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끝에 보면 왜이영화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다룬영화인지 알수있습니다.
그러나 그전에 이 영화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있습니다.**
비 포 더 레인 (Before the rain)(1994)
감독 : 밀코만체브스티 Milcho Manchevski
출연 :
Katrin Cartlidge .... Anne
Rade Serbedzija erbedzija .... Aleksander
Grégoire Colin .... Kiril
Labina Mitevska .... Zamira
Jay Villiers .... Nick
Silvija Stojanovska .... Hana
이 영화는 어렵고도 쉬운 영화입니다. 각 에피소드의 내용도 독창적은 아니지요.
키릴과 자미라의 사랑은 수 천 년 동안 세계 곳곳에서 끊임없이 되풀이 되어 오는
이야기의 또다른 변형이고, 앤의 이야기 역시 이해하기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알렉산더의 선택에 대해서는... 종군사진작가에 대해 이야기를 만들라고 하면 누구
나 가장 먼저 생각해내는 것이죠. 발칸 반도의 복잡한 역사를 모르더라도 영화를 이
해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알바니아와 마케도니아 사람들이 서로를 증오하며 싸웁니
다. 그 정도만 알면 충분합니다.
최근 수립된 마케도니아 공화국에 대한 영화다. 3부로 구성되어 있지만 각각의 이야
기 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일관된 주제로 이어진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얽혀져 있는 인물들 사이에서 인과관계가 이상하게 얽힌 시간의 서커
스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복잡한 해석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혹시나 관객들
이 어려워 할까봐 감독인 만체프스키는 지나칠 정도로 많은 설명들을 깔고 있습니
다. 주인공들은 끊임없이 시간에 대해 언급하고 심지어 너무나 적절한 문구가 담벼락
에 쓰여져 있기까지 합니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미묘한 상징이나 숨겨진 암호를
찾다가는 쉽게 오독으로 빠질 수 있습니다. 그만큼이나 평이합니다.
Words
마케도니아의 조그마한 마을. 그곳은 세계를 지배하는 문화의 발생지인 서방의 모습
과는 참으로 동떨어진 외양을 하고 있다. 산자락에 자리잡은 조그마한 동네, 염소우
리, 산자락에 위치한 수도원, 그 수도원 위로 동화책에서나 나올 듯 그려져 있는 달
과 별들...
그러나, 그들의 손에 쥐어져 있는 현대식 총들, 카세트 레코더에서 시끄럽게 흘러나
오는 팝송... 그 외딴 곳에조차 '문명'의 흔적이 보이지만 '서방'은 너무나 먼 곳에
위치해 있다. 그곳에서 서방 사람들은 자신들에 대해 관심없는 이방인들일 뿐이라고
되뇌이는 마을 사람들과, 서방으로 도망가면 아무도, 아무도, 아무도 그들을 찾을
수 없으리라고 자미라에게 말하는 키릴... 과연 이것은 마케도니아만의 전쟁일까?
'말'의 두 주인공은 키릴 신부와 자미라이다. 열 여섯 살 난 처녀 자미라는 '알바니
아'계로서, '마케도니아'계의 사내를 살해했다는 누명과 그로 인한 죽음의 위협으로
부터 탈출하여 수도원으로 도피한다. 키릴은 벌써 2년째 '무언의 고행'을 수행하고
있는 마케도니아계의 젊은 수사이다. 그들은 인간적인 애정과 남녀간의 사랑의 감정
으로 이끌리게 되고, 수도원을 에워싼 민병대원들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한다. 하지
만 그들의 앞길은 자미라의 할아버지에게 막히고, 그녀는 오빠의 손에 살해된다. 폭
력이 야기하는 형제살해의 대목은 맹목적인 폭력의 궁극적인 도달점이 어디인지를 웅
변적으로 보여준다. 나아가 수도원을 둘러싸고 민병대원들이 보여주는 야만적이며 행
위는 제동장치가 제거된 폭력이 어디까지 가능한지를 선명하게 각인한다.
Faces
런던에서 전쟁르포 사진을 편집하는 앤은 사이가 멀어진 남편과 종군 사진작가 알렉
산더 사이에서 애정의 갈등을 겪고 있다.흑백사진을 들여다 보는 앤. 사진 안의 끔찍
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그들을 동정이라도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단지 그들의
모습이 너무 비참해서 구역질이 난다는 것인지... 쓰러져 있는 자미라 옆에 키릴이
앉아있는 사진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앤. 한창 내전이 계속되고 있는 마케도니아는 역
시 런던에서는 너무나 먼 곳이고, 그곳은 그냥 짐 싸들고 하룻밤만에 떠날 수 있는
관광지나 휴양지가 아니다. 알렉산더의 청을 거절한 앤... 알렉산더가 고향인 마케도
니아로 돌아간 후, 앤은 남편 닉을 만나 이혼을 제의한다.
런던의 길거리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 게다가 평범한 레스토랑 안에서
의 어처구니없는 총격전. 한 중년의 사내가 두 사람이 만나고 있는 이 레스토랑에서
총을 난사해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닉도 얼굴에 총을 맞아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
도로 뭉그러져 죽는다.총에 맞아 피범벅인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며 "face. face...
your face..." 를 연발하는 앤. 지금까지 사진으로만 바라보던 사람들의 얼굴이 자신
의 눈 앞에도 현실로 나타났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는 것인지?
'얼굴들'에서의 두 주인공은 앤과 알렉스 (알렉산드르)이다. 영화는 공간적 배경을
순식간에 런던으로 옮기며, 잡지사 기자 앤과 사진작가 알렉스의 관계를 보여준다.
연인들로서 그들은 마케도니아 행을 주장하는 알렉스와 그것을 수용하기 어려운 앤
의 현재 상황을 제시하면서, 앤이 어떻게 그녀의 남편인 닉과의 저녁식사를 위하여
레스토랑에 가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이혼을 요구하는 앤과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닉 사이의 실랑이 장면으로 무수한 총탄세례가 퍼부어진다. 여기서의 무차별적인 폭
력은 아주 사소한 감정대립, 즉 갑자기 언짢아진 손님과 모욕받은 종업원의 대립에
서 야기되고 있다. 얼굴이 완전히 날아가버린 닉의 모습을 보면서 앤은 절망과 구토
상태에 이르른다.
Pictures
종군 사진작가 알렉산더는 마음의 안식처일 것 같은 고향 마케도니아로 돌아온다. 그
러나 이 곳은 유교연방이 해체된 후 예전에 사이좋게 지내던 이웃 사이가 세르비아계
와 이슬람계로 나누어져 전장터와 같은 적의가 흐른다. 알렉산더는 젊은 시절 사랑했
던 알바니아 여인 한나를 만나러 가지만, 곱지 않는 눈총을 받는다. 한나의 부탁으
로 그녀의 딸 지미라를 구하러 친척들에게 찾아 가지만 알렉산더는 총에 맞아 죽고
지미라는 도망친다.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간 알렉산더. 처음에는 어느 곳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것 같
은 그. 마케도니아에도, 런던에도... "저 사진기는 독일제래..." 하며 웅성거리는 마
케도니아의 아이들. 마케도니아인은 그들이 서방에서는 '사진'의 형태로만 존재한다
는 것을 알고 있고 런던에서는 마케도니아는 단지 '사진'으로만 존재할 뿐이지만,
이 '사진'이 담고 있는 진실성은 과연 얼마나 될까? 우리는 진실을 알기 위해서
는 '사진'을 찢고 직접 거기에 들어가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랬을 때 아마도
우리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있는 자신들을 발견할른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에서처
럼...
'사진들'에서의 두 주인공은 알렉스와 하나이다. 어릴 때부터 오랜 친구인 그들은
16년째 서로 만나보지 못한 상태다. 그들의 사랑은 지속되지 못했으며, 하나는 미망
인으로, 알렉스는 이혼한 처지로 서로 대면한다. 그런데 그들 사이의 건널 수 없는
세월과 상흔의 심연은 이미 인종과 종교문제로 깊어질대로 깊어진 상태였다. 한밤에
알렉스를 찾은 하나는 자미라가 그들 사이의 사랑의 결과임을 알리고, 그녀의 구출
을 부탁한다. 자미라의 구출은 사촌에 의한 알렉스의 살해로 연결되고, 자미라는 질
주에 질주를 거듭하면서 키릴이 거처하고 있는 수도원으로 몸을 숨기게 된다.
이 영화는 마케도니아 출신의 감독과 크로아티아 출신의 배우가 만든 영화로 내전
의 아픔을 가장 가까이 겪었던 당사자들이 만들었다.
쫓기는 알바니아 소녀를 숨겨준 마케도니아 그리스 정교회의 수도사, 매일 맞닥뜨리
는 전쟁 사진을 보며 공포에 적어있는 앤, 고향 마케도니아로 돌아와 전쟁의 아픔을
피부로 겪게 되는 종군 사진작가 알렉산더.
이 영화는 이들을 통해 전쟁이 인간에게 미치는 정신적 상처를 아름다운 영상과 특
이한 구성으로 그려냈다.
<비포 더 레인>은 마케도니아공화국의 영화다. 아마도 마케도니아는 이 영화 한편으
로 대외적으로 유명하게 되었을 것이다. 60년대 지진으로 피해를 입고 재건한 스코피
에 skopje가 이 나라의 수도다. 밀코 만체브스키가 94년 제작한 장편극영화로서 알바
니아와의 접경지대의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자행되는 불안한 일상과 우연(그러나 영
화가 진행됨에 따라 우연은 필연으로 이미 정해져 있음을 알게된다.)과도 같은 전쟁
의 공포에 대한 묘사가 세 부분으로 나뉘어 구성되어있다.
각 부분의 제목은 Words, Faces, Pictures이다. 이교도 청년과의 연애가 들통나자 도
망친 알바니아처녀와 그리이스 정교도의 젊은 수도사의 러브 스토리, 두 번째 이야기
에서는 마케도니아 출신의 보도사진 기자와 잡지 편집 일을 하는 영국 여인의 사랑
과 이별을 다룬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는 힘에 끌려 고향에 돌아온 사진기자의 운명
적인 여정과 비극적 죽음을 다룬 세 번째 에피소드는 평화스럽던 고향마을에서 알렉
산더는 살해되고 그의 도움으로 도망치던 알바니아처녀의 죽음으로 끝난다.
그것은 뫼비우스의 띠와도 같다. 사방을 연결하여 찍은 풍경사진을 이은 것처럼 시작
과 끝이 모호하다. 세 부분은 마치 소나타형식처럼 반복과 재현으로 연결되기도 하지
만 애매하게 어긋나기도 한다.(이를테면 두 번째 에피소드에 나타나는 사진의 촬영시
점 같은 것. 의도적일까?)
<비포 더 레인>은 닫혀진 시간과 공간의 이야기이다. 아무 인연도 없어 보이는 세개
의 이야기는 어느 순간에 그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러나 이야기는 거꾸로 흐르거
나 옆길로 새기 때문에 줄거리를 따라잡기 쉬운 영화는 아니다. 아마도 감독은 그렇
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을 바라고 있지 않을것이다. 오히려 마케도니아의 언덕에
서건 런던의 레스토랑에서건 일어나는 오늘의 알 수 없는 폭력과 그 의미없음을 이야
기하고 싶은것이리라.
마지막 장면에서 늙은 수도승은 키릴에게 '지혜'를 이야기한다.
"시간은 지나가지. 원은 항상 둥근것이 아니야"
(두번째 에피소드에 나오는 런던 거리의 낙서에는 "'시간은 절대 죽지 않는다. 원은
둥글지 않다."라고 쓰여있다.)
영화는 객관적으로 봤을 때, Faces - Pictures - Words 의 시간순서를 하고 있는 것
으로 생각된다. 만약 이 시간 순서대로 영화를 편집했다면 이것은 그냥 또 다른 하나
의 슬픈 비극적 영화로 남았을 것이지만 감독이 원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던 것 같
다. 일부러 영화를 Words - Faces - Pictures 의 순으로 배열해서 순환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게 만들었고, 그 효과를 더욱 극대화하기 위해 각각 파트 안에 긴밀히 연관
되는 씬들을 넣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Faces에서 자미라와 키릴의 사진이 나오고 키릴의 전화가 걸려온 것이라든
지, Words에서 알렉산더의 장례식이 나오고 앤이 거기 참석한 모습이 비친다든지 하
는 식으로 말이다. 이런 씬들은 과연 관객들의 시간관념을 흐리고 영화를 끊임없이
순환되는 고리로 받아들이게 하는 데 주효했다.
그럼 과연 감독의 의도는 무엇이었나? 그것은 '관객들로 하여금 충격받고 고통받게
하려는 것'이었다. 순환되는 고리. 다음에 일어날 일을 뻔히 알고 있다고 관객들이
믿게 된다면, 그리고 그것이 관객들이 순전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일어나지 말았으면
하고 생각하는 슬픈 이야기라면, 그것만큼 고통스럽고 답답한 것이 또 어디 있겠는
가? 그래서 관객들이 그 답답함을 지고 극장을 떠나 자기 방의 한 구석에서 아까 자
기가 본 영화를 떠올리며 그 고리를 어떻게 하면 끊을 수 있을지를 안타깝게 생각하
게 된다면, 감독의 의도가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야기의 결말은 우리가 짐작하는 그대로이다. 증오와 총질의 악순환이 고리를 이루
며 계속된다.
<비포 더 레인>은 만체프스키가 세밀한 부분까지 대단한 주의를 기울여 만든 하나의
스케치와도 같은 작품이다. 이야기마다 사랑을 구하려다 좌절되고, 꿈이 되풀이되면
서 주요인물들은 자꾸만 속이 울렁거림을 느낀다. 각 부분의 두드러진 날씨변화, 그
리고 위협과 희망의 가능성을 반반씩 지닌 비에 대한 묘사가 있다. <비포 더 레인>에
서는 어떤 형태로든 「세가지 먹구름」이 모여들어 천년의 하늘을 가로지른다. 그리
하여 비가 쏟아질 때에도 그것이 풀려난 것인지, 유예된 것인지 알 수 없다. 발칸반
도 국가들 사이에서 일어난 인종간의 증오와 그 영향에 관한 이 힘있는 우화는 평화
의 약속은 지키기 어렵지만 폭력의 약속은 지켜진다는 인류의 비극을 시적인 묘사를
통해 비판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재미있는 형식적인 면은 바로 시간입니다. 세 이야기의 시간 구조
는 서로 이상하게 얽혀있습니다. 재배치하면 단선적인 구조가 완성되는 [펄프 픽션]
과는 달리 이 영화의 시간은 과거와 미래가 얽혀서 이상한 꼬임을 만들어냅니다. 얼
핏 보기에는 2-3-1의 구조지만,'2. 얼굴들'의 에피소드에서 '1. 말들'의 에피소드의
여파(자밀라와 키릴의 사진,그리고 아마도 키릴이 건 듯한 전화)가 보여지므로 꼭 그
렇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저 무성의하게 뒤섞인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
는 하나의 법칙이 있습니다. 각 에피소드는 앞 에피소드를 과거로 해서 밟고 올라갑
니다. 1의 경우는 3을 과거로 삼지요. 이런 식으로 해서 끊임없이 다람쥐 쳇바퀴처
럼 돌아갑니다.
니체의 무한회귀를 연상시키지 않습니까? 확실히 만체프스키는 그와 같은 면을 염두
에 두고 있습니다. 영화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살육과 학살의 역사를 숙명처럼 묘사하
는 데에 이러한 장치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시간이 쳇바퀴처럼 끊임없이 돌기만 하지는 않습니다. 영화는 나름
대로 비상구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알렉산더의 선택은 다소 개인적이고 관객
들에게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하게 영화의 순환을 끊어놓습니
다. 이 영화는 직선적인 구조의 영화입니다. 사건의 순서만을 쫓아가지 않고 그 극적
인 논리를 따라가면 그 점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제목까지도 그걸 암시하고 있지요.
이 영화는 '비오기 전'의 이야기입니다. 영화가 시작할 때와 끝의 상황은 분명히 달
라져 있습니다.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형식이 너무나 재미있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관객은 영화 속에서 일어나는 살육과 증오의 드라마를 소홀히 하고 형식
에 더 집착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영화의 내용이 필요 이상으로 가벼워지게 됩니
다.
개인적 의견으로는 1부가 가장 좋았고, 2부는 의도야 어떻게 되었든 전체 내용과 약
간 떨어져 보였으며, 3부는 조금 산만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지만 풍경화를 보듯
멀리 떨어져서 본다면 사실 큰 무리는 없습니다. 형식에 주제가 묻힐 수도 있다고 앞
에서 썼지만, 각 에피소드들은 나름대로 효율적으로 관객들의 감정을 자극합니다. 관
객이 지독한 지적 스노브가 아니라면 이 영화에 대해 철저하게 냉소적이지는 않을 겁
니다.
아나스타샤의 음악은 이 영화의 가장 뛰어난 부분 중 하나입니다. 배우들도 튀지 않
고 적절하게 자기 위치를 소화해냈다고 봅니다. <비 오기 전에>는 3부작의 형식을 취
하고 있다: '말' (Words; 제1부), '얼굴들' (Faces; 제2부), '사진들' (Pictures; 제
3부). 각각의 부분들은 독자적인 형식과 내용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거기서 진행
되는 일련의 사건들은 일관된 줄거리와 주제의식을 전달한다. 그런데 이들은 독자성
을 소유한 자기완결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구도로 본다면, 그
것들은 하나의 주제로 환원되고 있음이 이 영화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감독은 각
기 다른 이야기들을 병렬적으로 배치해 놓음으로써 관객들의 지적이며 정서적인 호기
심을 불러 일으키면서, 동시에 어떻게 저것들을 이해해야 하는가의 수수께끼도 제시
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본다면 영화의 서사는 하나의 원환구조로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의 수월한 조합도 가능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떤가? 여
기에 관심의 촛점을 맞추게 되면, 영화 <비포 더 레인>에 대한 전면적인 이해와 풍요
로운 감상은 이미 불가능해지고 만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에 속하는, 다시 말해 시간과 공간의 자유로운 해체와 해석의 토대 위에서 만들
어졌기 때문이다. 3부작은 나름의 시간과 공간을 소유한 채, 그들에게 고유한 흐름
과 인과성을 내재하고 있으며, 따라서 장면들의 시간적 조합이나, 내적인 상호연관
의 추적은 불요불급한 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 포 더 레인>은 우리에게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였는가? 그것은 바로 인
류의 역사를 관통해 온 저 장구한 세월 동안의 '폭력', 그것도 그 끝을 알지 못하
는, 무한대로 발산하면서 무의미성으로 충만된 폭력의 실체는 무엇이며, 그것으로부
터 우리가 해방될 수 있는 출구는 무엇인가를 모색하는 과정으로 보여진다. 영화에
서 작가는 발칸반도 이외의 장소, 즉 베트남과 베이루트에서의 폭력까지도 언급한
다. 따라서 그는 전지구적인 폭력의 현재성을 직접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단 하나의 해결책이 있을 따름이다. 그것이 이름하여 '사랑'이다. 키릴 신
부의 파계와 그에게로 이끌리는 자미라. 바로 이것이 그들의 불가피한 죽음의 원인이
다. 영화작가는 이 장면에서 그들 죽음의 본원적인 의미를 관객에게 묻고 있으며, 따
라서 그는 폭력의 무의미성과 맹목성에 대하여 사유하고 있는 것이다. 제1부에서 알
렉스의 장례식에 느닷없이 모습을 드러낸 앤의 "오, 신이여!"의 독백장면, 제3부에
서 하나와 알렉스의 사랑과 자미라의 구출 등은 모두 이런 사랑에 기초하여 성립되
고 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이 영화의 강점과 딜레마가 자리하고 있다. 현재의 시간과 공간
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제한적이며 무목적적인 살륙을 서정적으로 풀어내 한 편의 수
채화와도 같은 잔잔한 영화로 승화시킨 영화작가의 뛰어난 능력에 대한 예찬이 한 곳
에 존재한다. 다른 한 편으로는 영화작가가 조국 보스니아의 현실을 방관자의 입장으
로 바라보고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점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 있다. 이 양자 사
이 그 어딘가에 우리가 만나고자 하는 영화의 핵심이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
다.
문제는 결국 대자적이거나 즉자적인, 그러므로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이거나, 즉흥적이
며 작위적인 결론에 도달하는 것을 유보하고 양자의 면밀한 대화와 토론의 과정이 요
구된다는 사실에 있다. 그리고 이 점에서 '변증법적인 대화'의 유의미성이 확인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에서 감독은 그것이 사랑이든 폭력이든, 그
어느 하나의 지속적이며 일방적인 지배가 인류사에서 관철되지 않았다는 명징한 사실
을 확인한다. 그리하여 그는 고전적인 명제, 즉 사랑과 폭력 사이의 긴장과 이완의
과정과 그것이 야기하는 결과만이 우리의 현재와 과거뿐 아니라, 미래까지도 담보할
수 있음을 담담하되 명확하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