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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를 닮은 자녀입니까?(마5장46-48)
성경본문: 마태복음5:46-48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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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시작되어 한 주간이 지났습니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시작하고 계십니까? 계획하신바 모든 일에 우리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풍성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날의 세상은 자기만의 특별한 그 무엇이 있어야 대접받고 인정받는 시대입니다. 그저 평범해서는 살아가기 힘든 시대입니다. 사실, 무언가 독특하고 특징 있는 사람은 흥미롭고 재미있고 또한 유용하여 어느 곳에서나 필요한 분야에서 쓰임 받는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 무언가 독특한 점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세상 속에서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가지 않고 예수의 방식, 하나님의 방식을 따라 살아가는 특화된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산상보훈의 말씀을 통하여 이 점을 분명하게 각인시키시며 교훈하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표현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소금과 빛으로서의 존재이기에 어떤 방식으로 이 세상 가운데서 살아가야 하는 지를 다양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교훈의 결론으로 마 5: 48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은 자식임을 알고 아버지를 닮아 온전한 삶을 살아갈 것을 의미합니다.
* 마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모든 살아있는 생물들은 부모로부터 태어나서 그 부모를 닮고 그 부모에게 배워 삶을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동물은 물론이고 사람 역시 그러합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자기 부모로부터 인생을 배워 닮아갑니다. 이는 노력해서 될 일이 아니라 그렇게 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식이고 자연적인 법칙이며 그렇게 주어진 유전적 요소(DNA)인 것입니다. 그것은 그 자식만이 갖고 있는바 독특한 외모요, 성격이요, 삶의 습관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고 살아가는 제자들에게 우리 주님께서는 이 점을 산상보훈을 통하여 분명히 하며 교훈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실 주님의 이 교훈들은 이 세상의 기준과 가치 그리고 삶의 방식으로 보면 도저히 적용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져 믿는 자들에게 조차 무시되곤 합니다.
그리고 값싼 복음만을 좋아하며 추구합니다. 그 결과 오늘날 세상은 과연 기독교인이 이 사회에 필요한 존재인가? 하고 묻습니다. 이는 우리들에게 우리의 근본적인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과연 오늘날 성도들은 세상의 소금이고 빛인가요?
최근 한국 사회에 있어서는 기독교인들의 삶의 형태에 대하여 무차별 비판합니다. 유감 되게도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이제 도를 넘어서서 반 기독교적 여론이 형성되어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 세상은 더 이상 기독교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연유에는 외부적인 요인도 있겠으나, 사실 엄밀하게 살펴보면, 내부적인 문제 즉 기독교인으로서의 본질적인 면이 제대로 지켜지지 못하여 나타난 현상이라고 하겠습니다.
즉 사회적인 냉소는 외부의 원인이라기보다는 내부적인 원인에 기인하는 요소가 더 크다고 하겠습니다. 이 점에 대한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솔직하게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자식이 아버지를 닮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거듭나지 않은 교인들이 있지 진정으로 예수 새생명을 얻어 거듭나 아버지를 알고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직 철이 들지 못하여 아버지의 교훈을 잊고 자식으로서 본분으로 제대로 구현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 모두는 심각하게 고민하며 자신의 삶을 점검하여 고쳐 나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아버지를 닮도록 힘써야 합니다.
1. 상식을 초월한 가치와 기준으로 살아가는 성도
주님께서는 46절과 47절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치셨습니다.
* 마 5:46-47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당시 세리는 백성들로부터 이방인인 로마 정권에 빌붙어 민족을 이용하고 등쳐서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한 못된 부류라고 비난받고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은 개와 같이 취급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들이 하고 있는 수준의 교제와 예절정도로는 부족하다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세리와 이방인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 즉 세상의 일반적인 상식과 삶의 방식은 끼리끼리 뭉쳐서 교제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고 형제끼리만 서로 인사하는 정도의 수준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자들은 비록 그가 기독교인이라 할 찌라도 온전한 제자의 삶의 방식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선인과 악인에게 동일하게 햇빛과 비를 내려주시는 분이시기에 끼리끼리만의 교제 정도로는 부족하고 제자들이라면, 모든 사람과 화평하게 친절하게 지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으로부터 미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 일차적으로 이런 측면이 강하다고 봅니다. 세상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끼리 교제하는 것을 시기 질투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고, 소, 영”이란 말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물론 성경은 믿는 자에 대한 관계성을 강조하는 면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대하여 열린 마음으로 대하며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진실하게 마음을 열고 교제할 것을 가르칩니다.
* 히 12:14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그리고 더 적극적으로 나아가 세상의 어둡고 썩어가고 있는 곳을 찾아서 소금과 빛으로서의 역할을 하여 부패를 방지하고 맛을 내어 맛깔 나는 세상, 환한 세상을 만들어 갈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의 가치와 기준보다 더 탁월한 가치와 기준을 설정하고 그것을 이루어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한 예로 요즈음 TV나 Phone을 만들어 내는 회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더 얇게, 작게, smart하게 만드느냐가 관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켜 팔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주님께서는 그 기준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 마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세운 윤리적, 도덕적 가치와 기준 보다 더 차별적인 우위의 기준을 설정하여야만 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를 설명하시면서 당시 율법적 기준에 따라 행동함을 당연시 하고 그 기준과 수준을 지키도록 가르친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교훈을 뛰어 넘는 가르침을 마 5: 21-44에서 상세하게 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해주신 교훈의 방식은 “옛 사람에게 들은 바 ---나는 너희엑 이르노니---”의 형식입니다. 그 속에는 우리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주제들을 담고 있습니다.
1) 미움의 문제 -분노와 욕(21-22), 2) 제사보다 먼저 화해(23-26), 3) 간음 문제(27-28), 4) 범죄를 근절하기 위하여(29-30), 5) 이혼, 간음 문제(31-32), 6) 언어생활(33-37), 7) 복수의 문제(38-42), 이웃 사랑과 원수를 대함(43-44) 등등 이 모든 교훈들은 세상의 소금과 빛 된 신분인 성도들 즉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버지를 닮아 살아가야 할 마음과 생각 그리고 행동의 교훈들입니다. 이 교훈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새 윤리, 새 가치, 새로운 공동체를 예시해 주셨습니다.
사실, 이러한 가르침들은 인간적으로 보면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아들로써 이 땅에 오셔서 사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살아간다면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만약 우리들이 이러한 주님의 교훈을 따라 아버지 하나님을 닮아 살아가려고 힘쓴다면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가 되고 천국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동기가 어떠하던지 결과가 중요합니다. 과정이 어떻든지 결과만 좋으면 됩니다. 윤리적인 것은 하나의 명분이요, 사치적인 것입니다. 오직 자신의 이익과 성공을 위해서는 어떤 것이라도 수용할 수 있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교훈은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기준이요, 가치요, 윤리적 수준입니다. 그것은 결과보다 동기를 더 중시합니다. 외모보다 속마음으로 중시합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온전하심을 닮아 살아가는 모습니다.
2. 아버지를 닮게 마련인 자식
자식은 당연히 자기 부모를 닮게 마련입니다. 48절의 말씀은 엄청난 말씀입니다.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하나님을 닮아 살아간 수많은 성도들(Peter, Paul, Augustine, Calvin, 수많은 순교자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진정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성도들의 놀라운 신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 벧후 1:3-4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사실, 예수를 믿게 된 사실은 신비스러운 능력이 우리 속사람에게 미쳐서 이루어진 결과입니다. 이는 창조 때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생명의 빛을 우리 속에 비추셔서 이루어 주신 재창조의 역사입니다.
* 고후 4: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그러기에 진정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은 당연히 아버지 하나님을 본받아 살게 되어있습니다. 그의 말씀을 사모하고 그 뜻을 추구하며 그의 행동양식을 따라 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닌 지를 살펴보는 자기점검은 세상의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는 지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성도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사실, 단지 정직과 성실과 부지런함으로 만 측정할 수 없는 그 무엇이 기독교인들에게는 분명히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도 그 정도의 윤리적 도덕적 가치 기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굳이 기독교인이 아니래도 세상에서 인정받는다고 믿고 예수를 믿지 않으려 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이러한 윤리적인 차원이 아니라, 더 높은 가치와 기준에 의하여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기독교인들은 결과보다는 동기와 마음과 추구함이 온 세상을 향하여 참된 가치와 수준을 제시하며 구현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아버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요구하시는 바를 순종하여 실행함으로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소극적으로 부정적으로 그 요구들을 적당하게 지켜나가려 하지만, 성도들은 속사람이 기꺼이 하나님께서 양심에 심어놓으신 법을 즐겁게 순종하려 합니다. 그것은 마음과 동기로부터 출발하는 자발적 순종의 과정입니다. 성도는 매사에 마음의 동기에 집착하여 스스로의 행동양식을 평가합니다. 심령의 가난함과 애통함, 의에 주리고 목마름을 추구하며 겸손과 온유로 온 세상과 화평을 유지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로 아버지의 온전하심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자식의 도리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 이후의 삶에 대하여 무지합니다. 심판 받아 지옥에 갈 것을 믿지 않으려 합니다. 당연히 이들은 천국에 대하여서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현실에 있어서 최선의 가치와 수준을 이루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참된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 설 그 순간을 의식하고 두려워합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스스로 인정하고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진리를 기뻐하며 감사하게 생각하고 겸손하게 살아갑니다. 참된 성도는 찬송가 441장을 작사한 Wesley가 “나는 죄와 악함이 가득하게 찬 자”라고 고백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항상 필요함을 고백합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입니다.
무엇보다도 성도의 세상인들과의 차이점은 환란과 죽음을 맞는 태도에서 분명해 집니다. 세상 사람들은 좌절과 절망 가운데 빠져 자포자기 하지만, 성도들은 화란 중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찾으며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시는 교훈을 찾아 끈기 있게 기다리며 감당하려 합니다.
심지어 죽음을 맞으면서도 세상 사람들은 끝이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도 성도들은 그 이루 자신에게 주어질 영광스러운 구원을 바라보고 기꺼이 죽음을 맞으며 적극적으로 대합니다. 성도는 새로운 소망으로 죽음 이후에 주어질 영광을 바라봅니다.
* 히 11: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이러한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 의식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들은 천국 시민으로서의 가치와 방법과 목표를 설정하고 이 세상 가운데 그러한 것들을 실현하여 나가도록 노력합니다.
3.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성을 항상 유지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아버지와 항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 벧전1: 22-23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바르게 자란 자식은 멀리 떨어져서 산다고 하더라도 항상 부모와 연락을 하며 살아갑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삶의 원리와 지혜 그리고 실천할 능력을 얻으려 합니다. 그는 이것이 아버지 하나님과 항시 관계를 맺는 수단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이미 예수 안에서 거듭난 백성들이기에 어떤 행위로 그 자격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이미 태어난 영적생명을 얻는 자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항상 신령한 젖인 말씀을 통하여 아버지의 뜻을 알려고 하고 들으려고 하여 그 음성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우리의 삶속에서 실천하며 살아갈 윤리적인 원리를 제세해 주셔습니다.
* 요 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이것이 하나님을 아비로 둔 주의 백성들의 삶의 모습이며 이 악한 세상 가운데 소금과 빛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올해 이러한 원리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온전하심을 이루어 가는 성숙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