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흩어지는 향기
향기란 감출 수 없다는 것이 바로 그 진가이다. 그래서 옛 선비들은 군자의 향기를 간직하려고 매난국죽(梅蘭菊竹)의 사군자(四君子)를 가까이 두려고 했다. 그런데 그 향기가 바람 앞에 설 때에는 더욱 멀리 퍼지어 감출 수가 없게 된다. 때로는 이것이 비극이 된다. 사향노루가 그러하다. 사향을 지닌 노루가 산속 바위 위에 고고하게 서있을 때에는 저절로 주위를 향기롭게 한다. 그가 어찌 바람을 향하여 오랫동안 서있을 수가 있을까? 사냥꾼의 총부리가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총알이 사향주머니를 노리어 맞추면 명중(命中)이 될 것이고, 노루 몸통을 관통하면 적중(的中)이 될 것이다. 이 때 노루는 자신을 위험에 빠뜨린 배꼽을 물어 씹으려고 해도 입이 미치지 않는다. 자신이 간직한 보물이 오히려 화근이 된 것이다. 그래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서제막급(噬臍莫及)이란 고사성어가 나온다. 한번 기회를 잃어버리면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이 말이 종원이가 용고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다는 오늘의 사자성어(四字成語)이다.
오늘 설이 지난 토요일 반창회모임 장소는 쌀과 도예의 고장인 이천이었다. 쌀 나무인 벼를 우리말로 ‘서리 풀’이라고 한다. 상서로운 풀 즉, ‘서초‘(瑞草)이다. 상스러운 풀은 향기로운 풀이기도 하다. 利川이란 말도 벼(禾)를 추수(刀)하는 냇가(川)란 말이니 옛 부터 벼가 자라기 좋은 곳으로 보인다. 또한 도예(陶藝)란 말도 우리 조상들의 전통이 향기로 묻어나는 그릇 만들기이니, 맛좋은 쌀을 아름다운 그릇에 담아 먹는 풍치가 있는 곳이다.
우리 친구 11명이 오전11시에 하나같이 판교역 경강선 승강장에 모였다. 경강선이란 조금 낯선 이름이다. 지난 대선에서 어떤 아줌마가 ’경인선 가즈아!‘라고 목소리 높였다는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런데 그 이름은 서울에서 강릉까지의 의미라고 한다. 언제 강릉까지 연결될지 모르지만 누군가 우리 모두 강릉까지 전철을 탈 수 있을 때까지 건강하게 살아있자! 라고 제안했다. 30여분가량 지나자 목적지인 신둔 도예촌역에 도착했다. 자가용 3대가 우리를 마중 나왔다. 이동수 회장 부부, 그리고 장남까지 동원되었다. 바로 점심예약 장소인 ’거궁‘이란 쌀밥 한정식집에 도착하여 맛난 쌀밥을 즐겼다. 이회장이 일본에서 가져온 금릉(金陵)이란 사케(정종)로 건배를 들었다. 입안이 얼음처럼 차갑고 상큼하도록 신선한 맛이었다.
그 다음 행선지는 사기막골 도예촌이었다. 이 광주교수의 대학원장 시절 이천시와 ‘1도시 1학교’ 결연을 맺어 행사를 한 곳이라고 한다. 이회장의 안내로 고암요(古岩窯)를 방문하였다. 가정집 같은 곳에 전시장과 가마가 있었다. 고암 김 흥복 선생이 빚은 백자, 진사, 분청 다관과 당초문양의 청자 잔, 매화문양의 자기, 붉은 사과처럼 탐스런 진사항아리, 소박한 백자 달 항아리 등 우리 선조들의 얼과 멋이 절제된 색깔과 문양으로 표현되어있다. 서글픈 소식은 아드님도 도예과를 나왔으나 대를 잇지 않고 다른 일을 한다는 김 선생의 설명이었다. 그만큼 도자기의 수요가 줄어들었다는 현실이다. 매년 도자기 축제가 열리지만 식문화의 변화로 우리 고전그릇이 뒷전으로 밀리는 추세는 어찌 할 수 없나보다. 도예촌 가게에 진열된 그릇들도 현대감각에 맞는 생활도예가 눈에 뛴다.
마지막 목적지는 이 회장 모친께서 계시는 곳이다. 올해 춘추가 94세임에도 놀라울 정도로 신관이 깨끗하시고 건강하신 모습이다. 엘리너 루즈벨트의 시가 생각났다.‘아름다운 젊음은 우연한 자연현상이지만, 아름다운 노년은 예술작품입니다.’ (Beautiful young people are accidents of nature. But beautiful old people are works of art.) 모친께서 엄격한 자기관리를 하신 듯하다. 아들친구들의 세배를 받으시고 약간 겸연쩍어하셨지만 기분도 좋으셨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회장 부인께서 다과와 약식과 커피까지 대접받고 한담을 나누었다. 나올 때에는 모친을 모시고 마당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오래도록 건강하시기를 빌었다.
우주자연의 질서인 하늘의 도를 깨닫는 것이 성인의 역할이라면 그 것을 실천하는 것은 군자의 사명이라고 한다. 하늘의 도란 시간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전도서에는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고 한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다고 한다. 더욱이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는 천륜이라고 한다. 부모님 생전에 자식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다 하는 것을 효(孝)라 한다. 孝字를 파자하면 十 + 九 + 子인데 十이란 완전수이고, 1-9이란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의 시간인 성장과정으로 이 기간 자식(子)으로서 부모에게 해야 할 일을 다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르칠 敎字란 효로 인도하는 교육을 일컫는 것이라고 한다. 나이가 70 중반으로 들어서야 이제서 이런 일들을 깨닫게 되는 것이 참으로 부끄럽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시간을 자식들에게 전해야 할 때이다. 부모로서의 일을 하고 살아야할 때이다.
오늘 반창회모임을 통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할 수만 있으면 향기를 조금씩 풍기며 살았으면 좋겠다. 그저께 7일 장모님 생신으로 마산에 갔다가 어제 저녁 늦게 고속터미널에 도착했다. 딸아이 내외와 외손녀가 마중 나왔다. 6살짜리 외손녀가 우리가 나오는 것을 보자 달려왔다. 달려오는 외손녀를 껴안았더니 그 아이가 ‘할아버지 냄새가 나’라고 했다. 그날 아침에 샤워를 했는데 무슨 냄새? 조금 기분이 그랬다. 오늘 이천에서 돌아왔을 때 그 아이가 또 쪼르르 달려와 안겼다. 그리고 할아버지 냄새가 난다고 해서, 무슨 냄새 했더니 몸 냄새라고 했다. 오늘 아침에도 샤워를 했는데, 좋은 냄새니 나쁜 냄새니 물었더니, 좋은 냄새라며 웃었다. 그래서 안심했다.
엘리너 루즈벨트의 시가 그러하듯이 ‘아름다운 젊음은 우연한 자연현상이지만, 아름다운 노년은 예술작품입니다.’라는 말은 옳다. 늙어 갈수록 관리하지 않으면 소외된다. 아이에게도 그러하다. 오늘의 키워드는 향기다. 사향노루에서 쌀의 상스런 향기, 도자기의 전통향기, 노년의 향기까지이다.
오늘 모임을 주선한 학철반장, 동수회장과 사모님 그리고 장남께 감사드리고, 함께한 광주, 국희, 병석, 상원, 재욱, 종신, 종원, 준하, 학종 친구들에게 감사드리며, 새해에도 더욱 강건하시고 평강이 함께하시기를 바라네!
종원이 여행 잘 하시고, 다음에 만나! Bon Voy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