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도(古耳島)
전라남도 신안군 압해면에 있는 섬.
왕성이 있었던 사연이 담긴 섬이다. 면적 5.54km2, 해안선 길이 21.4km이며 인구는 138가구, 257명(2013년 기준)이다.
고이도 개요
면적 5.54km2, 해안선 길이 21.4km인 고이도에는 네 곳에 마을이 있다. 1973년 226호 1,436명(초등학생 318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으나 지금은 겨우 138가구, 257명(2013년 기준)이 살고 있다.
명칭: 일제강점기 말까지도 왕도라 부르다가 그 후 고이도로 개칭하였는데 그 배경으로 두 설이 전해진다. 하나는 고려 태조 왕건의 숙부인 왕망이 고려 왕조의 전복을 꾀하며 왕이라 자칭하고 살았던 곳이라 하여 옛 도시의 옛 고(古) 자를, 섬의 모양이 귀와 비슷하다 하여 귀 이(耳) 자를 써서 고이도라 하였다고 한다. 또 하나는 섬의 형태가 고양이 귀처럼 생겼다고 해서 고이도라 했다고도 전해 온다.
고이도 역사
왕성이 있었던 역사의 섬 고이도는 압해도 · 지도와 일직선상에 놓여 있으며, 무안반도가 건너다보인다. 고이도에 있는 왕산성의 축조 시기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고려 왕건과 관련된 기록과 전설이 전해 온다.
고이도는 바닷길의 요충지로 알려진 곳이다. 옛날에는 거대한 나주평야의 곡식들이 영산강을 거쳐 이 섬 앞을 지나 칠산 바다와 서해 바다를 거쳐서 한강으로 올라갔다. 목포와 거리가 가깝고 지리상 요충지이기 때문에 신라 말기 후백제의 견훤이 이 섬을 요새로 삼았다가 궁예의 장수로 있던 왕건의 침략을 받아 큰 전쟁이 났던 곳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성을 쌓은 사람은 지금부터 약 1100여 년 전, 고려를 창건한 태조 왕건의 작은아버지인 왕망이란 사람에 의해서이다. 왕망은 왕건을 위해 최선을 다한 자신의 공을 왕건이 무시한다고 생각해 추가 전복(顚覆)을 기도하게 된다. 그러나 거사가 있기도 전에 탄로가 나 도망쳐 온 곳이 바로 압해읍 고이도였다.
왕망은 이곳 고이도에 성을 쌓고 근거지로 삼았다. 언젠가는 고려왕실에 도전하기 위해 고이도 근해를 지나던 세곡선을 붙잡아 식량을 빼앗았으며 선원들을 자기 부하로 만들었으나 나중에 발각되어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왕망은 자기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으나 그가 살던 흔적은 이곳에 남아 있다.
성터는 1km 정도 남아 있으며 왕이 살았다는 집터도 있다. 고이도 큰 산을 왕산이라 부르고, 음력 정월 보름날이면 부정이 없는 사람을 선발해 이곳에서 제를 지냄으로써 풍년과 행운을 불러오고 병마를 막아낸다고 믿었다.
일제 말 우리나라 지도에 이 섬이 왕도라 적혀 있었다고 한다. 예전의 성터는 그대로 보존되어 신안군의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수달장군 능창 전설에 등장하는 섬이자 군사적인 요충지로 알려졌기 때문에 많은 기대를 가지고 고이도 답사에 나섰다. 하지만 평범하고 작은 섬마을이라 놀라움과 실망이 교차되었다. 그러나 막상 섬 안에 들어가서 고이도의 최고봉 왕산(높이 65.3m)에 올라 보니 필자의 예상이 빗나갔음을 알았다. 왕산 정상에서 바라다보이는 바닷길은 해로(海路)의 요충지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왕산성의 정상 유적지 근처에는 기와편과 도기편이 수도 없이 많이 널려 있었다. 전문가는 아니지만 이곳에 무엇인가 숨어 있는 것 같았고, 도대체 천 년 전에 이 작은 섬에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궁금했다.
장보고 대사와 연관이 깊은 일본 스님 엔닌(圓仁)이 중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향길 기록에 고이도가 등장한다.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에 보면 '846년 9월 4일 밤 10시가 가까워질 무렵 고이도(古移島)에 이르러 정박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해역의 중요성 때문에 조선 왕조는 이 섬 건너 내륙부 연안에 다경(多慶)만호진을 설치했다. 이 섬은 한때 망운목장 속장터로 쓰이기도 했다.
1750년경에는 보성 선씨 선만권이 과거에 여러 번 낙방하고 실의에 빠져 방황하다가 섬에 들어와 정착한 바 있다고 한다.
고이도 근황
고이도는 신안군 압해읍에 속해 있지만 압해도와는 전혀 다른 생활권이다. 무안군 운남면 신월항까지는 700m로 뱃길로 5분 거리이기에 지척이라 거기를 중심으로 생활한다. 바로 이웃 섬 선도처럼 행정과 생활이 일치하지 않는 대표적인 섬이다. 그래서 고이도와 선도 주민들은 육지인 무안군에 편입되기를 바랐으나 늘 외면을 당했다고 불평을 한다. 이러한 민원으로 미운 털이 박혀 신안군으로부터 섬 발전에 대한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압해읍 고이도와 지도읍 선도 주민들은 신안군청이나 읍에 갈 때면 먼저 배를 타고 무안군 운남면 신월리로 건너간다. 거기서 다시 버스를 타고 3개의 면을 넘어 먼 길을 가야만 하는데도 관의 주도하에 행정적으로 경계를 만들어 놓아 주민들은 대단한 불편을 겪고 있다.
고이도는 건너편 육지인 신월리선착장과 가깝다. 하루에 12번 도선이 다닌다. 섬치고는 매우 교통이 좋은 곳이다. 그러나 섬이기 때문에 육지와 아무리 가까워도 저녁에는 도선이 끊기고 섬은 적막감에 휩싸인다.
주업은 대부분 농사이고 김양식은 3가구가 하고 있다. 김공장이 1개 있었는데 지금은 폐쇄된 상태이다. 대부분 낙지잡이로 소득을 올린다. 이곳 고이도는 탄도만 입구에 있기 때문에 낙지잡이 하는 세대가 9가구이고, 염전은 타지 사람이 12만 평 정도를 운영한다.
고이도는 섬 전체가 완만한 구릉지로 최고봉은 65.3m이며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갯벌이 넓어 제방을 쌓아서 염전이나 농경지로 이용하고 있다. 고이도 주민들은 예로부터 어업보다는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농도(農島)로 유명한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비옥했던 대부분의 농경지가 휴경(休耕)으로 묵혀 있고 전체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100ha가량만 경작되고 있다.
대부분의 전답들은 농로가 없어서 절반 정도가 묵혀 있는 실정이다. 주민들은 농업용 경운기를 2대씩 소유하고 있는데, 농사지을 땅이 많아서가 아니라 섬 안에 농로가 없어서 경운기가 필요한 논이나 밭에 각각의 경운기를 세워 두고 농사를 짓기 때문이다.
논과 밭이 있는 이곳은 주로 마늘과 대파를 경작하고 있고 고추밭도 더러 있다. 전체가구의 80% 정도가 전업농가이다. 토지이용은 논 61ha, 밭 139ha, 임야 331ha로 임야가 대부분이다.
고이도 왕산성지 : 고이도의 왕산에 있는 산성이다. 왕산성은 대체로 고려 이전의 삼한시대 또는 후삼국시대 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둘레 500m 정도의 왕산성은 바다에 면한 동남쪽은 능선을 따라 축성되었고 서북쪽은 왕산 하단 및 중북부에 축성되어 있다. 형태는 부정형으로 계곡을 포용한 포용식 산성이며 성벽은 1m 내외의 자연석과 50×20cm 정도의 잡석을 이용, 협축법(夾築法)에 의해 결구축성(結構築城)하였다. 남아 있는 성축은 높이 1.5m, 폭 3m 정도로 대부분 붕괴된 상태이다. 왕산의 산세는 낮고 평평한 구릉이 이어지다가 정상부에 이르러 갑자기 급경사를 이룬 형국으로 전체적으로 바위산이다. 이곳 왕산에서는 무안의 내륙지역 및 병풍도, 매화도, 마산도는 물론 지도읍 선도리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고이도 둘러보기
이곳은 왕산성 외에 섬 북쪽에 있는 큰 마을을 대촌이라 하는데 장터가 있어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그 외에 독족골, 불무청, 불당골, 덜리, 중석골, 장안 등과 암자터가 있다. 주민들은 대촌, 사동, 고장, 칠동에 집중하여 분포되어 있다. 칠동마을은 선창이 있는 밥섬과 통사골, 세제이, 윗동네, 아랫동네, 모갑골, 안꼬네 등 일곱 마을이 합쳐진 이름이다. 사동은 뒷산에 절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고이도의 관문이다. 여객선과 나룻배가 드나들고 선착장, 출장소, 보건소, 분교 등이 있다.
신월항에서 나룻배를 타고 방문한 고이도는 선착장 좌우로 해안길이 나 있는데 오른쪽은 비포장도로로 창고가 있는 곳이고 마을로 가는 길은 왼쪽이다. 선착장 앞 바다에는 상당한 수의 작은 고깃배들이 있다. 부교가 길게 이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 역시 물이 빠지면 길게 갯벌이 형성되는 곳으로 보인다. 해안길을 걸어 마을 쪽으로 가면 입구에 가게가 있고 마을 중심에 압해면 고이도출장소가 자리잡고 있다. 이곳을 지나 조금 더 가면 길이 갈리는 가운데에 쌈지공원이 있다. 남쪽으로 이어지는 길은 왕산길로 대촌마을 가는 길이고, 다른 길은 고장마을과 사동마을로 가는 길이다. 갈림길 입구 오른쪽에 학교가 있다.
압해초등학교 고이분교장이다. 제법 넓은 운동장은 학생들이 있어서인지 아직은 잡초가 무성하지 않다. 1977년에 만들어진 스탠드 뒤로 길게 이어진 단층짜리 교사에서는 현재 2명의 여교사가 모두 6명의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선착장이 있는 고이초등학교 분교 일대가 섬의 중심지이다. 학교에서 조금 더 가면 경로당, 고이도의 연혁과 함께 2000년에 준공되었다는 표지석이 있다. 그리고 바로 옆에 목포경찰서 관할 고이도치안센터와 보건진료소가 있다. 세 개의 기관이 나란히 들어선 셈이다. 이곳에서 조금 더 가면 갈림길이 나온다. 오른쪽에 두 기의 비석이 있는데 유허비와 영세불망비다.
사동마을은 전형적인 농촌의 모습이다. 고이도에는 교회가 2개 있는데, 60년이 넘은 고이교회와 1981년에 개척된 칠대교회가 있다.
고장마을을 지나 더 가면 염전터가 나온다. 시원스럽게 잘 뚫려 있는 고이길. 계속 이어지는 밭의 연속이다. 오옴덕골을 끼고 돌아 어느 정도 가면 염전이 나타난다. 길은 일정섬을 통과하게 된다. 일정섬은 고이도와 방조제로 연결되어 하나의 섬이 된 곳이다.
고이도는 주변의 작은 섬을 연결하여 면적을 크게 넓혔다. 일정섬 앞과 섬의 북쪽 그리고 대촌마을 앞바다를 메운 것이 대표적이다. 연결한 부분에는 염전을 만들었다. 고이도에는 일정염전, 고이염전, 태성염전이 있었는데 지금은 고이염전만 소금을 생산하고 있다. 염전은 한때 호황을 누린 적도 있으나 지금은 사양길로 접어들어 섬 전체가 활기를 잃은 느낌이다.
염전을 새우 양식장으로 바꿔 놓은 곳이 눈에 띄었다. 여기저기 새우 양식장 도구가 널려 있다. 왼쪽은 새우 양식장이고 오른쪽 해안은 갯벌이다. 왼쪽으로 선도가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신월리의 낮은 평지가 눈에 들어온다. 이곳에 몇 채의 집이 보이는데 한 집만 사람이 사는 집이다. 승용차나 경운기 한 대는 거뜬히 지날 수 있는 방조제를 건너면 또 다른 선착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