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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제주박물관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일주동로 17 번지
국립제주박물관은 제주항이 내려다보이는 사라봉공원 남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제주국제공항과의 거리는 차로 20분 남짓이다. 국립제주박물관은 2001년 개관하였으며, 제주의 역사와 문화유산을 체계적으로 전시·보존·연구하는 고고·역사박물관이다. 한반도와 중국, 일본을 잇는 동북아시아지역 문화교류의 주요 거점인 제주도의 독특한 역사와 문화를 압축해서 만나볼 수 있다. 상설전시와 특별전시 야외전시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시실내에서는 상설 체험코너인 <전통문화 체험실>에서 ‘쓱삭쓱삭 무늬가 살아나요-대동여지도, 인왕상, 덧무늬토기, 제주읍성도’와 ‘꼼지락 꼼지락 점토놀이-연꽃무늬, 허벅, 돌하르방, 동자석’ 을 점토로 관람객들이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다. 체험에 필요한 재료는 뮤지엄숍에서 판매하고 있다.
시설안내
박물관 건물은 섬의 전체적인 모양, 오름, 돌담 등에서 느낄 수 있는 제주도의 지형적인 특징인 곡선을 건물의 둥근 지붕과 정원의 굽은 길로 표현하고, 바람이 많은 기후적 특징을 담장과 창으로 형상화했다. 건물은 제주의 자연과 역사를 외부 공간에 조화롭게 형상화시켜 상징적인 공간 체계를 보여주고 있다. 제주의 초가 지붕을 형상화하고 화강석과 송이벽돌로 외부를 마감하였으며, 지형의 높고 낮음을 이용한 넓은 정원에 야외 전시물을 적절하게 배치하였다.
전시실은 총 6개이고, 특별전시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2024년 최신 정보는 공식안내 참조.
1. 선사실
제주의 탄생부터 첫 제주인의 정착 과정에 대해 살펴보고, 구석기시대부터 탐라국이 탄생하기 전까지의 문화발전상을 볼 수 있다. 특히 초기 철기시대 삼양동 유적의 복원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2. 탐라실
제주의 문화가 완성되고 꽃을 피웠던 탐라시대를 보여준다. 탐라국의 탄생과 주변국가들의 교류를 통한 과정에서의 발굴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사실 이때의 탐라시대는 '탐라시대형성기 - 탐라 전기 - 탐라 후기'로 이어지는 제주 고고학 학계 간 논의를 반영하여 삼양동 유적과 용담동 고분 유적부터 전시한다. 물론 이당시 취락유적을 감안하였을 때 그 당시의 국가 아래의 집단이 존재하였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우리가 진짜 문헌에서 나온다고 하는 '탐라'의 기록을 반증하는 시대는 이후 곽지리 유적, 고내리 유적에 가야 한다.
3. 고려실
고려와 제주가 통일이 되는 과정과 고려시대 제주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대몽항쟁기 제주도에서 생활했던 삼별초의 유물 또한 이곳에 있다. 주요 전시물로는 서귀포시의 수정사에서 출토된 석탑 부재와 법화사 터에서 발견된 청자그릇 등이 전시되어 있다.
4. 탐라순력도실
조선 시대 숙종 28년(1702) 탐라순력도를 통해 300년 전 제주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화첩은 43면에 걸쳐 제주목사 이형상이 제주도 곳곳을 순찰하는 모습과 여러 행사 장면 등을 담았다.
5. 조선실
조선시대의 제주는 조정과 더욱 긴밀한 관계 속에서 성장했다. 2~3년마다 파견된 제주목사와 정치의 중심이었던 제주목 관아, 유배와 표류를 통한 새로운 문화의 수용, 옛 문서와 생활 도구에 나타난 일반인들의 삶 등을 알 수 있는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이 밖에도 기증 유물을 중심으로 한 기증실이 있다.
소장 유물
안중근 의사 유묵 - 천여불수반수기앙이
이익태 목사 유품 - 초상, 지영록 등
탐라순력도
관람안내
평일(월요일 제외): 09시~18시
토요일, 공휴일: 09시~19시
야간개장시간: 3월~10월 매주 토요일 21시까지 개관
휴관일: 매주 월요일(단,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다음날 휴관), 신정
관람료: 무료. 단, 기획전시는 제외.
국립제주박물관 관람 동선
[중앙홀~선사 시대 제주~섬마을의 발전과 변화~섬나라 탐라국~고려시대 제주~조선시대 제주~제주 섬사람들~기증문화유산]의 동선으로 관람
중앙홀
국립제주박물관 상설전시실에 들어서기 전, 중앙홀 천장에는 제주 탄생 설화를 재해석한 스테인드글라스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한라산이 분화한 그날, 깊은 곳에서 붉은 용암이 솟구칩니다. 천장 중앙에는 바다 밑에서 올려다본 제주 섬 탄생의 순간이 펼쳐집니다. 이 아름다운 섬에 사람이 깃들었습니다. 섬 주위에는 탐라 개국을 풀어낸 ‘삼성 신화’와 ‘백록담’, ‘삼다도(三多島: 돌, 바람, 여자가 많은 섬)’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휴대폰을 바닥에 놓고 스테인드글라스를 배경으로 여러분의 얼굴을 사진에 담아보세요.
섬, 제주
우뚝 솟은 한라산과 수백 개의 오름이 있고 곶자왈의 푸름으로 덮여 있는 신비롭고 아름단운 풍광을 가진 섬. 약하게 부는 바람(지름새)에서 예기치 못하게 강하게 부는 바람(궁근새)처럼, 고요한 삶의 터전이자 격한 시련의 공간으로 제주 사람들의 이야기가 오롯이 담긴 섬. 그 섬 이야기, 국립제주박물관에서 들려드립니다.
선사시대 제주
제주는 젊은 섬입니다. 180만 년 전부터 제주 바닷속에서 용암이 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인류의 조상이 세계 곳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시기였습니다. 이윽고 용암이 바다 위로 분출하여 땅이 솟아올랐고, 화산이 식어 한라산과 오름이 되었습니다. 약 4만 년 전 빙하기에는 바닷물의 높이가 낮아서 제주는 한반도, 중국, 일본 규슈와 땅으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이 땅으로 사람과 동물이 오갔습니다. 서귀포시 서귀동 생수궤 유적은 제주에 처음 찾아온 구석기시대 사람들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주로 동굴이나 바위그늘에서 생활했습니다. 사냥하고 채집한 먹거리를 돌감을 다듬어 만든 좀돌날 같은 뗀석기로 조리해 먹었습니다.
1만여 년 전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고 날씨가 따뜻해졌습니다. 숲을 이루던 상록침엽수는 낙엽활엽수로 바뀌고, 몸집이 거대한 동물은 점차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사람들은 재빠른 동물을 사냥하기 위해 화살촉 같은 섬세한 석기를 만들어 썼습니다. 이러한 동북아시아 신석기문화를 제주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제주시 고산리에는 한국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신석기시대 마을 유적이 있습니다. 고산리식 토기는 이제까지 발견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흙그릇입니다. 바닷물의 높이가 높아지면서 제주는 ‘섬’이 되었지만, 한반도 남해안 사람들은 배를 타고 꾸준히 제주로 찾아왔습니다.
섬마을의 발전과 변화
사람들은 끊임없이 배를 띄워 바다를 건너다녔습니다. 한반도 중부와 남부 사람들이 제주를 오가면서 제주에는 새로운 청동기문화가 꽃을 피웠습니다. 육지와 뱃길이 가까운 제주시 삼양동과 용담동에는 큰 마을이 들어섰습니다. 바닷가와 평평한 언덕 위에 여러 채의 집이 모여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네모나게, 나중에는 둥글게 구덩이를 파서 움집을 세웠습니다. 제주의 섬마을은 점점 바뀌었습니다. 사람들은 전보다 단단한 민무늬토기를 구웠고, 돌을 잘 갈아낸 간석기로 물건을 만들어 썼습니다. 조개껍데기로는 예쁜 장신구를 엮었습니다. 마을의 우두머리는 육지에서 들어온 청동기와 옥 장신구로 자신의 권위를 자랑했습니다.
섬나라 탐라국
제주에 나라가 세워졌습니다. 마을마다 있었던 작은 지배세력이 합쳐져 하나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섬을 뜻하는 ‘탐’, 나라를 뜻하는 ‘라’를 합쳐 섬나라 ‘탐라국’이라 이름했습니다. 한반도에서 고구려・백제・신라・가야가 고대 국가로 성장하던 2세기 전후의 일입니다. 이때부터 제주의 모든 지역에서 같은 양식의 토기를 사용해서 섬 전체가 하나의 문화를 공유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배계층을 위한 무덤도 만들어졌습니다. 탐라국은 더욱 발전하여 바다 건너 백제・신라・왜・당 등과 교류하며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신라에서는 탐라의 지배자에게 ‘성주星主’, 즉 ‘별의 주인’이라는 칭호를 내려주었습니다.
고려시대 제주
918년에 세워진 고려는 처음에 탐라국을 그대로 인정했습니다. 180여 년 뒤인 1105년, 고려가 탐라국을 지방 행정구역인 ‘탐라군耽羅郡’으로 흡수하면서 탐라는 독립된 ‘나라國’의 지위를 잃었습니다. 고려의 한 지방이 된 제주에는 불교가 들어와 많은 사찰이 세워졌습니다. 육지에서 들어온 청자도 유행했습니다. 고려와 몽골의 전쟁 뒤에는 삼별초三別抄가 들어와 끝까지 몽골에 저항했지만, 1273년 삼별초가 고려와 몽골 연합군에게 패배했고, 탐라는 몽골이 직접 통치하는 탐라총관부로 바뀌었습니다. 몽골은 탐라의 드넓은 중산간에 목장을 만들고 말을 풀어 길렀습니다. 1295년에는 ‘바다 건너 고을’이라는 뜻의 ‘제주濟州’로 이름이 바뀌어 오늘까지 이어졌습니다.
조선시대 제주
조선에 들어와 제주는 전라도 소속의 제주목이 되었고, 중앙에서 목사가 내려왔습니다. 제주 목사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백성의 삶을 돌보고자 했습니다. 제주 사람들은 고유한 풍속과 신앙을 지키면서도 유교의 생각과 생활 방식을 받아들였습니다. 조선 중앙정부는 감귤과 말, 전복 등 토산품의 과중한 공납貢納으로 제주 사람을 괴롭혔습니다. 게다가 200년 동안 제주 사람이 섬 밖으로 나갈 수 없도록 금지하여 제주의 경제와 문화 발전을 더디게 만들었습니다. 한편 제주에 부임한 관리, 유배를 온 학자, 예기치 못한 표류漂流로 바깥세상을 경험하고 온 사람들은 섬에 갇힌 제주 사람의 눈을 넓혀주었습니다.
제주섬 사람들
제주도는 용암으로 만들어진 화산섬으로, 사람들이 살기에는 척박하고 힘겨운 생존의 공간이었습니다. 바다로 둘러싸인 제주는 열린 섬으로 여러 문화가 들어오기도 하였고, 고립된 섬으로 고유의 전통을 유지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제주인은 소박하지만 강건한 그들만의 문화를 싹틔워 나갔습니다.
기증문화유산
문화를 사랑하는 분들이 국립제주박물관에 꾸준히 문화유산을 기증하고 계십니다. 국립제주박물관은 고고, 역사, 미술, 생활유산 등 다양한 문화유산을 기증받아 연구, 전시합니다. 기증은 개인이 아껴 온 유산을 국민과 함께 나누는 고귀한 일입니다. 기증문화유산은 제주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는 국립제주박물관의 대표 소장품으로 거듭납니다. 뜻 있는 여러분의 기증을 기다립니다.
국립제주박물관 소장품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목사 이형상의 순력 기록화, 제주 문화가 담기다
1702년(숙종 28)
1 개요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는 대한민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국립제주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문화재로 1702년(숙종 28) 가을에 제주목사 이형상(李衡祥)이 약 한 달 동안 제주를 순력(巡歷), 즉 각 고을의 방어 실태와 백성의 풍속 등을 시찰하며 기록한 화첩이다. 더불어 경치 좋은 곳을 찾아다녔던 일상도 수록되었다. 화첩의 크기는 가로 36.4cm, 세로 56.9cm로, 그림 41면, 서문 2면 등 총 43면으로 구성되었다. 그림은 화공 김남길(金南吉)이 그렸는데, 18세기 초 제주의 풍속, 생활상, 명승, 군사 요새 등을 담고 있다.
2 척박한 섬, 제주
지금의 제주는 살기 좋은 관광도시로 인식되지만, 조선시대에는 매우 척박한 섬이었다. 일단 먹고살 만한 것이 부족했다. 중산간 지역은 말의 생산지로 부각되었고, 농사는 해안가에서만 지을 수 있었다. 논농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서 잡곡 위주의 생산이 행해졌고, 태풍 같은 자연재해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게다가 감귤·전복·약재 등의 진상 때문에 과중한 공물을 부담해야 했으며, 목자(牧子, 우마 사육의 역에 종사하던 사람)·포작인(浦作人, 전복과 물고기 등을 잡아 진상하는 역을 맡은 사람)·잠녀[(潛女), 해녀)]와 같은 고된 역을 졌다.
경제적 여건이 좋지 못해 제주 백성들의 삶은 힘겨울 수밖에 없었다. 이에 터전을 떠나서 유망(流亡)하는 사례가 늘어났고, 제주목(濟州牧), 대정현(大鼎縣), 정의현(旌義縣)의 군액(軍額)이 감소하였다. 1629년(인조 7) 중앙 정부에서는 제주 섬사람들의 출입을 금지하는 출륙(出陸) 금지령을 내렸다. 출륙 금지령은 약 200년간 지속되었고, 제주 사람들은 더욱 고립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섬 고유의 언어·풍속·문화 등은 그 독자적 특색이 더욱 강해졌다.
3 제주목사 이형상
조선시대 제주목에는 정3품의 목사(牧使), 대정현과 정의현에는 종6품의 현감(縣監)이 각각 파견되었다. 제주도(濟州島)는 행정구역상 전라도(全羅道)에 예속되어 있었지만, 지리적으로 중앙의 통제가 제대로 미치지 못했던 섬이었다. 그리하여 제주목사는 관찰사의 권한까지 일부 위임받아 대정·정의 두 현을 관할하도록 하였다. 조선시대에 제주도에는 약 3백 명에 가까운 제주목사가 파견되었다. 그들은 제주에 부임하여 지리지, 읍지 등을 편찬하기도 했다.
1651년(효종 2)에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원진(李元鎭)은 지리지 『탐라지(耽羅誌)』를, 1694년(숙종 20)에 부임한 제주목사 이익태(李益泰)는 『탐라십경도(耽羅十景圖)』(현재 전하지 않음, 19세기의 사본이 국립민속박물관에 소장)와 지리지 『지영록(知瀛錄)』을 편찬했다. 이형상 역시 제주 관련 기록을 다방면으로 남겼다.
이형상(1653∼1733)의 본관은 전주(全州)로, 효령대군의 10세손이다. 자는 중옥(仲玉)이고, 호는 병와(甁窩), 순옹(順翁), 호옹(浩翁)이다. 1680년(숙종 6) 별시 문과에 급제한 이후 호조좌랑, 성주목사, 동래부사, 영광군수, 경주부윤 등을 거쳤다. 제주목사로 부임한 때는 50세 때인 1702년(숙종 28)이었는데,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노론 이건명(李健命)의 청에 의해 1703년(숙종 29) 파직되었다. 소론 계열인 그는 여생의 약 30년을 경상도 영천 강가에 호연정(浩然亭)을 짓고 저술과 강학에 전념하다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796년(정조 20)에는 이형상을 비롯하여 이미 고인이 된 관리들이 대거 청백리(淸白吏)로 추천되기도 했지만, 끝내 의정부의 승인을 받지는 못했다.
개인문집으로 『병와집(甁窩集)』이 있다. 그의 저술은 성리학, 역사, 지리, 예학, 보학(譜學) 등 다방면에 걸쳐 200여 권이 있다. 그 가운데 ‘이형상 수고본(李衡祥手稿本)’이라는 이름으로 그의 저술 10종 15책이 유명한데, 수고본 안에 『탐라순력도』와 제주 지리지인 『남환박물(南宦博物)』이 있다. 『남환박물』은 지역 명칭 유래와 자연환경, 사적, 인물, 풍속, 산물, 방어 등에 관해 서술되어 있다.
4 탐라순력도의 구성과 내용
『탐라순력도』에는 1702년 10월 29일부터 11월 19일까지 21일 간의 가을 순력이 총 28면에 묘사되어 있다. 순력은 군사 점검의 목적이 컸다. 이형상은 해안가를 따라 설치된 9개의 진성(鎭城)을 순력했다. 제주목 관아를 출발해서 동쪽으로 가서 정의현(지금의 성산읍)을 거치고 남쪽을 지나 서쪽 대정현(지금의 대정읍)을 들른 후에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또한 지도 ‘한라장촉(漢拏壯囑)’ 1면, 일상적 행사 장면을 그린 그림 11면, 이형상이 쓴 서문 2면을 포함하여 총 43면으로 구성되었다.
서문과 마지막 면의 ‘호연금서’를 제외하면, 화첩의 각 장은 제목, 그림, 설명으로 구성되었다. 맨 위에는 그림의 제목을 쓰고, 그 아래에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맨 아랫부분에는 그림과 관련된 설명이 있다. 행사에 참여한 인원이나 해당 지역의 거리 등이 기록되었는데, 그 내용 대부분은 『남환박물』에도 실렸다. 한편, 2000년에 『탐라순력도』를 보존처리하기 위해 표지와 속지를 분리하는 과정에서 제주 속오군의 소속과 신원을 적은 명부인 제주속오군적부(濟州束伍軍籍簿)가 발견되기도 했다.
순력도의 1면은 제주 지도 ‘한라장촉’이다. 촌(村)·리(里)의 명칭, 목장, 봉수처, 연대(煙臺), 오름, 포구 등을 표기하였고, 주변 지역과의 방향과 거리 등을 표기하고 있다. 2면의 ‘승보시사(陞補試士)’는 윤6월 17일의 승보시 장면, 3면의 ‘공마봉진(貢馬封進)’은 윤6월 7일에 진상에 필요한 말을 징발하여 목사가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장면, 4면의 ‘감귤봉진(柑橘封進)’은 진상할 감귤을 확인하고 포장하는 장면, 5면의 ‘귤림풍악(橘林風樂)’은 제주목 관아 내 망경루 후원에 있는 귤밭에서 열린 풍악 장면 등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41~42면에는 서문이 있다. 제작 배경이 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인민 9,552호, 남녀 43,514명, 밭 3,640결, 목장 64곳에 국마(國馬)가 9,732필, 국우(國牛)가 703두, 귤나무 2,978그루 등 당시 제주의 실정을 알려주는 수치가 주목된다. 맨 마지막 43면에는 ‘호연금서(浩然琴書)’라는 이름으로 보길도에서 멀리 보이는 제주의 경관을 그린 그림이 있다.
순력도를 내용별로 살펴보면, 군사 점검 관련 그림이 가장 많다. 각 지역의 군졸, 무기, 군량미 등의 현황을 파악하고 군사훈련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화북성조(禾北城操)’에서는 순력을 시작한 첫날 화북진성에서 벌어진 군사훈련의 모습이 담겼다. 이형상은 객사 앞뜰에서 실시한 군사훈련을 지켜보고 있고, 군졸은 두 편으로 나뉘어 줄지어 서 있다. 화북진성은 타원형의 옹성으로 여장이 둘러져 있는데, 성곽 위에도 군사들이 정렬해 있다. 성곽 주변에는 민가가 형성되어 있다. 그림은 진성의 구조, 병사들의 정연한 모습, 주변 화북포구의 바닷물결과 파도까지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시사(試射, 활쏘기를 시험하던 일)와 전최(殿最, 관원의 근무 상태를 심사하여 성적을 매기던 일) 등도 행해졌다. 11월 6일에 목사 일행은 천지연 폭포에서 활쏘기 시합을 했다. ‘천연사후(天淵射帿)’ 그림을 보면, 천지연 폭포의 오른쪽 절벽 위에는 활을 쏘는 사람들이, 왼쪽 절벽 위에는 과녁이 있다. 폭포 중앙에는 가는 줄에 추인(蒭人, 짚으로 만든 인형)이 매달려 있다. 추인은 화살을 꽂아 운반하는 용도였다고 한다. 활쏘기 시합을 보는 군졸들과 군기(軍旗)의 위용이 폭포의 경관과 제법 어우러지는 장면이다.
제주목, 대정현, 정의현에서는 각각 양로연(養老宴)이 행해졌다. ‘제주양로(濟州養老)’의 경우 순력에서 돌아온 날인 11월 19일에 제주목 관아에서 열린 양로연을 묘사하였다. 초청된 노인들은 제주목에 거주하는 100세 이상 3인, 90세 이상 23인, 80세 이상 183인이었다. 그림에는 제주목관아 앞뜰에 흰 장막을 치고 양로연을 즐기는 목사와 노인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악공과 기녀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두 무동이 춤을 추면서 그들의 흥취를 돋우고 있다.
명승을 탐방하는 행사도 있었다. 순력 기간에는 김녕굴, 천지연폭포, 천제연폭포, 정방폭포, 산방산 등의 경관을 유람하였다. 이곳들이 당시에도 제주의 명승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었던 곳이다. 한편 왕자구지(王子舊址)라는 장소도 있는데, 그곳은 옛 탐라국 시절 왕자의 집터가 있었다가 조선 세종대에는 중추원부사 등을 역임했던 고득종(高得宗)의 별장이 있던 터로 유명한 곳이었다. 이형상이 그곳을 탐방하여 연회를 베푼 장면이 ‘고원방고(羔園訪古)’에 그려져 있다. 그는 순력 기간이 아닐 때 성산일출 등의 제주 경관을 보러 가기도 했다. ‘성산관일(城山觀日)’에서는 1702년 7월 13일 성산포 앞바다에서 떠오르는 붉은 일출과 그것을 보는 목사 일행이 묘사되어 있다.
순력이 아닌 일상적 행사 장면을 그린 11면은 진상과 목장 관련 행사 그림이 다수이다. 한편, ‘병담범주(屛潭泛舟)’는 그림 아래에 설명이 없는데, 그림에는 취병담(현재의 용연) 바다에 배를 띄어놓고 기녀들과 유희를 즐기는 목사 일행의 모습이 담겼다. 그 옆 용두암 근처에서 물질하는 잠녀(해녀)들의 모습이 대비되어 이채롭다. ‘건포배은(巾浦拜恩)’은 12월 20일에 관리 3백여 명이 조정을 향해 배례하고 그 이튿날에 읍성 밖 신당(神堂)들을 불태우는 장면이 함께 묘사되어 있어 흥미롭다. 신당이라는 무속 공간은 유교적 가치관으로 무장한 목사 이형상의 입장에서는 혁파 대상이었다. 하지만 거친 바다와 잦은 재변(災變)이 일상이었던 섬사람들에게는 생명과 안전을 기원하는 곳이었다. ‘건포배은’의 검은 잿빛으로 불타는 신당, 그 모습을 뒤로하고 조정에 배례를 올리는 목사 일행과 제주 섬사람들의 모습에서 중앙 정부와 지방 사회의 거리가 느껴진다.
5 탐라순력도의 가치
조선 후기의 지방관들은 공무를 수행하면서 부임지의 지리, 풍속, 역사 등을 다룬 여러 기록물과 회화를 다수 제작하였다. 『탐라순력도』 역시 그러한 경향 하에 제작되었는데, 현재 지방관이 만든 화첩으로서 ‘순력도’라는 이름을 가진 기록물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다. 저자, 화공, 제작 동기 등이 확실하게 나타나 있고, 18세기 초 제주의 지리, 문화, 군사, 풍속, 의례 등을 알 수 있는 중요 자료이다.
국립제주박물관 안내도
국립제주박물관 전시실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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