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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애국지사
독립기념관 소장 자료
間島共産黨 檢擧事件과 김하석 10·3 事件을 回想하면서.
1927年 10月 3日에 間島 龍井에서 朝鮮共産黨 滿洲總局 東滿 幹部와 黨員 三十餘名이 당시 龍井에 있던 日本總領事館 놈들에게 체포된 事實이 있다.
當時 朝鮮共産黨 內部에서 無原則한 宗派들 鬪爭이 있게 되어서 東滿道黨 幹部 內에 엠-엘 分裂主義者들이 공공연하게 朝鮮共産黨 內部에 潛在한 화요파를 청산하고 구축하여야 된다는 제마고기的 號로써 黨內에서만 싸운 것이 아니라 半公開的으로 上海派·이르쿠츠크파·國民議會派·北風會派·서울파 들과 간교하게 美人界 술책과 敎育界 술책 등을 使用하면서 黨內에 그들을 引入하면서 당을 攻擊하고 당을 不幸한 길로 前進케 하였으니 이와 같은 계기에서 당의 비밀을 적에게 發露하기가 가장 용이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日本帝國主義 走狗들이 投入하기에도 용의한 길을 준 것이다.
1927年 10月 3日 午後 3時 頃에 龍井市 후장리 김무희 同務의 집을 包圍하고 總領事館 刑事 韓興(한흥)의 지휘 下에서 朝鮮共産黨 滿洲 總局 宣傳部長 崔元澤(최원택), 東滿道 責任書記 安基成(안기성) 同務와 宣傳部長 玄七宗(현칠종) 等 5~6명을 체포하고 수색한 바 黨員들 名簿가 脫路되어서 32名의 共産黨員이 체포된 큰 事變이 發生하였다.
그런데 刑事 韓興(한흥)은 이 비밀을 어찌 探得하게 되었는가?
1925年에 조선에 있는 北風會(북풍회)의 金鳳益(김봉익)이라는 者가 조선으로부터 間島 龍井에 와서 勞働學院을 設立하고 계명사업을 하다가 1926年 夏期에 沿海道 海三(블라디보스토크)에 와서 國民議會(국민의회)의 金河錫(김하석)을 제우하고 “조선에서 무엇을 하여야 하는” 等의 設計를 받고, 도로 龍井으로 온 다음 김봉익은 “오산”이라는 이름으로 出世하였나니 그야말로 意氣 등등하게 半公開的 또는 公開的으로 活動하였으며, 1927年 7月에 서울에 소집되었던 中央協議會에 勞動學院의 代表로 進出하여 마르크스-레닌主義를 공공연하게 구설하다가 刑事놈들에게 주시되어 탈주하여 龍井으로 오게 되었으니, 當時 龍井의 社會界는 김오산(김봉익)에게 경각성있게 注視할 대신에 勇敢한 투사로 尊視하고 偉待한 것이며, 그를 黨에 引入하고 派爭에 利用하였다.
그런데 그 者는 벌써 刑事 韓興(한흥)과 1926年에 海三(블라디보스토크)에 갔다 돌아오던 때부터 밀탁된 것을 豫明못한 것이며, 김오산(김봉익)의 視線에 김무희 집은 어떤 집인가를 주심케 되었으며, 그로부터 비밀의 心腸을 알게 된 것이다.
當時의 모멘트는 9月 23日에 東滿道黨委員會에서 “黨의 規律을 등지고 파정을 야기하는 分裂主義者들과 信望없는 黨員들을 심사하여 黨의 隊列을 정돈할 것”이라는 테제로부터 黨을 비밀에서 청결하려는 때이었다. 이에 反對하여 m-엘派에 존속된 이(이름은 기억되지 않음)가 組織部長으로 있던 것만큼 黨員의 名簿를 安基成(안기성) 同務에게 傳達 以後 3日만에 검거가 始作된 것이다.
검거로부터 亡命한 同務들은 11月 23日에 沿海道(연해주) 海三(블라디보스토크) 新韓村에 소집되었던 亡命者會議에는 30餘名 黨員들이 集合되었는데 김오산(김봉익)도 會議에 出席케 되었으나, 누구든지 疑心치 아니하였을 뿐만 아니라 엠-엘派에 존속한 黨員이 20餘名으로서 그들은 金五山(김오산, 김봉익)을 革命的 戰友로 환영하였다.
김오산은 어찌하여 체포되지 아니하였는가? 그는 10月 1日에 회령으로 病 治療하러 갔는데 체포되지 아니하고 海三(블라디보스토크)까지 왔을 뿐 아니라 벌써 그 동안에 장가까지 가서 戀愛生活까지 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김오산(김봉익)과 김하석의 구수회의에 “김하석의 영의한 지도는”이 사건의 진수가 말로 되는 때에는 우리 國民議會와 내가 큰 모욕만 될 뿐 아니라 우리의 비밀이 탄로될 위험이 있으니 金五山(김오산, 김봉익) 너는 海三(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서너 달 동안 滋味있게 놀고 쉬다가 滿洲로 넘어가라는 것이었다.
김오산(김봉익)은 刑事 한흥에게서 3,000円의 은사금을 받았고 이것으로써 海三(블라디보스토크)에 와서 연애생활을 하다가 1928年 초에 滿洲로 넘어간 것이다.
김하석은 어떠한 사람인가?
1919年 3·1 운동 후에 十五萬円사건(간도15만원사건)이라면 누구든지 다 아는 바 15萬円 事件 英雄鬪士들과 15萬円의 金額까지 日本帝國主義 海三(블라디보스토크) 憲兵隊에 인계한 者이었다. 15萬円事件(간도15만원사건)의 指導者인 최봉설 同務는 檢擧 時에 憲兵들과 격투로써 脫走한 同務이며 체포된 英雄鬪士 3同務는 서울 刑務所에서 死刑을 當하고 한 同務는 10年의 惡刑을 받고 최봉설 同務에게는 사형을 언도한 사실이 있다.
1927年 10月 3日의 事件도 其 진수는 金河錫(김하석)의 黑手로 되었나니 金五山(김오산, 김봉익)에게 刑事 韓興(한흥)을 接見케 한 바 “광대한 운동에선 刑事도 이용하여야 하며”, “한흥은 우리 國民會議를 爲하여 암암리에서 鬪爭하는 者라고” 김오산(김봉익)에게 촉탁한 것이며, 김오산(김봉익)도 처음에는 事實의 진수를 모른 것이며, 다음에는 한흥에게 포로되어서 무서운 罪惡을 犯한 것이다.
1945年 8月 15日에야 解放된 朝鮮民主政府와 勞働黨은 이와 같은 옛날에 破廉恥하고 無原則한 反革命的 宗派主義者들을 창해에 장사하여야 할 것이니, 어느 派를 勿論하고 黨과 政府 및 세부 지방들에서까지 잠재하고, 宗派를 宣傳하며 조직하고 宣動하려는 宗派的 分裂主義者들의 싹을 探索하게 된다면 일망타진하여야 할 것이다.
1958年 10月 3日 원수산.Цвон Су Сан(원수산)
間島國民會(간도국민회)에 對한 回想談
筆者는 1959年 3月 28日에 Кисловодск(키슬로보드스크) 作養所로 가던 中路에 이미 書牘上으로만 연락을 가지고 있던 黃雲波(황운파) 同志를 訪問하고서 그에게서 들은 回想을 記錄하게 되었다.
黃雲波(황운파) 同志는 1891年 8月 18日에 朝鮮 咸北 鏡城郡 돌모루 貧農家庭에 出生되었다. 1900年에는 中領(중국령) 延吉縣, 동서영에 와서 母親을 모시고 中國地主 왕바트라는 者 집에서 돼지 치는 牧者로 三年을 지냈다. 其 후에는 그 곳에서 半作 農事를 하여서 近 十年을 生活하면서 冬三에는 夜學에서 工夫하였다.
1910年 朝鮮이 왜놈들에게 合邦(강제병탄)을 當하자 間島에는 愛國志士 李東輝(이동휘)·張基英(장기영) 其他 伸士들이 와서 啓蒙運動을 進行하였다. 나는 그들이 進行하는 朝鮮農村에 이미 있던 私塾을 改良하여 學校를 組織하는 事業에 熱誠으로 參加하였다. 퉁포쓸에 있던 舊學書堂을 改良하여서 “義成學校”를 조직하였는데 그 후에 中學校로 長成되어서 그가 三年間 學校 校長으로 親務하였다. 當時 敎師는 류빈·이한수 其他였다.
“3·1운동 後” 國民會(간도국민회)
1919年 3月 12日에 당시 龍井市 장날을 利用하여서 “間島 朝鮮人 獨立萬歲 示威運動”을 進行하였다. 그 날 延吉市에 있는 中國도태가 우리 指導者를 請하여 놓고서 “日本領士 있는 곳은 가지 말고서 다른 地域에서는 수후 4시까지 마음대로 示威하라”고 주의시키었는데, 當時 류국정이란 사람이 우기고 太極旗를 들고서 龍井 市內 日本領士 있는 곳으로 行陣하다가 中國軍隊가 日本領士를 捬護하느라고 서 있는 틈에 私服한 왜놈들이 끼여서 示威者들을 射擊하여서 數十 名이 死傷되었다. 負傷者들은 當時 英國病院에서 治療하게 되었다. 3·1운동 後 間島 전폭을 東西南北 네 部로 組織하고 間島에 國民會(간도국민회)가 政治的으로 總指導를 가지었는데, 總會長은 具春善(구춘선), 財務 徐相龍(서상룡, 최후 公金橫領 變節者)이었다. 國民會에서는 軍隊를 募集하기 爲하여서 財政을 一般 住民들에게서 義務的으로 收入하였는데 1-2-3-4 네 등급으로 義務金을 募集하였고, 朝鮮男子는 18歲로부터 45歲까지 軍役에 登錄되었다.XX 軍政署 反逆行動.
當時 間島에는 俄領(러시아령)에서 韓人社會黨(한인사회당) 中央委員會 委員長 李東輝(이동휘)와 相論하고 間島로 來到한 洪範圖(홍범도) 將軍이 汪淸 具德善(구덕선)네 집에 와서 비밀히 留하면서 獨立軍 募集하는 同時에 俄領(러시아령) 소황령(니꼴리스크)에 있는 비밀단체 指導者들과 연락을 맺어가지고 武裝을 사서 가져다가 具德善(구덕선)네 사는 洞里에 땅을 파고 “木炭”숯을 네 군데다가 감추어 두고서 軍人들을 비밀리에서 조련을 시켜서 조선에 나가서 왜놈들과 戰爭을 하고서 中國땅에서는 一切 왜놈들과 武裝 衝突을 하지 말자고 嚴密한 工作을 하고 있었다. 當時 間島 各 地方에서는 國民會(간도국민회)·新民團(신민단)·義軍部(의군부)·光復團(광복당)·아당 기타 7個 團體가 秘密裏에서 工作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서로 화목하였고, 같이 工作하였다.
XX “軍政署” 그런데 當時 汪淸 시대포라는 山谷에는 “軍政署”라는 기관이 나타났는데, 其 指導幹部들은 신통히도 모두 남조선에 본적을 둔 以前 舊韓國時代 貴族·軍閥들 出身이었는데, 김자진·金佐鎭(김좌진)·김규식·이범석 기타였는데 그들은 모두 金경장·金테모자 기타가 모두 資本國家 軍閥式이었고 自己部下 軍人들은 신통히도 왜놈 軍人들과 똑같이 차리고서 行動하였다. 그 자들은 처음에는 어디서 金錢을 얻어가지고서 數個月 동안을 軍人 數百名을 募集하여서 仕官學校를 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나중에는 武裝을 하고서 各 農村으로 돌아다니면서 示威運動을 하기 始作하였고, 國民會(간도국민회) 地帶에 侵入하여서 住民들에게 軍資金을 내라고 위협하였고, 乃終에는 國民會(간도국민회) 警務員들을 체포하여서 결박하여 가지고 가서 볼기를 치는 등 蠻行을 敢行하였다. 이와 같은 사정에서 “군정서”를 대항하기 爲하여서 엄밀히 비밀리에서 準備하던 武裝運動을 公開的으로 進行하게 되었다.
國民會(간도국민회)·義軍部(의군부)·新民團(신민단) 기타 軍事機關들이 봉오골 최진동 군대있는 지대에 함께 募集되어 聯合軍會를 열고서 各 軍隊를 “督軍部(독군부)”라고 하는 唯一한 名稱으로 團合시키었다. 당시 督軍部 總裁는 崔振東(최진동)이고 總司令長은 洪範圖(홍범도)였다. 이리하여서 間島에서 秘密裏에서 工作하던 各 獨立軍은 軍政署派들이 敢行하는 暴行을 反抗하기 위하여서 公開的으로 武裝行動을 하니, 金佐鎭(김좌진)·이범석派들 蠻行은 停止된 듯하나 놈들의 挑戰的 行動을 口實로 하는 왜놈 討伐隊는 이범석·김규식派들을 討伐한 것이 아니라, 督軍府(독군부) 根據地 봉오골을 進攻함으로써 間島 討伐이 始作되었다. (김좌진·이범석·김규식·이범윤 기타들이 最後에 가서는 모두 反革命·반소비에트·反共産主義 惡行을 敢行한 것을 미루어보면 그 무리들은 以前부터 원수들 囑託으로 形成되었던 것이 事實이다.)
당시 黃雲波(황운파)는 國民會(간도국민회) 警務隊 指導者 中 한 사람으로 工作하였는데, 그는 幹部에서 武裝準備를 하라는 使命을 받아가지고서 工作하였는데, 1919年 여름에 寧古塔 市內에서 金君三(김군삼)이라는 者가 物商客主를 크게 하고 있었는데, 그 놈 當時 왜놈 앞으로 秘密裏에서 探偵하는 者라고 指目을 받는 者였다. 國民會(간도국민회)에서는 류빈이라는 사람을 其 집에 보내서 書記로 일하게 하고 其 內幕을 探知하던 時期였다. 황운파는 영고탑에 가서 류빈을 經由하여 김군삼을 위협하고 교제한 결과에 短銃 25介는 35円式 주고 사고, 長銃 25柄은 그 놈이 기부하는 것을 받아가지고 中國 太平車에 감추어 가지고 운반하게 되었다.
그때 왜놈들 領事館이 龍井·頭道溝·汪淸·琿春(훈춘) 各處에 있었다. 각 領事館 內에는 경찰서가 있어 朝鮮人民을 任意로 체포하던 時期였다. 그는 집에 갔다가 새벽에 왜놈 순경놈이 들어와서 체포되었는데 그의 婦人이 순경의 허리를 안고서 싸우는 짬에 집에서 도망하여 산으로 올라가서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洪範圖(홍범도)軍隊를 찾아가서 俄領(러시아령)으로 오게 되었다. 그가 집을 떠나서 軍隊로 간 후 1920年 11月 27日에 그의 집을 왜놈들이 와서 불을 놓고서 그의 아들 “증일”이 한 살 반 된 것을 불이 붙는 가운데다가 총창으로 찔러서 던지었다. 그의 아들 하나는 第二次 世界戰爭(제2차 세계대전) 時에 參戰하였다가 독일 피씨쓰틀에 戰死하고 無後한 老人이었다.
軍政署 軍隊에 對한 강근(강회원) 동지 回想記.
나의 회상기 一片 1919年 3月 1日 獨立運動 當時에 서울에서 참가하여 폭동 示威運動으로 무기없이 다만 “大韓獨立萬歲”라는 號를 외치다가, 秘密 出版物 『목탁』·『경종』 등이 등사판으로 인쇄한 것을 분배와 배달하는 責任을 맡아서 밤이면 住民들의 住宅·商店·學校 등에 分傳하였다. 그러다가 尹海(윤해)의 조카 윤만정(변명은 윤걸)의 소개로 北間島로 亡命하여 軍政署 仕官學校에 入學하였다. 때는 1920年 3月이었다. 그때에 응모자 數는 모두 330명이었으나 30명은 資格不足으로 步兵隊로 넘기었다.
地帶는 길림성 汪淸縣 市大浦 밀림 속이었다. 그 당시에 지도층은 總裁 徐一(서일)·副總裁 玄千黙(현천묵)·司令官 金佐鎭(김좌진)·參謀長 羅 副尉(부위는 구한국시대 군대 부위인데, 그의 이름은 기억이 안된). 사관학교는 그 조직체가 학도단으로서 2개의 學徒隊와 4개의 中隊로 編成되었는데, 학도단장 朴英熙[박영희, 斗熙(박두희)], 第一 學徒隊長 崔重衡(최중형), 第二 學徒隊長 李範錫(이범석), 第二 學徒隊 第一 中隊長 吳祥世(오상세), 第二 學徒隊 第二 中隊長 李民和(이민화), 第一 學徒隊 第一 中隊長 姜氏인데 (이름은 실망), 第一 學徒隊 第二 中隊長 金氏인데(이름은 不기억), 그때에 나는 사관학교에서 제2학도대 제1중대 제2실장이었다. 사관학교 조직체로서 실장(室長)은 軍隊 內에서 分隊長과 同等하다. 그때에 나의 이름은 姜會元(강회원)이었다.
그때에 과목은 20여 가지 軍事學과 戰術과 戰略에 對한 實地 훈련으로 체조와 운동·射擊術·乘馬 등 其他 여러 가지 훈련이었는데, 午前에는 강당에서 軍事學을 修業하고 午後에는 시대포촌 전야에 가서 實地 練習을 하였다. 그래서 1920年 3月부터 始作하여 8月에 6個月間의 속성과로 卒業하였다. 그러하는 동안에 일제의 억압을 못 이겨서 연길현 中國 騎兵隊가 두 번이나 토벌하러 왔다가 우리의 實力이 굉장하고 準備가 宛備하고 기개가 늠름함과 外交的 手段으로 討伐하지 못하고 다만 會談 方道로 汪淸縣을 떠나서 다른 곳으로 가달라는 請託으로 할 수 없이 우리 軍隊는 靑山里로 移動하게 되었다.
이 얼마 전에 舊韓國時代 軍隊 大隊長으로 있던 金奎植(김규식) 동지가 우리 軍隊로 오게 되었다(이승만 정부에서 각원인 김규식은 아니다). 이때부터는 사관학교 조직체제는 없어지고 完全히 正式 軍隊로 編成하였는데, 그 조직체는 아래와 같다. 仕官學校 卒業生들만 150名으로 鍊成隊를 組織하여 其를 三分隊로 나누었는데 나는 제4分隊長으로서 勤務하였다(사관학교 卒業生이 300명인데서 中國 地帶에 집과 親戚이 있는 사람들은 一個月式 休暇를 주고, 우리같이 中國 땅에 집이 없는 사람들만으로서 조직한 것). 그러니 步兵隊 人員이 400명, 연성대 150명, 기타 人員이 100명(기타 人員은 무기 없는, 말하자면 가방 든 손님들 - 모연대·총재부·총관부·서무부 등). 이때에 軍隊 編成은 總裁部와 參謀部·司令部는 前과 같고, 다만 步兵隊와 練成隊인데 步兵大將은 金奎植(김규식)·박영하, 練成大將은 이범석, 步兵隊 中隊長·小隊長들은 以前 그대로.
1920年 八月 어느 날 (날짜는 未詳) 우리 全軍은 할 수 없이 시대포를 떠나서 낮이면 村에 주둔하고, 밤이면 行軍하여 가는 道中에 和龍縣 漁浪村에서 八月 秋夕을 2일 동안 지내고 靑山里로 向하는 道中 不過 20Km밖에 안되는 우리의 後方에서 敵軍이 우리를 追擊하여 따라온다는 것을 우리 參謀部에서 알고 忠臣場 거리 - (市場이자 조선과 中國人들이 거주하는 촌)을 지나서 靑山里 골짜기 어구에 當到할 때에 日軍은 벌써 忠臣場 거리에 와서 望遠鏡으로 지붕 위에서 보고서 우리의 兵力은 700명인데 敵軍의 兵力이 적다하여 後援軍 한 연대를 청하여 산지전을 準備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우리 軍隊는 靑山里 평양촌에서 2日間 묵었다. 때는 1920年 9月 10日 午前 10時였다. 첫 戰鬪가 始作되었다. 우리는 九月 九日 夕陽에 평양촌(평양촌은 靑山里에 있는 마지막 村名인데 15호 가량)을 떠나서 천산리 山谷 中心處 戰略上으로 第一 좋은 곳에 양 측면 山北에 主軍을 伏兵시키고 우리의 斥候는 적군이 들어오는 것을 잘 探知하였다. 우리가 그 촌을 떠날 때에 식료로는 다만 생감자를 한 베도자에 넣어 짊어진 것뿐이다.
이때 9月 9日 초저녁에 敵軍 騎兵聯隊가 평양촌에 와서 朝鮮住民들 집에서 留宿하는 것을 알고서 그날 밤 새벽에 조위 공격하여 전멸시키자는 과격 人士들의 議論도 紛紛하였으나, 그러자면 그 곳 조선주민들도 全滅을 당할 것이라고 하면서 參謀部에서 許可하지 않았다. 한번 戰鬪로 우리의 獨立이 完成된다면 小數를 犧牲시키더라도 할 수 없는 일이나, 그렇게 되지 못할 때에 한 사람이라도 犧牲시킬 수가 없다.
15호에 人名이 적어도 70~80명이나 된다. 그러니 山谷으로 誘引하여 전투를 準備한 것이다. 나는 그때에 練成隊 第四 分隊長으로 25명을 데리고 左側 山北에 매복하였는데, 林속에서 나무 밑마다 우리는 매복하였다가 敵軍의 兵力 主部가 우리의 伏兵한 범위 안에 들어오게 되는 때는 일제 사격으로 司令官의 구령이 내리면 全滅시키자는 내정이었다.그때에 적군은 騎兵聯隊인데, 말들은 평양촌에 두고 軍人들만 데리고 산골 오솔길도 없는 물개울관으로 인솔하고 들어오는 판이었다. 敵軍의 聯隊長은 姓名이 加納(かのう, 가노)이었는데, 그 자는 그 戰鬪에서 戰死되었다.
그 당시에 우리의 人命은 한 사람도 損害가 없었고 敵軍은 7~8百 名이 살상되고 그나마 절반은 우리를 追擊하였으나, 우리는 高地를 占領하고 있고, 其 者들은 그렇게 時期가 저락하고 恐怖에 떨리어서 추격하지 못하고 後軍을 기다리는 동안에 그날 밤을 그 高地에서 지내고, 그 이튿날 새벽에 漁浪村으로 行軍하였다. 그때 전투는 午前 10時에 始作되어서 午後 5時에 끝났다. 漁浪村으로 새벽에 行軍하는 道中에서 적은 村落에서 留宿하는 敵軍 150명을 살상시키고 (한 시간 전투에서), 그리고는 적군과 戰鬪가 없을 뿐만 아니라 敵軍을 만나본 일도 없었다.
첫 전투할 때까지는 敵軍이 우리만 추격하는 兵力뿐으로 알았으나, 南北 滿洲 一帶에 敵軍의 兵力이 師團 힘을 가지고 討伐作戰 하는 것을 알게 되자, 衆寡의 形勢를 살피고 하는 수 없이 我軍은 소련으로 移動하기로 된 것이다. 이때에 우리 군대는 安圖縣 方行으로 行軍한 일이 없었고, 우리가 싸우는 곳에서 멀지 않은 忠北村에 留宿하던 洪範圖(홍범도)는 應砲一聲의 아무 후원도 없이 안도현으로 도망하였다.
소련으로 向하여 行軍하는 道中에 數十村과 數十日을 지냈으나, 村名도 잊어지고 다만 큰 村들이나 몇 날씩 留宿하던 村만 더러 생각이 됩니다. 라자거우를 지나서 무단강을 지나서 安重根(안중근) 義士가 살던 八面屯 촌에 와서 20일가량이나 묵는 동안 처음으로 입쌀밥을 하루에 삼때씩 꿩고기 반찬에 잘 먹이고, 11月 11日에 처음으로 홑옷을 벗고, 中國 솜바지 저고리와 中國 털모자와 도리기를 신게 되었습니다(이 촌은 콩과 벼농사만 하는데 매우 부유하게 살고 독립사상이 심지어 어린이까지 특별한 모두 平安道 住民들이 거주하는 촌).
이 촌에서는 우리 군대에만 衣服 신발을 準備한 것이 아니라, 안무군대·최진동군대, 소련으로 들어온 군대들은 모두 이곳에서 衣服·신발 冬三 準備를 하여 주었다. 冬至달 말경에 이곳을 떠나 密山縣 씰리와 촌에서 20日 가량 留宿하였다. 이제 화제가 달라진다. 이때에 홍범도軍隊가 실리와촌 우리 군대로 들어온다는 通知를 받고서 우리 군指導層들과 禮裝隊와 같이 迎接하여 맞았다. 나는 그때에 홍범도를 처음 對面하였는데, 人員 數는 모두가 100명 미만이고 총을 가진 사람 수는 불과 30명이 지나지 않았는데, 그 중에도 군정서·국민회 기타 단체들의 地方 일꾼들과 사관학교 卒業生들 休暇 받고 집에 있던 몇 사람, 安圖縣 方向으로 가다가 西間島 新興學校 여러 사람들과 道中에서 가다가 오다가 서로 만난 숫자를 합한 人員들이었다.
이때에 李章寧(이장녕)·김승빈·김모·이모 등이 신흥학교에서 오다가 홍범도를 만나서 같이 밀산현 씰리와촌에서 合하여 군대 이름은 “大韓獨立軍(한국독립군)”이라고 개정하고, 홍범도는 其 軍隊에 고문관 “벼슬”을 차지하였다. 이때에 참모장은 이장녕이었다. 이때보다 한 달 앞서 안무군과 최진동 군대는 전투 한 번도 없이 이리저리 피하여 다니다가 소련으로 한 달 먼저 들어간다.
이들이 싸움을 하자니 어떻게 할 것인가? 軍隊라고 빈 이름뿐 100~150명씩 되나 무기는 일본38식 총 不過 몇십뿐이고 빈 메도자만 지고 따라다니는 사람들을 데리고 강적들과 전투할 생각조차 못하였다. 우리 군대는 불란서(프랑스)식 속사포가 4문이고, 三八式 日本 步兵총 한 번도 쓰지 않은 것이 500자루 以上, 무명 폭발(수류탄) 3~4개씩 外에도 몇 천개의 爆發彈들을 싣고 다니면서도 전투 實力을 몇 만 以上 완비하기 전에는 敵軍과 戰鬪할 의향은 없었는데, 적군이 추격하니 할 수 없이 한 것이다.
그해 “설”을 이만커우촌(город Иман, 이만 시), 전에 중국지방이다)에서 쇠고서 1921年 正月에 완충 都市 이만(Иман)으로 들어와서 독산평이라는 러시아촌에서 한 2주일 있다가 우리 대표들을 Хабаровск(하바로프스크) 소련군 군단장에게 보내어 交涉한 果然 그 곳(독산평)에서 무장을 解除하여 вагон(수하물차)에 싣고서 自由市로 들어갔다. 그때에 나는 두골을 상하여 Хабаровск(하바로프스크) 군대 위수병원에서 한주일 동안 치료를 받고 自由市로 들어갔다.
들어가 보니 판국이 不祥事할 징조를 보고서 Хабаровск(하바로프스크)로 돌아와 “韓人 共産黨軍隊 迎接部”에서 일하였다. 그때는 공산당이 좋다는 것만 알 것뿐이고, 학리는 고사하고 당의 강령과 규약조차 누구든지 잘 알지 못한 때였다. 그래서 공산당에 회장 이박영·軍隊 迎接部長 박미하유·로어(러시아어)서기 리니꼴나이·한문서기는 내가 일하였다. 그러다가 그해 가을에 공산당 규약에 의하여 한 국가 안에 다른 나라 공산당이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모두 합하고 나를 선전원으로 근방 조선 주민들이 살고 있는 삼일촌·부친까·
천리강 (그 후에는 자유촌) 등지로 派遣하였다. 共産黨의 學理와 규약을 알지 못하는 나로서 무엇을 선전할 것인가? 다만 그때에 나로써 아는 것은 無産者는 資本계급을 없애고 自己주권을 세워야 한다는 것과 일본놈을 다 쳐서 없애고 조선을 獨立한다는 것만이 나의 유일한 宣傳이었다. 그러다가 그곳에 학교가 없으니 學校를 創設하고 敎育사업을 하여달라는 그곳 住民들의 要請에 따라서 月給도 없는 입싸리 敎員으로 일하는 中에, 1922年 冬三에 힌派 軍隊가 Хабаровск(하바로프스크)로 다시 들어오는 때에 다시 自願 出戰하여 “나인”에서 싸우고 돌아와서 다반 조선학교 有給 敎員으로 일하다가, 1923年 가을에 처음으로 소황령(니꼴리스크)으로 나와서 各 地方으로 돌아다니면서 敎員으로 일하다가, 1946年 3月에 Сахалин(사할린)으로 派遣되어 군대에서 飜譯員으로 일하였고, 1954年까지 교원으로 근무하다가 至今은 國家의 배려로 연금을 받고 生活한다.
Кисловодский курорт (키슬로보드스크 요양소)에서 쓴 편지를 읽고, 또 류창익에게서 들으니 동지가 조선으로 여행하겠다는 것을 듣고서 나는 生覺하기를 至今 朝鮮에 가서 있고 Андижан(안디잔)에는 없는 것으로 짐작하였습니다. 마침 명절 祝電을 받고서 집에 있는 것을 알고서 회전도하고 오늘(11/ⅺ) 아침에 편지를 쓰는 차에, 同志의 片紙를 받고서 동지의 노염이나 풀고자 많이 생략하고 간단한 요령이나 기록합니다. 勿論 小說的으로 쓰자면 空冊 한 두권도 不足하지만은 歷史的 자료만 취하자면 도움이 될까 합니다.
그런데 同志도 나의 성격을 잘 아는 바와 같이 허위·과장·명예·地方的·宗派的 其他 等等을 떠나서 초월한 안목과 革命的 良心에 기초하여 들은 것은 쓰지 않고 다만 내가 실천한 것과 본 것만 기록하였습니다. 역사적 자료인 것만큼 사실에 무근거한 것을 위조하여서는 後生에게 對하여 其 責任이 무겁다는 것을 인식하여야 합니다.
동지의 편지에 기록된바 “학도대”라는 것이 없었고, 군정서와 홍범도 군대가 안도현으로 向하다가 우대영창에서 만난 일도 없는데 안도현으로 向하여 간 일조차 없는데 合하여서, 統義府라고 명칭하거나 홍범도가 군정서 부총재 “벼슬”을 한 일이 없습니다. 이제 나의 回想記를 잘 읽어보시오! 나는 소련 땅으로 들어올 때까지 군정서 부대와 한 시간도 떠나본 일이 없으니 잘 알고 허위도 없습니다.
사람 백 명이면 다만 소총 20~30자루를 메고서는 메도자를 메고 가방이나 들고 平民服을 입고 “앞으로 가”하는 구령에 뒤로 가는 人士들을 저 合하여 데리고 다니는 것이 무슨 군대이니, 안무군·최진동군(독군부)·홍범도군·獨立團(독립단)·義軍府(의군부)·新民團(신민단)이 모두 어느 곳에서 어느 때에 전투한 일이 있는가? 무기 없는 메도자꾼들이 강적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 다만 회령 건너편 봉우골에서 독군부가 자리를 잡고 있는 때에 日軍이 야습하여 들어오는 때에 총 한방도 대하지 못하고 맨 주먹으로 산산이 흩어져서 우리 사관학교에 와서 2일간 피신하였다 갔다. 自己 명예를 爲하여 허위·과장으로 어디서 무슨 싸움을 하여 日軍을 얼마를 잡았다는 거짓말들을 사회는 믿고 속는다. 나는 그것이 싫어서 至今까지 同志의 要請을 지체시킨 것이오.
지도층들의 변절은 나와의 관계가 없다. 나는 변절한 일이 없고, 그 자들의 변절은 변절 그대로 역사에 사실대로 기록될 것인데 나는 그로서 아무 주저한 것이 아니다. 시시한 소리만 하다 보니 두 분의 문안이 늦었습니다. 내내 白首 건강하다가 한 번 만나 萬端說話나 하여봅시다. 이제는 나이 있다고 수정기가 납니다. 19/ⅺ 59. 강근 강근 同志는 忠淸道(은진-강경에서 출생하였다)에 原籍을 둔 친구이다. 필자는 이 자료를 (軍政署) 얻으려고 2~3年 동안 강근 동지한테 간청하고 나중에는 노염을 하여서 얻은 자료이다. 내가 알자는 것은 청산리 전투였다. 21/ⅶ 1960? 대지를 김승빈 동지에게 전하였다. 역사적 요지만 노동당 역사연구소로 15/ⅺ 1960년에 보내었다. 김승빈 동지에게도 大旨만 보냈다. 나재거우 사관학교 최계립
나재거우 사관학교는 이동휘 주최로 鐵血光復團(철혈광복단) 團員 70여명이 工夫하였는데 全一(전일)이 큰 힘을 내였고, 그때 學生들 내가 기억되는 것은 1) 최계립, 2) 최상종, 3) 최관평, 4) 주룡술, 5) 주건, 6) 주진술, 7) 강상모, 8) 강우홍, 9) 여봉갑, 10) 정일무, 11) 임명극, 12) 맹훈, 13) 안영진, 14) 윤동선, 15) 이낙준, 16) 채창헌, 17) 임국정, 18) 이광, 19) 조훈, 20) 이재형, 21) 원일상, 22) 정성규, 23) 최호극, 24) 김기선, 25) 기타이다. 당시 조직지도자 1) 이동휘, 2) 이종호, 3) 장기영, 4) 지건, 5) 전일 등이고 지방열성자는 최정국·염재권·전천모·전이근 등이었다.교사 가운데서 김숭천이란 자는 일본 육군사관 기병과를 필한 자로 총독부에서 정탐으로 보내었다.
전일이가 그를 국자가에서 만나 보내면서 이놈한테서 잘 배우고서 그 후에 죽이라고 하여서 그대로 하였고, 조훈이도 당시 일탐으로 인정하고 죽이자고 했더니 도망하여서 이르쿠츠크에 갔다가 남만춘과 같이 이르쿠츠크파가 되었다. 사관학교 경비는 이종호가 담당하기로 하였는데, 어떤 놈이 이종호를 이간하기를 이종호를 죽이러 온다고 하니 그는 도망하였다. 그 후에 학교는 문을 닫고, 學生 36명은 우랄산 목재소에 갔다가 1917년 2월혁명 후에 А.П.김(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스탄케비치) 활동으로 고역에서 해방되었다. 기타 학생들은 당시 각 학교에서 체조교사가 되었다.
당시 이동휘는 왕청 하마탕에 있었는데 1916년에 왜병들이 수색하는데 달아나고 계봉우만 체포되었고 그들 집은 불에 탔다. 계봉우는 강화도에서 3년간 정배살이를 하였다. 1920년에 계봉우는 상해에 가서 “한인공산당” 당원이 되었다. 끝. 서전서숙 교장 이상설. 1906年에 용정에서 처음 조직되었는데, 學生들은 40여명인데 당시 간도 등지 한문지식이 있는 자들이 망라되었다.
당시 學生들 中 강백규·이병휘(이성)·한규현·박창익·윤준희 기타들이다. 이 서전서숙은 동불사에 고등소학교가 설립되어서 간도에서 조선청년들이 머리를 깎고 창가를 부르고 연설을 하기 시작하였다. 1911년경에 이동휘가 간도에 당도. 각 농촌으로 순행하면서 계몽사업을 열성으로 進行하였는데 “이동휘 눈물 한 방울은 학교 하나”라는 전설이 있었는데 당시 간도 일대에는 172개 학교가 조직되었는데 그 중에 光成學校(中學) 교장 이동춘, 교사 기태진·장기영·계봉우·박무림·김립·김하석, 체조교사 문경 기타. 明東學校 교장 김약연, 교사들 박태환·최중천·정재민·박상환·신최수·김연·박경철·김규찬, 여교사 이의순(이동휘 딸)·우봉운(평양에 있음), 체조교사 김치관, 기타. 唱東學校 敎長 이병휘(이성), 교사 남공선·홍우만·오상근·곽경, 여교사 홍은희, 체조교사는 박문호(3·1만세 시에 사망).
“맹호단” 단장 윤준희 1919年 3·1운동 후에 日探들을 박멸하기 위하여 조직되어서 왜놈순사 2명을 체포하여 해삼(불라디보스토크) 국민회 군무부장 김하석에게 가져오니 김하석은 그들을 도로 놓아 보내었다. 간도국민회 총회장 구춘선, 남부회장 마룡하, 東部회장 양도현, 북부 장원준 등이다.(원문)(역문)(위대한 10월혁명의 업적을 보호하기 위해 러시아인 노동자 및 농민들과 함께 한인 및 중국인 노동자들이 일어섰다.
그들은 수찬(г.Сучан, 수청,水淸,소성, 현재 파르티잔스크 지역) 지구의 봉기와 연해주에서의 빨치산 부대의 조직에 적극적으로 참여를 했다. 수이푼(Суйфун, 현재 연해주 우수리스크 일대) 지구와 니콜스크-우수리스크(현재 우수리스크, 우수리스크는 с.Никольское(1866), г.Никольск(1898), г.Никольск-Уссурийский(1926),г.Ворошилов(1935), г.Уссурийск(1957) 순으로 명칭이 변경되어 왔음)의 남부와 서부 지역에서는 조명선(Чо Мен Сен), 최배천(Цой Бе Чен), 이순외(и Син Уе) 등의 빨치산 부대들이 활동을 했다. 또한 니콜스크-우수리스크 남부의 폴타프카(Полтавка) 지구에서는 한경세(Хан Кен Се) 부대가 작전을 수행했다. 한인들 사이에서는 혁명사령부의 지도 하에 큰 정치-양육 사업이 수행되었다. 이 사업은 한인 공산주의자들인 이영선(Ли Ен Шен), 김 아파나시(Ким Афанасий), 최호림(Цой Херим) 등이 이끌었다.
빨치산 부대들은 바로 한국 영토 내에서도 형성이 되었다. 이후 이들 부대들은 연해주와 극동의 다른 지역들로 이동해 왔다. 이 부대들은 극동지역에서 외국간섭군(интервент)이나 백위파(белогвардеец) 군대와 전투를 벌였다. 또한 그러한 무장부대들의 조직에 눈에 띠는 참여를 했던 인물로 한인 노혁명가이자 사회활동가인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Цой Пётр Семёнович/П.С.Цой)가 있다. 그는 1920년 4월에 일본 간섭군들에 의해 잔혹한 고문을 당한 후에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총살을 당했다. 이동하(Ли Дон Ха), 한철훈(Хан Черун), 김규선(성)(Ким Кю Сен), 김백추(Ким Бяг Чу), 김화두(Ким Ува Ду), 천진서(Тин Дин Шо) 등이 한인 노동자 조직을 이끌어 나갔다.위대한 10월사회주의혁명은 한민족을 일깨워주었다.
한민족은 사회적, 민족적인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일어섰다. 보다 진보적인 노동자 그룹은 소비에트 공화국과의 단일한 전선을 형성하지 않고는 승리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한인 혁명가들은 적군(1917-18년 시기의 무장노동자 부대로서 적군의 핵심이었음)과 붉은군대(Красная Армия, 정식명칭은 ‘노농붉은군대’, 1946년 ‘Советская Армия’로 개칭됨), 빨치산 부대들이 외국간섭군과 백위파 군대에 맞서 투쟁하는데 도와줄 것을 노동자들에게 호소했다.한인 공산주의자들은 오로지 소비에트 권력만이 자유롭고 자주적인 노동자-농민의 나라 한국을 위한 투쟁에서 자신들을 도와줄 수 있다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인 혁명가들은 외국 제국주의자들의 맹렬한 저항에 부딪혔다. 한민족의 민족해방운동을 와해시키고, 안탄타 국가들의 요구에 따라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위해 한민족의 민족해방운동을 이용하고자 주로 지주, 부르주아지, 지식인들로 이루어진 한인 망명자 그룹은 1919년 4월에 상해에서 이른바 이승만(Ли Сын Ман)을 수반으로 하는 임시망명(정부)를 구성했다. 이 (정부)는 극동에서 활동했던 한인 사회활동가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자 노력했다.한인 공산주의자들은 일본의 압제와 외국간섭군 및 백위파 군대에 맞선 한인 노동자들을 지휘하기 위해서 [이르쿠츠크 센터](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를 조직했다. 이 조직은 극동지역에 거주하는 한인 노동자들 사이에서 혁명사업을 수행하도록 자신들의 전권대표를 정기적으로 파견했다.
두 개의 한인 사회주의 그룹인 혁명 그룹과 부르주아, 지주 그룹(상해파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공려공산당)의 존재는 빨치산 부대 사령부로 하여금 한인 빨치산 부대들을 조직하고 무장시키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이 부대들 중 일부 부대들은 무장해제를 시켜야만 했다. 이로 인해 상황이 때로는 심각한 충돌로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상해망명 임시정부의 망명가들에 의해 조직된 한인 부르주아지-민족주의자 부대들은 완전한 자치를 요구하며 빨치산 세력의 사령부에 복종하기를 거부했다. 일반적으로 해당 부대들은 해산되거나 한국이나 만주 지역으로 넘어갔다.한인 반혁명세력 우두머리들은, 한국은 자국의 국경 안으로 연해주와 프리아무르 일대를 포함시켜야 한다며 극동지역을 점령하고자 하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밝혔다.
외국 제국주의자들은 또한 자신들의 한인 첩보망을 이용하며 태고로부터 이어져 온 극동의 러시아 땅과 부를 탈취하고자 시도했다. 한인 반동주의자-간섭자들과 이들과 함께 활동했던 사회혁명당원과 멘쉐비키들은 볼쉐비키의 정치적 사업이 수행되고 있는 한인 노동자들 사이에 자신들의 첩보망을 심어놓는데 성공했다.혁명사령부와 그들에 의해 지도를 받고 있는 빨치산 부대들의 영향이 미치는 지역에서는 절대다수의 한인 근로자들이 소비에트의 기치 하에 투쟁을 했으며, 러시아 노동자-농민 세력과의 우호적인 투쟁동맹을 맺고 있었다.Партизанск외국간섭군들의 대규모 공격이 예상되는 상황 속에서 한인 노동자들은 빨치산들에게 식량을 공급하는 등 특별히 중요한 도움을 제공할 수 있었다.
극동지역의 한인 농가들은 일반적으로 러시아인 마을들과는 10-15km 이상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따라서 인구거주 구역에서 어쩔 수 없이 퇴각하거나 타이가 지대로 들어가는 경우에 한인 근로자들은 빨치산들에게 중요한 도움을 제공했다.)(『연해주에서의 빨치산 운동』, 131-133쪽) 조국 광복회 10대 강령 1936년 5월 5일~1945년
1. 조선민족의 총동원으로 광범한 반일 통일전선을 실현함으로써 강도 일본제국주의의 통치를 전복시키고 진정한 조선 인민정부를 수립할 것.
2. 조·중(조선·중국)민족의 친밀한 연합으로써 일본 및 그 주구(만주국)를 전복하고 중국인민들이 자기가 선거한 혁명정부를 창설하여 중국 영토 내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진정한 자치를 실행할 것.
3. 일본군대·헌병·경찰 및 그 주구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진정하게 싸울 수 있는 혁명군대를 조직할 것.
4. 일본국가 및 일본인 소유의 모든 기업소·철도·은행·선박·농장·수리기관 및 매국적 친일분자의 전체 재산과 토지를 몰수하여 독립운동의 경비에 충당하며 일부분으로는 빈곤한 인민을 구제할 것.
5. 일본 및 그 주구들의 인민에 대한 채권, 각종 세금, 전매제도를 취소하고 대중생활을 개선하며 민족적 공·농·상업을 장애 없이 발전시킬 것.
6.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전취하고 왜놈의 공포정책 실현과 봉건사상 장려를 반대하여 일체 정치범을 석방할 것.
7. 양반·상민 기타 불평들을 배제하고 남녀·민족·종교 등 차별 없는 인륜적 평등과 부녀의 사회상 대우를 제고하고 여자의 인격을 존중히 할 것.
8. 노예노동과 노예교육의 철폐, 강제적 군사복무 및 청소년에 대한 군사교육을 반대하며 우리말과 글로써 교육하며 의무적인 면비교육을 실시할 것.
9. 8시간 노동제 실시, 노동조건의 개선, 임금의 인상, 노동 동법안의 확정, 국가 기관으로부터 각종 노동자의 보험법을 실시하며 실업하고 있는 근로대중을 구제할 것.
10. 조선민족에 대하여 평등적으로 대우하는 민족 및 국가와 친밀히 연합하며 우리 민족 해방운동에 대하여 선의와 중립을 표시하는 나라 및 민족과 동지적 친선을 유지할 것.
참고자료.
鴉片戰爭 1次. 1839~1842年까지.鴉片戰爭 2次. 1850~1864年까지. 太平天國(태평천국의 난).1850~1864年까지. 壬辰倭亂.1592~1598年까지. 佛蘭西(프랑스)艦隊 侵入.1860年 1~2月. 美國과 전투.1811年~1865年美(미국) 사만호 平壤 侵入.1860年 7月.南延君墓 掘冢事件.1868年 4月.美(미국)艦 五夏 侵入.1871年 4月.琉璃國(오키나와현) 强占.1872~1879年까지.Всего 63(шестьдесят три листа) - 총 63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