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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글 코너 스크랩 수필 MBC FM 여성시대/현충원의 어머님
황종원(중앙대) 추천 0 조회 44 14.06.06 13:56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나는 해마다 현충원에 간다.

해다가 다녀온 일을 적는다.

하고 보면 그때가 이때요 이때가 저때다.

무덤의 벗들은 침묵하고 찾아 오는 벗들은 늙어간다.

반겨주시는 부모님께서 해마다 아뜩아뜩하시다.

자주 만나뵈야 대화가 길게 마련.

한 해에 한 번 만나 뵈니

안녕하세요.

잘 지내나.

그 말씀 그 대화다.

나는 몇 년 전 부터 MBC FM 여성 시대에 현충일 맞춰 글을 올린다.

당신과 아드님일에 대한 세상의 관심을 알려두리고자 한다.

그 관심이 늘 행복감을 드리는 것은 물론 아니리라.

하지만 가슴에 묻은 아들 친구가 아들을 생각하고 당신들을 생각하면서 기뻐 하실 모습을 뵙고 싶다.

이번 현충일을 맞이하여 나는 MBC FM에 글을 올린다.

 

 

 

방송이 나간다는 보장이 없다.

다만 현충일에 맞춰 방송 나갈 글을 찾는 작가의 눈이 내 글에 꽂히기를 바랬다.

언젠가는 방송이 나가기 전에 PD가 전화를 주던 때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 아무게 PD 입니다. 주신 글이 좋아서 방송이 몇일에 나갈 예정입니다. 혹시 다른 곳에 방송이 나간 적은 없는 글인지요."

근래에는 그런 예고가 없다.

아침 9시 넘었을 때 갑자기 느낌이 왔다.

내 글이 방송이 나가고 있다는 육감이다.

라디오를 틀었다.

대한항공기가 추락하여 가족 모두 불행을 당했다는 이 희령 대령에 대하여 나온다.

방송이 나간 지 여러 날이 지나면 방송 나간 CD가 집으로 온다.

그 CD는 아드님을 가슴에 묻은 어머님 것이다.

 

 

 

 

 

 

 

 

아내는 배위의 위치에 있고, 그들의 아들딸의 이름도 돌판에 새겨져 엄마 아빠 앞에 함께 있습니다. 그 해, 1983년. 화학 장교였던 그는 미국 군사학교에서 몇 년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던 9월 1일. 함께 미국 생활을 했던 가족 모두 KAL기 추락으로 떼죽음을 당하여 외로운 넋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정호승. 풍경달다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다녔던 아이들 귀현과 성준이 남매.

 

 

 

 

벌써 친구를 찾아 온지 20여년 그 중 10년 동안 이 자리에서 찍은 사진과

해마다 뵙던  어머님과 아버님과 오고간 일들을 적은 메모를 인쇄하여 사진첩을 만들었습니다.

 

"고마워."

어머님은 아들친구의 말 한마디에도 목소리가 떨리십니다. 눈시울이 젖습니다.
 

 

 

 

 

 

 


6월이 시작됩니다. 전화 한 통이 불쑥 걸려옵니다. 낯선 번호에서 낯선 여인이 안부를 묻습니다.

" 오랜만이세요. 저 이희령 오빠 동생 누구에요."

낯선 여인에서 아는 여인으로 단박 바뀝니다.

" 오빠, 고맙습니다. 전 미국에 있어요. 오빠께서 해다마 희령 오빠와 가족을 보러 현충원에 와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오빠께서 놓고 가신 시가 적인 종이를 여기 제 동생이 마침 묘지에 갔다가 받아 보았어요. 그 편지를 동생이 액자를 만들어서

집에다 걸어 놓았답니다. "

몇 년 전 현충원에 갔을 때 짧은 시구 하나를 친구 묘지에 놓고 간 일이 있지요. 묘지에 놓고 간 편지가 하늘로 전해지라는 소박한 소년의 마음으로 놓고 갔더니

그 편지에 대한 화답이 온 것입니다.

하늘로 보낸 편지에 하늘에서 전화가 온 것입니다.

" 오빠, 저는 다시 미국으로 갑니다. 언제 미국 저 있는 곳에 오시면 제가 알려 드리는 전화번호로 연락해주세요. "

이런 대화가 오고 갑니다.

다시 현충일이 다가 옵니다.

저는 다시 친구를 보러 갑니다.

해마다 그랬듯이

해다마 늙어 가도 청춘의 얼굴을 그리워하면서.


이렇게 찾아가면 이렇게 만납니다.

현충일 아침에....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주소를 둔 친구를 찾아 나섭니다.


그들은 여름 더위 겨울 추위를 맨몸으로 겪으면서 또 한 해를 보냈겠군요.


그들에게는 고독한 일상이 하루하루 친구였다가 현충일이면 친구 몇 몇이 계절처럼 그들을 찾아옵니다.


두 사람은 학군장교로 1970 년에 소위로 함께 임관했던 대학 친구이며, 전우입니다.


동작동 국립묘지 29묘역 묘비번호 3240 번은 이 희령 대령의 주소입니다. 현충원에서 합장묘에 배위 누구하며 군인 남편과 부인 이름이 나란한 묘비를 드물게 볼 수 있답니다.

 


아내는 배위의 위치에 있고, 그들의 아들딸의 이름도 돌판에 새겨져 엄마 아빠 앞에 함께 있습니다. 그 해, 1983년. 화학 장교였던 그는 미국 군사학교에서 몇 년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던 9월 1일. 함께 미국 생활을 했던 가족 모두 KAL기 추락으로 떼죽음을 당하여 외로운 넋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다녔던 아이들 귀현과 성준이 남매.


한여름 개울가 유년의 세월 속에서 우리 아이들과도 함께 놀면서 아빠와 부르던 노래가 있었으니.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채송화도 봉선화도 한창입니다.


아빠가 매어놓은 ㅅ ㅐ끼줄 따라


나팔꽃도 어울리게 피었습니다.

 

 

 


한참 뒤에 도착한 이대령 가족 이삿짐 속옷에 묻은 몇 가닥 머리카락이 와서야 비로소 죽은 자의 대접을 받아 영혼과 함께 묻혔습니다.


어머니는 그때서야 묘지를 지키며 목 놓으셨습니다.


현충일 마다 어머니는 아들을 기다리듯 아들의 친구들을 기다렸습니다.


많은 아들들이 발자국 소리 뚜벅. 뚜벅. 뚜벅. 묘지가 등대인양, 자신들은 바다인양 나타났습니다.

 


한 해가 지나고 두 해를 넘겼나요. 어머니 역시 봄날의 꽃 지듯 가셨습니다.


다시 세월 따라 현충일마다 묘지에서 형 친구들을 맞이하던 남동생은 암으로 떨어지는 꽃잎처럼 갔습니다.

 


가족이 떠나니 묘지 앞이 비었습니다. 세월 따라 친구들 걸음도 썰물처럼 빠져 나갔어도 저마다 마음만은 간절하겠지요.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자식의 친구들을 반갑게 맞이하던 일이 방금인 듯 하건만 어머니는 당신 자식을 가슴에 묻으셨으니 어머니, 여기 계십니까.


어머니의 모습이 보입니다.


우리가 묘지를 떠날 때 쏟아지는 햇볕에도 눈시울이 젖습니다.

 


어디 친구만 묻혔습니까. 친구와 함께 하였던 청춘이 묻혀있고, 친구의 당당했던 기상이 안타깝기에 그러합니다.


이제 쓸쓸한 묘지의 모습도 또한 그렇습니다.


들고 간 꽃다발을 놓습니다. 그리고 한 줄 시를 종이를 놓고 절을 하고 잠깐 묵념을 합니다.


먼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 소리 들리며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정호승. 풍결 달다

 

작년 재작년에 뵙던 어르신, 작은 아버님이 아니 보입니다.

바로 앞 묘비는 학훈 13기의 부인입니다.

8시부터 와있었으나 이희령네는 다녀간 이들이 아니 계시다는 군요.

 

동작동 국립묘지의 끝자락 55구역 묘비번호2731에는 강종구 대위가 삽니다. 강대위는 1977년 6월 22일에 순직하였고 부모님께서 계십니다. 강대위는 총각으로 세상에 남긴 혈육 하나 없습니다. 해마다 강 대위 어머니께서는 아들을 기다리시듯 아들의 친구들을 기다리십니다.


동기생 두 명이 와 있습니다. 해마다 여기서 만나는 친구들입니다.


현충일에 묘지 찾기 20여 년에 두 분 부모님이 올해 따라 힘이 들어 보이십니다.

“ 아이고 또 와주었네. 고마워라“

반기시는 아버님을 내 품에 안았습니다.

반기시는 어머님을 내 가슴에 안았습니다. 어머님께서는 당뇨와 고혈압을 벗 삼으셨다는 아우의 귀띔입니다.

반기는 강대위의 누이를 품에 안았습니다.


강대위 어머님께서는 먹을 것을 챙겨내시며 우리가 달게 먹으면 자식이 먹는 듯 반가워하십니다.


부모님께서 묘지를 지켜주시는 날들이 영원할 리 없습니다.

 


해마다 강대위 묘지를 찾아갈 때마다 약해지신 부모님을 뵈면 늘 조심스럽고 세월이 허망합니다.


세월이 가면 가는 데로 자식 생각에 더 힘든 부모님들이 계신 곳에 이번 현충일에도 아들들은 다시 길 차비를 하고 가고자 합니다.


전우 대신 남은 아들들이 할 일은 그냥 뚜벅 뚜벅 부모님 앞에 서는 일입니다. 자식 보듯 해드리고, 자식이 살았으면 이토록 우리처럼 벌써 환갑 나이 노년을 보여드립니다.

나는 꽃 다발과 사진첩을 놓고 묵념을 합니다.

사진첩은 어머님을 위한 것입니다.

벌써 친구를 찾아 온지 20여년 그 중 10년 동안 이 자리에서 찍은 사진과

해마다 뵙던  어머님과 아버님과 오고간 일들을 적은 메모를 인쇄하여 사진첩을 만들었습니다.

"고마워."

어머님은 아들친구의 말 한마디에도 목소리가 떨리십니다. 눈시울이 젖습니다.
 

 


다른 해에는 어머님은 말씀 하십니다.

“ 에고. 흰머리 늘고 마음고생, 세상 고생 많은 가봐.”

하시던 말씀이 금년에는 없습니다. 당신의 몸이 힘이 드신 탓입니다.

'어머니!'

잡은 손힘이 올해는 많이 약해지셨습니다.


우리 친구 중 하나는 강대위 누이와 젊은 날 사랑 이야기가 있어서 해마다 만나면 그 때 이야기를 하면서 한바탕 웃었으나 올해는 그 이야기는 건너뜁니다.

어머님은 활짝 웃으시려고 현충일 1년을 기다리셨지요. 이제는 그 웃음도 별로 없으십니다. 저마다 칠순을 바라보는  아들들과 당신의 아들딸이 지난 한 해 지나간 이야기를 합니다. 

어머님은 님은 슬며시 자리를 비키십니다.

다른 해에는 우리가 자리를 떠날 때까지 곁에 계시던 어머니이십니다.

올해는 현충원 입구에서 아들 종구의 묘지까지 10여 차례 쉬면서 쉬엄쉬엄 오셨다 하십니다.

그러면서 내년에 다시 볼 일은 기약을 아니 하십니다.

종구네는 주섬주섬 짐을 쌉니다.

묘지를 찾는 종구의 친구들인 우리가 떠나면 올 사람이 없어서입니다.

나는 아버님을 안아드립니다. 어머니를 안아드립니다. 누이를 안습니다.

올해 따라 내년에 뵙기를 기약 못하시는 부모님은 슬픔처럼 무겁습니다.

그래도 어머님. 저희는 또 만날 기약을 하고 갑니다.

어머님. 저희는 어머님의 아들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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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4.06.07 13:19

    첫댓글 휴일이라 오늘 할일 대충 챙겨 출발하면서 습관적으로 라디오를 켜는순간, 귀에 익은 양희은의 목소리가 들리는데 편지 사연이
    이희령과 강종구......
    볼륨을 높이며 바짝 긴장해서 들어보니 위의 사연이라! 너무 반가워서 도착즉시 방길선 편집장께 전화번호 확인해서 황종원 친구에게 감사의 통화까지,
    오늘은 정말 뜻깊은 하루였습니다. 황종원 친구께 다시한번 감사를 드리면서......

  • 작성자 14.06.07 18:37

    반갑습니다. 우리는 늙어 가고 친구들은 영원한 친구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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