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이 이 땅에 유입된 이래 겨레의 삶과 밀접한 관련을 맺어왔다. 꽃이 피는 세계를 극락정토로 생각했고, 저녁에 오므라들었다 아침이면 다시 피어나는 것을 보고 부활의 상징으로 믿었다. 죽어서도 연꽃이 피는 세상에서 다시 살아난다고 믿었던 우리 선조들은 고분의 중앙 가장 높은 천장에 연꽃을 그려 사후 세계의 낙원으로 삼았다.
건축물도 연꽃으로 단청을 했으며, 가장 화려한 비단 옷의 옷고름에도 연꽃을 그려 넣었다. 또 연꽃으로 차를 끓이거나 연잎, 연밥, 연근은 요리의 재료가 되었다. 죽어서도 연꽃을 장식한 꽃상여를 타고 저승의 강을 건넜다. 연꽃이 우리 겨레의 마음속에 얼마나 깊이 자리잡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연꽃은 생활 속에서뿐만 아니라 정신 세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많은 문학 작품 속에서 연꽃을 예찬했고 건축과 공예, 회화에서도 연꽃을 주제로 한 작품이 남아있다. 연꽃이 주는 의미와 우리의 의식주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연꽃은 열대 아시아와 오스트레일리아 원산으로 알려져 있다. 야생 상태로 자라는 지역만 해도 우리 나라를 비롯하여 중국, 러시아 동북지방, 인도,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오스트레일리아 등지에 넓게 분포한다. 식물 생태학적으로 보면 연꽃은 수련과에 속하는 다년초로서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다. 근경은 옆으로 길게 뻗으며 원기둥꼴이고 마디가 있다. 이 마디에서 실 뿌리를 내리고 진흙 속을 기면서 자란다.
연꽃은 종자 발아 능력이 그 어떤 식물보다 뛰어난 편이다. 일본의 오오가이찌로 박사는 2000년 전의 호수 진흙 층에서 발굴한 연꽃 씨를 발아시키는데 성공했다. 동경 부근의 5.4m 되는 깊이에 묻혀 있던 카누에서 세 개의 연꽃 씨가 발굴되었는데 그 중 두 개에서 싹이 튼 것이다. 그 연꽃이 씨가 여물어 지금은 세계 여러 나라 식물원에 보내져 자라고 있다.
씨가 워낙 단단하고 물이 묻지 않기 때문에 쉽게 발아하지 않는다. 물에 떨어진 씨는 물길을 따라 멀리멀리 퍼져 나가고 진흙 속에 수십 수백 년 동안 묻혀있다가 어느 때 조건이 맞으면 싹이 터서 자란다. 연의 학명 Nelumbo nucifera에서Nelumbo는 세일론어로 연꽃이라는 뜻의 라틴명이다. 또 뒤의 종소명 nucifera는 씨가 단단하다는 뜻이다.
연근과 연잎의 잎자루를 자르면 굵은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구멍을 통해 물위와 물 아래로 호흡을 한다. 잎은 수면에 뜨기도 하지만 수면 위로 솟아올라 전체 길이 1∼2m나 자란다. 잎은 원형이고 가장자리가 밋밋하고 매끄럽다. 잎자루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돋아나 있어서 맨살에 스치면 살갗이 찢어질 정도이다.
연잎은 물이 묻지 않고 물방울이 되어 구른다. 꽃은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이면 오므린다. 이렇게 며칠을 반복하는 동안 꽃이 수정되면 꽃잎이 처지고 이어 한 장씩 떨어진다. 꽃잎이 지는 모양을 자세히 보면 먼저 녹색의 꽃받침이 떨어진다. 그 다음 꽃잎은 오래도록 남아 있다가 밑에서부터 한 장씩 떨어져 버리고 암술머리만 남게 된다. 연꽃의 암술머리는 유난히 크다. 처음에는 위를 보고 꼿꼿이 서지만 씨가 익어 가는 동안 고개를 숙이고 종자가 완숙할 때쯤엔 완전히 밑을 향한다.
2. 오왕 부차와 세기의 미인 서시가 좋아했던 꽃
중국의 고생물학자 서인(徐仁) 박사는 1000만 년 전 지층에서 연꽃잎 화석을 발굴하였다. 또 1973년에는 절강성 여요현(余姚縣)의 7000년 전 하모도문화(河姆渡文化) 유적지를 발굴하였는데 이곳에서 놀라온 유물이 쏟아졌다. 그 중에서 식물학자의 눈길을 끈 것이 바로 연꽃 화분이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적어도 1만 년 전부터 중국의 남부 지방에서는 연꽃을 널리 심었으며 식용 또는 약용으로 생활에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연꽃은 연화(蓮花), 수지(水芝), 부용(芙蓉). 수화(水華), 수운(水芸), 빙단(氷旦), 수부용(水芙蓉), 택지(澤芝), 옥배(玉杯), 초부용(草芙蓉), 유월춘(六月春)이라는 여러 가지 이름을 갖고 있다. 동양에서 연꽃을 재배한 역사는 유구하다. 기원 전 500여 년 오(吳)나라 왕 부차(夫差)는 호산(虎山)의 궁(宮)에 연못을 파고 총애했던 비 서시(西施)와 함께 연꽃을 완상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서시로 꼽는다. 당대의 영웅 오왕도 서시를 잊지 못할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 때문인지 오월(吳越) 지방에서 생산되는 연근을 서시비(西施臂)라 하는데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요리라는 뜻이다.
3. 식용, 약용, 관상식물로 널리 재배해 온 연꽃
《시경(詩經)》진풍(秦風) 편에 한 여인이 사모하는 마음을 연못에서 자라는 연꽃과 부들에 비유하여 호소하고 있다.
저기 연못에 부들과 연잎이 정답게 자라네
사모하는 이여 그대를 향한 내 마음 어찌하오리까
자나깨나 애타는 마음 일손 놓고 눈물짓네 라고 적고 있다.
彼澤之陂 有蒲與荷
有美一人 傷如之何
寤寐無爲 涕泗??
부들은 남성을, 연잎은 여성을 비유한다. 연못에서 부들과 연잎이 정답게 자라고 있는데 그리운 님은 언제 돌아와 함께 지낼 수 있을까. 그리움이 사무쳐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고 있다는 애절한 사랑의 노래이다.
기원 전 700여 년에 이미 연의 각부 명칭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도 연꽃이 널리 심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아(爾雅)》석초(釋草) 편에, 연(荷)은 부거(芙呱)라 한다.
잎자루(葉柄)를 하라 하고 지하경에서 솟아오른 어린 싹을 밀(密)이라 한다. 또 꽃봉오리를 함담, 연의 씨방(花托))을 연(蓮)이라 하고, 씨(蓮子)는 적(?), 씨 중에서 배아(胚芽)를 의(薏)라 한다
당의 수도 장안(長安) 부근에도 부용원(芙蓉苑)이라는 넓은 연못이 있어서 여러 가지 연꽃을 심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 뿐만 아니라 겹꽃의 백련도 기록하고 있다. 왕인유(王仁裕)가 쓴 《개원천보유사(開元天寶遺事)》에는, "명황(明皇) 가을에 태액지(太液池)에 겹꽃(千葉) 백련(白蓮)이 여러 송이 피었다"고 했다. 또 동진(東晋) 이전에 이미 연꽃을 화분에 심어 가꾸기도 했다.
송나라 때는 분재기술과 함께 연못에 수경식물(水景植物)을 널리 재배하기도 했다. 당시의 연못에는 연꽃 외에도 수련, 마름, 부들, 갈대를 심었으며, 연못 가장자리에는 버드나무를 심어 수면에 어리는 영(影)을 즐겼다. 송의 동파(東坡) 소식(蘇軾)은 그의 《물류상감지(物類相感志)》에서, "양양 석량산 위에 연못이 있는데 보라색 연꽃이 핀다"고 적었다.
명대에는 본초학(本草學)의 발달에 힘입어 식물 분류학적으로도 많은 발전을 이룩했다. 또한 강남의 일부 호족들은 정원을 지나치게 호사스럽게 꾸몄는데 연못을 파고 가장자리는 태호(太湖)에서 나오는 질 좋은 태호석(太湖石)을 쌓아 마감했다. 연못을 팔 때 나온 흙으로 전설 속의 수미산(須彌山)을 조성하고 갖가지 기화요초(琪花瑤草)를 심었다.
16세기에 펴낸 《제민요술(齊民要術)》에는 연꽃 재배법과 함께 연씨의 단단한 껍질을 칼로 깎아서 심으면 쉽게 발아시킬 수 있다는 사실까지 기술하였다. 청 가경(嘉慶) 년간에 펴낸 《강하보(?荷譜)》에는 33종의 연꽃 품종을 기술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60년대 이후 연꽃의 개량에 힘을 기울인 결과 많은 신품종을 길러냈다. 항주(杭州), 무한(武漢), 북경식물원에서는 현재 300여 종의 연꽃 신품종을 작출(作出)하여 세계 원예시장에 내놓았다.
4. 불교와 함께 이 땅에 들어온 자원식물
불교를 상징하는 꽃, 하면 누구나 연꽃을 연상하게 될 것이다. 연못에 핀 연꽃의 청초한 모습을 보면 세상에 이처럼 깨끗한 것도 있었구나 하고 감탄하게 된다.
정말 연꽃만큼 순수하고 티없이 맑은 빛깔의 꽃도 흔치 않을 것이다. 진흙탕에 핀 연꽃이지만 주위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아서 예로부터 '성자(聖者)의 꽃'이라 불리어 왔다.
연꽃은 웅덩이에서 자란다. 물이 있으면 우선 시원하다. 인도라는 열대성 기후대에 속한 땅에 사는 사람들은 물이 있는 인더스강을 신성한 곳으로 여긴다. 불교에서는 가장 이상적인 삶의 터전, 즉 열반에 드는 것을 '물이 불을 끄는 일' 에 비교한다. 뜨거운 불기둥 같은 땅에서 더위와 고통에 시달리다가 시원한 연못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을 최고의 안락으로 생각했다.
그러한 물 속에 고귀한 연꽃으로 다시 피어날 수만 있다면 얼마나 근사한 바램이겠는가? 그래서 연꽃을 부활의 상징으로 보았고 재생의 기운을 타고난 꽃으로 보았다.
《무량수경(無量壽經)》에 의하면 '극락세계의 보련화(寶蓮華)에는 백천억 개의 잎이 있고, 그 잎에서는 수많은 광명이 비치며, 하나하나의 빛에서 부처가 나타난다'고 적고 있다. 또 《대아미타경(大阿彌陀經)》에는 '목숨이 다한 뒤에 극락세계로 가거나 칠보로 장식된 연화 세계에 다시 태어난다' 고 했다.
불교 경전에서는 연꽃이 피는 세계를 낙원으로 본 것이다. 《화엄경(華嚴經)》에는 향수가 가득한 바다에 거대한 연꽃이 떠 있고, 그 연꽃 속에 비로자나여래가 사는 화장장엄세계해(華藏莊嚴世界海)가 있다고 한다.
우리 나라와 일본에도 오래된 늪지나 연못에 연꽃이 널리 분포하고 있지만 언제부터 자라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5세기 경 일본의 웅략왕(雄略王) 때 중국의 연꽃이 조선반도를 거쳐 일본에 전해졌다는 기록으로 보아 적어도 그 이전에 한반도에서는 연꽃을 널리 재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고분벽화에서 볼 수 있듯이 불교와 함께 이 땅에 들어온 연꽃은 처음에는 불교를 상징하는 신성한 꽃이었으나 약용 또는 식용으로 쓰이면서 민간으로 퍼져나갔을 것으로 보인다.
이수광(李?光)의《지봉유설(芝峰類說)》에는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이 안변 부사로 있을 때 심은 연꽃이 활짝 피었다고 적고 있다. 또 강릉의 함담지에 심어진 연꽃은 해를 걸러 꽃을 피우는 괴상한 연꽃이라며, 연씨는 백 년을 지나도록 상하지 않고 연근은 땅에 버려 두어도 죽지 않는다고 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조선시대 때는 전라도 김제와 만경에서 연(蓮), 마름(菱), 순채(蓴)가 많이 난다고 했다. 또 경산과 황해도 연백에서 나는 연실(蓮實)을 토산품으로 치고 있다. 어디 이곳뿐이겠는가. 연못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연꽃을 심어 연근을 식용, 약용, 관상용으로 즐겼을 것이다.
유래가 가장 확실한 연꽃은 시흥 강씨 고택의 연못에서 자라는 옥순(玉脣)이라는 품종이다. 백련으로 꽃잎 가장자리에 붉은 줄이 둘러져 있는 지극히 아름다운 꽃이다. 이 연꽃은 조선 세종 때의 명신 사숙재(私淑齋) 강희맹(姜希孟) 선생이 진헌부사(進獻副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갖고 와 심은 것이라고 한다. 현재 간송미술관, 독립기념관, 아산 인취사(仁翠寺) 등지에 분양되었는데 해마다 고운 꽃을 피운다. 옥순을 심은 강희맹 선생은 《양화소록(養花小錄)》을 쓴 인재(仁齋) 강희안(姜希顔) 선생의 아우로 시·서·화 삼절로 당대의 이름을 더 높인 분이시다. 사숙재 선생은 《금양잡록(衿陽雜錄)》이라는 농업서적을 남겼을 정도로 식물학 지식이 뛰어난 분이시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중국에 갈 때마다 조선에 없는 백송이나, 회화나무, 석류, 좋은 품종의 매화, 모란 등을 갖고 왔다. 사숙재 선생이 얼마나 많은 식물종을 조선으로 갖고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옥순이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것은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최근 필자가 발견하여 이 지면을 통해 처음 소개하는 연이 있다. 경기 양수리에서 처음 발견했으므로 국명을 양수련(兩水蓮)이라고 했다. 재래종 홍련의 자연 변이종으로 수술이 꽃잎으로 변해서 겹꽃을 이루었다. 수술과 암술이 그대로 남아 있고 종자가 잘 열리므로 앞으로 교잡을 통해 더 많은 품종을 작출해 낼 수 있는 유전자원이다.
불교와 함께 이 땅에 전해졌을 것으로 보이는 연꽃은 전국의 중요 연못에서 매년 붉은 꽃을 피운다. 경북 상주의 공갈못, 제천의 의림지, 전주 덕진지, 해주의 부용지는 연꽃으로 유명하다.
5. 문학작품 속에 그려진 연꽃
북송 때 학자 주돈이(周敦滯)는 그의 〈애련설(愛蓮設)〉에서 연꽃을 이렇게 예찬했다.
내가 오직 연꽃을 사랑함은 진흙 속에서 태어났지만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맑은 물에 씻기어도 요염하지 않으며, 올곧은 줄기는 속이 비어 밖과 통하며, 덩굴지지 않고 가지가 없어서이다. 향은 멀수록 맑고 우뚝 선 모습은 멀리서 바라볼 일이요, 너무 가까이 할 수 없으니 연이야말로 꽃 중의 군자니라.
고려 충선왕이 원나라에서 돌아올 때 정이 든 연인에게 석별의 정을 나누며 붉은 연꽃 한 송이를 선물했다. 그 낭자는 돌아온다던 님을 애타게 기다렸지만 소식이 없었다. 마침 조선으로 귀국하는 이익재(李益齋)를 만나 연시를 적어 보낸다.
떠나실 때 주신 연꽃
처음에는 붉고 붉더니
오래지 않아 꽃 시들고
초라한 모습 사람 같더이다.
贈送蓮花片
初來灼灼紅
辭枝今幾月
憔悴與人同
선명한 연꽃이 언제까지나 붉게 피어있을 것 같더니 이제 시들어 초라한 모습으로 남았다. 사람의 마음도 연꽃처럼 변하고 말았는가. 그리운 님을 만날 수 없음을 한탄하며 한편으로는 원망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상주에는 연밥 따는 노래(採蓮謠)가 전해내려 온다.
상주 함창 공갈못에
연밥 따는 저 처자야
연밥 줄밥 내 따 줄게
이내 품에 잠들어 주게
잠자기는 어렵잖소
연밥 따기 늦어 가오
상주의 대표적인 이 노래는 공갈못을 배경으로 연밥 따는 아가씨와 연정을 품은 남정내의 대담 식으로 구성돼 있다. 낭만과 시정이 깃든 상주 공갈 못은 삼한시대에 축조된 저수지이다. 관계농업용 시설물이며 당시의 뛰어난 토목기술을 보여주는 유적이다.《상산지(商山誌)》에 따르면 제방의 길이가 860보이고, 연못의 둘레 16,647척이나 된다고 했다. 수심이 다섯 길이나 되는 연못에 연꽃이 가득 피어 일대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매년 여름 연밥이 익을 때쯤에는 부녀자가 연밥을 채취하기 위해 몰려들었고, 가을에 잎이 마르면 연근을 캐서 각종요리를 만들어 먹었다.
전남 강진군 성전면 금당리의 금당지(金堂池)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백련 서식지이다. 130여 년 전부터 백련이 피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그 고고한 모습을 지켜나가고 있다. 또 무안에도 10만 평에 이르는 넓은 백련 서식지가 있다. 귀중한 자원이면서도 그 동안 언론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은 백련의 가치에 대해 일반인이 깊이 인식하지 못한 때문으로 풀이된다.
중국의 시인 주자청(朱自淸)은 그의 글 〈하당월색(荷塘月色)〉에서 연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썼다.
꼬불꼬불한 연못 위를 가득 덮은 것은 넓적한 잎사귀. 수면을 뚫고 고고하게 세운 잎사귀는 무녀(舞女)의 치마. 층층이 포개어진 잎사귀마다 드문드문 빠끔히 얼굴을 내민 하얀 꽃송이가 더러는 교태롭게 피어 있고, 더러는 아직도 부끄러운 듯이 봉오리에 입막음을 하고 있다. 어쩌면 알알이 뒹구는 구슬일까, 아니면 파란 하늘의 별들일까? 아니면 욕실(浴室)에서 지금 막 나온 미인일까?
산들바람이 스치자 몇 오라기 맑은 향기는 마치 먼 나락(奈落)에서 아련히 들려 오는 노랫소리 같은 것. 이 때 잎사귀와 꽃 사이엔 조그마한 충동이 일고, 그 소동은 번개처럼 금방 연못 저쪽으로 물결쳐 간다. 서로의 어깨와 어깨를 다정하게 마찰시키던 나머지라 잎사귀 사이엔 금방 파란 물결이 길처럼 환하게 뚫린다. 그리고 잎사귀 아래로는 맥맥(脈脈)히 흐르는 유수(流水). 다만 잎사귀에 가리워 아무런 빛깔을 볼 수 없고 잎사귀만이 풍치(風致)를 보일 뿐.
달빛은 흐르는 물처럼 고요히 연꽃과 연잎에 쏟아지고 있다. 얇디얇은 파란 안개가 연못에서 으스스 일어난다. 잎사귀와 꽃은 어쩌면 마치 우유에다 멱감은 듯 보얗게 아롱져 있고, 어쩌면 가벼운 면사(綿絲)에 가리운 꿈처럼 몽롱하다.
중국 강남 지방에서는 지금도 연꽃을 딴다. 연꽃을 따는 풍습은 육조(六朝)시대부터 내려온 것으로 여러 시가에도 잘 나타나 있다. 양의 원제가 지은 〈채련부(采蓮賦)〉에는 당시의 풍습을 읽을 수 있다.
여기 선남선녀들이 두둥실 뜬 배에 몸을 싣고
천천히 선수를 틀며 술잔을 기울이네.
살며시 젖는 노에 물풀이 걸리고,
뱃전이 몸을 틀면 마름이 달아나네
가느다란 허리에 감긴 비단 자락.
돌아설 듯 망설일 듯 종종걸음,
봄의 여운을 간직한 지금은 여름,
꽃보다 잎이 향기로운 계절
치마가 젖을까 조심스레 미소짓고,
배가 뒤집힐까 옷고름 여미네.
於是妖童媛女 蕩舟心許
?首徐廻 兼傳羽杯
櫂將移而藻괘? 船欲動而萍開
爾其織腰束素 遷延顧步
夏時春餘 葉嫩花初
恐沾裳而淺笑 畏傾船而劍?
〈서주곡(西州曲)〉에는
남당에 가을이 깊어 연밥을 따려 해도,
연꽃은 높고 높아 키를 이루었네.
고개를 숙여 연밥을 만지면,
푸른 연밥은 맑은 물이라.
采蓮南塘秋 蓮花過人頭
低頭弄蓮子 蓮子淸如水
남향집 마당에 연못이 있고 그 연못에 연꽃이 가득 피어 있다. 때는 초가을이라 연밥이 익어 가고 있어 발길이 더욱 잦아졌다. 때늦게 핀 연꽃은 키를 넘어 우러러 볼 정도다. 발아래 연밥이 있어 손을 뻗었더니 웬걸 물 속에 어린 연밥일 줄이야. 하도 물이 맑아 물에 어린 허상을 실제 연밥으로 착각하고 손으로 따려고 했으니 얼마나 멎진 표현이냐.
연은 먼 옛날부터 우리의 먹거리가 되었고 때로는 불전을 장식하는 꽃으로 아낌을 받았다. 한국 전통 꽃꽂이 문화도 연꽃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불전의 공양화로 연꽃만큼 의미 있는 꽃도 없을 것이다.
6. 인동당초문을 탄생시킨 연꽃
연꽃에서 인동당초문(忍冬唐草紋)이라는 상상 속의 길상초(吉祥草)가 탄생했다. 물론 인동당초문의 인동이 어떤 식물을 뜻하는지는 아직 정확하게 고증된 바는 없다. 우리 나라 산야에 자생하는 인동이 바로 인동당초문 속의 그 덩굴식물인지 아닌지는 그리 중요한 것은 못된다. 그렇다면 당초문(唐草紋)의 당초란 어떤 식물일까.
대체로 학자들은 당 나라 풀이라는 이 당초를 난초로 보고 있다. 우리가 가꾸는 사군자 속의 보춘화나 혜(蕙) 또는 난(蘭)이 바로 당초라는 것이다. 난초를 도안화하여 연속무늬로 만든 것이 바로 인동당초문인 셈이다.
당초문은 원래 당 나라 때 고안된 문양이 아니다. 근원을 찾아 들어가면 고대 이집트 시대로 거슬러 오른다. 이집트의 연꽃무늬인 로터스(lotus)를 도안화한 장식문양이 그리스로 건너가 기원 전 5세기경에 완성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알렉산더 대왕의 동정 때 페르시아 지방으로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도에서는 아쇼카 왕이 건립한 부다카야의 난순(欄楯)에 처음 연꽃을 도안화 한 당초문이 등장한다.
이집트의 연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연꽃이 아니다. 비슷한 수련(睡蓮)을 지칭하는 것 같다. 당초문은 그 후 문양의 형태에 따라 그리스의 안테미온(Anthemion) 계와 아라비아 지역에서 발전한 아라베스크(Arabesque) 계로 나눌 수 있다.
안테미온은 잎이 다소 넓고 장중한 감이 있는데 비해 아라베스크 양식은 섬세하고 조밀한 감을 준다. 또 같은 안테미온 계의 문양에서도 원형의 꽃무늬 형식을 주로 하는 로터스(lotus), 부채꼴 꽃무늬 형식의 팔마트(palmette), 그리고 덩굴무늬 형식의 아칸더스(Acanthus)로 나눌 수 있다. 영국에서는 인동문을 허니서클(honeysuckle)이라 하고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종려나무잎(palm) 모양이라 하여 팔마트(palmette 棕櫚葉紋)라 한다. 서방의 덩굴형태로 연결되는 아칸더스 문양이 육조시대에 실크로드를 따라 동양으로 전해진 것이 인동당초문인 셈이다. 처음에는 허니서클을 번역한 인동에 중국 풀이라는 뜻의 당초문이 결합돼 인동당초문이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구려 고분 벽화에 다양한 인동당초문이 보인다. 그중 집안 제4호, 제5호분이나 사신총의 인동당초문을 걸작으로 꼽고 있다.
백제 무릉왕릉에서 출토된 왕과 왕비의 관식은 불꽃 문양과 보상화가 결합된 당초문이라 할 수 있다. 또 통일신라로 넘어오면서 서역에서 전해진 포도, 석류, 연꽃과 결합하여 여러 가지 형태의 당초문이 나타난다. 인동덩굴에 연꽃이 곁들여지면 연화당초문(蓮花唐草紋), 포도송이가 곁들여지면 포도당초문(葡萄唐草紋), 석류가 들어있으면 석류당초문(石榴唐草紋)이 된다. 그 외에도 보상당초문(寶相唐草紋), 모란당초문(牧丹唐草紋), 국화당초문(菊花唐草紋) 등 여러 가지이다.
7. 부귀다남의 염원을 담은 연꽃
연꽃은 우리 겨레의 심성에 특별한 의미로 자리잡았다. 불교를 국교로까지 승화한 고려시대에는 생활 전반에 걸쳐 연꽃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을 것이다. 연꽃을 통해 부활의 의미를 알았고 연꽃이 피는 극락정토를 믿게 되었다. 고구려 고분의 벽화에 나타난 연화나 백제 무령왕릉도 연화문 전으로 쌓았다. 사찰의 지붕을 이는 기와에도 연화문이 들어있다.
인당수에 몸을 던진 효녀 심청은 연꽃으로 다시 살날 수 있었다. 연꽃을 통해 부활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대목이다.
연꽃이라는 한 가지 식물이 회화, 건축, 공예를 비롯한 의생활, 식생활에까지 얼마나 폭넓게 쓰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건축물을 장엄하게 장식하는 단청(丹靑)에도 연꽃무늬를 뺄 수 없다. 연꽃(蓮花), 연잎(荷葉), 연봉(蓮봉), 연밥(蓮子)이 모두 단청의 소재이다.
꽃의 모양도 다양하다. 위에서 바라본 것, 옆에서 본 것, 사면에서 본 입체형도 있다. 꽃이 위로 피면 앙련(仰蓮), 밑으로 쳐지면 수련(垂蓮), 오그리거나 펼치면 파련(波蓮), 평면으로 오므리면 웅련이 된다.
조선시대 민화(民花) 속에는 삼다식물(三多植物)을 주제로 한 작품이 많다. 장수(長壽), 다복(多福), 다남(多男)을 뜻하는 삼다사상(三多思想)이 보편화되면서 복숭아(天桃), 석류, 불수감(佛手柑)이 십장생도(十長生圖)에 같이 그려지는 수가 있다. 때로는 복숭아, 석류, 연밥이 함께 그려지기도 한다.
동자가 연꽃을 갖고 노는 그림은 건강과 행복을, 연꽃 아래 노는 원앙 한 쌍은 부부의 금실을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아침이면 활짝 벌어지고 밤이면 오므리는 연꽃의 습성과 일생 동안 짝을 바꾸지 않는 원앙처럼 화목한 가정이 되기를 비는 마음에서다. 연꽃 아래 헤엄치는 잉어를 그리면 출세를 뜻한다.
그 외에도 석류와 연밥을 함께 그리거나 석류와 포도를 그려 다산과 다복을 빌었다. 석류와 불로초가 함께 그려질 때는 백자장생(白子長生)을 뜻하며, 황조(黃鳥)와 함께 그려지면 금의백자(錦衣白子) 즉 출세한 자손을 뜻한다.
연꽃이 활짝 핀 연못에서 물놀이를 하는 하동도(河童圖)나 복숭아밭에서 노는 동자 100명을 그린 백자도(白子圖), 포도덩굴에 매달려 노는 동자 그림은 모두 삼다사상(三多思想)을 반영한 작품이다. 복숭아와 불수에 수복강녕을 담았다면 연꽃과 포도에는 부귀다남의 기원이 서려 있다. 연밥의 씨가 많은 것을 취하여 자손의 번창을 염원했던 것이다. 한복의 옷고름에도 연꽃이 들어있고, 부녀자들의 안방을 장식하는 민화병풍에도 연밥을 그려 넣어 자손의 번창을 빌었다.
선비 문화 속에도 연꽃은 깊숙이 뿌리 내렸다. 옛 선비들은 연꽃을 심은 부용지(芙蓉池)에 부용정(芙蓉亭)을 지어 연꽃을 바라보면서 시회(詩會)를 열었다. 연꽃의 고매한 성정을 사랑하여 연잎에 맺힌 이슬을 모아 하엽차(荷葉茶)를 끓였다. 심신이 상쾌해 지고 혈색이 소년처럼 밝게 된다고 했다.
한양의 돈의문(敦義門) 밖 서지(西池)에는 연꽃이 많았다고 한다. 연꽃이 한창 흐드러지게 피는 새벽에 쪽배를 띄우고 연꽃 벌어지는 소리를 듣기 위해 선비들이 몰려들었다. 함께 연꽃 벌어지는 소리를 듣는 모임을 청련계(聽蓮契)라 하였다니 얼마나 운치 있는 모임인가.
연꽃에 맺힌 아침이슬을 모아 졸여서 엿을 고았는데 이것을 하로당(荷露?)이라 하여 미용식으로 썼다. 속살까지 예뻐진다고 하지만 엿을 고을 정도로 많은 이슬을 모을 수 있을지.
경북 안동의 하회(河回) 마을에는 강을 바라보면서 건너편에 둥근 바위산이 솟아있다. 이 바위산을 부용대(芙蓉臺)라 하는데 바로 연꽃 봉오리 모양을 한 동산이기 때문이다. 둥근 봉우리가 잔잔한 강물에 어리면 또 하나의 연꽃이 물 속에 잠겨 그윽한 정취를 자아낸다. 옛 선비들의 뛰어난 심미안으로 본 자연미라 할 수 있다.
8. 연꽃의 약리학적 효과
연꽃 씨를 연실(蓮實), 연자(蓮子), 석련자(石蓮子)라 하는데 말려서 약재로 쓴다. 껍질을 벗긴 연씨를 연육(蓮肉)이라 하며 맛이 달기 때문에 감석련(甘石蓮)이라고도 부른다.
연은 부위에 따라 이름이 많다. 연꽃의 암술머리를 연심(蓮心)이라 한다. 꽃에도 이름이 제각각이다. 꽃받침 즉, 송이 전체를 연방(蓮房), 잎은 하엽(荷葉), 잎 가장자리를 하엽대(荷葉帶), 잎자루를 하경(荷硬)이라 한다. 꽃을 연화(蓮花)라 하고 꽃술을 연수(蓮隨)라 한다. 근경은 연근(蓮根), 마디 부분을 우절(藕節)이라 하며, 근경을 갈아서 뽑아낸 전분을 우분(藕粉)이라 한다.
씨눈(胚)과 꽃대에는 알칼로이드계의 Nelum bine이 들어 있고, 근경에는 아미노산인 Asparagine, Arginine, Tyroisme 등을 함유하고 있다. 알칼로이드 함량은 잎에 0.4%, 잎 중앙 꼭지 부분에 0.06%가 함유돼 있다. 근경을 진통 진정제로 쓴다. 한방에서는 껍질을 벗긴 열매를 강장, 강정제로 하고 설사, 청소년의 유정에, 가슴이 두근거릴 때, 불면증과 해열제로 쓰인다.
잎은 열, 이뇨, 지혈, 지사 효과가 있고, 피로가 겹쳤을 때, 몸에 물이 찰 때 달여 마신다. 민간요법으로는 야맹증에 잎 2장을 감초와 함께 넣고 달여 마신다. 연자는 만성장염, 위염, 방광염, 요도염 등 염증성 질병에 달여 마신다. 연의 수술(蓮隨)은 강장, 유정, 치루, 토혈, 신경쇠약에 쓰고, 신장을 튼튼하게 하며 머리카락을 검게 한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연근은 피를 엉키지 않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하여 혈전 용해제로 쓴다. 송(宋)의 대관이 연근을 깎다가 양의 피를 받아 놓은 그릇에 한 조각을 떨어뜨렸다. 이상하게도 그 피가 오래도록 엉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 후부터 연근이 혈전 용해제로 유용하게 쓰이기 시작했다. 연밥은 덜 익었을 때 껍질을 까고 속에 든 열매를 날로 먹는다. 완전히 익으면 겉껍질이 딱딱한데 깨뜨려서 물에 불려 요리에 쓰거나 약재로 한다.
연은 잎, 뿌리, 열매 등 무엇 하나 버릴 것이 없다. 어린잎은 데쳐서 쌈을 싸 먹거나, 그대로 무쳐 먹는다. 큰 잎은 고기를 싸서 굽고 각종 양념을 한 고기를 찔 때 감싸는 재료로 쓴다. 이렇게 하면 연잎의 독특한 향이 배어 요리를 한층 맛있게 해준다. 또 연근은 갈아서 생즙을 내 마시기도 하지만 코피를 흘리거나 각혈이 심할 때 쓰는 약재가 되기도 한다.
연잎은 상처가 났을 때 지혈제로 쓰고, 독버섯을 먹고 중독증을 일으킬 때 잎을 짓찧어 그 즙을 마시게 했다. 또 야뇨증에 잎을 달여 마시면 특효라 했다. 지네에게 물렸을 때는 날콩과 함께 생밤, 연잎을 함께 찧어 해독제로 쓴다.
9. 정신을 맑게 하는 향기로운 연꽃차
16세기 중국의 심복(沈復)이 쓴 《부생육기(浮生六記)》에는 운(芸)이라는 여인이 연화차 끓이는 장면을 자세히 그리고 있다.
여름에 연꽃이 처음 필 때에는, 꽃들이 저녁이면 오므라들고 아침이면 피어난다. 운이는 작은 비단 주머니에 엽차를 조금 싸서 저녁에 화심(花芯)에 놓아두었다가 다음날 아침에 이것을 꺼내서 맑은 샘물을 끓여 차를 만들기를 좋아했다. 그 차의 향내는 유난히 좋았다.
이처럼 옛 선비들은 연꽃을 친한 벗 이상으로 사랑했다. 연꽃이 피면 벗을 불러 연향에 취했고 연꽃 속에 넣었던 차를 마셔 몸을 맑고 향기롭게 했다. 이와 같은 아름다운 연꽃 차의 전통은 사라지고 말았다. 연꽃을 칼로 잘라 강제로 꽃을 벌리고 그 속에 차를 넣어 실로 꽁꽁 동여맨 뒤 항아리 속에 가두어 두는 천박한 행위를 백련차의 전통이라고 자랑하고 있다.
연잎은 상처가 났을 때 지혈제로 쓰고, 독버섯을 먹고 중독증을 일으킬 때 잎을 짓찧어 그 즙을 마시게 했다. 또 야뇨증에 잎을 달여 마시면 특효라 했다. 지네에게 물렸을 때는 날콩과 함께 생밤, 연잎을 함께 찧어 해독제로 쓴다.
한국인에게 있어서 연꽃은 단순한 꽃이 아니라 믿음 그 자체이다. 서양인 좋아하는 장미나 백합은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원예식물이다.
동양인에게 있어서 연꽃의 의미는 종교로까지 승화된다. 불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 외에도 우리 심성에 잘 맞는 식물이다. 우선 우리 겨레가 꿈꾸는 낙원이 곧 연꽃이 피는 극락이라는 점이다. 연꽃 속에서 태어난 심청의 효성어린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고, 죽어서도 연꽃이 만발한 꽃상여를 타고 영생의 낙원으로 떠난다.
가장 화려하고 가장 성스러운 사원을 만들기 위해 무수히 많은 연꽃으로 장식하고 그 중앙에 연화좌대를 마련하여 부처님을 모신다. 또 연꽃은 부귀다남의 상징이며 자손의 번창과 건강장수를 염원하는 뜻이 담겨 있다. 부처를 상징하는 흰 연꽃이 고통과 질병에서 해방시켜 준다고 믿었다. 그래서 연꽃은 부위별로 각종 질병을 막아주는 영약으로 알려져 있다. 또 어린잎은 나물로, 연근은 밑반찬으로, 꽃은 차나 술을 빚어 마신다.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자원 식물인 셈이다.
최근 날로 수질오염이 가속화하고 있는 이 때 연꽃이야말로 도시의 조경용으로 식재 한다면 수질정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된다. 도시 중앙을 흐르는 작은 개천이나 호수 공원의 녹화용으로 연꽃을 심는다면 관상은 물론 수질과 공기를 동시에 정화시켜 준다. 환경을 보다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연꽃을 많이 심어야 한다.
연꽃은 오염된 수질에서도 잘 견디는 강인한 수초이다. 또 물 없이 화분에 심어 가꾸어도 잘 자란다. 도시 가로변의 녹지 공간용으로 활용할 수 있는 좋은 관상식물이다. 연꽃이 활짝 핀 우리의 도시 환경을 만들어 보자.
참고 1.불수감(佛手柑)=불수귤나무 佛手- (fingered citron) <Citrus medica var. sarcodactylis>
개요
쌍떡잎식물 쥐손이풀목 운향과의 상록관목.
분류 : 운향과
분포지역 : 중국·일본
내용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불수감(佛手柑)이라고도 한다. 가지에 가시가 있고 길게 자란다. 꽃잎은 5개이고 흰색이며 자주색을 띠는 것도 있다. 열매는 씨방벽이 변형된 것이며 식용 또는 약용한다. 향기가 좋고 열매가 괴상하므로 관상용으로 심는다. 열매의 끝이 손가락처럼 갈라진 것을 부처님의 손같이 생겼다고 생각하여 붙인 이름이다. 중국·일본 등지에 분포한다.
물과 뭍의 풀과 나무의 꽃 가운데 사랑할만한 것이 많다. 진(晉)나라의 도연명(陶淵明)은 유독 국화(菊花)를 사랑하였고, 이씨의 당나라 이래로 세상사람들이 모란(牧丹)을 매우 사랑하였다. 나는 홀로 연꽃을 사랑하노니, 진흙에서 나왔으면서도 물들지 아니하고, 맑은 물결에 씻기어도 요염하지 아니하며, 가운데는 통하며 밖은 곧고, 넝쿨도 없고 가지도 없으며, 향기는 멀리 더욱 맑으며, 우뚝이 깨끗하게 서있으며,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으나 함부로 가지고 놀 수 없다. 나는 국화는 꽃 가운데 은일(隱逸)한 것이고, 모란은 꽃 가운데 부귀(富貴)한 것이며, 연꽃은 꽃 가운데 군자(君子)라고 말하니, 아! 국화를 사랑하는 사람은 도연명 이후에는 있다는 소문이 드물며, 연꽃을 사랑하는 사람은 나와 같은 이가 몇이나 되는가? 모란을 사랑하는 사람은 마땅히 많을 것이다.
[註]
[蕃]우거질 번. [李唐]당대 왕조의 성이 이씨이므로 李唐이라 함.[自李唐來]自/~부터, ~이래로. [愛牧丹]唐의 則天武后가 목단을 사랑하여 궁중에다 심으니 唐의 上下가 모두 목단을 즐겼다. [어]沐자의 왼쪽 변 + 於 , 진흙, 앙금, 흐리다, 막히다. [어泥]진흙, 진창. [漣]이어지다, 잔잔할 물결 모양. [亨亨]형형-우뚝 솟아 있는 모양. [植]立과 같음. [첩翫]첩완-가까이서 매만지며 구경함. 첩=褻자에서 가운데 있는 衣자 사이의 글자를 빼고 執자를 넣음. [鮮]거의 없다는 뜻.
참고 3.
연꽃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서 정 주>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섭섭ㅎ지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 -
엊그제
만나고가는 바람 아니라
한 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 -
참고 4.
채련곡(采蓮曲)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년~1589년-
采蓮曲(연꽃을 따는 노래)
秋淨長湖碧玉流 추정장호벽옥류
가을에 맑은 호숫물 옥돌처럼 흘러가고
蓮花深處繫蘭舟 련화심처계란주
련꽃 피는 깊은 곳에 란초 배를 매놓고서
逢郞隔水投蓮子 봉랑격수투련자
당신 보고 물건너서 련꽃을 던졌는데
或被人知半日羞 혹피인지반일수
혹시 남이 봤을가봐 반나절 부끄럽네
...........초희(楚姬) 허난설헌(許蘭雪軒)은 1563년(명종 18년)에 태어나서 1589년(선조 22년) 3월 19일, 27세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