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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다
느 13:15-22
15 그 때에 내가 본즉 유다에서 어떤 사람이 안식일에 술틀을 밟고 곡식단을 나귀에 실어 운반하며 포도주와 포도와 무화과와 여러 가지 짐을 지고 안식일에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음식물을 팔기로 그 날에 내가 경계하였고
16 또 두로 사람이 예루살렘에 살며 물고기와 각양 물건을 가져다가 안식일에 예루살렘에서도 유다 자손에게 팔기로
17 내가 유다의 모든 귀인들을 꾸짖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 이 악을 행하여 안식일을 범하느냐
18 너희 조상들이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래서 우리 하나님이 이 모든 재앙을 우리와 이 성읍에 내리신 것이 아니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안식일을 범하여 진노가 이스라엘에게 더욱 심하게 임하도록 하는도다 하고
19 안식일 전 예루살렘 성문이 어두워갈 때에 내가 성문을 닫고 안식일이 지나기 전에는 열지 말라 하고 나를 따르는 종자 몇을 성문마다 세워 안식일에는 아무 짐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20 장사꾼들과 각양 물건 파는 자들이 한두 번 예루살렘 성 밖에서 자므로
21 내가 그들에게 경계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성 밑에서 자느냐 다시 이같이 하면 내가 잡으리라 하였더니 그후부터는 안식일에 그들이 다시 오지 아니하였느니라
22 내가 또 레위 사람들에게 몸을 정결하게 하고 와서 성문을 지켜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라 하였느니라 내 하나님이여 나를 위하여 이 일도 기억하시옵고 주의 크신 은혜대로 나를 아끼시옵소서
느 13:15-22 / [안식일 규정] 또 나는 그때에 유다 백성들이 안식일에도 일하는 것을 직접 보았다. 안식일에 포도주 틀에 올라가 포도를 밟아 술을 짜는 이들도 있고, 나귀에 곡식단이나 포도주 부대나 포도송이나 무화과 광주리나 다른 짐들을 지워 예루살렘으로 날라다가 파는 이들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유다 사람들에게 다시는 안식일에 그런 물건들을 팔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16) 또 예루살렘에는 두로 사람들도 몇명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물고기와 다른 상품들도 가져다가 안식일에도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팔았다. 17) 그래서 나는 유다 백성의 지도자들을 불러 놓고 이렇게 책망하였다. `안식일이 시작되는 저녁의 어둠 속에서 여러분이 저지르는 그 악한 일들은 차마 눈뜨고는 볼 수가 없소! 여러분은 안식일을 더럽히고 있소! 18) 여러분의 선조들이 바로 이런 죄를 지었기 때문에, 우리의 하나님께서 그토록 엄청난 재앙을 우리와 이 도성에 내리셨던 것이오! 그런데도 여러분은 이렇게 안식일을 더럽힘으로써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가 이스라엘에게 내리도록 할 작정입니까?' 19) 그러므로 나는 금요일 저녁때 해가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예루살렘의 모든 성문을 닫고, 안식일이 지나간 다음에야 비로소 성문을 다시 열도록 명령하였다. 그러고나서 나는 나의 직속부하 몇 사람을 성문마다 배치하여 안식일에는 어떤 짐도 성안으로 실어 나르지 못하게 하였다. 20) 그러나 안식일에 팔 수 있는 온갖 물품을 가지고 다니는 장수와 팔 물건이 있는 사람들이 한두 번 예루살렘 성밖에서 천막을 치고 잤다. 21) 그래서 내가 그들에게 경고하였다. `왜 안식일에 성벽 밖에서 잠을 가느냐? 만일 또 한 번 그런 일이 있으면 내가 모조리 붙잡아 들이겠다!' 그러자 그 다음부터는 안식일 저녁에 오는 이들이 없었다. 22) 그래서 나는 내 부하들 대신에 레위 사람들을 세워 성문을 지키게 하였다. 나는 그들에게 몸을 정결하게 씻고 와서 안식일을 거룩한 날로 지킬 수 있도록 성문을 모두 잘 지키라고 명령하였다. 이때에 나는 이렇게 기도하였다. `나의 하나님, 이 일에서도 나를 기억하시고, 언제나 변함없는 주님의 사랑으로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느헤미야의 개혁은 계속됩니다. 무너진 성벽만 재건하고 성전과 성전의 기능을 바로 세우는 일에 이어 안식일을 준수하도록 규칙을 만들어 시행하였습니다.
무너진 안식일(15-16) 이스라엘에서 안식일에 상품을 판매하는 것은 위법이었습니다(암 8:5). 안식일에 짐을 옮기는 것도 금지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 중의 어떤 사람은 안식일인데도 술틀을 밟고 곡식단을 운반하며 포도주 등을 예루살렘에서 팔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그러하니 이방인은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해안 도시에 살았던 두로의 사람들은 물고기와 여러 교역 물품을 안식일에 판매하였습니다. 평일과 안식일의 구분이 없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억하는 일에 점점 소홀해졌습니다. 작은 일은 작은 일입니다. 하지만 작은 일에 충성하지 못하면 이후 큰 일이 무너집니다.
지도자들을 꾸짖다(17-18) 많은 사람이 안식일을 범하는 것을 사소한 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볼 때 그것은 큰 악이었습니다. 이전에 조상들이 범하여 대가를 치른 것과 같은 죄악이었습니다(겔 20:12-24). 느헤미야는 안식법 시행에 있어서 모범을 보여야 할 사람들은 백성의 지도자들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지도자들에게 안식법을 솔선수범하도록 훈계했습니다. 말씀대로 살기로 약속하고 다짐했으면서도(10:31) 여전히 저지르고 있는 죄가 있습니까?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심판하실 수 있습니다. 그 죄가 올무가 되어 신앙성장을 막거나 믿음을 무너뜨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철저하게 안식일을 지키게 하다(19-22) 안식법 시행을 위한 조처로 안식일에는 성문을 닫고 상인들의 예루살렘 출입은 금지되었습니다. 짐을 성안으로 운반하는 것도 금지되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자기 수하의 사람들을 보초로 세워 직접 성문을 통제하고 감독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느헤미야는 안식일에 예루살렘을 철저하게 이방인 세계와 구별했습니다. 안식일에 성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상인들은 성 밖에서 호객행위를 하거나 몰래 성안으로 상품들을 반입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느헤미야는 이러한 행위들이 근절될 때까지 상인들을 강력하게 단속했습니다.
적용: 느헤미야의 이 모든 조치는 안식일 법을 유다 공동체의 회복과 번영의 기초로 확신하고 있었던 느헤미야의 믿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후에 예수께서는 안식일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보다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일에 힘쓰도록 제자들에게 가르쳤습니다(막 3:1-6, 눅 6:9).
백 번의 눈빛보다 천 번의 스킨십보다 만 번의 입맞춤보다 가슴 설레는 건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듣는 ‘사랑한다’는 한마디의 말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표현하지 않고 사랑을 한다는 것은 낙타에게 물 한 방울 없이 사막을 건너라고 하는 것과 같다고 어느 시인이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때로는 아무 조건도 이유도 없이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것을 감사하고 또 감사해야합니다.
< 설 교 >
느헤미야 13:15-22
찬송가 315장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느헤미야는 13장에 이르러 유다 공동체 안에 허물어져 있던 신앙을 개혁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느헤미야는 8장부터 대대적으로 신앙적인 개혁을 시작했었습니다. 절기 준수와 하나님과 맺었던 언약과 제사 제도의 확립, 그리고 오늘 13장에서는 안식일에 관한 개혁을 진행합니다.
(15-16) 그 때에 내가 본즉 유다에서 어떤 사람이 안식일에 술틀을 밟고 곡식단을 나귀에 실어 운반하며 포도주와 포도와 무화과와 여러 가지 짐을 지고 안식일에 예루살렘에 들어 와서 음식물을 팔기로 그 날에 내가 경계하였고 또 두로 사람이 예루살렘에 살며 물고기와 각양 물건을 가져다가 안식일에 예루살렘에서도 유다 자손에게 팔기로
유다 공동체를 본 느헤미야(15-16)
느헤미야는 유다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를 보았습니다. 한글 성경은 15절에서 ‘어떤 사람’이라고 지칭하고 있어서 마치 한 사람이 안식일을 범하는 인상을 주고 있지만, 히브리 원어에서는 한 개인이 아닌, 다수를 지칭하는 복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당시 대다수의 유다 백성들은 안식일을 범하고 있었고, 오늘 본문에서는 각 사람들이 각자 처한 환경에서 안식일을 범하고 있다는 두드러진 실례를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이것이 포로 생활에서 귀환한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13장 1절에서 백성들에게 모세의 책, 즉 하나님의 율법을 낭독해 주었습니다. 그는 말씀으로 명확한 기준을 세우고, 말씀으로 백성들의 심령을 새롭게 하며, 말씀으로 유다 공동체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습니다. 느헤미야의 개혁 한가운데에는 모세의 책으로 기록되어졌던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오늘 함께 읽은 본문 15절에서 ‘내가 본즉’이라는 표현이 무심코 지나쳐서는 안될 무게감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습니다. ‘보다’를 의미하는 동사 ‘라아רָאָה’는 본절에서 보다라는 기본적인 의미를 넘어서, 하나의 사건을 파악하여 본질을 인식하는 시선을 표현하는 의미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선으로 느헤미야는 안식일이 처참히 무너져있다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단순히 그런 상황을 본 것을 넘어서, 공동체 안에 안식일이 어떻게 무너져있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공동체 안에 얼마만큼의 강도로 임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인식했습니다.
두 말할 나위 없이 느헤미야가 안식일이 무너졌던 상황을 명확하게 볼 수 있게 만든 렌즈는 모세의 책,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모두 익히 아시다피시, 성경에는 어느 영화속 주인공 같이 초능력을 지닌 인물이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평범했습니다. 때로는 평범한 수준에도 못미치는 사람들이 성경속에는 즐비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맍은 위로와 용기를 얻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우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 마저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약 5:17).
느헤미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었다면, 예로부터 지켜 행했던 안식일의 모습과 당시 유다 백성들이 범한 안식일의 차이를 몰랐을 것입니다. 유다 공동체 각 사람이 각 처에서 안식일을 범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었다면, 그 역시도 그들과 동일하게 안식일을 범하는 사람 중 하나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어두운 영적인 상황 가운데 그가 눈을 들어 상황을 인식하여 보게 만든 힘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저와 교우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늘 하루라는 호흡을 선물로 받아, 악인과 선인에게 해와 비를 적절히 내려주시는 그분의 돌보심으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길거리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생업과 가정을 돌봅니다. 시장에 가서 사람들의 옷깃을 스치며 장을 보고, 끼니마다 식사를 합니다. 주기적으로 병원에서 의사를 만나 건강을 돌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아주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중에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렌즈를 통하여 삶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안식일을 뒤로한 채 열심히 산다면(17-18)
오늘 본문에서 유다 백성들이 행한 일들을 생각하여 보십시오. 그들에게는 지극히 평범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밭을 일구어 살던 그들은 곡식을 가져다가 나귀 위에 지워서 실어 나르고, 특산물이라고 불릴만한 포도주와 포도송이 그리고 무화과를 날랐습니다. 또한, 성문들을 닫지 않았고, 물건을 파는 상인들은 편의를 위하여 예루살렘 성 밑에서 잠을 청했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평범한 시선으로 바라보면 오히려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유다 백성 스스로도 이상한 점을 인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뉘앙스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느헤미야의 시선을 통해서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살았던 유다 공동체의 오류를 지적하셨습니다. 그 오류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않았던 일이었습니다.
(17-18) 내가 유다의 모든 귀인들을 꾸짖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 이 악을 행하여 안식일을 범하느냐 너희 조상들이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래서 우리 하나님이 이 모든 재앙을 우리와 이 성읍에 내리신 것이 아니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안식일을 범하여 진노가 이스라엘에게 더욱 심하게 임하도록 하는도다 하고
유다 공동체는 느헤미야의 호통에 어안이 벙벙했을 것입니다. 그들에겐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 시선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사는지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하루를 사는 것이야말로 무너졌던 예루살렘을 회복하여 이스라엘의 영광을 되찾는 일에 가장 큰 이바지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의 열심은 예루살렘 성읍에 하나님의 재앙을 임하게 하되, 더욱 심하게 임하게 만들 뿐이었습니다.
안식일이 무엇입니까? 안식일을 간단하게 정의하면, 일주일 중에 6일 동안은 평범한 일상을 살고, 일곱째 날은 온전한 쉼을 취함으로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구별하는 날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정의가 안식일의 정신을 모두 다 담아내진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구약을 통해 안식일 속에 담긴 그분의 마음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안식일의 개념은 당시 이스라엘 주변에 있던 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계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독특한 계명을 그의 백성에게 주시면서까지 그날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는 그의 백성이 하나님 자신이 누구인지를 뚜렷하게 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말씀은 안식일이란, 하나님께서 일주일의 모든 시간을 선물로 주신 분이며, 인생을 사는 모든 자의 삶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으며, 한 주 동안 일상에 치여 살아 멀어졌던 하나님과 영적인 연합을 안식일에 이루라 가르치고 있었지만, 유다 공동체는 안식일을 멀리한 채 일상을 살기에 급급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이러한 영적인 결핍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합니다.
(19) 안식일 전 예루살렘 성문이 어두워 갈 때에 내가 성문을 닫고 안식일이 지나기 전에는 열지 말라 하고 나를 따르는 종자 몇을 성문마다 세워 안식일에는 아무 짐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성문을 닫고 열어야할 것(19)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문에 그림자가 드리워지면 그 문을 닫고, 안식일이 지나기까지 문을 열지 못하게 했습니다. 유다 백성들에게 있어 하루라는 시간은 그날 저녁부터 그 다음 저녁까지였으므로, 느헤미야는 성문을 닫는 조치를 통하여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부터 완전히 끝이 날 때까지 성문을 열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느헤미야의 조치는 자연스럽게 유다 백성들의 일상을 중단하게 만들었습니다. 성문이 닫힘으로 그들의 세속적인 삶은 그치게 되었고, 안식일에 출입하던 장사꾼들의 출입은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창문을 열어 하나님을 바라보겠다는 의미는 세속적인 출입을 가능케 했던 성문을 닫는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성문을 닫음으로 온전한 안식일을 지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안식일을 지킬 때, 안식일은 우리를 지켜주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로 인도해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문 안에서 우리는 장사꾼들의 물건을 매매하라는 유혹의 음성을 듣지 않게 되어, 비로소 영적인 창문을 열어 하나님만을 뚜렷이 보게 될 것입니다.
성문 밖에서도 이어지는 안식(20-21)
한편, 느헤미야는 성문 안에서 안식일이 온전히 지켜지게 조치를 취했을 뿐만 아니라, 성문 밖에서도 안식일이 지켜지도록 하였습니다.
(20-21) 장사꾼들과 각양 물건 파는 자들이 한두 번 예루살렘 성 밖에서 자므로 내가 그들에게 경계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성 밑에서 자느냐 다시 이같이 하면 내가 잡으리라 하였더니 그 후부터는 안식일에 그들이 다시 오지 아니하였느니라
계산이 빠른 일부 장사꾼들은 더 많은 이윤을 남기기 위해 성 밑에서 유숙했습니다. 그래야 안식일이 끝난 뒤, 남들보다 더 빨리 예루살렘성으로 들어가 장사를 시작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에 의하여 성문 밖에서 안식일 계명이 온전히 지켜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장사꾼들의 이기적이고 교활한 행동으로 인하여 성문 밖의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성문 안에 있던 사람들까지 안식일을 방해받았을 것입니다. 이것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어 느헤미야는 장사꾼들을 엄한 어조로 경고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유다 지역을 다스리는 공식적인 권한이 있었기 때문에 장사꾼들도 그의 말이 빈 말로 들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 밑에서 유숙하는 일을 곧 바로 그쳤습니다.
느헤미야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 성 문 밖에서도 고군분투한 모습 속에서, 우리는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지경을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앞서 설명 드린 바와 같이, 안식일은 하나님과의 영적인 연합입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지만,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인생을 열심히 살기 위하여, 교회 밖의 삶에서 쉼을 놓치는 순간들이 많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쉼을 얻기 위하여 교회 안으로 들어옵니다.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교회 안을 피난처로 삼아, 그 안에서만 쉼을 누리려는 모습은 경계해야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교회 밖에도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쉼을 누릴 줄 안다면, 교회 밖에서도 쉼을 누려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며, 온 세상에 편재해 계신 분입니다. 그 분의 안식은 교회 안에만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밖에서도 그 분과 함께하며, 그분 안에서 쉼을 누리고, 그 분의 자녀로 살아가야합니다. 이것을 우리 교회는 ‘예배의 생활화, 생활의 예배화’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생활을 예배화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생활을 보아야 합니다. 느헤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당시 유다 백성들의 생활 속에 두루 퍼져있던 안식일에 관한 오류를 정확하게 보았듯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쉼을 얻지 못하게 하는 세속적 가치관이 우리 생활에 안팎으로 얼마나 두루 퍼져있는지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안식을 교회 안으로만 축소해서는 안됩니다. 교회 밖에서도 하나님은 동일하게 살아계시며 운행하고 계심을 잊지 않으시는 저와 교우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비록 세상의 소리는 매섭고 거칠며, 우리가 처한 환경은 차마 우리의 손을 쓰기 어려워 보일지라도, 교회 밖인 삶의 현장에서도 우리 하나님은 살아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때마다 그분 안으로 피하여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는 자의 특권이요, 세상을 담대히 이길 수 있는 권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러한 영적인 세계를 뚜렷하게 볼 수 있는 안목을 우리의 생활 속에서 안겨다 줄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느헤미야에게는 유다 공동체의 생활 속에서 무너졌던 안식일을 인식할 수 있는 눈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그러한 눈이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눈을 밝혀 주셔서, 우리의 생활 속에서 놓쳤던 안식을 주님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은총이 있길 원합니다. 하나님, 주님이 원하시는 안식은 우리가 교회 안에서 뿐만이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누리는 안식일 줄 믿습니다. 우리 100주년기념교회가 그러한 안식을 누릴 줄 아는 교회 되게 하셔서, 교회 밖에서도 세상을 담대히 이기는 귀한 주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느헤미야는 유다 공동체에 안식일이 무너져 있는 모습을 보았지만(15-16), 일반적인 눈으로 본다면 유다 공동체의 생활 모습이 그리 이상해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우리는 어떤 시선을 가지고 살아갑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져진 시선입니까? 아니면 일반적인 시선입니까?
2. 하나님의 진노는 더욱 심하게 느헤미야의 공동체에 임했습니다(18). 안식일을 범하는 것, 즉 하나님 안에서 쉼을 누리지 않을 때 찾아오는 재앙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3. 느헤미야가 안식일 전에 성문을 굳게 닫은 이유가 무엇입니까?(19)
4. 성 밖에서 유숙하던 장사꾼들에게 느혜미야는 엄한 경고했고(20-21), 조치를 취했습니다(22). 느헤미야가 안식일을 위하여 성 밖에도 거룩하게 만든 이유는 무엇입니까?
일요일과 안식일
느 13:15-22 / 조약돌 묵상
오늘 본문은 느헤미야가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 왕을 만나고 돌아 온 후에 발견한 세 번째 유대백성들의 잘못된 행동의 내용입니다. 첫 번째는 성전에 이방인인 도비야를 위한 방을 만든 일입니다. 두 번째는 백성들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므로 성전의 일을 할 레위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 간 일입니다. 세 번째는, 안식일 날 예루살렘에서 장사를 하므로 안식일을 더럽힌 일입니다. 느헤미냐는 그 때 마다 즉각 조치를 했습니다. 특별히 안식일 준수를 위해 성문을 일찍 닫게 하여 상행위를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안식일에 술 틀을 밟았다는 말은 포도주를 빚었다는 말입니다. 포도를 따서 틀에 넣고 밟는 것은 포도주를 만들기 위한 첫 번째 공정입니다. 그 첫 번째 공정이 끝나면 곧장 다음 공정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포도주를 망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술 틀을 밟는 순간부터 포도주 생산이 시작된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포도주가 빚어졌다고 한 것입니다. 문제는 그 날이 안식일이었다는 점입니다. 그 같은 현상은 당시 유대 백성들이 안식일 계명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었다는 단적인 증거로, 느헤미야의 눈에 발견되지 않을 리 없었습니다.
장사꾼들과 각양 물건 파는 자들이 예루살렘 성 밖에서 잤다고 했습니다. 그 같은 행동을 한 것은 안식일이 지나자 마자 성안으로 들아 와 물건을 팔기 위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곧 장삿속 입니다. 당시 그들은 성밖에서 자신들이 갖고 온 상품들을 홍보하였다고 합니다. 견물생심이라고 예루살렘 주민들의 호기심과 탐욕을 자극하기 위함입니다. 그것도 역시 장삿속입니다. 느헤미야는 그 혼란을 막기 위해 다시 그 같은 하면 잡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곧 체포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는 유다 지역의 합법적 총독으로, 그 지역 내에서는 이방인들에 대해서도 사법적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일날 교회로 오는 버스운전 기사님들 중에 분명히 그리스도인들도 있을 것입니다. 전철 기사님은 물론 철도 승무원 그리고 비행기 승무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날 불이 날 수 있습니다. 그때 출동하는 소방대원 중에 확실하게 기독교인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다못해 경찰 공무원, 군인들, 그리고 회사 당직자도 있습니다. 박물관 큐레이터처럼 주일날 근무해야 되고 그 다음날 쉬는 그런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모두 죽어야 합니다. 안식일을 범했기 때문입니다. 구약 율법에 따르면 돌로 쳐 죽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농경시대를 지나 산업시대 그리고 정보화 시대에 현재는 최첨단 시대를 달리고 있습니다. 직업도 1차 산업에서 2차, 3차 산업뿐만 아니라 현대인의 직업은 천차만별입니다. 한 달 사이에 새로운 직업 군이 생겨 깜짝 놀라기도 합니다. 9시~ 6시 근무시간은 옛날 말입니다. 병원 같은 곳은 24시간 운영을 해야 하니까 하루 삼 교대로 근무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다 못해 재택근무도 있습니다. 근무일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주 5일 근무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구약의 안식일을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성경의 규정을 파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 근본정신을 되살려 우리들의 삶에 재 해석하여 적용해야 한다고 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위하여 만드신 것으로, 그야말로 쉬는 날입니다. 따라서 그 날은 영적인 것은 물론 육체적인 것도 휴식을 통하여 충족되는 날입니다. 안식일의 기원은 하나님께서 6일간 세상을 창조하시고 7일째 되는 날에 안식하신 것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래서 거룩한 휴식의 날이란 뜻에서 ‘안식일’인 바, 사람들은 그날 철저하게 쉬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다만,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을 때에 진정으로 안식을 할 수 있으므로 그날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사람은 기계가 아닙니다. 기계도 쉬며 정비하지 않으면 고장 나듯이, 사람도 휴식을 취하며 재 정비하지 않으면 탈이 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피치 못할 사정이 있으면 굳이 주일날이 아니더라도 사람의 형편과 처지에 따라 일 주일 중 하루는 쉬며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운데 있으면 좋다는 해석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반드시 하나님 안에서 쉬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일요일과 주일 그리고 안식일의 차이점이라 그렇습니다.
직장은 가급적 주일 날 쉬는 곳으로 잡으면 좋겠습니다. 공 예배를 참석할 수 있고, 남들 쉴 때 같이 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득이한 사정이 있거나, 주일날 쉴 수 없는 직장을 이미 다니고 있다면 바꾸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주일 성수를 고집하기에는 이미 시대가 많이 변했고 또한 그럴 상황이 뒷받침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의 근본정신을 잘 알아 그것대로 적용하면 될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순전히 인간들을 위하여 주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가지면서 쉬어야 합니다. 안식일 준수는 하나님의 명령이므로 그날의 준수여부가 곧 하나님에 대한 인간들의 순종의 척도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급변하는 시대입니다. 안식일을 지키기에는 너무나 바쁘게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느헤미야는 유대백성들이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게 하기 위해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습니다. 즉, 안식일 전에 성문을 일찍 닫는 것입니다. 각종 외부 장사꾼들을 차단하여 예루살렘 주민들이 안식일을 망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도 그런 지혜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시대와 상황에 방심하고 있다 보면, 어느새 안식일을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일날 약속하지 않기, 토요일 저녁부터는 외출자제하기, 주말에는 집에서 식사하기 등등입니다. 각자의 사정에 따라서입니다. 안식일 준수를 위해서입니다. 이 시대에도 성경의 안식일은 지켜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월요일 날도 주일과 똑같이 예배 드리는 교회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월요일 안식하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성문을 지켜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라
느 13:15-22
* 시작 기도
(갈 5:3-4)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주님...
주의 말씀처럼 율법과 할례는 구약의 전형처럼 유대인들이 지켜 행하는 것들입니다.
그것을 바울에게 복음을 들은 자들도 지켜 행하려 할 때 사도 바울이 이렇게 일갈합니다.
할례를 받은 자들은 율법 전체를 지켜 행할 의무가 있는 자들이며 그런 자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율법 자체에 흠이 있는 것이나 죄가 아니라 오히려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합니다.
(롬 7:12)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다만 그 선한 것 곧 율법을 통하여 죄가 드러나게 한 것입니다.
(롬 7:13)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이 종 역시 계명이 없었다면 죄를 죄로 알지 않고 마음대로 살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이라는 계명을 통하여 우리가 죄에 거하지 않고 더욱 주님의 품으로 나아갈 담대함을 얻게 되는 것임을 믿습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옵소서.
계명을 통하여 나의 죄인 됨을 더 깊이 확인하며 주님 안에서 신실한 자로 서기 원하오니 나를 불쌍히 여기사 은혜를 더하여 주소서.
내 입술에 예수의 향기가 진하게 묻은 복음이 드러나게 하시고 복음 외에는 어떤 것이라도 전하지 않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성문을 지켜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라.
느 13:15-22
* 나의 묵상
느헤미야는 개혁조치의 일환으로 성전 정화와 함께 십일조 제도를 회복시킨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안식일 준수에 대한 조치를 확립한다.
느헤미야가 페르시아로 돌아간 사이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타락은 그들의 삶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그들은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은 물론 안식일의 규례도 범하여 노동과 매매를 하였다.
이런 실상을 알게 된 느헤미야는 우선 백성들의 지도자들을 강력하게 책망하였다.
그리고 안식일 준수를 위한 조치를 취한다.
즉 안식일이 이르기 전에 예루살렘 성문에 그림자만 드리워져도 성문을 닫고 안식일이 끝나기까지 성문 출입을 금지시켰다.
이를 위해서 문을 지키는 문지기들을 성문에 세웠다.
한편 느헤미야는 성전 정화와 십일조 제도를 다시 회복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자신이 안식을 위하여 한 일을 기억하여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한다.
십계명 중 제4계명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것이다.
구약 시대의 안식일은 금요일 해가 질 무렵부터 시작하여 토요일 해가 질 때까지이다.
그런데 이 안식일이 주일의 개념으로 바뀐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되셨다가 안식 후 첫날(일요일)에 부활하심으로 그 부활의 날을 주일 곧 안식일로 정한 것이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안식일은 예수께서 육신으로 오시기 전이었으므로 구약적 안식일 개념으로 통용되던 때이다.
느헤미야는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을 준수하도록 엄히 명하였다.
그것은 두로 곧 이스라엘의 북쪽에 있는 이방나라 상인들이 물건을 가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와 자유롭게 물건을 팔았기 때문이다.
안식일에는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상인들이 가게 문을 모두 닫았기 때문에 이방 상인들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은 어쩌면 황금 시장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방 상인들이 안식일에 물건을 팔지라도 유대인들이 그 물건을 사지 않으면 될 터이지만 어디 사람 마음이 그렇게 되던가?
나는 물건을 팔지 않을지라도 다른 이들이 물건을 파는 것을 보면 그것을 사고 싶은 마음은 인지상정이라 할 것이다.
그래서 많은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이방 상인들이 파는 물건을 구입하였던 것이다.
그것도 유다의 귀인들 곧 지도자들이 그 일에 앞장섰던 것이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그런 유다의 귀인들을 향하여 왜 안식일을 범하느냐고 꾸짖었다.
그가 귀인들을 향하여 주장하는 것은 곧 우리 조상들이 이같이 행하여 하나님께서 모든 재앙을 우리와 우리 성읍에 내리신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이런 악을 계속 행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 심하게 임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안식일을 잘 지켜야 한다면서 그에 대한 조치를 강구하였다.
안식일 전에 어둠이 드리울 때 성문을 닫고 안식일에는 그 성문을 절대 열지 말 것이다.
그리고 성 문지기들을 세워 안식일에는 아무 짐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율법인 십계명 중 제4계명을 확인해 보자.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켜라.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은 모두 ‘하라, 하지마라’는 계명이다.
분명한 것은 세상에 있는 모든 종교들마다 나름대로의 계명이 있다.
그 계명들 역시 모두 ‘하라, 하지마라’의 계명이다.
따라서 우리 기독교가 이런 ‘하라, 하지마라’의 계명에 목숨을 건다면 세상의 여타 종교들과 하등 다를 바 없다.
우리가 아무리 기독교는 종교의 범주를 벗어난 것이라 주장한다 할지라도 이런 계명을 지키는 것에 목숨을 건다면, 그렇게 해서 내가 완벽하게 잘 지켜서 구원에 이르고자 한다면 기독교도 세상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종교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주신 그 계명을 지키지 말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우리는 절대 율법인 계명을 지켜서 구원을 얻는 종교가 아니다.
이런 것은 바로 유대교이다.
철저하게 율법을 지켜서 구원에 이르려 하는 유대교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만홀히 여기지는 않는다.
우리가 할 수만 있으면 그 계명을 잘 지키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런 노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는 없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라, 하지마라’는 계명을 주신 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그것을 잘 지키라는 의미가 아니다.
너희들이 아무리 그것을 지키려고 애를 쓰고 또 쓴다 할지라도 그것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시고 그의 눈앞에 에덴동산 한 가운데 선악과 나무를 심어놓으셨다.
그리고 이 과일은 절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그 선악과가 얼마나 탐스러운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 보였다(창 3:6).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신 말씀, 곧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은 법이요 계명이다.
그런데 그의 눈앞에 너무나 먹음직스럽게 만들어 놓으신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네 눈으로 그것을 보고 어디 안 먹고 배길 수 있는지 한 번 보자는 것이다.
이 말은 네가 그것을 안 먹고, 내 계명을 잘 지켜서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라 너의 약함으로 인해서 먹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너를 구원하는 것은 너의 계명 지킴이 아니라 다른 구원의 방법을 내가 마련해 놓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창 3:15절과 21절에 나오는 여인의 후손으로 오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요, 메시야로서 행하시는 구속사건으로 인함이다.
그렇게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를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보내셨다.
(갈 4:4-6)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나는 구약의 사람들처럼 율법 곧 계명을 지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했었다.
그렇게 하려고 열심을 내면 낼수록 내 안에서는 그에 대한 반발심이 솟구쳤다.
무엇보다 계명을 어길 때마다 나를 사로잡는 죄책감이 나를 짓눌렀다.
이는 마치 계명을 어기는 것으로 내가 구원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나에게 복음을 알게 하셨고 그 복음은 나를 죄에서 자유케 하는 놀라운 비밀이 되었다.
나는 죄인이다.
그것도 죄인 중에 괴수임이 분명하다.
이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모든 죄를 대속하셨고 죄가 되어 죽으셨음을 알면서도 나는 여전히 죄를 먹고 마시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주님 앞에서 믿는 구석이 있다.
그것은 나의 불완전한 행위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덮으시는 주님의 은혜의 옷자락이다.
창세전에 나를 택하시고 나를 예정하시고 또한 나를 부르셨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야곱은 택하셔서 그를 사랑하셨고, 에서는 미워하셔서 그를 버리셨다(롬 9:10-13).
이렇게 하신 하나님이 불의하실 수 없다(롬 9:14).
심지어 애굽의 바로조차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할 때 그를 세워 사용하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어떤 이는 완악하게 하기도 하시기 때문이다(잠 16:4).
따라서 오늘 이 시간, 나는 죽기에 합당한 자임에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일어선다.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악한 것을 생각하고 더러운 죄를 지었지만 그것이 나를 어찌하지 못하는 것은 그보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위대하신 우리 주님의 은혜 때문이다.
그런 주님의 은혜의 옷자락으로 나를 덮는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나의 행위로는 아무리 발버둥 치며 애를 쓴다할지라도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압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선한 행위를 포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행한 선이 내 안에서 의로 드러나려 할 때 그것이 자기주장 의지인 죄임을 알기에 이 하루도 나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사오니 나를 불쌍히 여기사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룻이 보아스에게 당신의 옷자락으로 여종을 덮어달라고 했던 것처럼 이 종 역시 주님의 옷자락으로 덮임을 받기 원합니다.
이미 주님께서 이 종을 덮으셨습니다.
그럼에도 오늘 이 시간에도 주님의 덮으심의 은혜를 구하오니 나를 덮으소서.
내가 계명을 지켜 구원에 이르려고 하는 악한 의를 행하지 않게 하시고 주님 앞에서 더 납작 엎드려 낮아지게 하시고 내 손으로 잡았던 것들은 내려놓게 하소서.
나는 답이 없습니다.
오직 나의 답은 주님께만 있사오니 나를 장악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라
느 13:15-22 / 오병근목사
오늘 본문은 느헤미야가 안식일 준수를 회복한 것에 대해 전해주고 있습니다.
십일조 회복을 단행한 느헤미야가 이번에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안식일을 준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본문에서는 안식일을 범한 사례를 밝히는데, 안식일에 술틀을 밟고, 곡식단을 나귀에 실어 운반하고, 여러 가지 짐을 지고 예루살렘에 들어와 장사한 것 등을 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진술은 상당수의 이스라엘 자손들이 안식일을 범했다는 사실을 밝힌 것입니다. 이들이 이처럼 안식일을 범하며 장사를 하게 된 것은 결국 경제적인 요인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폐허가 되어버린 예루살렘에서 정착하기 위해, 빈곤한 환경 속에서 그들에게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경제적인 문제였기 때문에 그들은 안식일에도 경제활동을 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십계명 중 안식일 계명은 네 번째에 해당됩니다. 안식일 준수는 매주의 하루를 따로 구별함으로 모든 시간이 하나님께 속하였음을 고백하는 것임과 동시에 이 날을 거룩히 지킴으로 자신의 삶의 주권을 하나님께 의탁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할 때 안식일은 단순히 휴식을 취하는 날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선민으로서의 거룩함을 더욱 온전히 드러내도록 하기 위해 가장 적극적으로 지켜야만 하는 거룩한 계명이었습니다.
또한 안식일 계명은 이스라엘 백성의 주거 영역이나 그 영향권 안에 있는 이방인들도 지켜야만 하는 사항이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두로 사람이 안식일에도 예루살렘에 머물며 물건을 파는 것에 대해 유다의 모든 귀인들을 꾸짖었습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들이 예루살렘에 들어와 장사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안식일 범하는 것을 가볍게 여기고 있었으며, 그들이 장사할 수 있도록 허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귀인들은 지도자적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내 경제권을 좌우할 수 있는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두로의 상인들에게 장사를 허용하는 것에 일조를 하고, 이를 통해 수익을 얻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에 느헤미야는 모든 귀인들을 불러 꾸짖고, 과거 조상들이 안식일을 범함으로, 지금 예루살렘 성이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재앙을 받게 된 것임을 상기시키면서, 하나님의 진노가 더욱 심하게 임하지 않도록 안식일을 온전히 준수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조치로 느헤미야는 자신의 종자 몇 사람을 성문에 배치하여, 어두워갈 때에 성문을 닫고, 안식일이 지난 후에 성문을 열도록 했으며, 안식일에 장사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자들에게 경고하여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또한 레위인들에게 몸을 성결하게 하여 성문을 지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도록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십일조 회복을 이룬 후 하나님께 기도했듯이, 안식일 준수를 단행한 이후에도 하나님께 이 일을 기억하시고 자신에게 크신 은혜를 베풀어 주시길 간구했습니다.
- 오늘 본문에서 느헤미야는 안식일 준수를 회복시키기 위해 행한 일들에 대해서 전해주고 있습니다. 안식일 준수는 당시 고대근동의 어느 민족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이스라엘에게만 허락된 유일하고 고유한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즉 안식일 준수가 이스라엘과 이방민족을 구분 짓게 하는 가장 중요한 명령이었던 것입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안식일을 준수한다는 것은 일주일에 하루를 구분하여 하나님께 드림으로 내게 주어진 모든 생명의 시간이 하나님께 주권이 있으며, 나의 모든 삶의 필요를 오직 하나님을 의탁하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즉 안식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쁜 일상생활 가운데서도 과거와 현재 하나님께서 베푸셨던 은혜를 감사하여 돌아보는 시간일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날 하루 동안 일을 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먹을 양식을 공급하신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과거의 안식일은 오늘날 주일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주일을 맞이하는 우리는 그들과 같은 신앙고백을 해야 합니다. 지난 한 주 동안 하나님께서 내게 역사해 주신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고, 그 은혜 앞에 온전하지 못했던 내 삶을 돌이켜 회개하며, 앞으로 주어질 한 주의 삶에 주님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 백성답게 살겠다는 결단과 다짐의 고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온전히 영광돌리기 위해 하나님께 시선을 집중하고 경건과 거룩함, 기쁨과 감사함으로 지켜야 할 것입니다. 거룩한 주일을 온전히 준비하는 오늘이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