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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일로 詩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골드
★★★★★★★★★★★★★★★★★★★★★★★★★★★★★★★★★★★★★★★★★★★★★★★★★★★★★★★★★★ 미지의 곳을 탐방하는 여행은 가슴을 설레게 한다. 나의 첫 여행은 해남 황산에서 목포로 이사한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임성리까지 가는 기차여행이었다. 아버님의 배려였다. 파아란 3등 차표를 손에 쥔 나는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 차표를 역무원에게 내밀고 기차의 트랩에 오르는 순간 나는 처음 타본 기차의 매력에 칙칙폭폭 빠져 들었으나, 목포역을 떠난 완행열차가 동목포역에 도착하니 바로 그 다음역이 임성리역이었다. 임성리역에서 내려야 했던 내가 실망하는 모습을 짓자 아버님이 나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크면 서울도 갈수 있고, 미국도 일본도 갈수 있다고............................... ★★★★★★★★★★★★★★★★★★★★★★★★★★★★★★★★★★★★★★★★★★★★★★★★★★★★★★★★★★
성화밭 마을을 가다
산 전문가들이 원형이 잘 보존된 가장 아름다운 산촌마을 중의 하나로 꼽는, 삼척시 도계읍 황조리에 있는 성하밭 마을을 가보려고 2008.10.28일 여장을 꾸몄다. 먼저 삼척시 대이리에 있는 너와집과 굴피집, 그리고 환선굴을 구경하고, 삼척 에서 1박한 후 그 다음날 성하밭 마을을 찾아 볼 심산이었다.
공원관리소에 문의해 봤더니 환선굴보다 더 유명한 대금굴은 인터넷 예약제로 티켓을 판매하고 있었다. 10월분은 전량 매진된 상태였다. 대금굴 구경을 포기한 우리는 환선굴만 구경하기로 했다. 그러나 오후 5시까지는 반드시 입장해야 한다고 한다. 나는 내 세째 동서 안서방과 함께 낮 12시 삼척으로 향했다. 환선굴 입장 시간을 맞추기위해 우리는 쾌속 주행한 결과 오후 4시 15분에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환선굴 티켓팅을 하려고 매표소로 가는 데 어떤 사람이 나에게 한마디 한다. 대금굴 티켓이 두 장 남아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의아했지만 매표소 여직원에게 거침없이 대금굴 티켓 두 장을 요청하였다. 여직원이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처다 보았다. 나는 티켓 두 장이 남아있다는 정보를 어떤 사람에게 들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여직원이 이윽고 티켓 두 장을 내밀었다. 나는 생각지도 않은 보너스를 받은 기분이었고, 인생살이란 이런 경우도 있구나 하며 껄껄 웃었다.
대금굴은 모노레일(일명 은하철도. 일본에서 수입. 40명 정원)을 타고 근 200 미터를 가파르게 상승한 후, 산의 암벽을 뚫은 터널(140 미터)를 통과해야 동굴의 입구가 나온다. 터널에 들어서자 은하철도 구구구 동요가 흘러나오고, 환상적인 불빛이 마치 동화의 나라로 여행하는 기분이었다.
대금굴은 정말 아름답고 아기자기한 동굴이었다. 폭포와 물의 수량이 엄청났고, 여름철엔 물소리가 무서울 정도라 한다. 화려하고 장대한 종유석 커튼과, 천정에 붙어 숨쉬고 있는 그 현란한 종유석과 바닥에서 자라고 있는 석순이 정말 묘한 앙상불을 이루고 있었다. 가느다란 지팡이 같은 석순 하나는 키가 3미터 50센치라고 한다. 이 정도 클려면 20만년이 걸린 다는 것이다. 종유석과 석순이 서로 만나 기둥을 이루면 그것을 석주라고 하는데 어떤 종유석과 석순은 내일이라도 금방 만날 수 있을 듯 그 틈새가 2센치도 안되어 보였지만 둘이 서로 만나려면 앞으로도 300년 이상이 걸린다는 안내원 아가씨 의 설명을 들었다. 생명의 유한성을 망각한 채 아옹다옹 살아가는 우리 인생살이가 참 덧없이 느껴졌다.
안내원 아가씨가 다시 한마디 한다. "대금굴 구경의 가장 백미가 바로 이것이라고, 아줌마, 아저씨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 이라고.....,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어쩜 그리도 똑같을 수 있느냐고 말하지만, 지금까지 가장 걸작인 답변은 어떤 아저씨의 말 어제 본 것 또 봤네. " 라는 말이었다는 것이었다. 남근석과 여근석이었다. 지금까지 한국 산하에서 내가 본 것중 최고의 걸작이었다. 너무 사실적이었으나 묘한 격조를 지니고 과히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고매함을 지니고 있었다.
대금굴 구경을 마치고 모노레일에서 내리니 벌써 날이 어둑어둑 해졌다. 점심도 걸러 시장기가 엄습했다. 나는 삼척 어시장 회센터를 찾았다. 불경기 탓인지 오후 8시도 채 안됐는데 사람의 모습이 우리 밖에 없다. 동해안의 생선도 서해안과 별반 다를게 없없다. 도미, 놀래미, 부시리, 광어, 우럭등이었다. 단 특이한 점은 대형 쥐치가 많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나는 여기 저기 발품을 팔다가 족히 2키로는 넘어 보이는 참복을 발견하고 어시장 아줌마와 흥정을 시작했다. 아줌마는 3키로 짜리라고 10만원을 요구했지만 나는 절대 3키로는 안나가고 잘해야 2키로 정도 되겠다고 말해 6만원에 그 참복회를 뜨고 매운탕꺼리 를 가지고 그 어시장 아줌마가 안내해준 식당으로 갔다.
참복회는 참 쫄깃쫄깃하고 감칠맛이 나는 생선회 중 가장 고급으로 쳐주는 회이다. 아마 이만한 놈을 서울 고급 일식당에서 먹으려만 족히 4-5십만원은 지불해야 할것이다. 오늘은 여러모로 행운이 겹치는 날이라고 생각했다. 생각지도 않은 대금굴 도 보고 또 참복회도 먹게 되었으니 말이다.
참복회에 소주 두 병을 곁들였다. 나중에 나온 매운탕 맛이 정말 일품이어서 소주 한 병을 더 추가해 마시면서, 나는 식당 주인 아주머니의 솜씨를 극찬하였다. 그 아주머니는 마냥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 우리의 이야기를 나긋나긋 들어주면서 자기 는 포항서 시집와서 지금까지 이 곳에서 살고 있다고 말했다. 아들은 서울대를 나와 이부영 국회의원과 연이 닿아 결혼할 때 이부영 국회의원이 주례를 서주었다는 것이다. 그 인연으로 이부영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근무하다 지금은 그만 두고 시카고 주립대 조교로 근무하고 있으며, 자식들 여럿 있지만 자식들 신세 안지고 이렇게 식당일을 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연세를 물어봤더니 놀랍게도 금년 나이 칠순이시란다.
나는 한국 어머니중 최고의 어머니라고, 아니 정말 존경받을 만한 어머니라고 칭찬하였다. 그리고 나도 예순이 다 됐으니 어머니가 아니고 누님으로 부르겠다고 말했다. 그 어머님, 아니 그 누님과 나는 의기투합하여 위와 같은 기념사진을 남기게 되었다. 그렇지만 영감님은 아예 아무런 관심도 없는 듯 질투할 생각도 않으시고 그저 묵묵히 텔레비만 보고 계셨다. 어머님의 웃으시는 모습이 마냥 순박하고 행복해 보이신다. 안서방을 통하여 나중에 안 일이지만 계산은 만팔천원이 나왔는데 내가 어머님 2천원은 팁입니다. 라고 말하며 그 어머님 손안에 만원짜리 지폐 두 장을 꼬깃꼬깃 쥐어드렸다고 한다.
10월 29일 아침 6시에 일어나 미역국으로 해장을 하였다. 어젯 밤의 참복회와 매운탕에 소주 3병을 둘이 마시고 또 삼척온천에서 맥주를 네 병이나 마셨으니 쏙이 쓰렸다. 어제 구경하지 못한 환선굴을 아침 일찍 마저 보고 성화밭 마을을 가려면 서둘러야 했기 때문이다. 환선굴은 아침 8시 30분부터 입장이 가능하다.
환선굴 입구에 있는 이 너와집은 이종옥의 가옥이었는데 삼척시에서 사들여 관광객 관람용으로 복원해 둔 집이었다. 지금 전국적으로 남아있는 10 여채의 너와집 중에서 실제 살림집으로 사용하던 유일한 너와집이다. 병자호란(1636년) 당시 지어진, 자손들이 13대째 대를 이어 살아 온 고택이기도 하단다.
흙을 빚어 만든게 기와라면, 소나무를 쪼개 만든게 너와란다. 그 너와를 지붕위에 얹은 집이 너와집이다. 진흙 하나 이기지 않는 지붕 위엔 꼭꼭 포개 만든 나뭇조각들이 눈에 들어 온다. 그 위로 간간이 무거운 지지름돌(눌림돌)이 무게를 누르고 있다. 허술해 보이기까지 하지만, 기와지붕은 10년만 내버려 두면 잡풀이 돋고 이끼가 끼어 못 쓰게 되지만, 너와는 몇십년이 돼도 그런 일이 없단다. 그래서 산간에 살던 화전민이나 촌부들은 집중에서 너와집을 최고로 쳤단다. 구전되는 노래중엔 " 집이사 많다마는 너와집이 일품이라" 라는 구절까지 있을 정도란다.
이종옥의 너와집 바로 아래편에 있는 굴피집에서 포즈를 취한 나의 셋째 동서 안병희이다. 그는 무던하고 듬직하며 참 좋은 인간이다. 말수도 적고 이 번 여행을 같이 하며 내내 운전을 하였다. 난 성질이 불이지만 이 친구는 신중하다. 나와 서로 반반을 섞으면 어떤 유형의 인간이 나올까 상상해 보지만 별로 재미 없을 것 같다.
너와집과 굴피집은 비슷한 구조였으며 이 굴피집은 지은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집의 상태로 보아 19세기에 지어진 것으 로 본다고 한다. 너와집과 굴피집의 다른 점은 너와집은 지붕에 송판을 얹었으나, 굴피집은 참나무 껍질을 두껍게 벗겨 만든 굴피로 지붕을 이었다는 점이다. 집안의 연기는 지붕에 설치한 이름도 아름다운 까치구멍으로 배출될 수 있도록 하는 구조였다.
환선굴(해발 800미터) 가는 길에 잠시 늦가을의 정취에 잠기다.
환선굴을 찾아가는 길목에서 조망할 수 있는 환선굴을 품고 있는 덕항산의 촛대바위이다. 먼 옛날 이 촛대바위 근처에 폭포 와 소가 있어 아름다운 한 여인이 나타나 목욕을 하곤 했다.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이 쫒아가자 지금의 환선굴 부근에서 천둥 번개와 함께 커다란 바위더미들이 쏟아져 나오고 여인은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여인을 선녀가 환생한 것이 라 하여 바위가 쏟아져 나온 곳을 환선굴이라 이름 짓고 제를 올려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게 되었다는 환선굴을 발견하게 되 는 전설을 갖고 있었는데, 신기한 것은 환선굴이 스스로 굴의 입구를 만들어 내자, 이 촛대바위 근처의 폭포와 소는 물이 마 르고 환선굴에서 물이 넘쳐나와 환선굴 입구의 선녀폭포를 이루었다는 것이었다.
드디어 약 50분을 산행하여 아침 8시 20분에 환선굴에 도착하였으나, 보다시피 관광객이 아무도 없었다. 당연히 우리가 먼저 전기불을 켜달라고 요청하여 첫 관람객이 되었다.
환선굴은 제주 만장굴과 비교될 수 있으만큼 규모가 웅장한 동굴이었다. 동양 최대의 석회암 동굴을 자랑한다. 주굴 길이 약 3.3 km. 총길이 약 6.5 km. 환선굴을 포함한 대이리 동굴지대는 대금굴까지 합쳐 총 7개의 동굴이 천연기념물 로 지정되어 있다.
내가 느낀 환선굴은 거대한 지하궁전같았다. 아니 작은 지하도시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내 발걸음으로 50분이 소요되었으니 여자들이나 어린이 걸음으로 족히 1시간도 넘게 걸릴 것 같았다. 거대한 종유석 기둥, 박쥐들이 산다는 박쥐동굴, 지옥의 다리, 참회의 다리, 사랑의 다리등 볼거리도 많았으며 굴을 다 관람하고 나올 무렵, 환선스님과 용머리 전설, 만리장성이라 불리우는 퇴적암층이 압권이었다.
원래 석회암 동굴은 석회석이 물에 용해되는 성질이 있어 오랜 세월이 흐르면 스스로 동굴 입구를 생성해 낸다. 환선굴의 선녀가 멱감던 전설처럼 환선굴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동굴입구를 만들어 냈지만 지근거리에 있는 대금굴은 경우가 다르다. 두 굴 모두 5억년이 넘은 생성과정을 지닌 굴이지만, 대금굴이 있다는 확신을 가진 삼척시에서 7년여간의 정밀한 지질조사를 벌려, 최단코스의 암벽을 뚫어 대금굴의 입구를 찾아낸 것이다.
5억년이 넘게 들키지 않고 곰실곰실 자라나온 대금굴이 인간들의 욕심앞에 그만 벌거벗겨진 것이다. 생각해 보라 3미터 50센치의 석순이 자라는데 20만년의 세월이 걸린다니. 140미터의 석회석 암벽이 물에 녹아 스스로 동굴 입구를 생성하기 까지의 세월이란 아마 1억년이 더 걸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인간들의 개발욕구 덕분에 이승에서 지금 내가 또한 대금굴을 볼수 있는 호강을 하였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묘한 아이러니에 빠져들었다.
환선굴 관람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목에서 다시 이 통방아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여섯 내지 일곱평 남짓한 평면에 원추형 으로 서까래를 세워 그 위에 굴피로 지붕을 이은 모습이 이색적이다. 수로에서 쏟아지는 물이 물받이에 가득 차면 물의 무게 때문에 물받이 쪽이 주저앉고, 공이를 박은 쪽은 들려 올라간다. 물받이의 물이 쏟아지면 그 반동으로 원상회복되는데, 공이 는 그 힘으로 곡식을 찧는다. 산간 문화의 일면을 살필 수 있는 생활용구로 원형이 비교적 잘 간직되어 있었고, 약 100년전 것이라 한다.
저 방앗간에서 옛선조들의 웃음소리, 한숨소리가 들려오는 심안이 열린다면 아마 발걸음을 옮기기가 참 어려웠을 것이리라.
환선굴 구경을 마치고 이 번 여행의 최종목적지인 성화밭 마을을 찾아나섰다. 성화밭 마을은 삼척시 도계읍 황조리 도덕정사 부근에 있는 우리나라에서 제일로 쳐주는 원형이 잘 보존된 산촌마을이란 것을 서두에 이미 밝힌바 있다. 네비게이션으로 도덕정사까지는 쉽게 찾았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도덕정사의 스님들도 마을 사람들도 성화밭 마을을 아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잠시 난감했다. 우리는 도덕정사를 지나 찾아보기로 했다. 조금 직진했더니 바로 길 왼편에 육백산 등산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차에서 내려 그 안내판을 자세히 봤더니 우리가 서있는 바로 왼편의 지명이 성화밭이었다. 바로 코앞에 있는 마을을 같은 동네 스님도 마을 사람들도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 의아하기만 하였다.
육백산 등산안내판에서 조금 더 직진하자 왼편으로 난 급경사길이 보였다. 육감적으로 그 길을 따라가면 성화밭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급경사길은 소형 자동차 한 대가 겨우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험한 길이었다.
성화밭 마을이었다. 산집이 총 여섯채 있었는데 그 중 두채는 폐가였다. 해발 약 800 미터 고지에 드문드문 박힌 산집들은 그 옛날 전형적인 산촌마을의 풍경을 대변하였고, 황조리 같은 동네 주민들도 잘 모르는 이유를 알만 하였다. 여섯채 산집 을 다 구경하고 마을 끝집에서 이어진 길을 따라 걸어 보았다
울창한 아름드리 송림이 길 양편에서 쭉쭉 하늘로 뻗어있는 정감있는 시골길이었고, 솔향 그윽한 솔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그 길 끝자락에 위 사진에 있는 성화밭 마을의 마지막 집이 있었다.
성화밭 마을의 7번째 마지막 집인 이 집 왼편에 그들의 밭이 있었고, 그 밭에선 옥수수 수확을 끝낸 늙으신 남녀 농부님들 다섯명이 밭일을 정리하고 계셨다. 사진에 보이는 수확한 옥수수를 반출하기위해서인지, 소형 트럭이 밭에 주차되 있었다. 나는 이 주민들에게 이곳이 성화밭 마을이냐고 물었다. 그들은 성화밭이라고도 하고 성화촌이라고 한다고 답변하였다.
나는 성화밭 마을이 우리나라 산촌 마을 중 가장 아름다운 마을이라 서울서 구경왔다고 말했다. 그들은 소박하게 웃으며 뭐 구경할게 있느냐고 반문하면서, 저 위에 짓고 있는 대학교나 구경하고 가라하면서, 단풍도 지고 뭐 볼게 있어야지 라고 말했다.
성화밭 늙으신 어른들과 대화를 나누는데 낯선 이방인의 출입을 꺼리는 개가 금방이라도 물어 뜯을듯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 보며 계속 컹 컹 짖어댄다. 겨울엔 난방을 연탄으로 하는지 밭 주변엔 연탄재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고,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전신주가 서있는 걸로 보아 전깃불은 들어온다는 사실이었다. 가장 안타까운 일은 사진엔 안보이지만 옥수수를 저장한 뒤쪽 의 고냉지 무우밭이 갈아엎어져 있었다. 싱싱한 무우청과 먹음직한 통통한 다리를 지닌 무우 단 두 개만이 그 처참한 학살 을 면하고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다. 무우 농사 소출해봤자 인건비도 건지지 못해 저리 결행하였으리라 생각하니, 왠지 그 어르신들의 가난하고 애잔한 삶의 찌꺼기가 체증에 걸린듯 내 가슴의 명치가 아려왔다.
성화밭 마을 어르신들과 작별을 고하고 뒤돌아서니 성화밭 마을 앞산의 겹쳐진 산능선이 수없이 펼쳐지는 그 뷰(View)가 과연 장관이었다. 발걸음을 되돌리기 싫어 한참 동안 물끄러미 산의 정경에 취해 있는데, 이름 모를 나무위에서 까마귀 떼들이 성화밭 마을의 마지막 집 개처럼 낯선 이방인인 나를 경계하는지 까악-까악- 울음소리 또한 요란하였다.
사실 이 번 여행의 목적은 노후에 한가하고 느린 삶을 살수 있다면 이런 마을에서 한 번 살아보려고 사전 조사차 찾아온 것이었다. 산간 오지라 땅값도 쌀거고 이런 폐가를 사서 큰 돈 안들이고 거처를 마련한다면 좋지 않으려나 동행한 안서 방에게 의향을 물었다. "형님! 뭐 먹고 살건데요. 좋은 경치와 맑은 공기만 먹고 살수는 없잖아요. 딱 굶어 죽기 십상이겠 네요. 그리고 이 지방은 겨울에 눈도 많이 올건데 아까 올라올 때 그 급경사길로 어떻게 다니실 거예요. 겨울엔 완전히 갇혀 살아야 할텐데 힘들어요. 형님!"
그렇다. 사람이 생활의 패턴을 완전 바꾼다는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가족간의 동의도 있어야 하고 늙어 죽을 때까지 여유롭게 먹고 살만한 재산도 없고, 아직까지 앵벌이 짓을 하며 먹고 사는 내가 어찌 그런 호사를 누릴 수 있으랴. 그렇지만 이런 마음의 여유를 갖고 이 곳 성화밭 마을을 한 번 찾아봤다는 것 자체로 자족하고, 분수를 지키는 겻이 현명한 처신이 될런지도 모르겠다.
성화밭 마을을 내려와 그 늙으신 농부들이 말해 준 대학교를 보러 갔다. 강원대학교 도계(삼척) 캠퍼스 신축 공사가 거의 완공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난 그 엄청난 건축 규모에 놀랬다. 산 정상에 아마 한 오십채도 넘는 건물이 그 웅장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이 곳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며 공부하는 대학생이나 가르치시는 교수님들은 호연지기를 기르며 산의 정기 를 듬뿍 받으며 행복한 캠퍼스 생활을 누리겠지만, 바로 아래 성화밭 마을 사람들의 그 피폐한 산간 생활이 오버랩되어 애련 한 연민의 정이 또 다시 병인양 내 가슴에 도지는 것이었다.
신축중인 대학교 교정을 빠져나와 그 윗길로 차를 몰았다. 도대체 무엇이 나올련지 조금만 가보자고 안서방이 제안했는데 백미터도 못가 그 길은 막혀 있었다. 1박 2일간의 우리의 강원도 산간 오지 여행의 단막극은 이렇게 그 막이 서서이 내려졌다. <끝>
2008.10.31 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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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사항: ★1박2일의 일정은 너무 짧았다. 대금굴 티켓을 인터넷으로 반드시 예약(성인 12,000)하고 2박3일 일정으로 태백, 영월, 제천을 거쳐 오는 부부여행, 또는 친구와의 여행을 권한다. 성화밭 마을을 꼭 가보길 권한다.
★대금굴 관람티켓으로 환선굴(성인 4,000)까지 볼수 있었음(당일 유효)
★덕항산 등산을 겸하면 더 금상첨화일 것 같았다.
★숙박은 삼척온천(8,000)을 이용하면 좋다. 서울 왠만한 스파보다 시설이 좋았고, 수대의 관광버스가 주차되 있는 걸로 보아 단체 숙박객이 선호하는 온천임에 분명했다.
★영월 단종능앞 보리밥집 유명함.
★제천, 단양을 경유할 경우, 비원쏘가리집에 한 번 들려보길 권한다. 충북 단양군 단양읍 도전리 516 043)421-4000,6000 011-4422-6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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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금굴도 좋고 성화밭 마을도 종겠지만, 2킬로 넘는 참복이 탐나는구려.
위 일정대로 꼭 한번 가 봐야겠는데, 전부 내가 못가본 곳이라, 좋은 여행 정보을 주어 감사합니다
부부여행 꼭 한 번 하십시요. 대금굴 티켓 예약하시고
하시던 사업을 일단 성공리에 접고 드디어 여유롭게 평소 하고싶던 여행을 하는 모습 정말 부럽습니다
백수가 되어 보름 남짓 되었는데 조금 스트레스가 풀렸답니다.
여행기 단숨에 잘 읽었습니다. 자연스레 흐르는 물같이 글도 잘 쓰시었으니 말입니다.척에는 여러번 가보고 그 많은 계곡에서 물놀이과 야간 투망도 하며 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오며가며 이정표에 나타나는 그 동굴들은 한번도 가보지 못하고 말입니다. 그 동굴등 다음번에 갈 때에는 한번 찾아가 보아야하겠습니다.
삼척 김씨라서 삼척을 찾았구만. 강원도는 물과 공기가 좋을 껏 같아 살고 싶은 곳이기도 하죠. 성화밭은 귀하가 잘 맞을 것 마을인 것 같은데, 근처에 대학도 들어서는 걸 보면 살만한 곳 아닌가요? 감히 평한다면 글 솜씨가 대단해요. 여행작가로 활약하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같이 한 번 가보지 않으실련지요. 난 다시 한 번 가볼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