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카톡으로 나에게 늙지 말라고 한다 !
필자가 나이 많으니까 자연히 “늙음”에 대하여 이야기를 자주하게 된다.
“늙은이” “노인(老人” “할아버지”등 중에서 어느 명칭이 나을까
우리말 “늙은이”나 “노인(老人)”이라는 호칭은 우리말과 한자(漢字)말의
차이뿐이고 다 같은 “늙은 사람”이라는 표현인데 어쩐지
“늙은이”라는 말은 “막말” 호칭 같고 무시당하는 느낌이 든다.
“늙은이” “늙은게” “늙어가지고” “늙었으면”등등은
기분 나뿐 느낌을 준다.
우리말 “늙은이”이나 한자말 “노인(老人)”은 우리글과 한자(漢字)글의
차이일 뿐인데, 그런데 “늙은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쩐지 무시당하고
후레자식이 하는 “막말” 호칭같이 들린다.
왜 그럴까!
필자 생각으로는 우리 한민족은 한반도의 삼국시대부터 대륙국가
중국의 영향 아래서 살아온 민족이다.
우리 민족 역사에는 중국의 문화가 몸에 깊게 배어 있다.
21세기 지금도 우리글 “한글”이 있음에도 여전히 한자어(漢字語)를
사용하고 있다.
사대주의적(事大主義的) 언어라고 단언 할 수는 없지만 수천 수백 년
동안 중국문자 한자(漢字)로 우리의 언어 감정을 표현해 온 것은 사실이다.
필자만 해도 조선 역사에서 최고의 학자인
퇴계(退溪) 이황(李滉)선생의 “성학십도(聖學十圖)”는 잘 보지 않고
공자(孔子)의 논어(論語)를 쉽게 펼친다.
퇴계(退溪)의 “성학십도(聖學十圖)” 그림이나
율곡(栗谷)의 “고산구곡도(高山九曲圖)” 그림은 논어(論語) 못지않게
우리의 삶에 길잡이가 된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선생의 성학(聖學)의 요체(要諦)는
사람으로 태어나 성인(聖人)이 되기 위한 학문이요
다른 하나는 어질고 덕(德)이 뛰어난 임금(聖王)을 지향하는 제왕(帝王)의
학문이다.
선조(宣祖)는 성학십도(聖學十圖)를 병풍으로 만들어 머리맡에 두고
퇴계 선생의 가르침을 따랐다고 한다.
성학십도(聖學十圖)의 핵심은 제9장 “경재잠(敬齋箴)”이다.
선비 정신의 핵심은 존중과 배려에 있다는 내용이다.
나와 타인 자연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강조하고 있다.
넓은 의미에서 논어(論語)와 성학십도(聖學十圖)는 인간의 근본을
“인(仁)”에 두고 있다.
이야기가 잠깐 논어(論語)와 성학십도(聖學十圖)를 비교하였지만
퇴계선생도 논어(論語)와 같이 인성(人性)을 최우선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늙어가는 슬픈 사람에게 호칭하는
“늙은이” “노인(老人” “할아버지”는 인생에서 가장
죄(罪)가 많이 쌓인 사람 아닐까
그 이유로 필자는 기독교 신약성경 요한복음8장 2절에서 9절까지의
내용을 인용(引用)하여 아래에 기록한다.
▶요한복음 8장 간음(姦淫)한 여인(女人)의 내용이다.
2절-예수께서 아침에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사람들이 다 나오는지라
3절-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姦淫)하다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절-예수에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절-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쳐 죽이라 하였는데
예수 당신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절-바리새인들이 여자를 고발할 조건을 얻기 위해 예수를 끌어들여
시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무 대답을 안 하시고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을 쓰시니(무엇을 쓰셨는지 아직 기록이 없다.)
7절-바리새인들이 묻기를 계속하는지라 예수께서 일어나 말하기를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이 여자를 치라” 하시고
8절-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을 쓰시니
9절-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늙은이)이”가 먼저 떠나고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간음한 여자만 남았더라
※성경에 “어른”이라 되어 있는 것을 필자가 “늙은이”라 한 것은 여러 가지
성경 자료에 의한 것이다
이 성경(聖經) 구절에서 주목하는 부분은
“예수의 말을 듣고 노인들이 먼저 떠났다”는 끝 구절이다.
문예 부흥기의 이탈리아 화가 로렌초 로토(Lorenzo Lotto)가 그린
성화(聖畵) “간음한 여인”을 보면 그 자리에는 모두 열여섯 명이
서 있는데 여성은 간음한 그 여인 하나뿐이다.
여기서 “왜 늙은이들이 먼저 떠났을까”라는 질문을 하여본다.
추측컨대 인생은 산만큼 죄를 짓는다고 한다.
그래서 마음에 찔리는 죄책감이 커서 먼저 떠났을 것이다.
그러니 나이 먹은 것을 자랑할 것도 아니고 행세할 일도 아니다.
인생에서 연륜(年輪)과 그가 지은 죄(罪)의 양은 정비례(正比例)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일의 사회과학자 막스 베버(Max Weber)는 그가 쓴 책
“직업으로서의 정치”의 끝부분에서
The devils were old men.
“악마는 늙은이들이었다”라고 적어 넣었다.
우리 “늙은이”들은 이 나이가 되도록 마치
“곡식의 제비”처럼 죄한번 짖지 않고 어른답게 살아왔을까
아니면 크고 작은 죄를 얼마나 지었을까.
정말 죽음이 얼마 멀지 않은 나이 많은 우리들은
“늙은이” “늙은게” “늙어가지고” “늙었으면”하는 소리를
듣기 싫어할 인생을 살았는가!
친구가 필자에게 “늙지 말라”고 한말은
앞으로 남은 인생리라도 죄를 짓지 말라는 충고 아닐까
환갑 진갑이 청년이라는 소리를 듣는 장수(長壽) 시대에
“곱게 늙은 할아버지”라는 말을 참 듣기 어렵다.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