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형과는 그리 친밀하게 지내지 않았다.
자주 만나지도 못했다.
그는 '목회자'였고 나는 평범한 '근로자'였다.
그를 싫어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오히려 좋아했다.
그러나 우리는 가는 길이 달랐고 활동하는 영역도 판이했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그의 소명과 미션에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었다.
긴 인생길을 가면서 나는 그의 확고한 철학과 그만의 가치관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십수 년 전에 그는 가족들을 데리고 네팔로 갔다.
네팔 중에서도 가장 후미진 오지로 갔다.
'다일 선교회' 소속으로 떠났던 '1차 파송'이었다.
만년설을 머리에 이고 있는 '히말라야'의 고봉들이 작은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척박한 땅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곳에서 온갖 신산을 이겨내며 수년 간 전도와 봉사에 전념했다.
그리고 그곳 아이들의 교육과 복지를 위해 최선을 다해 헌신했다.
교회를 세웠고 학교도 세웠다.
아이들의 건강과 미래 비전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도입했고 그런 노력과 시도들이 시스템으로 영속할 수 있도록 단단한 토대를 구축했다.
빛나는 성과들이 향기로운 결실로 나타났다.
그렇게 4-5년을 보낸 뒤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네팔에서, 그의 땀과 헌신으로 목표했던 바를 어느 정도 달성했다는 것이 '다일 선교회' 본부의 판단이었다.
한국에서도 그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복귀 요청이 이어졌다.
한국에 돌아온 뒤 C형은 '다일 복지재단'의 사무총장으로서 다시 분주한 일상을 보냈다.
나는 그의 연락을 받고 가평군 설악면에 있는 '다일 공동체'의 농장에도 갔었다.
그곳에서 수확한 각종 농산물과 가공식품들을 판매하는 행사가 있었다.
그 수익금은 '소외계층'과 '해외 선교사업'의 종잣돈이 될 터였다.
그곳에서 '최일도 목사님'도 오랜만에 다시 만났다.
나도 제법 많은 양을 구입했고 내가 섬기는 각 공동체에 고르게 배분해 전달했다.
불우한 어르신들을 위한 무료급식소, '밥퍼'를 비롯해 '다일 천사병원', '다일 복지재단과 선교회' 등등 그의 손길과 기도를 필요로 하는 곳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한국에서도 그는 바쁜 세월을 살았다.
열심히 살았다.
그렇게 십여 년을 보낸 뒤에 다시 금년 가을에 네팔로 가기 위해 ' 2차 파송'을 자원했다.
그가 없는 사이에 네팔의 시스템과 조직들이 상당 부분 무너져 내린 탓이었다.
영화 '대부'에서도 그랬다.
'돈 비토 꼴레오네'와 아들 '마이클 꼴레오네'가 세상을 떠난 뒤에 그의 가문이 오래 가지 못했던 것처럼 네팔 오지에서의 영적, 정신적 리더였던 C형의 부재는 곧 견고했던 성의 무너짐과 황폐화를 의미했다.
세상의 이치는 늘 그랬다.
리더가 장기 출타하거나 사라지면 조직은 서서히 지리멸렬로 이어졌다.
삼국지도 그랬고, 십중팔구 왕조들의 몰락도 비슷했다.
C형은 곧 60대 중반이 된다.
'파송'이란 단어를 입에 담기엔 그는 너무 '고령'이었다.
그러나 세상의 기준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만의 굳건한 소명이 여전히 뜨겁게 숨 쉬고 있는 한 그는 자신의 미션을 향해 정진할 수 있기를 일생 동안 간구했다.
그랬기에 좌고우면할 것도 없이 과감하게 출사표를 던질 수 있었다.
뜨거운 '영혼의 인도'가 아니라면 결코 떠날 수 없는 길이었다.
그럴 나이도 아니었다.
'파송'과 '고령'이란 낱말은 애시당초 양립할 수 없는 단어였다.
무척이나 거칠고 곤고하며 시시때때로 아픔과 눈물이 골수에 파고드는 척박한 길이기 때문이었다.
지난 주 월요일 점심 때 청량리 '다일 문화재단' 사무실 옆 어느 식당에서 C형을 만났다.
곧 출국하는 걸 알았기에 보자고 했다.
각설하고 무조건 만나자고 했다.
출국하기 전에 오붓하게 둘이서 밥이라고 한 끼 먹고 싶었다.
일식당의 조용한 룸을 선택했다.
식사를 하면서 둘만의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기엔 그곳이 최적이었다.
C형은 17-8년 전에 심장 '관상동맥'이 막혀 큰 변을 당할 뻔했었다.
그의 아버지도 그 질환으로 집에서 주무시다가 하늘나라로 가셨다.
가족 내력이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일찍 발견해 동맥 이식수술을 받았고 가까스로 건강을 회복했다.
금년 봄에 그 부위에 다시 탈이 났다.
설상가상이었다.
과거에 이식했던 동맥이 다시 막혀 긴급하게 스탠스 시술로 위기를 모면했다.
건강검진 덕이었다.
종합적으로 판단했을 때, C형은 나이도 그렇고 건강도 그렇고 '2차 파송'을 갈 수 없는 형편이었다.
아니, 가면 안되는 상황이었다.
형이 나즈막하게 내게 얘기했다.
"내 상황은 내가 제일 잘 알지.
내 가족들도, 이 나이에 어째서 그렇게 힘든 곳에 또 가려 하느냐고 핀잔을 많이 해.
특히 지금 중학생인 늦둥이 아들이 제일 심하지.
하지만 죽고 사는 건 하나님의 영역이라고 믿는다.
모든 걸 주님께 맡기고 감사기도를 하면서 떠나려 한다.
설령 '관상동맥'에 문제가 생겨 낙후된 그쪽 의료수준으로는 적절한 응급대응을 못한다 하더라도 절대로 누굴 탓허거나 환경을 원망하지 않고 모든 걸 주님께 의탁한 채로 내게 부여된 소명의 완수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다"고 했다.
역시 형다운 얘기였고 형다운 '생사관'이었다.
심플했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내가 그래서 청량리에 왔어요, 형.
그게 바로 형이지요.
고딩 때부터 형은 그랬고, 그런 형을 존경하고 사랑했으니까요.
우리가 걷는 길이 달라 자주 만나지도 못했고, 친밀한 교제를 나누지도 못했지만 형의 인생 미션을 잘 알고 있어요.
그런 형을 보면서 나도 흔들림 없이 나의 길을 가기 위해 새벽마다 같은 마음으로 33년 이상을 기도했으니까요.
내가 네팔에서 함께 사역할 수는 없지만 늘 깨어서 기도할게요.
서로의 그릇이 크든 작든, 각자가 섬기는 영역에서 '나눔과 헌신'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네요.
나도, 형도 이미 육십을 넘겼는데 '삶 너머의 인생'과 '죽음 너머의 영혼'이 뭐 그리 대단하겠어요?
살 만큼 산 지금, 우리에게 '생과 사'가 그리 큰 문제는 아니잖아요.
인생 2막은 각자의 고유한 소명을 위해 홀로 뚜벅뚜벅 가야만 하고, 또한 갈 수밖에 없는 길이니까요.
평생을 그렇게 서원했다면 그런 길로 담대하게 나떠나야겠지요.
그런 형을 사랑합니다"
서로 바쁜 시간이었지만 두 시간 넘게 진지하게 소통하고 공감했다.
헤어지기 전에 마음을 담아 서로의 손을 맞잡고 기도했다.
그리고 식당 밖에서 뜨겁게 포옹했고 같이 셀카도 찍었다.
나보다 키가 큰 형은 팔도 길었다.
그래서 셀카도 용이하게 잘 찍었고 사진도 해맑게 잘 나왔다.
지금까지 열심히 뛰고 달리다 보니 나도 어느새 '이순'이 되었다.
'유유상종'이란 말이 있다.
나도 나이를 먹고 보니 이 말이 참 명제처럼 느껴진다.
'친소'를 얘기하는 게 아니다.
친밀함과 소원함이 아니라 인생 사명과 삶의 뒷모습을 얘기하는 것이다.
자주 만나서 커피를 마시고 수다를 떠는 것도 좋지만 그런 부류의 얘기가 아니다.
비슷한 곳을 바라보고 비슷한 미션에 헌신하며 일생 동안 묵묵하게 정진하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내 주변엔 그런 기인이나 괴짜들이 참 많다.
그들과의 '친소'는 그리 중요치 않다.
서로 배우고 영향을 주고 받으며 분야는 달라도 이 세상에 향기로운 벽돌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쌓고 떠날 수 있기를 기도하는 이들이 많다.
그런 기도와 그런 노력이 바로 인생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유유상종'이라고 표현했다.
그제, 형은 떠났다.
멀고 험한 길로 떠났다.
혼자서 갔다.
반 년쯤 후에 형수님이 합류하면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같을 것이라 믿는다.
편안함을 구치 말고, 이익을 구치 말며 나눔과 헌신에 진력하자 약속했다.
언제 어느 곳에 있든지 C형의 건승과 평안을 위해 기도하려 한다.
과거에도 형을 위해 기도했지만, 알 수 없는 내일의 '인도하심'과 그의 '평강'을 위해 더 진지하게 기도하고 싶다.
유달리 지진이 잦은 지역이라 과거에 세웠던 건물들이 많이 무너졌다고 했다.
그의 앞길에 할 일이 무척 많을 것이다.
땀과 눈물과 소망으로 다시 벽돌 하나 하나를 쌓고 쌓아, 그곳의 여러 공동체들이 견고하게 바로 설 수 있기를 진심으로 간구하고 있다.
형과 미팅을 마치고 전철로 귀사하는 길에 나는 줄곧 가스펠 한 곡을 흥얼거렸다.
마음 속 간절한 기도였다.
그 곡은 '파송의 노래'였다.
너의 가는 길에 주의 평강 있으리
평강의 왕 함께 가시니
너의 걸음걸음 주 인도하시리
주의 강한 손 널 이끄시리
너의 가는 길에 주의 축복 있으리
영광의 주 함께 가시니
네가 밟는 모든 땅 주님 다스리리
너는 주의 길 예비케 되리
주님 나라 위하여 길 떠나는 나의 형제여
주께서 가라시니 너는 가라 주의 이름으로
거칠은 광야위에 꽃은 피어나고
세상은 네 안에서 주님의 영광 보리라
강하고 담대 하라 세상 이기신 주 늘 함께
너와 동행하시며 네게 새 힘 늘 주시리
결심한 것을 행동으로 옮기자.
인생은 '앎'이 아니라 '행'이기 때문이다.
알고도 행치 않으면 모르는 것이며 이미 죽은 삶에 다르지 않다.
내가 큐티 시간에 늘 묵상하는 내용이지만, 상황과 환경에 기대지 말고 각자의 각근한 정신과 맑은 영혼을 중심에 두고 살자.
그리하면 어떤 비바람에도 각자의 삶이 풍화되지 않을 것이라 굳게 믿는다.
사랑하는 형에게 다시 한번 감사와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부디 건승하시길.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