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의 부역(負役) 흔적
임병식
내가 산정에 올라 고성(古城)을 마주하고서 필연적으로 강제 징집을 당했을 민초들을 생각하다가 잠시 머리속에서 혼란을 느낀 것은 다른것 때문이 아니었다. 강제 징집을 당했다면 분명 부역을 한것인데 이것이야말로 분명히 구별해서 말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사실이 그렇지 아니한가. 부역(負役)과 부역(附逆)은 발음의 장단에 차이가 있지만 이같이 확연한 뜻을 지닌 동음이의(同音異義)는 잘못 쓰여지면 공연한 오해를 불러올 수가 있기 때문이다. 부역(負役)은 어떤 일을 도와주는 것이지만 부역(附逆)은 그야말로 반역의 뜻을 담고 있지 않는가.
나는 그 고성을 보면서 글 한편을 써볼 생각을 하면서 제목을 ‘울력의 흔적’이라고 붙여볼까 했다. 예전에 공공근로를 나갈 때에 보면 흔히 그런 말을 썼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제성을 띈 노역을 생각한다면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 일한다는 뜻을 지닌 어휘는 의미 전달이 좀 약하다고 생각했다.
해서 부역(負役)을 생각했고 그것을 제목으로 할까하니 같은 동음인 부역(附逆)이 자꾸만 걸렸던 것이다. 해서 공연한 오해를 불식시키는 방법으로 한자를 병기하기로 했다.
흔히 제목은 글을 여는 창문이요 내용을 암시하는 예시적인 기능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더욱 혼돈을 피하게 하는게 마땅하지 않는가. 내가 이 부역의 문제를 생각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산성(山城)때문이었다. 고락산 정상에 이르니 그곳에는 의외로 큰 성이 있었던 것이다. 성은 보수해 놓은 것이었다. 하지만 하부는 옛것 그대로였다. 그러니까 허물어진 부분을 보수해 놓은게 분명했다.
성안에는 식수를 확보하기 위해 파놓은 우물까지 있었다. 규모로 보아 일개 중대병력은 능히 머물을 만한 크기였다. 나는 이것을 보니 문득 엣 선조들이 나라 방위는 물론 성을 쌓으느라 고생을 많이 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석성(石城)의 밑돌은 크기가 보통 큰것들이 아니어서 그돌을 이곳까지 운반하자면 무척이나 고생을 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것을 유심히 본 것은 얼마 전에 읽은 어떤 글과도 무관치 않다. 지금으로부터 200년전 여수에 거주한 정종선(丁鐘璿 1811-1878)이란 선비가 그런 부역의 고통을 떠올리게 하는 성소문을 올린 글을 접했던 것이다. 내용인즉 여수가 순천에 병합됨에 따라 과도하게 부역을 부담하고 있으니 옛날처럼 다시 복현(復縣)을 시켜달라고 임금에게 상소한 것이었다.
나는 그 글을 읽으면서 당시 상황을 가늠해 보았다. 그 시기는 순조연간으로 그때는 나라가 외침없이 보내던 때이다. 한데도 여전히 백성들은 과도한 노역에 시달린 탓에 빈곤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는 나라기강이 무너진 점도 있었다. 그것을 짐작케하는 시가 있다.
정약용선생이 쓴 ‘적성촌의 한집을 지나며’라는 시는 차마 눈물흘리지 않고는 감상할 수 없는 정황이 묘사되어 있다.
(전략 ) 아침 점심 다 굶다가 밤에 와서 밥을 짓고/여름에는 갈옷 입고 겨울에는 베옷 입네/ 들 냉이 깊은 싹은 땅 녹기를 기다리고,/이웃집 술 익어야 지게미라도 얻어먹겠네/지난 봄에 꾸어 먹은 환곡이 닷 말인데/ 이 때문에 금년은 정말 못살겠네(이하 생략 ) 구차한 살림형편의 실상이 절절하다.
하기는 삼정이 무너진 후에는 부패가 극에 달해 죽은 사람을 산사람으로 군적에 올려놓고 군포를 징수하고(백골징포(白骨徵布)하고, 16세 이하 어린이게는 군역을 면제토록 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속여서 군포를 징수(황구첨정 [黃口簽丁) 하였다니 백성들의 삶이 온전히 지탤될리 있었겠는가.
그런 실상을 정종선 선비의 상소문에서도 생생하게 드러난다.
“(전력) 부역에 있어서 여수 백성들은 전라좌수영의 부역에다 순천부역까지 나가니 한몸으로 두곳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가령 한집에 사오명의 가족이 있다면 아버니는 수영의 부역에 나가고 아들은 순천부역에 나가며 형은 수영부역, 동생은 순천부역에 나가야 하는데 그것도 어느 때에는 아침에는 수영부역, 낮에는 순천부역에 나가는 때가 있으니 한몸에 두지게를 져야하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거리입니다.(이하생략)”
이런 정황을 볼 때 곤궁한 살림을 살면서도 온갖 부역에 시달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기는 부역이라는 것이 4,50년 전만 해도 이어졌다. 신작로를 닦으면서 마을단위로 책임을 할당하여 자갈을 깔게 하고 평탄작업을 부담시켰는데 그때는 울력이라고 했지만 노동의 강도로는 강제성을 띄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목을 추길 음료수 한잔 공급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하물며 그보다 수백년 전은 오죽 했겠는가. 손수 싸온 꽁보리밥과 거친 밀빵을 준비하여 바윗돌을 옮기곤 했을 것이다. 그것도 큰 돌은 한 두 명으로는 어림이 없어서 대여섯 명이 매달려서 옮겨야 했을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종일내내 불려가 일하고 해가 떨어지면 겨우 귀가했을 터이니 생존자체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특이 이 지역사람들은 그런 부역 말고도 전란이 나면 배를 부릴줄 안다는 이유로 노젓는 일에는 감초처럼 동원이 되었다니 다른 지역민보다도 훨씬 고생을 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 석성을 바라보는 내내 마음이 아팠다. 당신들은 이 성을 쌓으며 누가 기억이나 해줄까 생각지도 못햏을 것이다. 그런데 육신은 이미 세상을 떠나 한줌 흙으로 돌아갔지만 당시 땀흘러 쌓은 흔적을 후대가 더듬어 보니 그 인연이 야릇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분들이 남기 하나의 기념물이라고 할까.(2013)
첫댓글 생각해보지 못한 기억들을 생각하게 하시고 역사의 흐름 속에 선조들의 고뇌가 떠올려지는 글입니다.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