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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애국지사
독립기념관 소장 자료.1
中領(중국령)에서 進行된 朝鮮解放運動 1958年 5月 2日에 김승빈한테 받은 자료.
朝鮮民族의 解放을 爲한 武裝的 鬪爭.全國 人民이 總蹶起하여 敵의 殘忍無道한 온갖 形式의 鎭壓을 當하면서 四個年 以上이나 繼續한 三·一運動에서 體得한 經驗에 依하여 國家의 獨立과 民族의 自由는 武裝的 鬪爭이 아니고서는 到底히 爭取할 수 없음을 自覺하고 朝鮮人民大衆은 國內國外를 勿論하고 到處에서 朝鮮人 民族의 義勇的 團體들이 組織되었으며 特히 滿洲에서나 蘇領(소련령) 遠東에서는 武裝的 團體들이 組織되었다.
이와 같은 環境에서 朝鮮의 獨立을 爲한 武裝的 鬪爭이 始作되었는데 그의 進行된 地帶·時期 또 그의 政治的 性質들에 依하여 滿洲에서의 獨立軍運動, 蘇領(소련령) 遠東에서의 빨치산운동 및 滿洲에서의 遊擊隊 運動들로 區分함이 必要하다.
一. 滿洲에서의 獨立軍運動 滿洲는 朝鮮獨立軍의 組織·訓鍊 及 그의 活動上 便宜에 있어서 모든 條件이 具備한 곳이었으며 또 事實에 있어서 朝鮮獨立軍의 發祥地로 되었었다. 그의 主要한 條件을 들면 아래와 같다.
1) 在滿(만주) 朝鮮僑民이다. 三·一運動(3·1운동)當時에 滿洲에 居住하는 朝鮮人의 數가 數萬戶에 達하였다.그들은 主로 一八六九年 己巳 凶年에 먹을 것을 찾아 渡江한 凶災民들과 一九一○年 庚戌國恥(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 以後에 日本 侵略主義者들의 殖民地策 아래에서 破産을 當하고 男負女戴하여 살길을 찾아 移住한 貧農民들과 政治的 壓迫을 못 이기어 避身한 革命的 亡命者들이다. 滿洲에서는 反日思想의 宣傳에 對한 言論的 制限이 없었기 때문에 反日團體의 組織 及 反日思想의 宣傳事業이 廣汎한 群衆속에 進行되었다. 그래서 在滿(만주) 朝鮮人民은 獨立軍 組織에서 原動力이 되었다.
2) 中國 側에서의 幇助이다. 中國과 朝鮮은 歷史的으로 늘 親善友好關係를 가지고 내려왔다. 그리고 특히 地理的 關係에 있어서 朝鮮은 中國의 國防에 對한 墻壁으로 되어있었다. 日本 侵略主義者들은 所謂 大陸政策 卽 朝鮮과 中國을 侵略하려는 政策의 實現을 爲하여 벌써 오래 전부터 熱狂的 發惡을 하여왔다. 一五九二年으로부터 一五九八年間에 있었던 壬辰祖國戰爭(임진왜란)이 그의 한 事實이다. 日本의 大陸政策을 反對하는 鬪爭에서 中國과 朝鮮은 언제든지 協同戰線을 組織하여 왔다. 그래서 日本 侵略主義는 中國과 朝鮮人民들의 共統的 敵이었다. 그래서 朝鮮이 日本에게 强制的 合倂(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을 當하였을 그때에 中國 各 言論機關들은 “脣無齒寒”이라는 題目아래에서 朝鮮人民들에 對하여 國恥의 悲哀를 同感하였으며 또 그 후 朝鮮獨立運動에 對하여 同情하였으며, 또 滿洲에서의 獨立軍의 活動을 默忍하여왔다.
3) 滿洲의 廣漠한 森林地帶이다. 滿洲에는 朝鮮과 接陸한 廣漠한 森林地帶가 많이 있다. 거기에는 獨立軍을 얼마든지 收容할 수 있으며 訓練할 수 있었다. 또 그곳에서 朝鮮으로 出動할 때에는 便利한 進出路가 無數히 있었다.
4) 武器購入의 可能이다. 그 當時 卽 一九一九~1920年에는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國民戰爭이 붉은 軍隊의 勝利로 그 終結을 告하는 時期였다. 中央에서는 벌써 白派(백위파)軍隊가 敗滅을 當하고 다만 遠東 沿海洲에만 日本軍事 干涉者들의 支持에 依하여 겨우 殘命을 保存하고 있는 白派(백위파)軍隊가 最後 發惡을 하고 있는 時期였다. 規律과 秩序가 紊亂하고 또 敗亡이 不遠한 것을 推測한 白派(백위파)軍隊는 蘇·滿(소련·만주) 國境地帶에서 多數의 銃砲彈藥, 기타 軍用品을 放賣하였다. 그래서 滿洲는 武裝의 購買 及 運搬에 가장 便宜한 地點이었다.
二. 反日 獨立團體 及 武裝部隊의 組織 三·一運動(3·1운동)以後에 朝鮮에서 愛國靑年들이“제 손에 武器를 잡고 怨讐와 싸워 自由를 爭取하겠다”는 抱負를 품고 滿洲로 들어왔다. 그리고 滿洲到處에서 群雄이 爭出하여 反日獨立團體들을 組織하였는데, 몇 개의 團體들을 組織하였는데 曾前에 組織되었던 몇 개의 團體들과 合하여 그 數가 數十個에 達하였으며, 1920年初에 와서는 武裝部隊를 가진 團體의 數가 七·八個에 달하였다. 이제 武裝部隊를 組織하였던 團體들과 軍事敎育을 實施한 團體들에 對하여서만 그 簡單한 事實을 적고자 한다
1) 韓族會(한족회)朝鮮이 日本에게 强制合倂(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을 當한 후 그의 殖民的 統治에 反對하고 滿洲로 亡命한 “憂國志士”들이 西間島에서 民族主義 團體인“扶民團(부민단”,“自信契(자신계)”를 組織하여 在滿(만주) 朝鮮僑民들에게 反日 獨立思想을 鼓吹하여 兒童 及 靑年들의 敎育, 特히 軍事敎育을 實施하여 오다가 三·一運動(3·1운동)以前에 이 두 團體는 聯合되어 韓族會라고 改稱하였다. 韓族會 所管 地域은 華甸·盤石·柳河·通化·桓仁·興京 其他 西間島 一帶가 總括되었고, 그 곳에 居住하는 朝鮮僑民의 數가 萬餘戶에 達하였다.
韓族會는 中國 官憲의 諒解를 얻어 刑事 以外의 民事에 關한 事務, 兒童敎育에 關한 學校事業 等 文化事業에 있어서 거의 自治의 性質을 가지고 行事하였다.
나는 여기에서 韓族會(한족회)의 軍事敎育에 關한 事實만을 簡單히 記錄하려 한다.
韓族會(한족회)에서 軍事敎育은 그의 훨씬 以前부터, 다시 말하면 扶民團(부민단)과 自信契(자신계)가 兩立하였을 初期부터 實施하여 내려왔다. 처음에는 白山農庄이라는 看板아래에서 十餘名의 靑年을 모아 한편으로 農業을 經營하는 同時에 秘密로 軍事敎育을 實施하였다. 얼마 後에 中國 官憲의 許可를 얻어 新興學校를 設立하고 普通中等敎育을 實施하는 同時에 軍事敎育도 兼行하였다. 軍事敎育을 擔任한 이들은 舊韓國 時代의 軍隊에 服務하던 陸軍參領(少佐) 梁圭烈(양규열)·副尉(中尉) 李章寧(이장녕)·下士 金昌煩(김창번)들과 白山農庄의 出身인 尹奇燮(윤기섭)·成駿用(성준용)들이었다. 新興學校의 畢業生은 新興學友團의 團員이 되며, 團員은 團의 命令에 依하여 地方 小學校의 敎員 또 地方團體의 職員으로 服務할 義務를 가졌다.
三·一運動(3·1운동)當時에는 新興學友團員의 數가 數百名에 達하였으며 軍事化를 畢한 靑年의 數로 約 三千으로 算하였다. 이들로써 地方軍 一個 旅團을 組織하였고 그들은 自家에서 各自 職務에 從事하면서 一旦 有事에 待機하고 있었다.
三·一運動(3·1운동)- 獨立宣言 以後에 朝鮮에서 多數의 靑年들이 滿洲로 모여들었으며, 또 當時에는 最新式의 軍事技術을 所有한 軍人들도 모여왔다. 이러한 環境의 變遷에 따라 新興學校의 敎育制度에서도 큰 變更을 일으키었다.
新興學校는 在來의 學制를 改正하여 中學智識을 가진 靑年들을 모아 六個月間 速成軍事敎育을 實施하기로 하고 柳河縣 孤山子·通化縣 哈美河 及 快大茂子에 三個 學徒隊를 設立하였다.
一九二○年 一月에 以上 三個 學徒隊의 畢業生 中 成績 優秀한 者들로써 敎成隊를 組織하여 좀더 高級의 軍事敎育을 一九二○年 六月에 中國 官憲이 日本의 强硬한 交涉에 依하여 韓族會 幹部들에게 新興學校의 位置를 日本의 偵察이 미치지 못하는 奧地로 移轉하라는 提議에 따라 敎成隊와 學徒隊의 學生 中 地方事務를 爲하여 地方에 殘置하고 約 一百二十名이 安圖縣 三人坊으로 移動시키었다.
新興學校의 軍事敎育은 三·一運動(3·1운동)以前에는 前 舊韓國 時代의 參領 梁圭烈(양규열)·副尉 李章寧(이장녕) 及 下士 金昌煩(김창번)들이 擔任하여 韓國의 舊式 軍事制度에 依하여 敎授되었으나 三·一運動(3·1운동)以後에는 當時에서는 最新式의 軍事技術을 所有한 日本 士官學校 出身인 李靑天(이청천)·金擎天(김경천)과 朝鮮步兵隊 出身인 金承斌(김승빈)과 또 얼마 後에 中國 雲南軍官學校 出身인 裵天澤(배천택)·李範奭(이범석)들이 新興學校로 모여온 後에는 最新式의 軍事技術에 依한 敎育을 實施하였다.
2) 北露軍政署軍政署는 汪淸縣 小汪靑에서 大倧敎 敎主 徐一(서일)을 首領으로 하여 組織되었다. 軍政署에서는 그의 組織 卽後에 軍隊의 編成과 軍事敎育에 着手하였다.
一九一九年 겨울에 軍事幹部의 養成을 爲하여 士官學校를 汪淸縣 十里坪에 열고 金佐鎭(김좌진)의 指導 아래에서 軍事敎育을 實施하였는데, 韓族會에서 聘來한 朴斗熙(박두희)·李範奭(이범석)·姜華麟(강화린)·白鐘烈(백종렬) 等으로 敎官을 삼아 學生 約 二百名을 募集하여 敎育을 實施하였다.
이와 同時에 靑年 約 三·四百名을 募集하여 軍隊를 編成하고 兵器를 購入하였다.
士官學校의 六個月 敎育豫定其間을 마치자마자 日本軍隊의 朝鮮 獨立軍 討伐이 始作되었다.
그래서 士官學校를 急速히 畢하고 軍隊를 編成하였는데, 司令長으로 金佐鎭(김좌진), 司官副官으로 朴斗熙(박두희), 步兵隊長으로 金奎植(김규식), 騎兵大將으로 李範奭(이범석)들이 任命되었다.
軍政署의 步·騎 兩隊의 人員이 五·六百名에 達하였고 또 機關銃도 四門이 있었다.
그래서 그 人員의 數로서나 兵器의 精銳로는 便으로 보아 獨立軍部隊들 中에서 그의 軍備가 第一 優秀하였다.
軍政署의 軍事的 主要人物들은 上述한 바와 같이 金佐鎭(김좌진)·金奎植(김규식)·李範奭(이범석) 等이었다. 이제 그 人物들의 簡單한 經歷을 紹介하면 아래와 같다.
金佐鎭(김좌진)은 그 門閥의 如何는 모르겠지만 兩班이라고 自稱하며 三·一運動(3·1운동)以前에는 一定한 職業이 없이 投機業的 事業을 하여 오다가 三·一運動(3·1운동)以後에 軍隊를 組織할 때에 거기의 首領 中 한 사람으로 되었다. 그의 智識으로는 學校의 敎育은 받은 것이 없고 若干의 漢文을 授業하였으며 軍務의 前歷도 가지지 못하였기 때문에 軍事上 知識도 所有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特長은 身體 健康하여 坐 超 十丈한다고 誇張하며 또 坐談에서 큰 好辨客이다.
그 좋은 風身과 言辨을 가지고 古代의 兵學인 孫吳兵書에 對하여 氣高萬丈하게 이야기 할 때에는 누구나 그를 큰 軍略家로 또 훌륭한 英雄으로 認定치 아니할 수 없었다. 이로 因하여 그가 軍政署 軍隊의 司官長이 되었다. 金佐鎭(김좌진)은 古代 中國式의 封建主義者였다.
그는 自己 事務室 안에 中古時代의 封建的 節次를 設定하였다. 그의 性格으로써는 得意의 時에는 氣槪가 世上을 덮을 듯한 大丈夫지만 逬境의 時에는 束手無策의 拙劣한 匹夫에 不過하다.
金奎植(김규식)은 舊韓國時代 武官學校 出身으로서 步兵參尉에 任官되어 韓國軍隊에서 服務하다가 軍隊解散 時에 解任되어 家事從事하여 왔다. 그의 理想은 封建的 民族主義者며 性質은 固執하였다.
李範奭(이범석)은 서울 兩班의 子孫으로 京城高等普通學校를 畢業하고 그 後 中國으로 들어가서 雲南軍官學校 騎兵科를 마친 후 卽時 西間島 韓族會(한족회)를 찾아와서 敎成隊에 敎官으로 있다가 北露軍政署(북로군정서)에서 敎官의 派遣을 請求함에 依하여 韓族會에서 그를 北露軍政署(북로군정서) 士官學校로 派遣하였다. 그의 理想은 資本主義的 官僚主義者며 性質이 매우 輕薄하였다.
3) 國民會(국민회)國民會(국민회)는 汪淸縣 蛤螞塘에서 組織되어 軍隊를 編成하였는데 그 兵力이 約 三百名에 達하였고 그의 指導官으로서는 舊韓國 時代에 下士로써 服務하던 安武(안무)가 選任되었다. 安武(안무)의 特性은 地方熱이 아주 甚한데 있었다. 그래서 그의 軍隊는 自己의 親威 及 同鄕人들로 組織되었으며, 또 이로 因하여 그는 軍隊 統御의 能力을 가지지 못하였으며 軍事上 智識이 없음에도 不拘하고 그 軍隊는 團結이 鞏固하였다.
4) 洪範圖(홍범도) 軍隊洪範圖(홍범도) 軍隊는 어떤 特別한 隊號를 가지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形式上으로 國民會(국민회)에 속하여 있었다. 이 軍隊는 洪範圖(홍범도)의 여러 同志들과 또 團體들의 도움으로 組織되었는데, 그 兵力이 約 四百名에 達하였고 指導的 幹部로써는 前 義兵出身인 全大復(전대복)·朴雲鳳(박운봉)들이었다.
洪範圖(홍범도)는 朝鮮이 日本에 合倂(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을 當하기 前 日本 侵略主義者의 勢力이 朝鮮으로 侵入할 時期로부터 反日 義兵運動에 參加한 老大將이었다. 洪範圖(홍범도)·全大復(전대복)·朴雲鳳(박운봉)들은 二十餘年間 義兵運動의 經驗을 가졌지만 現代的·政治的·軍事的 智識을 가지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 軍隊의 一般秩序 及 그의 行動이 전혀 義兵式이었다. 洪範圖(홍범도)는 身體가 건강한데다가 驍勇을 兼備하였기 때문에 世上이 그를“나는 洪範圖(홍범도)”라고 불렀다.
5) 督軍府(독군부) 哭督軍府(독군부)는 汪淸縣 鳳桐洞에서 組織되었는데 亦是 武裝部隊를 編成하여 그 人員이 三·四百名에 達하였으며 그의 指導者로서는 崔振東(최진동)이 選任되었다. 崔振東(최진동)의 本名은 崔命祿(최명록)인데 일찍 中國에 入籍하여 그 地方에서는 財産으로나 名聲으로서 相當한 勢力을 가진 有力者였다. 自家를 墻壁으로 둘러쌓고 四方에는 砲臺를 지어놓고 自設 自衛團을 두었던 有名한 土豪였다. 三·一運動이 發生된 後에 비로소 獨立運動에 參加하였으며 自己 財産의 全部를 朝鮮獨立運動에 바치었다. 그의 理想은 純全한 中國 封建的 英雄主義者였다.
6) 義軍部(의군부)義軍部(의군부)는 西間島 長白 一帶를 根據로 하여 組織되었는데 그의 部隊 若 二百名은 許在旭(허재욱)의 指導 아래에서 汪淸縣 鳳桐洞 方面에 位置하고 있었다. 許在旭(허재욱)은 庚戌國恥(강제병탄) 以前부터 朝鮮에 侵入되는 日本 侵略主義의 勢力을 反對하여 鬪爭한 늙은 義兵이다. 許在旭(허재욱)을 세상에서 普通 許營長이라고 불렀고 志氣가 潔白하고 思想이 徹底한 愛國者였다.
7) 光復團(광복단)光復團(광복단)은 白頭山 밑 安圖縣 一帶를 根據로 하고 舊 李朝(조선) 末葉에 承知벼슬을 하였던 金星極(김성극)을 團長으로 하여 組織되었다. 그의 武裝部隊 若 一百五十名은 舊韓國 時代에 騎兵 上等兵이던 趙東植(조동식)의 指揮 下에 있었다.
8) 其他 武裝部隊와 軍事敎育을 實施한 團體上述한 獨立團體들 以外에 朝鮮儒林의 漢文學者 조맹선을 首位로 한 光復團이 哈爾濱(하얼빈) 方面에 組織되어 武裝部隊를 編成하였던 事實이 있었으나 其 行動에 對한 特記할 만한 事實이 없었다.
韓國時代에 第一期 日本留學生으로 日本士官學校를 畢業하고 朝鮮으로 돌아와 軍事界에 有名하던 柳東悅(유동렬)은 上海에서 組織되었던 大韓民國臨時政府의 參謀總長으로 任命된 것도 就任치 아니하고 大軍의 統率은 心服의 中堅幹部가 없이는 不可能하다는 觀念을 가지고 滿洲 松花江 沿岸 三江 方面에 큰 農庄을 設立하고 多數 靑年을 募集하여 心服部下 養成에 勞力하였으나 別 結果를 보지 못하고 말았다.
三. 獨立軍의 活動과 日本軍의 討伐 上述한 獨立軍部隊들은 一九一九年 末부터 一九二○年 初에 걸치어 組織되었다. 이 部隊들은 防諜에 對한 何等의 對策을 取하지 아니하였을 뿐만 아니라 遊擊戰術의 根本이 되는 自己의 位置 及 行動을 敵에게 秘匿하려는 顧慮조차 없었다. 그래서 이 獨立軍部隊의 거의 全部가 豆滿江 對岸 바로 敵의 눈앞에 있는 汪淸縣 內에 集中되어 村村이 往來하면서 示威運動을 行하였다. 이로 因하여 朝鮮 獨立軍의 組織과 그들의 位置 及 行動들에 對한 事實을 世上에서 다 알게 되었다. 그래서 日本 侵略主義者들은 朝鮮 獨立軍을 反對하여 自己의 討伐隊를 滿洲로 派遣하였다.
朝鮮 獨立軍을 反對한 日本軍의 討伐이 두 번이었고 또 日本 側의 强要에 依하여 組織되었던 中國軍의 討伐이 한번 있었다.
(一) 日本軍의 第一次 討伐과 鳳梧洞 戰鬪
一九二○年 봄에 獨立軍部隊들의 聯合을 爲하여 洪範圖(홍범도)·許在旭(허재욱)·崔振東(최진동)·安武(안무) 들이 指揮하는 四個의 獨立軍部隊가 汪淸縣 鳳梧洞에 集中되었다. 이에 對한 情報를 接한 日本軍 部隊는 中國과 아무 交涉도 없이 不法 越境하여 滿洲로 侵入하였다. 日本 討伐隊는 二個의 支隊로 分하여 一隊는 朝鮮南陽附近에서 豆滿江을 건너 南山里 方面으로부터 鳳梧洞에 集中된 朝鮮獨立部隊를 攻侵하고, 또 다른 一隊는 穩城 附近에서 江을 건너 冷水泉子 方面으로부터 鳳梧洞을 攻擊할 卽 東西拹戰의 作戰計劃을 가지고 陰 四月 二十日 밤에 不法 越境하였다.
아무 防諜上 對策이 없었고 前方에 警戒網조차 配置하지 아니하고 있던 獨立軍隊隊들은 自己네가 朝鮮으로 派遣하였던 募捐隊員들의 遇然한 發見으로 急報한데 依하여 日本 討伐軍의 日本軍의 出動에 對한 事實을 새는 날 새벽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意外의 이 急報를 받은 獨立軍隊隊들은 卽 鳳梧골 左右쪽 高地들을 占領하고 戰鬪準備를 한 後 日本討伐隊의 到達을 기다리고 있었다. 鳳梧골 안에는 獨立軍이 가득 찼다는 情報를 받고 온 日本討伐隊는 가장 嚴正한 警戒로써 그 翌日 곧 陰曆 四月 二十一日 午前 九時쯤에 鳳梧골 洞口에 있는 南鳳梧洞에 到着하였다. 農村을 搜索하고 村民을 檢問한 結果 獨立軍部隊들이 聯合할 目的을 가지고 鳳梧洞에 모였다가 數日 前에 헤어져 갔다는 새 情報를 받은 日本軍討伐隊는 그곳에서 아침을 먹고 獨立軍部隊를 追擊할 決心을 가지고 鳳梧골 안으로 向하여 行進하였다.
討伐隊가 봉오골 안에 들어서자 左右에 埋伏하였던 獨立軍部隊들은 一時에 射擊을 開始하여 戰鬪가 始作되었다.
討伐隊가 位置한 골 안은 매우 狹隘하였고 高地에서 내려다 쏘는 瞰別의 射擊에 掩蔽할 만한 地物도 거의 없었으며, 또 猛烈한 射擊 아래에서 行軍縱隊로부터 戰鬪隊形으로 옮기는 데는 相當時間을 要求하게 되었으며 또 적지 않은 損失을 받았다. 갑자기 퍼붓는 소낙비로 左右를 分別할 수 없는 틈을 타서 討伐隊는 겨우 陣地를 占領하고 戰鬪準備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사이에 獨立軍部隊들은 後方으로 退却하여 그 자취를 감추었다.
討伐隊는 人員의 큰 損失을 받아 負傷者의 救護 及 戰死者의 屍體의 措處 等 自己네의 緊急한 事情에 依하여 獨立軍을 追擊하지 못하고 도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 戰鬪에서 討伐隊가 받은 敎傷者의 正確한 數는 알 수 없으나 負傷者와 戰死者의 屍體를 몇 날 동안 運搬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日本軍의 第一次 獨立軍討伐은 獨立軍의 勝利로 끝을 맺었다.
(二) 中國軍隊의 獨立軍討伐
第一次 朝鮮獨立軍討伐에서 失敗를 當한 日本政府는 日本軍隊가 滿洲로 不法 越境하여 軍事行動을 行한 國際的 罪責은 生覺지 않고 自家의 武力이 優勢하다는 自慢으로서 中國政府에 向하여 “中國政府가 滿洲에 있는 朝鮮獨立軍을 鎭壓지 않는 境遇에는 日本政府가 日本軍을 滿洲로 派遣하여 그를 討伐하겠다”는 通牒을 發하였다.
中國政府는 外國軍隊를 自國 內에 들여놓지 않기 爲하여 吉林 孟 團長에게 吉林省 管內에 있는 朝鮮 獨立軍을 解散하라는 命令을 發하였다.
이 命令에 依하여 編成된 孟 團長의 反 朝鮮獨立軍討伐隊는 비록 出動은 하였으나, 그들에게 朝鮮獨立軍을 꼭 討伐하겠다는 熱誠이 없었고 또 獨立軍 側에서도 中國軍討伐隊와 싸울 必要가 없었다.
그래서 兩側에서 서로 衝突을 回避한 結果로 한번의 戰鬪도 發生되지 아니하였으나 形式的으로는 中國軍討伐隊는 朝鮮獨立軍의 뒤를 따르고, 또 朝鮮獨立軍은 그에게 밀리어 人煙이 稀少한 森林地帶로 쫓기어 들어갔다. 이와 같이 七月과 八月 두 달 동안 討伐隊는 따르거니 獨立軍은 쫓기거니 하면서 한번도 衝突된 일이 없었다.
(三) 日本軍의 第二次 討伐과 靑山里戰鬪
朝鮮獨立軍 鎭壓에 對한 中國軍討伐隊의 無能力을 口實로 하여 一九二○年 九月 九日에 日本軍 第二次 討伐隊가 不法 越境하여 滿洲에 侵入하였다. 이때에 朝鮮獨立軍部隊들 中에 軍政署·洪範圖(홍범도)部隊가 孟團長 討伐隊에 밀리어 大森林의 한 林緣한 地方인 靑山里 方面에 駐留하고 있었다.
鳳梧洞戰鬪의 前鑑이 있음에도 不拘하고 遠方에 諜報網을 配置하지 아니하고 靑山里 山上에서 露營하고 있던 軍政署 軍隊와 洪範圖(홍범도)軍隊는 豫想치 못한 日本軍討伐隊에 包團를 當하였는데 이 戰鬪를 獨立軍의 靑山里戰鬪라고 이른다.
이 靑山里戰鬪의 狀況은 大槪 아래와 같다.
獨立軍의 兵力은 軍政署軍隊가 約 五·六百 名이었고 洪範圖(홍범도)軍隊가 約 三·四百 名을 合하여 近 千 名에 達하였다.
討伐隊의 兵力에 對하여서는 그 詳細한 數는 알 수 없으나 廣汎한 範圍로써 包圍하였던 事實과 또 第一次 討伐에서 失敗하였던 前鑑에 依하여 반드시 몇 개의 聯隊에 달하였으리라고 推測된다.
上述한 獨立軍部隊들은 靑山里 山上에 露營하고 있던 中 一九二○年 九月 中旬 어느 날 밤에 小哨線에서 發見한데로부터 敵에게 包圍된 것을 알게 되었다. 이 獨立軍隊들은 遑忙히 戰鬪를 準備하여 敵의 攻擊을 抵抗하여 包圍의 鐶을 突破 脫出하였다.
이 戰鬪는 夜戰이었으며 또 森林戰이었다. 夜戰이나 森林戰에서는 通視가 不完全하고 또 聯絡이 困難한 關係로 通一的 指導가 不能하며 이로 因하여 各 局所에서 各異한 戰果를, 다시 말하면 한 곳에서는 이 便이 勝利하는데 다른 곳에서는 저 便이 勝利하는 등 戰果가 不一한 것은 戰術上 原則이다. 그런데다가 또 討伐隊에는 地形이 生素하였고 또 軍政署軍隊의 服制가 日本軍의 服制를 模紡하였던 關係로 彼我를 分揀하기 困難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討伐隊는 獨立軍이 自己내의 包圍環에서 脫出한 것을 알지 못하고 自己네의 相對方을 包圍된 獨立軍으로 誤認하고 서로 攻擊하여 어떤 곳에서는 白兵戰에까지 이르렀었다.
그래서 日本軍討伐隊는 獨立軍에게 받은 損害보다 적지 않은 損害를 自己네들끼리의 싸움에서 받았다.
朝鮮獨立軍 側에서도 敵의 不意의 攻擊에서와 또 그의 包圍環을 突破함에 있어서 적지 않은 犧牲을 當하고 깊은 森林地帶로 그 자취를 감추었다.日本軍의 第二次 討伐은 討伐隊와 獨立軍이 다 같이 큰 損害를 받고 勝負의 判決이 없이 끝을 마치었다. (四) 琿春(훈춘) 日本領事館 襲擊 特殊使命을 받아가지고 各 地方에서 活動하던 獨立軍部隊들의 鬪士들 數十名은 中國 山軍의 侵攻을 받아 琿春市가 一時 秩序紊亂 하였을 機會를 利用하여 一九二○年 十月 十二日에 日本領事館을 襲擊하여 領事館에 불을 놓고 그들과 衝突되었던 事實이 있는데 日本 側에 依하면 日本人 官吏 十一人, 官吏는 七名의 戰死者와 日本人 十二名, 朝鮮人 二名의 負傷者가 있었다고 하며 또 獨立軍 側에도 數名의 犧牲者가 있었다고 하였다.
琿春(훈춘) 日本領事館을 습격한 朝鮮獨立軍 鬪士들의 姓名이 判明되지 못하였다.
四. 朝鮮獨立軍의 滿洲에서 沿海洲로 移動朝鮮獨立軍部隊들이 上述한 바와 같이 自己의 活動에 모든 條件이 具備한 滿洲를 떠나서 그 活動地帶를 俄領(러시아령) 遠東으로 옮기게 된 것은 아래와 같은 原因으로 說明된다.
ㄱ. 鳳梧洞·靑山里의 두 戰鬪에 携帶彈藥을 거의 射盡하고 그를 補充할 可能이 없었으며,
ㄴ. 其 當時에 俄領(러시아령) 遠東地方에는 軍事干涉의 外國軍隊들 中에 日本軍隊가 남아있어서 野默的 反蘇行動(반소련행동)을 敢行하고 있는 때였다. 그래서 소비에트 主權의 援助아래에서 붉은 軍隊와 協同하여 日本軍隊와 싸울 可能이 있었다. 上述한 原因에 依하여 滿洲의 朝鮮獨立軍部隊들은 一九二○年 十月부터 一九二一年 一月에 걸친 其間에 俄領(러시아령) 遠東으로 넘어왔다.
遠東으로 넘어오기 前에 獨立軍部隊들의 聯合이 實施되었는데 洪範圖(홍범도)軍隊와 新興學校 敎成隊와 趙東植(조동식)이 指揮하는 光復團의 部隊들이 聯合하여 大韓義勇軍이 組織되었다.
大韓義勇軍은 아래와 같은 環境에서 一九二○年 十月에 安圖縣 三人坊에서 組織되었다.
安圖縣 下에는 趙東植(조동식)이 指揮하는 光復團의 獨立軍部隊가 있었고, 또 그 해 五月에 新興學校 敎成隊의 徒手學生 百餘名이 三人坊과 兩 江口에 모여서 軍事敎育을 實施하고 있었는데 九月 末에 靑山里의 戰鬪에서 後退한 홍범도의 軍隊가 來着하였다. 洪範圖(홍범도)軍隊에서 治療치 않고는 軍務에 服할 수 없는 隊員들을 除隊하고 그의 武裝을 徒手로 있던 新興學校 學生들에게 넘기어 주기로 하고 上述한 各 部隊를 聯合하였다.三個 部隊의 聯合으로 組織된 大韓義勇軍의 兵力은 約 四百餘名이었는데 그로써 司令部와 三個 中隊를 編成하였다.
司令部는 總司令으로 洪範圖(홍범도), 副司令으로 李靑天(이청천), 副官으로 姜南一(강남일)[本名은 南相詢(남상순)], 部員으로 全大復(전대복)·朴雲鳳(박운봉)들이었고, 中隊長으로서는 崔尙萬(최상만)·金昌煥(김창환)·趙東植(조동식)들이 任命되었다.
이렇게 새로 軍隊를 編成하여 가지고 一九二○年 十一月 初에 安圖縣을 出發하여 俄領(러시아령)으로 向하였다.
一九二○年 十二月 初에 密山·虎林의 縣境地帶 十里窪라는 村落에 到達하여 거기에서 北露軍政署(북로군정서)軍隊와 서로 만나게 되었다. 隊員의 數를 五·六百名으로 算하던 北露軍政署(북로군정서)軍隊가 靑山里戰鬪에서 後退할 때에 統一的 指導아래에서 退却지 못하고 各 小部隊들이 各自 分散的으로 退却하여서는 連略을 잃었던 關係上 十里窪에 到着한 兵力이 二百名에 不過하였고 그 밖에 徐一(서일)·金吾石(김오석) 等 後方에 있던 首領들 몇 사람이 있었다.
十里窪에서 大韓義勇軍(대한의용군)과 北露軍政署(북로군정서)軍隊와의 聯合會가 몇 날 동안 進行되었는데 人選問題에서 意見이 不一하여 會議를 채 마치지 못하고 거기에서 떠나 虎林縣 到木溝로 그 位置를 옮기었다. 到木溝에서 이 聯合會를 마치는데 그 結果로 이 두 軍隊는 “統義府”라는 名稱아래에 聯合되었다.
統義府는 本部와 一個 大隊와 學徒隊로서 編成되었다. 本部 總裁 徐一(서일)·副總裁 洪範圖(홍범도)·司令部 司令長 金奎植(김규식)·副官 朴斗熙(박두희)·部員 若干人, 軍事部 部長 金吾石(김오석)·部員 若干人, 敎育部 部長 金佐鎭(김좌진)·部員 若干人, 武裝한 軍人 約 六百 名으로 一個 大隊를 編成하였는데 大隊長으로 李靑天(이청천)·副官 金承斌(김승빈). 學徒隊는 北露軍政署(북로군정서) 士官學校를 畢業한 學生들 四·五十名으로 組織되었는데 隊長은 李範奭(이범석)이었다. 軍隊 指揮의 實權은 事實上 大隊長에 있었고 其他 部長들은 虛名無實의 名譽職으로 首領들의 虛榮心을 慰安하는데 不過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組織部署를 끝마치고 一九二一年 一月에 統義府는 伊滿(달네레친스크) 北方 犻山坪으로 넘어와서 當時에 붉은 軍隊 第二軍團 司令部에서 伊滿(달네레친스크)에 派遣되어 있던 朝鮮 獨立軍 迎接部員 朴公瑞(박공서)의 周旋으로 아물洲 自由市로 輸送되었다. 이때에 自由市에 滿洲에서 넘어온 獨立軍部隊들로서 安武(안무)가 指揮하던 國民會軍隊, 崔振東(최진동)이 지휘하는 督軍部軍隊, 許在旭(허재욱)이 指揮하던 義軍部軍隊, 統義府 및 그 밖에 小部隊들이 集中되었다.五. 滿洲에서 第一期 獨立軍運動에서의 缺點과 失策
全 朝鮮人民의 積極的 支持 及 愛國靑年들의 熱誠的 參加와 中國人民의 幇助 及 官憲들의 同情을 가지고 必要한 모든 條件이 죄다 具備한 滿洲에서 組織된 朝鮮獨立軍이 鳳梧洞·靑山里의 두 小戰鬪에서 所持 彈藥을 거의 射盡하고 戰鬪力을 喪失하게 된 것은 그 運動에 있었던 缺點과 失策들로 말미암은 것이다.
滿洲에서의 第一期 獨立軍運動에서 缺點으로 認定되는 것은 그 運動의 統一的 指導가 없었던 것이다. 前述한 七個 獨立軍部隊의 總兵力이 二千名에 達하였었다. 그러나 이를 指導하는 總 指揮部가 없어서 各自 獨斷으로 行動한 것이 이 運動에 있었던 큰 缺陷이다. 獨立軍部隊의 指揮者들은 洪範圖(홍범도)와 許在旭(허재욱) 두 늙은 義兵을 除한 外에는 그 全部가 李朝時代(조선시대)의 特權階級인 兩班의 子孫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舊韓國時代의 官僚階級 또는 封建的 英雄主義者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自己네의 歷史的 傳統性인 政權爭奪에 對한 野慾과 仕官慾에 對한 虛榮心, 自己 밖에 없다는 自慢心, 其他 모든 野卑한 行動으로 兩班의 本性 그대로 忌憚없이 敢行하였다.
이 首領들은 國家의 獨立의 爲하여 必要하다고 認定하는 일도 自己의 私慾을 充足하는데 背馳된다면 그를 實行하지 아니하였다. 그의 一例를 들면 分立된 獨立軍部隊들을 한데 聯合하여 統一的 指導아래에서 協動動作을 하는 것은 獨立軍運動에서 가장 必要한 것이라고 누구나 다 認定하였으며 또 그 首領들도 이를 否認하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獨立軍部隊들의 聯合會가 열리었었다. 이렇게 數次 열리었던 聯合會는 그 會議마다 聯合에 對한 必要, 새 團體의 組織的 構造들에 對한 問題들은 順調롭게 可決을 얻는다 하더라도 나중 人選問題에서 意見의 一致를 얻지 못하여 畢竟 그 會議는 아무 成果도 얻지 못하고 散會하게 된 事實이었다. 設或 多數 可決로 結定을 짓는대도 落選된 側에서 그 結定에 不服하고 會場을 脫退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獨立軍部隊들이 聯合되지 못하였으며 따라서 鳳梧洞·靑山里의 두 戰鬪에서도 作戰上 統一的 指揮가 없었고 各自 獨斷的 行動을 取한 關係로 可能한 戰果도 얻지 못한 것이 事實이다.
獨立軍部隊의 首領들은 上述한 바와 같이 理想的으로 沒廉恥하였을 뿐만 아니라 軍事的으로 沒常識하였으며 政治的으로 無能力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그 運動線上에서 큰 失策들이 있었다.
敵의 警戒가 簿弱하고 秩序가 解馳한 틈을 타서 그를 不意에 습격하여 周章狼狽에 빠트리는 것이 寡少한 兵力으로 優勢의 敵과 싸우는 遊擊戰의 秘訣이며 또 初步的 常識이다. 이를 爲하여 自己의 位置·企圖·行動 等을 絶對로 敵에게 秩匿하고 敵에 關한 모든 것 作戰上 必要條件을 詳細 또 精確히 偵察하여야 될 그 反面에 自己에 對한 防諜 또 敵情에 關한 偵察 等의 施實이 全無하였으며 또 그에 對한 關心조차 없었다. 이 獨立軍部隊의 首領들은 二·三百名의 武裝한 部隊를 가지고 바로 敵의 눈앞에 있는 豆滿江 對岸 汪淸縣 一帶에서 橫行하며 示威運動을 行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鳳梧洞·靑山里의 두 戰鬪가 다 敵의 攻擊으로 始作되었으며 獨立軍部隊들은 그를 미리 알지 못하고 있다가 不意의 攻擊을 받아 받지 않을 損失도 받게 되었다.
上述한 二千名의 獨立軍部隊들을 廣漠한 滿洲 山林地帶 몇 곳에 秘密히 配置하고 그 곳을 根據로 하여 軍事敎育을 實施하는 同時에 數十名으로 編成한 小部隊들을 朝鮮으로 出動시켜 敵의 憲兵出張所 及 巡査駐在所들을 습격함으로써 그들의 秩序를 攪亂하였으면 敵意를 沮衰하였을 것이며 朝鮮民衆의 反日 鬪爭心을 격려 增强하였을 것이며 또 獨立軍의 兵器彈藥을 補充 擴張하였을 것이다. 이에 反하여 獨立軍部隊 首領들의 無諜 妄動으로 因하여 鳳梧洞·靑山里 두 戰鬪에서 戰鬪力을 喪失하였다.六. 獨立軍首領들의 末路
獨立軍組織 初期에는 그 首領들이 相當한 信任을 가졌다. 그들이 自己 部下들의 信任을 가지게 된 것은 아래와 같은 原因에 있었던 것이다. 제 손에 武器를 쥐고 怨讐와 싸워 國權을 回復하겠다는 決心을 가지고 獨立軍部隊를 찾아온 靑年들에게는 自己의 한 몸을 獨立事業에 바치겠다는 覺悟밖에는 利己的 私慾은 없었다. 政治的 敎養과 革命的 訓鍊이 없는 순결한 이 愛國靑年들이 어느 獨立軍部隊에 編入된 후 그 首領들의 談話에서 全혀 알지 못하던 朝鮮의 歷史談, 平生에 들어보지 못하던 熱烈한 反日愛國談, 祖國의 光復을 爲하여 千辛萬苦를 겪어온 그들의 經歷談, 또 氣高萬丈의 壯言豪語에 眩感되어 그들을 眞正한 愛國者로, 絶世의 英雄으로, 適任의 領導者로 認定하고 信任하였으며 崇拜하였다.
그러나 數次에 걸치어 開催되었던 獨立軍의 聯合會가 그 聯合의 目的을 達하지 못하고 散會하는 데서 首領들의 野心이 나타났으며 또 鳳梧洞·靑山里 두 戰鬪에서 그들의 無能力이 나타났다. 그래서 部下들에게만 아니라 一般群衆에게까지 信任이 없어지고 나중에는 그들을 反對하는데까지 이르렀다.
一九一九年 ~ 一九二○年에 滿洲에서 일어났던 朝鮮獨立軍의 首領들 가운데서 洪範圖(홍범도)·許在旭(허재욱) 두 늙은 義兵大將을 除한 外에는 大槪 悲慘한 末路에서 紡徨하고 있으며 或은 自己의 一生을 마치었다. 이제 그의 簡單한 事實은 紹介하면 아래와 같다.
蘇領(소련령) 遠東으로 넘어온 朝鮮獨立軍部隊들의 指導者들은 모두 그 軍隊와 함께 自由市에 集中되었는데 金佐鎭(김좌진)·金奎植(김규식)·李範奭(이범석) 等 前 軍政署의 首領이라고 自認하던 세 사람은 伊滿(달네레친스크) 北方에서 蘇領(소련령) 地方에 越境하여 軍隊가 鐵道로 自由市를 向하여 出發하려고 乘車하는 바로 그 時刻에 軍隊에서 逃躱하였다. 그 后에 金奎植(김규식)은 沿海洲로 나아가 빨치산隊長이 되어 遠東에서 日本軍事 干涉軍과 白衛軍을 逐出 掃蕩하고 議會主權을 樹立한 後에 自己의 軍隊를 領率하고 滿洲로 越境 逃走하였다. 越境 時에 不罪한 러시아인 農民 두 사람을 銃殺하였는데 이는 國境地帶에 居住하는 러시아 사람들에게 怨恨을 造成하여 이로써 俄領(러시아령)에 家族을 둔 自己 軍隊의 隊員이 軍隊에서 脫走하여 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막기 爲한 手段이라고 說明된다.
滿洲로 越境한 以後에 卽時 中國官憲에게 軍隊는 武裝解除를 當하고 解散되었다.
이로써 金奎植(김규식)은 羞恥스럽게 自己의 一生 事業의 終幕을 告하고 말았다.
金佐鎭(김좌진)은 伊滿(달네레친스크)에서 박일리야와 함께 빨치산을 조직하였다가 나중에는 그의 反對를 받아 滿洲로 넘어갔다. 그때 滿洲에는 朝鮮獨立을 目的한 統義府·義軍府·參義府·正義府 많은 團體들이 한데 聯合할 運動을 하고 있는데 金佐鎭(김좌진)은 別로이 虛名無實한 新民府라는 團體를 조직하여 가지고 自己를 首領으로 내세웠다. 그러다가 出處-未詳의 어떤 靑年에게 暗殺을 當하였다고 한다.
李範奭(이범석)은 伊滿(달네레친스크)에서 軍隊가 出發할 때에 軍隊에서 逃走하여 滿洲로 넘어가 鴉片中毒者가 되어 北島間地方에서 放浪生活을 하다가 上海臨時政府로 가서 寄生 生活을 하였고 그 다음 朝鮮이 解放된 以後에 臨時政府와 함께 朝鮮으로 들어가 南朝鮮 傀儡政府의 首相이라는 탈을 쓰고 美國 侵略主義者들의 장단에 춤을 춘 極端의 反動者로 되었다.以述 以外에 獨立軍 首領들은 或은 自由市까지 或은 이르쿠츠크까지 들어갔다가 그의 多數가 다시 滿洲로 돌아갔다. 이제 그들의 事實을 간단히 紹介하면 徐一(서일)은 前述한 바와 같이 大倧敎의 敎主로써 信徒들의 信望을 가졌으며 또 그의 性質이 淸廉하고 意志가 高潔한 東洋 封建主義的 漢學者였다. 그는 自由市까지 들어갔다가 獨立軍部隊들이 한데 聯合編成 될 때에 그에 參與치 아니하고 滿洲로 돌아갔는데, 거기에서 朝鮮獨立軍事의 繼續을 爲하여 活動하다가 八面通 附近 어떤 森林地에서 갑자기 찬 가을 소나기를 맞아 老年에 衰弱한 氣運으로 慘殺을 當하였다고 한다.
崔振東(최진동)·安武(안무)에 對하여 前述한 바 있거니와 그들은 軍隊와 함께 自由市를 거쳐 이르쿠츠크까지 들어갔으나 軍事上 智識이 없었기 때문에 軍隊에 直接 服務치 못하고 獨立軍의 首領이었던 關係로 特別한 待遇를 받고 지내다가 一九二二年 軍隊解散 時에 滿洲로 돌아가 別로 社會事業에 參加치 아니하고 自己 家事에 從事하고 말았다.
李靑天(이청천)에 對하여 前述한 바 없기 때문에 그의 經歷을 簡單히 紹介하려 한다. 그의 本名은 池大泳(지대영)인데 朝鮮兩班階級의 出身으로 舊韓國時代에 武官學校에 入學하여 在學 中 一九○七年 丁未七條約(한일신협약)의 締結로 因하여 韓國軍隊가 解散을 當할때에 武官學校도 亦是 廢校를 當하게 되었다. 그 때에 武官學校 在學 中 志願者로써 日本仕官學校로 轉校하여 그를 畢業한 後에 日本軍隊에 任官 補職되어 服務하면서 第一次 世界大戰 때에 靑島戰爭에 出戰하여 獨逸軍을 反對하여 戰爭하였고, 그 後 日本 本邦안에서 中尉의 階級을 가지고 中隊長으로 服務하고 있는 中 三·一運動이 發生되었다. 一九一九年 여름에 休暇를 얻어 朝鮮으로 돌아왔다가 거기에서 逃走하여 金警天(김경천)·申東天(신동천)과 함께 滿洲로 들어와 韓族會 新興學校를 찾아왔다. 李靑天(이청천)은 資本主義的 官僚主義者의 典型的 人物이었다. 그러나 軍事上 智識으로써나 理想的 方面으로 보나 그는 그 當時 獨立軍 首領들 中에 第一 先進的 人物이었다.
이르쿠츠크에까지 들어가 高麗特立旅團 內에 조직되었던 軍事學校의 校長으로써 고려여단이 解散되는 一九二二年 가을까지 服務하였으며, 그 後에 上海에 열린 國民代表會에 參加하여 獨立運動을 조직 또 指導할 만한 最高 指導機關을 創設하자는 創造派의 한 사람으로 臨時政府는 虛名無實한 政治的 奸勇輩의 巢窟로 보아 其의 解體를 絶對 主唱하였다. 그러나 自己의 主唱을 이루지 못하고 一九二三年 滿洲로 돌아와서 獨立事業을 繼續하였다. 벌써 一九二三年부터 滿洲에서의 朝鮮獨立運動은 共産主義的 또 純全한 民族主義的 두 方向으로 分裂되었는데 一九三二年 日本 侵略主義者들의 軍隊가 滿洲에 侵入하여 所謂 滿洲帝國이란 傀儡政府가 조직되고 日本軍警의 討伐과 彈壓으로 民族主義的 朝鮮獨立團體들은 解散되고 共産主義者들은 깊은 地下工作 또 빨치산軍隊로 가서 日本侵略軍과 鬪爭하게 되었다.
이때에 李靑天(이청천)은 「오리가 물로 간다」는 격으로 自己가 極力 反對하던 上海臨時政府를 찾아갔다. 거기에서 지내다가 朝鮮解放 以後에 서울로 돌아와 어떤 黨의 首領이 되어 反動陣營에 立脚하고 있다.
獨立軍 首領 가운데서 洪範圖(홍범도)·許在旭(허재욱) 두 늙은 義兵大將만이 自己의 一生을 國家의 獨立, 民族의 自由를 爲한 鬪爭에 바치었다.
洪範圖(홍범도)는 朝鮮 獨立軍部隊들이 自由市에 集中하였다가 一九二一年 八月에 이르쿠츠크로 移轉되어 거기에서 고려特立旅團이 조직되었을 때에 直接 軍務에는 服務치 아니하였으나 軍人들의 革命的 志氣를 鼓舞 장려하였으며, 그 해 겨울에 朝鮮獨立軍部隊의 隊長의 名義로써 世界革命의 首領인 레닌同志를 訪問하였는데 그 談話의 內容은 未詳하나 레닌同志에게서 拳銃을 膳物로 받고 또 레닌동지가 親筆署名한 朝鮮軍大將이라는 證明書를 받았다.
遠東에서 白派(백위파)의 外國軍事 干涉軍을 反對한 빨치산運動에서 軍人을 恒常 激勵하며 그 精神을 鼓舞하였으며 遠東에 소비에트 主權을 樹立한 後에는 社會主義 建設事業에 依前히 熱心從事하였다. 그는 恩給을 받음에도 不拘하고 늘 勞力을 계속하였다.
朝鮮解放을 두 해를 앞두고 一九四三年에 世上을 떠났다.
許在旭(허재욱)은 一九二一年 朝鮮獨立軍部隊들이 自由市에 集中되었을 때에 그 곳에 自己 部隊와 같이 모였다가 이르쿠츠크로 移轉할 때에 自己 혼자서 沿海洲로 나와 亦是 直接 軍隊를 指揮하지는 아니하고 背後에서 事業하다가 遠東에 소비에트主權을 成立한 후에 社會主義에 參加하여 鬪爭하다가 興凱湖 湖畔에서 사나운 눈보라를 만나 怨慘히 凍死하였다. 끝.
9/VI 1958年 등서.
獨立團(독립단)과 新興學校 1955年 1月 15日에 尹哲奎(윤철규) 同志를 訪問하고 들은 回想談과 Кызылорда(크즐오르다)에서 死亡하신 黃旭(황욱) 先生의 回想談에서 記錄한 자료.一九○七年에 韓國에서 왜놈들 强壓으로 七條約(한일신협약)을 체결하게 되자 朝鮮신사계와 有識한 儒敎 또는 以前 貴族들 가운데는 救國 反日運動이 海內·海外를 勿論하고 蜂起하였다. 그런데 그 運動은 두 가지 方向으로 進行되었다. 하나는 武裝을 손에 쥐고 義兵을 일으켜서 武力으로 祖國을 侵犯하는 日本帝國主義를 武力으로 反抗하자는 義兵運動이고, 하나는 外地에 나가서 于先 未開한 조선 同胞들을 開明시켜서 愛國心과 排日運動을 展開하자는 伸士들이었다.
그래서 朝鮮解放運動은 처음부터 最後까지 두 가지 方向으로 展開되었다. 그리고 地方을 따라서 그때 運動者들의 行動강령이 서로 다른 것을 엿볼 수 있다. 多數 義兵運動은 平安道 出身이고 文化獨立運動은 咸鏡道·三南 出身이었다.
1907年이었다. 忠淸道人 以前 貴族 李東寧(이동녕, 父 영해부사, 兄 이회영 平壤감사, 兄 이시형 慶尙감사)이 率先하여 많은 財程을 募集하여 가지고 中國 當時 奉天省 柳河縣에 當到하여 柳河·通化·회인·관전·해룡府 其他 附近 地方에서 土地 2/3를 돈을 주고 샀는데, 四百日●에 達하였다. 그리고 北京政府에 交涉하여 “韓族會”라는 自治機關을 組織하고 靑年들을 養成하게 되었다. 白雲先生 주진수의 設計로 新興學校를 設하고 靑年들을 敎養하기 始作하였다(토지값이 한 밀니온 400천).
조선이 日本帝國主義者들에 강제 合邦(강제병탄)이 된 후에 그 地方에는 江原道 울진 等地 有志人士들이 모여들고 合邦 時 108人의 감금되었던 中 한 사람 양기택(양기탁, 平南 江西人)·조맹선(平南 何川人) 기타 平安道 人士들이 모여들기 始作되어서 그 地帶는 三南사람들(忠淸道)·江原道·平安道 伸士들과 愛國靑年·貧農民들이 移住하게 되었다.
그 후 民族解放運動은 두 가지 路線으로 分立하게 되었다. 仕官學校를 組織하여 가지고 靑年들을 豫備軍人 - 將校로 養成하였다가 有期한 機會에 獨立軍運動으로써 日兵과 싸워 獨立하자고 主張하는 조맹선·양기택 제씨 平安道 出身들과 聯合된 江原道 울진 人士들 尹哲奎(윤철규) 기타, 但只 實力만 養成하되 먼저 學校를 設하고 靑年들을 敎養하는데 反日精神으로 明養하고 外國과 交際하여서 武裝的 충돌이 없이 獨立하자는 李東寧(이동녕) 기타들이 主張이었다.
조맹선은 처음 “正義會”(그 후 정의부)를 조직하고, 소비에트라는 궁벽한 地方에다가 “백사농장”이라는 屯田制를 設하고 그 안에 仕官學校를 組織하였다. 결과 이동녕 기타가 경영하는 “新興學校”에서 卒業한 靑年들은 多數가 正義會 仕官學校로 와서 工夫하게 되었다. 韓族會에서는 多數한 靑年들을 잃어버리고 不平을 두게 되었다. 그러나 몇 해 후에 仕官學校에 中心하고 集合한 學生들이 數千 名에 達하였다.
1917年 러시아에서 大 十月 社會主義 革命이 成功되자 그들은 소련에 있는 朝鮮人 共産黨員들과 연락을 맺어가지고 안으로 두 진영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1918年 봄에 원동 Хабаровск(하바로프스크) 市에서 開催되었던 朝鮮人 海外政治亡命者會議에 이동령·양기택(양기탁) 기타 人士들이 參加하였다. 그 會議는 당시 원동 소비에트 人民委員會 外交總長이고 당시 Хабаровск(하바로프스크)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多數派) 責任秘書이던 金 알렉산드라 베들옴운나(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지도 下에서 發起되고 進行되었다.
會議 결과에 러시아 多數派들과 같이 行動강령을 하여서 조선 革命運動을 社會主義革命으로 發轉시키자는 人士들 이동휘·유동렬 기타가 韓人社會黨(한인사회당)을 조직하고 이동녕 其他 조선人 自體로 조선독립운동을 進行하겠다고 主張하여서 소황령(소왕령, 니콜스크, 우수리스크)에 가서 文昌範(문창범)이가 당시 結成하던 韓族總會(한족총회)와 結託하고 헤어졌다.
그리되어서 양기택(양기탁)은 이동휘·유동렬 기타와 相論하고 韓人社會黨 당원으로 出世하지 아니하고 마치 中立者의 태도를 가지면서 中國에 돌아가서 熱誠分子인 敎員 仕官學生 全部를 차츰차츰 기회를 보아서 Хабаровск(하바로프스크)에 열리는 韓人 사관학교로 보내고 나중에는 自己와 기타 幹部도 같이 Хабаровск(하바로프스크)에 移轉하여서 大隊長 1,000명을 養成하자고 비밀리에 約束하고 양기택(양기탁)은 떠나가게 되어서 처음으로 보냈던 學生 4~50명이 우수리 전선에 나가서 “한인사회당 적위군” 명의로 戰死하였다. 최명옥은 당시 北京에 있다가 仕官學校 교원으로 Хабаровск(하바로프스크)가 잠시 흰파(백위파)한테 占領된 후에 당도하였다. [만일 國民戰爭이 아니었다면 그 곳 仕官學校 기타 全部가 Хабаровск(하바로프스크)로 왔을 것이다.]
1919年 3·1운동 후에 조맹선은 자기가 지도하는 단체를 “獨立團(독립단)”이라고 稱하였다. 그리고 비밀 片紙를 써서 윤철규 동지를 俄領(러시아령) 沿海洲에 있는 이동휘나 홍범도를 訪問하게 하였는데 이동휘는 海三(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나고 홍범도는 취풍 다어재골서 만났는데, 이동휘나 홍범도는 獨立團(독립단)軍隊 全部를 俄領(러시아령)으로 移轉시키라고 意見이 同一하여서 편지 回答을 주니 윤철규는 住地에 돌아갔다. 조맹선은 그에 同意하고 먼저 300餘名을 노동자 葉담배-鴉片따는 일꾼으로 假裝하고 윤철규가 영솔하여 가지고 俄領(러시아령) 沿海洲 Гродеков (그라데코프) 구역에 당도하여 당시 그 지방 조선인 총회장 최재형 에게 맡기고 도로 넘어가서 남은 군인들을 두 部隊로 나눠 와서 300餘 名은 Эхо(에호)에 와서 留하다가 俄領(러시아령)으로 차츰 옮기게 하고 그 나머지는 Харбин(하얼빈)까지 移轉시키고 윤철규 동지는 柳河에서 日軍에게 체포되었다가 그 해 10月에야 亡命 도주하였다.
당시 獨立軍 司令官은 최영호이었다(그는 江原道 울진인, 以前 서울 兵丁이고 義兵이었다). 윤철규가 체포되자 최영호는 떠나서 無故히 俄領(러시아령) Гродеков(그라데코프)구역에 當到하여서 장재村으로 들어가는 中路에서 당시 그 地方에 있던 소위 “義軍團(의군단)”이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던 최이준·홍진우·주대윤(曲靑人)·신우경·한봉섭 등 陰謀로 暗殺을 당하고 軍人들은 解散을 當하여서, 數十名 이종학 기타는 홍범도軍隊로 가고, 신용걸 기타는 血誠團(혈성단)에 갔다가 수청에 가서 영웅적으로 올킨市에서 戰死하고 나머지 多數는 이만(달네레친스크) 등지에서 “獨立團(독립단)” 軍隊로 다시 出戰하였다.
遠東에 소비에트主權이 樹立된 후에 최영호를 暗殺하는데 參加하였던 김가·馬重哲(마중철)·朴仁[(박인)치따] 기타 13人이 잡혀 處斷을 당하였다. 양기택(양기탁)이는 1920年 경에서 日軍에게 체포되었다.
1958년 6월 25일 г.Андижан(안디잔 시)에서 썼음.
첫댓글 좋은 자료인데...글자크기를 좀 주리고 계속 2.3.4...이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