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죽음은 크게 나누어 질병사, 사고사 그리고 스스로 선택한 죽음으로 대별할 수 있다. 지난해 정치인, 기업가, 공무원등 유명인사들이 스스로 선택하는 죽음을 보고 어떻게 살아온 삶인데 한 순간에 저런 선택을 해야만 했는가를 생각했었다. 자신의 살아온 과거의 어두웠던 부분이 밝은 세상에서 공개되어 무참히 짓밟힐 때 가장 소중하게 여겨온 생명마저 포기해 버렸다. 이 때마다 생각난 성경구절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8:38)"였다. 사고사는 에베레스트 정복과 같은 위험이 따르지만 목표에 이를 때 느끼는 희열을 위하여 어느 정도 감수하고 나선 산악인들이 당한 사고사를 보면 안타깝게 느껴지지만 그보다도 천재지변이나 중앙선을 넘어 달려온 차량에 의하여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당하는 사고사야 말로 억울한 죽음일 것이다. 여기서도 가해자는 고의가 아니고 실수이거나 불가항력적인 경우가 많다. 아랍권에서 선교사적 사명을 띠고 아랍어를 배우고 선교의 비전을 안고 나섰던 고 김 선일 형제의 선교사적 죽음은 가해자가 있는 반인륜적, 극도로 잔인한 죽임이었다.
살아 있는 생명체를 구성하는 세포들은 사이토카인라는 신호전달물질을 주고 받음으로서 긴밀히 자극하고 자극을 받으면서 살아간다. 신호전달물질분비에 이상이 생기면 세포가 건강하게 살아가지 못한다. 과분비되어도 세포는 이상하게 성장하여 암이 되기도 하여 건강한 개체를 유지할 수 없다. 전자통신과 휴대폰이 발달한 이 시대에 세포와 마찬가지로 사람들 사이에 언제 어디서나 긍정적인 신호와 해가 될 수도 있는 신호를 동시에 주고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세포에서 신호전달 물질이 필요이하거나 필요 이상이면 세포자멸(apoptosis)과정을 통하여 세포가 죽어가고 또 다른 건강한 세포가 태어난다. 사람사이에서도 신호자극이 없어지거나 너무 강하면 세포자멸과 같이 자살로 몰고 간다. 따라서 적절한 자극을 주고받아야 한다.
날마다 암환자, 그것도 수술후 재발하여 어찌해볼 수 없는 상황에 처한 환자들을 대하면서 어떻게 저들을 위로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며 이들을 위한 심적 갈등이 근년에 갖는 가장 힘든 일 중의 하나가 되어왔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인 그들에게 자신의 마지막 지푸라기인 의사의 표정과 말의 뉘앙스까지도 흘리지 않으려는 말기암 환자의 병실회진에서 돌아 나올 때가 가장 어렵다.
‘죽음이 가장 큰 선물’이라고 규정한 어느 작가는 가까이 있던 사람이 죽어가는 과정을 통하여 우리에게 갑자기 다가오는 죽음을 어떻게 두려움없이 평화롭게 맞이할 수 있는가를 역설했다. 그 핵심은 그 동안 깊은 관계를 가지며 살아왔던 사람들이 ‘당신이 떠난 후에도 계속하여 당신을 그리워하고 당신이 사랑했던 것을 사랑하고 당신이 지키고자 했던 귀한 가치를 우리가 기억하고 지키겠노라.’는 다짐과 고백속에서 조용히 떠나보내는 것에 대하여 가치를 부여한 것이다.
갈곳을 알지 못하고 떠나가야만 하는 자의 마음과 보내야하는 자의 마음의 안식을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신앙적 의지뿐인지도 모른다. 다시 돌아오지 못할 죽음이라는 나락을 앞두고 백척 간두에서서 도인이나 성자가 아닌 이상 준엄과 품위를 유지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불가항력적인 자연의 이치가 아닌 김선일 형제와 같은 인위적인 죽임앞에선 더욱 그렇다. 예수님도 이 땅에서 마지막이 가까워왔을 때 부활이 예정되어 있음을 알지만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하지 않았던가?
병실에서 대장암 간전이로 고생하시던 어느 장로님의 육체적인 고통속에서도 ‘지금까지 살아오게 하고 이 좋은 계절에 떠나게 됨이 감사하다.’는 고백을 하며 죽음을 거역하지 않고 감사로 받아들이는 그 분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잔잔한 감동을 느꼈었다. 간암으로 죽어가는 아버지 목사님과 단지 지켜볼 수 밖에 없는 아들 목사님이 3개월간 투병하면서 나눈 대화의 기록 『빛, 색깔, 공기』(김 동건저, 대한기독교서회간)를 읽으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마지막을 어떻게 마무리 할 것인가에 대해 큰 지침을 얻게 되었다. 수채화처럼 삶을 마무리하는 조 장로님과 김 목사님의 마지막 모습은 품위있는 죽음의 표본으로 느꼈었다.
암환자의 가족들이 물어오는 질문 중 가장 흔한 것은 ‘앞으로 얼마나 살 수 있을 것인가?’이다. 그 때 마다 나의 답은 ‘잘 모릅니다.’이다. 가끔씩 환자를 통해서 전해 듣는 얘기는 어느 의사는 3개월밖에 못산다고 얘기를 하더란다. 대략 예측은 하지만 예측을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 나의 오랜 신념이다. 설령 그 기간에 죽는다하더라도 환자나 그 가족이 그 기간의 암시속에서 당하는 불안감은 모른다는 것보다 나을게 없다. 간혹 통계치를 벗어나 실제로 훨씬 오래 사는 사람도 있다. 환자의 생존기간을 예측할 입장이 될 때면 틀리더라도 언제나 낙관적인 방향으로 말하는데 낙관적일 때 삶의 충실성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좋은 죽음은 좋은 삶을 살아왔음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는 노벨평화상을 받은 심장병 전문의 버나드 라운 박사의 표현을 새기고 싶다.
목전에서 날마다 죽어 가는 암 환자들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품위를 잃지 않고 삶을 마감할 수 있을 것인가를 자주 생각해 본다. 그 답은 한가지로 귀결된다. ‘품위있는 삶’을 삶으로 ‘품위있는 죽음’을 맞을 가능성이 가장 높아진다는 것이다. 셔윈 널랜드 박사는 ‘좀더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오랜 기간에 걸쳐 죽음을 준비하는 방법밖에 없다. 죽음 안에서 우리가 찾는 존엄성은 우리 삶의 과정 속에서 찾아진다.’ 고 하였다.
그리스도인의 이상적인 최후의 고백은 사도바울이 기록해 놓았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도다”(딤후 4:7)
한달전 병실을 찾았을 때 잔잔한 음성으로 대화를 나누셨고 새벽 미명에 마지막 칼로리까지 다 소모할 정도로 자연의 수를 다하시고 조용히 떠나신 박 원섭 목사님의 뒷 모습을 온 성도들이 바라보면서 “주가 내게 부탁하신 모든 사역 마친 후 예비하신 그 곳에서 쉬겠네, 성도들이 주의 영광 할렐루야 부를 때 나의 음성 그 노래에 합하리/ 이 세상에 머물동안 주의 일을 힘쓰며 주의 구원함과 은총 전하고 나의 생명마치는 날 저본향에 올라가 주의 얼굴 그 곳에서 뵈오리”( 찬 224) 라는 목사님의 고백스러운 성도들의 찬양과 “기도하시는 분, 착하고 충성된 종, 겸손하고 온유하신 분, 화목과 화평을 나누시는 분, 사랑이 많으신 분, 늘 즐거워하는 분”이라는 내용으로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모시던 김 명혁 목사님의 추념 설교로 ‘복 있는 사람’ 이라는 표를 달고 떠나시는 고 박 원섭 목사님의 마지막 가시는 모습에서 또 한번 “품위있는 죽음” 과 더불어 “품위있었던 삶”을 느끼게 했다.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