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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종서 (金宗瑞 1390∼1453 (고려 공앙왕 2∼조선 단종 1))
조선 초기 문신. 자는 국경(國卿). 호는 절재(節齋). 본관은 순천(順天). 시호는 충익(忠翼).
1405년(태종 5) 문과에 급제한 후 사간원우정언(司諫院右正言)·지평(持平)·집의(執義) 등을 거쳐 1433년(세종 15)에는 함길도(咸吉道)관찰사로서 6진(六鎭)을 설치, 조선의 국경선을 두만강으로 확정시켰다. 이듬해 함길도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帝制使)를 겸직하면서 야인(野人)들의 정세를 탐지하여 보고하고 그 방비책을 건의하였다.
1440년 형조판서·예조판서를 지내고, 1446년 우참찬(右參贊)에 올랐다. 1449년에는 정도전(鄭道傳)이 편찬한 《고려사(高麗史)》가 공정하지 못하여 왕명으로 개찬(改撰)하게 되자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로 총책임을 맡아 1451년에 간행하였다. 그 뒤 평안도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를 거쳐 좌찬성(左贊成)·우의정에 올랐으며, 1452년(문종 2) 《세종실록》 편찬때 총재관(摠裁官)이 되었고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편찬을 감수하여 간행하였다.
같은 해 단종이 12세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좌의정으로서 황보인(皇甫仁)·정분 등과 함께 어린 왕을 보필하였다. 대호(大虎)라는 별호까지 붙은 지용(智勇)을 겸비한 명신(名臣)으로서, 왕위를 노리고 있던 수양대군(首陽大君)에 의해 1453년 두 아들과 함께 집에서 격살(擊殺)된 뒤, 대역모반죄(大逆謀叛罪)라는 누명으로 계유정난(癸酉靖難)의 첫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1746년(영조 22)에 복관(復官)되었다. 시조 2수가 진한다. 저서에 《제승방략》이 있다.
2) 이괄 (李适 1587∼1624(선조 20∼인조 2))
조선 중기 무신·반란자. 자는 백규(白圭). 본관은 고성(固城).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형조좌랑·태안군수를 지냈으며, 1622년(광해군 14)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하기 직전 인조반정에 가담, 이듬해 거사가 진행되었을 때 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포도대장에 이어 평안병사 겸 부원수가 되어 영변(寧邊)에 출진, 성책을 쌓고 군사훈련에 힘써 정사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1624년 아들 전이 한명련(韓明璉)·정충신(鄭忠信) 등과 공모하여 반역을 꾀한다는 고변을 받자 조정에서 사실 여부를 조사할 목적으로 의금부도사와 선전관이 영변에 파견되었는데, 이들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군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진격, 인조가 공주(公州)로 피난 가고 한때 한성(漢城)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곧 관군에게 대패하여 도망가다가 부하장수 기익헌(奇益獻)·이수백(李守白) 등에게 살해되었다.
- 이괄의 난
1624년(인조 2) 평안병사 겸 부원수 이괄(李适)의 주동으로 일어난 반란. 이괄은 인조반정때 공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2등공신밖에 되지못한 데다 외지인 영변(寧邊)으로 부임하게 되고, 도원수 장만(張晩)의 휘하에 있게 되자 불만이 많았다. 이때 그의 아들 전이 한명련(韓明漣)·정충신(鄭忠信)·기자헌(奇自獻)·현집(玄楫)·이시언(李時言) 등과 반란을 꾀한다는 무고가 있어, 중앙에서 사실 여부의 조사를 위해 의금부도사·선전관을 파견하자 이들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1월 24일 모반혐의로 압송되던 구성부사 한명련과 항왜병(降倭兵)을 포함한 군사 1만여 명을 이끌고 영변을 출발, 개천(价川)·순천(順川)·자산(慈山)을 점령했다. 이어 중화(中和)를 점령, 황주(黃州)에서 장만 휘하의 관군과 충돌하여 반란군이 승리했다. 벽제(碧蹄;高陽)에 이르렀을 때 인조가 공주(公州)로 피난하여 한때 한성(漢城)을 점령했다. 2월 11일 선조의 아들 흥안군(興安君) 제를 왕으로 추대하고 행정체제를 정비했으나, 장만(張晩)의 반격으로 안령(鞍嶺;지금의 무악재)에서 대패하여 이괄·한명련 등과 그 패잔병은 수구문(水口門;光熙門)을 나와 광주(廣州)로 달아났다. 관군의 추격을 받게 되자 부하장수 기익헌(奇益獻)·이수백(李守白) 등은 이천(利川)에서 이괄·한명련 등 9명의 목을 베어 관가에 항복하니 잔당은 흩어지고 난은 진압되었다. 22일 인조가 환도했으며, 장만 등 32명이 진무공신(振武功臣)으로 포상되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국내 반란으로 왕이 서울을 떠난 사태는 처음이어서 집권층에 큰 충격을 주었고 민심의 동요가 컸다. 이런 불안한 정세는 후금(後金)에 알려져 뒤의 정묘호란의 한 원인이되는 등 국내외에 많은 영향을 끼졌다.
3) 단종 4권, 즉위년(1452 임신 / 명 경태(景泰) 3년) 12월 13일(신축) 2번째기사
고려의 공신·충신·명장 등을 왕씨의 제사와 함께 제사하도록 하다
의정부가 예조의 정문(呈文)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고려 왕조(高麗王朝) 의 태사 개국 무열공(太師開國武烈公) 배현경(裴玄慶) · 충렬공(忠烈公) 홍유(洪儒) · 무공공(武恭公) 복지겸(卜智謙) · 장절공(莊節公) 신숭겸(申崇謙) 등 4인은 모두 〈 고려 〉 태조(太祖) 를 추태하여 삼한(三韓)을 통일하고, 1등 공신(一等功臣)이 되었습니다. 태사 개국 충절공(太師開國忠節公) 유금필(庾黔弼) 은 북계(北界)에 북적(北狄)819) 이 침입하였을 때 태조 가 유금필 을 보내어 진압하니 〈오랑캐의〉 여러 부족이 서로 좇아서 내부(來附)하여 북쪽이 안정되었고, 태조 가 견휜(甄萱) 과 여러 번 싸워 이기고 마침내 백제 를 멸망시킨 것은 모두 유금필 의 공이어서 시종 〈태조의〉 총애(寵愛)를 여러 장수들보다 깊이 받았고, 태조 와 함께 배향(配享)되었습니다. 태사 내사령 장위공(太師內史令章威公) 서희(徐熙) 는 거란(契丹) 의 소손녕(蕭遜寧) 이 고구려 의 옛 땅을 수복한다고 성언(聲言)하며 침입하였을 때 성종(成宗) 820) 이 서경(西京)821) 이북의 땅을 떼어서 그들에게 주려고 하였고, 또 서경 의 창고(倉庫)에 있는 곡식을 풀어 대동강(大同江) 에 던져 버리고자 하였으나, 서희 가 불가함을 여러 차례 말하고는 자청하여 소손녕 의 진영(陣營)에 가서 거듭 논설하여 힐난(詰難)하니, 그 말하는 기품(氣品)이 강개(慷慨)하였으므로 소손녕 이 강제로 하지 못할 것을 알고 파병(罷兵)하여 돌아갔으며, 또 〈서희는〉 군사를 이끌고 가서 여진(女眞) 을 쫓아내고 장흥(長興) · 귀화(歸化) 등지에 성을 쌓았으므로 성종 과 함께 배향(配享)되었습니다. 태사 문하 시중 인헌공(太師門下侍中仁憲公) 강감찬(姜邯贊) 은 거란주(契丹主) 가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서경 을 공격하여 아군(我軍)의 패배 소식이 이르자 여러 신하들이 모두 항복할 것을 의논하였으나, 그는 현종(顯宗) 822) 에게 남쪽으로 피난(避亂)할 것을 권하였고, 뒤에 거란 군사 10만 명이 침입해 와서 장차 서울을 핍박(逼迫)하려 할 때, 강감찬 은 서북면 도통사(西北面都統使)가 되어 서울에 원병(援兵)을 보내었고, 또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크게 싸워 〈거란군을〉 격파하니, 살아서 돌아간 자가 겨우 수천 명이었으므로 현종 과 함께 배향되었습니다. 수태보 문하 시중 문숙공(守太保門下侍中文肅公) 윤관(尹瓘) 은 여진(女眞) 이 치열하게 동계(東界)에 난입(闌入)823) 하였을 때 예종(睿宗) 824) 이 윤관 에게 명하여 그들을 쳐서 물리치고 구성(九城)825) 을 쌓았으며 공험진(公嶮鎭) 에 비석(碑石)을 세워 경계로 삼았으므로 예종 과 함께 배향되었습니다. 문하 시중 문열공(門下侍中文烈公) 김부식(金富軾) 은 묘청(妙淸) 등이 서경 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인종(仁宗) 826) 이 김부식 에게 명하여 이를 토벌 평정하였습니다. 김부식 은 문장(文章)으로써 이름을 세상에 떨쳤으며 송(宋)나라 사신 서긍(徐兢) 이 김부식 을 보고 그 사람됨을 좋아하여 김부식 의 가세(家世)와 도형(圖形)을 가지고 돌아가서 황제(皇帝)에게 아뢰어 판목(板木)에 새기고 그 전기(傳記)를 널리 퍼뜨리니, 이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이 천하에 알려져서 인종 과 함께 배향되었습니다. 문하 평장사 문정공(門下平章事文正公) 조충(趙沖) 과 문하 시중 위열공(門下侍中威烈公) 김취려(金就礪) 는 거란 의 유종(遺種)인 김시(金始) · 김산(金山) 두 왕자(王子)가 군사를 이끌고 북쪽 지방에 난입하고, 강동(江東) 에 들어와 있었을 때 고종(高宗) 827) 이 조충 과 김취려 에게 명하여 이를 공격하였습니다. 이때 몽고 원수(蒙古元帥) 합진(哈眞) 과 동진 원수(東眞元帥) 완안자연(完顔子淵) 이 군사를 합하여 거란군을 토벌하여 우리를 구원한다고 성언하며 화성(和城) · 맹성(孟城) · 순성(順城) · 덕성(德城) 등 4성을 공파(攻破)하고 곧 바로 강동(江東) 으로 향하여 나아가니 중외(中外)가 놀라서 떨었습니다. 조충 등이 조정(朝廷)에 청하여 합진 · 완안자연 과 더불어 화약(和約)하고 강동 을 공파하여 항복시키고 드디어 합진 등과 더불어 동맹(同盟)하여 형제국(兄弟國)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두 사람이 모두 고종 과 함께 배향되었습니다. 첨의령 충렬공 (僉議令忠烈公) 김방경(金方慶) 은 임연(林衍) 이 원종(元宗) 828) 을 폐위시켰을 때, 세자(世子)가 몽고 에 있으면서 군사를 보내어 임연 을 토벌할 것을 청하니, 황제가 몽가독(蒙哥篤) 을 보내어 이를 토벌하게 하였습니다. 세자가 김방경 으로 하여금 같이 가게 하였는데, 김방경 은 몽고군이 만약 대동강 을 건너게 되면 반드시 전국이 놀래어 변란(變亂)이 일어날까 두려우니 성지(聖旨)를 받들어 서경 에 주둔(駐屯)하면서 성원(聲援) 만 하고 대동강 을 건너지 말 것을 말하였습니다만, 북계(北界)의 반민(叛民)인 최탄(崔坦) 등이 혼란한 기회를 타서 나라를 병탄(倂呑) 할 뜻이 있어서 몽가독(蒙哥篤) 에게 고발하여 말하기를, ‘본국이 장차 관군(官軍)829) 을 죽이려고 제주(濟州) 로 들어가고자 하니, 사냥나간다고 성언하고 대동강 을 건너 왕경(王京)830) 을 엄습하여 왕족을 사로잡고 옥백(玉帛)831) 을 모두 얻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니, 몽가독 이 장차 그대로 따르려 했으나, 김방경 이 조서(詔書)를 어기고 대동강 을 건너는 것이 불가함을 힘써 말하여 이를 중지시켰습니다. 임연 의 무리인 삼별초(三別抄)가 승화후(承化侯) 832) 를 왕으로 옹립하고 진도(珍島) 를 근거지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 원종(元宗) 이 김방경 에게 명하여 이를 토평(討平)하게 하였는데, 삼별초의 무리가 탐라(耽羅) 833) 로 도망해 들어가니 김방경 이 또 이를 토벌하여 평정하였습니다. 또 원나라 의 세종(世宗) 이 군사를 보내어 일본(日本) 을 다시 정벌하면서 고려 로 하여금 이를 주관케 하자 충렬왕(忠烈王) 834) 이 김방경 에게 모두 명하여, 원수(元帥)로 삼고 가서 정벌하게 하였습니다. 위득유(韋得儒) · 노진의(盧進義) 등이 김방경 이 모반하였다고 무고(誣告)하고, 홍다구(洪茶丘) 가 본국(本國)835) 에 불만이 있어서 김방경 으로 하여금 〈 원나라 에 대하여 모반하였음을〉 무복(誣服)하게 하여 화(禍)를 국가에 전가시키고자 철색(鐵索)836) 으로 그 목을 감고, 곧 이마에도 감으려 하자 왕이 차마 볼 수 없어서 김방경 에게 말하기를, ‘천자(天子)가 어질고 성스러워 장차 그 사정이 거짓임이 밝혀질 터인데, 어찌 스스로 고통을 계속되게 하는가?’ 하니, 김방경 은 ‘왕께서는 어찌 이러하십니까? 신이 어찌 감히 몸을 아껴 무복함으로서 사직(社稷)을 저버리겠습니까?’ 하고 끝내 굽히지 않으니, 이에 황제도 석방하고 불문에 부쳤습니다. 중서평장정사(中書平章政事) 안우(安祐) ·정당 문학(政堂文學) 김득배(金得培)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이방실(李芳實) 등은 홍건적(紅巾賊) 4만 명이 서경 을 함락했을 때 안우 · 김득배 · 이방실 이 분연히 이를 공격하여 크게 격파시키니, 적의 전사자(戰死者)가 서로 머리를 이었고 겨우 3백 명만이 압록강(鴨綠江) 을 건너 도주(逃走)하였으며, 뒷날 홍건적 20만 명이 개성 을 함락하였을 때는 안우 · 김득배 · 이방실 이 군사 20만 명을 거느리고 개성을 포위하여 크게 격파시켰는데, 10여만 명을 죽이고 나머지 무리는 강을 건너 도주하니, 그때 사람들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편안한 침식(寢食)을 하게 된 것은 세 원수(元帥)의 공이다.’ 하였습니다. 수문하시중 문충공(守門下侍中文忠公) 정몽주(鄭夢周) 는 공양왕(恭讓王) 837) 을 도와서 반정(反正)하고 중흥 공신(中興功臣)이 되어 드디어 시중(侍中)에 제배(除拜)되었으나, 끝내는 절의(節義) 때문에 죽었습니다. 처음에 명나라 가 비로소 일어났을 때 정몽주 는 공민왕(恭愍王) 838) 에게 힘써 청하여 가장 먼저 귀부(歸附)했으나, 공민왕 이 죽고 난 후 이인임(李仁任) 등이 다시 원나라 를 섬기고자 함에 정몽주 가 또 그 불가함을 극진히 진계(陳啓)하였습니다. 또 일본 에 사신으로 가서 왜구(倭寇) 를 금할 것을 청하고, 정몽주 가 교린(交隣)의 이해(利害)를 극진히 펼치니, 이에 그 주장(柱將)이 공경하고 복종하여 포로된 사람 수백 명을 돌려주고, 〈 왜구 가〉 세 섬[三島]을 침입하여 약탈하는 것을 금지시켰습니다. 고황제(高皇帝) 839) 가 세공(歲貢)840) 을 증가시켜 말(馬) 5천 필(匹), 금(金) 5백 근(斤), 은(銀) 5만 냥(兩), 포(布) 5만 필로 정하자, 정몽주 는 명나라 서울로 가서 증가된 세공을 제감(除減)할 것을 주청(奏請)하였고, 또 호복(胡服)841) 을 혁파하고 화제(華制)842) 를 계승할 것을 건의하였으며, 가묘(家廟)를 세우며 오부 학당(五部學堂)과 지방의 향교(鄕校)를 건립하고, 의창(義倉)을 세우고, 수참(水站)을 설치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각 왕대(王代)에 배향된 사람 중에서도 특별히 백성들에게 공로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청컨대 왕씨(王氏) 의 제사를 받들 때 함께 제사하도록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태백산사고본】 2책 4권 22장 B면【영인본】 6책 557면【분류】 *왕실(王室)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 *인물(人物)
[註 825]구성(九城) : 고려 16대 예종 2년(1107)에 윤관(尹瓘)이 17만 대군으로 여진족(女眞族)을 정벌하고 쌓은 아홉 개의 성, 곧 함주(咸州)·영주(英州)·웅주(雄州)·복주(福州)·길주(吉州)·공험진(公嶮鎭)·숭녕진(崇寧鎭)·진양진(晉陽鎭)·통태진(通泰鎭)을 말함. ☞
[註 832] 승화후(承化侯) : 고려 원종 때의 왕족. 이름은 온(溫). ☞
[註 834] 충렬왕(忠烈王) : 고려 25대 임금. ☞
[註 836]철색(鐵索) : 철사로 꼬아 만든 줄. ☞
[註 837] 공양왕(恭讓王) : 고려 34대 임금. ☞
[註 838] 공민왕(恭愍王) : 고려 31대 임금. ☞
[註 839] 고황제(高皇帝) : 명나라 태조(太祖). ☞
[註 841]호복(胡服) : 오랑캐의 복제(服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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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일단, 글이 안올라가는 이유를 찾았습니다. 인터넷 도구->인터넷 옵션에서 열어본 파일들을 모두 삭제하니 글일 올라가네요... 꾸준히 청소를 해줘야 되는듯... 인터넷 속도도 빨라지구요...
다음, 단종은 고려의 충신들에게 드리는 '제사'를 허락한 결정적인 '결점'이 있었네요. 함께 제사까지 지냈으니, 조선의 왕의 위치에서 '폐위'를 당할만 하였습니다... 김종서가 많이 관여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괄의 난'은 석연치 않은 점이 너무 많네요...
고려 중기와 조선 초까지 야인들 즉 북적들 때문에 골치를 겪는데 이 이유는 조선이 관할 하는 지역이 비옥하기 때문이며 동시에 시베리아의 기후 변화, 중앙아의 사막화와 연관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