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9일 우리의 중심
하느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신다.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모이는 거처럼 하느님이 선택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 한 곳에 모인다. 성당 정면 한 가운데, 천주교인 거실이나 방 가장 잘 보이고 중심이 되는 데에 십자고상이 걸려 있는 이유다. 반대로 죄는 공동체를 흩어놓는다. 하느님을 미워하는 게 아니라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게 죄다. 미워하며 정든다고 하느님을 원망하고 미워하면서 하느님과 가까워진다.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가고, 그리고 나 자신도 분열시키는 게 죄다. 교회는 죄는 단호하게 거부하지만, 죄인은 언제나 환영한다.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켜 아버지 하느님 집에 살게 하신다. 교회가 이런 곳이다 보니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다. 나도 너도 그중 하나다. 예수님 공동체도 지금 우리와 다르지 않았을 거다.
원의 중심에 가까워질수록 원둘레가 짧아지는 거처럼 공동체 구성원 각자가 공동체 중심이고 주인이신 예수님과 가까워질수록 서로 가까워진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 가까워져야 한다. 예수님이 없이 가까워지면 결국 분파가 생기고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공동체는 인간적인 시각에서 보면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모임이다. 성격적으로나 사회적 위치 또는 정치적 성향으로 볼 때 그들은 하나가 되기는커녕 그렇게 모일 수도 없었다. 그들은 예수님이 불러 모으셔서 함께 지냈던 거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기억할 때 우리는 하나가 되고 또 좋아하지 않으면서 서로 사랑하는 게 가능해진다.
구약의 요셉은 예수님의 예고편 같은 인물이다. 야곱은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여인 라헬에게서 얻은 첫째 아들 요셉을 다른 아들들보다 사랑했다. 다른 형들의 질투를 받아 그는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 갔지만 거기서 제상이 됐다. 온 세상에 기근이 들어 그들이 굶어 죽게 됐을 때 제상 요셉은 늙은 아버지 야곱과 함께 그들을 모두 구원한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다. 하느님께 사랑받고 하느님을 너무 사랑해서 하느님 뜻이 아니면 아무것도 행하지 않았던 그분은 사람들에게 거북하고 위험한 존재였다.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가서 예수님을 만난다면 내가 그분에게 큰 은혜를 입어 기적을 체험하지 않은 이상 아마 나도 예수님을 그런 사람으로 여겼을 거 같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아우성치지 않았을까?
베드로 사도가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해 설교하며 그 끝에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온 집안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사도 2,36) 그러자 사람들은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하며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사도 2,36-37) 2천 년 전의 내가 그랬을 거라면 지금 여기 사는 나도 그럴 거다. 이집트 제상이 된 요셉의 요구에 그 형들이 자신들이 요셉에게 한 짓을 기억하며 그 죗값을 치르게 된 거라고 여겼다. 그들은 그 제상이 그 요셉일 줄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저 십자가의 주님이 나를 구원하셨음을 알고 또 믿는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은 없다.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다.(사도 4,12) 주님께 한 발 가까이 가면 이웃과도 한 발 더 가까워진다.
예수님, 주님을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 주님의 제자들을 붙잡아 벌주는 게 하느님을 위하는 일이라고 여겼던 바오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지르던 그 군중, 저는 그들을 비난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들이 악해서 그런 게 아니라 하느님이 그런 분일 줄 몰라서 그랬습니다. 지금 제가 그렇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아드님께로 인도해 주시고 그분과 더 가까워지게 도와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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