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루카1,28)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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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참된 신앙, 복된 신앙은 늘 '그럼에도 불구한 신앙', '그럼에도 또한 신앙'이라는 특성을 지닌다.
입증 가능하고 이해 가능한 경계를 넘어서는 희망을 품은 용기 있는 발걸음이라는 특성을 지닌다.
예수가 첫 제자를 부르고, 밤새도록 물고기 한마리도 잡지 못한 제자들에게 다시 바다에
그물을 던지라고 한 장면에서 훗날 사도들의 우두머리가 되는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한다.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럼에도 스승님께서 말씀하시니
제가 그물을 치겠습니다.'(루카5,5)
그분 말씀에 대한 신뢰는 희망을 낳는다. 그분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 증거자의 말이다.
토마스 사도처럼, 또한 보지 않고 그럼에도 그분을 따르는 사람처럼
그분 말씀으로 사도들은 증거자가 된다.
여러 방법으로 불신앙과 불신으로 이끌 수 있는 가시적 세계에서 나와 보이지않는 세계로,
이해할 수 없고 보이지 않는 실재의 숨겨진 신비의 품으로 뛰어들 믿음과 용기를 우리 신앙이 지닌다면,
우리도 증인이 된다. ...신앙이 살았는 한, 신앙은 늘 상처입고, 위기에 내던져지고, 가끔은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우리 신앙은-좀더 가볍게 말해 지금까지의 신앙형태는- 다시 깨어나기 위해 냉담해질 때가 있다.
'못자국들'을 볼 수 있는 상처입은 신앙만이 믿을 수 있고 치유할 수 있다.
십자가의 밤을 지나지 않고 심장이 꿰뚫리지 않는 신앙은 이러한 힘을 갖고 있지않다.
눈이 멀어본 적없는 신앙, 어둠을 체험하지 않은 신앙은 보지 못했고 보지 못하는 이들을 결코 도울 수 없다.
'보는 자들'의 종교, 바리사이적이고, 자기확신에 가득 차있고, 상처 입지 않은 종교는 빵 대신 돌을, 믿음대신 이데올로기를 ,
증언대신 이론을, 도움대신 충고를 주고, 사랑의 자비를 보여주는 대신 지시하고 명령한다.
'보지 못함', 진정으로 겸손하게 고백된 보지 못함은 믿음의 공간을 열어준다.
신앙은 이 보지못함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버려진다.
-토마시 할리크 / 상처입은 신앙 227-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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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동에서 뵌 눈에 익은 성모자상.
여전히 흔들리고 갈등하면서도
신앙을 선택하는 고마운 분들을 만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봄을 마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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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봄
나도 봄
함께 꽃이 되는 봄
어울려 향기 내는 봄
- 봄 / 윤보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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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