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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와 ‘무질서’의 공존과 조화
오랜만에 ‘이동학교’(Moving School)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지기 시작한 때부터이니 물리적인 시간은 2년 6개월 정도에 불과했지만, 심리적인 시간은 그보다 훨씬 더 길었다. 왜 그리 길게 느껴졌을까. 곰곰이 생각해 봐도 잡히는 게 없다가 프로그램이 열린 인도네시아에 와서야 한 생각이 선명해졌다. 행사 첫날 한 이슬람 기숙학교 쁘산뜨렌(Pesantren)을 탐방했을 때 만난 아이들과 청년들 덕분이었다. 꾸밈없는 표정과 미소, 수줍은 말투와 몸짓, 또 못 말리는 장난스러움과 다른 한편의 진지함.... 밀려드는 해방감이 몸을 압도해 왔다. 어쩌면 지난 이십여 년 동안 아시아 여러 나라들을 돌아다닌 것도 결국은 이런 목마름 때문은 아니었던가.
그러나 다음 날 프로그램을 시작하면서 이런 행복감은 벌써 금이 가기 시작한다. 세션이나 워크숍을 시작하거나 끝내야 할 때 10-20분씩 늦거나 지체하기 일쑤고, 진짜로 정색하고 진지해져야 할 순간에 실실 웃는 게 다반사요, 또 ‘질서’가 당연히 요구되는 상황을 아무렇지 않은 듯 번번이 깨버린다. 주어진 규범과 규칙이 강제하는 질서를 따라 굳은살 배기도록 살아온 나 같은 사람에게 이런 ‘무질서함’은, 동남아에서는 자주 겪는 일임에도 여지없이 소화불량을 동반한다. 적응하려면 일정한 시간과 노력이 요구되고 때로는 인내를 필요로 하는 상황과 마주해야 하는 것이다. 이때야말로 이들을 대하는 태도가 ‘현실주의적 낭만주의자’가 될지 아니면 ‘낭만주의적 현실주의자’가 될지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다. 말장난 같지만 이런 구분은 내게는 이들을 대하는 데 효과적인 지침이 된다.
내가 정리한 이 둘의 차이는 이렇다. 전자가 무질서해 보이는 어떤 것, 곧 어떤 규격과 흐트러짐이 혼재되어 있는 그런 섞임 자체를 또 다른 ‘질서’로서 인정하면서 시작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오늘이 배고프고 힘들어도 내일을 무한히 긍정하는 이 청년들의 웃음과 낙천성에서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둘 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이들의 가감없는 미소와 대책 없는 낙천성, 또 그 유쾌함에 쏠리는 내 일체감을 일정 부분 에누리해내야 하는 게 유감이지만, 규범과 뒤섞임을 새로운 현실로 깨닫고 수용하는 자아의 확장은 전자의 현실주의여야만 하는 이유로 충분하다. 그러나 그게 뭐 어쨌다는 말인가. 자기 위안에 불과할 것 같은 이런 구분을 만일 프로그램에 참가한 청년이 본다면, “하, 뭐 그렇게까지....”라고 하면서 빙긋 웃는, 한번의 웃음으로 끝날 일인지도 모르겠다.
지난 7월에 열린 2022년도 인도네시아 '이동학교' 참가자 모습. (사진 출처 = 황경훈)
개혁주의 이슬람과 근본주의의 위협
인도네시아는 한국인들에게 동남아에 있는 이주노동자를 송출하는 한 국가라거나 발리나 욕야카르타 같은 유명한 관광지가 있는 나라 정도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작 인구가 2억 7800만 명(2022년 추계)에 이르는 세계 4위의 인구 대국이고 더욱이 세계 최대 이슬람 국가라는 사실은 한국인뿐 아니라 동남아인들도 잘 모르는 듯하다. 인도네시아는 이웃한 나라이기도 하고 또 무엇보다도 극단적이고 근본주의적 이슬람과 달리 이곳 이슬람이 온건하고 다양성을 인정하는 다원주의적 성격을 지닌 독특한 종교성을 가졌다. 종종 이슬람 극단주의의 테러가 발생하기는 하지만, 인도네시아 이슬람은 이웃한 말레이시아나 남아시아의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지의 이슬람에 비해 세속성을 옹호하는 특징을 띠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타 종교문화 및 인종에 대한 태도를 둘러싸고 진보와 보수 세력이 보이는 이념투쟁이나 이슬람을 적대하는 국내 그리스도교계 근본주의가 여전히 성한 한국에도 무시 못할 의미가 있다. 관용적 시각과 태도는 한국을 포함해 종교와 연계된 분쟁이 끊이지 않는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매우 필요해 보인다.
물론 인도네시아 이슬람도 정치 지형의 변화에 따라 진폭이 있어 왔다. 아닌 게 아니라 지난 30년 동안 인도네시아에서는 종교적 근본주의나 강경파의 호전성이 커지면서 종교 간의 평화로운 공존보다는 긴장이 야기되고 또 소수민족의 권리와 안전에 해를 끼치는 일이 발생해 왔다. 예배 장소를 비롯한 공공 공간은 드물지 않게 공격의 대상이 되었고 교회는 혼란을 일으킨다는 이유로 폐쇄되기도 했다. 특히 2017년 신성모독죄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전 자카르타 주지사의 투옥은 인도네시아에서 종교 간 공존이 쉽지 않음을 보여 주는 상징적 사건이 되었다.
그리스도교도인 자카르타 주지사 ‘아혹’(Ahok)은 2017년 주지사 선거를 앞두고 행한 강연에서 쿠란을 언급했다가 논란에 휩싸였다. 이 쿠란 구절은 ‘유대인과 그리스도교도를 지도자나 친구로 삼지 말라’(5:51)는 내용을 담고 있고 있는데, 아혹은 “이 구절을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이들에게 속았다면 내게 투표하지 않아도 된다”고 대응했다. 그의 자카르타 주지사 재선에 반대해 온 이슬람 강경파는 이를 빌미로 그가 쿠란 자체를 부정했다고 주장하며 자카르타 도심에서 몇 달 동안 수만명 규모의 반대 시위를 계속했다.1) 언어학자 등의 전문가들은 그의 말이 쿠란을 모독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지만,2) 그는 결국 유죄 판결을 받고 2년간 수감생활을 했으며 2019년 1월 석방됐다.
2022년 인도네시아 이동학교 '문화의 밤' 행사 준비 사진. 각 부족의 전통 의상을 입은 모습. (사진 출처 = 황경훈)
그리스도인 청년과 ‘현재인 미래’
이러한 상황과 더불어 사회 경제적 빈곤은 인도네시아 청년의 미래를 더 어둡게 한다. 직업이 없는 청년들이 얼마간의 돈을 받고 테러에 가담하게 된다는 얘기는 이 나라뿐 아니라 분쟁이 발생하는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에서 어렵지 않게 듣게 된다. 청년들은 자신을 죽음에 몰아넣는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약속이라면 거의 맹목적이다시피 믿는 듯도 하다. 인도네시아 사회의 종교적 적대감, 빈곤과 불평등은 폭력과 극단주의가 번성하는 비옥한 땅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도네시아의 신세대, 특히 젊은 그리스도인과 이슬람인이 대화와 협력, 나아가 공생의 문화를 촉진해 나가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오늘날 인도네시아 청년 그리스도인은 이런 신앙상의 도전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가?
이 질문을 이동학교 프로그램 참가자 청년들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던진 사람은 헤루 프라코사 신부다. 그는 오랫동안 인도네시아 예수회가 운영하는 사나타 다르마(Sanata Dharma) 대학에서 종교간 대화를 가르쳐 왔고 이 프로그램을 주최한 아시아평신도지도자포럼(ALL Forum) 행사에도 몇 차례 강사로 참가했다. 프라코사 신부는 전문성을 인정받아 교황청 종교간 대화위원회 이슬람 전문 위원으로 활동 중이며, FABC의 종교간 대화위원회에서 활동한 토마스 미첼 신부 이후 이슬람과의 대화에 실질적인 진전을 기대하게 하는 인물로 보인다. 이번 프로그램에서 그는 ‘공동협력성(synodality)과 만남의 문화’를 주제로 강의하면서 ‘공동협력성은 그리스도교나 다른 종교뿐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과도 함께 걷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후자, 그러니까 세상 사람과의 연대와 협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했다. 강의 주제는 내가 제시한 것이지만 그런 내용으로 가르칠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참 반가웠다. 공동협력성 논의가 교회 안으로만 제한되는 현실이 갑갑했는데, 그걸 아는 듯한 다음과 같은 말은 돋보였다.
“‘나는 신앙인이기 이전에 시민’이라는 생각보다 ‘나는 시민이기 전에 우선 신앙인’이라는 생각이 점점 인도네시아에 확산되고 있다. 이런 신념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면 종교 근본주의자가 될 가능성이 크기에 우려스럽다.”3)
그러나 아무리 강의가 훌륭해도 정작 청년들에게 울림이 없다면 이런 칭찬과 감사는 아전인수요 공허하기 짝이 없다. 중요한 것은 청년들이고 더 직접적으로는 그리스도인 청년이므로 그리스도인 신앙과 관련된 가르침과 배움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헤루 신부가 FABC 문헌을 인용해 마지막에 이런 질문을 던졌다. “우리 이웃 속에서 자기 종교 전통이 아닌 다른 전통에서 오는 하느님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을까?” 나는 참가자 청년들 상당부분이 이를 긍정할 것으로 본다. 그것은 서두에 언급한 “흐트러짐이 혼재되어 있는 그런 섞임 자체”에서 자유와 편안함을 보는 다원성을 일상의 삶으로 살고 있는 청년들의 힘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청년들 자신이 각기 다른 인종적, 언어적, 관습적 전통을 성장 배경이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더욱이 정치, 경제, 종교적 어려움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도네시아의 청년이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이들 가운데 하나라는 통계가 있는데, 어쩌면 이도 이런 시각을 빼고는 설명하기 어렵지 않을까 싶다. 세계가 한 마을이라는 ‘지구촌’에서 살고 있고 또 살아 내야 하는 현대인들이 이 청년들의 삶과 지혜를 적극 배우려 한다면 좀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오래된 미래’로서가 아니라 ‘현재인 미래’로서 말이다.
1) 황철환, ''신성모독 논란' 인니 기독교도 주지사에 2년 실형…법정 구속', <연합뉴스>, 2017.05.09.
2) C. A. Wijaya, 'Ahok’s speech not blasphemous: Expert', <The Jakarta Post>, 2017.03.21.
3) 황경훈, '세상을 위한 신앙에 이슬람인, 그리스도인 구별 없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22.07.22. 본문을 원문에 의거해 약간 수정함.
황경훈
우리신학연구소 선임연구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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