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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제사장과 예수아의 자손들
느 12:1-21
1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함께 돌아온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은 이러하니라 제사장들은 스라야와 예레미야와 에스라와
2 아마랴와 말룩과 핫두스와
3 스가냐와 르훔과 므레못과
4 잇도와 긴느도이와 아비야와
5 미야민과 마아댜와 빌가와
6 스마야와 요야립과 여다야와
7 살루와 아목과 힐기야와 여다야니 이상은 예수아 때에 제사장들과 그들의 형제의 지도자들이었느니라
8 레위 사람들은 예수아와 빈누이와 갓미엘과 세레뱌와 유다와 맛다냐니 이 맛다냐는 그의 형제와 함께 찬송하는 일을 맡았고
9 또 그들의 형제 박부갸와 운노는 직무를 따라 그들의 맞은편에 있으며
10 예수아는 요야김을 낳고 요야김은 엘리아십을 낳고 엘리아십은 요야다를 낳고
11 요야다는 요나단을 낳고 요나단은 얏두아를 낳았느니라
제사장의 족장들
12 요야김 때에 제사장, 족장 된 자는 스라야 족속에는 므라야요 예레미야 족속에는 하나냐요
13 에스라 족속에는 므술람이요 아마랴 족속에는 여호하난이요
14 말루기 족속에는 요나단이요 스바냐 족속에는 요셉이요
15 하림 족속에는 아드나요 므라욧 족속에는 헬개요
16 잇도 족속에는 스가랴요 긴느돈 족속에는 므술람이요
17 아비야 족속에는 시그리요 미냐민 곧 모아댜 족속에는 빌대요
18 빌가 족속에는 삼무아요 스마야 족속에는 여호나단이요
19 요야립 족속에는 맛드내요 여다야 족속에는 웃시요
20 살래 족속에는 갈래요 아목 족속에는 에벨이요
21 힐기야 족속에는 하사뱌요 여다야 족속에는 느다넬이었느니라
주전 538년 고레스 왕의 조서를 내리자,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한 1차 귀환한 제사장 그리고 레위인 대제사장의 족보 예수아의 아들 요아김 때의 제사장까지의 명단으로 2차 에스라, 3차 느헤미야와 함께 귀환한 제사장들의 이름입니다.
첫 귀향민과 함께 돌아온 제사장들과 레위인들(1-7) 예루살렘에 정착한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명단을 기록했습니다. 스룹바벨 때로부터 느헤미야의 때까지 대제사장들과 그 사이의 기간 동안 이루어진 제사장 가문이 포로 생활에서 가장 먼저 돌아온 그룹의 지도자입니다. 스룹바벨과 예수아를 포함하여 22명의 제사장 집안 리더들의 명단입니다. 돌아온 사람들은 바벨론에서 상당히 성공한 사람들이지만, 안정된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주신 기업의 땅을 다시 회복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고 왔습니다. 안정된 기반이 잡힌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의 언약을 믿고 모든 것을 내버리고 왔다고 합니다. 느헤미야 7장 66-69절에 보면 돌아올 때 사만 이천 삼백 육십 명이라고 했고, 말, 노새, 낙타나귀들의 숫자를 보면, 그들의 재정상황을 설명해 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이 무너진 것을 재건하다가 포기하고 있을 때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지도자들이 일깨워서 성벽을 다시 쌓게 됩니다.
요야김 때 제사장들과 레위인들(8-21) 2, 3차에 귀환한 제사장들의 명단입니다. 요아김 때 사역했던 제사장들의 이름으로 에스라에서는 예수아와 갓미엘과 레위 사람 74명이라고 했지만, 빈누이, 세레뱌, 유다, 맛다냐를 추가로 언급합니다. 맛다냐는 찬양대를 맡았고, 그 형제 박부갸와 운노가 예배를 드릴 때 그들과 마주서 있다고 합니다. 요야김은 자신의 아버지 예수아의 뒤를 이어 대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에스라도 포함하고 있으며,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요야김이 여전히 대제사장 직분을 수행했을 것입니다. 정착이 끝난 후 이같이 종교인들의 인구조사가 실시된 것은 이어질 본격적인 개혁을 위한 전단계로서 종교적 체제 확립을 위한 기초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성벽을 재건하고 봉헌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데, 성벽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적용: 믿음을 위하여 말씀을 좇아가야 한다면 안정된 삶의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습니까?
어떤 목사님이 이런 설교를 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전 세계에 단 한 그루의 장미만 창조하셨더라면 세계 사람들은 그것을 보려고 몇 천 마일을 여행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몇 천만 그루의 장미를 만들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장미에 그리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단 한번만 축복해 주신다면 우리는 그것을 소중히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평생 그 축복을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을 등한시하는 것입니다."
< 설 교 >
행복의 전염성
느 12:1-5 / 임현수목사
우리들이 살고 있는 시대를 어떤 삶은 아스피린 시대라고 부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골치 아픈 시대라는 말 입니다. 경제적인 상황을 보십시오. 집 값이 오르고 물가도 치솟고 매출은 올라가지 않고 국제적으로는 기근이 심각하고 범죄율도 점점 높아지고 폭력이 난무하며 어린이 학대 강도 강간 낙태 자살 마약과 약물 복용자의 증가 이혼 부정 끊임없는 전쟁 생태계의 위협… 이런 것들을 생각해 보면 미치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행복은 전염 됩니다.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행복도 전염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부정적인 것들만 전염되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도 전염됩니다. 우리도 행복을 전염 시키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12장의 말씀을 보면 어떤 사람 이 행복을 전염시키는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예루살렘의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까지 들렸다고 했습니다. 12장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명단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런 기쁨의 날이 오기까지는 믿음의 선배들이 있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1-11절은 스룹바벨 시대의 제사장들 레위인들이고 12-26절은 여호야김 시대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입니다.
믿음의 조상을 만나는 것은 축복입니다. 저도 어렸을 때 가장 부러웠던 친구들이 잘 믿는 부모님을 가진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자손들에게 귀감 (龜鑑)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젊은이들은 자기들이 잘나서 뭘 한다고 생각 하지만 사실은 어른들의 수고가 없었다면 자기들이 어떻게 성공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의 민족 축제는 조상들의 피 땀 위에서 이루어 진 것을 기억 하라는 것입니다. 본이 될만한 믿음의 조상들이 많을수록 후세대 에는 본받을 모델 이 많아집니다.
*히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을 보십시오. 아브라함, 요셉, 모세, 여호수아 같은 사람들… 리빙스톤과 처칠을 위시해서 수많은 영국의 위인들이 누워있는 웨스터민스터 사원, 죠지 와싱톤, 밴자민 프랭클린, 링컨, 루즈벨트 를 비롯한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 또스또 예프스키, 톨스토이, 푸시킨, 차이코 프스키가 잠자는 모스크바 공원묘지를 보십시오. 그들은 후세대가 본 받을 수 있는 귀한 모델이 되어주신 분들 입니다. 교회는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 2000년 역사는 이름없는 순교자 들의 피와 믿음의 선진(先進)들의 헌신과 충성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의 봉사도 역사의식(歷史意識)을 가지고 후일 (後日)을 생각하며 해야합니다. 누군가에 의하여 평가되고 기억될 것을 생각하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후일에 너희 후손이 묻거든…누가 성전을 건축했는지? 누가 선교센터를 만들었는지? 누가 미전도종족을 입양해서 복음화 하였는지? 미션 스쿨은 누가 만들었는지? 한인 회장을 해도 비전을 가지고 후손들을 생각하며 해야 하며 실협 회장을 해도 꿈을 가지고 후손들을 생각하면서 일하면 위대한 조상이 될 것 입니다.
(유대인 컴뮤니티… 최고 시설의 병원들, 양노원, 컴뮤니티 센터…)
이제 이스람엘 백성들은 감사와 감격의 성벽낙성식(城壁落成式)을 갖게 됩니다(12:27-43). 그래서 성벽 재건을 마친 후 백성들은 각처에서 한자리에 모여 큰 축제예식을 가졌습니다.
느 12:27 예루살렘 성곽이 낙성되니 각처에서 레위 사람들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데려다가 감사하며 노래하며 제금 치며 비파와 수금을 타며 즐거이 봉헌식을 행하려 하매
28 이에 노래하는 자들이 예루살렘 사방 들과 느도바 사람의 동네에서 모여 오고 예루살렘에 거주 하는 사람들만 모인 것이 아닙니다. 각 처에서 모였기에 민족의 축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봉헌식의 큰 기쁨은 성벽 건축을 시작 할 때부터 백성들이 마음을 모았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고생을 같이 했기 때문에 지금 같이 기뻐 할 수 있는 것 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고난도 기쁨도 함께하는 공동체, 고난도 영광도 함께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롬 12:15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은혜와 감사를 깨닫고 난 후 정결함을 거쳐 나오는 찬송은 더욱 은혜스러웠습니다.
30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몸을 정결케 하고 또 백성과 성문과 성을 정결케 하니라
행복은 강한 전염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큰 기쁨은 원수들의 조롱과 대조가 되었습니다.
12:31 이에 내가 유다의 방백들로 성 위에 오르게 하고 또 감사 찬송하는 자의 큰 무리를
두 떼로 나누어 성 위로 항렬을 지어 가게 하는데 한 떼는 우편으로 분문을 향하여 가게
하니 / 4:3 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섰다가 가로되 저들의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
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
느헤미야는 충성할 때는 앞장 섰고, 자기가 영광을 받아야 할 때는 뒤로 빠지는 겸손한 지
도자였습니다.
38 감사 찬송하는 다른 떼는 저희를 마주 진행하는데 내가 백성의 절반으로 더불어 그 뒤
를 따라 성 위로 행하여 풀무 망대 윗길로 성 넓은 곳에 이르고
오늘날 우리교회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 넘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공동체를 찾고 있습니다. 교회가 기쁨이 넘치는 공동체가 되면 저절로 부흥
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민교회는 싸우는 공동체로 사회에 인식 되고 있
으니 이것은 철저히 회개해야 할 일 입니다.
이 날에 무리가 크게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아이도 즐거워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의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
느니라
43절이 한구절에 즐거워 했다는 말이 4번 나옵니다. 그리고 심히, 크게 즐거워 했다고 합니
다. 어린이부터 부녀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즐거워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꼭 기억해야할 것은 이런 진정한 기쁨은 하나님이 주셔야 한다는 사실 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하나님께서는 환난 가운데 낙망한 자기 백성들에게 느헤미야를 보내셔서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게 하셨고 대적들의 시험에서도 참고 견디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크게 즐거워하도록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자기 백성의 위로자가 되십니다. 사람들이 가까이 있기 원하는 사람은 바로 이런 기쁨의 사람, 즐거워 하는 사람, 미소 짓는 사람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렇게 행복을 전염시키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교회는 항상 개혁 되어야 합니다
느 12:44-47, 13:1-14 개혁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느헤미야서가 12장에서 끝나지 않고 13장까지 이어지는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변질과 타락이 찾아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모습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은 언제든지 변질 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개혁은 계속 되어야 한다는 것 입니다. 한 때는 하나님께 아무리 뜨겁게 충성했다 할지라도 안일한 자세로 있다 보면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도 모르게 차디찬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불덩어리가 숯덩이로 되듯이 그렇게 끝날 수도 있는 것 입니다.
성경에는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말씀도 있고 (고전 10:12)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갈 3:3)는 책망도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느헤미야가 12년 만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변질이 찾아 왔습니다.
(B.C433년) 적어도 12년 동안은 정치적으로 안정 되었고, 영적 도덕적 부흥이 있었습니다. 느 5:14 내가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 곧 아닥사스다 왕 이십 년부터 삼십이 년까지 십이 년 동안은 나와 내 형제가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 하였느니라.
그런데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느헤미야가 12년 만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생긴 것입니다. 그 기간이 얼마인지는 모릅니다. 1년은 될 것 입니다.
느 13:6 그 때에는 내가 예루살렘에 있지 아니하였었느니라 바벨론 왕 아닥사스다 삼십이년에 내가 왕에게 나아갔다가 며칠 후에 왕에게 말미를 청하고
*시련 < 기도 < 회복 < 번영 < 축복 < 변질 < 세속화 < 종교의식화(宗敎儀式化) < 개혁(改
革) 이런 사이클이 반복 됩니다. 그래서 성전은 언제나 정화(淨化)되어야 합니다.
느헤미야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제사장 엘리아십은 암몬 사람 도비야에게 성전의 큰방을 내어 주었습니다. 도비야는 어떤 사람입니까?
느 6:18 도비야는 아라의 아들 스가냐의 "사위"가 되었고 도비야의 아들 여호하난도 베레갸의 아들 므술람의 "딸"을 취하였으므로 유다에서 저와 동맹한 자가 많음이라
그런데 이런 도비야에게 성전의 가장 거룩한 장소를 내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셔야 할 성전에 마귀가 들어와 앉아 있다는 것은 끔찍한 일 입니다. 교회가 말씀과 기도와 성령님을 의지하기보다 사람과 돈을 더 의지하고 조직을 더 중시할 때는 반드시 교회가 변질되며 세속주의가 찾아 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계속해서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세속주의를 추방 해야 합니다.
내가 심히 근심하여 도비야의 세간을 그 방 밖으로 다 내어 던지고/명하여 그 방을 정결케 하고 ..... (8,9절)
요2:14-16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내 아버지 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도피주의자가 되면 안되지만 그렇다고 세상에 속해 있는 사람도 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한국 대사가 카나다에 와서 살고 있는 동안은 카나다에서 할 일이 있어서 사명을 가지고 사는 것이지 카나다에 속한 시민이 아닌 것처럼 우리들도 이 세상에 사는 것 이 하늘나라의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지 세속화 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집인 성전은 기도 하는 집이 되어야지 장사하는 집이 되면 안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성전을 청결케 하신 것 입니다. 그래서 개혁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은 시간이 지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오염되기가 쉽습니다. 12장에서 개혁했던 일이 13장에서는 다시 변질 되었습니다.
*느12:44-47절과 13:10-14절을 비교해 보면 그렇게도 열심히 일하던 레위인들이 각각 그 전리로 도망가는 일이 벌어집니다. 먹고 살아야겠다는 것 입니다. 자식들을 양육하기 위해서 일해야겠다는 것입니다.
느 13:10 내가 또 알아본즉 레위 사람들의 받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그 전리로 도망하였기로 사역자들이 생활비 조달이 어려워지면서 (농어촌교회,개척교회,선교사) 사역을 기피 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그들만의 잘못이 아닙니다.
(2,000명 교인이 십일조 하면 200명의 풀타임 사역자가 사역 할 수 있습니다. 50명만 일하고 150명은 선교사로 파송 할 수 있습니다)
13장에 보시면 백성들이 십일조를 다시 시작했을 때 레위인들은 다시 돌아왔습니다(13:11,12)
느 13:11 내가 모든 민장을 꾸짖어 이르기를 하나님의 전이 어찌하여 버린 바 되었느냐 하고 곧 레위 사람을 불러 모아 다시 그 처소에 세웠더니 12 이에 온 유다가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가져다가 곳간에 들이므로 그러면서 느헤미야는 기도합니다. 느헤미야의 개혁운동은 항상 기도로써 힘을 얻었습니다. (14절) 이제 13장에 보면 느헤미야의 책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3. 성경적 책망은 겸손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느 13:15-31 개혁은 책망을 포함합니다.
책망은 성경의 기능 가운데 하나 입니다.
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
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사1:5, 6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마음은 피곤하였으며 /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늘 ...
목회자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일은 범죄한 성도에 대한 바른 지도(指導)입니다. 바르게 말씀 드리면 듣지 않는 분들이 많습니다. 자기에게 좋은 얘기만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잘못을 지적하면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공격 한다고 생각 하고 쉽게 교회를 옮겨버리는 사람들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민 교회에서는 권징조례가 실천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책망을 받아 들일 줄 아는 성도가 바른 성도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칭찬만 하신 분이 아닙니다.
마 11:20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엡 5: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12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주께서는 형제가 범죄 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면 용서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무조건 책망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목적은 회개와 용서입니다. 그리고 관계를 회복하는 것 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보시기 바랍니다.
눅 17: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 하거든 용서하라"
갈 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책망의 목적은 다시는 범죄하지 않도록 그를 돕는 것입니다.
함부로 맹세하는 것은(마 5:34) 잘못된 것이지만 저주라도 달게 받겠다는 자세로 하는 하나님 앞에서의 진지하고 엄숙한 서원이나 맹세는 유익할 수 있습니다.
느 13:25 내가 책망하고 저주하며 두어 사람을 때리고 그 머리털을 뽑고 이르되 너희는 너희 딸들로 저희 아들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 아들들이나 너희를 위하여 저희 딸을 데려오지 않겠다고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라 하고 지도자들도 지도력의 유형이 각각 다릅니다. 느헤미야나 바울 같은 분들은 매우 직선적이고 엄격하며 목적 지향적인 사람들이어서 과격한 면이 있고 과단성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나 에스라의 경우는 사람 지향적이어서 같이 울면서 문제를 고치려고 노력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도력의 스타일이지 누가 맞고 누가 틀린 것은 아닙니다.
어째든지 인간은 연약하여 범죄한 자와 가까이 있으면 또다시 범죄하기 쉽습니다. 죄의 뿌리와 원인을 제거 하지 않으면 또 다시 범죄하게 됩니다.
느 13:28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 요야다의 아들 하나가 호론 사람 산발랏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내가 "쫓아내어" 나를 떠나게 하였느니라
범죄의 성격과 결과를 차분하게 설명 해주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26 또 이르기를 옛적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이 일로 범죄하지 아니하였느냐 저는 열국중에 비길 왕이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 하나님이 저로 왕을 삼아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셨으나 이방 여인이 저로 범죄케 하였나니 결론을 내립니다. 느헤미야의 개혁은 네 가지에 집중되었습니다.
1) 세속주의는 어떤 경우도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요 17:15-18, 롬 12:1,2)
예수 믿는 성도들이 영적인 성장과 강건함을 유지 하기 위해서 항상 경계해야 할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세속주의 입니다. 세상에 물들면 안됩니다. 그러면 병들게 되고 망하게 되고 죽게 됩니다. 세상을 본 받지 말아야 합니다.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2) 십일조 생활은 반드시 회복되어야 합니다.(10-14절)
십일조는 물질에 대한 신앙의 고백이며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헌신 입니다. 십일조가 회복 되어야 하나님의 일이 하나님의 계획대로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진행하게 됩니다. 한국 성도들이 모두 이 거룩한 의무를 이행하고 순종 한다면 지금보다 배가 넘는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서도 엄청난 사역을 하게 될것 입니다.
3)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반드시 회복되어야 합니다. (15-22절) (막 2:27, 롬 14:5, 마 11:28, 고전 6:19)
안식일은 우리들을 위해서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의 도구입니다. 그래서 이 날 저 날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도 안식년도 목적은 관계의 회복과 나눔의 실천에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안식의 정신을 이해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4) 무너진 가정은 반드시 회복되어야 합니다. (23-27절)
가정은 인류에게 남아있는 하나님 나라 사역의 마지막 보루(堡壘)입니다. 기독교 지도자들의 자격 기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가정입니다. 목사와 장로의 기본 자격은 가정을 잘 다스리는 자라야 합니다. 이교의 오염(汚染)이 무서운 것은 기독교적 가정을 형성하는 일에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딤전 3:4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
딤전 3:12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
(17세기 미국 대각성운동의 주역, 청교도의 아버지 요나단 에드워드와 맥스 쥬크의 이야기 / 873명과 1292명의 자손들….교수 65, 의사 60, 성직자 100, 장교 장성 75, 판검사 30, 변호사100, 공무원 80, 저술가 80, 상하의원 4, 부통령 1 / 유아사망 309, 직업거지 310, 불구자 440, 매춘부 50, 도둑 60, 살인자 70, 건달 53… )
결혼이 한 가정을 살리기도 하고 망하게도 한다는 것을 기억 하면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아름다운 가정을 꾸리시기 바랍니다.
이 모든 어그러진 부분들을 바로 세우고 난 다음에 느헤미야는 언제나 그랬듯이 마지막에도 기도를 잊어 버리지 않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느13:31)
결국 느헤미야서는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를 끝납니다. 이것은 느헤미야가 사람들에게 자기의 공로를 인정 받기 원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인정 하시고 기억해 주시길 바랐습니다.
같은 내용의 기도들이 13장에서 반복되고 있는 것을 찾아보십시오. 14절,22절, 29절에 정확하게 같은 내용의 기도가 반복되지 않습니까?
성경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쉴 수 없는 날마다 새로운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제의 기도로 오늘을 견디어 낼 수 없습니다. 어제의 양식으로 오늘을 살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은 오늘의 도움을, 오늘은 오늘의 기도를 필요로 합니다.
이런 기도와 믿음의 사람 한 사람이 역사를 변화 시키는 것 입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향한 열정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열정 때문에 자신의 기득권도 포기하고 성벽 재건에 헌신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런 열정과 비전을 주시므로 우리 교회의 성전 건축이라는 대 과제를 성취하고 마지막 남아있는 주님의 지상 명령 성취에 최선을 다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찬양이 앞에 서다
느 12:17-43 / 유관지목사
오늘은 예배 중에 찬양대원 임명순서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들어 있는 느헤미야서의 후반부, 7장 이후부터는 찬양대원들이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 얼마나 중요한 직무를 맡은 사람들인지를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느헤미야서는 예루살렘 성의 성벽을 재건한 기록인데, 찬양과는 거리가 먼 내용인데 느헤미야서가 찬양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궁금하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 처음 듣네!’ 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잘 살펴보세요.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 공사는 착공으로부터 52일 만에 끝났습니다.(느6: 15)
성벽 재건 공사가 끝나자 느헤미야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합니다.
7장부터 그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먼저 일할 사람들을 세웁니다. 조직을 합니다.
7장 1절을 보세요.
성벽이 건축되매 문짝을 달고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을 세운 후에 제일 먼저 세운 사람들이 문지기입니다.
그 때 예루살렘 주변에는 예루살렘을 엿보는 세력들이 많았기 때문에 문지기의 역할이 중요했습니다. 그러니까 문지기를 먼저 세운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찬양대원들이었습니다.
그 다음이 레위 사람들, 제사장들, 오늘날로 말하면 교역자와 장로님들이었습니다.
그 다음은 행정을 맡은 관리들이었습니다.
찬양대원들의 우선순위가 이렇게 높았습니다.
7장 5절부터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사람들의 명단이 나옵니다.
모두 사만이천삼백 육십 이 명이 돌아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개 자손이 몇 명이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44절을 보세요. “노래하는 자들은 아삽 자손이 백사십 팔 명이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아삽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 찬양대 지휘자였습니다.
노래하는 자들, 찬양대 대원들은 이와 같이 특별히 계수되었습니다.
중요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7장 73절에는 이와 같이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백성 몇 명과 느디님 사람들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다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사장들, 레위 사람들, 문지기들, 노래하는 자들은 중요한 계층이었습니다.
백성 몇 명은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면에 느디님 사람들은 노예들의 집단이었습니다. 아마도 포로들의 후손이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들은 다윗 때부터 성전에서 잡역을 담당했습니다.
그러므로 느헤미야서 7장 73절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백성 몇 명과 느디임 사람들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라는 말은 아주 중요한 일을 맡은 사람들에서 시작해서 평범한 사람들과 천한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돌아와서 살았다는 뜻입니다.
노래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마치고 개혁운동을 일으킵니다.
절기를 지키고 회개운동을 합니다. 그리고 백성들과 더불어 언약을 세웁니다.
10장 뒷부분에 그 언약의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 주 여호와의 모든 계명과 규례와 율례를 지켜 행하겠습니다, 이방인들과 결혼하지 않겠습니다, 안식일을 잘 지키겠습니다, 성전에 필요한 것들을 위해 봉헌에 힘쓰겠습니다, 첫 열매를 여호와의 전에 드리겠습니다, 제사장들을 잘 섬기겠습니다, 십일조를 잘 바치겠습니다, 하나님의 전을 소홀히 여기지 않겠습니다,’ 이와 같은 것들입니다.
준공을 한 다음에 개혁운동을 했다, 철저하게 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 교회에 많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가 힘써 할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언약을 세운 다음에 사람들이 언약에 인봉을 합니다.
인봉을 했다는 것은 서명을 했다는 뜻입니다.
10장에 서명한 사람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총독 느헤미야에서 시작해서 여든 명이 넘는 사람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이들은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지도자들, 또는 각 계파의 대표들이었습니다.
10장 28절을 보세요. 여기에도 노래하는 사람들, 찬양대원들이 따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느헤미야서 7장에서 끝 장인 14장까지에 “노래하는 자들”이라는 말이 매우 빈번하게 나옵니다. 노래하는 자들은 바로 찬양대원들을 말합니다.
이 말이 왜 이렇게 자주 나옵니까?
노래하는 자들, 찬양대원들은 왜 이렇게 특별히 취급되었습니까?
귀환 시대의 이상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영광 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찬양하는 사람들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자세한 것은 역대상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 36절을 보면 봉헌예배를 드릴 때 나팔을 압은 사람들, 악기 잡은 사람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악기를 잡았고” 이렇게 적었습니다.
다윗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악기를 만들고 사용하는 일에 힘쓴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그런 모습을 살리려고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뒤에 이어지는 12장 45절에서 47절까지를 보면 그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결례의 일을 힘썼으며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도 그러하여 모두 다윗과 솔로몬의 명령을 따라 행하였으니 옛적 다윗과 아삽의 때에는 노래하는 자의 지도자가 있어서 하나님께 찬송하는 노래와 감사하는 노래를 하였음이며 스룹바벨 때와 느헤미야 때에는 온 이스라엘이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에게 날마다 쓸 몫을 주되 그들이 성별한 것을 레위 사람들에게 주고 레위 사람들은 그것을 또 성별하여 아론 자손에게 주었느니라
느헤미야서 12장 24절을 보면 레위 족속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명령에 따라 순서대로 주를 찬양하며 감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귀환시대에는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전례에 따라 찬양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특별대우를 했습니다.
찬양대원들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 귀환 시대에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역사에서 언제나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일 년 쉰 주일 가운데 연초의 한 주일을 택해 찬양대 임명예배로 드리며 찬양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제 느헤미야는 재건된 성벽을 봉헌합니다.
이 성벽 봉헌의 의미는 대단히 큰 것이었습니다.
삶의 터전이 견고해졌습니다.
외부의 조롱하는 세력들로부터 방비를 잘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 귀환이 진행되고 있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마음 놓고 돌아와서 살 수 있는 그릇이 마련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미 돌아온 사람들의 사기를 높이고 마음을 하나로 묶게 되었습니다.
만일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되지 않고 부서진 상태 그대로 있었다면 이스라엘 역사에서 귀환 시대는 훨씬 더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한 일은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도성인데 하나님의 도성을 파괴된 상태로 그대로 둘 수 없다. 초라한 모습으로 놔 둘 수 없다.’ 하는 신앙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그와 같이 감격적인 봉헌예배를 준비하는데 제일 먼저 한 것, 제일 힘쓴 것, 제일 중요하게 여긴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음식 준비였을까요?
요즘 말로 하면 매스게임 같은 식전행사였을까요?
27절 뒷부분에 그것이 나와 있습니다.
감사하며 노래하며 제금을 치며 비파와 수금을 타며 즐거이 봉헌식을 하는 일이었습니다.
노래하는 사람들, 찬양대원들을 모으는 일이었습니다.
봉헌식을 하는데 찬양대를 둘로 나눕니다.
한 찬양대는 오른쪽으로, 한 찬양대는 왼쪽으로 찬양을 하면서 돕니다.
오른쪽으로 도는 찬양대 뒤에는 율법학자인 에스라가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왼쪽으로 도는 찬양대 뒤에는 총독 느헤미야가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율법학자 에스라와 총독 느헤미야, 이 둘은 귀환시대의 대표적인 두 지도자였습니다.
이 둘 앞은 각기 찬양대를 앞에 세우고 그 뒤를 따랐습니다.
여러분, 예루살렘 성벽을 봉헌하는데 찬양대가 앞에서고 그 뒤를 하나님의 큰 일꾼들이 따르고 그 뒤를 백성들의 지도자들이 따르고, 이들이 한쪽으로 시계방향으로, 한쪽은 시계반대 방향으로 도는 광경을 머릿속에 그려 보세요.
그리고 40절 앞부분을 보세요, “이에 감사 찬송하는 두 무리가 하나님의 전에 섰고” 이들이 성전에서 만나는 광경을 그려 보세요.
얼마나 장엄했을 것입니까?
얼마나 감격적이었을 것입니까?
그 때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은 찬양으로 둘러싸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은 찬양으로 가득하였습니다.
하나님도 이와 같은 봉헌식을 크게 기뻐하셨고, 이 일을 통해 영광을 받으셨을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봉헌식을 하는데 찬양을 앞세웠습니다.
우리도 중요한 일을 할 때, 아니 모든 일들을 하는데 찬양을 앞세워야 합니다.
찬양을 앞세우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봉헌식을 하는데 왜 찬양을 앞세웠습니까?
찬양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가장 적합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느헤미야의 마음은 형언하기 어려운 감사로 가득 차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완전히 멸망하지 않고 포로생활을 하면서도 그 명맥이 보존되게 하신 것에 대한 감사가 있을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화시켜서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신 일에 대한감사가 있을 것입니다.
자기에게 페르시아 왕실의 술 맡은 관원으로 만족하면서 일생을 보내지 않고 고국으로 돌아와 성벽재건의 일을 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신 일에 대한 감사가 있을 것입니다.
성벽을 재건할 때 어려운 일도 많았고, 방해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모함도 많았습니다.
투서도 많았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민원도 많았습니다.
자세한 것은 느헤미야서 전반부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이기고 성벽을 봉헌하게 된 것에 대한 감사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감사를 표현하는데 가장 적합한 것은 찬양입니다.
여러분, 감사할 일이 있습니까?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가장 간단한 찬양은 “할렐루야!”입니다. 할렐루야라는 말의 뜻이 ‘여호와를 찬양하라’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 16~18)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이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범사에 “할렐루야!” 해야 합니다.
감사를 찬양으로 표현하는 성도들, 할렐루야가 앞장 서는 생활, 할렐루야에 둘러싸인 생활을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느헤미야는 봉헌식을 하는데 왜 찬양을 앞세웠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일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시편 78편을 여시기 바랍니다.
제일 앞에 “아삽의 마스길”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아삽은 아까 말씀 드렸습니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찬양대의 지도자입니다.
마스길이라는 말의 뜻은 난외주에 있습니다. 교훈시라는 뜻입니다.
시편 가운데 교훈적인 성격을 가진 시들에는 이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시편 78편은 우리는 하나님이 하신 일을 후손에게 알려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시편 78편 5절에서 8절까지를 읽어 드립니다.
여호와께서 증거를 야곱에게 세우시며 법도를 이스라엘에게 정하시고 우리 조상들에게 명령하사 그들의 자손에게 알리라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후대 곧 태어날 자손에게 이를 알게 하고 그들은 일어나 그들의 자손에게 일러서 그들로 그들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잊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계명을 지켜서 그들의 조상들 곧 완고하고 패역하여 그들의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며 그 심령이 하나님께 충성하지 아니하는 세대와 같이 되지 아니하게 하려 하심이로다
우리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일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자손들이 알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우리는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살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을 거역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게 됩니다.
올해, 2005년은 해방된 지 60년이 되는 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난 60년 동안 이 민족을 보호해 주시고 인도하시고 부흥시켜주시고 국제적인 지위가 높아지게 해 주신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알려 주어야합니다.
우리가 IMF를 겪었고 지금 유례없는 불경기를 겪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것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고, 전쟁의 위험에서 건져주시고 부흥시켜 주시고, 정치적으로도 민주화를 이루게 하신 것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1885년 부활절에 아펜젤러 선교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첫 선교사로 우리나라에 들어왔습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120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난 120년 동안 한국교회를 부흥시켜 주고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를 비롯하여 세계 10대 교회, 50대 교회에 한국 교회가 여럿 들어가게 하시고, 타문화권 선교사들을 세계에서 두 번째, 또는 세 번째로 많이 파송하는 교회로 성장시켜 주신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한국교회가 성장이 둔화되었다, 감소되었다는 이야기가 전에는 막연하게 들리더니 요즘은 목회현장에서 이런 일들이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일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큰 이유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음을 주셨다, 하나님이 그 복음이 왕성하게 자라게 하셨다, 하나님이 한국 교회에 여러 가지 놀라운 일들, 자랑스러운 일들이 많게 하셨다, 이것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어려운 일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신 일을 잊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지금까지 우리에게 하신 일을 기억하고 그것을 자손들에게 전하기에 힘쓸 때 하나님이 이 나라를 경제적인 어려움과 답답한 정치현실에서 벗어나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남아시아의 지진해일이 종말과 관계가 없습니까?
아닙니다. 관계가 있습니다. 15만 명이 훨씬 넘는 사람이 목숨을 잃은 일이 어떻게 성서적인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종말 문제는 원래 말하기 아주 조심스러운 일이고, 지진해일 지역의 주민들이 겪은 슬픔과 고통이 너무 크기 때문에 지금은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고 사랑을 나누는 일이 더 급하기 때문에 그것을 강조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성서적인 관점, 특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종말의 현상과 연결해서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럴 때 ‘지금은 참 긴장된 시대이다. 우리는 종말론적인 긴장 가운데 살아야 한다. 예수님이 오늘 재림하시더라도 반갑게 맞이할 수 있어야 한다.’ 하는 마음이 새로워질 것입니다.
지금은 이와 같이 영적으로 긴장해야 할 때입니다.
한국 교회가 지난 120년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하게 사용하시고 많은 복을 주신 것을 잊지 않고, 이것은 자손에게 전하기에 힘쓴다면 하나님께서는 한국 교회를 이 중요한 때에 더욱 귀하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나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와 도움들을 기억하고 그것을 주변에 알리기에 힘쓴다면, 자녀들에게 전하기에 힘쓴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이 개인적으로 겪고 있는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여러분을 더 귀하게 사용하시며 많은 복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일을 기억하게 하는 데는, 그것을 자손들에게 전하는 데는 찬양이 가장 효과적입니다.
그래서 아삽은 시편 78편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하신 일을 자손에게 전해야 한다고 하면서 이어서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신 일, 낮에는 그름으로, 밤에는 불빛으로 인도하신 일,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신 일, 만나와 고기를 주신 일, 이스라엘 백성이 자주 하나님을 배반할 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가 되게 한 일, 그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이 대적을 물리쳐 주신 일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찬양하는 가운데, 찬양을 앞세우는 생활을 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일들, 놀라운 일들, 많은 은혜를 기억하고 그것을 자손들에게 전하기에 힘쓰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느헤미야는 봉헌식을 하는데 왜 찬양을 앞세웠을까요?
즐거움을 표현하는데 찬양이 가장 적절하고 효과적이었기 때문입니다.
43절을 보세요.
이 날에 무리가 큰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 아이도 즐거워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이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
즐거워했다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몇 번 나옵니까?
네 번 나옵니다.
이 즐거움을 표현하는데 찬양보다 더 적절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시편 126편을 보세요. 이스라엘 민족이 포로생활에서 돌아올 때 부른 노래입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생활에서 돌아오게 하신 일, 하나님이 행하신 큰 일입니다.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된 일, 하나님이 행하신 큰 일입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있었던 기쁘고 좋은 일들 하나님이 행하신 큰 일입니다.
설교는 보편적이어야 하기 때문에 저는 예루살렘 성벽 봉헌을 목양교회와 연결시키는 일을 피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말씀을 들으면서, 성전 준공과 입당과 봉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목양교회 성전 준공, 앞으로 석 달 뒤에 있을 입당, 모두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우리가 한 해라도 빨리 당기기 위해 힘써야 할 봉헌, 하나님이 행하실 큰 일입니다.
이와 같이 즐거운 일이 있을 때 그 즐거움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즐거운 일, 찬양입니다.
성도 여러분의 삶에 즐거운 일들이 차고 넘쳐서 그것이 찬양으로 표현되기 바랍니다.
느헤미야는 봉헌식을 하는데 왜 찬양을 앞세웠을까요?
예루살렘 성벽 봉헌의 사실을 멀리, 널리 알리는데 찬양이 효과적이었기 때문입니다.
43절 끝부분을 보세요. 예루살렘이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다고 했습니다.
주변 부족들이 그 소리를 듣고 ‘저것이 무슨 소리지?’ 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되어 봉헌하면서 부르는 소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이것 보아라, 우리가 그렇게 방해했는데 성벽이 완성되었네. 그들은 하나님이 이 일을 하셨다고 하는데 우리를 꺾고 이 일을 가능하게 한 하나님이란 도대체 누구일까?’ 하였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찬양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멀리, 널리 전하는데 아주 효과적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그 능력과 위엄을 전하는데 아주 효과적입니다.
느헤미야 당시에는 찬양 소리가 주변 부족에만 들렸지만 오늘날에는 여러 매체를 통해 전 세계, 전 부족이 듣게 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찬양은 감사를 표현하는데 아주 효과적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게 하고 후손들에게 전하는데 아주 효과적입니다.
즐거움을 표현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 하나님의 존재를 널리 알리는데 아주 효과적입니다.
찬양에 힘씁시다. 찬양을 앞세우는 생활을 합시다.
이 일을 앞에서 하고 있는 찬양대원 여러분, 여러분의 직무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기 바랍니다.
찬양에 힘쓰고 찬양을 앞세우는 생활을 하여 감사할 일들이 더욱 많아지고, 하나님이 더 큰 일, 위대한 일을 하고, 즐거움이 더욱 넘치고, 하나님이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기를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오직 한 분이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배 공동체를 회복할 중심인물들
느 12:1-21 / 행복한 말씀묵상팀
귀환한 제사장들과 레위인 명단(느 12:1-11)
요야김 시대 제사장 족장들 명단(느 12:12-21)
<말씀묵상>
포로기에도 하나님이 대제사장 계보를 보호해 주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느헤미야서의 핵심 주제는 성전 예배의 회복입니다. 이를 위해 제사장과 레위인 명단을 확인합니다. 먼저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함께 귀환한 제사장들(1~7절)과 레위인(8~11절) 명단을 기록합니다. 레위인 중 맛다냐와 박부갸와 운노는 찬양 인도를 담당했습니다. ‘직무를 따라 그들의 맞은편에’(9절) 있다는 것은 마주보고 화답하며 찬양했음을 뜻합니다. 이어서 예수아로부터 얏두아까지 대제사장 계보를 기록합니다(10~11절). 얏두아는 페르시아 시대 마지막 시기의 대제사장으로 봅니다. 이들은 포로지에서 귀환한 후 재건한 성전에서도 대제사장 직분을 이어 갑니다. 하나님은 포로기를 거치면서도 대제사장 계보가 이어지도록 보호해 주셨고, 그들로 하여금 신앙 공동체를 지도하게 하셨습니다.
예배 회복을 위해 내가 하나님 시선으로 살필 부분은 무엇인가요?
우리 신앙의 중심은 예배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창조자이신 우리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를 이루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배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우리의 신앙의 실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배가 회복되어야 우리의 영혼이 회복되고 우리의 영혼이 회복되어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영혼의 기쁨과 만족을 얻는 최상의 길입니다. 우리가 무력하고 힘이 없고 나약해지는 이유나 죄악에 끌려다니므로 어둠에 사로잡히는 이유는 모든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혼의 모든 것은 공급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가장 큰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예배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귀환한 제사장들 명단을 다시 기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요야김은 대제사장 예수아(여호수아)의 아들입니다(10, 12절). 예수아는 스룹바벨과 함께 1차 귀환을 주도한 인물입니다. 그러므로 ‘요야김 때에’(12절)는 1차 귀환 다음 세대이자 에스라가 귀환하기 전 세대를 의미한다고 봅니다. 12~21절에는 20개나 되는 제사장 가문(족속) 족장 목록을 기록합니다. 이는 1~7절에 기록한 이름과 거의 비슷하며, 핫두스 가문(2절)과 마아댜 가문(5절)만 빠져 있습니다. 성전 제사를 위해 구별된 제사장 가문이 보존되고 번성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귀환한 제사장들과 레위인 명단을 다시 기록하는 것은 성벽 완공과 더불어 신앙 공동체에서 시행할 성전 제사 제도가 확립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바른 예배를 지속하기 위해 내가 철저히 점검할 일은 무엇인가요?
오늘날 우리가 예배에 대한 사모함이 없습니까? 왜 우리의 예배가 불경건하고 무성의하고 형식적인 예배가 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믿지 않기때문입니다. 참된 예배에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마음이 있습니다. 주님을 찾는 자들은 주님이 절대 필요함을 깨닫고 자신의 죄악을 진솔하게 고백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그를 덮어주시는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참 예배하는 마음이란 이 시간 나에게 명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칭찬과 격려의 말씀을 듣기도 하고, 때로는 책망과 경고의 말씀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살겠다는 마음가짐이 없는 모든 예배는, 사실 하나의 형식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참된 예배에는 하나님께 헌신의 결단이 있습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앞장서서 헌신하는 이들에게 크신 은혜를 더해 주소서. 어떤 시련이 와도 제가 하나님을 멀리하거나 떠나지 않게 하시고, 꿋꿋하게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소서.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이 보내신 곳에서 마음 다해 하나님을 높이며 찬양하게 하소서.
믿음의 계보를 확인하다
느12:1-21 / 찬송:175장
오늘 말씀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명단입니다.
예루살렘 성벽이 완공된 후에 제1차 귀환자들의 실태를 조사하여 백성들을 예루살렘과 각 성읍에 재배치한 바 있는 느헤미야는 이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명단을 작성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가 이러한 조처를 취한 이유는 제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있던 성전 제사 제도를 정비하기 위해서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한 그는 성벽 봉헌식을 거행하기에 앞서 그 봉헌식을 담당할 자를 확인하고 종교적으로 준비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한편 이러한 본문은 제1차 귀환 때에 스룹바벨과 함께 돌아온 제사장들의 명단인 1-7절, 느헤미야 시대의 제사장들의 명단 8, 9절,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했으며 성전 재건에 앞장섰던 대제사장 예수아의 족보 10,11절, 예수아 아들인 요아김 때의 제사장 명단인 12-21절 등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느헤미야가 종교인들의 명단을 자세히 기록한 것은 느헤미야의 관심이 성전 제사 제도의 회복을 통해 이스라엘이 다시 구속사의 주역으로서의 자격을 회복하는 것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먼저 하나님께서는 유능하고 신실한 일꾼이 일생을 끝마치게 되면 그 뒤를 이어서 충성할 수 있는 새로운 일꾼을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 결코 중단되지 않도록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모세의 뒤를 이어서 여호수아가 세움을 받고, 엘리야의 뒤를 이어서 엘리사가 세음을 받았듯이, 하나님께서는 제사장 직분 역시 바벨론의 포로 기간 중에도 단절되지 않고 계승될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한편 오늘날의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세우심을 받았는데, 주님께서 우리를 충성되이여겨 직분을 맡기셨다는 사실에 감사하면서 죽도록 충성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자들의 이름은 주님에 의해 영원히 기억된다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봉사하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명단이 성경에 기록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처럼, 만약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수고하고 봉사한다면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돼 해와 같이 영원토록 빛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위해 수고한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은 줄 알고 주님을 위해 헌신하여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찬송:183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