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는 화요일이었다.
그날 기념일을 맞은 친구에게 축하의 인삿말을 건넸다.
그 친구는 고향에 살고 있다.
어쩌다 한 번 문자나 전화로 소통을 하고 있지만 애경사가 아니면 몇 년 동안 좀처럼 만날 일이 없었다.
고딩 시절에 교회에서 만난 친구였다.
교회 친구들과는 각자 다른 대학에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헤어졌다.
그리고 십여 년이 흘렀다.
군대 다녀오고, 대학 졸업하고, 직장 잡고 결혼하여 가정을 일구느라 모두가 정신 없이 살았다.
삼십대 초,중반이 되어서야 다시 교회 친구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나 대동소이한 인생의 과정이었다.
그제 기념일을 맞았던 Y도 결혼하고, 아이들 둘을 낳았다.
우리는 삶이 안정되자 자연스럽게 재회했다.
비슷한 시기에 결혼한 까닭에 친구들의 각 가정환경이나 자녀들의 나이도 비슷했다.
고향 친구들이 서울에 오기도 했고, 수도권에 사는 친구들이 고향으로 가서 함께 만나기도 했다.
그렇게 잘 지냈고 죽이 맞았다.
그런데 언젠가 Y가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새로 신축한 아파트에 입주했는데 식사와 커피를 대접하겠다고 했다.
기쁜 마음으로 고향으로 갔고 그의 집을 방문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였다.
그날 방문했던 친구들의 숫자는 대략 7-8명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20여 년 전의 일이라 기억이 약간 흐릿하지만 인원은 그 정도였다.
그러나 우리는 차 한 잔도 못 마시고 Y의 집에서 나왔다.
그의 아내가 그리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아내도 친구들이 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함께 식사하고 커피도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요량이었고, 우리는 그리 기대하고 있었다.
더욱이 그날은 주말이었고 점심 무렵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집을 방문했을 때, 마침 과외 선생님이 옆방에서 Y의 애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과외수업은 원래 오후 늦게 있었는데 그날따라 선생님의 개인 사정으로 갑자기 낮으로 변경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애들의 공부에 방해가 될 수 있으므로 미안하지만 밖으로 나가서 식사도 하고 모임도 해달라고 했다.
아내의 정중한 요구였다.
나는 적잖게 충격을 받았다.
할 수 없었다.
각자 작은 선물 꾸러미를 들고 갔는데 그건 집에 두고 씁쓸한 마음으로 나왔다.
Y도 어처구니 없는 표정이었으나 적어도 애들 교육에 관한 한 자신은 입도 뻥긋하지 못한다고 했다.
전적으로 아내가 알아서 한다고 했다.
아들과 딸 모두 '스카이'에 보내는 것이 아내의 '지상과제'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소득 수준에서는 버겁지만 오래 전부터 '과외'를 하고 있다고 했다.
다시 한번 내 머릿속엔 강한 충격파가 느껴졌다.
'띵' 했다.
우리도 각자의 가정에서 애들을 키우고 있었고, 자녀들의 나이도 엇비슷했기에 아이들의 교육과 성장에 대한 관심이 컸다.
하지만 이건 달라도 너무 달랐다.
한 마디로 놀라운 수준이었다.
먼 곳에서 '집들이' 차 찾아온 남편의 친구들을 과외수업에 방해된다며 나가달라고 당당하게 얘기하는 아내가 틀렸다는 건 아니다.
그럴 수 있다.
다만 내 상식으로는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는 것 뿐이다.
내가 Y에게 물었다.
"애들 과외가 원래대로 밤에 있었다고 치자. 우리가 방문한 건 점심무렵이었는데 니가 집에서 함께 식사하자고 했었잖아? 식사준비는 했던 거였니?"
그랬더니 "중국음식을 주문하려고 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남자 친구들보다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교회 여자 친구들이 더 놀라는 눈치였다.
'유구무언'이었고 '갑분싸'였다.
식사를 하면서 한동안 긴 침묵이 흘렀다.
아름다운 '은파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레스토랑에서 어찌 어찌 식사를 마쳤고,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잠간 나누다 일찍 헤어졌다.
길게 있을 분위기도 아니었다.
그날 고속도로를 타고 상경하는데 정말로 세상살이의 '방식'이 달라도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Y 애들의 '서울대 입학'은 '따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했다.
눈꼽 만큼이라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친구들은 직장을 따라 전국에 흩어져 서로가 바삐 살았다.
그로부터 약 십여 년 뒤 나는 다른 친구에게서 풍문으로 들었다.
Y 아들이 기타를 메고 매주 '고속버스'를 탄다고 했다.
'군산'에서 '서울'까지 '기타과외'를 받느라 왔다갔다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스카이는 어떻게 됐는데?"
내가 그렇게 물었더니 친구가 그랬다.
"공부는 진작에 포기했고 '실용 음악과'에 가기 위해 기타를 배우고 있다"고 했다.
"허허...우째 이런 일이"
오늘은 2023년 11월 16일이다.
'수능일'이다.
노력한 만큼, 땀을 흘린 만큼 수험생들에게 공정한 열매가 맺히기를 기도한다.
그제가 Y의 '기념일'이라 연락했었다.
그러데 오늘이 마침 '수능일'이다.
수능일 탓에 갑자기 20여 년 전의 일이 생각났고, 생각난 김에 몇 자 적었다.
그 후로 지금까지 고향쪽에서 아주 유능한 '뮤지션'이 혜성처럼 등장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인생이 어찌 자신의 의지대로 되는 것이던가?
내 의지 대로 되는 건 거의 없다.
다만 지속적으로 나의 길과 삶의 방식을 기도하며 간구할 뿐이다.
노력 없이 얻어지는 게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나이듦'이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그 수많은 시간과 비용을 가족 간에 '소통'하고 '공감'하며 '추억'을 엮는데 썼더라면 좋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Y에게 하는 얘기가 아니다.
부모인 우리 모두에게 하는 얘기다.
그리고 앞으로 부모가 될 청춘들에게 하는 얘기다.
아니다.
'얘기'가 아니라 내 마음 속 혼자만의 '주문'이자 '독백'이다.
이제는 자녀들이 모두 20대 후반, 30대 초반이 되었다.
곧 가정을 꾸릴 것이다.
이미 꾸린 청년들도 있다.
한 번 흘러간 세월은 절대로 되돌릴 수 없고 다시는 황금같은 청춘의 기회도 오지 않는다.
그게 인생이다.
그렇기에 매 순간을 순수와 열정으로, 또한 생명과 존재에 대한 감사로 임해야 한다고 믿는다.
수험생들, 모두 수능 대박 나길 빈다.
그리고 점수나 학교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니 너무 염려하지 말기 바란다.
하늘은 높고 세상은 넓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
가슴 활짝 펴고, 항상 긍정적인 시선과 따뜻한 마음으로 세상과 담대하게 마주하길 바란다.
파이팅이다.
우리 모두에게 오늘도 최고의 하루가 되길 소망한다.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