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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 제도의 회복을 위한 열심
느 13:28-31
28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 요야다의 아들 하나가 호론 사람 산발랏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내가 쫓아내어 나를 떠나게 하였느니라
29 내 하나님이여 그들이 제사장의 직분을 더럽히고 제사장의 직분과 레위 사람에 대한 언약을 어겼사오니 그들을 기억하옵소서
30 내가 이와 같이 그들에게 이방 사람을 떠나게 하여 그들을 깨끗하게 하고 또 제사장과 레위 사람의 반열을 세워 각각 자기의 일을 맡게 하고
31 또 정한 기한에 나무와 처음 익은 것을 드리게 하였사오니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
느 13:28-31 / 그런데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 요야다의 아들 중에 유다 민족의 원수인 호론 사람 산발랏의 딸과 결혼한 이가 있었다. 그래서 내가 엘리아십의 가문 전체를 추방시켰다. 29) 이때에 나는 이렇게 기도하였다. `나의 하나님, 제사장의 직분을 더럽히고 주께서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과 맺으신 언약도 짓밟아 버린 이런 고위층 종교인들의 죄악을 잊지 마소서!' 30) [결론] 나는 이렇게 이방의 모든 더러운 풍습에서 우리 민족을 깨끗이 씻어 놓았다. 나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을 다시 세워 성전의 임무를 수행하게 하고, 각자에게 임무를 정해 주었다. 31) 나는 또 백성에게 때를 정해 주어 제물을 바칠 때에 쓸 장작도 바치게 하고 모든 과일의 첫 열매도 바치게 하였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기도하였다. `나의 하나님, 내가 한 모든 일을 기억해 주시고 나에게 좋은 것으로 갚아주소서!'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 가운데 한 명은 율법을 무시하고 느헤미야의 적대자였던 산발랏의 딸과 결혼하였습니다.
제사장을 추방하다(28-29) 대제사장 엘리아십은 대제사장으로서 백성의 모범이 되지 못했고 느헤미야의 개혁에 방해가 되었습니다. 자녀를 잘못 양육했던 엘리를 연상시킵니다(삼상 2:12). 엘리아십은 대제사장으로서 유다 공동체를 복원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할 막중한 사명과 책임을 진 자였지만 자녀 문제로 이스라엘 총회에서 축출되고 말았습니다. 대제사장으로서 손자를 이방인과 결혼하게 한 것은 용납될 수 없는 비율법적인 행위였습니다(레 21:13-15). 느헤미야는 제사장 직분을 모독하고 레위인과 제사장의 계약을 어긴 성직자들의 비행을 하나님이 기억해 줄 것을 기도합니다. 죄를 범한 죄인들을 잊지 않고 벌하여 줄 것을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외부적으로는 적대자들의 조롱, 모함, 협박에 시달렸고 내부적으로는 지도자들과 백성의 안일한 신앙과 불의를 개혁해 가야만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 버거운 일을 잘 해결해 갑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따라 사는 지도자였고 기도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반열을 세워 일을 맡게 하다(30-31)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했고 사회, 정치, 경제적인 개혁을 하여 유다 공동체가 새롭게 태어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느헤미야는 마지막까지 성전 제사 제도의 회복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신앙의 갱신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다시 새로워지도록 한 것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각기 순서를 따라 의무를 감당하도록 했습니다. “정한 기한에 나무”는 번제에 필요한 나무를 말하며, “처음 익은 것”은 성소를 위해 바쳐야 할 제물에 있어 대표적인 헌물입니다(10:34-35). 느헤미야는 성전을 정화하고, 제사장과 레위인이 직무를 담당하는 데 불편함이 없게 하였습니다. 느헤미야서는 느헤미야의 짧은 기도로 끝을 맺습니다. “복을 주옵소서”라는 기도는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라는 뜻입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행했던 일들에 대해 자신이 상급을 받게 될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적용: 하나님은 말씀을 따라 충성스럽게 사는 사람을 인정하시고 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성공입니다. 당신에게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그 말씀을 성실히 따르는 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십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에 할 수 있었던 일에 감사하십니까?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자기 생각과 다른 사람을 적으로 여기고 배신으로 여기는 사례를 많이 보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각각 다른 은사를 주시고 다른 사명을 주셨는데 나와 다르다고 해서 너무도 쉽게 배격하고 정죄하고 비판합니다. 그러면서도 전혀 죄책감을 갖지 않습니다. 나와 다르다고 틀린 것은 아닙니다. 우리 몸에 여러 지체가 있어 각자 자기 역할을 하여 온전한 한 몸을 이루듯이 우리 교회 안에서도 손의 역할, 발의 역할, 눈의 역할, 귀의 역할 등 다양한 은사와 사명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한 몸인 교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 설 교 >
나를 기억하소서
느 13:28-31 / 이진수목사
오늘 본문의 말씀은 8월 말부터 약 3개월간 나누어 왔던 느헤미야서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무너져 버린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 페르시아 왕궁에서 예루살렘으로 내려와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에 머물며 그 백성들과 함께 수많은 방해와 공격에도 불구하고 성벽을 재건한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 그리고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와 태도를 배우고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것은 52일 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벽 재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에 무너진 신앙의 성벽을 쌓는 일입니다. 예루살렘 성벽보다 훨씬 더 쌓기가 어렵고 더 나아가 그 성벽이 다시 무너지지 않도록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느헤미야서의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잠언 4:23절의 말씀과 같이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의 말씀이 더욱 다가옵니다.
마지막 13장의 말씀은 그토록 어렵게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였고 죄로 인해 영적으로 무너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죄를 깨닫고 회개하며 이제는 하나님의 율법과 뜻대로 순종하며 살겠다고 서약하고 결단했습니다. 예루살렘 성 안에 섞여 사는 암몬과 모압 족속들, 그리고 성전 안에 있던 도비야와 그의 세간을 내 쫓고 내 던졌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며 십일조를 성전에 드려 레위인들이 전적으로 성전의 예배와 제사의 직무를 감당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페르시아로 귀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지키기로 한 그 서약들을 모두 범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으로 다시 돌아온 느헤미야는 다시 개혁을 시작합니다. 그들을 말씀으로 다시 엄하게 책망하여 다시 돌이키게 했습니다. 28절에 마지막으로 제사장이었던 엘리아십의 손자가 산발랏의 딸을 아내로 받아 들인 것을 알고 내 쫓아버리는 일로 13장의 무너진 신앙을 다시 바로 잡는 것으로 마감하게 됩니다.
그 모든 일을 한 후에 느헤미야는 기도함으로 느헤미야서가 끝이 납니다. 우리가 함께 살펴 보았지만 느헤미야 1장도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과 불탄 성문, 그리고 그 안에서 고생하고 있는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고 슬퍼하며 하나님께 간구하는 느헤미야의 기도로 시작됩니다.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마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저와 성도님들의 모습이 되기를 원합니다. 기도함으로 시작하고 기도로 마치는 하루, 한해, 그리고 우리의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진정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세상의 유혹을 물리치고 말씀대로 끝까지 충성하며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성벽을 재건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다시 돌이키고 세우는 그 일을 마친 후에 하나님께 기도한 느헤미야의 기도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31절 “나의 하나님, 나를 기억하여 주시고, 복을 내려 주십시오” 어떻게 보면 느헤미야의 기도가 조금은 일차적인 기도처럼 느껴집니다. 더 멋진 나라와 국가의 부흥을 위해, 혹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더 이상 무너지지 않도록 중보하는 기도를 하면 더 좋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왜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자신을 기억하고 복을 내려 달라고 기도했을까요? 사실 느헤미야가 감당했던 일들이 그만큼 쉽지 않았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편한 왕궁과 높은 자리에서 내려와 폐허된 예루살렘 성으로 와서 암살의 위험과 대적들의 끊임없는 방해와 공격 속에 성벽을 쌓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너진 신앙을 세우기 위해서 애쓰고, 쉽지 않은 내부를 개혁했습니다. 성벽을 완성하고 신앙도 세웠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돌아와 보니 또 다시 무너져 있는 영적 신앙을 보고 또 다시 영적 성벽을 세우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물론 하나님께서 자신이 수고하고 애썼던 것을 아시고 도우시고 지키심을 알았겠지만 그동안의 수고와 애씀이 있었기에 자녀가 부모에게 하듯이 “하나님, 저 그동안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대로 힘들고 어려웠지만 성벽 재건과 영적 회복을 끝까지 감당했습니다. 아시죠?”라고 마음을 쏟아놓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느헤미야 13장에는 사실 3번이나 나를 기억하시고 축복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14절 “하나님, 내가 한 일을 기억하여 주십시오. 하나님의 성전을 보살핀 일과,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정성껏 한 이 일을 잊지 마십시오”22절에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수 있도록 레위 사람들을 세운 후에 한 기도가 “나의 하나님, 내가 한 이 일도 기억하여 주십시오. 그지없이 크신 주님의 사랑으로 나를 너그러이 보아주십시오”입니다. 그리고 31절에 사람들에게 때를 정하여 주어서, 제단에서 쓸 장작과 처음 거둔 소산을 바치게 하 “나의 하나님, 나를 기억하여 주시고, 복을 내려 주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말씀대로 살기 위해 애쓰는 것이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우리가 주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 제가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믿음으로 순종하기 위해 이렇게 애썼습니다. 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이렇게 섬겼습니다. 내가 하늘의 상을 바라며 이 땅에서 이렇게 희생했습니다. 이 일을 기억하시고 축복하소서”라고 하는 부끄럽지 않은 빛난 면류관을 받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죄의 사슬을 끊어야 합니다
느 13:28-31
❚죄의 전염성
여러분, 설 연휴 잘 보내셨습니까? 먼 길 다녀오신 분들도 잘 다녀오셨지요? 가족들도 잘 만나셨고요? 이렇게 좋은 명절 보내고 다시 여러분을 뵙게 되니 더 반갑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기분 좋게 설 연휴를 보내는 사이 세상에는 아주 충격적인 소식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군포 여대생 실종사건 범인을 잡은 뉴스 여러분 보셨지요? 그런데 범인을 잡고 보니 희대의 살인마였습니다. 강 모라는 이 범인이 전처를 포함해 이미 일곱 명이나 여성들을 살해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또 앞으로 조사 결과에 따라 도대체 몇 명을 더 죽였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이 사건을 보면서 도대체 어떻게 이런 무서운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그것도 2003년부터 20명을 연쇄 살인한 유영철 사건 이후 이런 연쇄살인이 잇달아 일어나는 것을 보며 정말 두려울 뿐입니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잔인하고 악독해질 수 있을까요.
그런데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이번 사건의 범인이 유영철이나 그 이전의 범인들과 달리 가난하거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소외 되어서 이 사회를 증오해서 범행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너무 멀쩡하게 잘생기고 고등학생 중학생 두 아들도 두고 직장도 버젓하게 다니며 너무나 멀쩡하게 살던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웃 사람들이나 같은 직장 동료들은 너무 잘 생기고 친절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고 증언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살인을 저지르고도 아무 죄의식이 없다고 합니다. 태연하게 범행을 재연하면서 그 흔한 “잘못했다,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도 안 하고 도리어 죄를 추궁하는 경찰들에게 “증거 있으면 가져와 보라”고 큰소리를 쳤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까지 됩니까? 이것이 바로 죄의 무서운 힘입니다. 죄가 사람을 이렇게 만듭니다. 죄가 사람을 변하게 하고 죄가 사람의 양심도, 최소한의 인간성도 다 앗아가서 인간을 금수만도 못한 존재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마 이런 연쇄살인범들도 처음에 살인을 할 때는 아마 무척 긴장도 하고 죄책감도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계속 사람을 죽이고 죄를 지으면서 아무 감각도 없고 죄책감도 사라집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이고 죄를 짓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죄의 무서운 힘이요 죄의 무서운 전염성입니다. 보세요. 앞으로 이런 일이 점점 더 많아질 겁니다.
한 개인이 죄를 처음 짓기 시작하면 어느새 그 죄에 사로잡히는 것처럼 이 사회도 마찬가지로 이런 무서운 죄가 꿈틀거리기 시작하면 어느새 온 사회가 죄악으로 만연하고 한 두 사람쯤 죽어도 사람들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시대가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아니, 이미 그런 사회가 되었습니다. 최소 대여섯 명 이상은 죽어야 사건이 되고 웬만한 죄에는 사람들이 꿈쩍도 안 하고 충격도 안 받는 그런 시대, 죄를 당연시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죄의 전염성입니다. 정말 무섭습니다.
그래서 이런 죄는 단호하게 끊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안 끊으면, 버리지 못하고 살다보면 어느새 그 죄에 나 자신이 사로잡히게 되고, 내 가정이 전염되고, 나아가 온 사회가 온 나라가 죄의 사슬에 얽매는 일이 벌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죄가 처음 시작될 때, 전염병이 시작될 때 단호하게 끊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살고 가정과 나라가 삽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느헤미야 13장 말씀이 바로 이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본문이 워낙 길어서 다 읽지 못하고 맨 뒤에 몇 절만 읽었습니다만 오늘 말씀을 이해하려면 13장 전체를 다 보아야 합니다. 느헤미야 13장은 느헤미야서의 맨 마지막 장으로 결론이 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이 결론 부분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기 위해 취한 세 가지 개혁조치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개혁조치들을 통해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로소 하나님의 백성답게, 여호와의 거룩한 성민답게 변화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느헤미야 13장에 나오는 말씀은 첫째로, 느헤미야서의 결론이 되는 동시에 느헤미야와 에스라가 주도한 개혁의 최종적인 단계를 기록하고 있기에 중요한 말씀이 되며, 둘째로 오늘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해야 무엇을 해야 하나님의 백성답게,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는 아주 중요한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이 시간 느헤미야 13장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이방인과의 관계를 끊어라!
느헤미야가 주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한 개혁은 첫째,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들어와 섞여 살고 있는 이방사람들을 쫓아내는 일이었습니다. 본문 13장 1절을 보십시오. 모세의 율법책을 백성들에게 읽어주는데 율법에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왜 하필 암몬과 모압 백성은 영원히 하나님의 총회, 즉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에 들어올 수 없는가? 다른 이방인은 하나님을 믿겠다고 고백하고 개종하면 받아주는데 왜 암몬과 모압만 안 되는가?
그 까닭이 2절에 나옵니다. 암몬과 모압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을 양식과 물로 영접하지 않고 도리어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저주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민수기 22장에 나온 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평지에 진을 쳤는데 이때 모압의 왕이었던 발락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히 많은 것을 보고 몹시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잘못하다가는 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를 멸망시킬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절에 나온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을 양식과 물로 대접하고 고이 보냈다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텐데 어떻게 하면 저들을 멸망시킬까 궁리하다가 선지자인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합니다. 그래서 이때부터 모압과 암몬 백성은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 완전히 ‘찍힌’ 것이고 다른 민족은 몰라도 모압과 암몬 족속만은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다, 이렇게 정해진 것입니다.
이런 내용이 신명기 23장 3~4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느헤미야 때 바로 이 신명기를 읽다보니 “어? 모세의 율법책에 모압과 암몬은 영원히 우리 공동체에 들어올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네?” 하고 깨닫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가 뭐냐? 이 사실을 모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이미 상당수의 모압과 암몬 백성들이 들어와 섞여 살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큰일이지요. 이런 경우 많은 사람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기왕 이렇게 된 거 어쩌냐? 그냥 살자. 앞으로 잘 하면 되지” 이런 식입니다.
실제 우리가 이런 식으로 어물쩍 넘어갈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뭔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깨달았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할 수 없지 않냐? 다 지나간 일이고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냥 넘어가자, 다음부터 잘하면 되지 않냐 이거지요. 그런데 죄는 그게 아닙니다. 죄라는 것이 앞으로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미 저질러진 죄, 내가 알고 저질렀던 몰랐던 상관없이 이미 저지른 죄는 내 안에 마치 찌꺼기처럼 점점 쌓여갑니다.
그래서 우리 핏줄 속에 찌꺼기가 조금씩 쌓이다보면 언젠가 혈관을 꽉 막게 되는데 이것이 동맥경화요 그래서 혈압을 못 견디고 혈관이 터지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뇌출혈 아닙니까? 우리 생명을 빼앗아갈 수도 있는 무서운 질환입니다.
마찬가지로 이미 저질러진 죄들, 죄인 줄도 모르고 어느새 내 삶 깊숙이 들어와 자리 잡고 살고 있는 그 죄는 반드시 청산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어쩔 수 없고 앞으로 잘 해야지는 안 됩니다. 내 안에 들어와 섞여 살며 어느새 깊숙이 자리 잡은 그 죄가 언젠가 터집니다. 그것이 내 안에 잠재해 있다가 언젠가 큰 사고를 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나중에 깨달았더라도 반드시 그 문제를 해결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절대 어물쩍 넘어가지 않습니다. “이미 모압과 암몬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 들어와 섞여 살면서 우리 며느리도 되고 사위도 되었는데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 지금까지는 할 수 없고 앞으로 그렇게 안 하면 되지” 하는 식으로 대충 넘어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3절에 보면 백성들이 이 율법을 듣고 자신들 가운데 살고 있는 모압과 암몬 사람들을 다 쫓아냅니다. 다 쫓아낸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13장 23절부터 보면 이미 유다 사람들 가운데 아스돗과 암몬과 모압 여인을 아내로 맞아 살면서 자녀를 낳았는데 그 자녀들은 유다 말은 못 하고 자기 어미가 하는 말만 할 줄 아니 이런 한심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그만큼 자녀들에게는 아버지보다 직접 품에 안고 키우는 어머니의 영향이 더 중요한 법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그 이방 아내와 자녀들을 다 쫓아내게 합니다. 게다가 28절을 보니 이스라엘을 이끌어야 할 영적 지도자인 대제사장 엘리아십 가문조차 당시 실력자인 이방인 산발랏과 사돈을 맺고 있어서 느헤미야가 내쫓았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좀 너무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이방인이라지만 어떻게 결혼해서 살고 있는 아내와 내 자식까지 쫓아내라는 말입니까?
하지만 그래도 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그들의 혈통이 섞여 이스라엘의 혈통이 더럽혀지고 더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섬기는 우상이 이스라엘 전체를 타락시키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아프고 힘들더라도 쫓아내라는 것입니다. 눈물을 머금고라도 단호하게, 잔인해 보일만치 뿌리치고 끊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여호와의 거룩한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공동체 개혁의 첫 번째 단계입니다.
❚둘째, 도비야를 쫓아내라!
두 번째 개혁조치도 첫 번째 조치와 연결됩니다. 느헤미야가 알아보니 참으로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여러 방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님께 드릴 거룩한 성물을 보관하는 큰 방 하나에 도비야라는 자가 사사로이 들어와 차지하고 앉아 있는 것입니다. 도비야는 당시 막강한 실력자였습니다. 비록 암몬 사람으로 이방인이었지만 사마리아인 산발랏과 더불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간 사이 예루살렘과 인근 지역을 다스리면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그런 권력을 빼앗기게 될까봐 두려워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하는 것을 끝까지 방해하고 심지어 느헤미야를 죽이려고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4절에 보면 그런 도비야가 대제사장 엘리아십과 친분관계를 맺고 성전의 큰 방 하나를 차지하고 자기 개인 창고로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지요. 그러나 이 일에 대해 그 누구도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도비야 자신이 막강한 권력자인데다가 대제사장의 비호까지 받고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 안에 이렇게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고 권력의 힘을 빌어 죄를, 잘못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며 사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을 끊지 못하면 그 나라는 망합니다.
우리나라도 달라지려면 이런 일부터 끊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은 못했지만 총독 느헤미야가 그 방 안에 있던 도비야의 세간을 밖으로 다 내던지게 합니다. 그리고 그 더렵혀진 방을 정결하게 하고 본디 있던 하나님의 성물들을 그 방안에 들여놓습니다. 아무리 권력가라도, 아무리 힘이 있어도, 아무리 누구누구와 친하고 비호를 받더라도 죄는 죄입니다. 똥은 똥일 뿐입니다. 아무리 임금님이 보신 것이라 해도 똥은 똥일 뿐입니다. 왜 갑자기 더럽게 똥 얘기냐고요? 더러운 것은 더러운 것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더러운 것은 누가 뭐래도 더러운 것이기에 가져다 버려야 집안이 깨끗해집니다. 냄새가 안 납니다.
죄가 이런 것입니다. 그 죄를 짓는 사람, 더러운 행동을 하는 사람이 누구든 아무 상관없습니다. 죄 짓는 사람이 나 자신일 때 너무 관대하거나 죄 짓는 사람이 나와 가깝다고 해서 관대하고, 가족이라고 해서 봐주고, 힘 있는 사람, 권력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관대하다면 우리는 결코 바른 길로 갈 수 없습니다. 끊어야 합니다.
우리 몸은 성령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인데 도비야가 성전의 큰 방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있는 것처럼 죄와 더러운 습관이 내 삶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앉아있게 해서는 안 됩니다. 도비야가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그 자체도 부끄러운 일이지만 언젠가 나를 다 지배하려고 들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더러운 세간을 들어내 던져버려야 합니다. 성전에서 쫓아내야 합니다. 내 몸에서 쫓아버리고 나를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 몸이, 내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성전이 될 것입니다.
❚셋째, 생계 우선주의를 끊어라!
느헤미야가 시행한 마지막 세 번째 개혁조치는 생계 우선주의를 끊은 것입니다. 본문 10절부터 보면 레위 사람들이 받을 몫을 못 받아서 레위 사람과 성전에서 노래하는 사람들이 전부 성전에 있지 않고 자기 밭으로 도망가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레위 사람은 십일조를 가지고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데 당시 백성들이 자기 먹고 살기 힘들다고 십일조를 안 바치니 굶어죽게 생긴 것입니다.
둘 다 잘못입니다. 생계에 쪼들린다고 해서 마땅히 드려야 할 십일조를 떼어먹은 백성들도 문제요, 먹고 살기 어렵다고 해서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사명을 저버리고 자기 밭으로 도망한 레위인도 문제인 것입니다. 두 쪽 다 ‘생계 우선주의’의 함정에 빠져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에 불순종한 죄를 지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15절부터 보면 어떤 유다 사람이 안식일에 술틀을 밟고 곡식단을 나귀에 싣고 예루살렘에 들어와 팔았습니다. 어떤 두로 사람도 예루살렘에서 물고기와 각종 물건들을 팔다가 발각되었습니다. 다시는 안식일을 범하는 일이 없도록 꾸짖고 내쫓고 나서야 거룩한 안식일을 제대로 지킬 수 있게 됩니다. 이것도 바로 ‘생계 우선주의’입니다.
이제 생계 우선주의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실 것입니다. 생계, 즉 먹고 사는 것이 최우선이 되어 다른 일은 그 다음 순위로 미루는 일입니다. 다른 것이야 뒤로 미룬다고 해서 문제가 되겠습니까만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것, 지켜야 할 일조차도 생계에 우선순위가 밀려난다면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태도를 “문제가 있다” 정도로 말하지 않고 ‘죄’라고 말씀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순위가 생계나 인간적인 것들에 밀려나는 현상이 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일들을 통틀어 제가 만든 말이 ‘생계 우선주의’입니다. 우리 주변이 이런 일이 참 많습니다. 직장 때문에, 사업 때문에, 장사 때문에 하나님의 일이 뒤로 밀리는 일 말입니다. 가족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에 일어나는 일도 포함됩니다. 십일조는 당연히 하나님께 드려야 할 몫인데 내 생계 우선순위에 밀린다고 한다면, 그래서 느헤미야 당시처럼 레위 사람들이 굶는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죄입니다. 레위 사람들도 이 점에서는 책임을 면키 어렵습니다.
어디 십일조나 헌금뿐이겠습니까? 물질이든 시간이든 관심이든 그 무엇이든 하나님 우선주의로 드리지 못하고 내 생계나 형편에 밀려 두 번째 세 번째 순위라 된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일이 생계에 밀렸습니다. 생계나 가족관계, 인간관계를 핑계로 주일성수를 범한다면 마찬가지 죄입니다. 안식일이나 주일성수뿐 아니라 우리가 삶의 모든 면에서 하나님을 내 일보다 뒤로 미룬다면 큰일입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했는데 그 뜻은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여기지 않고 내 생계나 내 일을 먼저 두는 일을 하나님이 정말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죽이거나 도적질, 간음하는 일은 죄로 여기지만 이런 우선순위의 문제는 죄로 여기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오히려 살인, 간음, 도적질보다 이 ‘우선순위’ 문제를 더 심각하게 봅니다. 그만큼 생계 우선주의, 나 우선주의는 무서운 범죄이며 하나님 우선주의, 하나님의 제일주의, 하나님 중심주의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문제를 극복하고 하나님 우선주의로 간 것처럼 오늘 우리도 이 ‘생계 우선주의’의 유혹을 극복하고 언제나 어떤 경우에나 하나님 우선주의로 가야지만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죄악의 사슬을 끊어라!
의학자들은 이미 지구상에서 사라진 질병이라고 보고는 있지만 페스트(pest)라는 아주 무서운 전염병이 있습니다. 이 병에 걸리면 사람이 시커멓게 변하면서 죽는다고 해서 흑사병(黑死病, plague)이라고도 부릅니다. 페스트는 쥐에 기생하는 벼룩에 의해 전염됩니다. 그런데 그 전염성이 너무나 무서워서 한번 페스트가 발병되면 순식간에 그 지역 전체가 감염되고 24시간 내에 다 죽고 맙니다.
1347년에서 1351년에 이르는 네 해 동안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면서 전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죽는 바람에 중세봉건제도가 무너졌다고 할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 병균이 발견되지 않습니다만 지금 같으면 이 병이 생겨도 별 문제가 안 될 것입니다. 살균만 잘 하면 전염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쥐벼룩 때문에 이 병이 생기지만 그 다음에는 이 병에 걸린 사람이 마신 물, 먹던 음식, 입던 의복에 의해 전염이 됩니다. 무엇보다도 이 병에 걸려 죽은 시체 때문에 가장 많이 점염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저 하늘이 내린 재앙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살균 같은 것은 꿈에도 생각 못한 것이지요. 가족이 이 병에 걸리면 격리를 시켜 치료해야 하는데 어떻게 가족끼리 그럴 수 있냐며 한 집안에 두었기 때문에 순식간에 온 가족이 다 전염이 되고 그러다가 죽은 시체는 불로 태워야 하는데도 그렇게 하지 못해서 이 병이 온 가족을 다 죽이고 유럽 인구 1/3을 죽이고 난 후에야 사람들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죄가 이와 같습니다. 전염성이 정말 무섭고 빠릅니다. 그리고 반드시 사람을 죽입니다. 그것도 영원히 죽입니다. 지금까지 늘 해오던 일이니까 하고 대충 넘어가면 곧 그 죄가 전염되어 나 자신을 지배해서 죄의 자녀가 되고 맙니다. 가족이니까 하고 대충 넘어가면 죄가 곧 온 가족에게로 전염되어 가정을 파괴하고 사회 전체를 죽이고 맙니다. 그래서 끊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관습적으로 해오던 일이라도, 아무렇지도 않게 해온 습관이라도 끊어야 합니다. 가족이라도,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전염병에 걸린 시신은 태워야하듯 그렇게 끊어야 합니다.
죄를 당연시 하는 그 순간부터 죄는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죄를 대충 넘어가는 순간부터 죄는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죄를 끊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는 사이에 순식간에 전염되고 맙니다. 그래서 빨리 쫓아내고 복음성가 가사처럼 성령의 불로 태워버려야 합니다. 이 죄의 사슬을 못 끊으면 나는 평생 그 사슬에 매어 살아야 합니다. 내 가정은 대를 이어가며 어둠의 자식으로 살게 됩니다. 급기야 나라와 민족까지 타락시키고 죄가 지배하는 세상이 되고 맙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 해온 관습이라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요 버릴 것은 버려야 합니다. 잘못된 구습은 고쳐야 마땅합니다. 많은 교회가 신앙적이지도 않고 합리적이지도 않은 일들을 지금까지 해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고집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인 줄 분명히 알면서도 느헤미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인간적인 정을 핑계로, 습관을 핑계로, 또 내 생계를 핑계로 대며 지금도 버젓이 행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는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절대 그 안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성벽을 잘 재건해도, 아무리 멋진 성전을 지어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끊었습니다.
아무리 피를 나눈 가족이고 혈육이라도 내쫓습니다. 아무리 먹고 사는 것이 중요하지만 잘못된 관습,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일들은 다 끊고 지킬 것은 지켰습니다. 막강한 실력자 도비야도 몰아냅니다. 이 모든 조치가 다 죄를 내쫓고 잘못된 관습을 끊은 것입니다. 이렇게 아무리 어려워도 끊을 것을 제대로 끊어야 그리스도인답게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내가 변하기를 원한다면, 정말 우리 교회가 변하기를 원한다면 죄의 사슬, 잘못된 관습의 사슬을 끊어야 합니다. 그리고 두 주 전에 나눈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서 갱신되고 새로워져야 합니다. 말씀이 역사하고 그 안에 새로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그런 교회,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 거기에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해주셔야 합니다. 말씀이 역사해야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새롭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진정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롭게 되고 거듭나는 성도 여러분과 가정과 교회와 이 민족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당신의 사명을 회복하라!
느 13:28-31
어떤 아주머니가 오랜 노력 끝에 운전면허를 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큰 마음 먹고 중고차를 뽑아 차의 뒷면에 ‘초보운전’이라고 붙이고 다니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루는 차가 많은 골목에서 운전 미숙으로 시동이 꺼지고 말았습니다. 갑자기 꺼진 시동으로 당황해하고 있는데, 뒤 따라 오던 남자 운전수가 열을 받았던지 “야, 집에 가서 밥이나 해!”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아주머니는 굉장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운전을 안 한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주 급한 일이 생겼습니다. 다시는 자동차를 운전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아주 급한 상황이라서 결국 차를 몰고 나갔습니다. 이 아주머니의 차 뒤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 밥하러 가는 중임”
여러분, 생각이 나를 바꿉니다. 자신을 좁은 생각의 틀 속에 가두어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보다 적극적인 생각으로 당신 앞에 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생각에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생각으로 자유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느헤미야 선지자가 하나님 앞에 드린 기도입니다.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 여러분, 여러분은 살아오면서 이런 절박한 삶의 기도를 드려본 적이 있었습니까?
“나의 하나님!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시옵소서” 느헤미야 선지자가 드렸던 이 기도가 여러분의 삶에도 그대로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즐겁고 의욕적인 사람을 붙들고 일하십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다가 여러분의 영혼에 불이 붙어서 기쁨의 탄성이 터져나오기를 바랍니다. 인생에는 보이지 않는 손길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오늘 여기 온 여러분들은 모두가 다 보이지 않는 손길에 이끌려 인도함을 받아 왔습니다. 그 보이지 않는 손길은 바로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하신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시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내 자녀들을 기억하사 복을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몰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를 아십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미래의 소망이 끊어지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실, 성공이나 행복이라는 것도 소질보다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아무리 소질이 많고 재능이 좋아도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지 않으면 행복할 수도 없고, 성공할 수도 없습니다. 예배의 핵심, 신앙의 핵심은 다름 아닌 마음의 자세입니다. 자신을 너무 심하게 취급하지 마십시오. 기가 막히고 분하고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할지라도 자신을 학대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아끼던 재산의 일부가 도망갔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의지하던 사람이 배신을 하고 인간관계가 엉망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감당할 수 없는 어떤 한계 속에 짓눌렸다고 할지라도 절대로 여러분 자신을 심하게 취급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고 극복하리라!”는 이 마음만 있으면 다시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고 극복하리라!”는 이 믿음만 있으면 우리는 더 크고 위대한 일을 이루어 갈 수가 있습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기억하십오. 변화만이 살길입니다. 우리는 오늘 왜 이곳에 왔습니까? 변하러 온 겁니다. 변하면 살 길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정말로 변화만이 살길임을 믿으십니까?
어느 단체나 어느 조직을 보더라도 변화에 앞장을 서는 사람은 그 무리 가운데 10%입니다. 하나님은 놀랍게도 한 시대, 한 역사가 바뀔 때에 변화의 흐름을 감지하고 그 변화를 따라가는 10%의 사람들을 붙들고 새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어도, 아무리 성경을 달달 외워도, 아무리 기도를 잘해도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변화의 흐름을 감지하지 못하고, 10%의 무리 속에 들지 못하면 종교꾼이 되고 맙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이 종교꾼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찾아볼 수 없는 종교꾼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종교꾼들을 통해서는 아무 일도 못합니다. 이것이 지금 이 시대가 갖고 있는 아픔입니다. 의인 10명이 있으면 그 도성은 살아납니다. 의인 10명이 있으면 그 시대는 살아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지금 나는 통제 받기를 싫어하고 변화를 싫어한다고 하지만 지금 여러분이 앉은 자리에 불행하게도 물이 뚝뚝 떨어진다고 하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누가 이야기하지 않아도 바로 다른 자리로 옮겨가고 말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변화는 고난과 고통 가운데서는 스스로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고통 가운데 있을 때는 변화는 스스로 주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여러분, 내 인생에서 당하는 모든 고통이나 고난이라고 하는 것을 저주라든가 징벌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한 것들은 하나님이 더 나은 장래, 더 나은 앞날을 만들기 위해서 내게 주신 사랑의 채찍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표현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위대한 변화의 흐름에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내 생활의 방식이 어떠했든 과거 지향적인 본능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고 오늘 다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뒤엣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서 부르는 부름의 상을 향해서 깨어 버리십시오. 변화를 거부하는 이 마음이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질병입니다. 그래서 변화를 보면 대개 다음과 같은 반응의 단계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무조건 거부하는 단계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무관심의 단계입니다.
세 번째 단계에 나타나는 것이 탐색의 단계입니다. 처음에는 눈치를 보다가 모든 사람들이 움직이고나니까 그제서야 움직이게 되는 단계입니다. 소극적으로 따라가는 단계입니다.
네 번째 단계는 흐름을 본 사람들은 따라가지만 흐름을 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따라가지 않거나 못 따라갑니다.
다섯 번째 단계는 분리되고 맙니다. 흐름을 따라간 사람들은 시대에 어떤 흐름을 만들고, 흐름을 보지 못한 사람들은 시대의 낙오자가 되고 맙니다. 배척의 무리와 헌신의 무리로 갈라지고 맙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을 갖는 것도 중요합니다. 교회에 다니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의 감화와 감동과 은혜를 힘입고 하나님이 일으키는 새로운 변화의 역사에 앞장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변화를 주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변화는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사명에는 언제나 변화를 이끌어내는 힘이 있습니다. 바른 사명을 가진 사람 속에는 언제나 변화의 물결이 일어납니다. 변화의 역사도 일어납니다. 사명을 붙든 사람 속에는 감당할 수 있는 변화의 힘도 주십니다.
변화를 주도하는 사람! 하나님의 사람이란, 변화를 주도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왜요? 이 땅에 영원한 안전은 없고 다만 변화의 기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진리에 미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위를 둘러보시기 바랍니다. 무엇이 보입니까? 삶의 모든 표현은 대개 시각에서 옵니다. 따라서 어떤 사물의 한 곳만 본다면 그것밖에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의 생각도 완전할 수가 없습니다. 인생을 가장 답답하고 어렵게 사는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의 시각이 옳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부부싸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에게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자신의 시각만이 최고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시각은 각각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라보는 위치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차이점을 통해서 위대한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고 불평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바라보는 시각과 같지 않다고 배척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시각의 차이를 통해서 당신의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시각의 싹쓸이가 독재자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 시각 싹쓸이의 독재자들이 나타나면 사회가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양성을 수용하지 못하는 이 시각의 싹쓸이가 지금 우리 나라를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멍청하게 만들고,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를 정말 고통스럽게 만들고, 나를 제한하는 것은 다름 아닌 나의 시각일 뿐입니다.
인생에 커다란 변화란 결국 시각의 전환에서 옵니다. 과거의 회상시각이 아닌 미래를 창조하는 사명의 시각으로 자신의 시각을 전환한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시각의 종입니다. 자기가 보는 것만큼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보는 것만큼 말하기 때문입니다. 보는 것만큼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미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왭니까? 그 사람의 시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보는 시각을 통합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다양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입니다. 위대한 지도자란 누구입니까? 시각을 통합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우리 정치가 제일 힘든 이유가 무엇입니까? 시각을 통합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나와 같지 않으면 전부가 원수입니다. 내 시각과 같지 않으면 무조건 무너뜨려야 할 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문제라는 단어를 씁니다. 그러나 문제는 없습니다. 다만 문제를 보는 시각이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변화를 얻기 위해서 왔습니다. 우리가 달라지기 위해서 왔습니다. 오늘 우리가 문제를 보는 시각을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고 바꿀 수 있다고 하면 돌아가는 길에 문제는 변할 것입니다. 내가 문제를 보는 시각을 바꿀 수만 있다고 하면 문제는 항상 변합니다. 과거에 일어난 어떤 문제를 과거의 시각으로 풀려고 하면 절대로 풀리지 않습니다. 과거에 일어났던 그 일은 오늘의 시각으로 풀어야 풀립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 이상으로 믿고 나가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만을 붙잡고 몸부림치는 존재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미래의 꿈을 붙잡고 앞으로 나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마음의 생각이 오늘 여러분을 이 자리에 앉게 한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지금 만들어 내시기 바랍니다.
지도자의 질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국가의 지도자, 교회의 지도자이든지 지도자가 질병에 걸리면 큰일입니다. 그 질병을 이 시간 한 번 스스로 진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 질병은 무변화라는 질병입니다.
두 번째 질병은 상상력이 뒤떨어지는 질병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 하면 놀라운 상상력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나를 돕기 시작하셨다! 이제 하나님이 뒤집기를 하실 때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신다!”면서 뛸 듯이 기쁨이 샘솟습니다. 이것이 영적 예배의 특징입니다.
세 번째 정력과 열정의 질병입니다.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열정이 없다면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아무리 재능이 있고 기회가 와도 열정이 없는 사람은 어떠한 일도 못합니다. 하나님은 재능이 많은 성도가 아니라 정력과 열정이 넘쳐흐르는 성도를 원하십니다.
네 번째 핑계와 변명의 질병입니다. 자꾸 핑계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모든 사람은 오해할 권리가 있고 나는 해명할 의무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만이 내가 가는 길을 아신다는 사실을 믿고 나아갈 뿐입니다.
다섯 번째 질병은 불끈불끈 화를 잘 내는 질병입니다. 어떤 일에든지 쉽게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지금 심각한 영적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입니다.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화를 내지 않습니다.
여섯 번째는 모험하지 않으려는 질병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고 강하고 담대하게 모험하시기 바랍니다.
일곱 번째는 안일함을 즐기려는 질병입니다. 안전지대라고 하는 안일함 속에서 깨고 나오시기 바랍니다. 새로운 땅, 가나안에 가려면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박차고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여덟 번째 배짱이 없는 것입니다.
아홉 번째 불안하고 자기 방어적인 질병입니다. 자꾸 자신을 방어하기만 합니다.
열 번째는 유연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굳어버렸습니다.
열한번째는 협동정신이 부족해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열두 번째는 절대로 변화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힘입고 조직 내에서 변화를 주도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가면 변화가 일어난다! 그 조직의 변화를 유도하시기 바랍니다. 그 조직 내에 변화를 일으키시기를 바랍니다. 꿈은 인생의 틀을 바꾸어 놓습니다. 어느 날인가 어느 시간인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다가, 예배하다가, 찬양하다가 내 속에 꿈이 나타나면 내 인생의 틀이 그때부터 바뀌기 시작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이 틀림없이 바뀔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장래를 예견할 수 있은 유일한 길은 장래를 만들어낼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들의 몫이며 고유 영역입니다. 꿈과 사명은 보통 사람들로 하여금 특별한 일을 해내게 만들어냅니다. 지도자는 따르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가지 않으려는 그곳으로 그들을 데려다 주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변화의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나를 따르라! 상황에 굴복하는 사람들이 아닌 상황을 극복하는 사람들입니다. 삶의 길잡이인 비전과 사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지금 이 시대는 이런 사람들을 찾고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다가 내 속에 나타나는 사명된 영감 속에 펄펄 뛰는 삶의 감사와 감격이 가득 차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일들에 앞장서 보십시오. 왜 세상의 일에는 앞장서기를 좋아하면서 하나님의 일은 싫어하십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동업자인데 하나님의 일에 우리가 앞장선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도우시겠습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명함의 직함들은 사실 다 헛되고 헛된 것입니다. 어느 순간에 하나님이 불어 버리면 그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고 미래를 창출하며 사람을 키워내는 사람이 되십시오. 어떻게 하든지 나 때문에 키워진 사람이 있다! 나 때문에 변화된 사람이 있다! 이것처럼 귀한 보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어디를 가든지 사람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그런 신뢰할 수 있는 진실한 사람이 되려고 발버둥쳐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않으면 세우는 자의 수고는 헛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지킴이 다 헛것이 되고 맙니다. 우리 가운데 보이지 않는 손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우리가 무엇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 이 말씀을 마음 깊은 곳에 새겨두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손길에 잡히려는 몸부림을 치시기 바랍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내게 주신 사명을 선언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사명이 있는 사람은 재능이 있는 사람보다 귀합니다. 사명이 있는 사람은 기회가 있는 사람보다 중요합니다. 사명이 있는 사람은 지식이 있는 사람보다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재능 있는 사람이라든가 지식이 있는 사람보다도 사명이 있는 사람 속에서 역사 하십니다. 사명이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우리는 지금 교회 부흥이라는 사명 앞에 서 있습니다. 아시는 대로 우리 교회에는 넉넉한 재벌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십니다. 연약한 자를 들어 역사를 일으키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명을 붙잡기만 한다면 놀라운 부흥의 역사를 일으키실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명의 힘은 저항의 힘보다 훨씬 강합니다. 사명의 힘은 고난의 힘보다 훨씬 강합니다.
어느 바닷가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지나가던 사람이 아이들에게 물었답니다. “애들아, 너희들 뭐하니?” “보면 몰라요? 물장난하고 있잖아요.”라고 한 아이가 대답하더랍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다른 아이에게 또 물었습니다. “너는 뭐하니?” “보면 몰라요 모래집 짓고 있잖아요” 다른 아이에게 또 물었습니다. “너는 무엇하니?” “예, 저는 새 도시를 만들고 있어요! 아직 이 땅에 나타나지 않은 내가 만들어야하는 새 도시를 만들고 있어요. 앞으로 제가 이룩할 거예요. 제가 만들어야 할 새 나라를 만들고 있어요.” “누가 맡겼지?” “하나님이 제게 준 사명이에요” 그 아이는 훗날 나라를 이끌어 가는 대통령이 됐다고 합니다.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사명을 가지고 하는 사람과 사명 없이 하는 사람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는 일은 사명입니다. “나는 사명적 존재다!”라고 하는 자기 사명선언이 기적을 일으키는 겁니다. 사명이 없는 사람은 너절한 것들이 판을 칩니다. 너절한 것들이 소중한 시간을 다 빼앗고 맙니다. 그러나 사명에 사로잡힌 사람은 질서가 있습니다. 소중한 것들로만 가득차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사명을 가질 만큼 중요한 인물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하나님은 중요하지 않은 생명을 이 땅에 보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한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너무너무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런가 하면, “사명에는 고통이 따른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 사명에는 고통이 따르는 것입니까? 인간의 행복이라고 하는 것, 기쁨이라고 하는 것, 보람이라고 하는 것은 사명을 수행하는 과정 속에서 일어나는 보너스입니다. 따라서 사명은 절대로 고통이 아닙니다. 사명은 보람입니다. 사명은 삶의 의미입니다. 사명은 인생을 바꾸어 놓습니다. 사명이 위대한 삶을 만듭니다. 그래서 사명은 재능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여러분,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날 때부터 위대하게 태어난 사람은 이 땅에 아무도 없습니다. 어느 날인가 그 생명 속에 하나님이 주신 위대한 사명을 깨닫는 순간 위대한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누가 더 위대한 삶을 살았느냐? 위대한 삶의 사명을 끝까지 실행하는 사람은 위대한 삶을 살았습니다. 사명 없이 너절한 삶을 산 사람들은 너절하게 살고 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지금 무엇을 위해 일하고 있습니까? 무엇을 위해 재물을 모으고 있습니까? 인생이 무엇입니까? 인생이 속도입니까? 축적입니까? 인생은 속도보다도, 축적보다도 더 중요한 방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고, 더 중요한 사명이 있을 뿐입니다. 행복이나 성공은 삶의 사명의 실현을 통해서 오는 보너스일 뿐입니다. 이런 함정들에 근심하거나 빠지지 마십시오. 무능하다고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현재의 상황과 환경과 어려움 때문에 사명을 이루지 못할 거라고 미리 판단하지도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모세도 바꾸어 놓으십니다. 사무엘도 바꾸어 놓으십니다. 사울도 바꾸어 놓으십니다. 다윗도 바꾸어 놓으십니다.
물론 사명을 가진 사람도 때로는 마음에 혼란이 올 수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나를 붙드셨을까? 정말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마음속에 혼란이 있습니다. 두려움도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때로는 조바심도 있고 답답할 때도 많습니다. 왜 이렇게 어려울까? 그래서 나는 실격자다. 나는 할 수 없는 사람인데 괜히 혼자 나섰나보다. 이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표현입니다.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걱정하지 마십시오. 근심하지 마십시오. 오늘 하늘의 하나님께서 나에게 복을 주십니다. 하늘의 하나님이 나를 도우십니다. 하늘의 하나님이 나를 기억하셔서 내게 복을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한 뜻을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다만 우리의 할 일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만을 바라보면 됩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붙잡기만 하면 됩니다. 이 작은 생명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게 해 달라고 나를 하나님의 맡기시면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잃어버렸거나 생활 속에 묻어두었던 사명을 다시 회복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시옵소서”
느헤미야의 이 기도는 바로 저와 여러분의 기도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복 받을 짓을 해야 합니다. 변해야 합니다. 사명을 붙잡아야 합니다.
이 시간 이 작은 생명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다. 다시금 내게 주신 주의 사명을 회복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다.
“나의 하나님!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