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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 여인과의 결혼 금지
느 13:23-27
23 그 때에 내가 또 본즉 유다 사람이 아스돗과 암몬과 모압 여인을 맞아 아내로 삼았는데
24 그들의 자녀가 아스돗 방언을 절반쯤은 하여도 유다 방언은 못하니 그 하는 말이 각 족속의 방언이므로
25 내가 그들을 책망하고 저주하며 그들 중 몇 사람을 때리고 그들의 머리털을 뽑고 이르되 너희는 너희 딸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 아들들이나 너희를 위하여 그들의 딸을 데려오지 아니하겠다고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라 하고
26 또 이르기를 옛적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이 일로 범죄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는 많은 나라 중에 비길 왕이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 하나님이 그를 왕으로 삼아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셨으나 이방 여인이 그를 범죄하게 하였나니
27 너희가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아 이 모든 큰 악을 행하여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을 우리가 어찌 용납하겠느냐
느 13:23-27 / [혼혈 결혼 문제] 또 나는 그때에 블레셋 족속의 아스돗 여인과 암몬 족속의 여인과 모압 족속의 여인과 결혼한 유다 사람도 몇 명 발견하였다. 잡혼 문제는 이미 에스라가 개혁한 일이 있었으나 그것은 생존문제와 직결되어 있어서 여전히 이방여인과 결혼하는 이들이 잔존해 있었다. 24) 그런데 블레셋 족속의 대표적인 성읍 아스돗이나 다른 족속의 성읍에서 아내를 취하여 낳은 아이들은 반 이상이 그들 어머니 나라의 말을 하고 유다 나라의 말을 하지 못하였다. 어머니들이 자녀들에게 자기들의 모국어만 가르친 것은 지극히 당연하였다. 그들은 모국어밖에 몰랐기 때문이다. 25) 그래서 나는 그들의 남편인 유다인들을 몹시 꾸짖고 욕하였다. 또 몇 사람은 때리고 머리털까지 잡아당겼다. 그러고 나서 나는 그들을 모두 하나님 앞에 세워 놓고 이런 맹세를 시켰다. `우리는 이방인들에게 우리의 딸들을 시집 보내지도 않고, 우리와 우리의 아들들을 위하여 이방인의 딸들을 아내로 데려오지도 않겠습니다!' 26) 그리고 나는 다시 가르쳐 주었다. `이스라엘의 뛰어난 왕 솔로몬이 바로 이 여자 문제 때문에 실수하였다는 것은 여러분이 잘 압니다. 그는 얼마나 똑똑하고 위대하였습니까? 온 세상의 수많은 왕들 중에서 그와 비교할 만한 왕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를 사랑하셔서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토록 위대한 왕도 이방 여인들이 망쳐놓았습니다. 27) 그런데 여러분이 바로 이방여인들과 결혼하여 그토록 무서운 죄를 지으며 우리의 하나님께 반역하고 있는데, 어찌 내가 그냥 둘 수 있겠습니까?'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백성들의 문제점을 계속해서 개혁해 나갔습니다. 느헤미야의 개혁은 종교와 신앙을 넘어 사회 영역으로까지 확대됩니다.
아스돗 방언을 말하는 아이들(23-24) 유다 백성들은 여러 해 전에 에스라의 명령에 따라 이방 아내들을 내보냈습니다(스 10).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자 아스돗, 암몬, 모압 등의 여인과 결혼하는 풍습이 다시 만연되었습니다. 그들의 자녀들은 유다 말을 하지 못하고 아스돗 방언을 하였습니다. 아스돗은 블레셋 성읍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말은 민족의 정서를 담고 있고, 특별히 이스라엘은 구전을 통해 신앙의 유산을 지켜왔던 민족입니다. 언어가 끊기면 신앙교육이 단절될 수밖에 없고, 마침내 이방 문화에 익숙하게 될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이를 경계했습니다.
이방인과의 결혼을 금지하다(25) 느헤미야는 이성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폭력을 행사하였습니다. 이런 과격한 행위는 느헤미야가 받은 충격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이들에게 자녀들을 이방인과 결혼시키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게 했습니다. 이방인들과의 결혼을 금지한 이유는 이스라엘의 민족적, 혈통적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모압 여인 룻이나 가나안 여인 라합이 다윗과 그리스도의 족보에 들어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는 무엇보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올바로 지키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신 7:3-5).
솔로몬의 실패를 경계하다(26-27) 느헤미야는 솔로몬의 예를 들어 다시 한번 유다 백성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큰 축복을 받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방 여인과 결혼함으로써 하나님께 큰 악을 행하였습니다(왕상 11). 솔로몬은 자신의 처첩들을 연모한 나머지 그녀들의 우상을 위해 신당을 지어주는 등 하나님께 용납할 수 없는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느헤미야는 이방 여인과 결혼한 자들에게 자신들의 죄가 얼마나 큰 것이고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에 대해 분명히 깨닫도록 한 것입니다.
적용: 느헤미야는 계속해서 백성들의 삶을 살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신앙의 눈으로 바라봤습니다. 당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바로잡아야 할 일이 보일 때 당신은 어떻게 하는 사람입니까?
지금 지구상에서 가장 잘 사는 민족은 유태인입니다. 그들은 세계의 금융뿐만 아니라 매스컴, 언론, 영화 등도 거의 지배하고 있습니다. 왜 그들이 그렇게 돈줄을 쥘 수 있었을까요? 인색하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고, 머리가 좋기 때문이라고 말도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의 십일조 생활 때문이라고 말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축복은 하나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철저한 십일조 생활’을 통해서 행동으로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말과 행동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 설 교 >
느헤미야 13:23-27
하브루타 대화 묵상
성령을 의지하는 기도
말씀을 기록하도록 영감을 불어넣으실 뿐만 아니라 풀어주시고 행하도록 힘주시는 성령께서 충만하게 임하사 오늘 말씀을 두고 대화 묵상을 할 때 도와 주옵소서
본문과의 대화
1. '그 때에'는 어느 때인가?
2. 유다 사람이 아스돗과 암몬과 모압 여인을 아내로 삼는 것은 무슨 문제가 있는가?
3. 그들의 자녀가 유다 방언은 못하고 각 족속의 방언을 하는 것은 무슨 문제가 있는가?
4. 이 문제들이 책망하고 저주하며 머리털을 뽑을 문제인가?
5. 옛적에 솔로몬 왕이 범죄한 것은 무엇인가?
6. 어떻게 이방 여인이 솔로몬에게 범죄하게 하였는가?
7.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 하는 것은 왜 큰 악을 행하는 것인가?
하브루타와의 대화
1. '그 때에'는 어느 때인가?
느13:6과 같이 잠시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에게 다녀온 후에 성벽 중건을 방해하고, 비웃고 거짓 예언을 하게 하며, 유다 사람들과 내통하던 암몬 사람 도비야에게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성전에 큰 방을 만들어 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유다 여인과 결혼했고, 그의 아들도 유다 여인과 결혼한 사람이었다(느6:18). 그러므로 유다에서 그와 동맹한 자가 많았다. 그들은 도비야의 선행을 말하기도 했고, 그에게 느헤미야의 일도 알려 주었다. 도비야는 느헤미야를 두렵게 하려고 편지를 보냈던 사람이다. 느헤미야는 성전에서 도비야의 세간을 방 밖으로 내어 던지게 하고 정결하게 하고 성전 그릇과 소제물과 유향을 들여 놓게 했다. 레위 사람들의 몫을 주지 않아서 흩어져서 민장들을 꾸짖어 제자리에 세웠고 안식일을 어기는 사람에게 경계하고 꾸짖어 안식일을 지키도록 했던 때이다.
2. 유다 사람이 아스돗과 암몬과 모압 여인을 아내로 삼는 것은 무슨 문제가 있는가?
하나님은 신명기 7장 3절-4절에서 가나안의 이방 민족과 혼인하는 것을 금하셨다. 이유는 그들이 유혹하여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3. 그들의 자녀가 유다 방언은 못하고 각 족속의 방언을 하는 것은 무슨 문제가 있는가?
장춘식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유다 사회에는 외국인과의 결혼이 만연되어 있었다(스 9-10장; 느 6:18; 10: 30). 이곳에서 유대인과 블레셋 출신 아스돗 여인과의 결혼으로 제기된 문제는 그 자녀들이 사용하던 언어에 관한 것이다. 느헤미야가 제기한 문제의 심각성은 그 자녀들이 모국어 대신에 외국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모국어인 히브리어 자체를 말하지 못하는 데 있었다. 언어를 국가 정체성의 한 중요한 요소로 볼 때 이것은 자기의 종교적 본질을 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공동체 형성과 발전에 있어서 큰 문제였다.] (100주년기념주석, 400)
4. 이 문제들이 책망하고 저주하며 머리털을 뽑을 문제인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가혹하게 보이지만 당시 주변 문화와 비교해 볼 때 이 정도는 오히려 약한 벌이지 않을까 싶다.
5. 옛적에 솔로몬 왕이 범죄한 것은 무엇인가?
솔로몬 왕은 위에서 언급한 신명기 7장의 이방인과의 결혼을 금지한 율법을 어겼다.(왕상3:1) 거기에 그치지 않고 또 다른 이방 여인과 혼인관계를 맺는다.(왕상11:1-2) 하나님께서 이방인과의 결혼을 금지하신 이유는 "그들이 반드시 너희의 마음을 돌려 그들의 신들을 따르게 하리라"는 것이었다. 솔로몬은 이 말씀에 불순종했고 주님이 예견하신대로 솔로몬의 이방 여인들은 솔로몬의 마음을 돌려 그들의 신을 따르게 했다(왕상11:4-11).
6. 어떻게 이방 여인이 솔로몬에게 범죄하게 하였는가?
왕상 11장 4절-11절의 내용대로 솔로몬이 나이가 많을 때에 마음을 돌려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다. 둘째 다른 신을 위한 산당을 짓고 분향하고 제사하게 했다.
7.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 하는 것은 왜 큰 악을 행하는 것인가?
신앙 공동체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하여 하나님 나라를 무너뜨리게 되기 때문이다.
자신과의 대화
1. 이방 여인과의 결혼 문제는 사람이 생각하기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를 초래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유다의 역사에서 여호사밧과 아합의 가문이 혼인함으로 생기는 피비린내 나는 살육을 볼 때 반드시 순종해야 할 말씀이다.
2. 불신자와 결혼하지 말라는 신약의 메시지는 고후 6장 14절-18절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는 것이다. 삶에서 사람들 간에 메는 멍에 중에 결혼만큼 호흡을 잘 맞추며 살아야 할 멍에는 없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신앙의 대상이 다른 사람과 함께 멍에를 메고 평생 살아갈 수 있겠는가? 다시금 신자들의 결혼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과의 대화
하나님의 자녀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시고 복되게 살기 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자녀들이 믿음 안에서 결혼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알려주시는 것에 감사드립니다.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도록 성도들에게 말씀을 잘 풀어 경계하도록 도와 주옵소서.
거룩함을 지키라
느 13:23-28 / 이진수목사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벽 재건 후에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대로 순종하며 살겠다고 맹세하고 결단했습니다. 하지만 느헤미야가 페르시아에 돌아가서 다시 돌아와서 보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순종하겠다고 언약했던 모든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있었습니다. 이방인들 모압과 암몬 족속들이 예루살렘 성안에 들어와 살고 있었습니다. 원수 도비야가 성전 방 안에 거하고 있었습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것을 중단하여 레위인들이 성전을 떠나갔고 성전은 내 버려져 있었습니다. 안식일도 지키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을 보면 이방인들과 결혼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자세히 보니 이방인과 결혼한 사람들의 자녀들이 낳은 자녀들을 보니 유대인의 말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절반이 아스돗 말이나 다른 나라 말은 하면서도, 유다 말은 못하였다”
그런 모습을 보고 느헤미야가 어떻게 했습니까? 25절입니다. “나는 그 아버지들을 나무라고, 저주받을 것이라고 하면서 야단을 치고, 그들 가운데 몇몇을 때리기도 하였으며, 머리털을 뽑기까지 하였다. 그런 다음에 하나님을 두고서 맹세하게 하였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딸들을 이방 사람의 아들에게 주지 마시오. 당신들과 당신들의 아들들도 이방 사람의 딸을 아내로 데려와서는 안 되오”
느헤미야가 그 모습을 보고 얼마나 분노했는지 나무라고, 저주 받을 것이라고 야단을 치고 더 나아가 몇몇을 때리고 머리채를 잡고 흔들어 머리털까지 뽑았습니다. 왜 그렇게 느헤미야가 분노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명하신 이방인들과 결혼하는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왜 이렇게 구약 곳곳에 이방인들과 결혼하는 것에 대해 강하게 책망합니까? 그리고 특별히 느헤미야는 이방인들과 결혼한 가정에서 태어난 자녀들이 유대 말을 하지 못하고 이방말만 하는 것을 보고 그렇게 분노했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잘 알듯이 언어는 곧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언어를 통해서 민족의 문화가 전달이 되고 언어는 곧 민족의 정신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언어는 정체성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했을 때 한국말을 쓰지 못하고 일본말을 쓰게 하려고 얼마나 애썼습니까? 그 이유는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완전하게 지배하고 망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택한 받는 거룩한 백성입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하나님께 구원 받은 거룩한 백성입니다. 세상과 구별되어 살아야 하는, 이 세상에서 하늘의 법을 따라 살아야 하는 세상과는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방 여인들과 결혼함을 통하여 자신들만 아니라 자녀들이 세상과 이방 문화 하나님이 아닌 우상의 죄된 모습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솔로몬 왕이 무너진 것이, 이스라엘 나라가 무너진 것이 바로 이방 여인을 들여 와서 일어난 일임을 다시 한번 분명하게 상고 시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된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기 때문에 끊임없이 세상의 가치관이 들어오기 쉽습니다. 세상의 언어와 세상의 문화, 세상이 추구하는 사단과 죄의 유혹이 끊임없이 있습니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 것을 모르듯이 우리들의 마음과 삶에 점차적으로 세상의 언어와 가치관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들어오기 쉽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시대에 많은 성도들이 그렇게 세상과 동화되고 타협하고 살아갑니다. 어느새 정체성을 잃고 섞여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뜻이 아닌 세상의 법과 방식대로 살아갑니다. 이방 여인을 데리고 살고 있었던 느헤미야 시대의 백성들과 마찬가지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을 보면 “깨어라, 정신을 차리라, 분별하라” 라는 말씀을 계속 우리들에게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28절을 보면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인 요야다의 아들 가운데 하나가 이스라엘의 대적이었던 이방 사람 산발랏의 딸을 데리고 결혼하여 사위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에 느헤미야는 그들에게 27절에 “이제 당신들이 이방 여자들을 아내로 데려와서, 이렇게 큰 잘못을 저지르며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는데, 우리가 어찌 보고만 있을 수 있소?”라고 책망하며 그들을 쫓아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의 법과 뜻이 아닌 세상적인 육신의 정욕대로, 세상의 방법을 따르고 살아가고 있지 않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법과 뜻에서 벗어나는 세상과 죄를 품고 살고 있는 것을 단호히 쫓아내기 원합니다.
느헤미야 13:23-31
찬송가 430장
느헤미야가 자리를 비운 동안, 그간의 개혁이 무색할 만큼 이스라엘은 빠른 속도로 해이해졌습니다. 복귀한 느헤미야는 민족의 영적 상태를 두루두루 주의하여 관찰하고, 면밀하고도 자세하게 알아봅니다. 13장 전반부에서 느헤미야는 제사장의 직분 수행 문제를 살피고, 안식일 위반 문제도 살펴 개혁을 단행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가 관심을 가진 문제는 이방인들의 영향력으로 인한 유혹, 곧 결혼 문제였습니다.
느헤미야의 개혁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가 이방인 산발랏의 사위가 될 정도면, 이방인과의 통혼은 사회에 만연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얼마 전 에스라에 의해 이스라엘 남자들과 타민족 여자들 사이의 결혼에 대한 개혁이 이루어졌지만, 그들은 이를 거스르고 또다시 죄를 답습합니다. 느헤미야는 통혼 문제와 그로 인한 결과를 살폈습니다(23-24).
이스라엘 백성이 배우자로 삼았던 이들을 파악해봅니다. 아스돗은 유다의 서쪽 지역에 자리 잡았던 블레셋의 다섯 성읍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스돗 사람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할 때 산발랏과 동맹하여 귀향민들을 위협했던 민족입니다. 또 암몬 사람으로 대표하는 도비야도 산발랏과 합세하여 성벽 건축을 방해했습니다. 암몬과 모압 민족은 이스라엘과는 뿌리 깊은 대적 관계에 있었던 민족입니다.
혼인을 통해 맺어진 관계는 이 세상에서 사람과 사람이 이룰 수 있는 가장 친밀한 관계입니다. 결혼은 향후 두 사람에게 전개될 삶의 방향에 직결됩니다. 그런데 성전을 짓고 성벽을 건축했던 이스라엘 백성이 그 성벽이 건설되는 것을 방해하고 하나님을 대적했던 이들과 하나가 되면 그 결혼생활은 처참한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방향도, 기준도 다른 두 사람이 함께하기 위해선 누군가가 무언가를 포기하고 타협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통혼의 결과가 그들이 무엇을 타협했었는지 알려줍니다.
통혼의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눈에 띄는 결과는 다름 아닌, 사랑의 결실이라는 자녀들의 언어 문제였습니다. 자녀들이 유다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언어는 소통의 도구일 뿐만 아니라, 생각의 창이기도 합니다. 언어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사고방식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또한, 말은 말을 하는 사람의 인격을 담는 그릇이기도 하며, 민족에게 언어는 그 민족의 역사와 기억이 켜켜이 쌓인 농축된 결과물입니다. 우리 민족도 일제강점기에 강제로 언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함으로 민족적 사고와 정체성을 훼손당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또한 ‘독도’는 누군가에겐 한 섬의 이름일 뿐이지만, 우리나라의 역사 배경과 문화 안에서 자라난 사람에겐 다른 깊이로 다가옵니다.
하물며 신앙의 언어는 어떻겠습니까? 신앙의 언어는 믿음을 갖는 데 중요한 역할과 기능을 합니다. 범신론의 문화적 배경을 가진 인도에서나 다신론의 배경인 일본에서는 ‘하나님’이라는 단어의 개념을 가르칠 때 쉽지 않다고 합니다. 인격을 가진 ‘하나님’과 유일한 ‘하나님’이라는 인식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유다의 언어를 잃어버린 그들은 가치관과 정체성이 흐려졌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신앙도 옅어집니다. 그렇기에 느헤미야는 과격하다 싶을 만한 조치를 취합니다.
(25) 내가 그들을 책망하고 저주하며 그들 중 몇 사람을 때리고 그들의 머리털을 뽑고 이르되 너희는 너희 딸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 아들들이나 너희를 위하여 그들의 딸을 데려오지 아니하겠다고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라 하고
그들을 책망하고 저주했으며, 단호하게 꾸짖습니다. 엄격하게 훈계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때리고 머리털을 뽑으며 굴욕감을 안겨줍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신앙에 위배된 혼인을 하지 않겠다는 맹세까지 시킵니다. 단호하고 즉각적인 느헤미야의 조치에서 죄에 대한 경멸과 뿌리 깊은 불신앙에 대한 분노가 보입니다. 그는 눈감아주거나 관용을 베풀지 않고, 또 무책임하게 방치하지 않았습니다. 이 분노 서린 조치는 그만큼이나 사태가 중대하고 심각함을 알려줍니다. 그가 이렇게까지 극심히 분노했던 이유가 이어서 나옵니다.
(26-27) 또 이르기를 옛적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이 일로 범죄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는 많은 나라 중에 비길 왕이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 하나님이 그를 왕으로 삼아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셨으나 이방 여인이 그를 범죄하게 하였나니 너희가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아 이 모든 큰 악을 행하여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을 우리가 어찌 용납하겠느냐
이스라엘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솔로몬의 예를 들어 경종을 울립니다. 솔로몬은 ‘사랑을 입은 자’였으나, 수많은 외국 이방인 여인들을 후궁으로 맞아들였습니다. 결혼으로 동맹을 맺어 정치적인 안정을 꾀했으나, 한편으로 진정 그녀들을 사랑했다고 전합니다. 그렇게 왕궁 깊숙한 곳에서 이방 신에게 제사가 드려지기 시작했고, 이방 여인과 결혼하며 함께 유입된 이국 문화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을 위협했습니다. 나아가 나라를 분열시키는 단초까지 제공했습니다. 이처럼 한 사람이 타협한 죄가 나라를 멸망시키는 파국을 초래했음을 밝힙니다.
곧 타산지석 삼아 경고하며 범죄에 대해 경각심을 갖게 한 것입니다. 죄를 반복하지 말라고, 잘못된 역사를 거듭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당시 통혼했던 이들에겐 개인의 실리를 위한 결혼이었을지라도, 느헤미야에게 통혼이란 신앙을 담는 그릇 언어를 잃어버리게 만들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흐릿하게 하는 범죄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거울삼아 반성하고 돌이키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우리 가정과 삶에 은연 중에 들어와 자리를 꿰찬 세속적 욕망은 무엇입니까? 신앙의 언어, 사랑의 언어를 잃어버리게 하는 세속의 언어는 무엇입니까? 그런 말을 하는 자기 자신을 매섭게 치고, 신앙의 언어를 대체하고 있는 불신앙의 말을 하는 데에 스스럼없는 분위기를 진지하게 여겨야 합니다. 이렇게 훈계와 꾸중으로 정신과 마음을 새롭게 한 느헤미야는 실천적인 개혁을 감행합니다.
(28-29)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 요야다의 아들 하나가 호론 사람 산발랏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내가 쫓아내어 나를 떠나게 하였느니라 내 하나님이여 그들이 제사장의 직분을 더럽히고 제사장의 직분과 레위 사람에 대한 언약을 어겼사오니 그들을 기억하옵소서
대제사장 엘리아십은 성벽 건설 방해에 앞장섰던 도비야를 위해 성전 뜰에 방을 만들어준 것도 모자라 자신의 손자를 산발랏의 사위가 되게 합니다. 무엇보다 순수성을 지키고, 하나님 말씀을 깍듯이 지켜야 할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에게는 과감하게 대합니다. 그를 쫓아내어 떠나보냅니다. 제사장 직분을 더럽혔던 당사자를 추방하고 분리하며 직분에 걸맞은 순수성을 지키게 한 것입니다.
우리 역시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임에도 타협하고 있는 세속적인 욕망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예를 더럽히는 가치들은 무엇입니까? 사명을 망각하게 하고,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도록 흔드는 유혹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느헤미야가 감행했던 분리조치와 추방조치를 따라, 우리의 직분을 흔드는 유혹들을 도려내고 멀리하십시다.
(30-31) 내가 이와 같이 그들에게 이방 사람을 떠나게 하여 그들을 깨끗하게 하고 또 제사장과 레위 사람의 반열을 세워 각각 자기의 일을 맡게 하고 또 정한 기한에 나무와 처음 익은 것을 드리게 하였사오니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
다음으로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로 하여금 본래 임무를 수행하게 합니다. 그들이 있어야 할 제자리로 돌려놓습니다. 레위인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지파입니다. 느헤미야는 정의감을 과도하게 부리지 않고, 그의 의로운 분노도 하나님이 정하신 선 안에서 멈춥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정하신 본래 자리로 그들을 되돌려 놓았습니다. 아울러 첫 열매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고 기억하는 행위입니다. 열매가 맺혀지기까지 그 과정 가운데 내려주신 하나님의 복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전방위적이고 지속적인 개혁을 했습니다. 훈계하고 때리고 없애고 제거하고 내쫓으며 열심히 개혁에 임했지만, 그는 개혁의 결실을 주님의 덕택으로 돌립니다.
그래서 끝으로 느헤미야는 개혁을 마치면서 주님께 이렇게 간구합니다.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을 기억해내어 말씀의 렌즈로 이스라엘의 생활을 들여다보았고, 역사 속에서 솔로몬을 기억해내어 이스라엘을 훈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 하나님의 일하심과 훈계를 기억했기에 개혁을 감행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알았습니다. 그가 새롭게 고쳐나가는 개혁은, 이스라엘 가운데 하나님께서 새일을 행하시는 통로일 뿐이라고 말입니다. 그렇기에 느헤미야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께 좋은 기억이 되어, 이스라엘에게 복과 은총을 내려달라고 기도합니다.
느헤미야의 마지막 장은 이처럼 개혁을 거듭하며 마치게 됩니다. 그치지 않는 개혁은, 개혁의 부질없음을 말하기보다는 오히려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는 만큼 매일 매일을 새로운 마음으로 쇄신해야 함이 필수적이라는 방증입니다. 무엇보다 기도로 마친 느헤미야의 개혁은 하나님이 하시는 새일, 곧 예수님을 통해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신 일을 기대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의 퍼즐에서 떨어져 나가서 추했던 우리를 깨끗이 하여 제자리로, 본래의 위치로 끼워 넣어주셨습니다. 우리도 말씀을 기억하며 삶에서 힘쓰는 작은 개혁들이 하나님께 좋은 기억이 되고, 하나님이 하시는 새 일의 통로가 되며, 하나님의 경륜에 한 조각이 될 것입니다.
달이 꽉 찬 추석입니다. 가득 차오른 달처럼 사랑과 진리의 말씀으로 가득 찬 가족 모임, 그리고 교회 식구들이 되기를 간절히 빕니다. 우리 가정을 새롭게 하시며 회복하신 열매들을 맛보고 있다면, 마음에 새기며 기억합시다. 혹, 개선의 열매가 아쉽거나 간직할 만한 좋은 기억이 없다면, 2024년 12월 31일까지 남은 105일 동안 쇄신을 거듭함으로 하나님과 함께 나눌 좋은 기억을 만들어가기를 소망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한 해의 풍요로운 수확을 기원하는 추석을 저희에게 허락하시니 감사합니다. 가족들과 함께하는 소중한 시간, 세속의 말이 틈타지 않게 하시고 세속적 가치관으로 물들었던 가족 분위기를 단절시키는 용기를 내려주옵소서. 주님의 영원한 말씀으로 새로워지게 하시고, 주님의 사랑을 입은 사랑의 언어들로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게 하옵소서. 자기 자신과 가정을 끊임없이 새롭게 하는 저희의 몸부림이 하나님께 좋은 기억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 경륜의 한 조각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통혼의 결과는 무엇이었나요? 삶 가운데 타협했던 세속적 욕망은 무엇이었는지 살펴보고 타협하여 발생한 결과를 파악해봅시다.
2. 가족들 간 대화 속에서 세속의 가치를 담고 있는 말(언어)은 무엇인가요? 특별히 추석 가족 모임 중, 세속을 좇는 대화를 단절하고 신앙을 담는 대화를 해봅시다.
3. 느헤미야의 개혁은 하나님께 좋은 기억이 되었습니다. 100여일 남은 2024년, 하나님께 좋은 기억이 될만한 새 일을 만들어봅시다.
이방인과의 결혼을 금지함
느 13:23-27 / 생명의 삶
결혼은 신앙 공동체의 정체성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느헤미야 시대에 이방인과의 결혼은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언약 갱신 때 이방인과 결혼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음에도(10:29~23), 유다 사람들이 경제적 사회적 이익을 위해 아스돗과 암몬과 모압 등 주변 민족 여인들과 결혼한 것입니다. 그들이 낳은 자녀는 이방 민족의 말은 하면서도 유다 말은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백성이 아닌 이방인으로 자랐다는 의미입니다. 이 일에 대해 느헤미야는 꾸짖는 정도가 아니라 심한 체벌까지 가하면서 다시는 이방인과 결혼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게 합니다. 이방인과 결혼하면 솔로몬처럼 하나님을 떠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선택으로 하나님 신앙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 느헤미야가 이방인과의 결혼을 금지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신앙을 잃어 버릴 수도 있기에 내가 신중하게 선택할 일은 무엇인가요?
** 이방인과 결혼한 대제사장 후손(느헤미야 13장 28~31절)
28.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 요야다의 아들 하나가 호론 사람 산발랏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내가 쫓아내어 나를 떠나게 하였느니라
(한절묵상_느헤미야 13장 23,28절)
유다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이주했지만, 그들 마음은 온전히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았습니다. 백성은 이방 여인과 혼인했고, 대제사장의 증손자마저 산발랏의 사위가 되는 영적 간음이 공동체에 퍼졌습니다. 언제든 죄의 유혹에 넘어질 수 있는 것이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성도는 하나님 말씀을 따랐던 과거 신앙에 안주해선 안 됩니다. 날마다 말씀 앞으로 나아가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 은혜는 오늘을 사는 힘과 지혜입니다.
29. 내 하나님이여 그들이 제사장의 직분을 더럽히고 제사장의 직분과 레위 사람에 대한 언약을 어겼사오니 그들을 기억하옵소서
30. 내가 이와 같이 그들에게 이방 사람을 떠나게 하여 그들을 깨끗하게 하고 또 제사장과 레위 사람의 반열을 세워 각각 자기의 일을 맡게 하고
31. 또 정한 기한에 나무와 처음 익은 것을 드리게 하였사오니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
대제사장 집안사람까지 이방인과 결혼했을 정도로 이방인과의 통혼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증손자가 산발랏의 딸과 결혼했습니다. 호론 사람 산발랏은 암몬 사람 도비야와 함께 성벽 재건을 가장 심하게 반대했던 사람입니다. 가장 거룩해야 할 대제사장 가문까지 타락한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그를 파면하고 내쫓습니다. 앞으로 이방인과 결혼한 사람이 제사장이나 대제사장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함입니다. 느헤미야서가 성벽 봉헌이라는 영광스러운 축제로 끝나지 않고, 다시 돌아온 느헤미야가 타락한 유다 공동체를 개혁하는 이야기로 끝나는 것은 오늘날 우리도 날마다 개혁되어야 하는 존재임을 깨닫게 합니다.
– 느헤미야가 대제사장의 증손자를 내쫓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 나와 공동체가 하나님 말씀 앞으로 돌이키는 개혁을 지속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오늘의 말씀 요약)
유다 사람들이 이방 여인과 결혼했는데, 그들 자녀가 유다 말을 못 합니다. 이에 느헤미야는 유다 사람을 책망하고 이방 여인과의 결혼을 금합니다. 그는 호론 사람 산발랏의 사위가 된 요야다의 아들을 쫒아내고, 제사장과 레위 사람을 이방 사람으로부터 떠나게 해 자기 반열대로 일하게 합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제 삶을 향해 밀려오는 다수의 논리와 세상의 진리에 단호하게 반응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뜻에 합당한 삶이 되도록 제 신앙을 점검하고 개혁하는 일을 멈추지 않게 하소서. 제 삶을 은혜와 사랑으로 이끄실 하나님을 신뢰하며 날마다 믿음으로 살게 하소서.(아멘)
지도자 느혜미아
느 13:23-27 /
오늘은 느혜미아서 전체를 통해서 느혜미아의 지도자적 자질에 대해 전체적으로 정리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 교회 모든 영적인 지도자들이 느혜미아와 같은 구체적인 자질을 갖추도록 여러분이 기도하여 주셔야 하고, 또 각각 크고 작은기관에서 지도자로 세움을 받은 분들은 느혜미야를 통해 지도력을 본받아야 한다고 봅니다.
느혜미아는
1. 소명의 사람이었습니다. 소명이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예루살렘 성벽이 황폐화 되고 성문이 불탔다는 소식을 동생 하나니가 전했을때 느혜미아는 처음에는 너무나도 가슴 아파 울었으나 기도하는 도중에 그 것을 제건하는데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신다는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바사국에 술관원이라는 직책을 던지고 무너진 도시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왜요 하나님이 자신으로 하여금 그 일을 하도록 부르셨기때문입니다.
지도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소명의식입니다. 하나님이 이 일에 있어 나를 쓰시려고 부르셨다는 확신이 제일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확신이 없는 지도자는 환난과 어려움을 지탱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일을 위해 나를 쓰시려고 불러 주셨다는 확신만 가지만, 아골골짝 빈들에라도, 소돔같은 거리라도, 달려가서 이름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일생을 헌신 할 수 있습니다.
왜요 욥기서7장 17절 말씀처럼 내같은 “사람이 무엇이관데 주께서 크게 여기사 나에게 마음을 두신” 그 자체가 너무 감사하고 영광스럽기 때문이죠.
그러나 하나님이 어떤 일을 우리에게 맡기실때 억지로 하게 하시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인격이시므로 우리를 다루실때도 철저히 인격적으로 대우 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그래서 그분은 먼저 그분 자신의 소원을 우리 마음에 이식을 시킵니다. 그래서 그분의 소원이 내 소원 되게 하시고 내 소원이므로 기쁨을 갖고 일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2장 13절 “너희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어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행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또한 그 사람에게 주어진 일을 이루시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전서 5:24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고 하십니다.
느혜미아의 마음에 기도중에 성벽을 재건하고자 하는 강력한 소원을 심어 주신 하나님 , 그 소원을 심어 주었을뿐만 아니라 느혜미아를 통해서 그 성벽재건을 이루신분은 바로 하나님이셨음을 우리는 느혜미아서 공부를 통해서 이미 살펴 보았습니다.
저는 이것을 경험합니다. 신학대학원 1학년때 기도중에 무교회지역에서 교회를 설립해보고 싶은 아주 강렬한 소원이 마음속에서 불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원은 주님이 주신 소원이었습니다. 소원데로 무교회지역에 들어가게 되었고, 또한 몸된 교회를 아주 평탄하게 이루게 하심을 저는 역역히 경험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몸된 교회를 위해 해야 할일에 대해 마음에 소원을 담아 주신분이 있을 줄 압니다. 그 분은 그 일에 부르심을 받고 있는것이라 생각해도 틀린것이 아니라 봅니다. 그럴때 순종하시고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져 나가는 과정을 경험하시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2. 느혜미아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느혜미아서는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마칩니다. 그리고 중간 중간 느혜미야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려고 아주 짧은 기도를 자주 하는것을 보게 됩니다.이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기도의 사람이었던가를 알게 합니다. 기도의 사람은 시간을 정해놓고만 기도하는것이 아니라 생활속에서 언제라도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고, 또한 무시로 기도를 통해 하나님에게 나아갑니다.
이런 사람이 정말 기도가 생활화된 사람입니다. 그리고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이가도 합니다
기도의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만 의지하는데 있습니다. 느혜미아가 그러합니다. 그는 그의 배후에는 아다사스다왕의 막강한 권세가 있었습니다. 왕에게 편지한통만 보내도 그는 왕의 도움을 쉽게 받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순간순간 모든 어려움을 오직 기도로 하나님께만 말합니다. 그것은 인생에 있어서 인간의 생사화복, 절대주권은 왕에게 있는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알기때문입니다.
3. 느헤미아는 비젼의 사람이었습니다.
비젼을 다른 말로 하면 “꿈”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느혜미아는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세계, 다른 사람이 생각지 않는 세계에 대한 꿈을 갖고 있는 지도자였습니다.
느혜미아서 전체를 통해 발견되어지는 느혜미아의 비젼은 단순한 성벽재건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꿈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무너진 성을 세우므로 예루 살렘 성전중심으로 다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중심으로 , 하나님만을 섬기는 하나님의 왕국의 재건을 바라는 하나님나라의 건설의 꿈을 갖고 있는 모습을 보게 합니다. 그의 비젼은 땅의 비젼이 아니요 하늘에 비젼입니다. 그의 눈은 하늘 보좌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벽을 건축할때 하나님의 성전에 제일가까운 문,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을 운반하는 구별된 문인 양문부터 건축했습니다. 성벽재건이 끝나자. 느혜미아는 백성들을 모아놓고 부흥회를 개최해서 떠난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다 돌립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6시간들으면서 통곡을 하며 회개합니다. 그리고 이방인과의 혼인 금지, 십일조, 안식일 지킴의 서약을 하나님게 드리며 그 마음들이 하나님을 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립니다. 이것이 느혜미아의 꿈입니다. 느혜미의 꿈은 하나님 나라에 있었던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저는 꿈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비젼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성경은 성령을 받고 진리를 깨우친 사람은 비젼을 갖게 된다고 합니다.
사도행전2:17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늙은이들도 꿈을 꾼다고 합니다. 무슨꿈을 꿀까요 천국꿈을 꾸는것입니다. 주님만날 꿈, 먼저간 성도들을 만날 꿈, 그리고 생명수강가를 주님과 더불어 거닐 꿈, 천군천사들과 더불어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을 향해 기쁨의 찬송을 올릴꿈, 그리고 주님 오실때 이 땅에 교회만 남는 꿈. 그래서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것은 주님을 위해 일하는것이며, 복음을 전하는 일이라는 꿈을 꾸는것입니다. 이것이 크리스쳔의 비젼입니다.
4. 느혜미아는 복종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느헤미아는 주어진 사회의 권위를 무시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왕을 존중하였고 예루살렘으로 가기전에 왕께 자신의 계획을 제출하여 승인을 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지만 ,하나님이 인간의 유익을 위해 세상에 허락하여 주신 권위에 대해서복종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가끔 하나님이 허락하신 권위에 거역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사실 최초에 하나님의 권위를 거역한 것은 사단이었습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권위를 업신여겼고,또한 아담과 하와에게도 하나님의 권위를 거역하도록 유혹했었습니다. 그래서 이 권위를 거역하는 행위를 성경은 무서운 죄로 간주를 하고 있습니다.
삼상 15장 23절에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다” 라고 했습니다. 사술이라는 말은 점을 치는 것을말합니다. 귀신의 가르침을 받는것을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권위를 거역하도록 마귀의 가르침을 받았듯이 , 하나님이 인간 세게에주신 권위를 거역하는 것도 마치 사술의 죄와 같다는것입니다.
. 롬 13:1-3절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관원들은 선한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 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권위중에 가중 큰 권위는 하나님의 권위입니다.
다윗의 위대한 점은 하나님의권위를 아주 소중히여겼다는 데 있습니다..
사울을 죽일기회를 두번이나 하나님이 주셨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부음받은 종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왜요 하나님이 그를 선택했었고 그에게 권위를 부여 하셨기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상 26장 23절 이하에 보면 “ 여호와께서 오늘날 왕을 내손에 붙이셨으되 나는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받은자 치기를 원치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오늘날 왕의 생명을 내가 중히 여긴것 같이 내 생명을 여호와께서 중이 여기셔서 모든 환란에서 나를 구하여 내시기를 바라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5. 느혜미아는 아주 계획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성급하게 일을 밀어붙이지 않았습니다. 느혜미아서 2장을 보면 느혜미아는 비밀리에 상황을 조사해 보고 정황을 먼저 파악합니다. 그리고 유대 지도자들과 은밀히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에게 자기의 계획을 말합니다. 느혜미아는 하나님의 지시를 기꺼이 기다렸다가 나아갈 방향이 분명해지면 곧 바로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계획없이 일하는것이 아니고 계획을 세우고 그 다음에는 일꾼들의 협력을 구하고 ,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준 그 일에 대한 비전을 그들도 가지게 하려고 애를 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해야 할 일과 일할 장소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는 일꾼들에게 고마워 했고, 상황이 어려워지면 그들을 격려했습니다. 또한 상황이 위태로울때는 그들에게 안정감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성벽재건후에는 백성들을 위해 “부흥 에배”를 드렸고, 그 후에는 공개적으로 성벽낙헌식을 가졌습니다. 그는 일을 계획하고 그 계획에 따라 일하는사람이었습니다.
6. 느혜미아는 대적의 전략을 간파하였습니다.
느혜미아서 4,5,6장에 걸쳐서 대적 산발랏과 도비야등이 얼마나 음흉한 괴략으로 느헤미아를 괴롭힌지 모릅니다. 그러나 느혜미아는 그들의 전략을 간파하고 있었고, 그들의 꾀에 넘어가지 않았을뿐만 아니라 철저히 대비를 하였습니다.지도자는 사탄이 우는 사자처럼 삼키거나 속이는 뱀처럼 다가올 때를 알아야 하고 그들의 전략을 간파하고 있어야하며 ,또 대비할 줄 알아야 한다고 봅니다. 영적인 레이더를 늘 캐어 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7. 느혜미아는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는 남들이 자는 밤에 무너진 성벽을 돌아보았습니다. 대적이 위협이 거세질때 그는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큰 대공사를 선두지휘를 했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차려 많은 사람들을 자기상에서 먹게 했을뿐만 아니라, 백성들사이의 불평거리를 잘 판결지어주는 행정관으로서의 많은 일도 열심히 했습니다. 게으리지 않으며 열심히 일하는 느헤미아의 모습을 봅니다.
8. 느혜미아는 모범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느헤미의 생활에 책망할것이 없었습니다. 경제적인 면에서도, 이성적인 면에서도, 그리고 그에게주어진 권위를 사용하는 면에서도 책망할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경제적 후원을 거절했고, 오히려 다른 사람을 돕는데에 자기 돈을 사용했습니다. 그는 나는 유대총독인데 하고 유세를 부린것이 아니라. 백성들과 자신을 동일시 했으며 함께 성벽을 건축을 할때는 그들과 동등한 입장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백성으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사도바울은 오늘을 사는 성도들에게도 그렇게 살라고 합니다.즉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빌2:15)가 되라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디모데전서 4장 12절에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자에게 본이 되라”고 합니다.
9. 그는 하나께만 영광을 돌렸습니다.
느혜미아가 출세하는데 관심이 있었다면 그는 그냥 궁궐에 머물러 있었을것입니다. 그는 궁궐에서 술맡은 관원으로서 존경을 받고 있었고, 평안한 생활을 하고 있었기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벽을 건축을 통해 오로지 하나님만이 영광 받으시길 원했습니다. 느혜미아서 6장 15-16절을 보면 “성 역사가 오십이일 만에 엘룰월 이십오일에 끝나매 우리 모든 대적과 사면 이방 사람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스스로 낙담하였으니 이는 이 역사를 우리 하나님이 이루신것을 앎이니라” 성벽건축을 완공은 느헤미아가 이룬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셨다고 그는 성경에 기록하면서 하나님께만 영광을 온전히 돌렸습니다.
그리고 성벽건축후엔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도록 했습니다. 느혜미아 9장 5절을 보면“.. 너희 무리는 마땅히 일어나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어다 주여,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송축하올것은 주의 이름이 존귀하여 모든 송축이나 찬양에서 뛰어남이니이다”라고 합니다.
느혜미아뿐만 아니라 사도바울도 이와 같은 자세로 살았습니다.
고린도전서3장5-7절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으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고 하며 나와 아볼로는 아무것도 아니라,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만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고 고린도 교회에 하나님을 제쳐놓고 교역자들을 더 추종하는 교인들에게 말합니다.
누가복음 6장 26절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참 선지자는 그 칭찬과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그러나 거짓선지자는 하나님 대신 자기가 영광을 받았습니다. 이런 자에게는 화가 있다고 하십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린 느혜미아의 모습 우리 모습되었으면 합니다.
10. 그는 용기의 사람이었습니다.
느헤미아는 위험한 성읍에서 살면서 음흉한 대적과 대항할 만한 용기가 있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공부했지만 성전에 들어와 살던 대적 도비야를 성전에서 내쫓았습니다.그것은 쉬운일이 아니였습니다. 대제사장 엘리아십과 연줄이 있는 사람이였기때문입니다.
사실 새로운교회에 목사님이 당회장으로 부임해서 교회에 그릇된 유전을 척결하는데 제일 어려운 장애는 그 교회에 상당한 영향력을 소유하고 있는 기존 장로님들층일것입니다.
실지 제가 아는 모 교회에서는 서울상대를 졸업하고 설교를 참 잘하시는 목사님이 부임하신후 1년만에 교회를 떠나시게 된 교회가 있습니다. 이유인즉, 조용한 교회에 예배시간에 북을 치고, 박수를 치고 요란스럽게 해서 몇번 시정을 장로님들이 부탁을 드렸으나 계속 밀어붙여서 , 또 주일날 아침일찍 교인들과 더불어 멀리 야외예배를 장로님들이 결정을 했는데, 목사님은 못가는 성도들이 염려가 되어서 주일날 가는것을 반대했던가 봅니다. 그런것이 장로님들의 눈에는 자신들의 의견을 따라주지 않는 고집이 센 목사라고 하며 교회에서 갑자기 나가달라고...
그리고 저에게 그교회에 장로님이 전화를 하셔서 최목사님이 당회장감을 하나 소개해주시면 , 모시고 싶다고... 잘 아는 목사님 소개하려다가 그 교회에 사정을 잘 아는 인근 교회 목사님으로 부터 사정 이야기를 듣고는 소개하는 것을 거절한적이 있습니다.
그만큼 한국적 상황에 힘이 듭니다. 무언가 과감히 척결한다는것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느혜미아 13장 23절에 보면 , 유다사람들이 암몬과,모압여인과 결혼해서 자녀를 낳았는데 그 자녀가 유대나라말은 못하고 이방나라의 말을 하는것을 보고는 느혜미아는 단호하게 그들을 “책망하고, 저주하며, 두어 사람을 때리고, 그 머리털을 뽑아 다시는 이방여인과 결혼하지 않게다는 맹세”를 시키는 용기의 지도자였습니다.
아무쪼록 느혜미아서를 공부하면서 지도자 느혜미의 이와같은 10가지 지도자적 자질을 우리가 본받아 하나님의 쓰임받는 휼륭한 일군들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