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전 여름방학에 나는 대학교 4학년 학생 27명(남자 11명 여자 16명)을 데리고 3주간 네팔 카투만두로 봉사활동을 다녀온 적이 있다. 서울소재 대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몇명 안되고 전부 지방대학생들로 진정한 봉사를 하고 싶은 학생도 일부 있었겠지만 대다수 취업시 가산점을 받기위한 스펙을 쌓으려고 갔다. 경비에 절반은 본인부담이고 반은 교육부예산이었다.
학생들은 매일 절반으로 나뉘어 한팀은 빈민가 어린이들에게 아침배식하는일을 하고 또 절반은 히말라야 등반대로 왔다가 포교차 현지에 정착한 영봉스님이 무료로 운영하는 한국어 어학원에서 한글을 가르쳤다. 아침배식은 청량리 노숙자들에게 식사를 대주는 것으로 유명한 밥퍼목사인 최일도목사의 교회에서 후원하고 있었다. 당시만에도 한국으로 일하러 오려는 네팔사람들이 너무 많아 10월 일요일하루에 전교가 휴교한 상태서 한국노동부 산하기관서 감독하에 한국어 능력시험을 치루었고 당시 지하철공사장, 건설현장 등 한국와서 일하는 노동자가 8천명에 달했다. 더러운 구정물이 흐르는 강가근처 천막촌에 사는 아이들은 우리가 제공하는 하루 한끼를 먹기위해 매일 아침 200명씩 줄을 섰고 판자로 지어진 교회에서 한국말로 찬송가를 한시간 가량 부른후에 아침배식을 해주었는데 동생들을 허리춤에 끼고 와 식판을 혀로 핥으면서 깨끗이 밥한톨 안남기고 먹었고 더 먹고 싶은 표정이 역력했다.
과거 내가 대학입학시험 본고사 국어시험을 볼때 십시일반을 한자로 쓰라는 문제가 나왔는데 생각이 나지 않아 못쓰고 나왔고 보기좋게 낙방한 적이 있다. 그뒤로 십시일반을 수도 없이 써봤고 그뜻이 얼마나 우리가 살아가는데 중요한지를 느끼곤 했다. 시는 숟가락 싯자이니 열숟가락이 모여 한사람 밥이 된다는 뜻으로 나눔과 베품의 숭고한 의미를 지니는 사자성어였다.
지나간 세월동안 집사람이 여행을 가거나 집을 며칠씩 비우게 되면 난 꼭 친구들을 불러 우리집에서 밥을 같이 했다. 지금사는 잠실로 이사온지 일년반이 지났는데 우리집서 밥먹으러 온 팀을 세어보니 8팀이 되었다. 근사하게 차리는것도 아니고 그냥 내가 끓인 김치찌개 와 된장찌개. 골뱅이파무침. 무말랭이무침.계란말이. 김. 그리고 중국집서 시킨 양장피하나면 충분했다.
쌀독에서 인심난다고 밥먹으며 나누는 정은 오래간다. 당시 꿀꿀이죽같은 밥을 먹던 네팔에 빈민가 아이들도 이제는 장성하여 한국서 일하러온 청년들도 더러 있을 것이다. 못살던 시절에도 부모님들은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꼭 같이 밥먹자고 말했다. 아무리 메마른 사회라도 사람사는 인정은 얼굴보며 먹는 식탁에서 나오다고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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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맞아요
지방살다가 서울에 처음 올라와서 갈데도없고 혼자 어디가서 사먹기도 어려웠을대 강남터미널에서 가게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볼때마다 배고프지 밥먹자 식사시간도 아닐때도 밥먹자 하던친구 지금은 제가 늘 맛있는걸 사가지고 가지요
친구는 미안해 하지만 난 아직 멀었어요 더많이 값아야해요
신세를 졌음에도 갚는것도 쉽지 않습니다. 살기바빠 잊어버리거든요.. 다올님이 친구랑 같이 밥먹으며 신세갚는것도 인간다운 면모와 정이 둠뿍 있는 것입니다.
인정이 많으세요.
이제는 먹는 즐거움이
크답니다.
나이 들고해서 그럴까요?
참 어렵게 지낸 세월이
문득 나네요.
오빠 당시에는 꿀꿀이
죽도 사 먹었다고 하네요ㅠ
네팔서 3주있으면 참 고생많이 했습니다. 빈민가 주택을 3주간 세내어 학생들은 1.2층을 쓰고 저는 마당구석 창고서 삐거거리는 나무침대서 무려 3주를 잤습니다.
수시로 전기가 안들어오고 수돗물도 끊어져 여학생들은 굉장히 고통스러운 3주였지요.
그래도 경비를 아껴 떠날때는 빈민가 무료급식소 단체에 3백불.. 스님이 운영하는 한국어무료 어학원에 3백불씩 주고 왔습니다.
스님은 매년 한국에 구정연휴에 늘 잠시 오는데 그때마다 등촌동88체육관서 네팔노동자들이 2천여명이 모여 축제를 합니다. 거기에 초대 받아오는 스님은 완전영웅 대접받으며 네팔노동자들의 눈물바다속에 환영행사를 합니다.
사람 냄새 풍기며 사시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