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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가 성벽을 봉헌하다
느 12:27-43
27 예루살렘 성벽을 봉헌하게 되니 각처에서 레위 사람들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데려다가 감사하며 노래하며 제금을 치며 비파와 수금을 타며 즐거이 봉헌식을 행하려 하매
28 이에 노래하는 자들이 예루살렘 사방 들과 느도바 사람의 마을에서 모여들고
29 또 벧길갈과 게바와 아스마웻 들에서 모여들었으니 이 노래하는 자들은 자기들을 위하여 예루살렘 사방에 마을들을 이루었음이라
30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몸을 정결하게 하고 또 백성과 성문과 성벽을 정결하게 하니라
31 이에 내가 유다의 방백들을 성벽 위에 오르게 하고 또 감사 찬송하는 자의 큰 무리를 둘로 나누어 성벽 위로 대오를 지어 가게 하였는데 한 무리는 오른쪽으로 분문을 향하여 가게 하니
32 그들의 뒤를 따르는 자는 호세야와 유다 지도자의 절반이요
33 또 아사랴와 에스라와 므술람과
34 유다와 베냐민과 스마야와 예레미야이며
35 또 제사장들의 자손 몇 사람이 나팔을 잡았으니 요나단의 아들 스마야의 손자 맛다냐의 증손 미가야의 현손 삭굴의 오대 손 아삽의 육대 손 스가랴와
36 그의 형제들인 스마야와 아사렐과 밀랄래와 길랄래와 마애와 느다넬과 유다와 하나니라 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악기를 잡았고 학사 에스라가 앞서서
37 샘문으로 전진하여 성벽으로 올라가는 곳에 이르러 다윗 성의 층계로 올라가서 다윗의 궁 윗 길에서 동쪽으로 향하여 수문에 이르렀고
38 감사 찬송하는 다른 무리는 왼쪽으로 행진하는데 내가 백성의 절반과 더불어 그 뒤를 따라 성벽 위로 가서 화덕 망대 윗 길로 성벽 넓은 곳에 이르고
39 에브라임 문 위로 옛문과 어문과 하나넬 망대와 함메아 망대를 지나 양문에 이르러 감옥 문에 멈추매
40 이에 감사 찬송하는 두 무리가 하나님의 전에 섰고 또 나와 민장의 절반도 함께 하였고
41 제사장 엘리아김과 마아세야와 미냐민과 미가야와 엘료에내와 스가랴와 하나냐는 다 나팔을 잡았고
42 또 마아세야와 스마야와 엘르아살과 웃시와 여호하난과 말기야와 엘람과 에셀이 함께 있으며 노래하는 자는 크게 찬송하였는데 그 감독은 예스라히야라
43 이 날에 무리가 큰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 아이도 즐거워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이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
느 12:27-43 / [예루살렘 성벽 봉헌식] 느헤미야가 계속 보고하였다. ㄱ) 예루살렘의 성벽공사가 완공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성벽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우리는 온 나라에서 레위 사람들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데려다가 제금을 치고 비파와 수금을 타며 즐겁게 감사의 찬양을 드리는 봉헌 예식을 거행하게 하였다. (ㄱ. BC 445년) 28-29) 레위 사람들 중에서 성가대원들은 주로 예루살렘 주변의 평지에 마을을 이루고 살았기 때문에, 그런 마을에서 와서 모였고 또 느도바와 벧길갈과 게바와 아스마웻 지역에서 와서 모였다. 30)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은 먼저 자신의 몸에 물을 뿌려 몸을 정결하게 하고, 그 다음에는 백성과 성벽과 성문에도 물을 뿌려 정결하게 하였다. 31) 그러고 나서 나는 유다 지도자들을 성벽 위로 오르게 하고, 감사 찬양을 하는 성가대원들은 크게 두 편으로 나누었다. 한편은 성벽 위로 올라와 오른쪽으로 남단의 쓰레기 성문을 향하여 행진하였다. 32) 이 성가대원들의 뒤에서는 호세야가 유다 지도자의 반을 이끌고 따라갔다. 33-36) 그 뒤로는 아사랴와 에스라와 므술람과 유다와 베냐민과 스마야와 예레미야 등의 제사장들이 따라갔다. 이들은 나팔을 불면서 걸어갔다. 그 뒤로는 레위 사람들이 따라 갔는데, 그 선두에는 스가랴가 서 있었다. 그의 조상은 아버지 요나단으로부터 그 위로 스마야와 맛다냐와 미가야와 삭굴과 아삽이었다. 스가랴의 뒤로는 그의 친척인 스마야와 아사렐과 밀랄래와 길랄래와 마애와 느다넬과 유다와 하나니가 따라갔다. 이 레위 사람들의 맨 앞에는 서기관 에스라가 서 있었다. 이 레위 사람들은 모두 현악기들을 들고서 연주하였는데, 그 모습은 옛날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 수금을 연주하던 것과 같았다. 37) 샘터가 있는 성문에 이르러서는 그들이 성벽에서 내려와 다윗의 도성에 이르는 층계를 밟고 올라갔다. 거기서는 다윗성을 뒤로 돌아 도성의 동쪽에 있는 샘터 성문에 이르렀다. 38) 유다 지도자들의 나머지 반이 따르는 두번째 찬양대원들은 내가 직접 이끌었다. 우리는 성벽 위로 올라가 왼쪽으로 행진하여 풀무 망대를 지나서 넓은 성벽에 이르렀다. 39) 그 다음에는 에브라임 성문과 옛 성문과 물고기 장터의 성문을 지나 계속 하나넬 망대와 함메아 망대를 거쳐 양문에 이르고, 형무소의 성문에 이르러서 행진을 멈추었다. 40-42) 마침내 두 편의 성가대원들은 성전의 앞마당에 모여 섰다. 내 곁에는 유다 지도자의 반이 서고, 그 곁으로 제사장 엘리아김과 마아세야와 미냐민과 미가야와 엘료에내와 스가랴와 하나냐가 모두 나팔을 들고 서 있었다. 또 그 곁으로는 마아세야와 스마야와 엘르아살과 웃시와 여호하난과 말기야와 엘람과 에셀 등의 레위 사람들이 서 있었다. 성가대원들은 예스라히야의 지휘에 따라 웅장한 찬양을 시작하였다. 43) 이어서 우리들은 많은 짐승을 잡아 화목제물로 바치고, 모두 그 제물을 나누어 먹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도성의 성벽을 성공적으로 완공하도록 도와주신 것을 감사하며 모두 기뻐하였다. 여인과 어린아이도 함께 기뻐하니, 환호성을 외치며 기뻐하는 소리가 먼 곳에까지 들렸다.
이스라엘은 허물어진 성벽을 다시 쌓으면서 많은 수고를 했으며, 성벽 봉헌식을 하면서 하나님이 은혜를 받습니다. 모든 것에 감사하며 자신들을 정결하게 하여 봉헌식을 여는 장면입니다.
각처에서 사람들을 찾아서(27-30) 공사가 끝나고 성벽이 다 쌓여지고 난 다음에 그 성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봉헌식을 행하기 전에 예루살렘 거민이 너무 적어서 연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느헤미야의 현명한 이주 정책으로 많은 사람이 예루살렘 성 안에 거주하게 되었고 비로서 느헤미야는 봉헌식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예식의 분위기를 주도할 찬양대를 소집하고 종교인들을 비롯한 모든 백성과 성곽자체의 정결의식이 행해졌습니다. 봉헌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의 성품이 거룩하시기에 예배자 역시 신령과 진정이 담긴 참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이 정결하게 되어야 했습니다. 봉헌식에 가장 중요한 감사의 노래를 부르는 것은 레위 사람들의 사명입니다. 이에 신앙을 지도하는 믿음이 있는 사람들을 불러서 감사하는 노래를 했습니다.
구별하여 바치는 봉헌식(31-43) 정결예식이 끝나고 봉헌식은 성벽 위를 돌던 두 무리가 성벽 위를 걸어가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에스라를 선두로 우편으로는 분문을 향해 성벽 위를 걸어가는 무리와, 느헤미야를 선두로 그 반대편으로 성벽 위를 걸어가는 무리로 구분하여 진행했습니다. 이 독특한 낙성식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완공되었다는 사실을 감사함과 성벽의 튼튼함과 안전함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도우심에 달려 있다는 것을 상징적인 고백입니다. 성벽 위를 돌던 두 무리가 마주치면 하나님을 찬양하고 성전으로 가서 큰 제사를 드리고 즐거움으로 낙성식을 마무리 합니다. 제사장이 등장하는 것에서 자신의 역할을 잘 분별한 느헤미야의 현명함이 드러납니다. 지도자로서 역할을 잘 했음에도 낙성식은 제사장이 주도해야 함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 정결해야 하며, 우리의 도움은 오직 하나님께 있으며, 하나님을 섬길 대상으로 우리의 모든 것을 헌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성대한 제사를 드려 봉헌식을 끝마쳤습니다.
적용: 예배는 우리의 삶을 구별하여 드리는 시간입니다. 나의 예배에 대한 태도는 어떠합니까?
나는 오늘 하루도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출근길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늘 내가 사는 이 땅에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하늘을 이루게 하소서!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 하늘을 바라보며 함께 행복하게 하소서!" 나는 그렇게 하루를 시작하며 오늘도 힘차게 지하철을 타고 출근길에 오르는 발걸음이 늘 행복합니다.
< 설 교 >
성도가 누리는 즐거움
느헤미야 12:27-30, 43-44 / 피영민목사
서 론
우리가 구약 성경을 보게 되면 종교가 유대교입니다. 이 유대교는 대체로 암울하고 어둡고 슬프다는 인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 12장은 다릅니다. 즐겁고, 행복하고, 기쁩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종교라고 해서 반드시 어둡고 슬픈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반역함으로 인해 어두움과 슬픔과 노예됨이 온 것이지 하나님께 순종하고 헌신하면 이처럼 즐거움과 기쁨이 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느헤미야 12장입니다. 43절 한절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이 날에 무리가 크게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아이도 즐거워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의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 ‘즐겁다’라는 단어가 몇 번 나왔습니까? 43절에만 4번 나오고 있습니다. 44절 후반에 보면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을 인하여 즐거워함을 인함이라”라고 했습니다. 43절에 4번, 44절에 한번 나오고 있습니다. 모두 5번이나 “즐거워 했다”고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헌신하면 하나님이 큰 기쁨과 즐거움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즐거움의 축복은 구약 성도만이 누릴 수 있는 체험이 아닙니다. 즐거움(joy)의 축복은 모든 시대에,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누릴 수 있는 축복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되 세상이 알지 못하는 기쁨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아 너는 행복자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행복한 백성이요, 우리는 즐거워하는 백성이 되어야 할 줄로 마땅합니다. 한 번 따라서 해 보시죠. “나는 행복자로다!” 우리는 얼마나 행복합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행해 주시는 일이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독생자 예수를 보내어 십자가에 피를 흘려 그 피 값으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옥에서 건져 천국으로 옮겨 주셨으니 우리는 언제 죽어도 천국 갈 사람이니 행복합니다. 우리는 잠깐 살다가 죽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죽음으로 끝이 아니고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만에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해서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 영혼안에 성령을 두셔서 가끔은 ‘내가 너 안에 있다’하고 은사도 주시고, 기적도 주시지 만은 본질적으로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고 계시니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우리가 행복해야 될 이유는 잠깐만 생각해 보아도 수 없이 많습니다. 느헤미야 12장에서 유다 백성이 누리는 기쁨, 즐거움의 세 가지 특징을 생각해 보면서, 느헤미야 12장의 기쁨이 우리의 기쁨이 되기를 바랍니다.
Ⅰ. 첫째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기쁨이다
“너희는 신실한 사람들이요, 너희는 천국에 와야 될 사람들이다”라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느헤미야 12장 1절-26절을 보면 이름만 있습니다. 읽기에 지루한 내용입니다. 1절을 보면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및 예수아를 좇아 돌아온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이러하니라 제사장은 스라야와 예레미야와 에스라와”라고 기록되었습니다. 1-26절까지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의 이름입니다. 1-11절까지는 B.C 538년에 스룹바벨과 귀환한 제사장들과 레위사람들의 명단이고, 12-26절까지는 그로부터 94년 후인 B.C 444년에 느헤미야, 에스라와 함께 활동한 제사장, 레위 사람들의 이름입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은 물론이고, 전국 각지에 흩어져 거주하면서 백성들의 신앙을 지도해 왔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어려운 시대를 살았습니다. 성벽재건을 위해서 오랫동안 기도했지만 응답을 눈으로 못보고 죽은 사람들입니다. 기도해도 응답을 못 받습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축복이 오랫동안 지연되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예배 전통을 이어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들의 이름은 잊어버리기 쉬웠습니다. 사람이 헤어지는 건 슬프지 않아도, 잊혀지는 것은 슬프다고 합니다. 잊혀지기 쉬운 이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기억해 주시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이름을 읽어 봐도 누군지 알 수 없고 지루하지만, 하나님이 이런 이름들을 잊지 않고 낙성식 할 때에 이름을 기억하고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들의 수고를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생각하면서 감동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들은 어려운 시대에 수고 많이 한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의 수고로 인해서 성벽의 재건이 가능해 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성벽 낙성식을 하면서 반드시 기록되어야 한다. 후손들은 이 사람들을 존경해야만 한다. 이들은 사회가 영적으로 어렵고, 어두운 때에도 나를 향한 예배의 전통을 신실하게 지켜 온 사람들이다. 이름을 성경에 기록하고, 기억하고, 인정 해주야 한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 일입니까? 우리 모두는 영원 전부터 “내 백성이다”라고 택해 주셨습니다. 우리를 기본적으로 인정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기본 인정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기본 인정에다 특별히 잘 했다고 하는 인정을 받게 되면 얼마나 기쁘고 행복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죽어 천국에 갔더니 베드로가 이렇게 물어보더랍니다. “야, 너는 하나님이 인정해 줄만한 것 하나라도 있으면 얘기해 봐라” 한참 생각하더니 “내가 길을 가는데 연약한 여자가 깡패들에게 매를 맞고 있었습니다. 연약한 여자를 구해내기 위해 깡패들과 맞써 싸웠습니다. 아직 그 소식 안올라 왔습니까? 그거 하나 밖에는 인정받을 만 한게 생각이 안납니다.”라고 했답니다. 우리가 천국가서 베드로가 여러분에게 물어 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너는 하나님이 인정해 줄만한 것 하나라도 있으면 얘기해 봐라” 하나님께 갈 때 인정받을 만한 기록을 가지고 가는 사람 되시길 바랍니다.
교회 역사를 보아도 인정받고 기억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종교개혁은 1517년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에 의해서 일어났습니다. 1536년 존 칼빈(John Calvin)선생이 기독교를 완성하고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시작하면서 교리적인 정립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루터와 칼빈만 교회 역사에 기록된 것은 아닙니다. 중세 천년을 암흑기라 합니다. 중세 천년, 이 암흑기에 교회가 교리적으로 부패하고 윤리적으로 부패할 때에도 대항해서 투쟁하여 일어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카다리파(Cathari), 왈도파(Waldenses) 이런 사람들도 있고, 14기 말에는 어거스틴의 신학을 다시 일으킨 영국의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체코슬로바키아의 존 후스(John Huss)가 있습니다. 체코 프라하 광장에 가면 후스 선생님 동상이 누워 계십니다. 사람들은 잊어 버리기 쉬워도 하나님은 존후스, 존 위클리프에게 고생 많이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존 후스는 1415년 콘스탄스 종교회의에서 교황이 “안죽일테니까 와라”했습니다. 막상 오니깐 불에 태워 죽였습니다. 하나님은 존 후스에게 “불에 탈 때 얼마나 힘들었느냐 고생했도다”하고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존후스, 존위클리프는 교회역사에서 영원히 빛나는 스타가 되었습니다. 빛나는 별들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고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것은 기쁨의 근원입니다.
시1:6절에 보면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신26:18절에도 “여호와께서도 네게 말씀하신 대로 오늘날 너를 자기의 보배로운 백성으로 인정하시고 또 그 모든 명령을 지키게 하리라 확언하셨은즉”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보아도 예수님으로부터 믿음 좋다고 인정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눅26:1-4절을 보면 두 렙돈을 헌금한 과부에게 “그는 구차한 중에도 자기의 모든 것을 넣었다”라고 하시면서 그 과부의 헌금을 인정하고 칭찬해 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눅7장을 보면 로마의 백부장에게 “유다백성들 중에도 이만한 믿음을 본 적이 없다”라고 하시면서 크게 칭찬하면서 인정해 주셨습니다. 또, 마15장을 보면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네 믿음이 크도다 네 딸이 즉시 나았도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예수님께서 여인을 칭찬하고 인정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인정 받아도 참 기쁩니다. 그리고 인정받지 못하면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제가 설교를 하면 꼭 제 아내가 이렇게 말합니다. “여보, 이것은 빼고 더하세요”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내가 칭찬해 주면 기분이 좋습니다. 아내에게서 칭찬만 받아도 용기가 생깁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너 같은 사람이 없다” 인정해 주시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느헤미야 12장에는 이렇게 인정받은 사람들이 기록된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에게도 인정받고 하나님에게도 인정받는 기쁨이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Ⅱ. 둘째는, 원수들을 물리치고 승리한 기쁨이다
27절 이하에는 봉헌식을 준비하고, 봉헌식을 시행하는 장면입니다.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사람들을 예루살렘으로 모두 불러 모았습니다. 느헤미야가 봉헌식을 하는데 성가대를 먼저 모은 것입니다. 그리고 악기를 준비하고 몸을 정결케 하고 성문과 성을 정결케 합니다. 정결의식을 행한 것입니다. 레위기 19장에 보면 정결의식이 나와 있습니다. 제사장은 멍에를 매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를 잡고 그 피를 일곱 번 뿌립니다. 그리고 불살라 재를 만들어 물에서 끈 후 재를 담은 물에 우슬초를 적셔 사람이나 혹은 부정해진 물건에 뿌리게 되면 정결케 되는 것입니다. 목욕도 하고 옷도 깨끗이 세탁해 입고 우슬초로 정결케 하는 물을 뿌리고 성벽과 성문에도 우슬초로 정결케 하는 물을 뿌려 의식적으로 정결케 한 후에 느헤미야는 성가대와 모든 백성들을 두 팀으로 나눕니다. 시계를 보면 중앙 아래는 여섯시, 중앙 위는 열두시입니다. 여섯시에서 한 시간이 지나면 7시가 됩니다. 이 일곱시 방향에 모여 두 팀으로 나눕니다. 하나는 학사 에스라가 앞서가고, 하나는 총독 느헤미야가 앞서갑니다. 그리고 성가대가 가고, 백성 절반이 따라갑니다. 일곱시 방향으로 시작해서 에스라팀은 동진하고, 느헤미야 팀은 서진해 나갑니다. 일곱시에 방향에서 진행을 하여 한시 방향에서 모이는 것입니다. 그 때에 성가대와 수많은 백성들이 악기 연주하면서 찬양을 합니다. 이 산과 저 산이 마주쳐 울리고, 성가대의 노래가 어우러져 하나님께 올라가고, 한시 방향에 모두 모여 제사를 드리고, 크게 하나님을 찬양을 하니 온 백성이 다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이것이 성벽 낙성식입니다. 이 낙성식은 축사, 격려사, 기념사 이런 것이 없습니다. 이 예루살렘 성벽 낙성식은 온 백성이 찬양을 하면서 두 팀으로 나뉘어 소리가 울리고 마주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모두가 참여하고 모두가 움직이고 노래하고 역동적입니다. 이때에 느헤미야의 마음속에는 무슨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느헤미야가 앞서 가면서 무엇을 생각했겠습니까? ‘이 성벽이 52일만에 완성되었고, 7월 1일에 모여서 성경을 공부하고, 7월 14일이 되었구나. 불과 세달전만 해도 유다 백성들은 절망했고, 낙심했고, 연약했고, 무기력했고, 원수들이 우리를 조롱했었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느헤미야 4장 10-11절이 유다 백성들의 당시 생각입니다. “유다 사람들은 이르기를 흙 무더기가 아직도 많거늘 담부하는 자의 힘이 쇠하였으니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하고 우리의 대적은 이르기를 저희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가 저희 중에 달려 들어가서 살륙하여 역사를 그치게 하리라 하고” 세달지나고 나니 감사와 기쁨과 찬양이 넘치고 있습니다. 이 기쁨은 원수를 향해서는 승리의 기쁨(Joy of Triumph)이며, 일에 관해서는 완성의 기쁨(Joy of Completion)입니다. 불과 세달 사이에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백성들은 믿음으로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사는 인생길은 나그네길입니다. 영원히 살 수 없습니다. 아무도 이 세상에 영원히 살 수 없습니다. 나그네 인생길을 살아가다가 본향으로 가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천국, 믿지 않으면 지옥입니다. 연옥은 없습니다. 이 나그네는 세상을 살아 갈 때에 때로는 천국 갈 소망을 가지고 있어도, 낙심의 때도 있고, 어둠, 절망의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행하는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면 우리에게 기쁨의 때, 승리의 때, 완성의 때가 올 줄로 믿습니다. 잠언 4장 18절을 보면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수 믿고 의인된 사람의 인생은 돋는 햇볕 같습니다. 여러분, 어둠이 깔리고 칠흙 같은 어둠이라도 동해 앞바다의 태양이 떠오르고 서광이 비취고, 태양이 점점 떠올라 온 천지가 밝아지고, 햇빛을 비추어 온 천지 따뜻해 질 때에 얼마나 우리는 감격합니까? 우리의 인생은 돋는 햇볕 같다는 것입니다. 지금 인생이 슬프고 어두운 분이 계십니까? 좌절하지 마십시오. 우리 인생은 돋는 햇볕과 같습니다. 점점 광명한 곳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이 광명입니다. 천국이 기쁨의 완성입니다. 우리가 다 천국 갈 사람아닙니까? 빌립보서 1장 6절을 보면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해서 착한 일을 시작하셨는데 완성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천국은 완성의 기쁨, 승리의 기쁨의 장소요, 하나님께 감사하는 보은의 장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그 기쁨을 맛보기로 조금씩 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미국에서 6년을 살았습니다. 미국에서 살 때에 배고프면 슈퍼마켓에 갔습니다. 왜 갔냐면 맛보기로 먹을 수 있는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맛보기로 한 바퀴 돌면 위가 절반이 찹니다. 두 바퀴 돌면 꽉 찹니다. 그래도 모자라면 세 바퀴 돕니다. 맛보기만 먹어도 배가 부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천국의 기쁨을 조금씩 맛보기로 주시는 것입니다. 2010년도에는 천국의 기쁨을 많이 맛보시기를 바랍니다.
Ⅲ. 셋째로, 하나님의 축복을 증거하는 기쁨이다
유다 백성들이 승리한 것은 원수들도 듣습니다. 이방나라 사람들도 모두 듣습니다. 43절 보면 “이 날에 무리가 크게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 아이도 즐거워 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의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탄일종이 땡땡땡 멀리 멀리 들리네” 들리잖아요! 종치면 들리지 그곳에만 있지는 않습니다. 산발랏, 도비야, 게셈 성벽을 방해를 했던 이 웬수들도 소식을 듣고, “이제 우리는 망했도다. 우리가 한 것은 실패했도다.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성벽을 완성 했구나. 역시 유다 백성의 하나님은 위대하신 하나님이시로다. 포로된 자들을 해방시켜 예루살렘 와서 성벽까지 건설하고 살게 하셨도다”라고 이방 나라 사람들도 소식을 듣는 것입니다. 교회 승리의 노래는 마귀에게는 멸망의 선포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소식은 마귀의 머리가 깨지는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성령이 임하여 부흥이 된다는 소식은 마귀의 진영에는 곡소리가 되는 것입니다. “강남중앙침례교회가 부흥이 되었데. 우리는 망했구나”하는 것입니다. 이방나라가 하나님의 백성이 부흥이 되었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해서 백성들이 즐거워하는 것은 단순히 감정적인 즐거움의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와 선교의 승리의 의미가 있습니다. 선교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전도도 교회가 기뻐야 열매가 맺고, 선교도 우리가 기뻐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많이 오면 뭐합니까? 강남중앙침례교회에 예배에 왔는데 사람들마다 인상 쓰고 있으면 ‘행복한 교회가 아니구나’하고 돌아 가버립니다. 우리 성도들은 모두 예배 나올 때 윗 이빨을 내놓고 오시길 바랍니다. 부흥되는 교회들은 대부분 윗 이빨을 내놓고 다닙니다. 우리가 전도하고 선교의 열매를 맺는 것도 사영리를 외웠다고, 훈련을 받았다고, 프로그램을 했다하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 개개인의 영혼이 예수 믿어 성령받고 충만하고 기쁘면 전도도 되고, 그런 사람들이 모인 교회에 예배에 참석하면 “여기로다”고 출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T.V 설교 들으신 권사님들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부흥되는 교회의 성도들을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얼굴이 밝고, 기쁨이 넘치고, 활력이 넘칩니다. 그러나 부흥이 안되는 교회를 보면 어둡고, 기쁨이 없고 활력이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126편은 학사 에스라가 기록한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바벨론 포로 된 백성들을 해방시키시고, 무너진 성벽을 세우셨습니다. 대사를 행하신 것입니다. 열방 나라 사람들이 그 소식을 듣고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대사를 행하셨대”라고 말을 합니다. 그 소리를 들으니 기쁘다는 것입니다. 2010년도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사를 행하시고 이런 기쁨이 넘치는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성도들 영혼마다, 가정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고 대사를 행하시고 우리는 기쁨의 해, 즐거움의 해, 천국의 즐거움 맛보는 해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2010년도 강남중앙침례교회는 하나님께서 대사를 행하시고 성령을 폭발적으로 부으시고, 부흥이 일어나서 우리 가운데 기쁨이 넘쳐 나기를 바랍니다. 마가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 어느 집에 들어가니까 사람들이 용신 할 수 없을 정도로 몰려들었다고 했습니다. 우리 강남중앙침례교회가 사람들이 용신 할 수 없는 부흥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또, 2010년에는 대한민국에 승리의 소식, 기쁨의 소식이 들려야 합니다. 별볼일 없는 것 가지고 싸우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가 아랍의 원전을 수출하는 나라가 돼서 감사합니다. 아랍 뿐만 아니라 미국도 우리나라에서 원전을 사가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삼성, 엘지, 대우가 세계만방에 깃발이 휘날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골프선수, 야구선수, 축구선수등 모두 가서 우승하기를 바랍니다. 최경주 선수 우승하시고, 박지성 선수 100골 넣으시고, 김연아 선수도 금메달 따시기 바랍니다. 승리의 소식, 기쁨의 소식 들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복음으로 돕고, 물질로 돕는 나라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정치하는 분들도 힘이나고, 재미나고, 살맛나는 나라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느헤미야 12장은 기쁨의 장입니다. 우리는 느헤미야처럼 기쁨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쁨을 만들어 낼 뿐만 아니라 유다 백성들처럼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순수성을 지켜라
느헤미야 12:27-13:31 / UBF(경희문교회)
요절/ 느헤미야 13:30 “내가 이와 같이 저희로 이방 사람을 떠나게 하여 깨끗하게 하고 또 제사장과 레위 사람의 반열을 세워 각각 그 일을 맡게 하고”
우리는 지난 3강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한 후, 자신들의 무너져 있던 신앙생활을 회복한 것을 배웠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들은 즐거이 성벽 봉헌식을 거행하였습니다(12:27-47). 또한 그들 가운데 섞여 있는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을 몰수히 분리케 했습니다. 이로써 느헤미야가 간절히 바랐던 이스라엘의 회복은 어느 정도 이루어진 것 같이 보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이를 지켜볼 때 가슴이 뿌듯했습니다. 그는 이제부터는 이스라엘 민족이 수치를 면하고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영광 가운데 거하게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계속적으로 부흥하여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서 영광을 드러낼 기대에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바사에 갔다가 돌아와 보니 충격적인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 하나 하나는 다시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심각한 죄악들이었습니다. 그것을 그대로 방치한다면 이스라엘은 다시 파멸하고, 이전보다 더 비참한 상태로 떨어질지도 몰랐습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느헤미야는 심히 근심했고, 분노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과감하고도 철저하게 이런 죄악들을 몰아내었습니다. 그리함으로 민족 번영의 기틀을 세웠습니다. 그러면 본문에 나타난 이스라엘을 망하게 할 수 있는 악한 일들은 무엇입니까? 또 느헤미야는 이를 어떻게 제거했습니까?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우리를 망하게 할 수 있는 죄악이 무엇인가를 분별하고, 이와 싸워 몰아낼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인간적인 관계를 통해서 들어온 독소를 몰아내었습니다(13:1-9). 13:1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성벽 낙성식을 하는 날에 성경을 공부하면서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영영히 하나님의 회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그러자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즉시 이스라엘 중에 섞여 있는 모압과 암몬 사람들을 찾아내어 몰수히 쫓아내었습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했습니까? 모압과 암몬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독소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했을 때 양식과 물로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압 왕 발락은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하였습니다(민22-24장).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압 암몬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하는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비록 이스라엘 중에 살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아이덴티티가 없습니다.
이런 그들이 이스라엘에 섞여 살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스라엘이 강할 때는 조용히 있겠지만, 이스라엘이 약해지면 이스라엘을 망하게 할 수 있습니다. 아마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이 황폐한 동안에 식민지 백성으로서 유다 땅에서 뒤엉켜 살다보니 모압과 암몬 사람들이 하께 살게 되었을 것입니다. 또 모압과 암몬 사람들은 주변국가들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들의 생존을 위해서도 좋은 관계성을 맺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모압과 암몬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나쁠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압과 암몬 속에 있는 저주의 독소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성경공부를 통해서 그 독소를 보았고 그 독소를 제거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이전에 하나님의 전 골방을 맡은 제사장 엘리아십은 도비야와 인간적으로 친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도비야를 위하여 성전에 한 큰 방을 갖추어 주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쓸 소제물과 유향과 기명을 두는 방과, 성전에서 섬기는 사람들을 위한 곡물 등을 두는 방을 터서 큰 방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면 도비야는 어떤 사람입니까? 도비야는 영영히 여호와의 회중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율법에 선언된 암몬 사람입니다. 그는 산발랏과 함께 이스라엘이 흥왕하는 것을 싫어했던 사람입니다. 더군다나 성벽 건축을 한사코 방해했던 이스라엘의 원수입니다. 그런데도 엘리아십은 이런 그를 그것도 거룩한 성전에 들여놓았습니다. 그러면 엘리아십은 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서까지 도비야를 성전에 들여놓았을까요? 도비야가 회개했을까요? 아니면 그가 원수도 사랑하는 가슴이 넓은 남자였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도비야와의 인간적인 친분 때문이었습니다. 28절을 보면 엘리아십의 손자 요야다의 아들 하나가 산발랏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산발랏과 도비야는 친구 사이였습니다. 또 도비야는 유다의 귀인들과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습니다(6:17-19). 이런 연유로 엘리아십도 도비야를 알게 되고, 도비야와 친하게 되었습니다. 도비야를 만나보니 이방사람이라고 해서 뿔 달린 이상한 사람이거나, 특별히 사람이 더 악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중동지역의 정치 실세였습니다. 그래서 이런 그와 사귀어 두는 것이 이스라엘을 위해서도 도움이 될 것 같았습니다. 사실 이방인들에게 둘러 쌓여 있는 유대인들로서는 그들과 좋은 외교관계를 맺음으로써 안전보장에도 유익하였습니다. 그래서 엘리아십은 자신은 유다를 위한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7절을 보십시오. 느헤미야가 볼 때 엘리아십이 도비야를 위해 하나님의 전 뜰에 방을 갖춘 일은 악한 일이었습니다. 또 엘리아십은 제사장으로서 누구보다도 섞인 무리를 분리해야 할 사람이요, 이방의 독소가 이스라엘에 들어오지 못하게 지켜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아십은 제사장으로서 누구보다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들을 귀히 여기고 섬겨야 할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인간관계 때문에 영적인 질서를 무너뜨리고, 하나님께 드려야 할 제사나 하나님의 사람보다 도비야와 같은 자를 더 중시했습니다. 이렇게 할 때 성전예배가 엉망이 되고, 섬기는 사람들이 마음에 상처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영적인 일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게 됩니다. 느헤미야는 이를 알았을 때, 제사장이면서도 영적인 분별력이 전혀 없는 엘리아십으로 인해 심히 근심하고 노했습니다. 어찌하여 이런 사람을 성전에 들여놓았는가? 도대체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려고 작정했는가 생각하면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비야의 세간을 그 방밖으로 다 내어 던졌습니다. 그리고 그 방을 정결케 하고 원래의 용도대로 회복토록 하였습니다.
느헤미야가 볼 때 도비야는 인간관계를 위장해 이스라엘에 들어와 있는 독소였습니다. 그런데 독은 언젠가는 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독소를 그대로 두면 많은 사람이 괴로움을 당하고, 영적인 일이 방해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도비야를 성전에서 쫓아냄으로서 독소를 미리 제거해 버렸습니다. 이는 그만큼 느헤미야가 자기 민족이 독소에 침투 당하지 않고 순수하고 건강하기를 바랬기 때문이었습니다. 모임이든 사람이든 건강해야 일도 하고 열매도 잘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섞인 무리는 우리 속에 들어오는 세상적인 요소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도비야는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의 내면에 슬며시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는 비성경적인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은 말씀을 통해서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말씀을 공부하며 이런 것을 철저히 분리해내고 과감하게 쫓아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것이 언젠가는 독처럼 퍼져서 우리를 파멸하게 할지도 모릅니다. 저는 지난해 두 목자의 일을 통해서 이것의 중요성을 깊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두 분은 인간적으로는 다 능력도 많고, 하나님도 열심히 섬겼습니다. 그러나 내면에 자매 문제와 형제 문제의 독소가 들어왔을 때 말씀 앞에서 이를 발견하고 철저히 제거하지 않았습니다. 그랬을 때 그 독소가 점점 퍼져 영적인 생명력을 상실하였습니다. 결국은 좁은 길로 부르신 하나님의 사명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또 악령에 시달리는 무서운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관계를 통해 들어온 독소들을 영적으로 잘 분별하고 제거해야 하겠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전이 버린 바 되지 않도록 힘썼습니다(13:10-14). 이를 위해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잘 섬겼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내가 또 알아본즉 레위 사람들의 받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그 전리로 도망하였기로” 느헤미야가 성전에 와서 보니까 레위인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자 레위인들에게 생활비를 대 줄 수 없었습니다. 레위인들은 먹고 살 수 없자 각각 그 전리로 도망하였습니다. 레위인들이 없는 성전은 청소도 되지 않고 불도 피워져 있지 않았습니다. 레위 사람들이 없는 성전은 썰렁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모든 민장들을 불러놓고 하나님의 전이 어찌하여 버린 바 되었느냐고 꾸짖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전이 버린 바 되면 어떻게 됩니까? 결국 영적 쇠퇴가 찾아옵니다. 양들이 성전에 나와 죄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하게 됩니다. 성전예배도 잘 돌아가지 않으니 은혜도 받지 못하게 됩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영적 쇠퇴가 찾아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런 일이 생길 것을 염려하여 일찍이 이렇게 백성들에게 경고하였습니다. “너는 삼가서 네 땅에 거하는 동안에 레위인들을 저버리지 말지니라.”(신12:19) “네 성읍에 거하는 레위인은 너의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자니 또한 저버리지 말지니라.”(신14:27, 18:1-8) 느헤미야는 곳간을 관리하는 레위 사람들을 불러모아 다시 그 처소에 세웠습니다. 그후에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속한 제물들을 가져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온 유다가 곡식과 새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가져다가 곳간에 들였습니다. 그리고 느헤미야는 네 사람을 세워 헌금을 감독하고 십일조와 제물들을 나누어주도록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과 서기관들과 평신도들을 대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다 충직한 사람들로 인정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물질역사는 그냥 둘 때는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충성된 사람들이 맡아 기도하며 섬기면 양들이 하나님께 속한 물질을 하나님께 드리게 됩니다. 그래서 물질을 통해서도 믿음을 배우게 되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종들이 세워지게 되고, 하나님의 전이 버린 바 되지 않게 됩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레위인들을 잘 섬겼을 때 성전 예배는 부흥했고, 그 나라는 강해졌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왕이 레위인들을 무시하자 레위인들이 다 남 유다로 내려갔습니다. 이때 북이스라엘은 우상 숭배로 가득 차고 하나님의 진노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레위인들이 남 유다로 들어와서 르호보암 왕을 도왔을 때 남 유다는 작지만 강성해졌습니다. 이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해방 후 북한의 김일성은 목사님들을 핍박하여 다 쫓아냈습니다. 그 결과 북한은 김일성 부자를 우상 숭배하는 곳이 되었고, 계속되는 기근으로 수백만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이 당하는 고난이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북에서 쫓겨난 목사님들이 남한으로 내려왔을 때 남한은 그들의 열심에 의해서 수많은 교회가 개척되고 영적인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여기에는 신자들이 목사님들을 주님의 종님하면서 존중하고 귀히 여기며 좋은 것으로 섬긴 아름다운 전통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이때 유망한 젊은이들이 주님께 헌신하는 역사가 왕성하게 일어났습니다. 그랬을 때 같은 한반도임에도 남쪽은 30년 이상 풍년을 누리고 나라는 강성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조그만 나라를 높이사 세계의 10대 강국이 되게 하시고 선교사 파송 세계 3위의 나라로 쓰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전이 버린 바 되지 않도록 하나님께 속한 물질을 하나님께 잘 드리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잘 섬겨야 합니다.
셋째,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도록 했습니다(13:15-22). 안식일을 잘 지키는 것은 길게 보면 하나님께 복을 받는 길이 됩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느헤미야가 또 보니 유다에서 어떤 사람이 안식일에 술 틀을 밟고, 곡식단을 나귀에 실어 운반하며, 여러 가지 짐을 지고 안식일에 예루살렘에 들어와 장사를 하였습니다. 또 세계적인 장사꾼들인 두로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거하며 물고기와 각양 수입품을 가져다가 안식일에 유다 자손들에게 팔았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왜 이렇게 안식일을 범하였을까요? 아마 그들은 먹고살기 위해서는 안식일에도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볼 때 이는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조상들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을 때 심히 진노하시고 그 모든 재앙으로 그들과 그들의 성읍에 내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민족 전체의 사활이 달린 문제였습니다. 느헤미야는 다시는 이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라도 안식일을 지키게 하기 위해서 온갖 조치를 다 취했습니다. 우선 그는 안식일에 일하고 물건을 파는 유대인들을 책망하고 그 일을 그만두게 하였습니다(15). 그리고 유다 모든 귀인들을 심하게 꾸짖었습니다(17). 그리고는 안식일에는 아예 성문을 닫도록 명하였습니다. 자신의 종자 두어 사람을 성문마다 세워서 안식일에 아무 짐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각양 물건 파는 사람들이 성문이 열리기만 하면 먼저 들어와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자 했는지, 아니면 담 너머로라도 팔고자 했는지 한 두 번 예루살렘 성밖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장사꾼들의 악착같은 자세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들에게 이놈들, 이같이 하면 내가 잡으리라고 겁을 주고 쫓아버렸습니다. 이들을 그대로 두면 사람들의 마음이 안식일에도 자꾸 성 밖으로 향하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느헤미야는 레위 사람들에게 특별히 안식일에는 몸을 정결케 하고 와서 성문을 지켜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라고 명하였습니다.
느헤미야가 볼 때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길이요, 또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길임을 믿었습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계산해 보면 안식일에도 장사하면 돈을 더 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주일도 없이 일주일 내내 뼈빠지게 일합니다. 그러다가 30, 40대에 과로사 하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적으로 볼 때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길이요 우리의 믿음을 잘 지켜갈 수 있는 길입니다. 길게 보면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쫄딱 망하게 됩니다. 실제로 북극을 탐험할 때 한 사람은 안식일도 없이 줄기차게 걸어갔습니다. 반면에 다른 한 사람은 안식일은 철저히 쉬면서 갔습니다. 그런데 쉬면서 간 사람이 먼저 북극점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간 사람은 더 많이 걸었지만, 그가 걸어간 길은 바다 위를 떠다니는 빙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잠언 16:9절은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우리 인생에서 유익함을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지킬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 길을 인도하시고 승리의 길, 복된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는 우리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 한국교회가 살고, 한국교회가 섬기는 한국 민족이 사는 길이 됩니다. 우리 모임을 봐도 주일을 절대적으로 잘 지키는 분들이 꾸준히 믿음이 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비록 시대는 주일을 잘 지키는 것이 힘들지만, 주일을 잘 지키는 것은 하나님께 복을 받는 길이 됨을 믿습니다.
넷째, 가정과 자녀를 위해 믿음의 결혼을 하게 했습니다(13:23-31). 가정이 살아야 민족이 살고 나라가 살게 됩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느헤미야가 또 알아보니 유다 사람이 아스돗과 암몬과 모압 여인을 취하여 아내를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 자녀들이 유다 말은 하지 못하고 각 족속의 말을 하였습니다. 십중팔구 아이들은 늘 밖에 나가 일하는 아버지보다 많은 시간을 함께 하는 어머니에게서 말하는 법을 배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히브리 말을 모르게 될 때 어떻게 율법책을 읽을 것이며, 어떻게 거룩한 예배에 참석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방 여인을 취하는 일이 예루살렘 성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자녀들이 유다 말을 하지 못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 자녀들의 신앙교육이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장차 이런 세대가 중심이 될 때는 생각하니 두렵고 끔찍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25절을 보십시오. 느헤미야는 그들을 불러다가 책망하고 저주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랑이 무슨 죄냐고 하자 열을 받았는지 두어 사람을 때리고, 그들의 머리털을 뽑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르되 “너희는 너희 딸들로 저희 아들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 아들들이나 너희를 위하여 저희 딸을 데려오지 않겠다고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라.”고 하였습니다.
느헤미야가 이 문제에 대해 이렇게 강경한 것은 역사를 통해서 이 일의 무서움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옛적에 솔로몬 왕이 바로 이 문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범죄하였습니다. 솔로몬은 열국 중에 비길 수 왕이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저를 왕으로 삼아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그에게 모든 사람보다 뛰어난 지혜를 주시고 부귀와 영화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솔로몬이 이방여인을 취해 아내를 삼았을 때 말년에 우상숭배의 죄를 범케 되었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그래서 느헤미야는 말하였습니다. “너희가 이방 여인을 취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을 우리가 어찌 용납하겠느냐?” 느헤미야가 이처럼 강경하게 불신자와 결혼을 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을 막기 위함입니다. 결국 솔로몬이 이방 여인들과 결혼함으로 왕권과 왕국에 대한 위협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 시대에 잡혼은 제사장직까지 위협했습니다. 28절을 보면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 요야다의 아들 하나가 호론 사람 산발랏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그를 쫓아내고 떠나게 하였습니다. 그는 가정 생활을 거룩하게 하였습니다.
가정은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입니다. 가정은 교회가 있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만드시 기관입니다. 이런 가정이 영적인 가정,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정이 될 때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가정이 살아야 교회가 살고, 교회가 살아야 민족이 산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신앙적인 결혼, 곧 믿음의 결혼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 모임이 이제까지 힘있게 캠퍼스 복음역사와 세계선교역사를 섬길 수 있었던 것도 성경에 기초한 믿음의 결혼을 통해서 복음적인 가정들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가정을 이루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정과 양들을 섬겼을 때 양들의 생명이 살아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끝까지 이런 믿음의 가정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 가운데 이런 믿음의 가정을 많이 세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연말 스탭목자 수양회에서 청교도 연구를 한 교수님으로부터 종교개혁사 특강을 들었습니다. 청교도들은 하나님께 우리를 어떻게 드릴 것인가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그들은 교회와 예배를 개혁하여 오직 하나님께만 예배하고자 했습니다. 이를 통해 온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수단으로 가정을 택했다고 하였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교회보다 가정을 더 중시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청교도 시대에는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남편은 벌금을 물거나 감옥에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들이 가장 중시한 것이 자녀들의 신앙교육이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자녀들이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아니라, 거듭나는 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학교도 신앙교육을 위해 세웠습니다. 성경을 읽을 수 있게 하고자 초등학교를 리딩스쿨로 세웠습니다. 존 카튼 목사는 우리가 자녀에게 성경을 가르치지 않으면 언젠가 지옥에서 부모된 우리를 저주할 날이 온다고 하였습니다. 또 그들은 중등학교는 기독교 고전이나 교리교육을 위해 그램마스쿨로 세우고, 대학인 칼리지를 세워 기독교 지도로서의 삶을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했을 때 이들이 후에 오늘날의 막강 미국의 기초를 놓았다고 했습니다.
아마 느헤미야의 간절한 소원도 백성들이 믿음의 결혼을 함으로써 이스라엘 가운데 이런 영적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수치를 벗고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명예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번성하여 제사장 나라의 본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이런 간절한 기대와 소망 가운데 백성들을 도왔습니다. 이를 위해 백성들이 하나님 백성의 순수성을 지키고,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도록 도왔습니다. 30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와 같이 저희로 이방 사람을 떠나게 하여 깨끗하게 하고 또 제사장과 레위 사람의 반열을 세워 각각 그 일을 맡게 하고” 물론 죄악된 세상을 살아가는 백성들이 순수성을 지키도록 돕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볼 때 순수성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개인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길이요 민족이 살고 번성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힘들 때마다 기도하며 이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자기를 기억하고 축복해 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우리 UBF를 볼 때도 철저하게 말씀대로 살고자 인간적인 것, 세속적인 것과 싸우고 순수하게 살았을 때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이렇게까지 자랐습니다. 우리가 끝까지 하나님 앞에서 순수하고 분명해야 하겠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분명한 진리를 지키고, 믿음의 순수성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금년 한해에도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는 가운데 영적인 분별력을 덧입고 순수성을 지키는 싸움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이 시대의 느헤미야가 되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양들을 사랑하며 순수하고 분명하게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하셨다
느헤미야 12:27-43 / 류영모목사
I. 아름다운 예식
제 친구 가운데 교수 부부가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 은퇴를 잘 했다고 밥을 사겠다고 해서 자리를 같이 했습니다. 젊은시절에는 싸움도 잘 하던, 사네 안사네를 몇 번이나 하던 부부였습니다. 어느덧 둘 다 시니어가 되었습니다. 제가 죠크를 했습니다. 그래도 잘 사셨다고.
그랬더니 부인이 하는 말 목사님 제가 이 사람 만난 거야 로또지요. 목사님 로또가 뭔지 아시지요? 제가 목사지만 로또를 모르겠냐고 안다고 말했습니다. 로또는 안 맞아도 이렇게 안맞을 수가 있구나. 그게 로또랍니다. 평생 한번은 맞겠지 ~ 자꾸 사게 되는 것이 로또다.
우리 인생은 행복을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서울대학교 최인철 심리학 교수가 있습니다. 행복론을 강의하는 교수입니다.
행복이 뭘까? 가로축 세로축이 있대요. 세로축은 재미, 기쁨의 축입니다. 가로축은 만족, 보람, 의미라는 축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경험하는 가운데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는 경험들이 있답니다. 그게 커져야 행복이래요. 똑같이 경험하면서도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는 것들은 있습니다. 또 어떤 경험들은 재미는 있는데 보람이 없는 것들이 있대요. 의미는 있는데 기쁨이 없는 경험들도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정말 인생 살면서 재미있는 것 기쁨이 되는 것, 뿐만 아니라 보람도 되고 의미도 있고 만족할 수 있는 경험이 있어야 인생의 행복이 쌓여져 간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제게 “목사님 평생을 사시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 가장 기뻤던 순간이 언제 입니까?” 묻는다면 그 많은 것들 가운데 반드시 포함되는 한 가지가 있다면 함께 예배드리는 이 비전채플을 건축하고 입당예배 드리던 봉헌식을 하던 그때가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가진 것 없이 교회를 개척하고 섬기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능곡, 마두동 상가 예배 당 시절, 시설의 불편함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어렵사리 마두동 유치원 부지 에 예배당을 짓는 게 제약점이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힘겹게 이 예배당 부지를 구입 했습니다. 오랜 기간 과정을 거쳐서
건축하는 가운데 이 건축을 못보고 죽을지도 모 르겠다는 어려움도 겪었습니다. 그러다 건강도 회복하고 이 비전채플 예배당을 지었 고 드디어 입당 감사예배를 드리던 그날의 감격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교회 창립28주년을 보내며 지난 몇 주 동안 의미있는 예식이 있었습니다.
1) 47명 청소년 입교예식이었습니다.
부모의 믿음을 따라서 유아세례를 받은 자녀들이 이제는 믿음으로 잘 자라서 자기 입으로 신앙고백을 하고 마음으로 믿어 구원받은게 확실하다. 입교예식을 거행하는 데 그 시간이 얼마나 의미가 있었던지 그 철없는 아이들의 눈시울이 빨개졌습니다. 입교하는 자녀들의 목에 십자가를 걸어주고 부모님들이 손을 얹어 축복기도 하는 시간에는 부모님의 눈가에 눈물이 흘렀습니다. 자녀들의 믿음을 세웠다는 기쁨과 감격 이 온 교회 안에 가득한 시간이었습니다.
2) 40분 은퇴하시는 분들 갈렙사역자로 추대하는 예식도 있었습니다. 이제 역할이 잘 마쳤으니 뒷방으로 물러나 조용히 쉬십시오 하는 예식이 아닙니다. 당신들의 헌신과 수고 아름다웠습니다. 당신들의 헌신과 수고로 교회를 세우고 부흥 을 일으켜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행정 사역은 내려놓지만 리타이어(retire), 타이어를 바꿔 끼우고 거룩한 사역, 복음의 사역, 영적인 사역을 위해서 헌신해 주세요. 지금까지도 그랬듯이 어려운 자리에 든든히 서 계셔 주세요. 추대하는 소중한 예식이었습니다. 온 교회가 따뜻했고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간증하곤 했습니다.
3) 그리고 지난 주일 75분 장로, 집사, 권사를 임직하는 예식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장엄했고 질서정연한 예식 가운데 임재하는 성령의 능력, 많은 분들이 이곳 에 임하는 성령의 구름을 경험하는 은혜의 잔치였습니다. 임직 받으시는 분은 물론 예식에 참여한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귀한 잔치 자리였습니다.
믿음 공동체의 예식은 참 중요합니다. 예식의 이유가 있고 성경적, 신학적 의미가 있 습니다. 잘 구연하면 모든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성령의 임재를 느끼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느헤미야와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고 봉헌식을 거행하는 장 면입니다. 백성의 절반은 학사 에스라를 중심으로 찬양하며 시계 반대방향으로 성을 돕니다.
또 다른 백성의 절반은 총독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찬양하며 시계방향으로 성을 돕니다. 두 무리가 성전 앞에서 만나 봉헌식을 거행합니다.
봉헌식을 설명하는 오늘 본문 성벽 규모가 몇 km가 되더라. 건축양식은 어떠하더 라. 아름다움이 어떠한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가문 가 문이 어떻게 헌신하셨는지, 그분들의 명단과 가문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이것이 오 늘 봉헌식입니다.
II. 왜 성벽을 돌았을까?
봉헌예식에 앞서 느헤미야와 영적지도자들은 찬양하며 왜 성벽을 돌았을까요? 왜 이런 성벽돌기 퍼포먼스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저는 성벽을 도는 본문 느헤미야 12장을 읽으며 느헤미야 2:12-17이 겹쳐 지나갔 습니다. 군계일학. 페르시야에서 성공하여 잘 살던 느헤미야에게 하란이란 동생이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벽이 다 무너졌습니다. 성문들이 불탔습니다. 폐허가 된 이 소식 을 전해 듣고 밥을 먹지 못합니다. 잠을 자지 못합니다. 몇날 며칠을 통곡하고 웁니다. 어렵사리 임금의 허락을 받아 예루살렘 성에 도착한 느헤미야는 한밤중에 혼자 몸으로 무너진 성벽을 돌아봅니다. 처참하게 무너진 성벽, 모조리 불타 재가 된 성 문을 보았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울분이 솟아올랐습니다. 성을 지켜야 할 지도자 들은 뭘 했단 말인가? 분노를 억누르고 백성들을 모아 눈물로 호소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일어나십시다. 성을 수축하십시다. 다시는 수치를 당치 마 십시다. 이렇게 어렵게 시작하여 오늘 완성된 성벽 성문을 돌고 있습니다.
성벽을 돌며 어떤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을까요? 성벽 재건 과정에서 있었던 온갖 어려 움과 사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을 것입니다.
산발랏과 도비야. 원수들이 조롱과 공격합니다.
가진 것도 없는 것들이 성을 수축하겠다고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지겠다. 간사하고 잔인한 음모를 매일 일삼습니다.
이런 시련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역사하셨는지 순간순간들이 기억났습 니다. 성벽을 어루만지며 느헤미야는 실성한 사람처럼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찬양 받으세요. 하나님 영광 받으세요.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그 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하나님이 하셨다”입니다.
이런 불가능한 일이 이토록 아름답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순간순간 울컥울컥하는 눈물을 억누르며 돕니다. 백성들의 지도자들이 돌멩이 하나, 벽돌 하나, 나무토막 한 조 각에 묻은 자신들의 눈물과 땀 그리고 헌신의 피를 만지며 돌았습니다.
훗날 건축위원장이 죽거든(1부, 2부에는 제가 죽었습니다) 이곳에서 장례예배를 드 리겠지요. 이 비전채플을 위원장님 관을 메고 한 바퀴 돌지 않을까요?
이 자리는 우리가 엎드려 기도하던 자리인데, 이 자리는 토목공사
마치고 무너지는 철근을 붙들고 울며 기도하던 자리인데, 여기는 골짜기였는데, 여기는 아름드리 나무 가 숲을 이루던 자리, 그 나무를 베던 그 자리인데, 순간순간 벽돌 한 장, 유리 한 장 나무 토막 하나에도 묻어있는 우리의 눈물, 땀이 기억나지 않았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오늘 봉헌식 장면입니다.
III.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보라
“하나님이 하셨다” 이 고백은 비록 느헤미야나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고백은 아닙니 다. 느헤미야 6:15-16 성벽 역사가 52일 만에 끝나는 모습을 보며 방해하고 공격하던 원수들이 두려워하며 고백합니다. 불가능한 일이 이처럼 신속하게 이루어 졌다면 이건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하나님 살아계신다.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이루어진 일이다. 하나님이 하셨다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느헤미야서는 13장 정도되는 짤막한 성경입니다. 이 13장 밖에 안되는 느헤미야서에 “하나님이 하셨다”
하나님이란 단어가 무려 60번이상 등장입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어떻게 시작하셨 는지, 어떻게 마치셨는지,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셨다 ! 이것이 바로 믿음의 사람들의 자서전적인 고백입니다.
여러분이 오늘이 내 생애 마지막 날이라고 한다면 지난 날을 돌이켜 보며 순간순간 하나님이 하셨다고 고백하지 않겠습니까? 그 고난의 시간, 고통의 시간, 내게 힘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배운 것 없는데 물려받은 것 없는데 잘 먹고 잘 살았다. 하 나님이 하셨구나. 아이들에게 말씀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는데 든든히 믿음 지키는 자 녀들을 보며 하나님이 하셨구나. 이 고백을 하지않겠습니까?
백성들이 기쁨의 찬송을 부르며 성을 돌 때 멀리서 방해꾼 산발랏과 도비야가 바라 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성벽을 재건하고 봉헌하는 이 일은 느헤미야가 군계일학 성공한 이후였습니다. 생의 목적이었습니다. 생애 기쁨이요 보람이요 자랑이었던 것입니다.
에스더시대에 유다인들을 진멸하기 위하여 사형대가 높이 매달려있었습니다. 거기에 에스더가 매달리고 모르드개가 매달려야 될 장대였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하나님이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원수 하만이 매달립니다. 당신의 백성들을 향하여 하만 백성들을 향하여 보라!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보라!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지키신다. 당당하고 통쾌한 장면입니다.
850명 이방선지자들과의 대결에서 승리하고 하나님께서 3년6개월동안 하늘을 닫으셨다가 소낙비를 내리십니다. 그 비를 맞으며 엘리야는 퍼레이드를 벌입니다. 임금이 마차에 타라고 했지만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달립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아 보라! 하늘문을 닫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오 하늘문을 여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비를 그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비를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하늘도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땅도 하나님이 주인이시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하셨다.
장대비를 맞으며 퍼레이드를 벌이는 느헤미야의 심장과 얼마나 닮았습니까?
성령의 음성을 듣게 되면 일마다 때마다 하나님이 하셨다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 러나 마귀는 가끔 우리에게 아니야 네가 했다. 너 교회를 얼마나 많이 섬겼니? 그런데 네가 받는 대접이 그 모양이야? 섭섭증을 일으킵니다. 마귀가 하는 말입니다. 그 래 내가 얼마나 수고했는데~ 마귀의 소리입니다.
시골 우물가에 개구리 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자기들은 개구들이 모여 사는 우 물이 전부인줄 아는데 하늘을 보니까 학이 우아하게 훨훨 날고 있습니다. 개구리 한 마리가 “야 멋도 있다.
나도 하늘 한번 날아봤으면 좋겠다.” 학이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네가 날개가 없는데 어떻게 하늘을 날수 있겠니?” “학 형님, 여기 꼬챙이 하나 있어요. 이 꼬챙이 끝을 학 형님이 입에 무세요. 제 가 반대쪽 꼬챙이 끝을 입으로 물고 학 형님이 하늘을 날게 되면 저도 하늘을 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 기막힌 생각이다.”
학이 꼬챙이를 물고 하늘을 훨훨 나릅니다. 우물가를 빙빙 돌면서 훠이 훠이 나 는데 밑에 있는 개구리들이 보니까 기가 막힙니다. “친구 개구리가 하늘을 난다. 야 저 꾀를 누가 냈을까? 지혜가 놀랍다. 아무개 개구리가 하늘을 난다. 저 꾀를 누가 냈을까?” 그때 하늘을 날고 있던 개구리가 그걸 못참고 내가 했지. 내가 ~ 입을 여는 순간 개구리는 땅바닥을 향하여 곤두박질 치는데 그 다음날부터 그 개 구리가 눈에 보이지 않더라. 내가 했지.
♪하나님이 선택하셨고 예수님이 구속하셨고 성령님이 인치셨으니 삼위일체 하나님 찬양 ~ 죄 많은 나를 구원하신 일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예수님이 함께하시고 성령님이 능력주시니 삼위일체 하나님 찬양 ~ 목장 사역에 성벽을 이룬 것, 다음 세대 자녀들의 성벽을 이룬 것도, 예배를 이토록 아름답게 섬겼던 아름다운 성벽, 가난한 자 약자들을 섬겼던 아름다운 성벽, 내 곁에 사람들이 실망하고 좌절하고 넘어져 있을 때에 기도와 말씀으로 저들을 일으켜 세웠던 사람의 성벽, 가진 것도 없는데 내가 이룬 사업들, 일터에 행복했던 일들, 우리 가정을 믿음으로 세웠던 일들, 내가 쓰러지고 넘어지고 도무지 일어날 수 없을 때 힘주시고 내 손 붙들어서 오늘까지 인도하신 분, 하나님이 하셨습 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이게 우리들의 신앙고백입니다. IV. 성벽 청결 예식
오늘 본문 30절 성벽을 돌기 전 재미있는 예식을 거행합니다. 성결예식입니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몸을 정결하게 하고 또 백성과 성문과 성벽을 정결하게 하니라” 사람을 정결하게 할 뿐만 아니라 성문과 성벽까지 성결하게 합니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하나님이 이루신 역사를 돌아보기 전에 우리 마음을 거룩하게 하고 우리가 했던 이 역사 하나 하나를 거룩하게 하여 하나 님께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성벽 재건과정에서 기쁨으로만 일했겠습니까? 불평할 때도 많았습니다.
뒤에서는 지도자 느헤미야를 원망했을 것입니다. 피곤에 지칠 때마다 다투기도 했습 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하나님의 역사를 볼텐데 산발랏이 쳐들어왔을 때에 이러다가 우리 다 죽는 것 아니야. 불신앙의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성벽, 성문까지 성결하게 했습니다.
성벽을 돌며 누구는 이렇게 길게도 잘했네. 아무개 가문은 이게 뭐야? 이걸 공사라고 했어? 아마 비교의식을 가지고 백성들의 마음이 나뉘어 졌을 것입니다.
느헤미야와 제사장들이 성결예식을 통해 다 아름답다. 가문들마다 수고했다. 이 성 문을 매단 가문 잘했다. 우리가 이 성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자. 모 두 하나님이 하셨다. 모두 최선을 다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아름답다 깨끗하다 하나님이 받으셨다. 그게 성벽 성결예식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우리가 이룬 성벽들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이 귀하다 소중하다 축복하는 순간입니다.
V. 봉헌예식은 감사와 기쁨의 마음을 드리는 것
오늘 예배시간 우리는 여러 곡의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 찬송은 찬양팀이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예배의 주제가 있고 찬송, 설교 등 모든 순서는 그 예배 주제와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성벽 봉헌예식의 주제가 “감사 찬송”입니다.
31절 38절 40절 46절 감사 찬송을 부르며 돌았다. 모든 백성이 감사의 노래를 불 렀다. 감사 찬송이란 말이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집 없는 서러움과 고통을 견디어 내고 20년 30년 허리 동여매고 집 한 채 장만하여 이사하는 가정처럼 온 가족이 둘러 앉아 감사예배를 드릴 때 그 감격이 오죽했을까요? 무너진 성벽, 불탄 성문, 사마리아에 종을 갖다 바칩니다. 원수들이 쳐들어 올 때마다 산아 나를 숨겨다오. 바위야 나를 감추어 다오. 어린 자식 품에 안고 도망 다 니던 일이 생각납니다. 농사 지었지만 먹고 살 길이 없어서 나무껍데기 벗겨 먹던 그 때 일이 생각납니다. 지금은 아름답게 성벽이 완공되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이 백성을 지키신다는 사인입니다. 성문이 튼튼히 세워졌습니다. 그 성벽을 돌면서 감사 와 감격이 오죽했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느헤미야가 성문이 불탔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가슴 아파한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습 니다. 페르시아 왕을 움직여 조서와 물자를 주신 분도 하나님이 해 주셨습니다. 산 발랏과 도비야의 못된 공격을 이기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 막으신 것입니다.
먹을 것 이 없어 자식들을 종으로 팔 때에 하나님이 모든 백성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주셔서 서로 도우며 성벽을 완공했습니다.
약하디 약한 자신들을 통해 성벽과 성문에 잘 세워진 모습을 돌아보며 어찌 눈물을 안 흘렸겠습니까? 왜 감격스럽지 않았겠습니까? 감사 찬송이 쏟아져 나오지 않았겠 습니까?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지금까지 쌓아온 여러분의 인생의 성벽을 돌아보며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 마음이 내 속에 솟아오르면 여러분은 잘 사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절 43절을 보십시다.
“이 날에 무리가 큰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 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 아이도 즐거워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이 즐거워하는 소리 가 멀리 들렸느니라”
이 행복감을 한 절 가운데 즐거워했다는 말이 4번씩이나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저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기쁨의 감정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즐거움. 감사와 기쁨은 가졌다 못 가졌다. 많이 가졌다 적게 가졌다의 문제가 아니 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으니 하나님이 지켜주셨으니 부족해도 하나님이 소중 하다 말씀해 주셨으니 하나님 앞에 내 인생을 높여 드리며 감사 찬송을 부르는 장 면입니다.
♪무화과 나뭇잎이 마르고 포도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 열매 그치고 논밭에 식물이 없어도 우리에 양 떼가 없으며 외양간 송아지 없어도 (7가지가 없데요.) (그런데) 난 여호와로 즐거워하리난 여호와로 즐거워하리 난 구원의 하나님을 인해 기뻐하리라
이게 내 인생에 마지막 노래인 것입니다.
얼마나 잘 먹고 잘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셨으니 어려운 일 가운데도 좋은 일 가운데도 고난의 순간에도 시련의 순간에도 승리했던 그 순간에도 하나님이 이루셨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
하나님이 기다리는 그곳으로 모든 것 내려놓고 내가 하나님 앞에 서면서 불러야 될 찬송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살아 있는 예배의 4가지 요소
느 12:27~43 / 류영모목사
I. 감격의 성벽돌기 퍼포먼스
슬기네 가족은 주일마다 온 가족이 나란히 앉아 예배를 드립니다. 슬기 할아버지는 의자에 앉자마자 졸다가 잠이 들어버립니다. 아버지가 슬기에게 “오늘은 할아버지가 조실 때마다 깨워드려라. 잘하면 예배 끝나고 5천원을 주마” 약속을 했습니다.
슬기는 할아버지가 졸아도 주무셔도 깨울 마음이 없습니다. 예배 후에 “왜 깨워드리지 않았느냐”고 물었지요. 슬기 왈 “할아버지가 안 깨우면 1만원을 준다고 했거든!”
주일마다 우리가 감동적인 예배, 살아있는 예배를 드린다는 건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살아있는 예배는 교회를 살리고 성도를 살립니다. 좋은 예배가 좋은 교회를 만듭니다. 이 시간에는 “살아 있는 예배의 4가지 요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12장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고 봉헌예배를 드리는 장면입니다. 느헤미야는 봉헌 예배 전에 먼저 레위인을 찾습니다. 먼저 성가대를 조직하고 훈련을 마칩니다.
성전 제사가 위기를 맞고 있는 상황 속에서 레위인들은 멀리 흩어지지 아니하고 예루살렘주변에 대기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한 공군조종사 10분 대기조 같은 사람들입니다.
봉헌예배에 앞서 느헤미야와 에스라는 성벽돌기 퍼포먼스를 합니다. 총독 느헤미야가 찬양대 절반, 백성의 절반을 이끌고 성벽 위에 올라 시계 방향으로 성을 돕니다. 제사장 에스라는 또 다른 찬양대 절반과 백성의 절반을 이끌고 시계 반대방향으로 돕니다.
봉헌예배를 설명하는 오늘 본문은 성벽의 규모가 어떠하더라, 높이 넓이가 어떠하더라, 건축 양식이 어떠하더라,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튼튼하더라 하는 얘기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 일에 헌신한 사람들, 가문의 이름이 기록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봉헌예배를 예배되게 하는 4가지 요소를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벽을 돌 때 만 가지 생각이 머릿 속에서 스쳐 지나갔을 겁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을 부르셨고 역사하셨는지, 어떤 위기가 있었고 이 위기를 어떻게 이겼는지, 백성들이 눈물겹게 어떻게 헌신했는가 하는 것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습니다.
성벽을 도는 본문 느헤미야 12장을 읽다보면 1장, 2장이 눈 앞에 겹쳐 지나갑니다. 페르시아에서 포로의 자식으로 성공하고 잘 적응하여 살고있던 어느날 동생 하나니로부터 조국의 성벽은 무너지고 성문은 불에 타버린 비참한 소식들 듣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가슴을 부둥켜안고 금식하며 통곡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처럼 튼튼하게 성벽이 재건되었습니다.
그 감회가 어떠했을까요? 눈물이 앞을 가리지 않았을까요? 어렵사리 임금의 허락을 받아 예루살렘 성에 도착한 총독 느헤미야 한밤 중 말을 타고 혼자 몸으로 성을 돌아보다가 쓰레기더미에 막혀 발길을 돌려야 했습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을 모아놓고 어쩌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 꼴이 되었습니까? 성벽을 재건합시다.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마십시다. 설득합니다.
금식하며 울던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 온 백성이 성벽에 올라 찬양하며 성을 돌고 있는 이 모습이 감격스럽기만 합니다. 쓰레기 더미에 막혀 발길을 돌리던 돌리던 그 날밤을 생각하면 잘 정리정돈된 예루살렘 성이 기적 같기만 합니다. 왜 눈물이 쏟아지지 않았을까요? 왜 저절로 감사가 터져나오지 않았겠습니까?
성을 돌며 성벽 재건 과정에서 있었던 온갖 어려움과 아팠던 일들이 스쳐 지나갑니다. 산발랏과 도비야, 원수들의 조롱과 공격이 얼마나 심했습니까? 아무것도 없는 것들이 이 엄청난 일을 하겠다고? 너희들이 세우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질거야. 그런데 지금 성벽 위에 모든 주민이 올라가서 돌고 있습니다. 반역자의 프레임을 씌우고 못된 페이크 뉴스를 만들어 퍼뜨리던 자들의 소행이 다시 생각납니다. 심지어 암살 음모를 꾸밉니다. 그러나 ♪이 또한 지나가리라. 모든 위기는 지나갔습니다. 온갖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되었습니다.
성벽을 어루만지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레위인 찬양대의 아름다운 찬송이 가슴을 더욱 벅차게 만듭니다.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일들이 이루어졌습니다. 저절로 입에서 “하나님 감사해요. 하나님이 하셨어요”가 터져 나옵니다.
은혜 중 성벽재건 공사가 완성되어졌을 때에 수문 앞 광장에 백성들이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함께 울던 일, 무려 천년만에 초막절을 함께 지키며 기뻐하던 일들이 꿈만 같습니다.
더구나 지금 이 성벽, 성문 공사를 마치고 하나님이 하셨다고 고백하는 봉헌예배를 드립니다. 이보다 더 큰 감격이 어디 있을까요? 이보다 더 아름다운 예배가 어디 있을까요?
II. 정결의 예배 : 하나님이 하셨다
에스라, 느헤미야는 감격에 겨워 울고 있지만은 않았습니다. 예배는 감정을 해소하는 카타르시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마냥 기쁘다고 노래하고 춤을 추며 심벌즈를 치고 하프와 수금을 연주하는 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배는 기뻐하고 즐기는 일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들은 그동안 수고와 헌신을 아끼지 않은 백성들에게 복을 달라고 비는 모습도 눈에 띄지 않습니다. 예배는 위복타령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의 오늘 봉헌예배를 잘 살펴보면 오늘 우리의 예배에 반드시 잊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예배는 어떤 예배일까요? 죽은 예배는 어떤 예배일까요? 살아있는 예배는 어떤 요소들이 있어야 할까요? 살아있는 예배의 첫 번째 요소는 “정결”입니다.
본문 12:30절 말씀을 보십시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몸을 정결하게 하고 또 백성과 성문과 성벽을 정결하게 하니라” 예배하는 목적, 자세가 정결해야 한다는 겁니다. 제사장도 백성도, 성벽도 성문도 예배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모두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정결이란 순수하다. 깨끗하다는 뜻입니다. 더러운 것은 씻고 닦습니다. 오염된 것은 불로 태웁니다. 봉헌예배를 드리는 모두의 마음을 정결하게, 순수하게 했다는 겁니다. 예배에 내 욕망, 내 욕구, 내 추한 동기들이 끼면 안됩니다. 내 집을 장사하는 소굴로 만들지 말라고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교회와서 예배드린다고 하면서 교회를 섬긴다고 하면서 내 장사할 수 있다는 겁니다.
성결이란 키질을 하여 곡식을 고른다는 뜻입니다. 쭉정이는 날려 보내고 알곡만 남기는 것입니다. 정결이란 양을 잡아 제사를 드릴 때에 흠없는 깨끗한 양을 의미합니다.
정결이란 오직 “하나님이 하셨습니다”하는 고백입니다. 느헤미야도 에스라도 제사장들도 족장들도 자신의 공로의식을 버리는 것입니다.
느헤미야서는 13장으로 구성된 짤막한 성경입니다. 이 13장 밖에 안되는 느헤미야에 하나님이란 단어가 무려 60번 이상 등장합니다. 성벽재건 과정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시작하셨는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을 마치셨는지를 드러내는 책이 느헤미야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이 고백이 정결입니다.
내 생애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설 때에 하나님께서 제게 면류관을 씌워주시면 ♪ 면류관 벗어 주 앞에 드리세. 나는 죄인입니다. 무익한 종이로소이다를 고백하며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제가 한 것 없습니다.”를 고백하는게 정결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하셨습니다”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면류관 벗어서 주 앞에 드리세 나는 죄인이요 무익한 종이로소이다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850명 이방선지자들과의 대결에서 승리하고 하나님께 비를 달라고 기도합니다. 드디어 3년 6개월동안 닫혀졌던 하늘문이 열리고 장대비가 쏟아집니다. 이 비를 맞으며 엘리야는 백성들 앞을 달립니다. 아합 왕의 마차 앞을 달려갑니다.
백성들아 보라! 하나님이 하셨다. 아합아 보라! 하나님이 참 신이시다. 하늘의 주인도 하나님이시고, 하늘을 닫고 여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땅의 주인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하셨다. 하나님을 자랑하며 엘리야는 달립니다.
느헤미야와 에스라는 성벽에 올라 에워싸고 돌며 “오직 하나님이 하셨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정결입니다.
예배의 첫 번째 요소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오늘이 예배의 주인도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나를 구원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요 역사를 심판하실 심판주이십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식하고 하나님이 하셨다고 외치는 것이 예배입니다. 이것이 예배의 첫 번째 정결예배입니다.
우물에 개구리들이 개굴개굴 놀고 있었습니다. 우아하게 학 한 마리가 날아 갑니다. 개구리가 날아보겠다고 팔짝 뛰었지만 퐁땅 빠집니다. 개구리 한 마리가 학에게 요청을 했습니다. “학 형님, 저도 하늘을 날고 싶어요.” “네가 어떻게 하늘을 날겠니” “여기 막대기가 하나 있는대요. 형님이 이 막대기를 물면 저도 끝에서 막대기를 물고 형님이 날으면 저도 하늘을 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야 재미있겠다.” 학이 막대기를 물고 꾀를 낸 개구리가 막대기 끝을 물었습니다. 하늘을 나르는데 개구리가 하늘을 날고 있거든요. 온세상 개구리들과 우물 안에 개구리들이 개굴개굴 “야 신기하다. 개구리가 난다. 하늘을 나는 기가막힌 아이디어를 누가 냈을까?” 그랬더니 개구리가 하늘을 날다가 입을 벌려서 “내가 했지!” 땅바닥에 팔딱 떨어져 죽었답니다.
문득 문득 교회를 섬기다가, 우리가 구원론을 얘기하다가 내가 했지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입을 닫는 겁니다. 나를 구원하신 이 역사 누가 이루셨습니까? ♪하나님이 선택하셨고 예수님이 구속하셨고 성령님이 인치셨으니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 찬양
III. 감사의 예배
살아 있는 예배의 두 번째 요소는 “감사”입니다.
오늘 본문에 레위인들을 모아 찬양대를 조직하고 부른 모든 찬송의 주제는 감사였습니다.
27절 감사하며 노래하며 31절 감사 찬송하는 자 38절 감사 찬송하는 다른 무리
40절 감사 찬송하는 두 무리가 46절 감사하는 노래를 하였음이며 짤막한 본문 안에 감사했다는 말이 5번씩이나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건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되새기는 겁니다. 영어의 감사 thank이란 말과 생각 think이란 말은 그 어원이 꼭 같습니다. 감사는 감사한 일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잊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고 누리는 은혜 가운데 그 무엇도 당연한 것은 없습니다. 내가 은혜 받을 당연한 자격이 있다고 착각하면 감사 대신 불평이 터져나옵니다. 구원받을 자격도 공로도 선행도 조건도 내겐 없습니다.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내게 빚진 것이 없습니다. 빚진 자는 바로 나입니다. 우리는 그 어떤 선물도 누릴 자격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라는 말과 감사라는 말도 동의어입니다.
장애인 사역단체인 “가브리엘집”에 퇴학을 당할 수 밖에 없는 한 중학생이 사회봉사명령을 받고 왔습니다. 중학교 2학년 남자아이 소개서엔 “학교에서 포기한 학생, 약한 친구 괴롭히기, 상습폭행, 상습도박, 거짓말 욕설을 입에 달고 다님.”
첫날부터 원장은 이 아이에게 반겨 웃어주며 잘 왔다. 네가 꼭 우리 집에 필요하다. 아이들을 좀 도와주라고 제안합니다. 아이에게 감사일기장을 선물로 주며 하루 5가지씩 감사한 일을 찾아 적어보라고 합니다. 언젠가부터 아이의 감사일기장이 빼곡이 채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지하철에서 자리가 없어 앉지 못했지만 손잡이가 있어 감사했다.” “나같이 나쁜 아이를 포기하지 않고 기다려주고 기도하는 어머니가 있어서 난 복 받은 아이다.” “내게 꿈과 희망이 생긴게 너무 감사하다.”
“거짓말이 얼마나 나쁜 것인지 알게 되어서 감사하다.”
“정직이 이처럼 행복한 것인가를 알게 되어 감사하다.”
“다른 아이들이 버린 쓰레기가 내 쓰레기처럼 느껴지는게 신기하다.”
감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입니다.
감사는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예배입니다.
감사는 나를 행복하게 하는 예배입니다.
남편이 수줍은 듯 아내에게 장미 한송이를 들고 들어왔습니다. 아내는 천하를 받은 것처럼 깜짝 놀라며 감사를 표현합니다. 남편 마음 속에 다음에는 한송이가 아니라 한다발을 가져와야지. 한다발을 가져옵니다. 아예 졸도 감사합니다. 남편이 또 결심합니다. 다음에 더 좋은 걸 가져와야지. 5만원짜리로 꽃을 만들어서 가져옵니다. 아예 기절초풍하고 넘어졌습니다. 남편이 다음에는 꽃 한송이에 금반지 대롱대롱 매달아서 들어오는 겁니다.
장미 한송이 수줍은 듯 들고 들어오는 남편에게 아내는 시큰둥 길바닥에 떨어졌었어? 거기 둬. 어쩐 일이야? 고맙네. 영혼없는 인사를 합니다. 이 여인은 다시는 꽃 구경 한 적이 없었더라.
IV. 기쁨의 예배
살아있는 예배의 세 번째 요소는 기쁨입니다.
오늘 본문이 느헤미야 12:27로 시작하여 43절로 끝이 납니다. 시작하는 27절에서 즐거이 봉헌식을 행했다고 시작합니다. 기쁨으로 시작합니다. 마지막 43절에서는 한절 안에 온 백성이 봉헌예배를 드리며 즐거워했다는 말이 4번씩이나 반복합니다. 히브리어의 반복은 최상급을 의미합니다. 극한의 기쁨으로 드린 예배였다는 겁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영광입니다. 그러나 그 영광은 예배하는 자에겐 큰 기쁨으로 임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예배자의 기쁨은 반대개념이 아니라 같은 개념의 다른 표현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될 때 우리에게는 기쁨이 되는 것이고 우리가 감사와 기쁨으로 예배할 때에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목회를 시작하며 처녀 목회지에서 설교했던 첫 번째 책이 「축제가 있는 교회」입니다. 저는 목사로서의 꿈이 있습니다. I have a dream. 우리 성도들이 모두 행복하게 예배하고 행복하게 교회생활을 하는 겁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꿈이 있다면 여러분들의 행복, 기쁨의 예배입니다. 교회 와서도 지옥에서 출장나온 얼굴을 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안타깝습니다.
성도는 지옥같은 세상에서 지옥처럼 살다가 죽어서나 천국에 가는게 아닙니다. 성도는 천국같은 세상에서 천국처럼 살다가 영원한 천국에 가는 겁니다.
주일은 기쁨을 얻는 날입니다. 예배는 기쁨으로 드리는 겁니다.
♪ 주 음성외에는 참 기쁨 없도다 날 사랑하신 주 늘 계시옵소서
기쁘고 기쁘도다 항상 기쁘도다 나 주께 왔사오니 복 주옵소서. 이게 예배입니다.
V. 드림의 예배
살아 있는 예배의 마지막 네 번째 요소는 헌신 즉 드림의 예배입니다.
느헤미야 12:44-47에 보면 지금까지 성전 곳간이 비어 있어서 사역자들이 성전을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봉헌 예배와 함께 감사와 기쁨의 예배를 드린 백성들이 일제히 십일조와 풍성한 감사 예물을 드림으로 성전이 활기를 되찾고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습니다. 은혜를 받습니다. 구원을 받습니다. 성령의 임재를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 보면 에배는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 본다고 말하지 않고 예배 드린다고 합니다. 살아 있는 예배는 4번째 요소는 드림의 예배입니다.
느헤미야서를 공부하고 있습니다만 다음장 13장에도 나옵니다. 느헤미야서 안에 십일조와 봉헌 이야기가 왜 이리도 많이 나올까요? 먹고 살기조차 벅찬 위기시대였습니다. 이때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것을 돌려드린다는 것은 십일조와 봉헌이 그만큼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경제적 위기시대에 드리는 십일조와 봉헌이 진짜 신앙이더라는 것입니다. 어떤 위기 중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을 타협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것을 갚아 주시겠다. 그게 바로 느헤미야서에 등장하는 봉헌의 사건들입니다.
에덴동산 이후 인간은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이 예배에서 인간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 하나님께 열납되느냐 거절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이 결정되어집니다. 명운이 결정되어집니다. 미래가 결정되어집니다.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거절하심으로 가인은 제물과 함께 버림을 받습니다. 아벨은 그 제물을 하나님이 받으셨습니다. 그 예배와 함께 아벨의 자손 대대가 하나님 앞에 열납된 것입니다. 이게 바로 예배입니다.
<결 론>
오늘 본문은 느헤미야가 성벽재건을 마치고 하나님께 봉헌예배를 드리는 장면입니다. 이 봉헌 예배를 통해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엔 어떤 요소가 있어야 하는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예배는 정결의 예배, 감사의 예배, 기쁨의 예배, 드림의 예배가 있습니다.
언젠가 내가 죽어 교회에서 천국환송예식을 할 때 장지에서 운구행렬이 마당에 도착합니다. 장로님 한 분이 “우리 목사님 이 비전채플 세우면서 얼마나 가슴앓이를 했습니까? 비전채플이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영광의 예배처소가 되기 위해서 생애를 바쳤던 분인데 우리가 이 예배당을 한 바퀴을 돌고 들어갑시다.” 비전채플 예배당을 한바퀴 돕니다.
로비층 마당에 도착하면 함께 건축했던 분들이 토목공사를 끝내고 공사 중단 되어졌어요. 거북이 등처럼 마당이 쩍쩍 갈라질 때에 제가 설교 시간에 그렇게 말했습니다. 내 자식들이 병석에 드러누워도 이렇게 마음이 아플까? 그때 일이 생각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이 동산을 구입했지만 개발이 안 되는 땅입니다. 7년동안 눈물로 기다리고 또 기도하고 기다렸던 그때 가슴앓이들. 그리고 성도님들 행복하게 해 드리기 위해서는 통로가 시원해야 된다고 믿었기때문에 남문에서 들어오는 그 길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천정부지의 비용을 드리고 온갖 막힌 행정 통로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예배당 건축하다가 병이 들어서 저는 공사를 못 보고 죽는 줄 알았지요. 저를 업고 예배당 공사 철골을 오르던 장로님들이 우리 목사님 그때 이렇게 아프고 애를 쓰시고 가슴앓이를 하셨는데... 온갖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 지나가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찬양대의 찬양과 함께 이곳에 앉아서 천국환송예배를 드렸다. 그 얘기가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마지막 한 번의 예배가 있다면 우리는 어떤 예배를 드릴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제가 한 것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고백이 우리 안에 가득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일들을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함으로 감사가 가슴 깊은 곳에서 터져 올라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늘을 나르고 춤을 추고 찬양하는 극한의 기쁨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최고, 최선의 봉헌의 드림의 예배가 살아있는 예배라고 오늘 본문은 웅변하고 있습니다.
행복한 교회와 성도
느 12:40-43 / 이규왕목사
우리는 누구를 막론하고 가정과 직장과 교회에 속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 중에 어느 하나만을 선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은 가정이나, 직장이나 교회나 어디서든지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행복한 삶은 가정과 직장과 교회 중에 하나가 아니라 가정과 직장과 교회가 분리될 수 없는 균형적인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돈만 있으면 행복하게 되는 줄 알고 직장과 사업 때문에 가정을 소홀히 하거나, 가정을 핑계하고 교회를 소홀히 하는 것은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바로 알지 못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은 가정이나 직장이나 교회나 어느 한 쪽에 치우쳐 균형이 깨진 삶을 살기 때문에 가정이나 직장이나 교회 안에서 잘못된 인간관계로 말미암아 상처를 주고받는 불행한 삶을 살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야 할 축복은 사업에 성공하는 것만이 다가 아니라 행복한 가정과 더불어 행복한 교회생활을 하고 있는 것임을 깨닫고, 이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행복한 교회 생활을 하는 성도가 어떤 사람인지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그 답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1. 하나님께 봉헌하는 사람들
세상 어느 민족보다 죄와 상처와 고난이 많은 민족이 있다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 민족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지정학적으로 강대국에 욱여 싸여 강대국의 침략을 받아 멸망을 당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포로로 끌려가서 노예가 되어 짐승처럼 살아야 했습니다.
그 같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무슨 즐거움과 기쁜 추억이 있었을까요? 아마도 기억조차 하기 싫은 아픈 상처뿐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이스라엘 민족을 특별히 사랑하셔서 강대국의 손에서부터 자유와 해방을 얻어 꿈에 그리던 예루살렘으로 무사히 귀환하게 하셨습니다. 얼마나 기쁨과 감격이 컸을까요?
그러나 그 기쁨도 잠깐 뿐이었습니다. 꿈에 그리던 예루살렘은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오래 동안 방치한 상태였기 때문에 정착하기 어려웠습니다. 가장 시급한 것이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고 예루살렘을 회복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온갖 훼방과 고난을 무릅쓰고 52일 동안 한 손에는 병기를 들고 훼방하는 적을 방어하고 한 손에는 연장을 들고 밤낮을 가라지 않고 열심히 일하고 성을 쌓아 마침내 52일 만에 성을 완공했다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 성이 완공되었다는 기쁨보다는 그동안 자나 깨나 죽도록 성을 쌓는 일에 전념하였기 때문에 육신적으로 매우 지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슨 기쁨과 행복이 있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성경 본문을 보게 되면 그와 같이 아픔과 상처뿐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한 때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느 12:43) 이 날에 무리가 큰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 아이도 즐거워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이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
1) 불과 한 절 안에 ‘즐거워’라는 말이 네 번이나 반복되고 있으며,
2) ‘심히, 크게, 멀리 들렸다’고 한 말씀처럼 큰 즐거움이며,
3) 한 두 사람이 아니라 어린아이들조차도 다 함께 즐거워하였으며,
4)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미완료로 지속적인 즐거움이며,
5) 그 주체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신 즐거움입니다.
우리 주변에 아무리 즐거운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큰 즐거움은 보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물론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오늘 성경 본문에 나타난 기쁨과는 비교가 될 수 없는 기쁨들이라는 것입니다.
1) 예루살렘 성을 52 일이라는 단시일에 기적적으로 재건하였을 때이고,
2) 오랜 세월동안 중단되었던 제사를 하나님께 다시 드렸을 때이고,
3) 수문 앞 광장에서 에스라가 읽어주는 성경을 듣고 은혜를 받았을 때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와 같은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을 누리게 하였을까요?
그것이 바로 완공된 예루살렘 성벽을 하나님께 제물처럼 받혀 드리는 봉헌식 제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그와 같은 큰 기쁨을 이스라엘 온 백성들이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느 12:27) 예루살렘 성벽을 봉헌하게 되니 각처에서 레위 사람들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데려다가 감사하며 노래하며 제금을 치며 비파와 수금을 타며 즐거이 봉헌식을 행하려 하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갖가지 고난을 감수하면서 예루살렘 성을 재건한 궁극적인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를 나타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을 재건한 목적이 자기들의 소유로 삼고 안일과 평안을 위해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봉헌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하나님께 봉헌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 성을 가져가시거나 세를 받으시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봉헌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의 주인이요, 왕이시오, 통치자가 되시고 그 예루살렘 성에 사는 자기들은 그 하나님의 통치에 절대 복종하며 살겠다는 헌신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노래하며, 악기를 연주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예루살렘 성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제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과거 어느 때도 경험한 적이 없는 큰 기쁨과 즐거움의 복을 부어주심으로 행복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행복한 교회는 예배를 참석하는 성도들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좀더 받겠다는 영적인 이기심으로 모이는 교회가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의 전인격을 올려 드리는 심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이 모인 교회인 것입니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만일 우리가 그러한 마음으로 교회를 출석하고 예배를 드린다면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이 드리는 예배를 기쁘게 받으시고, 또한 우리들에게 큰 기쁨과 즐거움의 복을 내려 주심으로 행복한 성도가 되고 행복한 교회가 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잠 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2. 서로 화합하는 사람들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돌들을 서로 연결하여 쌓는 일이었습니다. 만일 돌과 돌 사이에 틈이 생기게 되면 적군이 쉽게 성을 무너뜨릴 것입니다.
그러나 성벽을 쌓는 돌을 서로 연결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과 마음이 마치 성벽의 돌들처럼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만일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지 못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벽을 재건하지 못하도록 훼방하던 산발랏과 도비야의 도전을 극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서로 마음을 같이 하여 화합하는 일은 성벽을 재건할 때만이 아니라 재건된 성벽을 하나님께 봉헌하는 일에 있어서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예루살렘 성벽을 봉헌하는 일 역시 한 두 사람이 아니라 전 이스라엘이 백성들이 서로 하나가 합심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각종 악기를 연주하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무리를 좌우편 두 그룹으로 나누어 성벽을 행진하는 일에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가 되어 일사분란하게 협력하였습니다.
1) 이스라엘 각처에서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룰 정도였습니다.
(28) 이에 노래하는 자들이 예루살렘 사방 들과 느도바 사람의 마을에서 모여들고 (29) 또 벧길갈과 게바와 아스마웻 들에서 모여들었으니 이 노래하는 자들은 자기들을 위하여 예루살렘 사방에 마을들을 이루었음이라
물론 사람들이 각처에서 먹고 살기에 바빴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성을 하나님께 봉헌하는 일을 위해 만사를 제쳐 놓고 다 예루살렘 한 곳으로 모였습니다.
2) 제사를 드리기에 앞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론 성문과 성벽까지 정결하게 하였습니다.
(30)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몸을 정결하게 하고 또 백성과 성문과 성벽을 정결하게 하니라
과거에 조상들은 형식적인 제사로만 만족하였으나 예루살렘 성벽을 봉헌하고자 하는 무리들은 제사의 형식보다 성결하게 하는 일을 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을 때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셨습니다.
3) 이스라엘 각처에서 모인 사람들의 수가 많아 한꺼번에 성을 돌수 없기 때문에 두 그룹으로 나누어 성을 돌았으나 두 그룹이 결국 하나님의 전 앞에서 함께 만났습니다.
(40) 이에 감사 찬송하는 두 무리가 하나님의 전에 섰고 또 나와 민장의 절반도 함께 하였고
그와 같은 심정으로 서로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예루살렘 성을 봉헌하는 제사를 드리게 될 때 하나님께서 그 봉헌식에 참여한 자들의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큰 기쁨을 부어주심으로 온 백성들이 즐겁게 하나님을 찬송하였을 때 그 소리가 멀리까지 들렸다고 하였습니다.
(43) 이 날에 무리가 큰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 아이도 즐거워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이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
하나님은 가족과 이웃과 교우들이 서로 하나가 되어 사랑하고 협력하여 일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반면, 사탄은 정 반대로 잘 모이지 않게 하고 억지로라도 모이게 되면 서로 반목하고 분쟁하고 분열하게 하는 일을 해오고 있습니다.
그 결과 창조주 하나님과 그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과 불화하고 인간들끼리 반목하고 불화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세상에 교회를 세우신 것은 교회를 통해서 사람들이 모이게 하시고, 모인 사람들이 예수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협력하고 화합하는 가정과 사회와 국가와 교회를 축복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시 133:1)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골 2:2)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오늘도 주님의 몸된 교회 안에서 그 같은 원리가 동일하게 적용되어져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한 교회 안에서 사람마다 맡은 직분이나 업무가 각기 다를 수 있습니다. 이를 테면 찬양대원과 주일학교 교사의 하는 일과 목사 장로 집사라는 직책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슨 직책이나 직분이든지 막론하고 그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공동 목표아래 서로 하나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모여 예배하는 교회가 바로, 분쟁과 갈등이 많은 현대 교회 가운데서 행복한 교회인 것입니다.
3. 주의 일에 충성하는 사람들
예루살렘을 완공하였으나 그것이 다가 아니라 예루살렘 성을 잘 유지 하는 일이 보다 더 중요하였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각 계층의 사람들을 보다 더 많이 예루살렘 성안에 정착시켜 강대한 성읍이 되게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에 거주하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기피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 지도자들이 솔선수범하고, 2) 제비 뽑힌 십분의 일과, 자원하는 사람들로 필요한 인력을 충원하여 각기 자기가 해야 할 일들을 분담하게 하였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의 이름이 바로 그와 같은 역할을 담당한 사람들입니다.
1) 제사장들과 형제의 지도자들
(7) 살루와 아목과 힐기야와 여다야니 이상은 예수아 때에 제사장들과 그들의 형제의 지도자들이었느니라
2) 찬양하며 감사하는 자들
(24) 레위 족속의 지도자들은 하사뱌와 세레뱌와 갓미엘의 아들 예수아라 그들은 그들의 형제의 맞은편에 있어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명령대로 순서를 따라 주를 찬양하며 감사하고 (36) 그의 형제들인 스마야와 아사렐과 밀랄래와 길랄래와 마애와 느다넬과 유다와 하나니라 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악기를 잡았고 학사 에스라가 앞서서
3)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들(25절)
(25) 맛다냐와 박부갸와 오바댜와 므술람과 달몬과 악굽은 다 문지기로서 순서대로 문안의 곳간을 파수하였나니
비록 성문을 여닫는 하찮은 일이지만 각자 맡겨진 일에 꾀를 부리지 않고 최선을 다하여 충성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45)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결례의 일을 힘썼으며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도 그러하여 모두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의 명령을 따라 행하였으니
여기서 ‘힘썼다’는 말은 와우 계속 미완료 동사로서 지키고 보존하고 준수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는 뜻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그와 같은 일들이 인간들이 보기에는 마땅히 해야만 하는 일이고 대수롭지 않은 일인 것 같은데도 그 일에 힘써 충성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그 이름들을 성경에 기록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오늘도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묵묵히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 충성하는 성도가 누구인지 다 아시고 착한 종이라고 칭찬하시며 또한 그 이름을 하늘 생명책에 기록해 놓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빌 4: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직분이나 직책은 수직적인 감투가 아니라 달란트 비유와 같이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이며 은사입니다.
달란트를 많이 받았느냐 적게 받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맡겨주신 직분의 높고 낮음이 아니라 작은 일에 얼마나 충성하였는가의 유무인 것입니다.
(마 25: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크고 작고, 높고 낮고를 막론하고 충성스러운 일꾼들이 많은 교회가 행복한 교회인 것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비록 가정과 직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상처를 받아 만신창이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행복한 교회 생활을 할 수 있다면 치유와 회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상처뿐 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온갖 고난을 극복하며 52일 만에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여 하나님께 봉헌할 때 기쁨이 충만한 행복한 봉헌식이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비결은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복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43) 이 날에 무리가 큰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 아이도 즐거워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이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
우리가 주일마다 이처럼 모여 하나님께 우리의 몸을 산제사로 드리는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통해 우리들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큰 즐거움을 체험할 수 있다면 바로 행복한 교회, 행복한 성도의 축복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주님의 몸된 교회에 모여 하나님을 섬기고 서로를 섬겨야 합니다. 어느 민족보다 슬픈 일이 많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벽을 봉헌하면서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큰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되었던 비결을 우리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1) 만사를 제쳐 놓고 주일마다 주의 전으로 모이고(28, 29).
2) 한 주간에 지은 죄를 회개함으로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30).
3) 즐거운 마음으로 감사 찬송하는 역동적인 예배를 드리며(38, 40, 46).
4)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일이 각기 다를지라도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목적을 위해 하나가 되며(40, 42).
5) 내 지식이나 경험이나 고집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최우선으로 하고(44)
6)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달아 최선을 다해 힘써야 합니다(45).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회개하는 자의 죄를 사해주시며, 병든 마음과 육체를 치유하시며, 어려운 문제를 극복하고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며, 슬픔이 기쁨이 되게 하시며, 절망이 소망이 되게 하시며, 죽음에서 영생으로 전환해 주시는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가 그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믿음으로, 심정으로 예배를 드린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와 성도들에게도 동일한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행복한 교회, 행복한 성도가 되는 복을 주실 것입니다.
(시 65:4)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