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본 메세지] ---------------------
“새는 알에서 깨어나려고 한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한 개의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을 향하여 날아가려고 한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 락사스라 한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위의 구절은 굳이 <데미안>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한 번은 들어본 적 있는 유명한 구절이다. <데미안>은 필자가 굳이 구구한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될만큼 세계 고전문학의 한 봉우리로 우리나라에 소개되어 있다. 아프락사스, 새와 알의 비유, 완전한 인간 데미안 등 많은 형이상학적 대화가 주된 주제인 이 책은 일차대전 당시 많은 독일군들이 죽으면서 가슴에 품고 있었다는 일화로 더욱 유명하다.
이 책은 특히 우리나라에서 많은 호응을 얻었는데 전혜린 씨와 같은 분은 거의 숭배에 가까운 서평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데미안>은 인생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에밀 싱클레어’와 완벽한 인간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데미안’의 만남이 테마이다. 두 사람은 밤을 세우며 토론을 나누는데 거기 등장하는 집단 무의식, 배화교, 아프락사스 등의 많은 형이상학적 이야기가 아마도 읽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 같다. 이야기는 쭉 진행되다가 그 유명한 새의 이야기에까지 진행된다. 그러나 이 대목을 우리는 유의깊게 볼 필요가 있다.
두 사람이 새의 이야기를 나누는시점은 일차대전이 벌어진 직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거기서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새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알을 깨는 아픔이 있어야 한다고 한바탕 훈계하고 곧이어 당시의 유럽 정세를 말한다.
유럽은 지금 새가 알에서 깨는 아픔을 겪고 있다. 이 아픔이 끝나면 유럽은 새로운 세계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싱클레어에게 말하고 데미안은 자신이 일차대전에 참가하겠다는 뜻을 밝힌다. 감명을 받은 싱클레어도 전쟁에 참여하고 두 사람은 야전병원에서 일생의 마지막 만남을 가지는 것으로 이 소설은 끝난다.
교언영색(巧言令色)을 일삼는 자는 군자가 아니라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문체의 아름다움을 글의 첫째로 꼽는 경향이 있어서 헤르만 헤세의 유려한 문체에 감명을 받은 사람들이 그 내용성은 둘째치고 데미안을 지나치게 부풀려 왔다. 소위 ‘세계 고전’ 가운데 가장 거품이 많은 것이 <데미안>이 아닌가 한다. 이제 아프락사스니 뭐니 하는 거품은 빼고 데미안을 바로 보아야 할것이다. 왜냐하면 일차대전 이후의 세계사가 ‘완벽한 인간’ 데미안이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반대로 더욱 혼돈의 시대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영국과 프랑스가 세계 각국에 식민지를 건설하며 제국주의 단계에 접어들 무렵까지 독일은 수백 개의 자그마한 영주국으로 분할되어 있었다. 19세기 말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의 출현으로 독일은 무력 통일을 이룩하고 뒤늦게 산업화에 박차를 가한다.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팽창하려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독일 자본주의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미 국내 시장은 포화 단계에 이르렀고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처럼 해외에 식민지를 건설하려 나서기에 이른다. 막상 독일이 식민지 확보에 나섰을 때 이미 전세계는 몇몇 선발 제국주의 국가에 의해 분할된 상태였고 독일이 확보할 수 있는 식민지는 가치 없는 몇몇 불모의 땅 정도에 불과했다. 따라서 독일로서는 기존의 식민지 체계를 부수어야할 필요가 있었고 거기에는 ‘알을 깨는 아픔’이 수반되었다. 일차대전은 그러한 식민지 쟁탈전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불거져 나온 전쟁이었던 것이다.
이제 <데미안>의 구절들을 헤르만 헤세가 하고 싶던 그대로 바꾸어보자. 아마 진정 헤세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었을 것이다. “독일은 알에서 깨어나려고 한다. 알은 구체제이다. 독일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영국과 프랑스를 깨뜨려야 한다. 독일은 세계 제패를 위해 날아가려 한다. 그렇게 건설된 것은 독일 제국이다.”
<데미안>은 철학 소설이 아니다.
전쟁을 부추기는 참전소설에 불과하다. <데미안>에 등장하는 갖가지 철학적 개념들은 독자의 사고를 마비시키는 장치에 불과하다. 파시스트들의 농간에 놀아나 참전문학을 쓴 사람들은 어느 시기에나 있었다. 우리나라에도 이차대전이 일어났을 때 귀축영미(鬼畜英尾)를 몰아내고 신성한 대동아 공영을 이룩하자고 문필을 휘두른 이광수, 서정주 등등의 삼류 작가들은 많이 있었다. 헤르만 헤세가 그나마 다른 삼류 작가들과 비교해 뛰어난 점이 있다면 그들처럼 전쟁에 참가하자는 메세지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현학적인 문체를 이용해 철학 소설처럼 겉치장하는 기술이 뛰어나다는 점이다. 일차대전에서 전사한 독일 젊은이들의 품 속에서 <데미안>이 나왔다는 이야기는 수정되어야 한다. 그들은 전쟁터에서 마음의 위안을 얻기 위해 <데미안>을 품에 안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데미안>을 읽고 흥분한 젊은이들이 불 속으로 뛰어드는 나방처럼 전쟁터에 몰려든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토록 문제점이 많은 소설이 왜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도 소위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서구 문물이라면 사족을 못 쓰고 무조건 대단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우리의 문화 사대주의 풍토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다음 기회에 보다 자세히 논하기로 하고 이 글은 이만 끝맺도록 하겠다. 지금도 많은 청소년 추천 도서 목록에는 <데미안>이 오른다. 청소년들은 무엇을 배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