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력 하나로 버텨온 인생인데 빈손으로 또 한해를 갈무리하려다보니
며칠 전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았어요. 사우나 찜질방까지 다녀왔지만
어깨 통증이 가시질 않아서 9시 기상-러닝-글쓰기-식사-룸 청소를 마치고
2라운드 취침에 들어갔는데 PM2시에 저절로 눈이 떠져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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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에 일어나 앉아 TV 볼륨을 높였고 MB가 특별사면 돼 자택에서
신년 메시지를 하는 모양입니다. 채널을 돌려버리려다가 들어보니
"걱정을 끼쳐드려서 송구합니다. 올 한해 너무 어려웠는데 다들 애쓰셨고
새 해에는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열심히 살라"는 기도를 하겠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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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나 그렇게 기도하시라. 나는 내가 알아서 살 거니까. 아니 이 정도
메시지를 전할 것 같으면 뭐 하러 기자 회견을 했는지 저로선 이해가 가지
않네요. 21세기 보수 교회의 포지션이 딱 MB 수준입니다. 형기15년 까주고
벌금82억 털어줬으니 이제 더 이상은 국물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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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스, 4대강 사업으로 만든 엄청난 돈 자손대대로 잘 먹고 잘 사시라.
휙 하고 채널을 돌렸더니 예쁜 놈 임 영웅(32)이 특집을 합니다. 아들 같은
녀석이 저리도 의젓한 것 좀 보시라. 영웅이가 송우리 놈 인줄은 알았지만
오늘 보니 어머니께서 운영하는 미용실이 우리 노래방(앙상블, 월드)바로 옆
건물에 있었네요. 양띠, 경복 대 실용음악과를 다녔다니 남훈이 또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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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훈이란 놈은 에스더랑 갑장이기 때문에 제가 더 예뻐했는데 당시(2007-
2013) 오전 시간 대(9:00-18:00)는 제가 잠을 자는 동안 남훈이가 학생손님
을 받았어요. 남훈이가 미성년자(19)인데도 워낙 똘똘해서 제가 게임장
일도 시키고 노래방을 아예 맡겨놓았어요. 제가 아는 91년 산 양띠들은
하나같이 야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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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영웅이가 친구들과 함께 우리 노래방을 얼마나 다녀갔을까요?
포천인구가 15만 인데 그중 송우리가 핫플레스였고 포천 인구 8만이
움직였어요. 조그만 동네에 노래방 포함 술집이 300개가 있었습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하면 인재가 나오려면 인프라가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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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노래방이 사양길이지만 영웅이가 청소년 시절에는 노래방이
전성기였어요. 동전노래방이 이때 학생 손님을 겨냥해 나온 시스템입니다.
저는 우리 아이들 키울 때 만화 책, 스티커, 닌텐도, 휴대폰, 컴퓨터, 이젤,
박스, 토시 같은 것들을 애기 때부터 사줬고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욕망을
사유하도록 의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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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연극, 서점, 여행, 맛 집 기행, 문화체험, 미술관, 전시회, 야외스케치
같은 것들은 일상생활로 했고요, 그때마다 지인들로부터 눈총을 받기도
했지만 아이들이 좋아했기 때문에 개의치 않았어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우리 아이들이 아빠를 자기편이라고 생각하게 된 1등 공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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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MEMA(문화적 유전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우리 아이들이 제
DNA보다 '문화적 유전자'를 닮아줘서 얼마나 오진지 모릅니다. 저의 교육
철학은 못하는 것 9개를 죽이고 잘하는 것 1 개를 살려주는 블루오션
전략이었는데 그것이 먹힌 것 같아요. 에스더는 아기 때부터 크레파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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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고 놀다가 그림 하나로 전교회장-서울예고-세종 대-한예종-수랩까지
왔지만 예주는 책보기가 취미였던 아이였고 큰 특기가 없는 줄 알았어요.
어느 날 악보를 줄줄 읽는다는 소리를 들었고 지역 콩쿠르에서 10분짜리
피아노 연주를 하는 걸 보고 제가 딸의 음악적 재능을 발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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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를 사줬는데 음악에 문외한인지라 솔직히 뭘 서어포트 해줘야할지
몰랐어요. 중학생이 되면서 체르니40번을 마감으로 피아노와 작별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뭔지 모를 안타까움 때문에 혼자서 많이 슬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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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주가 초3년 때 자기도 회장 선거에 나가고 싶다고 해서 너무 기뻤어요.
저는 예주가 내성적인 아이인 줄 알았어요. 근데 그 안에 욕망이 있는 것을
보고 쌍수를 들고 환영 했어요, 수줍게 나간 첫 선거에서 고배를 마셨고 4
학년이 되면서 회장, 6학년 때는 전교회장에 입성을 합니다. 김 예주 리스펙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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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 가서 볼 때마다 우리 예주가 언니 못지않은 리더십(욕망)이 있다는
걸 알았지만 피아노를 무기로 대학 진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계획 수정이
불가피했어요. ‘그래 공부로 가자!’ 예주가 보성 3년 다니는 동안 질풍노도를
겪었을 텐데 아빠도 포천에서 힘든 시기를 살고 있었으니 누가 예주를 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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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만한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예주야 미안해. 에스더가 아빠 대신 예주
진학상담을 했고 배화여고에 입학을 했어요. 고1이 되면서 어느 날 본인이
진로 수정을 하겠다고 해서 잠깐 당황했어요. 자기도 미술을 하겠답니다.
그때 쓴 편지를 첨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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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주야, 아빠가 기운이 다 빠져서 네게 글을 쓴다. 네가 피아노를 쳤고
우리 집에 음악 하는 사람이 한 명쯤 나올 것을 기대했는데 네가 1학년 때
미술을 하겠다고 해서 조금 놀랬어. 근데 열 공하는 너를 보고 깜작 놀랬어.
네가 아빠 피를 물려받았으니 소질이 있을 테지만 소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열심히 오래하는 것이란다. 앞으로 1년을 죽기 살기로 하면 서울 대에 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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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것이고 대학가서도 4년을 열심히 하면 그림을 20년 올-인한 언니처럼
될 것이다. 5년 후라야 겨우 네 나이23살이야. 만약 10년을 더하게 되면 넌
교수를 하고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어제는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혼자서
울었다. 예주야, 괜찮니? 콘서트도 못가고 학과에 실기까지 하느라고 고생
많구나. 사랑한다. 우리 딸.(2017.6.19.mon.아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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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던 사회에서의 예술은 왜 욕망을 사유하는가? ‘욕망desire’ 은 일반
적으로 어떤 동기가 실현되지 못하고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억압되어
있는 상태로써, 외부와 부단히 관계를 맺으며 자유롭게 흐르고자 하는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때문에 욕망은 그동안 도덕적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통제 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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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것으로 인식 되어왔어요. 욕망은 이성을 지닌 사람이 물리쳐야 할 저급한
정신활동이라고 생각한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종교에서는 욕망을 가지는 것
자체를 죄라고 단정하여 욕구를 그 본성상 악으로 규정했고, 로마인들은 욕구
를 그 영향의 측면에서 보아 악(evil)으로 간주했습니다. 이렇듯 욕망은 플라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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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서양 철학사에서 이성에 비해 열등한 능력으로 배제되어 왔고, 이성 중시
사상은 모던적 사고의 근간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그러나 욕망의 진정한 의미
는 긍정적이고 필연적이며 모든 생물에게서 제거 되어서도 안 되고 제거할 수
도 없는 근본적 본능이라는 것입니다. 예주야! 글쓰다 보니 기분이 좋아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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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연시라고 특별할 것 없다. 적당히 놀고 마시고 공부하렴. 뭐든 제어하거나
과하면 문제가 생기단 말이지. 내 속에 미움이나 한을 오래 품지 말고 속히 잊거나
그때그때 즐기는 인생을 살기 바래. 믿음을 까먹어서 걸리면 믿음의 교회 나가고
때때로 아빠가 밉거나 섭섭하면 연락을 단절하거나 밀당을 하시라. 그리고 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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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으면 바로 문자를 보내면 좋겠구아. 동영상 작업은 얼마나 진전이 있니? 한 학기
남겨둔 겨울 방학동안 동영상 업데이트를 해보는 건 어떻겠니? 네 음악적 재능을
동영상에 불사지르란 소리야. 아빠가 그동안 네 회화에 대한 언급을 자제한 이유는
숙명여대 특차미술학부생의 그림이니까 그정도는 기본으로 해야한다고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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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도 2번 했고 이번 포트폴리오 보니까 비구상은 네가 언니보다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네가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을 고려한 끝에 학부 졸업-대학원진학
(연출, 멀영)-작업실 만들어 평생 작업-학원 운영(비정규직은 항상 돈 나오는 구석이
필요함)-결혼이든 비혼이든 자유지만 아빠가 데릴사위를 원한다는 걸 기억해줬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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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겠구나. 아빠가 월권 한다고 우리 똥강아지가 화를 내면 어쩌나 고민하지 않은 건
아니다만 오매불망 네가 잘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심사숙고한 것이니 참고만 하시라.
오늘은 여기까지 쓸게. 김 예주 파이팅!
2022.12.30.fti.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