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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쓰기와 자아 찾기 / 이은봉 시인(광주대 문창과 교수)
① 언어, 나, 자아의 발견
사람이라면 누구나 태어난 지 2년이 되면 말을 하기 시작한다. 직접 발화하지 못하는 농아도 두 살이 넘으면 곧바로 말 속에서, 곧 언어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 누구나 두 살이 넘으면 말을 한다는 것,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그가 언어로 상징되는 사회적 현실 속에 들어오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인간의 사회적 현실을 형성하는 가장 강력하고 기본적인 도구는 말이다. 말, 곧 언어라는 도구가 없이 사회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적 현실은 물론 사회적 질서를 가리킨다. 사회적 질서의 세계는 그것이 질서라는 점에서 언어적 질서의 세계와 구조적으로 다르지 않다. 따라서 언어의 질서를 유지하는 법, 곧 문법은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법, 곧 사회법을 상징하기 마련이다. 언어적 질서의 세계가 곧바로 사회적 질서로 치환될 수 있는 소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언어 역시 이성의 작동에 의지해 태어나는 질서의 세계이고, 사회적 현실 역시 이성의 작동에 의지해 태어나는 질서의 세계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라캉(Jacuues Lacan)은 언어 이전의 삶을 가리켜 상상계라 하고, 언어 이후의 삶을 가리켜 상징계라고 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상상계는 요람에서의 삶을 가리키고, 상징계는 사회현실에서의 삶을 가리킨다. 따라서 인간의 정신계에서 상상계는 세계와 동화되어 있는 영역이고, 상징계는 세계와 이화되어 있는 영역이라 할 수 있다.
상상계, 곧 요람에서의 삶에는 ‘나’라고 하는 것이 옳게 자각된 채 존재하지 못한다. ‘나’라고 하는 것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아직은 저 자신을 주체로 자각하지 못한 채 존재하는 것이 여기서의 ‘나’이다. 상처도 고통도 슬픔도 자율적으로 자각하지 못하는 천국을 살고 있는 ‘나’가 요람에서의 ‘나’, 곧 상상계에서의 ‘나’인 셈이다. 거울 속에 ‘나’와 실제의 ‘나’를 구별하지 못하는 나, 세계에 동화되어 있는 ‘나’ 말이다.
물론 요람에서의 ‘나’와 사회현실에서의 ‘나’는 삶의 존재방식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회현실에서의 ‘나’는 요람에서의 ‘나’와는 달리 냉혹하고 살벌한 생존경쟁에 처해 있기 마련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나’의 무엇이 사회현실을 이처럼 냉혹하고 살벌하게 만드는가. 이론의 여지없이 그것은 언어이다. 언어로 대상을 인식하고, 언어로 인식한 대상을 언어로 계산하고 언어로 경계하고, 언어로 주문 등을 하는 것이 사회현실에서의 ‘나’이다.
나날의 삶에서 언어는 긍정의 기능을 하기도 하지만 부정의 기능을 하기도 한다. 긍정의 기능을 하는 언어는 부정의 기능을 하는 언어에 비해 상대적으로 귀하다. 긍정의 기능을 하는 언어보다는 부정의 기능을 하는 언어가 훨씬 충만한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지금의 긍정의 기능을 하는 언어보다 부정의 기능을 하는 언어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것이 지금의 삶을 이루고 있는 대부분의 ‘나’라는 것이다.
흔히 긍정의 기능을 하는 언어를 긍정의 언어, 부정의 기능을 하는 언어를 부정의 언어라고 요약해 부른다. 긍정의 언어는 플러스 작용을 하고, 부정의 언어는 마이너스 작용을 한다. 긍정의 언어는 삶을 상승시키고, 부정의 언어는 삶을 하강시킨다. 긍정의 언어는 갓 구운 빵처럼 부드럽고, 부정의 언어는 갓 벼린 칼처럼 날카롭다. 긍정의 언어는 칭찬과 감탄의 언어이고, 부정의 언어는 비난과 야유의 언어이다. 긍정의 언어는 생명의 언어이고, 부정의 언어는 죽음의 언어이다.
따라서 문제는 부정의 언어이다. 부정의 언어는 화살촉이 되기도 하고, 창이 되기도 하고, 폭탄이 되기도 하면서 ‘나’라는 존재를 파괴시킨다. 그렇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부정의 언어 때문에 상처를 받고 아파하며 무서워 떨고 있다. 물론 반대로 긍정의 언어 때문에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환호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다. 긍정의 언어는 사람들을 짓이 나게 하고 있다. 긍정의 언어는 사람들의 꿈이 되기도 하고 사랑이 되기도 하고 행복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언어는 사람들을 가르기도 하고 붙이기도 한다. 이처럼 언어는 사람들을 불행하게도 하고 행복하게도 한다. 언어가 이러한 기능을 하는 것은 언어에 감정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감정은 이성과 달리 움직이고 변하는 성질을 갖고 있다. 이성이 상수(常數)라면 감정은 변수(變數)이다. 감정이 변수라는 것은 그것이 휘발성을 갖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한번 발흥하면 주체의 의지에 의해 쉽게 조절되거나 통제되지 않는 것이 감정이기도 하다. 한동안은 자의적으로 발광(發狂)하는 것이 감정이라는 정신기제이다.
따라서 감정의 주인이 되는 일은 누구에게나 어려울 수밖에 없다. 방자할 정도로 자유로운 것이 감정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을 감정의 주인이 되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특별한 훈련과 수련을 거치게 되면 누구라도 감정의 주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佛을 이루거나 聖을 이룬 사람, 해탈한 사람을 가리켜 다름 아닌 감정의 주인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니만큼 감정의 주인이 되기는 쉽지 않기 마련이다.
시는 끝내 감정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사람, 곧 부처나 성인이 되지 못하는 사람의 산물이다. 시의 언어에 상대적으로 섬세하고 세련된 감정이 담겨 있을 수밖에 없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시의 언어가 때로 부정의 기능을 하기도 하고 긍정의 기능을 하기도 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시를 쓰거나 읽는 ‘나’라는 존재를 고통에 빠지게도 하고, ‘행복’에 젖게도 하는 것이, 나아가 이들 각각의 양가감정에 빠지게도 하는 것이 시의 언어라는 점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시의 언어는 이처럼 복잡계의 감정을 거느린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시의 언어 역시 사회현실 속에 존재하기 마련이다. 사회현실은 주체가 그것을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언어로 가득 차 있는 공간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 사회현실이라는 공간에서 흘러넘치는 언어에 이리 치고 저리 치며 살고 있다. 물론 언어에 치지 않고 언어를 즐기고 향유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거개의 사람은 언어의 화살, 언어라는 창에 찔려 오랫동안 신음해 본 체험을 갖고 있다. 더러는 언어의 폭탄을 맞고 목숨을 잃은 사람까지 있다. 물론 이는 언어에 주체와 객체의 감정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언어를 사용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언어를 사용하는 주체는 당연히 ‘나’일 수밖에 없다. 나는 언제나 ‘언어’를 통해 나 자신 밖의 사회현실 속으로, 곧 세상 속으로 들어오도록 되어 있다. 언어를 통해 내 속으로 들어오는 것은 세상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때의 ‘나’를 흔히 개념화하여 ‘자아’, 주체라고 하고, 세상을 개념화하여 흔히 세계, 객체라고 한다. 세상의 주체와 객체는 늘 언어를 매개로 하여 서로 관계하며 상호작용을 하기 마련이다.
이때 언어를 사용하는 주체가 ‘나’ 곧 자아라고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언어를 매개로 하여 자아는 언제나 저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해가기 때문이다. 여기서 정체성을 확보해간다는 것은 내가 남이 아니라 ‘나’라는 의식, 곧 자아의식을 형성해간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때의 자아의식이라는 용어는 자아개념이라는 용어로 불리기도 한다. 자아개념은 실제의 ‘나’가 아니라 내가 ‘나’에 대해 생각하는 개념인 만큼 얼마간 작위적이고 허구적일 수밖에 없다. 본래의 내가 아니라 나에 대한 내 생각 말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아개념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더없이 중요한 작용과 역할을 한다. 모든 자아는 자아개념, 자신의 정체성에 맞게 사회현실과 관계하고 기능하기 때문이다. 자아개념은 본래 나란 무엇이고 누구인가, 나란 있는가, 없는가 등의 질문과 함께 형성되기 마련이다. 이러한 질문과 함께 자아를 탐구하다 보면 이내 ‘나’를, 곧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
자아를 발견하도록 하는 자아 탐구는 일단 먼저 타자 탐구에서 비롯된다. ‘나’는 본래 남을 인식하는 가운데 ‘나’를 인식하도록 되어 있다. 남을 하나의 개인으로 받아들이면서 내가, 곧 자아가 가장 먼저 인식하는 타자는 가족 중의 하나이기 쉽다. 아버지, 어머니, 형과 누나의 동생, 친구의 친구, 선생님의 제자 등의 형태로 존재하기 시작한다. 보통의 자아는 대부분 이렇게 타자의 범주를 점차 넓혀 나간다. 물론 타자를 인식하고 경험한다는 것은 주체가 자기 자신의 자아개념을 작동시킨다는 것을 뜻한다.
세상에는 생명을 마치는 순간까지 내 자신은 누구이고, 무엇인지 되물어보지 못하는 사람이 없지 않다. 아직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거의 가져 보지 못한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과거의 봉건 시대에는 그러한 사람이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개인으로서의 주체적 자아를 미처 계발하지 못했던 것이 그 시대 대부분의 사람들일 것이다. 그 시대의 자아는 대개가 가부장이나 봉건 영주, 기타 지배자에게 종속되고 부속되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여자의 경우에는 좀 더 심했거니와, 당시를 살았던 비주체적 자아의 모습은 여필종부(女必從夫)라는 한자말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몰론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자아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고 해야 옳다. 개인의식, 곧 자아의식을 바탕으로 성장해 온 것이 근대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근대 자본주의 시대, 지금의 이 시대에 이르러 ‘나’는 누구이고 무엇인가라는 질문, 곧 자아의 실재에 대한 사유와 인식은 필수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고서는 누구도 오늘의 이 근대 자본주의 사회를 제대로 살아가지 못한다.
‘나’란 누구이고 무엇인가에 대해 묻고 대답하는 과정에 개인으로서의 ‘나’ 곧 주체를 바로 세울 수 있고, 나아가 자기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 곧 자아라고도 하는 개인이 저 자신의 삶에 대해 전면적으로 책임을 지는 것이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성숙한 자아, 곧 성숙한 개인은 저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삶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는 존재이지만 말이다.
이처럼 자아의식의 성장은 근대 자본주의의 성장과 깊이 맞물려 있다. 본래 서정시는 근대 자본주의에 이르러 부쩍 성장한 자아의식의 산물이다. 매 편의 서정시에는 매 편의 시를 쓸 때만큼의 자아의식이 투영되어 있기 마련이다. 서정시가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성립과 더불어, 다시 말해 낭만주의 시대의 개막과 더불어 문학의 중심 장르로 부각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성장하는 개인의식을 기초로 하는 근대라는 역사의 한 시기에 이르러 새롭게 중흥기를 맞은 것이 서정시라는 것이다. 언제나 성숙한 개인의식을 바탕으로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서정시의 장르적 특성이라는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때의 성숙한 개인의식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은 논의가 필요하지만 말이다.
중세 봉건사회에서의 인간의 성장과정과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인간의 성장과정은 다르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 이르러 자아에 대한 반문과 인식은 대강 사춘기를 거치면서 구체화된다. 사춘기를 거치면서 개인으로서의 ‘나’는 남을, 자아는 타자를 인식하기 시작하고, 그 타자를 통해 내 자신을 발견하고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즉, 사춘기를 바르게 통과할 때 성숙한 개인으로 자리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한 인간의 성장과정에 사춘기만큼 중요한 시기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아가 세계로부터 분리되어 독립된 주체로 바로 서게 되는 것도 실제로는 이 시기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춘기에 심한 방황을 하는 것도 얼마간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자아와 세계에 대한 반문과 인식을 통해 자기 자신의 자아관을 포함한 세계관을 만들어 가는 것이 이 시기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사춘기를 온전하게 통과했다고 해서 모두 다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아니다. 내 자신을 바르게 발견하려면 수많은 질문과, 질문에 따른 고뇌가 필요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면 누구라도 저 자신을 실현하도록 부추기기 마련이다. 내 자신을 실현하는 일은 사회현실 속에 내 자신을 기투하는 일을 가리킨다. 사회현실 속에 내 자신을 기투하는 일은 사회현실 속에 내 자신을 바로 세우는 일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자아의 실현은 ‘나’에 대해 지속적으로 반문하는 사람, 반문해 자아를 발견한 사람에게 숙명적으로 뒤따라오는 성장의 과정, 성취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자아의 발견과 자아의 실현이 시간적 순차에 따라 항상 선조적(線條的)으로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자아를 실현하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자아를 새롭게 찾고 발견하고 깨닫는 것이 살아 생동하는 주체인 개인이 갖는 특징이다. 이는 시를 쓰는 주체로서의 개인, 시인이라고 해도 다를 바 없다. 시를 쓰는 자아, 곧 시인도 계속해 그가 찾고 발견하고 깨닫는 내 자신의 자아를 시라는 언어 형식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 < ‘유쾌한 시학강의(강은교·이승하 외 지음, 아인북스, 201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