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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삼성혈(三姓穴)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 1313번지 외 7필지
삼성혈은 제주도의 고씨·양씨·부씨의 시조가 솟아났다는 3개의 구멍을 말한다.
3시조들은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사냥해 먹고 살다가, 다섯 곡식의 씨와 송아지·망아지를 가지고 온 벽랑국의 세 공주와 각각 결혼하여 농경생활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구멍은 품(品)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하나만 바다와 통하고 나머지는 흔적만 남아있다.
조선 중종 21년(1526)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단과 비석을 세우고, 주위에 울타리를 쌓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제주 삼성혈(三姓穴)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 1313번지 외 7필지에 있는 사적지로, 탐라국 시조에 대한 제의가 이루어지는 장소. 1964년 6월 2일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형태
처음 조성될 당시만 해도 개소리, 닭소리가 들리지 않는 인가(人家)와 멀리 떨어진 신성한 곳으로서 탐라국 시조를 모셔 제사를 지내기에 적소였다. 그러나 이제는 주변에 광양성당, 광양초등학교, 보성시장과 주택가가 자리하는 곳으로 변하였다. 사적으로 지정된 지역은 모두 3만 3,833㎡에 이르며 돌담이 둘러쳐진 가운데 전체적으로 원형을 이루고 있다.
원형의 돌담은 각석을 겹담으로 쌓아 둘렀다. 삼성혈은 조선시대 1526년(중종 21) 목사 이수동(李壽童)이 돌 울타리를 쌓고 혈(穴) 북쪽에 홍문(紅門)과 혈비(穴碑)를 세워 후손들에게 혈제(穴祭)를 지내게 함으로써 성역화되었고 1772년(영조 48)에 양세현(梁世絢) 목사가 바깥 담장을 쌓아 소나무를 심게 하고 제전(祭田)을 마련하여 향청(鄕廳)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삼성혈을 자세히 살펴보면 입구, 제의 준비처, 제의처, 전시관 등으로 4개 지역으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입구에는 홍살문(높이 300㎝, 기둥 직경 30㎝)이 세워져 있고, 돌하르방(높이 220㎝)이 함께 놓여 있다. 그 옆에 ‘탐라국발상지’라고 새겨진 자연석과 사적지 표지(길이 77㎝, 폭 28㎝, 두께 13㎝)가 세워져 있어 도심의 다른 지역과 구분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오랜 세월 동안 자란 수목들이 수림을 이루고 있다. 이 홍살문은 조선 중종 21년 목사 이수동에 의한 것으로, 당시 중종이 홍문과 표단을 내렸다는 기록이 전한다.
사적지임을 알리는 한글과 영문 표기의 안내문을 지나면 출입구인 건시문을 만난다. 삼성혈로 들어 오는 첫 대문인 건시문은 삼문 형태로 기와를 얹었다. 양쪽 앞에는 돌하르방이 놓여 있다. 혈 안에는 울창한 수림과 몇 개의 건물을 연결하는 관람로가 갖추어져 있다. 관람로는 현무암을 판석(板石)으로 다듬어 깔아 비가 내려도 불편함이 없도록 하였다.
제의 준비처에는 많은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건시문을 지나 왼쪽에 붉은 흙인 송이를 바닥에 깔고 자리하고 있는 숭보당을 중심으로 동남쪽에 전사청, 숭보당과 전사청 뒷부분에 수직사, 수직사 뒤쪽에 종무청, 전사청 뒤쪽에 제기고가 각각 자리를 잡고 있다.
전사청(奠祀廳)은 제향(祭享)에 관한 일을 맡아 보는 집으로서 1827년(순조 27)에 세워진 뒤 몇 차례 이건(移建) 중수(重修)하였으며, 2000년 9월에 중건(重建)하였다. 숭보당(崇報堂)은 1849년(헌종 15)에 뛰어난 선비를 두어 면학하던 재사(齋舍)로서 몇 차례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재생들이 학업을 연마하던 숭보당은 1974년 12월에 현 위치로 옮겼다. 건물은 전면 7칸과 측면 4칸인 5량집으로 앞너비 15.95m, 옆너비 6.62m이다.
지붕은 팔작형이다. 높이 0.82m의 부초석 위에 높이 0.75m, 지름 0.28m의 원형기둥을 세웠다. 또 주두(柱頭) 위에 창방과 도리를 사래 맞춤하였으며, 끝막새에는 연화문을 새겼다. 수직사(守直舍)는 삼성혈을 지키는 사람이 사는 집이었으며, 종무청은 삼성혈의 제반 업무를 맡아 보는 재단사무실로 이용되는 곳이다. 제기고는 제의에 사용되는 제기와 용품을 보관하는 곳이다.
제의처에는 입구에 삼성문이 세워져 있고 안쪽에 삼성전이 있다. 후면 북동쪽에 북문, 남쪽에 전향문이 있다. 전향문 서쪽에 혈단문이 있고, 그 안쪽에 삼성혈, 혈단, 혈비가 자리하고 있다. 삼성전은 삼성사(三姓祠)를 참배하는 사람들이 분향(焚香)하는 곳이다. 삼성전의 입구인 삼성문에는 향로와 향이 준비되어 있다. 그 안쪽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삼성전이다. 지금부터 약 4,300여 년 전 탐라(耽羅)를 창시한 삼을나(三乙那)의 위패가 봉안된 묘사(廟祠)이다. 신라에 입조(入朝)한 성주(星主), 왕자(王子), 도내(徒內) 삼고씨(三高氏)가 오늘쪽에 배향되고 있다.
1698년(숙종 24)에 유한명(柳漢明) 목사가 혈(穴)의 동쪽에 삼을나묘(三乙那廟, 지금의 三姓殿)를 건립하였다고 하며, 그 후 1703년(숙종 29)에 이형상 목사가 가락천 동쪽으로 삼성전을 옮겼다. 1785년에는 정조가 「삼성사(三姓祠)」라는 편액을 친히 하사하여 왕(王)에 대한 예우로서 국제(國祭)로 봉향하도록 하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고종 8년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사우(祠宇)가 한때 헐렸다가 고종 27년에 다시 세웠고, 1910년에 중건하였다.
지금의 건물은 1971년에 낡은 건물을 완전히 해체하고 웅건한 모습으로 또다시 중건한 것이다. 건물은 전면 6칸, 측면 4칸의 7량 집이다. 면적은 앞 너비 12.05m, 옆 너비 5.5m이고 지붕은 팔작형이다. 또 높이 0.15m인 원형 주춧돌 위에 높이 1.55m의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창방을 사래 맞춤하였다. 양식은 주심포이며, 막새에는 연화문이 새겨져 있다. 그 후 수차례 중수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서원(書院)인 삼성사는 1740년(영조 16)에 안경운(安慶運)목사가 재생(齋生)을 두면서부터이다. 그리고 사액(賜額)이 내려진 것은 1785년(정조 9) 이월이었다. 제주 유학(幼學) 양경천(梁擎天)의 상언(上言)에 따라 예관(禮官) 고택겸(高宅謙)이 와서 ‘삼성사’란 왕의 어필 액자와 절목을 내렸다. 삼성사에는 장의(掌議) 한 명과 유사(有司) 두 명, 정원 내의 30명, 정원 외 70명의 학생을 두었다.
전시관은 2001년 12월에 개관하였다. 전시실과 영상실을 두고 있는 한식 기와집이다. 전시실에서는 삼성혈과 관련된 현판, 고문헌, 제기 등 실증적인 자료들을 전시함으로써 고대탐라(제주)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영상실에서는 삼성혈의 신화를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여 상영하는 등 신비스러운 제주(탐라)의 역사와 이 고장 선조의 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운영하고 있다. 탐라 개국신화를 영상화하여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탐라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 주고 있는 곳이다.
이밖에도 오랜 유적지가 지니는 오래된 다양한 수목과 고풍스런 정자 및 돌담길·유적을 조성하는 데 기여한 사람들의 공로비 등은 제주를 찾는 관광객은 물론 오고가는 철새의 도심 속 정류지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는 곳이다. 특히 이 세 개의 지혈은 주위가 수백 년 된 고목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모든 나뭇가지가 혈을 향하여 경배하듯이 신비한 자태를 취하고 있다. 또한 아무리 비가 많이 오거나 눈이 내려도 일년 내내 고이거나 쌓이는 일이 없으며, 주위의 나무들이 혈을 중심으로 모두 수그러져 있어 신비로움을 자아내고 있다.
내용
삼성혈에 얽혀 전해 내려오는 삼성신화는 다음과 같다.
탐라에는 태초에 사람이 없었다. 옛 기록(동문선, 고려사, 영주지)에 이르기를 기이하게 빼어난 산이 있는데 한라산이라 한다. 구름과 바다가 아득한 위에 완연히 있는데 그 주산(主山)인 한라산이 그의 신령한 화기를 내리어 북쪽 기슭에 있는 '모흥(毛興)'이라는 곳에 삼신인(三神人)을 동시에 탄강시켰으니 지금으로부터 약 4300여 년 전의 일이다. 삼신인(三神人)이 용출(湧出)하였다 하여 이곳을 삼성혈(三姓穴)이라 하며, 3개의 지혈(地穴)이 있다. 이 신인(神人)들을 이름하여 을나(乙那)라 하며 세 성씨의 시조이며 탐라국을 개국하였다.
그들의 모양은 매우 크고 도량이 넓어서 인간사회에는 없는 신선의 모습이었다. 이 삼신인은 가죽옷을 입고 사냥을 하는 원시의 수렵생활을 하며 사이좋게 살았다. 하루는 한라산에 올라가 멀리 동쪽 바다를 보니 자주색 흙으로 봉한 목함(木函)이 파도를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그 목함을 따라 지금의 성산읍 온평리 바닷가에 이르러 목함을 열어 보았다. 그 안에 알 모양으로된 둥근 옥함(玉函)이 있었으며, 자줏빛 옷에 관대를 한 사자(使者)가 있었다.
사자가 옥함을 연즉 청의(靑衣)를 입고 자색(姿色)이 출중하고 품질(稟質, 품성)이 단아(端雅)한 공주(公主) 세 사람이 좌석을 정제(整齊, 정돈하여 가지런함)하여 함께 앉았고, 또 우마와 오곡의 종자를 가지고 와서 연혼포의 해안 언덕에 내어놓으니 삼신인이 자축하여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하늘에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것이다"하여 기뻐하였다.
사자가 두 번 절하고 엎드려 말하기를 "나는 동해 벽량국(碧浪國, 동해에 있다고 하는 상상의 나라)의 사자올시다. 우리 임금님이 세 공주를 낳으시고 나이가 성숙함에도 배필을 정하지 못하여 한탄하던 차에 하루는 자소각(紫宵閣, 하늘에 있다고 하는 자줏빛 누각)에 올라 서쪽 바다를 바라보니 자줏빛 기운이 하늘에 이어지고 상서로운 빛이 영롱한 가운데 명산이 있는데 그 명산에 삼신인(三神人)이 강림하여 장차 나라를 세우고자 하나 배필이 없으므로 이에 신(臣)에게 명하여 세분 공주를 모시고 오게 하였으니 항려(伉儷, 짝, 남편과 아내)의 예식을 갖추어 큰 국업(國業, 나라를 일으킴)을 성취 하시옵소서"하고는 홀연히 구름을 타고 동쪽 하늘로 사라졌다.
이에 삼신인은 제물(祭物)을 정결하게 갖추고 목욕재계하여 하늘에 고하고 각기 세 공주와 혼인하여 연못 옆 동굴에서 신방을 차리고 생활하니 인간으로의 생활이 시작이며 이로써 농경사회로 발전하고 정주의 기초가 됐다 하였다.
그래서 자줏빛 함이 올라온 성산읍 온평리 바닷가를 연혼포(延婚浦)라 하며, 지금도 세 공주가 도착할 때 함께 온 말의 발자국들이 해안가에 남아 있다. 또한 삼신인이 목욕한 연못을 혼인지(婚姻池)라 부르며, 신방을 꾸몄던 굴을 신방굴(神房窟)이라 하고 그 안에 각기 세 개의 굴이 있어 현재까지 그 자취가 보존되고 있다.
삼신인은 각기 정주할 생활 터전을 마련하기 위하여 도읍을 정하기로 하고 한라산 중턱에 올라가서 거주지를 선택하는 활을 쏘아 제주를 삼분하여 제1도와 제2도와 제3도로 정하니 이로부터 비로소 산업을 이룩하여 오곡을 심고 우마를 길러 촌락이 이루어졌으며, 자손이 번성하여 탐라국의 기초를 이룩하였다. 그 활 쏜 지역을 사시장올악(射矢長兀岳)이라 하며, 활이 명중한 돌을 한데 모아 보존하니 제주시 화북경의 삼사석(三射石)이라 한다.
그 후 역사시대에 이르러서는 탐라국 왕손들이 신라에 입조하여 작호(爵號)를 받았다. 또 신라, 백제, 고구려뿐만 아니라 중국·일본·유구왕국과도 독립국가로서 교류하며 해상교역 활동도 하면서 수천 년간 탐라국으로의 왕국을 유지하다가 고려시대에 합병됐다고 한다.
삼성혈에서 이루어지는 제향으로는 매년 4월 10일에 춘기대제를, 10월 10일에는 추기대제를 후손들이 중심이 되어 각각 봉향하고 있다. 12월 10일에는 건시대제라 하여 혈단에서 제를 지내고 이다. 모든 제관은 왕에 대한 예우로 금관제복을 착용하여 사흘 전에 입재하여 목욕재계하고 제향에 임한다. 지금은 조선시대 때 국제로 모신 것과 달리 제주도민제로 봉행되고 있다. 초헌관은 제주도지사, 아헌관과 종헌관은 덕망 있는 사회 지도층 인사가 각각 맡아 하고 있다.
탐라왕국의 발상지 제주 삼성혈
입구에는 신성한 장소를 상징하는 홍살문과 돌하르방이 양쪽에 세워져 있다.
돌하르방은 옹중석, 우석목, 벅수머리 등으로 불리기도 하며,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의 성문 입구에 세워졌던 석상이다. 제주읍성 동서남 세 개의 문밖에 각 8기씩 24기와 정의현성, 대정현성 세 개의 문밖에 각 4기씩 12기가 설치되어 모두 48기가 세워졌다고 한다.
다공질 현무암으로 만든 돌하르방의 평균 키는 제주 187cm, 성읍 141cm, 대정 134cm 정도로 문헌기록상 조선 영조 30년(1754)에 제주목사 김몽규가 세웠다고 전해지며, 다른 지역의 성문이나 사찰 앞에 설치한 장승과 같이 수호신의 역할과 경계 금표석 기능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삼성혈 관람은 건시문-모성각-전시관-삼성전-전사청(숭보당)-삼성혈-건시문 순으로 시계 반대방향으로 하게 된다.
삼성혈은 제주도 사람의 전설적인 발상지이다. 삼신인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조선 중종 21년(1526) 목사 이수동이 처음 표단과 홍문을 세우고 담장을 쌓아 춘추봉제하기 시작한 이래 역대 목사에 의하여 성역화 사업이 이루어졌고 현재에도 내년 춘기대제, 추기대제, 건시대제를 봉향하고 있다.
삼성혈로 가려면 건시문을 통과해야 한다.
건시문 앞에 돌하르방 두 기가 있는데, 원래 제주읍성 서문밖에 있던 것을 옮겨 놓은 것이다.
건시문을 통과하면 바로 왼쪽에 매표소가 있고, 관람료는 4,000원이다.
건시문에서 직진해도 좋지만, 나무들을 보려면 오른쪽으로 돌아 관람해야 한다.
삼성혈 성역 내에 자라는 수고 3m이상 되는 수목은 모두 701본이며 수종은 43종이다. 주요 4수종은 수령 500년 이상 추정되는 곰솔을 비롯하여 구실잣밤나무, 녹나무, 팽나무 등 현존 본수가 455본으로서 전체의 65%를 차지하고 있다.
삼성혈 비석군
삼성사(三姓祠) 건립과 보존 및 운영에 공이 많은 제주목사 7명의 기념비를 비롯하여 삼성 후손의 기념비 7기와 삼성전 중건 관련 비 2기가 세워져 있다.
모성각(慕聖閣)과 팽나무를 지나면 삼사석비(三射石碑)를 만나게 된다.
1735년(영조11)에 제주목사 김정이 탐라국의 시조인 고,양,부 삼신인이 벽량국의 세 공주를 배필로 맞아 각자 살 땅을 정하려고 화살을 쏘았다는 전설을 적은 비석이다. 이 비석은 제주시 화북동 삼사석 옆에 있었으나, 1930년 고한용 등이 비석을 그 자리에 묵도, 옆에 새로 만들어 세웠다. 묻혀있던 원래의 삼사석비는 1997년에 보수하여 보관해 오다가 2009년에 삼성혈 경내로 옮겨 세웠다.
삼성혈 전시관에는 삼성혈의 신화에 대한 모형도와 도지정문화재인 홍화각, 홍화각기, 급제선생안과 고문서, 제기 등이 전시되고 있으며 영상실에서는 제주 개벽신화인 탐라를 창시한 삼신인의 용출로부터 탐라국으로 발전하여 고려말에 이르기까지 모든 신화적, 역사적 과정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여 영상물로 방영하고 있다.
홍화각 현판과 홍화각기
홍화각은 제주목 관아에 있던 건물로서 이 현판은 홍화각에 실제 걸려있었던 현판으로 1435년에 고득종의 친필을 비자목을 사용하여 각자한 현판으로 알려져 있다.
홍화각기는 제주목 관아의 홍화각 등 관아 건물의 건립 전말을 판각한 기문이다. 글 전체의 내용은 제주도의 지형과 역사를 우선 간략히 서술한 뒤에 최해산의 인품과 선치를 찬양하였고, 다음으로 홍화각의 건립내역과 홍화각이라 명명한 이유를 적고 있다.
전시관 앞에 연리목이 있다.
사랑나무인 연리목 아래에는 두 개의 의자가 놓여있다.
삼성문(三聖門)은 삼성전(三聖殿)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삼성문 앞 정원에는 하귤이 탐스럽게 달려 있다.
삼성전(三聖殿)은 분향하는 곳으로 조선 숙종 24년(1698) 건립 후 1970년 중건했다.
삼성전(三聖殿)
지금부터 4,300여 년 전 탐라를 창시한 삼을나의 위패가 봉안된 사당으로 조선 숙종 24년(1698) 목사 류한명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제향은 매년 춘기대제(4월 10일)와 추기대제(10월 10일)를 후손들이 봉향한다. 편액은 의친왕 이강의 친필이다.
전사청
제향에 관한 업무를 맡는 곳으로 조선 영조 47년(1771) 목사 양세현에 의해 건립되었다.
(리플릿에는 순조 27년(1827)에 건립되었다고 되어 있다.)
전사청 뒤에는 제향에 사용되는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가 위치해 있다.
숭보당
선비들이 학업을 연마하던 곳으로 조선 현종 15년(1849) 목사 장인식에 의해 건립되었다.
숭보당에 앞 마당에서는 전통 민속놀이를 체험할 수 있다.
제기차기, 투호놀이, 굴렁쇠 굴리기 등등...
주위에는 왕벚나무가 심어져 있어 벚꽃 필 때 방문하면 아름다울듯하다.
삼성전 뒤쪽에는 삼성혈이 자리잡고 있다.
삼성혈 주위에는 특히 아름드리 나무들이 많이 자라고 있어 신비함을 더한다.
수령이 꽤 보이는 녹나무가 삼성혈을 지키고 있다.
태초에 삼을나(고을나, 양을나, 부을나)가 용출하신 곳으로 매년 건시대제(12월 10일)를 제주특별자치도지사가 초헌관이 되어 제주도민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주도민제로 봉향한다.
삼성혈을 더 가까이 가서 볼 수 있도록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두 그루의 녹나무가 수호신 역할을 하고 있어 더욱 신비롭다.
삼성혈 관련 유적지
동해의 벽랑국에서 오곡의 종자와 가축을 가지고 온 삼공주를 맞이했던 해변인 연혼포(延婚浦)
삼신인이 벽랑국 삼공주와 혼례를 위하여 목욕 재계한 연못이며, 혼례 후 첫날밤을 치는 신방굴이 있는 혼인지
삼신인이 도읍(주거지)을 정하려고 활을 쏜 봉우리인 사시장올악(射矢長兀岳)
삼신인이 도읍을 정항 때 쏜 화살이 박혔던 돌인 삼사석(三射石) 이 있다.
제주 삼성혈 관람 동선
[건시문~매표소~모성각~삼성혈 전시관~삼성문~삼성전~전사청~숭보당~삼성혈~건시문]
찻잎 향 나는 녹나무 도마를 매만지며
‘이웃집 토토로’ 살던 신성한 나무… 제주 서귀포엔 국내 유일 울창한 자생지
한겨레21 기사 등록 2025-02-07 20:49, 수정 2025-02-13 22:40
캄포 도마를 선물로 받았다. 석 달간 목공 수업을 들으며 정성껏 만들었다 한다. 향기가 나니 주방에 걸어두는 것만으로도 기분을 좋게 해줄 거라고 지인은 도마를 자식 대하듯이 쓰다듬으며 말했다.
캄포는 녹나무다. 정확하게는 녹나무에서 얻는 정유 물질인 장뇌(樟腦)를 말하는데, 그게 고유명사처럼 널리 쓰이다보니 아예 녹나무 자체를 캄포라고 부른다. 내게 도마를 만들어준 이의 말처럼 녹나무는 목재의 향이 무척 좋다. 편백이나 측백에 발효된 찻잎이 더해진 향 같달까. 낯설지만 당기는, 적당히 무게감 있는 우아한 향이다.
호랑이 연고도 녹나무로 만든다
녹나무 체내의 화합물이 방향(芳香), 그러니까 꽃다운 향기를 발산한다. 장뇌와 리날로올을 중심으로 사프롤, 시네올 등이 후각을 자극하는 동시에 항균 작용까지 하는 것이다. 그 특유의 향은 나무를 자르지 않아도 잎과 가지 구분 없이 몸 전체에서 발산된다. 그래서 녹나무의 에센스는 향수와 비누와 살충제 따위를 만들 때 쓴다. 우리에게 익숙한 물파스나 호랑이 연고의 원료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제주를 비롯해 일본, 중국, 대만, 인도, 베트남 등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난대, 아열대 지방이 녹나무의 원산지다. 그 일부 국가에서는 자연적으로 사는 녹나무 외에 추가로 사람이 심어 기르는 녹나무가 번성했는데 그 둘의 경계를 가늠하는 게 언젠가부터 어려워졌다고 한다. 장뇌를 얻을 목적에서 자생지 밖에 심은 나무들이 야생에 너무 퍼졌기 때문이다. 원산지가 아닌 다른 국가에 건너가서도 녹나무는 번성했다. 1822년 오스트레일리아에 정착한 녹나무는 금세 무성한 숲을 이뤘다고 한다. 녹나무의 장뇌 성분은 주변에 다른 식물이 못 살게 하는 특별한 전술을 펼친다. 이를 타감작용(他感作用)이라 한다. 한 개체가 자신의 휘발성 물질로 가까이에 있는 다른 식물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유칼립투스와 같은 토착종을 밀어내서 유칼립투스를 먹고 사는 코알라가 곤경을 겪을 수도 있다고 퀸즐랜드 전역과 뉴사우스웨일스 일부 지역에서는 녹나무를 유해 수종으로 낙인찍었다. 해로움이 있을 거라는 우려와는 달리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자란 녹나무는 ‘청정 지역 호주 캄포’라는 광고성 문구와 함께 전세계 목재시장에서 비싼 값에 거래된다.
죽어서도 향긋하게 또 한 번 사는 나무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신 우리 할아버지는 목수였다. 나는 할아버지가 직접 지은 집에서 아버지를 통해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으며 컸다. 집을 떠난 지 30여 년이 흐른 지금도 한 번씩 그 집에 갈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는 깜짝 놀란다. 기둥과 대들보며 한옥의 자태가 어릴 적 내 기억 속 모습처럼, 아니 전보다 더 젊고 생기로워 보여서다. 나무는 나무로서 일생을 살고 나면 죽어서 목재로서 또 한 번 생을 산단다. 대목수 할아버지가 나무를 매만지며 아버지에게 자주 했다는 그 말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할아버지도 녹나무를 접했을까.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 어떤 나라에서는 말썽일 정도로 많이 사는 녹나무가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에만 아주 드물게 살기 때문이다. 귀한 만큼 녹나무 목재는 과거에 왕실의 가장 필요한 곳이나 신성한 곳으로 먼저 보내졌을 것이다. 왕실 무덤의 목관을 만들 때, 사찰에서 불상이나 목어를 만들 때, 거북선과 같이 역사적 사명을 지닌 배를 만들 때 녹나무 목재를 썼다. 방향과 항균 능력이 탁월해 벌레가 잘 생기지 않아 보존성이 높고 목재의 색과 결이 곱다고 하는 그 녹나무. 지금은 그 목재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한다.
제주특별자치도에서 제주도의 나무로 지정한 것이 녹나무다. 녹나무를 찾아 떠나는 나만의 제주 여행지가 있다. 공항에 내려서 어렵지 않게 갈 수 있는 곳이 제주 시내 한가운데 있는 삼성혈(三姓穴) 사적지다. 탐라국 시조에 대한 제의가 이뤄지는 장소로 1964년에 사적으로 지정된 곳. 원형의 돌담을 쌓고 둘러 혈제(穴祭)를 지내도록 성역화한 건 일찍이 1526년의 일이라 한다. 오랜 역사를 가늠할 수 있을 법한 녹나무 고목 여러 그루가 삼성혈 사적지에서 우람하게 자라고 있다. 콩짜개덩굴이나 일엽초와 같은 양치식물이 녹나무에 뒤엉켜 산다.
서귀포 ‘면형의 집’에는 녹나무 고목이 사는 아름다운 정원이 있다. 면형의 집은 에밀 타케 신부가 1902년 세운 홍로성당이 있던 곳으로 제주도 가톨릭의 초창기 역사와 관련이 있다. 타케 신부는 1898년 스물다섯에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으로 한국에 파견되어 한국에서만 사셨다. 당시 참 힘들던 한국을 도우려 식물을 채집해서 유럽에 보내는 방식으로 선교자금을 모았다. 1952년 선종할 때까지 식물분류학사에 큰 업적을 남긴 인물이 타케 신부다. 면형의 집 녹나무가 어려운 시기를 견디고 지금의 고목이 된 건, 그 수도원 정원이 여러 초목으로 그토록 아름다워진 건 아마도 타케 신부의 살뜰한 보살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면형과 피정이라는 단어가 녹나무에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면형(麵形)은 성경에 나오는 밀떡이 성체로 바뀐 후에도 그 모양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겉모양을 이르는 말.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비유적 표현일 테다. 피정(避靜)은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성당이나 수도원 같은 곳에서 묵상이나 기도를 통해 자신을 살피는 일을 뜻하는 가톨릭 용어다. 녹나무 앞에 서면 신령스러움에 나도 모르게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공손한 자세를 취하게 된다. 그 커다란 녹음 아래서는 시끄러운 세상을 떠나서 가만히 쉬거나 기도하게 된다. 적어도 나에게는 녹나무가 그런 나무다.
녹나무 보고플 땐 제주나 부산으로
삼성혈과 면형의 집에 사람의 관리를 받는 녹나무가 있다면, 서귀포 도순리에는 야생의 녹나무 자생지 군락이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지 60년이 넘은 숲이다. 강정교를 중심으로 강정동과 도순동 일대 개천가의 급경사면에서 녹나무는 숲을 이룬다. 숲에는 천연기념물 원앙도 산다. 녹나무 숲은 냇가와 들판의 경계 역할을 한다. 그 경계 너머 북쪽으로 한라산이, 남쪽으로 서귀포 앞바다가 펼쳐진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녹나무 숲 주변의 문화재 보호구역 일부를 해제하고 어느 정도의 녹나무를 벌채할 것이라고 들었다. 강정교 재가설을 위해서라던가. 안타깝다.
부산에 가면 벌채 직전에 살아남은 녹나무 한 그루를 만날 수 있다. 부산시민공원의 남문 입구를 지키는 녹나무다. 원래 시청 옆 사설 재활용센터 마당에서 살던 나무인데 도시계획으로 청사가 헐리게 되면서 잘릴 예정이었으나 극적으로 구조돼 2019년 여름부터 시민공원에서 살게 됐다. 그런데 부산은 녹나무가 저절로 자라지 않는다. 어떤 이유에서 누군가가 어느 시기에 옮겨 심은 나무가 지금에 이르렀을 것이다. 대체로 일제강점기에 심은 녹나무가 남부지방에 드물게 있기는 하다. 그중 한 곳이 순천공업고등학교다. 1910년 양묘장 자리였다가 1946년 순천사범학교를 거쳐 지금의 학교 자리에 녹나무 거목 12그루가 줄지어 있다. 양묘장 시절의 묘목이 지금의 거목이 되었다고 추정한다.
부산에서 녹나무를 지킨 사례와 비슷한 일은 더 일찍 일본에서도 있었다. 오사카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도시 네야가와시의 가야시마역(萱島駅)에서 1972년의 일이다. 동네 사람들이 정령으로 여긴 가야시마 신사의 신목(神木) 녹나무는 철도 복선화 공사 때 댕강 잘릴 예정이었다. 역사 확장 공사는 주민들의 요구대로 녹나무를 그대로 남겨두고 진행됐다. 멀리서 보면 거대한 녹나무가 플랫폼 위로 넓게 펼쳐져서 마치 브로콜리 같기도 하다. “삭막한 느낌의 플랫폼에 초록을 더해 행복감을 준다”며 역은 1983년 오사카 도시 경관 건축상을 받았다.
오래 산 고목을 신성시하는 건 국경 없는 문화 같기도 하다. 1988년 일본에서 제작된 만화 영화 ‘이웃집 토토로’가 여러 나라에서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인기를 얻은 걸 보면. 한국에서는 2001년 개봉했다. 당시 나는 중학교 3학년이었다. 영화를 보고 느꼈던 짙은 감동과 행복한 감정은 지금도 여전히 생생하고 너무 거대해서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이웃집 토토로’에서 숲의 요정 토토로가 사는 집이 바로 커다란 녹나무다. 주인공의 동생 메이가 폴짝폴짝 뛰면서 “녹나무, 녹나무!”라고 말한다. 영화 속 배경은 1950년대 도쿄 인근 시골 마을이다. 녹나무가 사는 마을로 이사한 자매와 토토로의 이야기는 사십 대가 코앞인 내게 여전한 명작이다. 이 영화는 어릴 적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이자 앞으로 사랑하는 조카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미래 같은 것.
입춘에 태우면 나쁜 신 도망간다 믿어
입춘에 선조들은 녹나무를 태워 그 연기를 집집마다 풍겼다고 들었다. 그 냄새를 맡고 나쁜 신은 도망가고 좋은 신들이 찾아온다는 속설도 있었다 한다. 녹나무의 살균 효과가 악귀와 병마를 쫓는 풍습으로 이어진 것이리라.
이른 봄에 나오는 녹나무의 새순을 나는 더없이 좋아한다. 그 색감을 동경한다. 녹나무 새잎은 엷은 분홍색과 더 엷은 연두색 물감을 물에 푼 색으로 입춘이 지나면 입술을 내민다. 그러면 가지에 먼저 붙어 있던 묵은잎이 떨어진다. 새로 돋아난 잎은 점차 초록색이 된다. 표면 왁스층이 도톰해지며 시간이 지날수록 잎은 반질댄다. 녹나무가 상록수인 건 연중 같은 녹색의 잎을 달고 있어서가 아니라 묵은잎을 떨구는 동시에 새잎을 키우며 상록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잎사귀를 반짝거리며 몇백 년을 누구보다 크게 산다. 죽어서도 변함없이 향긋하게 산다. 녹나무는 그렇다.
허태임 식물분류학자·‘나의 초록목록’ 저자
삼성혈 종합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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