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황실의 역사서 '만주원류고(滿洲原流考)'에도 금나라의 태조에 대해 "신라왕의 성을 따라 국호를 금이라 한다'는 기록이 있다. 송나라때의 역사서 '송막기문(松漠紀聞)'은 "금나라가 건국되기 이전 여진족이 부족의 형태일 때, 그 추장은 신라인이었다"고 전한다.(정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이야기가 비단 중국의 사서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신라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의 후손임을 주장하는 부안 김씨들은 그들의 '족보'를 내세워 '금사', '만주원류고', '송막기문' 등의 내용을 이렇게 뒷받침한다. (애신각라는 더이상 가설이 아님... 음차도 아님,,)
"함보는 법명이고 그의 본명은 김행 (혹은 김준)으로 마의태자 김일의 아들이자 경순왕 김부의 손자이다. 김행은 여진으로 갔지만 다른 두 형제는 고려에 남아 부안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가설)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안정복 역시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김준은 삼형제인데 김준이 여진으로 망명할 때 두 형제를 두고 혼자서 갔다.'고 밝히고 있어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인 김함보라고 주장한다. (가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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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는 신라인 증명? 글이고
마의태자 설인데.. 아직 가설입니다만 정설이 될 가능성이 크게 있군요 ^^
또 다른 마의태자의 행방
필자의 두 가지 가설을 이상하게 보는 독자가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마의태자 문제에 관한 한 또 하나의 가설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하나의 마의태자로 보이는 사람이 여진 땅에 들어가서 금(金)나라의 시조가 되었다는 엄연한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10년 전에 만주 영고탑(寧古塔)으로 알려진 발해진을 탐방한 일이 있다. 발해진은 발해의 상경이요, 요의 상경이기도 한 역사의 고장일 뿐만 아니라 금 태조가 공격하여 되찾은 우리의 서울이었다. 가던 날 발해진 광화문 위에는 구슬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넋을 잃고 앉아 있는 필자를 향해 그곳 조선족 한 사람이 한 말은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이 땅은 중국 땅이 아닙니다. 우리 땅입니다. 중국 사람 말 듣지 마시구레.”
또 다른 마의태자 행방과 관련해 먼저 ‘고려사’를 찾아보기로 하자. 고려 11대 문종 28년(1074) 9월, 그러니까 신라가 망하고 마의태자가 개골산으로 들어간 해(935년)로부터 139년 후의 일인데, 갑자기 “동여진(東女眞)의 추장 오고내(烏古)가 죽고 그의 아들 핵리발(劾里鉢)이 자리를 이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 오고내와 핵리발 부자가 남도 아닌 고려인이요 옛날 신라 왕족 김씨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고려로 볼 때 매우 불길한 일이었다. 신라를 멸망시킨 고려가 볼 때 신라왕족 김씨 후손이 바로 코앞에 나라를 세워 국경을 맞댄다는 것은 여간 불안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면 그 김씨는 누구란 말인가. 고려왕조는 그가 경순왕의 투항을 반대하고 개골산에 들어갔다는 마의태자 후손은 아닌지 바짝 긴장하고 정보를 수집하느라 혈안이 되었다. 보고가 들어왔다. 다행히 마의태자 후손은 아닌 것도 같았는데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정보에 따르면 동여진을 장악한 이른바 태사(총독)는 금준(今俊)이란 사람의 후손인데 평주(平州) 사람이었다 한다. 일설에는 김행(金幸)이라고도 한다. 금씨란 우리나라에 드문 성이니 김씨가 맞을 것이고, 그는 몸을 숨기기 위해 함보(函普)라는 법명을 쓰기도 하였다. 이 사람이 영흥에 숨어 살다가 여진 땅으로 월경하여 아지고촌(阿之古村)이란 마을에서 여진 여자를 취하여 극수(克守)를 낳았는데 이가 곧 금나라 시조라는 것이다.
그러면 평주는 과연 어딘가. 황해도 평산(平山)이 평주라는 설도 있으나 이는 잘못이고 함경도 영흥(永興)이 평주라는 설이 설득력이 있다. 고려 수도 개성과 가까운 황해도에서는 왕건의 눈을 피하기 어려웠고 여진 땅과 너무 멀었다. 함경도 영흥은 원산 근처에 있는 군사요지로서 여진과 접경지대였다. 여기 같으면 왕건의 눈을 피해 중으로 숨어 살거나 여진으로 망명하기 쉬웠을 것이다. 영흥을 일명 평주라 한 것은 바로 고려 문종 때 이곳에 평주진을 쌓아 여진의 침략에 대비했기 때문이다. 거의 같은 시기에 영흥에는 정변진, 장평진 같은 군사기지가 생겨난 것을 보면, 고려는 이곳을 북방수비의 요지로 삼았던 것 같다. 함경도 영흥은 또 금강산과 가깝고 설악산과도 가까워서 만일 고려군과 싸워 져서 후퇴한다면 동해안을 거쳐서 함경도 원산 방면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여기 같으면 재기를 노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여의치 않았는지 마의태자는 다시 여진 땅으로 갔다. 아무리 왕건이 마의태자를 잡으려 해도 조국광복을 향한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여기서 한 가지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영흥 땅이야말로 뒷날 태조 이성계가 일어나 고려왕조를 전복한 혁명의 고장이란 사실이다. 대륙을 통일하는 금나라의 시조가 나고 조선왕조 태조 이성계가 난 고장이 바로 영흥 땅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금나라 시조가 된 김행(金幸) 또는 김준(金俊)이란 인물이 과연 경순왕과 어떤 관계인가. 아들인지 손자인지 분명치 않다. 물론 족보에도 나오지 않으며 나왔다 하더라도 믿을 수 없다고 할 것이다. 다만 그가 마의태자와 같은 외자 이름이라는 사실, 그리고 중 행세를 하며 피해 다녔다는 사실을 중시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순암 안정복은 김준의 형제가 삼형제였다고 하면서, 김준이 여진으로 망명할 때 두 형제를 두고 혼자서 갔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증언이다. 현재 마의태자의 후손이라 주장하고 있는 부안김씨 족보에 따르면 김행이 마의태자 김일의 아들이고, 김행은 여진으로 갔지만 나머지 두 형제는 고려에 남아 부안김씨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족보 문제는 나중에 좀더 연구하기로 하고 여진으로 간 김행은 어떻게 되었을까. 여진은 당시 원시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김행과 그 후손들은 국가를 건설할 지혜와 문화가 없는 여진족을 지도하여 나라 세우기에 진력했던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조국 신라를 잃은 마의태자의 한을 풀기 위해서였다. 그곳 풍속은 흉노와 같아서 여러 부락은 성곽도 없이 산과 들에 분거하였으며, 문자가 없어 언어와 결승(結繩)으로 약속하였다. 그 땅에는 말이 많았는데 준마는 간혹 하루에 천 리를 달린다고 한다. 사람들은 날쌔고 용맹스러웠고 아이들도 능히 활을 잡아당겨 새나 쥐를 쏘아 맞혔다. 커서는 모두 활 쏘고 말을 타고 싸움터에 나가 싸우는 노련한 병사[勁兵]가 되었다. 그러나 각 부락이 서로 자웅을 다투어 통일되지 못했다. 여진의 강역은 서쪽으로 우리나라와 경계를 접해 있기 때문에 일찍이 거란과 우리 나라를 섬겨 몇 번 와서 조회했다. 그러나 그 예물은 사금이나 짐승 가죽이나 말이었고, 이에 우리나라에서는 은으로 후히 주어 보냈다.
‘고려사’는 이렇게 여진이 후진 사회였다고 하면서 그 위치는 흑룡강 유역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흑수(黑水), 즉 흑룡강의 옛 습속에는 방이 없고 땅을 파서 나무를 걸치고 흙을 덮어 그 속에서 살며 수초(水草)를 찾아다녔으므로 언제나 정처없이 옮겨 살았다. 김행의 후손 극기라는 인물이 토지를 개간하고 곡물을 재배하면서부터 집 짓는 제도가 생겼고 사람들이 그 지역을 납갈리(納葛里)라 이름했다. 그 말은 한자로 거실이란 뜻이었다.”
당시 여진은 생(生)여진과 숙(熟)여진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김행이 간 여진은 생여진이었다. 생여진은 끝까지 요의 지배를 받지 않다가 결국 요를 멸망시키고 금나라를 세워 중국을 지배한다. 이는 신라에서 망명해간 왕자의 힘이 절대적이었던 것이다.
마의태자 후손이 여진(女眞)에 들어가 금나라를 일으켰다는 사실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에도 산견(散見)된다. ‘고려사’ 세가(世家) 권13 예종 10년(1115) 3월조에 보면 이런 기사가 나온다.
“이달에 생여진 완안부의 아골타가 황제를 일컫고 국호를 금이라 했다. 혹은 말하기를 ‘옛적 우리 평주(平州) 승(僧) 금준(今俊)이 여진에 도망해 들어가 아지고촌(阿之古村)에 거주했으니 이가 금의 시조다’라고 하며 혹은 말하기를 ‘평주 승 김행(金幸)의 아들 극기(克己)가 처음에 여진의 아지고촌에 들어가 여진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으니 고을(古乙) 태사(太師)라 하고 고을이 활라(活羅) 태사(太師)를 낳고 활라가 아들이 많아 장자를 핵리발(劾里鉢)이라 하고 계자(季子)를 영가(盈歌)라 했는데, 영가가 웅걸(雄傑)이어서 중심(衆心)을 얻었다. 영가가 죽자 핵리발의 장자 오아속(烏雅束)이 위를 이었고 오아속이 졸하매 아우 아골타가 섰다고 한다.”
또한 ‘고려사’의 같은 예종 4년(1109) 6월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여진 사신이 고려에 와서 ‘옛날 우리 태사 영가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우리 조종이 대방(고려)에서 나왔으니 자손에 이르러서도 의리상 귀부함이 마땅하다’고 했고 지금 태사 오아속도 역시 대방을 부모의 나라로 삼나이다.”
항일독립운동가요 민족사학자인 백암(白岩) 박은식은 ‘꿈에 금태조를 만났다(夢拜金太祖)’는 글을 썼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얼마나 분했는지 꿈에 금태조가 나타나더니 이렇게 꾸지람을 하셨다는 것이다.
“너는 조선의 유민이 아닌가. 조선은 짐의 부모의 고향이요 그 민족은 짐의 동족이라. 지금 조선민족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볼 때 매우 측은한 바가 있으나 하늘은 자분자강(自奮自强)하는 자를 돕고 자포자기하는 자를 싫어하시나니 이것이 천의(天意)다. 너희 조선민족은 아직도 과거의 죄악을 반성하지 못하고 있구나.”
물론 이 글은 역사소설이다. 그러나 근거 없는 소설가의 소설이 아니라 진실만을 말하는 역사가의 소설이다. 규장각 부제학을 역임한 김교헌(金敎獻)은 소상하게 신라 왕손이 여진 땅에 가서 먼저 완안부의 지도자가 되고 어떻게 해서 금나라를 세우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그의 한국사 개설서인 ‘신단민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말갈이 발해에 속했는데 발해가 망하니 그 부락의 전체 이름을 여진이라 했다. 또 백두산을 동과 서로 나누어 서쪽은 숙여진이라 하고 동쪽은 생여진이라 했다. 요에 속했으나 생여진은 나라를 스스로 다스리는 제도 아래에서 임금을 태사(太師)라 했다. 그리고 신라의 종실 김준의 아들 극수(克守)를 맞아 왕위에 앉혔는데 부락의 이름을 완안(完顔)이라 하고 그들의 성이 되었다. 완안은 여진 말로 왕자라는 뜻이다.”
납북 사학자 손진태도 ‘금태조는 황해도인야’라는 논문에서 금태조 아골타가 스스로 고려는 ‘부모 지방’이라 했고, 중국측 기록 ‘금지’에는 금나라 왕은 본시 신라인이요 호가 완안인데 완안은 한어로 왕이란 뜻이라고 기록돼 있다고 한다. 금태조가 신라인이라는 것은 이미 고려 때부터 전한 이야기여서 ‘고려사’에 기사가 너무 많다고 말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 와서 실학자 이수광이 그의 ‘지봉유설’에서 “옛날 금의 완안씨는 본시 고려인이었기 때문에 고려에 매우 후하게 대했고 끝내 침범하지 않았다. 의주는 원래 고려 땅이라 금이 요를 멸한 뒤 고려에 돌려주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잠정적인 결론에 도달하여야 할 것 같다. 우리는 오랫동안 신라가 무기력하게 망했다고만 생각했다. 심지어 이등박문이 고종을 협박하여 양위시킬 때도 신라 경순왕을 인용하면서 양국(讓國)이 마치 한국의 전통인 양 놀려댔다. 또한 그 뒤에 친일파 이광수가 소설 ‘마의태자’를 써서 마의태자의 금강산 입산을 널리 기정사실화했다. 광복 후에도 현인의 ‘신라의 달밤’이 히트하여 신라는 백제와 달리 두말하지 않고 고려 왕건에게 항복한 것으로 알게 됐다. 그러나 금강산의 태자 유적지를 가나 설악산의 유적지를 가나, 마의태자는 아버지인 경순왕 앞에서 말했듯이 천명이 아니고서는 신라는 망하지 않는다고 믿고 충신 의사를 모아 끝까지 역전사수(力戰死守)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마의태자의 후손이 여진에 가서 금나라를 세워 선조들이 이루지 못한 유한을 풀고야 말았던 것이다. 이 얼마나 장한 일이며 진실한 역사인가.
여기서 꼭 해두어야 할 말은 지금까지 중국의 역사로 알던 발해와 요 그리고 금의 역사는 우리 역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사대주의 유학자들은 감히 중화를 침범한 요와 금나라를 우리나라 역사 속에 끌어넣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발해는 겨우 우리 역사라 했으나 요나 금은 우리 역사의 울타리 밖으로 몰아낸 것이다.
지금의 중국사가 성립된 것은 청나라 때의 일이다 그 이전의 중국사는 이른바 중화민족의 역사였다. 몽고는 물론 거란(요), 여진(금)의 역사는 중국사가 아니었다. 이들 역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킨 것은 청나라였다. 청은 후금이요 여진의 나라였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잃어버린 우리 역사를 되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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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신각라가 말장난이 아닌게 밝혀졌고..
금서 이외에도 많은 곳에서 기록이 나오는군요 ^^
고려사, 만주원류고 등등(설마 만주원류고를 위서로 보는분은 없겠죠 ^^)
마의태자설도 저도 처음에 단순히 근거 없는 주장인줄만 알았는데
뜻밖에 수긍가는 근거들이 많네요..
단순히 무시하기에는 많은 증거가 있네요 ^^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아무래도 마의태자설 옳은것같네요 ^^
첫댓글아 짜증나. 도대체 귓구멍이라는 신께서 만들어 주신 소중한 물건이 있기나 하는겁니까? 위 글이 모두 '진실'이라고 가정한다 하여도 도대체 어디에 금나라가 당시 고려인과 강한 문화적 동질성을 공유했다는 말입니까? 금사를 국사에 포함시킬수 있는 근거는 이 글 어디에도 없습니다.
저도 노잘란님과 같은 생각을 한건 벌써 수년전입니다.....하지만.....여느카페에서 그런 말하다...집중포화를 맞고 말았죠.......노잘란님 그냥 님만 알고 가세요......여진인하면...야만인이라 우리와는 전혀 혈연적 관계까지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또 그러면서 고구려는 우리나라라고 강력히
고구려는 클랜 이름입니다...^^;; 한 예로 미국의 인디언 역사가 독립적으로 인정받는 것은 아닌 것을 상기해 주세요...엄연히 인디언은 미국인의 주축과 다른 민족입니다...그렇다면 그들 역시 소수민족이라는 이야기가 성립되죠...그렇지만 그들은 엄연한 미국인이고 인디언의 역사는 미국의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아즈텍 잉카는 넘어가도록 하고 위에 적은게 제 논리입니다. 그 논리에 따라 판단하면 지금 현재 청과 금의 역사는 중국본토를 바탕으로 한 여진족의 역사이고 그 민족은 현재 중국에 속해 있습니다. 그렇다면 원의 역사는 그렇다고 치고 만주의 역사는 지금 당장은 중국의 역사로 봐야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노잘란님의 말씀에 따르자면 다민족 국가의 경우 중심민족의 역사가 그 국가의 역사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금과 청의 중심민족은 엄연한 여진,만!주!족입니다...그리고 한국은 엄연한 韓민족이구요...중심민족의 역사라는 부분에서도 노잘란의 생각은 그 근거가 없어집니다...
역사의 편입에 있어 중요한 점은 '현재 국가와 고대 국가의 영역의 일치성', '민족의 동질성', '문화의 동질성' 이 3가지가 그 중점입니다...하지만 금의 경우는 위의 3가지 중 어느 것에도 일치하지 않는군요...노잘란님의 주장은 가설을 바탕으로 하면서 위의 조건에 부합되는 부분도 없습니다...
흑태자 에드워드/하지만 낮쯤에 노잘란님과 개인적으로 사담을 한 결과 노잘란님은 [금,청의 역사는 중국이 주인이 아니며 따라서 우리역사로 편입시켜야 한다]라는 헤괴망측한 논리를 펼치시더군요-_-. 역사라는 것이 남의 것이 아니라고 주워 가지면 우리것이 되는. 먼저 줍는 놈이 임자인 그런 물건이었나 궁금해집니다.
저는 노잘란님의 [금,청은 중국의 역사가 아니다]라는 앞 의견에 대한 비판이 아닌 [그러므로 우리나라 역사에 편입시켜야 한다]라는 뒷 의견을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주족은 만주족이지 그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혈연적 관계를 완벽하게 부정하지는 않겠으나 그것 하나만으로 함부로 결론을 내리기에는 문화적
장님이십니까? 문맹자십니까? 난독증이 있으십니까? 터진 입에서 나온다고 다 말이 되는것은 아닙니다. 도대체 어딜봐서 N.R님의 댓글이 [지구 절반 영국과 중국이 가져라]라는 주장과 통한답니까? 청,금의 역사를 우리나라에 억지로 포함시키고 나면 무엇하실랍니까? [두체!두체!]를 외치시며 거리로 뛰쳐나가 실랍니까?
중국공안 스파이라...ㅡㅡ 그렇게 보실수도 있겠군요... 제 글에는 분명히 그런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주장이 포함되어 있으니까요...하지만! 그 외의 내용인 지구절반을 영국과 중국이 가져가고, 일제치하에서 독립운동하신 불들을 테러리스트 만들었다는 것은 해명해 주시기 바랍니다...어디서 그런 생각이 드셨는지...
첫댓글 아 짜증나. 도대체 귓구멍이라는 신께서 만들어 주신 소중한 물건이 있기나 하는겁니까? 위 글이 모두 '진실'이라고 가정한다 하여도 도대체 어디에 금나라가 당시 고려인과 강한 문화적 동질성을 공유했다는 말입니까? 금사를 국사에 포함시킬수 있는 근거는 이 글 어디에도 없습니다.
위의 글대로 친다면 프랑스 독일은 한 역사겠군요...프랑크왕국에서 갈라졌으니...ㅡㅡ;
고구려님 ^^ 만주족이 독립하지 않았습니까 ^^
프랑스와 독일이 엄연히 국가로 존재하는 이상 그런 일이 없겟찌요 중요한건 만주족국가가 없지 않습니까 ^^
그렇게 주장하다가 고조선이 중국에게 뺏길 빌미를 줄지도 모릅니다.
저도 노잘란님과 같은 생각을 한건 벌써 수년전입니다.....하지만.....여느카페에서 그런 말하다...집중포화를 맞고 말았죠.......노잘란님 그냥 님만 알고 가세요......여진인하면...야만인이라 우리와는 전혀 혈연적 관계까지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또 그러면서 고구려는 우리나라라고 강력히
주장하고요.........현재 차이나드레스의 원조도 건주여진의 복장이며...그들도 고추만 없는 김치류도 먹었으며......온돌도 사용했습니다........뭐....여진의 역사.....우리가 국사에 쓸수없다면......중국 줘버려요...........발해도 뭐도 전부다.....
만주족이 중국인인 이상 만주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에 편입해야 하죠...그건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위와 같은 부정확한 사료보다는 좀 더 확실한 자료가 있어야 노잘란님의 주장이 통할 것 같군요...
고구려님....... 그럼 중국에 속한 나라없는 소수민족의 역사는 중국사가 되는것입니까?
아무리 다민족 국가라고 해도.. 중심민족의 역사가 그나라의 역사가 되는것이지...... 미국도 다민족 국가인데... 미국사는 오직 오리지날 미국인의 역사만이 있으며 러시아도 다민족 국가인데 오리지날 러시아인의 역사만이 자신들의 국사입니다만.
고구려는 클랜 이름입니다...^^;; 한 예로 미국의 인디언 역사가 독립적으로 인정받는 것은 아닌 것을 상기해 주세요...엄연히 인디언은 미국인의 주축과 다른 민족입니다...그렇다면 그들 역시 소수민족이라는 이야기가 성립되죠...그렇지만 그들은 엄연한 미국인이고 인디언의 역사는 미국의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아즈텍 잉카 문명도 연관성이 있는듯한데 거기에 대한 제 상식이 부족하여 연관을 짓지 못하겠군요...
아즈텍 잉카는 넘어가도록 하고 위에 적은게 제 논리입니다. 그 논리에 따라 판단하면 지금 현재 청과 금의 역사는 중국본토를 바탕으로 한 여진족의 역사이고 그 민족은 현재 중국에 속해 있습니다. 그렇다면 원의 역사는 그렇다고 치고 만주의 역사는 지금 당장은 중국의 역사로 봐야되지 않을까요?
만약 한국이 다민종 국가이고 고대에 신라 고구려 백제가 각각 다른 민족으로 구성된 국가였다고 쳐도 그 국가들은 현재 하나의 나라의 전신이고 그에 따라 한국의 역사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노잘란님의 말씀에 따르자면 다민족 국가의 경우 중심민족의 역사가 그 국가의 역사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금과 청의 중심민족은 엄연한 여진,만!주!족입니다...그리고 한국은 엄연한 韓민족이구요...중심민족의 역사라는 부분에서도 노잘란의 생각은 그 근거가 없어집니다...
역사의 편입에 있어 중요한 점은 '현재 국가와 고대 국가의 영역의 일치성', '민족의 동질성', '문화의 동질성' 이 3가지가 그 중점입니다...하지만 금의 경우는 위의 3가지 중 어느 것에도 일치하지 않는군요...노잘란님의 주장은 가설을 바탕으로 하면서 위의 조건에 부합되는 부분도 없습니다...
인용하신 부분 역시 정설이 아닌 가설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군요...노잘란님 학자가 발표했다고 해서 무조건 정설인 것은 아닙니다...제 생각에 위의 글은 어느 정도의 자료를 가지고 발표한 가설인듯 하군요..가설을 바탕으로한 주장은 자제를 좀 해주시길...
에구...
미국의 인디언역사가 독립적으로 인정받는게 아니다 하셨는데 누가 그런 판단을 해서 인정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지금 민족레벨로 거론하는 것인데, 민족역사라면 그 민족의 입장에서 판단해야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3가지는 중국인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흑태자 에드워드/하지만 낮쯤에 노잘란님과 개인적으로 사담을 한 결과 노잘란님은 [금,청의 역사는 중국이 주인이 아니며 따라서 우리역사로 편입시켜야 한다]라는 헤괴망측한 논리를 펼치시더군요-_-. 역사라는 것이 남의 것이 아니라고 주워 가지면 우리것이 되는. 먼저 줍는 놈이 임자인 그런 물건이었나 궁금해집니다.
만주족과 우리민족과의 연관성은 접어두고라도 중국역사로 치부하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군요. 인디언이나 만주족이 있다면 끄잡고 물어보고 싶군요. 또한 티벳의 역사가 서구에서 독립적으로 인정되는 점은 어떻게 여기시는지?
저는 노잘란님의 [금,청은 중국의 역사가 아니다]라는 앞 의견에 대한 비판이 아닌 [그러므로 우리나라 역사에 편입시켜야 한다]라는 뒷 의견을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주족은 만주족이지 그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혈연적 관계를 완벽하게 부정하지는 않겠으나 그것 하나만으로 함부로 결론을 내리기에는 문화적
이질감이 매우 심합니다.
저 역시 논리를 펼치다보니 '금,청의 역사는 중국에게 무조건 편입시켜야 한다'는 이상한 주장을 펼쳤군요...ㅡㅡ 이 점은 사과드립니다.
고구려님....님이 주장하신 내용은....혹시...중국 공안쪽에서 오신 스파이가 아닐찌....의심스럽습니다....허허...지구절반은 영국과 중국이 가져야겠군요,,,,,,카카카카카 웃음밖에 안나옵니다....
고구려님이 한말은 일제하에서 독립운동하신분들을 테러리스트로 만드는겁니다...........
가스가 겐고로님. 그렇게 따지자면 귀하들의 의견은 제눈에 섬나라 우익진영과 만만디 똘아이들의 의견과 맥락을 같이하는 파시스트들의 논리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할말이 있고 않할말이 있는법 입니다.
NR님이 금,청역사가 한국사에 편입되는것이 불가함을 이야기 하신것을 빼면 도대체 어디에 [금,청은 무조건 일고의 제고도 없이 중국역사에 포함되어야 한다]라는 주장이 있답니까? 혹시나 생겼던 오해를 해명하기 위해 친절하게 덧 사과문까지 붙이셨습니다만. 중국 공안이 파견한 스파이?
장님이십니까? 문맹자십니까? 난독증이 있으십니까? 터진 입에서 나온다고 다 말이 되는것은 아닙니다. 도대체 어딜봐서 N.R님의 댓글이 [지구 절반 영국과 중국이 가져라]라는 주장과 통한답니까? 청,금의 역사를 우리나라에 억지로 포함시키고 나면 무엇하실랍니까? [두체!두체!]를 외치시며 거리로 뛰쳐나가 실랍니까?
중국공안 스파이라...ㅡㅡ 그렇게 보실수도 있겠군요... 제 글에는 분명히 그런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주장이 포함되어 있으니까요...하지만! 그 외의 내용인 지구절반을 영국과 중국이 가져가고, 일제치하에서 독립운동하신 불들을 테러리스트 만들었다는 것은 해명해 주시기 바랍니다...어디서 그런 생각이 드셨는지...
노잘란님은 다른사람말은 안듣고 자기주장 펼치기만 좋아하는군요. 이무수한 리플들은 귀하에게 문제가 있다는 증거들입니다. NR님 노잘란님에게 동요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님도 취급이 비슷해지려합니다.
충고 감사드립니다~^^
제가 말이 지나친점은 사과드립니다......음..제가 생각해도...전 파시스트가 맞는듯 싶습니다..... 파시스트가 잠시 흥분했다 생각하시죠....
만주원류고는 청국이 '한족에 대한 문화적 열등감'에 고대이래 만주-한반도의 역대국가들을 모조리 자신들의 역사로 날조해 쓴 문헌입니다. 따라서 사서로서의 가치는 제로에 가깝습니다. 일반적인 역사학자라면 만주원류고를 사료로 입론을 세우지는 않습니다.
신라가 소호금천씨의 후손을 칭한것도 그것이 실제 사실이어서 라기 보다는 어떻게든 중국문명에 자신들의 시조를 연결해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 입니다. 이런 경우는 흉노족 같은 경우에도 나타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