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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사람을 성전에 세우다
느 13:10-14
10 내가 또 알아본즉 레위 사람들이 받을 몫을 주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자기 밭으로 도망하였기로
11 내가 모든 민장들을 꾸짖어 이르기를 하나님의 전이 어찌하여 버린 바 되었느냐 하고 곧 레위 사람을 불러 모아 다시 제자리에 세웠더니
12 이에 온 유다가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가져다가 곳간에 들이므로
13 내가 제사장 셀레먀와 서기관 사독과 레위 사람 브다야를 창고지기로 삼고 맛다냐의 손자 삭굴의 아들 하난을 버금으로 삼았나니 이는 그들이 충직한 자로 인정됨이라 그 직분은 형제들에게 분배하는 일이었느니라
14 내 하나님이여 이 일로 말미암아 나를 기억하옵소서 내 하나님의 전과 그 모든 직무를 위하여 내가 행한 선한 일을 도말하지 마옵소서
느 13:10-14 / [레위 사람들의 부양비를 지급하다] 또 내가 알아보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내가 없는 사이에 레위 사람들에게 줄 세금도 바치지 않았다. 그러자 성전에서 봉직하던 성가대원들과 상당수의 레위 사람들이 성전에서 떠나 그들의 농토가 있는 고향 마을로 돌아갔다. 11) 그래서 나는 모든 지역의 관리들을 데려다가 이렇게 꾸짖었다. `어찌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내버려 두었소?' 그리고 나는 레위 사람들을 데려다가 다시 그들의 일을 맡겼다. 12) 그러자 온 유다 백성들도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가져다가 성전의 창고에 쌓았다. 13) 나는 제사장 셀레먀와 서기관 사독과 레위 사람 브다야에게 성전 창고를 감독하게 하였다. 나는 또 삭굴의 아들이며 맛다냐의 손자인 하난을 세워 그들을 돕게 하였다. 이들 네 사람은 이미 믿을 만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들은 동역자인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는 임무를 맡았다. 14) 그 일을 마치고 나는 이렇게 기도를 드렸다. `나의 하나님, 이 모든 일들을 기억해 주소서!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정성을 다한 일들과 나의 하나님의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를 위하여 한결같이 한 일들을 잊지 마소서!'
레위인은 하나님의 집을 관리하고 예배의 직무를 담당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레위인이 제대로 대우받지 못해 생존을 위해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자기 밭으로 간 레위인(10) 제사장은 백성이 바치는 제물 가운데서 자신들의 몫을 받았습니다(신 18:3). 그러나 레위인은 제사장과 달랐습니다. 그들은 전적으로 십일조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백성이 십일조를 바치지 않으면 레위인은 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생계를 위해 다른 수단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레위인과 노래하는 사람 중 일부가 자기 밭으로 가서 농사를 짓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은 누구에게도 유익한 일이 아닙니다. 레위인이 레위인의 일에 충실한 것이 모든 사람들에게도 유익한 일입니다.
백성들이 십일조를 가져오다(11-12)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전이 어찌하여 버린 바 되었느냐”며 레위인을 제자리로 복권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모든 유다 백성들에게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십일조의 회복은 단순히 백성들이 십일조를 지켰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는 유다 전체를 생각해서도 영혼이 잘되어 범사가 잘되어지는 기반을 다지는 일입니다.
충직한 사람들(13) 느헤미야는 제사장, 서기관, 레위인 그룹 중 한 사람씩을 임명해 창고지기로 삼았습니다. 이들은 충직한 사람들로 인정받은 사람들로서 레위인에게 십일조를 공평하게 분배하는 일이 맡겨졌습니다. “충직하다”는 말은 ‘신실하다’, ‘책임감이 있다’의 뜻입니다. 충직은 재물을 관리하는 사람에게만 요구되는 덕목이 아닙니다. 모든 직분자의 필수 덕목입니다.
나를 기억하옵소서(14)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집과 그 모든 직무를 위한 수고를 하나님께서 기억해 주도록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돌보시지 않으면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행한 선한 일이라는 구절에서 선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세드는 하나님에 대한 느헤미야의 변함없는 충성과 헌신, 자신의 삶 속에 표현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적용: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 어떤 관심을 두고 있습니까? 이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기억하고 보상해 줄 선한 일임을 기억합시다.
스위스의 의사이자 작가인 '폴 투르니에'는 정신이 육체에 영향을 끼친다는 인격 의학의 창시자입니다. 어느 날, 그는 악성 빈혈로 고생하는 한 직장인 여성을 진료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반년 이상 치료해도 효과가 없어서 입원 치료를 받기를 권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후, 그녀는 치료를 위해 병원에 다시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치료 전부터 이전과는 다른 건강한 모습이었고, 검사 결과에서도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일주일 동안 특별한 것을 했나요?” 그러자 환자가 말했습니다. “제가 한 것이라곤 죽도록 미워하던 한 사람을 용서한 것뿐이에요.” 그녀의 고질적인 질병은 다름 아닌 미움과 증오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질병의 치료법은 다름 아닌 ‘용서’였던 것입니다.
축복과 간증의 기초
느 13:10-14 / 임현수목사
모든 사람이 축복을 받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축복은 거져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일정한 법칙을 따라서 행할 때 오는 것입니다.
농부는 자연의 법칙을 잘 사용하면서 그 법칙을 따라 순종하여야만 풍성한 수확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 법칙은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대로 적용되어 집니다.
이같이 모든 축복에는 일정한 법칙과 도리가 있는 것같이 믿음의 세계에도 성도가 지켜야 할 축복의 법칙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말씀입니다.
그 중에 특히 물질의 축복과 관계 있는 하나님의 약속이 곧 십일조입니다.
지난 주일에 십일조에 대하여 말씀 드렸는데 많은 분들이 말씀에 즉각적으로 순종하시는 아름다운 본을 보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음에 작정하신 분들은 앞으로 1년 동안만 이라도 꾸준하게 온전한 십일조를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 함으로 축복을 경험 하셨다면 계속 하십시오.
십일조를 안 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가 저주를 받았다고 말하면 기분 나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주객이 전도된 격 입니다.만약에 설교자인 제가 개인적인 감정으로 그런 말을 했다면 그것은 제가 잘못한 것 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그렇게 말씀 했다면 기분 나빠 할 것이 아니라 회개해야 할 것 입니다.
도둑놈 보고 도둑놈이라고 하는 것이 기분 나쁘다면 도둑질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다면 성경이 잘못된 것이지요.
그렇다면 왜 십일조 생활을 해야 할까요?
1.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 입니다.
예수께서도“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막12:17) 고 말씀 하셨습니다. 가이사는 로마 황제를 가르킵니다. 이것은 로마시민은 로마에 세금을 내야 한다는 말씀 입니다. 카나다 시민이 카나다에 세금을 내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하나님의 것은 무엇 일까요? 말라기서 3:8절에 보시면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겠느냐?...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 이라>
로마 시민이라면 로마에 세금을 내야 할 납세의 의무(롬13:6-7)가 있듯이, 하나님 나라의 영적 시민권자인 우리들은 (빌3:20)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십일조를 내야 한다고 가르치신 것 입니다.이것은 의무이며 동시에 법입니다.
에수께서 말씀하신 저 유명한 산상설교에도 보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But seek first his kingdom and his righteousness)
이 말씀은 우리는 두 나라에 속한 사람들인데 하나는 이 세상 나라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인데,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한다면 온전한 십일조의 실현은 필요 불가결한 것 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이 세상에 진리의 기둥과 터인 교회와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 존재 할 수 없고 하늘나라가 전파 될 수 없기 때문 입니다.
이 땅에서도 세금을 잘 내는 나라가 부강합니다. 국민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했기 때문 입니다. 개인으로는 좀 가난해도 국가적으로는 매우 상태가 좋은 건강하고 부강한 나라는 모두 세금을 잘 내고 잘 관리 하기 때문 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교회가 건강한 교회 이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시민인 성도들이 먼저 그 나라를 위하여 드리는 십일조와 헌물이 성실하게 실천 될 때 교회는 이 땅에서 왕성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 시켜 나가게 될 것 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본 가운데 하나가 있다면 솔로몬 성전을 건축 할 때 일 것 입니다. 그들은 자원하여 하나님의 일에 헌신 하였는데 건축헌금이 얼마나 많이 들어 왔는지 너무 많이 헌금 하시는 바람에 다음 주 부터는 제발 헌금을 가져오지 말라고 광고 할 정도였습니다.
진정한 영적인 부흥이 일어나면 이런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2. 십일조는 성도의 의무 이기 때문 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십일조는 성도들의 <법적인 의무>에 해당 했습니다. 우리들의 삶 속에 어떤 것은 <윤리적인 의무> 일수가 있고 어떤 것은 <법적인 의무> 일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에 태어난 남자들에겐 <병역의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것은 명백히 <국가적인 범죄>에 속합니다. 그러나 어떤 의무는 단순히 윤리적인 의무도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있어서 십일조는 법적인 의무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이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 것은 <구체적인 범죄>였습니다.그런 의미에서 라기는 <그것을 도둑질>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 입니다.
사실 십일조가 하나의 법으로서 제도화 된 것은 <모세>에 의해서 된 것 입니다. 그러나 기억 하셔야 할 것은 십일조의 기원은 모세가 아니라는 사실 입니다.
십일조가 제도화 되기 이미 오래 전에 <십일조의 습관>은 아브라함 때부터 존재 하고 있었습니다.
창14:19,20절에 보시면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동맹한 왕들을 격파하고 빼앗은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 오면서 <멜기세댁>이라는 제사장을 만 났을 때,그 전리품의 십분지 일을 그에게 바쳤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법적인 규정 때문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주관 하시고 축복해 주시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심정을 가지고, 이 모든 재물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믿음의 고백>으로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 모습을 배워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은 저 유명한 벧엘의 들판에서, 약간은 훙정적이긴 하지만, 하나님이 내 한 평생을 앞으로 인도해 주신다면, 내가 받은 축복의 십 분지 일을 반드시 주 앞에 드리겠습니다. 라고 언약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도 법적인 제도화 이전 이지만 벌써 하나님의 백성들에겐 십일조의 실행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 시대 이후 아모스 시대에도, 히스기야 임금때도, 요엘 선지도, 에스라, 느헤미야도, 말라기 선지자도 신앙부흥과 함께 <십일조 실행>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일조의 정신과 윤리적인 의무는 <신 구약>을 일관하는 하나의 가르침 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십일조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십일조를 실행 하던 바리새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23:23에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이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니라"하시면서 바리새인들의 율법의 외식적인 준수를 책망하고 계시지만, 그러나 그러면서도 <이것도 행하고,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하시면서 십일조의 관습도 여전히 보존 되어야 할 10/1조의 당위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특히 십일조의 율법적인 의무 이행 보다 더 중요한 십일조의 정신을 강조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십일조 드리는 정신을 세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1) (의)의 표시
(2) (인)의 표시
(3) (신)의 표시
십일조는 하나님의 공의의 표현 입니다.십일조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 입니다.하나님의 신실하심의 표현 입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 십일조의 실행은 아직도 우리에게 주어진 <성도 들의 도덕적인, 혹은 윤리적인 의무>라고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성경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 들이 십일조를 이행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 일까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 보다도 가장 큰 이유는 우리들의 <이기심> 일 것 입니다.
미국에서 어떤 청년 하나가, 십일조에 대한 설교를 들으면서 <나도 십일조를 드려야지> 결심 하면서 목사님을 찾아 갔습니다. <목사님 저도 한 평생 십일조를 드릴수 있도록 저를 위해 축복 기도 해주세요> 그 때 목사님은 축복 하겠다고 하면서 < 그러나 한 가지 확인 할 것이 있는데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기로 언약 하겠는가? 그러면 축복 하겠네> 청년이 대답하길 <물론이죠. 축복만 해 주십시오.제가 한평생 십일조를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이 청년은 약속을 하고 기도를 받았습니다.
이 청년은 그 후 10불의 수입을 얻은 후 <1불>을 헌금 했습니다.오래지 않아서 그는 100불을 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0불>을 드렸습니다. 여기까진 별로 힘들지 않았습니다.그 다음에는 500불을 벌자 <50불>을 드리는 일이 힘들어지기 시작 합니다. 드디어 그의 수입은 <1000불>이 되었습니다. 이제 <100불>을 드리는 것이 힘에 벅차기 시작 했습니다.도저히 힘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매우 소박한 청년이었던 모양 입니다.그래서 그는 그 목사님께 다시 찾아와서 정직하게 자기의 마음을 고백했습니다.
<아무래도 100불은 드리기가 힘듭니다. 목사님 혹시 하나님과 약속한 것을 취소 할 수는 없을 까요?> 그랬더니 목사님이 웃으시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미안 하지만 하나님 앞에 약속한 그 언약은 결코 캔슬 되지 않습니다.그러나 제가 이렇게 할 수는 있습니다.형제를 위해서 기도해 드릴수가 있겠는데, 형제가 1000불의 십일조를 드리기 힘드니까, 옛날처럼 수입이 10불로 쫄아 들도록, 그래서 1불만 드릴 수 있도록 제가 기도할까요?>
수입이 많아지면 드리기가 힘들어요. 그러나 반대의 경우도 가능 합니다. 수입이 줄어 갈 때도 여전히 힘든 것은 마찬가지 입니다. 경제적인 상황이 어려워지면 그래서 수입이 줄고 압박을 받을 때 우리가 제일 먼저 줄이고 싶은, 혹은 포기하소 싶은 유혹을 받는 영역 가운데 하나가 헌금 입니다. 헌금 안 드린다고 해서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 지장도 없어 보이니까, 거기서부터 줄이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됩니다.
말라기 시대, 느헤미야의 시대 사람들이 받았던 시험이 바로 정확하게 그런 시험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십일조를 중단 했습니다.
그리고 십일조를 한다는 사람들도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온전하지 못한 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 입니다.
한국엔 4가지 거짓말이 있다고 합니다.
1.처녀들의 거짓말(시집 안 갈래요)
2.노인들의 거짓말(빨리 죽고 싶어요)
3.장사군의 거짓말(이거 밑지고 파는 겁니다) 한가지 추가된 것이 있습니다.
4.정치인들과 공직자들의 재산공개와 실명제가 이루어지면서 생긴 유명한 거짓말이 있습니다.(이게 전부 야요)
우리는 십일조가 아닌 것을 드리면서도 십일조를 주님께 드린다고 말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3. 십일조는 하나님의 사역의 기초이기 때문 입니다,
느헤미야 시대에 레위인들이 자기들의 일을 버리고 성전을 떠난 이유가 무엇 입니까? 말라기 시대에 하나님의 집이 황폐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십일조의 실행이 없었으므로 제사장들이 써포트 박을 길이 없었기 때문에 자기들의 전리로 도망 간 것 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십일조가 들어오면 그것으로 첫째, 제사장을 써포트하고,성전을 관리 했습니다.그리고 또하나 중요한 사역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내를 돌보는 일 이었습니다.
말3:5절에 보면 십일조가 등한히 되면서 이런 구제의 사역이 어렵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말 3:5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술수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케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케 하며 나를 경외치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거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오늘 본문에도 보십시오.
느 13:10 내가 또 알아본즉 레위 사람들의 받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그 전리로 도망하였기로 11 내가 모든 민장을 꾸짖어 이르기를 하나님의 전이 어찌하여 버린 바 되었느냐 하고 곧 레위 사람을 불러 모아 다시 그 처소에 세웠더니 12 이에 온 유다가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가져다가 곳간에 들이므로
신약에 와서는 구제의 사역보다 더 중요한 교회의 사역이 강조되고 있는데 그것은 <선교의 사역>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최고의 소원이 무엇 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사역이 부흥되는 것을 바라보는 것>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사역에 무관심 한다면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 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영적생활이 침체해 있거나 타락하고 있다는 중거 입니다.
내년에는 아프카니스탄에만 1000명의 단기선교 팀들을 동원할 예정 입니다.
지난 2년 동안에는 중앙아시아 대학생 5000명에게 복음을 전하고 훈련하는 사역을 감당 했습니다.이런 일에 재정적인 써포트가 없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일이 진행 되겠습니까?
교회기 존재하는 목적이 선교입니다. 선교를 포기할 때 교회는 조재의 가치를 잃어 버리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역의 기초로서,성도들의 십일조생활과 헌금생활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4. 십일조는 축복의 약속이기 때문 입니다.
우리들 자신의 축복을 위해서도 십일조 생활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주께서 주신 산상설교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마 6: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은 누구를 위하여 쌓는 것 입니까?
<너희를 위하여> ..헌금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 입니다.그러나 주께서는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것 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 명령을 수행하지 못하므로 인해서, 우리가 받아야 할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누구의 손실 인가요? 그것은 우리들 자신의 손실 입니다. 말라기 선지자의 약속을 다시 한번 봉독 하겠습니다.
<3:10> "만군의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지금 지구상에서 십일조를 가장 철저히 실행하고 있는 사람들은 유대인 입니다. 그리고 청교도의 후예들 입니다. 그런데 사실 말씀 그대로 그들이 지금 세계의 부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미국과 카나다를 떠나면 북미의 경제는 완전히 혼란에 빠집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실천하는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십일조의 제도는 물질의 번영을 위하여 주셨습니다. 챨스 박사는 십일조는 교인 200명을 조사한 결과 십일조를 하고 나서부터 더 번창하고 행복해졌다는 통계가 나왔다고 합니다.
십일조는 영적 번영을 위하여 주셨습니다. 대다수의 성도는 십일조 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영적 생활이 분명해지고 철저히 회개가 나왔으며 성경말씀의 이해와 기도가 활기차게 나왔고, 주님의 사업에 동참하는 보람과 교회 생활의 즐거움과 구원의 확신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1.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십니다.
2. 우리의 소유를 보호해 주십니다.
3. 우리의 이웃들에게 간증이 되는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주보에도 쓴 글이지만 십일조왕 록펠러의 간증으로 마치겠습니다.
가난한 행상의 아들로 태어난 아주 평범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었고, 머리가 좋다는 소리도 못 듣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다행인 것은 그의 어머니는 그를 기독교 신앙으로 잘 키웠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의 어머니는 십일조 정신을 철저히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예 주머니를 두 개 만들어 주고 오른쪽에는 언제든지 십일조를 챙겨 넣도록 했습니다. 그는 8세 때에 받은 돈 20센트에서 2센트를 뚝 떼어서 처음으로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는 15세 때에 침례를 받고 나서 그 교회에서 회계의 직분을 받아 줄곧 봉사 했습니다.
그가 21세 되던 해에 한 사건이 터집니다. 그 당시 그가 다니던 교회건물이 저당 잡혀 있었습니다. 그는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 사방 팔방으로 노력해서 마침내 저당 잡혔던 교회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사건을 겪으면서 그가 크게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돈을 벌어 주의 일을 봉사해야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처음으로 곡물가게를 차립니다. 여기서 성공을 거둔 후 그는 25세 때 미국의 클리브랜드에다 정유소를 하나 세웁니다. 그때부터 그는 석유사업에 전심전력을 다했습니다. 그러다가 광산업에 손을 대었는데 사기를 당해서 투자금 모두를 날렸습니다. 광부들은 폭도로 변해서 밀린 임금을 요구했습니다.그는 빚 독촉에 자살을 생각 하기도 할 정도였습니다.그는 마지막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간절히 간구 했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온전한 십일조를 실천하며 살아왔는데 왜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기도하는 중에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때가 되면 열매를 거두리라.더 깊이 파라.”그는 다시 일어나 다시 폐광을 파기 시작 했습니다. 사람들은 제 정신이 아니라고 수근 거렸지만 그는 아랑곳 하지 않고 계속 파 내려갔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검은 덩어리가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습니다. 유전이 발굴 된 것 입니다. 그는 32세에 자본금 100만 달러로 오하이오 석유회사를 설립하게 됩니다. 그리고 드디어 44세에 미국 석유산업의 90%를 장악하는 석유왕이 됩니다. 20세기 최고 부자였던 존 데이비슨 록펠러(John Davision Rockefeller) 의 간증입니다.
교회의 품격을 높이는 직분자로 서라
느 13:10-22 / 오정호목사
연일 매스컴을 장식하는 황우석 교수의 파동을 보면서 몇 가지 교훈을 생각해 봅니다.
첫째, 한 사람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 가에 대한 부분입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부부의 대화에서거나, 직장 동료와의 대화에서나, 학교에서나, 온 매스컴이 한 사람의 입을 주목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놀라운 기대와 영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인간의 유한성입니다.
우리 국민들은 일희일비하며 귀가 너무 얇습니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고 친구도 없고 동료도 없습니다. 학문도 없고 과학도 없고 윤리도 없고 과정도 없고 회개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유한성입니다.
셋째, 물질문명의 폐해입니다.
돈과 명예에 대한 지나친 추구가 있습니다.
넷째,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의 부족입니다. 황 박사에게 이렇게 목매는 이유는 난치병을 고치기 위한 어려운 사람들의 몸부림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교회와 사회는 연약한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저는 얼마 전 재활원을 방문하여 힘들게 살아가는 장애인들을 돌아보며 교회가 해야 할 일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이 시대의 교회는 사회와 국가에 대한 희망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은 도덕적 차원에서 희망이 되어야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숫자는 적었지만 성도들로 인해서 그들이 속한 가정이나 직장이나 사회의 윤리 평균수준이 올라갔습니다. 영적 수준과 도덕적 차원에서 더 맑고 투명해졌습니다. 이 시대에 희망을 주는 교회, 희망을 주는 성도의 삶을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하며 개혁을 주도했던 느헤미야의 개혁을 본받아야 합니다. 효율성과 비효율성을 따지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했던 그의 개혁에는 몇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첫 번째 원리 - 지도자들이 앞장 서야 합니다.(4-11절)
개혁은 내 생각가운데 잘못된 생각, 못된 생각, 불신앙의 생각은 내어버리고, 주님이 기뻐하는 생각을 다시 품는 것이 바로 개혁의 출발입니다. 부정적인 영향력을 주는 직장동료나 교우들을 모델삼아 자신의 신앙수준을 하향 평균화해서는 안됩니다. 느헤미야가 과감한 개혁을 단행할 때 주변의 적들은 그의 마음의 중심을 빼앗기 위해 많은 것들로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과감하게 개혁했습니다. 경건의 능력은 없고 경건의 모양만 남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외식하는 자의 대명사로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삶을 정리하고 과거의 삶을 답습하지 않고 나가려고 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성도라는 이름만 가지면 않됩니다. 이름에 합당한 능력을 소유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이 다시금 빚어주실 것을 믿으며 다시금 시작해야 합니다. 지도자들, 부모, 스승들이 앞장설때 우리는 이 사회의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원리 - 헌신이 회복되어야 합니다.(12-14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물질헌신의 회복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개혁은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을 정직하게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청지기적 직분의식을 가지고, 황금우상을 물리쳐야 합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을 떠났다가 돌아왔을 때 성전을 섬기는 사람들은 모두 떠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백성들의 헌신도 식어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자리를 떠난 레위인들을 돌이키고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백성들을 책망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몸과 마음은 물론 재물의 헌신에 대한 회복을 이루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물질의 청지기직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장도 주시고, 건강도 주시고, 모든 좋은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내가 마음에 받을 때 주님 앞에 최소한 주님을 사랑한다는 증표로 주님은 열 개 가운데 한 개를 요구하셨습니다. 십일조는 헌신의 결과가 아니라, 헌신의 시작입니다. 헌금은 세금의 성격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풍요로움에 대한 감사와 사랑의 표현의 시작입니다. 물질의 첫 자리에 주님이 계셔야 합니다. 물질의 첫 자리에 주님을 모시는 회복이 일어나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우들에게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하여 드릴 것”을 강하게 도전하였습니다. 새해, 새마음으로 헌금생활의 은혜와 기쁨을 회복합시다.
세 번째 원리 - 주일을 힘써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15-22절)
구약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이것은 안식일의 회복입니다. 물질의 첫 자리에 주님을 모시는 물질헌신이 필요하다면, 주일성수는 우리에게 주신 시간의 첫 자리를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제철소의 용광로를 담당하거나 긴급한 환자를 다뤄야 하는 특별한 경우들을 제외하고는 주일을 예배드리기 위해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진노가 안식을 범함으로 인해 일어난 일임을 알았습니다. 레위인들에게 몸을 정결케 하고 와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일에 대해서 가볍게 여깁니다. 기분 따라 움직입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주일성수를 가볍게 여깁니다. 몸에 배인 취미생활 때문에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다. 이러한 일들로 인해 그리스도인의 정체감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의 회복은 첫 시간을 주님께 드리는 예배의 회복이며, 주일성수(主日聖守)의 회복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보물처럼 귀하게 쓰이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물질 드리는 것과 주일을 회복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은 최소한의 시작입니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한 사람의 영향력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쓰임 받고 품격 있는 성도로 온전히 서기 위해 자신을 개혁해 간다면 세상을 향해 우리는 감동을 창출하는 선한 영향을 끼치게 될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지도자로서 스스로 자신을 개혁하는 일에 남다른 열정이 있었습니다. 온전한 회복과 은혜 충만한 삶을 위하여, 우리 모두가 우리시대에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로 기쁘게 쓰임 받읍시다. 기본이 강한 그리스도인으로 우뚝 섭시다.
하나님께 기억될 사람
느 13:10-22 / 오정호목사
서울 지하철 2호선 합정역 부근에 외국인 연합교회가 있고, 그 옆에 펼쳐져 있는 숲에는 우리나라에서 복음을 전하다 세상을 떠난 선교사님들의 유해가 묻혀있는 묘지가 있습니다. 거기에 "나는 조선인을 사랑하였노라. 그래서 내 몸을 조선 땅에 눕히노라"든지, "나는 이 나라가 복음화 되기 위해 내 청춘을 주앞에 드렸노라" 등의 비문이 새겨져 있는 비석들이 있습니다.
「한국의 역사」라는 책을 통하여 한국의 어려움을 세계에 드러낸 헐버트 선교사님은 "나는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잠들기보다 한국 땅에서 내 일생을 끝내기를 원한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 분들은 그 정도의 머리와 열심을 가지고 자기 나라에서도 출세할 수도 있었지만 청운(靑雲)의 뜻을 품고 선교의 비젼을 가지고 이역만리(異域萬里) 한국 땅에 왔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 비록 자기 나라에서는 잊혀진 존재가 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삶을 기억해 주시리라는 확신 때문에 한국에 까지 찾아오고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본문 14절의 "내 하나님이여 이 일로 인하여 나를 기억해 주옵소서"라는 느헤미야의 기도는 비록 짧지만 핵심 있는 기도로 인생의 참된 의미를 깨달은 자만이 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진시황제는 주전 221년에 중국 천하를 통일했습니다. 그는 자기를 기리고 기억하게 하기 위해 가는 곳마다 공덕비를 세웠습니다. 잊혀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에 의해 잊혀질까 두려워서 눈치를 보지만, 진정으로 축복되고 성공한 인생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기억해 주시는 인생입니다. 사람들의 뇌리에는 잊혀 졌더라도, 역사의 한 페이지는 장식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가슴속에 우리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면 우리 삶은 결코 무의미한 삶이 아닙니다.
22절의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위하여 이 일도 기억하옵시고 주의 큰 은혜대로 나를 아끼시옵소서"라는 기도에도 느헤미야의 마음과 전체 삶이 그대로 배여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사람들 앞에서 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다짐했기 때문에 당당하고 확신있는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이런 기도를 할 수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1. 느헤미야에게는 하나님의 성전을 위한 헌신이 있었습니다.(10∼13절)
느헤미야가 개혁을 주도했습니다. 성전을 청결케 하고 하나님의 가정들을 든든히 세우는데 힘썼을 뿐 아니라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제사장을 도와 하나님의 전을 섬기던 레위인들이 생활비를 받지 못하니까 찬양대원들과 도망을 쳤고, 하나님의 성전은 피폐해지고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본 느헤미야가 백성들의 모든 지도자들을 모아 놓고 "어찌 하나님의 전이 버린바 되었느냐?"며 꾸짖고 도망간 레위사람들을 다시 불러 그 위치에 세웠습니다.(11절)
주께 드려야 할 것을 드리지 않고 의무를 소홀히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이 어려움을 당했던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경고와 꾸짖음의 메시지는 즉시 백성들의 반응을 가져왔습니다. 온 유다가 회개하고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가져다가 곳간에 들였습니다(12절).
종교개혁가인 마틴 루터는 "우리의 회심은 세 가지 면에서 이뤄져야 하는데, 첫째는 우리 마음의 회심이요, 둘째는 우리 정신의 회심이요, 셋째는 우리 지갑(경제/물질)의 회심이다"고 했습니다.
우리 새로남교회 모든 성도들은 어차피 드려야 할 것을 빼앗기기 이전에 하나님께 드리는 즐거움을 누리며 살기를 바랍니다. 마지못해 하는 헌신이나 드림은 드리는 자의 마음속에 박탈감을 낳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쁨을 상실하고서 어떻게 감격이 있는 교회생활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교우 여러분! 거룩한 결단이 필요한 분이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정상적인 삶을 회복하십시오!
느헤미야는 "내 하나님의 전과 그 모든 직무를 위하여 나의 행한 선한 일을 도말하지 말고 기억해 주옵소서"(14절)라고 자신있게 기도할 정도로 하나님 전과 하나님의 일을 사랑하고 헌신했습니다.
2.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날을 지켰습니다(15∼21절).
물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시간 가운데 하나님을 첫 자리에 모시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 삶 가운데 주님의 날과 주님의 시간에 대한 도전들이 많습니다. 직장동료들간의 정리나 경제적이익등 여러 가지 이유와 방법들로 회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에서 특히 시간의 우선순위에 있어서 첫 자리를 차지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것에 자신이 없으면 은혜의 자리에 나아갈 수도 없고,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날을 힘써 지키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든든한 기초와 출발이 됩니다.
*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온전한 물질생활을 해야 합니다(12절).
요한 웨슬레 목사님은 처음 목회할 때 30파운드를 생활비로 받았습니다. 그 가운데 28파운드는 자기를 위해 사용하고, 2파운드는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후에 100파운드의 생활비를 받게 되었을 때도 28파운드는 자기를 위해 사용하고, 나머지 72파운드를 이웃과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사용했습니다. 300파운드를 받게 되었을 때도 28파운드만을 자기를 위해 사용하고 나머지 272파운드를 남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그는 물질관이 달랐습니다. 또 그는 말하기를 "열심히 땀을 흘려 벌어라. 그리고 그것을 주를 위해 열심히 드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쌓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기억해 주십니다. 이것이 형통입니다.
천안의 열매맺는 교회를 섬기는 심복순 권사님이 계십니다. 그 분이 천안명물인 호두과자를 굽는 사업을 했습니다. 처음에 어려웠을 때 "하나님, 이 사업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하기를 원합니다"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반죽이나 속에 들어가는 내용물을 처음 것과 동일하게 투자했습니다. 경제적 호황을 만나도 정직하게 호두과자를 만들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응답해 주셔서 사업이 크게 번창했습니다. 그러나 권사님은 자기를 위해 쓰고, 가족을 위해 쓰는 것을 고정시켜 놓고 나머지를 섬기는 교회와 어려운 개척교회를 돕는데 사용했습니다. 이것이 생명력 있고 간증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마땅한 삶입니다.
IMF로 인하여 경제적으로 힘들고, 직장을 떠나서 새로운 직장을 구해야 하며, 새로운 사업을 구상해야하는 긴박한 상황인 것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어려울 때 믿음으로 행해야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그 어려움 위에 우뚝 세우셔서 많은 사람들에게 믿음의 간증을 하게 하십니다.
2. 주님의 날에 온전한 시간을 드려야 합니다(19절)
안식일을 범하게 된 것은 두로에 있는 사람들이 건어물 등을 가지고 와서 장사를 했습니다. 이 때문에 느헤미야가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게 하기 위해 명하여 성문을 닫아놓게 했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주일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다른 것을 붙잡고 누리기 위해 포기해서는 안되는 주님의 날을 포기하고 맙니다.
세상을 향한 문을 닫아 놓아야 우리는 주님의 날을 범하게 하는 유혹 자체를 막을 수 있고 이 시대의 느헤미야로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세상으로 향하는 문은 닫고, 주님을 향한 문은 활짝 열어서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과 예배를 존중할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 삶을 존중해 주십니다.
사랑의 하나님! 주님의 날과 주님의 일에 우선순위를 두고 힘쓰게 하소서!
물질을 드리는 기쁨을 알고 하나님께 기억되는 인생이 되게 하소서!
우리 모두 이 시대의 느헤미야의 심정으로 살게 하소서!
오 하나님! 우리 모두 하나님께 기억되는 축복된 생애되게 하소서!
역사의 새벽을 만드는 사람
느 13:28-31 / 고흥식목사
산을 정복하려고 수많은 사람이 산에 오르지만 정상을 정복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사람도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달려가지만 성공자는 많지 않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예술 등 어느 분야든지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기는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나 성공 중에 성공은 주안에서 성공한 사람, 즉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최선을 다하며, 또한 큰 능력을 받았을 땐 더 큰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성공자는 첫째로 건강해야 합니다. 먼저 영적으로 건강해야 하고, 육신적으로도 건강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성공자는 개인적으로 매력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사업하는 사람이 그 일에 대한 과정이 매력적이라면 결국은 그 사업은 성공합니다. 매력 있는 사람은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흠이 없습니다. 세 번째로 성공자는 다른 사람보다 배우려는 열심이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배워야 하고, 많은 경험을 쌓아야 하고, 뚜렷한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낙심 중에도 굴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전진의 힘이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향한 위로의 손길을 기다리게 하며, 우리가 사람과 환경을 움직일 때 필요한 지혜를 공급 해줍니다.
본문의 느헤미야(Nehemiah)는 바벨론 나라의 포로로 끌려간 비극적인 시대의 사람입니다. 무명의 집안에서 자랐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왕(아닥사스다 Artaxer Ι, B.C 464-423)치세하에 공직으로 왕의 경호를 맡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그는 조국 이스라엘이 폐허가 되고 하나님의 성전이 황폐된 것을 보고, 공직에서 평안히 남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국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하고 이스라엘의 부흥을 일으키게 됩니다. 느헤미야는 이렇게 사는 길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또 자신에게도 복된 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역사의 새벽을 가져온 사람입니다.
1. 사명을 붙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축복의 비밀은 꿈이 있는 사람에게 주십니다. “너희는 목전에 행하시는 이 큰일을 보라”(삼상12:16) ‘큰일’이란 형제, 이웃, 사회, 민족,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즉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 주님은 온 세상 인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큰 일을 행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세계의 중심지 로마에서 복음전파를 위해서 큰일을 붙들고 일했습니다. 요셉은 애굽 전체와 민족과 가족을 구했고 위대한 사명의 큰일을 행했습니다. 우리교회도 민족복음화와 영적각성과 세계선교를 위해서 큰일을 붙들고 있습니다.
사명(使命, mission)은 히브리말로 ‘짜바’라고 하는데 이 말은 ‘책임 맡다’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명을 위해서 선한 싸움을 싸워가야 합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4:7)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사도바울은 자신 속에 있는 강적 때문에 고민했습니다. 우리도 예배시간에 우리 안에 있는 강력한 것을 잡아내야 합니다. 이것을 이길 수 있는 무기는 성령의 힘입니다. 그리고 붙들고 나갈 과제는 사명을 붙잡는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는 키워야 할 사명을 잡아야 하고, 희생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은 복음의 사명! 즉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런 사명을 붙잡고 사시기 바랍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시오! 그리고 당신의 사명을 감당하시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 할 수 있습니다.
2. 고난을 감당해야 한다
사명을 붙들고 나가는 사람은 언제나 고난이 앞을 막고 있습니다. 즉 반대세력과 부딪히게 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 엘리아십은 도비야라는 사람, 즉 좋지 못한 사람과 손잡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의 손자 하나는 산발랏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산발랏은 느헤미야를 해치려고 늘 대항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비웃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해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게셈과 결탁하여 느헤미야를 돕는척 하면서 실상은 해하고자 하였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억압하고 두렵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의 사람이라면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아무리 큰 고난이 닥쳐와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이기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일에만 관심을 집중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I formed for myself proclaim my praise) 하나님께서는 피조물로부터 찬송과 예배를 받으시기 위해서 창조하셨습니다. 소리나지 않는 것은 고물이고 무용지물입니다. 따라서 찬양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어긋나는 거침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을 살면서 세상풍속과 문화에 빠져 있지 말고, 고난이 닥쳐오고 힘들어도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하면 여러분의 삶은 반드시 승리할 줄 믿습니다.
3. 하나님이 복 주셔야 한다.
하나님이 복주시려면 하나님의 기억속에 내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옵소서!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느13:31) (Remember me. with favor, Oh my God!)
하나님께 기억해 달라는 기도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 제가 악한 세력 때문에 고난 중에 있사오니 나를 기억하옵소서! 저들의 악한 행동을 기억하옵소서! 보응하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12:19) 두 번째 기도는 “하나님! 제가 하나님께 처음 익은 것, 정한 기한에 소중한 것을 드리오니 기억하옵소서.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느13:31) 그 앞의 30절 말씀을 보면 “떠나게 하여 깨끗하게 하고”라는 말은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마음을 비운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일을 맡게하고”라는 말씀의 의미는 자신의 직분을 감당한다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31절에 “드리게”라는 말씀의 의미는 자신의 봉헌, 헌신을 말합니다. 즉 감사생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 있는 사람의 3대 강령입니다. 그리고 복 받는 3대 지침입니다.
하나님의 전에 나와서 하나님의 전에서 쓰임을 받도록 사명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전에서 고난도 감당하면 하나님께서 기억해 주십니다. 하나님이여! 처음 익은 것을 드리오니 나를 기억하옵소서! 새해에는 거룩한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의 일에 동참해 보십시오. 그리고 역사의 새벽을 만드십시오.
드려야 할 십일조
느헤미야 13:10-14 / 이진수목사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으로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전 방에 거하던 원수 도비야를 내어 쫓고 도비야의 세간을 성전의 방안에서 즉시 내 던져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성전과 예배에 최선을 다해야 할 제사장이 원수 산발랏의 딸을 손자의 사위로 삼고 도비야와 가까이 지내며 성전 안에 채워 놓아야 할 하나님의 성전 방안에 도비야와 도비야의 세간을 갖다 놓게 한 것을 보면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배와 제사, 그리고 성전의 임무를 감당하는 레위인들이 어떻게 하고 있을지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가 알아보니 역시나 성벽 건축 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느헤미야 때 불러 모았던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내겠다고 한 십일조 생활을 중단했기에 살아갈 수 있는 사례를 받지 못하고 성전을 떠나 저마다 먹고 살기 위해 밭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성전의 일을 감당하던 레위인들이 떠난 성전은 또 다시 예배가 중단되고 버린바 된 것입니다.
느헤미야 10장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에 기록된 대로, 우리의 맏아들과 가축의 첫 새끼 곧 처음 난 송아지와 새끼 양을 성전에서 우리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에게 바치겠습니다. 또 처음 익은 밀의 가루와 온갖 과일나무의 열매와 새 포도주와 기름을 가져다가, 제사장의 몫으로 우리 하나님의 성전 창고에 넣기로 하고, 또 밭에서 나는 소출 가운데서 열의 하나는 레위 사람들의 몫으로 드리겠습니다. 열의 하나를 떼어서, 우리 하나님의 성전 창고의 여러 방에 두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아무렇게나 버려 두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나님 앞에 서약하고 맹세하고 지켜 나갔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페르시아에 다시 돌아간 후 얼마되지 않아 하나님의 전은 버려졌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십의 일조, 첫 열매들을 더 이상 드리지 않아서 그것으로 성전의 예배와 제사를 감당하는 레위인들이 떠나가고 밭에서 일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성경에 정확한 이유가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는 당시의 상황이 녹록치 않았을 것입니다. 성벽을 세워졌지만 여전히 페르시아의 식민지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과중한 세금을 내야 했습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생활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내 생활, 내 가정, 내 자식 먼저 챙기도 바쁜데 성전에 내야 할, 하나님께 드릴 십일조는 뒷전이 된 것입니다. 더 나아가 성전을 보니까 성전의 제사장이 도비야와 가까이 지내면서 성전의 방까지 내어 주는 모습을 보면서 저런 인간에게 내 귀한 물질과 곡식을 줄 수 없다 라는 마음이 들어서 일부러 내지 않은 백성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떠한 이유이든지간에 드려야 할 헌금과 십일조 생활을 멈추었습니다. 드리겠다고 한 약속을 저버리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성전과 예배의 직무를 전적으로 담당하던 레위인들이 먹고 사는 문제로 인해, 자신이 맡아야 직분을 감당하지 못하고, 자기 밭으로 돌아가서 성전 일을 전적으로 감당하고 있는 사람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다시 말하지만 백성들이 십일조를 계속 신실하게 드리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상황이 변하고 시간이 흐르자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적으로 퇴보한다는 것은 헌금으로 알 수 있습니다. 헌금함에 돈을 넣으면서 아까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면 나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아니라 교회가 싫고 사람이 싫어서 그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상황과 형편이 어려워서 그렇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하자님을 향한 시선이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상황과 형편만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 어떻게 일을 처리합니까? 11절 보시면 십일조 생활을 중단한 리더들과 백성들을 꾸짖습니다. 그리고 다시 성전에서 온전히 사역해야 할 레위인들을 다시 복직시켜 성전의 일을 감당하게 합니다. 12절을 보면 온 유다 사람들이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가지고 와서, 창고에 들여다 놓습니다. 그리고 13절을 보면 레위 사람들에게 그것을 잘 분배하도록 정직하다고 인정을 받는 사람 세 사람을 택하여 그 일을 맡깁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이 행한 일, 십일조 생활을 중단한 백성들을 꾸짖어 다시 드리게 행한 일, 그로 인해 레위인들이 성전의 직무를 온전히 감당하게 한 일에 대해 하나님께 이렇게 14절에 기도합니다. “하나님, 내가 한 일을 기억하여 주십시오. 하나님의 성전을 보살핀 일과,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정성껏 한 이 일을 잊지 마십시오”이것이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기뻐하시고 축복하시는 일임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온전한 십일조 생활과 예배의 직무를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정성껏 섬김과 드림의 헌신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축복하심을 믿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꾸준함이 탁월함을 이긴다
느헤미아 13:10-14 / 김경민목사
세상에는 어느 분야에나 천재형과 노력형이 비교되곤 하죠. 특별히 스포츠 분야나 예술, 혹은 공부와 관련하여 천재와 노력이 많이 비교하죠. 천재가 더 잘할까? 노력하는 사람이 더 잘할까?
그런데 현대인들에게는 천재형이나 노력형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일관되고 꾸준한 사람입니다.
현대인들의 특징이라고 하면, 쉽게 실증내고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것이죠.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직장도 혹은 전공도 심하게는 사람의 관계도 쉽게 여기는 풍조가 있죠. 그래서 일관되고 꾸준한 사람을 원하지만, 그런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죠.
그런데 이러한 풍조가 비단 오늘의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 성벽 봉헌식을 기쁨으로 드리며, 앞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버려두지 아니하겠다고 다짐하고 약속하였던, 예루살렘 사람들이, 느헤미야가 잠시 예루살렘을 비우고, 아닥사스다 왕궁에 있을 때에, 마음이 돌아서버리는 일이 발생한 것이죠.
지난 시간에는 성벽 봉헌식 때 만들어진 십일조를 보관하는 방을 도비야에게 내주었던 일을 살펴보았는데, 오늘 본문은 십일조의 방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하면서 나타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 십일조의 방의 문제가 쉽게 보입니다. 도비야를 내어 쫓고 그 방에 원래 보관하기로 하였던 십일조로 받쳐진 각종 예물을 잘 보관하면 되는 것이죠.
하지만 당시 이들이 어떠한 상황에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간단한 문제였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흉년이 있었는지, 또는 주변 이민족으로부터 침략을 받은 것은 아닌지, 아니면 예루살렘 지도층의 부정부패는 없었는지 등등의 상황도 있었겠죠.
이런 여러 가지 상황으로 인하여 예루살렘 사람들의 십일조가 레위사람들에게 온전하게 전달되지 못하였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전을 지키며 봉사하던 많은 사람들이 성전을 떠나 밭으로 도망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버려두지 않겠다고 약속한 예루살렘 사람들은 거짓으로 하나님께 약속을 한 것일까요?
성경에서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 2가지 마음을 갖게 합니다. 하나는 이런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이죠.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하면서 말이죠.
또 다른 마음은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일입니다. 나도 하나님께 드린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없는가 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성경에서 이런 말씀을 보면서 남을 비난하거나, 자신의 약함으로 실의에 빠질 이유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말씀들은 결국 회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죠.
언제든지 우리는 다시 시작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탁월하게 잘하는 성도가 되려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꾸준하게 순종하는 성도가 되려고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 13장에는 총 3번의 느헤이먀의 기도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14절은 그 첫 번째 기도인데요. 느헤미야의 기도를 보면 내가 선한 일을 하였으니 나를 도망하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는 하나님 그래도 나를 저들과 다르게 선한 사람이 아닙니까? 나는 벌 받을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여기서 선한 일을 ‘하싸다이’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우리가 잘 하는 하나님의 은혜, 자비, 인자하심을 뜻하는 헤세드입니다. 곧 내가 한 선한 일은 내가 잘한 일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인자하심을 나타내는 일을 말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전하는 일을 하였으니 이 일이 흐지부지 되지 않고 계속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기도를 하는 것이죠.
우리에게도 이러한 마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탁월하고 돋보이는 성도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드러내는 성도가 되며, 그러한 삶이 흐지부지 되거나 끊어지지 않도록 꾸준하고 일관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바라기는요. 오늘도 언제나처럼 하나님을 의지하시며,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전할 수 있는 하루를 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하루의 삶이 꾸준하고 일관되게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승리하시는 하루가 되어서, 오늘도 기쁨과 감사로 하루를 사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꾸준하게
느 13:10-14 / 장영기목사
또한 나는 레위인들이 정기적으로 배당되는 양식을 받지 못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예배를 인도하던 레위인과 노래하는 사람들이 모두 성전을 떠나 각자의 농지로 돌아가게 되었다. 나는 관리들을 꾸짖었다. "하나님의 성전이 왜 버려졌소?" 나는 모든 사람들을 다시 불러들여 각자의 자리에 배치했다. 그러자 온 유다 사람이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다시 창고에 들여다 놓았다. 나는 제사장 셀레먀, 서기관 사독, 레위인 브다야에게 창고의 책임을 맡겼다. 그리고 맛다냐의 손자요 삭굴의 아들인 하난을 그들의 오른팔로 삼았다. 이들은 정직하고 근면하기로 정평이 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책임지고 자기 형제들에게 돌아갈 몫을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나의 하나님 이 일로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제가 하나님의 성전과 예배를 위해 헌신적으로 행한 이 일을 잊지 마십시오.
제사장이 그렇게 이방인과 내통하고 있을 정도였으니 예배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보나마나였습니다.
역시, 느헤미야 때 불러 모았던 레위인들과 노래하는 자들은 사례를 받지 못하자 도망가고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버린 바 되었던 것입니다!
10장 언약식에서 그들이 다짐하고 봉인한 언약은 어떻게 된 것일까요?
그 때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여러가지를 다짐한 후 '우리가 하나님의 전을 버려두지 아니하리라'고 마무리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의 전은 버려져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성경에 정확한 이유가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니어서 그 이유를 추측해 볼 수밖에 없습니다.
먼저, 당시의 상황이 녹록치 않았을 것입니다.
식민지의 경제 상황이라는 것이 늘 그렇지 않습니까?
페르시아에 대한 과중한 세금 등으로 백성들의 허리가 휘었겠지요.
그러다 보니 성전에 십일조를 내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지도자들의 타락은 백성들의 마음을 식게 했을 것입니다.
제사장이 이방인과 내통해서 성전의 방을 내어준 사건을 보며 백성들의 마음이 돌아섰을 가능성도 크지요.
지금 느헤미야가 레위 사람들이 떠난 것에 대해 지도자들을 꾸짖는 것으로 보아 지도자들도 솔선수범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백성들이 무엇을 보고 배웠겠습니까!
궁극적으로는 사탄의 방해까지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어쨌든 사탄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는데 온 힘을 다 쏟고 있으니까요.
이전의 성경말씀을 돌아보았을 때 성벽을 완성하고 말씀을 들으며 회개하고 봉헌식을 했던 그 일련의 과정들이 단지 일시적인 흥분에 지나지 않았다거나 느헤미야라는 강력한 지도자가 두려워 겉으로만 회개하는 척 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물론 지도자들 중에는 그런 부류도 있었겠지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당시에는 나름대로 진심으로 회개하고 기뻐하며 예배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역시 문제는 꾸준함입니다.
우리 또한 부흥회나 수련회에서 감격에 겨워 회개하고 예배하며 다짐했지만 일상으로 돌아오자 어느새 이전으로 돌아가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아.. 우리는 너무 연약합니다. 너무 쉽게 다짐을 잊어버리기도 하고 조금만 어려움이 오면 결심이 무너지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상황을 탓하며 스스로를 합리화하지요.
별 수 없습니다.
다시 일어서야지요.
첫사랑을 기억하며 어제의 다짐을 기억하며 오늘 아침의 결단을 기억하며 다시 일어서는 수밖에 없습니다.
먼저 꾸준한 말씀묵상과 기도가 필요합니다.
수련회나 부흥회 때처럼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지는 못하겠지만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이어가는 말씀과 기도가 우리의 다짐을 날마다 새롭게 합니다.
공동체의 도움도 필수적입니다.
혼자서는 쉽게 넘어지지만 함께 걷는 사람들은 서로 붙잡아주고 일으켜주며 함께 나아갑니다.
꾸준함이 탁월함을 이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