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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착한 사람 콤플렉스>
오늘 복음의 비유는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로 시작됩니다.
저는 이 말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아들 둘이 있었다는데 두 아들 중에서는 누가 더 주인공일까?
왜 한 아들의 비유를 들지 않으시고 두 아들의 비유를 드셨을까?
비유의 뜻을 이해하는 데는 작은 아들의 얘기 하나만으로도 충분하고,
사람들은 보통 작은 아들의 얘기에 비중을 더 두기에 이 비유를 흔히 ‘탕자의 비유’라고 하지 않는가?
사실 이 비유의 주인공은 작은 아들도 아니고 큰 아들도 아닙니다.
이 비유의 주인공은 자비로운 아버지이고, 이 비유의 주제도 그러므로 아버지의 자비입니다.
그럼에도 두 아들을 얘기함은
하느님은 큰 아들에게 자비로우신 것은 물론, 당신을 떠났던 작은 아들에게도 자비로우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일 거고,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두 부류의 태도가 있음을 얘기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큰 아들은 우리나라에서 보통의 큰 아들이 그런 것처럼
부모를 모셔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인지 부모의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큰 아들은 동생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부모를 떠나지 않은 것에 도덕적 우월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생이 돌아오고 그런 동생을 환영하는 아버지를 보고
시기질투를 하면서 큰 아들의 도덕적 우월감은 깨지게 됩니다.
큰 아들이 아버지 곁에 머문 것이 사랑 때문에 그러한 것,
그러니까 마음으로부터 원해서 그러한 게 아님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버지께 볼멘소리로 말합니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곁에 머묾이 사랑이 아니고 행복이 아니었습니다.
큰 아들도 동생이 떠날 때 같이 떠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동생처럼 떠나지 않은 것이 동생보다 착하다는 우월감 때문이었는데
아버지가 그런 자기의 착함을 인정하고 동생은 나무라시기보다는
동생이나 자기나 똑같은 아들이라고 하시고 동생이 돌아오니 잃었던 아들을 찾았다고 하며 더 기뻐하시자
큰 아들은 착한 아들의 심리에서 종의 심리로 떨어져버립니다.
그러니까 어쩌면 그는 착한 아들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이런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착한 아이'라는 소리를 듣기 위해
내면의 욕구나 소망을 억누르는 삶을 살던 것이 고착화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착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 특히 어렸을 때는 부모의, 커서는 직장 상사나 책임자의
인정이나 사랑을 받지 못할까봐 두려워합니다.
이런 사람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내면의 욕구와 소망을 억누름으로써
불만이 쌓이게 되고 자유롭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의 착함을 인정해주지 않으면 존재가 흔들리고
큰 아들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종의 비하감에 빠집니다.
이에 비해 작은 아들은 자기 내면의 욕구대로 행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떠났고 나쁜 아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행복이 아님을 고생을 통해 깨달았고,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 참으로 행복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렇지만 자기는 아버지를 배신하고 떠난 자기는
아들이 아니라 죄인이요 품팔이꾼으로서 아버지 곁에 있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큰 아들이나 작은 아들이나 아들이라고 생각지 않고 종이나 품팔이꾼으로 낮춰 생각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큰 아들은 비하감 때문이고 작은 아들은 겸손 때문이며,
그래서 큰 아들은 비참하고 작은 아들은 행복합니다.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는데
아들로 받아주시니 너무 행복합니다.
- 작은형제회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
지금 현재 저는 안식년을 어느 본당의 사제관에서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조그마한 아파트를 구해서 살고 있습니다.
안식년 기간 동안에 해야 할 공부가 있어서 저만의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식사부터 청소까지 집안 살림의 모든 것을 저 혼자 처리를 해야 합니다.
그런 저를 아는 어떤 신부님께서 만나자마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 밥은 먹고 사니?”
소위 자취생처럼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한다는 것이 쉽지 않겠지만,
특히 음식을 직접 해 먹는다는 것이 가장 어려울 것으로 생각하셨나 봅니다.
그런데 이 자리를 빌어 말하면 저는 너무나도 잘 해먹고 있습니다.
외식보다는 집에서 직접 요리를 하면서 잘 먹고 있지요.
물론 요리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있는 반찬을 가지고서 대충 음식을 만들어서 먹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그 맛이 꽤 괜찮습니다.
전문적으로 요리를 배운 적도 없고 요리책을 보고 만드는 것도 아니지만
이것저것 넣어서 만든 찌개를 먹으면서 스스로 감탄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아무것이나 잘 먹는 저의 놀라운 식성도 그 이유가 되겠지만, 그보다는 요리의 주재료가 훌륭하기 때문입니다.
김치 등 기본이 되는 반찬들을 종종 아는 신자분들이 가져다주시거든요.
그런데 그 맛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이렇게 맛 좋은 반찬을 주재료로 섞어 만들었기에 엉터리 음식이어도 맛이 좋을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우리 삶이 엉망진창으로 보일 때가 있습니다.
도저히 미래가 없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주재료는 다름 아닌 주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엉터리 삶처럼 보여도 최고의 맛과 가치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의 되찾은 아들 비유 말씀은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한다고 투덜거리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죄인이 회개하여 새 삶을 얻는 것을 기뻐하시기에
우리 역시 회개의 삶을 따르는 이들을 바라보면서 기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작은 아들은 아들 자격을 잃어 마땅했지요.
아버지 집을 떠난 것은 아버지를 등지고, 아버지의 재산을 축내는 먼 나라로 갔기 때문이지요.
어쩌면 스스로 그리스도를 등지고 교회를 떠나, 아버지 하느님께서 주신 재산을 모두 빼앗길 어둠의 땅으로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는 여전히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지요.
그리고 그의 기대대로 아버지께서는 그는 외면하지 않습니다.
살진 송아지를 잡고 거룩한 잔치를 벌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 죄를 짓는다 할지라도
죄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굳은 의지를 갖고 주님께 나아간다면
당신의 큰 사랑으로 우리를 기쁘게 받아주십니다.
- 인천교구 / 안식년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
<순결한 창녀>
양승훈 교수는 ‘물에 빠져 죽은 오리’에서 이렇게 자신의 경험을 적고 있습니다.
자동차 서비스 회사에 근무하는 동생이 오랫동안 서울 본사에서 근무하다가 일산에 있는 회사의 부품 창고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울적해진 동생은 기분도 달랠 겸 창고 옆에 오리를 키울 수 있는 작은 수영장을 만들었다.
수영장이래야 꼬마들이 물장구나 치며 놀 만한 크기의 널찍한 물통이 전부였다.
그러고 나서 퇴근하기 전에 오리 농장에 달려가 청둥오리 한 마리를 사서 물에 넣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밤새 안녕할 것을 기대하며 출근을 해 보니 오리가 물통 속에서 죽어 있는 게 아닌가!
깜짝 놀라 오리를 이리저리 뒤척여 봐도 짐승에게 물린 흔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수영이 ‘전문’인 오리가 물통 턱을 기어 올라오지도 못하고 30cm 정도밖에 안 되는 얕은 물에 빠져 죽었을 리는 없지 않은가!
결국 오리 농장에 가서 주인에게 따져 물었다.
하지만 자초지종을 들은 농장 주인은 그것도 몰랐느냐는 듯이 말했다.
“이 오리는 오리 농장에서 부화하고 키운 오리입니다.
그래서 수영을 할 줄 모르지요.
게다가 이 오리는 어릴 때부터 물속에 집어넣지 않았기 때문에 깃털에 기름이 분비되지 않아 물에 잘 뜨지도 못합니다.”
우리가 죄를 피한다고만 해서 진정으로 경건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죄를 허락하셨다면 다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작은 아들에게 죄를 지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신의 유산을 내어주었다면
그 죄를 통해 무언가를 깨닫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죄는 그래서 유용합니다.
유용하기 때문에 인간 주위에 있기 하신 것입니다.
마치 오리도 물이 없는 곳에서만 살면 더 이상 물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가지지 못하는 것처럼
인간도 죄와 끊임없이 싸워보지 않고서는 죄를 이길 수도, 죄 때문에 겸손해질 수도 없습니다.
아기들이 엄어지지 않고는 걷는 법을 배울 수 없는 것처럼
하느님도 우리가 죄 짓는 것을 결코 두려워하시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 어떤 유혹이 닥치더라도 다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지니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트럭 뒤에 이렇게 써 놓고 다니는 것을 누군가가 보았다고 합니다.
한 쪽에는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써 놓았고, 다른 쪽에는 “내 차를 건드리는 놈은 박살을 내 놓겠다”라고 써 놓았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이 참으로 경건한 사람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은 이미 부정한 사람입니다.
사람과 접촉하지 않으면 죄를 짓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순결해지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참으로 순결한 사람이 하는 기도가 나옵니다.
그 순결한 사람은 단 두 가지만을 청합니다.
하나는 ‘죄의 용서’입니다.
자신이 죄인인 줄 모르면 교만하여 순결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분은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꺼이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다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들을 모르는 체해 주시리라.
당신께서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
우리 죄를 잊어달라고 기도하면서 다른 사람 허물을 들추어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남을 판단하는 데에는 자신은 이미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교만이 깔려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자신의 나약함을 알아서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는 것입니다.
“과수원 한가운데, 숲 속에 홀로 살아가는 당신 백성을, 당신 소유의 양 떼를 당신의 지팡이로 보살펴 주십시오.
옛날처럼 바산과 길앗에서 그들을 보살펴 주십시오.
당신께서 이집트 땅에서 나오실 때처럼, 저희에게 놀라운 일들을 보여 주십시오.”
나의 힘으로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죄가 없다고 말하는 이는 다 거짓말쟁이인 것입니다.
죄와 싸워 본 사람은 죄를 이길 수 없음을 압니다.
그래서 겸손하게 주님의 도우심을 청합니다.
이런 사람이 순결한 사람인 것입니다.
믿으면 순결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믿으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성령의 열매인데 성령은 교만한 자 안에는 사시지 않기에
사람을 판단하는 자가 믿는다는 것은 거짓과 위선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 딸을 고쳐달라고 청하는 가나안 여인을 사람들 앞에서 개 취급을 하십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자존심도 없이 “저, 개 맞습니다. 그렇지만 자녀들이 먹는 빵 부스러기는 먹을 수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합니다.
당신 앞에서 자신을 완전히 낮춘 그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장하다.”
순결한 사람은
오늘 독서에서처럼 자기 죄에 대해 용서를 청하고 또 자신의 약함을 알기 때문에 하느님의 도우심만을 바라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우리는 간음하다 잡힌 여인입니까, 아니면 그 여인을 향해 돌을 들고 있는 사람들입니까?
그 날 그 간음하다 잡힌 여인만이 그리스도께 심판받지 않고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구성원은 모두 창녀들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약한 존재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순결합니다.
왜냐하면 그 겸손함이 바로 더러움 자체인 뱀을 몰아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부들은 언제나 교회를 부를 때 ‘순결한 창녀’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우리는 순결합니까, 부정합니까?
부정한 것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
<사랑을 기억하라>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하느님께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가 죄인이라 해도 우리는 하느님 마음에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
죄의 유혹에 떨어졌을 때 우리가 그분으로부터 벗어나 숨게 됩니다.
내가 그분을 멀리할 뿐입니다.
나를 애타게 바라보고 계시는 주님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저는 램브란트가 그린 ‘탕자의 귀향’을 좋아합니다.
그 그림은 바로 오늘 복음의 내용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품에 안기는 아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아버지의 눈은 사시가 된 채로 그려져 있습니다.
아버지는 집나간 아들이 그리워 마음과 눈이 늘 아들에게로 향하여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들이 어떤 행동을 취하든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한결같고 또 그칠 수가 없는 법입니다.
무릎을 꿇은 작은 아들은 다 닳아버린 신발 때문에 발바닥을 드러낸 채
아버지의 가슴에 모두를 맡겨버렸고 그 주변에서 사람들이 그들을 바라봅니다.
한 구석에서는 희미하게 보일 듯 말 듯한 여인이 이 장면을 애달프게 지켜보고 있는데 어머니의 모습이 아닐까?
아니면 방탕한 삶을 멀리하는 표현일까?
생각해 봅니다.
아들이 용서를 청하든 그렇지 않든 돌아온 것만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시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우리의 하느님을 발견합니다.
우리보다 먼저, 그리고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계시며 내가 알기도 전부터 나를 사랑하고 계시는
하느님 아버지가 계심을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그 사랑은 매끈한 오른손을 통해 어머니의 사랑을, 투박한 왼손이 아버지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형은 지팡이를 쥔 채 멀뚱멀뚱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동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회개한 작은 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아들이 옛 생활을 버리고 아버지께 돌아왔는데
그것은 아들이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집의 풍요로움을 기억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버지집의 처지가 밖에 보다 못하였다면
그는 아버지 집을 구지 찾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넉넉함을 기억한다는 것은 큰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자비로우신 아버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허물과 잘못, 죄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큰 사랑으로 감싸주시는 아버지는 바로 우리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작은 아들이 배고픔에 지쳐 돼지나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라도 허기를 채우려고 하였을 때는
집 밖으로 나온 것을 후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회개한 것은 아마도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하고 연습한 말을 채 하기도 전에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라고 하시며 먼저 받아주셨을 때일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사랑을 느꼈을 때 옵니다.
그런데 두 아들이 모두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하여 자기 것을 챙겨서 집을 나갔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생각지도 않고 자기 좋을 대로 한 것입니다.
반면 큰 아들은 아버지의 품 안에 있으면서도 그 사랑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하며 투정을 부렸습니다.
몸은 같이 있었으나 마음은 아버지를 떠나 있었습니다.
이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큰 아들의 마음에는 이만큼 했으니 이만큼은 받아야 된다는 보상 심리가 잠재하고 있었는데
결국 그것이 밖으로 표출되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 두 아들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큰 아들이든 작은 아들이든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며 아버지 품을 그리워하는 사순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자비와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 품에서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또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해 주신 이유를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의인이라고 자처하며 목을 뻣뻣이 하고 있는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신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도 교만함이 자리하고 있다면 내려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성모병원 행정부원장 겸 청주상당노인복지관장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
<되찾은 아들의 비유>
루카복음에 있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루카 15,2-3).
그래서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입니다.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하느님과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세리들(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그것을 비판했습니다.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이 말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큰아들이 하는 말과 같습니다.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죄인들을 처벌해야 하고, 죄인들을 구원에서 제외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큰아들은 작은아들을 처벌해야 하고, 가족 공동체에서 추방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죄 속에서 살던 세리들의 과거의 모습만 생각했고, 회개한 현재의 모습은 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큰아들은 방탕하게 살던 동생의 과거의 모습만 생각했고,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온 현재의 모습은 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죄인들 때문에 슬퍼하시는 하느님의 슬픔을 함께 나누지 않았고,
죄인들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하느님의 기쁨을 함께 나누지 않았습니다.
큰아들은 작은아들 때문에 슬퍼하는 아버지의 슬픔을 함께 나누지 않았고,
작은아들이 돌아와서 기뻐하는 아버지의 기쁨을 함께 나누지 않았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자기들도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자기들이 위선자라는 것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함부로 판단했고, 멸시했습니다.
큰아들은 자기는 효도를 다 했다고 자기 마음대로 생각했고, 자기가 위선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동생의 죄만 비판했고, 동생을 멸시했습니다.
대부분의 세리들이 죄 속에서 살았던 죄인들이라는 것은 맞습니다.
작은아들은 자기 마음대로 집을 떠나서 방탕하게 살았으니 그가 죄인이라는 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회개한 세리들은 더 이상 죄인 취급을 받으면 안 됩니다.
작은아들도 회개하고 돌아왔으니 더 이상 죄인 취급을 받으면 안 됩니다.
회개하고 돌아온 사람을 죄인 취급하면서 배척한다면,
그 사람을 받아주신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어떤 바리사이가 성전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루카 18,11-12)
그는 자기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을 다 잘했다고 자화자찬하고 있습니다.
그 바리사이의 기도는 큰아들이 아버지에게 한 말과 같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완벽하게 다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정말로 죄가 없었을까?
또 큰아들은 정말로 잘못한 일이 하나도 없었을까?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죄 가운데 대표적인 죄는 '위선'입니다.
그들의 선은 겉으로 보기에만 선이고, 사실은 가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속으로는 세리들과 다를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큰아들도 위선자입니다.
비유의 내용에는 그가 잘못한 일이 구체적으로 안 나오지만,
그가 한 말을 보면 그는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종으로서 했을 뿐이고, 아들로서 일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착한 아들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작은아들과 다를 것 없는 아들이었습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라는 아버지의 말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 말은 물질적인 것들뿐만 아니라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들까지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나와 너는 하나다." 라는 말이 됩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남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따라서 큰아들과 작은아들도 남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작은아들을 잃었을 때 아버지는 자신의 일부를 잃었고,
그 아들이 돌아왔을 때 잃었던 자신의 일부를 되찾았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아버지의 말은(루카 15,32)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과 같다." 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큰아들은 당연히 기뻐해야 합니다.
사실 바리사이들(율법학자들)과 세리들을 구분하는 일, 큰아들과 작은아들을 구분하는 일은 인간들이 하는 일이고,
하느님 앞에서는 구분되지 않습니다.
모두가 다 죄인들이고,
모두가 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들입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을 가리켜서 죄인이라고 말할 권한이 없습니다.
겸손하게 자신의 죄를 회개할 의무만 있을 뿐입니다.
큰아들도 회개해야 하고,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도 회개해야 합니다
아버지는 작은아들이 돌아와서 기뻐하고 있지만,
큰아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어서 여전히 슬퍼하고 있습니다.
- 전주교구 함열본당 상지원 공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제정신차려 주님께 되돌아가는 길>
인간은 무엇인가를 찾아 어딘가로 떠났다가 되돌아가는 '길 위의 존재'이다.
그런데 많은 순간 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원하는 것을 찾고 자기뜻을 이루려고 앞만 보고 달려갈 때가 많다.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가난한 사람들의 예언자 미카는 가난한 이들을 희생시키는 상류 계층의 불의에 대해 심판하고 있다.
그는 백성들에게 이스라엘이 썩었음을 고발하면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밝히시리라 예언한다.
그렇지만 그는 하느님께 용서를 빌면서,
그들의 죄를 눈감아 주시고 자애를 베푸시는 야훼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다((7,18-19).
하느님께서는 유배지에서 돌아온 백성들에게 요르단 강 건너편의 비옥한 땅을 주심으로써
당신의 자비심을 드러내시고 유배지에서의 기적을 되풀이하셨다.
이 기도 속의 믿음은 죄를 기꺼이 용서하시는 주님의 한없는 자애에 기초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비록 백성들이 불충실하다 해도
구원계획을 포함한 당신의 모든 약속들을 파기하지 않으신다.
주님은 “허물을 용서해주시고, 죄를 못 본 체해 주시며,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애를 품으시는” (미카 7,18-19) 분이시다.
하느님의 자애로 인하여 죄로 점철된 인간의 과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의 무한한 자애에 대한 응답과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로서 끊임없이 회개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느님의 용서는 진정한 구원이며, 해방이며 혁신이며 아울러 새로운 창조이다.
하느님께서는 그저 고분고분하고 어정쩡한 부성애로써 우리의 허물을 모르는 채 하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새로운 책임을 맡기시고 선으로써 악을 이길 수 있는 확신을 주신다.
이렇듯 그분은 죄인에게도 살아가는 기쁨을 다시 내려주신다.
잃었던 아들을 되찾고 기뻐하는 아버지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세관원들과 죄인들과 자주 어울려 식사하는 것을 심히 못마땅하게 여기는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에게 하신 비유 말씀이다.
하느님께서는 회개하는 죄인들(작은 아들)을 반기시기에
바리사이들과 율사들(큰아들)도 하느님의 이 기쁨에 동참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자기 몫을 챙겨 아버지 집을 떠났던 작은아들은 제정신이 들자 뉘우치며 아버지에게 품팔이꾼으로라도 삼아주시길 바랐다(15,18-19).
아버지는 아들이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달려가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아버지는 원망도 질책도 하지 않고 그의 회개를 기뻐하며
오히려 잔치를 벌이고 아들로서의 자리를 회복시켜 주었다.
큰아들은 아버지의 자비를 이해하기는 했지만
동생에게 주어진 용서의 선물을 함께 기뻐하고 공유할 줄을 몰랐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큰아들도 잔치에 참가하여 함께 즐기기를 원하셨다.
생각해보자!
하느님과 함께 있고 그분을 소유하는 것보다 더한 행복이 어디 있는가.
그런데 우리는 육(肉)의 영에 사로잡혀
아버지의 집, 곧 그분의 한없는 자애와 생명을 주시는 숨결을 거부한 채 자신을 찾아 방황한다.
거짓 허상을 찾아 떠돌며, 공허한 말잔치와 조화(造花)와 같은 어색한 아름다움에 속아 넘어가며
자기 만족과 착각의 늪을 헤매고 있음도 알아채지 못한 채!
이제라도 하느님의 자애(慈愛)를 잊고 자애(自愛)에 몰두하여
자꾸만 주님으로부터 멀어져가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고 ‘제정신을 차려’(15,17) 아버지께 되돌아가자.
한없이 자애로우신 그분의 사랑으로 매순간을 이어가면서도
대죄 중에 죽는다면 얼마나 무책임하며 비참한 일인가!
매순간은 그렇게 도전이다.
죽음과 죄와 육의 영에 사로잡히는 그 순간이
바로 아버지께로 되돌아가는 반환점임을 기억하자.
주님께서는 내가 돌아가기로 작정하기만 하면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부터 달려오셔서 안아주실 것이다.
지금이 바로 되돌아가야 할 때이다!
그 길이 진정한 행복의 길이다.
- 작은형제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자비하신 아버지>
오늘 복음의 소제목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지만
이보다 '자비하신 아버지의 비유'라함이 더 적절합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추상적이자 철학적인 초월자, 막연한 하느님이 아니라
자비하신 인격적 아버지임을 깨닫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루카 6,36)
바로 이 복음 말씀에 대한 해설이 오늘 복음의 '자비하신 아버지의 비유'입니다.
이 말씀이 진정 복음이며 우리의 자랑스런 하느님 상입니다.
도대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친교 깊이할 수 있는 종교가 세상 어디에 있겠는지요.
안식년을 맞아 잠시 '아버지의 집'인 수도원을 떠났던 제 경우를 복음의 작은아들과 견주는 것은 말그대로 어불성설(語不成說)이지만
그래도 저는 제 처지를 통해 오늘 복음을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1년여의 안식년이 끝나고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아버지의 집에 귀가했지만
작은아들은 거의 행려자 수준의 거지가 되어 돌아왔으니 얼마나 감개무량했겠는지요.
저의 귀가는 말그대로 금의환향이었습니다.
비단옷을 입고 온 것이 아니라 수도형제들의 따뜻하고 열렬한 환대가 그대로 그대로 비단옷이었습니다.
이어 아름답고 아기자기하게 준비된 제가 집무할 사무실도 저를 환대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도 공동체의 수도형제들도 저를 환대한 경우와는 달리
복음의 집에 있던 큰아들은 아버지의 작은 아들의 환대에 노골적으로 화를 내며 적의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전혀 틀린 말이 아닙니다.
큰아들의 입장에서 보면 공감이 갑니다.
이또한 우리의 보편적 모습입니다.
다 맞는 말같은데 자비심이, 연민의 사랑이 통째로 빠져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큰아들로 상징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큰 아들과 같은 종교지도자들이나 성직자, 수도자들은 아닌지 우리 모두의 회개해야할 모습을 보여줍니다.
제 경우 아버지의 집인 수도원에 돌아오니 말그대로 살 것 같았습니다.
불암산과 하늘을 보니, 또 거룩한 성전, 큰 밥상 같은 제대를 중심으로 형제들과 미사를 드리고 성무일도를 바치니 살 것 같았습니다.
26년간 살던 제 '잘 곳'의 방이, '먹을 곳'의 식당이, '기도할 곳'의 성전이 있으니 살 것 같았습니다.
귀가 후 처음으로 계속 숙면하니 또한 살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와 수도형제들만 아니라 무수한 형제자매들이 저를 환대했습니다.
제 귀가(歸家) 소식을 접한 허엘리야 수녀님의 환영 메시지입니다.
"환영합니다. 어서 오셔요. 신부님!
기다렸습니다. 돌아와 주셔서 감사하여요. 신부님!“
하여 안식년 동안 알게모르게 저를 보살펴주신 형제자매들에게 귀원 5일째 카톡으로 사진과 함께 감사메시를 발송했습니다.
"무사귀원 5일째! 감사합니다.“
이 카톡에 대한 허엘리야 수녀님이 진정성 가득 담긴 두 번째 다음 답글에 감동했습니다.
"프란치스코 신부님! 고맙습니다.
살아, 오셔서요.
새롭게, 하느님과 고운 추억 엮어가시는 걸음 되소서!“
살아오셔서 감사하다니요.
그러니 복음의 아버지는 살아돌아온 작은아들이 얼마나 고맙고 기뻤을까요.
조마조마한,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귀가하는 아들을 멀리서 본 아버지는 가엾은 마음에 달려가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
아버지의 자비심이 그대로 드러나는 참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아, 작은아들의 진정성 넘치는 회개의 고백성사입니다.
어제 귀원 후 고백성사받을 때의 신선한 충격을 잊지 못합니다.
생전 처음으로 만난 오창선 신부님입니다.
고백성사 후 별다른 훈계 말씀도 없이 보속으로 '주의 기도 1회'을 받았을 때
순간 아버지의 자비와 더불어 마음 가벼워짐을 느꼈습니다.
아, 보속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 가벼운 선물같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돌아가신 우리 민신부님도 보속은 '성모송 3회'였다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아버지는 회개의 고백성사를 본 작은아들에게 훈계도 책임추궁도 보속도 없이 곧장 환대의 비단 금의를 입혀주십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합니다.
회개를 통해 완전히 아버지의 아들로 복권된 작은아들이요, 바로 이 거룩한 미사잔치를 상징합니다.
자비와 겸손은 함께 갑니다.
자비하신 아버지는 겸손한 아버지입니다.
최고로 자비하시며 겸손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어제 고백성사 후 은총처럼 떠오른 생각에 신부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강복을 청했습니다.
"저에게도 강복을 주십시오."
즉시 제 앞에 무릎을 꿇는 오창선 고백신부님의 겸손에 감동했습니다.
이미 피정 중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라는 제 책을 읽고 감동을 받았다 하시기에 다른 2권의 제 책을 선물로 드리니 참 행복했습니다.
오늘 복음의 아버지는 또 얼마나 겸손하신지요.
큰아들을 조용히 타이르며 설득하는 겸손하신 아버지의 모습이 잔잔한 감동입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것이다.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자기를 완전히 비운 겸손하신 아버지이심이 단박 느껴집니다.
큰아들은 물론 우리 모두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큰아들의 반응은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지만
아마 회개하여 기쁨의 잔치에 참여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오늘 미카 예언자가 고백을 통해 이런 자비하신 아버지의 정체를 잘 밝혀 줍니다.
"그분은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꺼이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다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들을 모르는 체 해주시리라."
주님의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잔치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환대의 비단 옷을 입혀주시고
우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주시며,
우리를 성실히 대하시고 자애를 베풀어 주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토 수도회 성 요셉 수도원
* <굿뉴스> 매일미사 묵상글 담당 신부님의 묵상글 *
오늘의 복음을 읽을 때 많은 이가 큰아들에게 공감합니다.
집을 나갔다가 돌아온 말썽 많은 작은아들보다는
오히려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충실하게 살아온 큰아들이 더 칭찬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와 늘 함께 있고 아버지의 것이 모두 그의 것이었습니다.
분명 큰아들은 좋은 몫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렇게 살면 좋겠지요.
사람들에게나 하느님에게나 미안하고 부끄러울 일 없이 당당하게 한평생 살고 싶은 것이
큰아들의 마음일 것이고, 우리에게도 그런 마음은 없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런 큰아들이 아버지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하고 말하는 작은아들을,
아버지가 아들로 받아 준다는 데에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 작은아들은 비로소 아버지를 제대로 알게 됩니다.
또한 작은아들은, 자기가 자격이 있어서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그렇지만 큰아들은 아버지의 부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는 자기가 모든 것을 잘해서 아들로 인정받는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이런 큰아들이 작은아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큰아들은 자기와 동생을 비교하면서 잘못을 저지르고 돌아온 동생이 저렇게 환대받는다면,
그동안 철저하게 열심히 살아온 자신의 노고가 인정은커녕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투덜거립니다.
이처럼 큰아들의 시각은 온통 자신에게만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눈을 돌려 아버지를 바라본다면,
더욱이 바로 그 아버지의 아들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진정 알았더라면,
집 나갔던 동생이 돌아온 것을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큰아들은 자기가 아버지를 위해 수고한 것만 생각하였고
아버지가 베푸는 사랑은 알지도 기억하지도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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