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일차) 벽소령~덕평봉~칠선봉~영신봉~세석~촛대봉~삼신봉~연하봉~장터목
오늘은 시간적으로나 체력적으로 여유가 있는 날이다. 느긋하게 일어나 벽소령 맑은 공기와 눈부신 햇살아래 아침을 해결하고 세석을 향해 출발한다.
영신봉 가기 전 덕평봉 너머에 있는 선비샘은 예년보다 많은 물을 쏟아내고 있어 목을 축이기 충분했다. 지리산 종주 중에 만나는 샘물 중 임걸령과 선비샘은 수량도 풍부하지만 과히 지리산 최고의 물맛을 자랑한다.
선비샘을 지나 한동안 비교적 완만한 오르막 내리막을 반복하며 진행하다보면 눈앞에 장터목산장과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가파른 계단을 오르게 되고, 정상부 주변의 조망이 뛰어난 암봉을 돌아서 조금 더 진행을 하면 길옆으로 영신봉 표지목을 지나 세석대피소에 도착하게 된다.
세석대피소에 오면 항상 대학생 시절인 1985년 지리산 첫 종주를 할 때가 생각난다.
고등학교 시절 동네 대학생 선배들의 지리산 산행 무용담을 듣고 동경을 하다가 대학생이 되어 변변한 등산장비와 복장도 없이 도전한지 3번째 만에 화엄사에서 중산리까지 종주에 성공하고 기뻐했던 기억이다.
사촌형이 쓰던 천으로 된 낡은 배낭에 감자, 양파, 쌀, 석유버너, 양념 등 무거운 식자재를 넣어 다녔고, 젊은 패기에 기타와 커다란 카세트까지 들고 다녔던 무모한 젊은 청춘이었다.
당시 지리산에 가기 위해서는 조치원역에서 0시경에 출발하는 완행열차에 몸을 싣고, 남원까지 직접 가는 열차가 없어 당시의 이리(지금은 익산)에서 열차를 갈아타고 가야만 했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남아있다.
지금과 같은 대피소 시설은 상상도 못했고 지금의 노고단 고개와 연하천 도착 전 샘물이 흐르던 평지, 세석산장 주변 등에서 야영을 하면서 천왕봉을 넘어갔다.
정상에 군인들이 주둔하던 노고단고개 주변에서 야영을 하던 중에는 군인들이 내려와 군용모포 등 군수품이 있는지 수색을 하며 소등을 하도록 제지 했었던 기억이 있고, 조그만 산장만 덩그러니 있던 세석산장 주변에는 지금의 철쭉군락을 대신하여 울긋불긋 형형색색의 텐트들이 텐트촌을 형성하며 젊은 산객들의 추억의 장이 되었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간다.
세석대피소에서 한가로이 점심을 해결하고 촛대봉 바위에 올라 한참동안 시시각각으로 지리산이 그려내는 수채화 같은 풍경에 빠져본다.
얼마 전 마운틴티브이 프로그램 중 그레이트 지리산이라는 프로에서 히말라야 산행 중 여덟 손가락을 잃은 등반가 박정헌과 영화로도 상영되었던 소수의견의 작가 손아람이 게스트로 나와 대화를 나누던 장면이 생각난다.
손아람 작가가 산악인 박정헌에게 힘들게 왜 산에 오르는지 묻자 그는 “죽을 걸 알면서 왜 사느냐”는 질문과 같다고 말하며 산에 있을 때 존재감을 느끼고 성취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나도 산악인은 아니지만 산을 좋아하는 한사람으로 자주 산에 가다보니 주변에서 가끔씩 같은 질문을 받을 때가 많다. 그럴 때 마다 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어 공감이 되는 말이다.
백무동 한신계곡을 오르면서 손아람 각자가 산을 올려다 볼 때가 좋다고 말을 하는 장면도 생각이 난다. 하지만 나는 반대다 산정에 앉아있을 때가 행복하고 시간가는 줄 모른다. 그렇다고 정복주의 등산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높은 곳에서 사방을 멀리 내려다보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시시각각 생겨나고 사라지고 변하는 구름과 바람, 켜켜이 쌓인 산 능선과 햇살 등 자연이 연출하는 풍광들이 좋을 뿐이다.
어쩌다 보니 촛대봉에서 한 시간 여를 보내고 연하봉을 넘어 장터목대피소에 도착한다. 벽소령에서 장터목대피소까지 산행시간은 대략 5시간이 소요된다.
여유를 부리긴 했지만 오후 5시도 되지 않은 시간에 도착하여 잠자리 배정을 받고 보니 벌써 많은 사람들이 자리배정을 받은 상태라 2층밖에 자리가 없다.
다음날 새벽 일출을 위해 이른 저녁식사를 마치고 기다리니 환상적인 일몰이 시작된다. 반야봉 낙조를 본 적이 없어 비교할 순 없지만 지금까지 내가 지리산에서 본 일몰은 영신봉과 장터목이 언제나 최고였다고 생각되는데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환상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지금 이순간도 직장 내 단체 카톡 방에서는 연신 폭염경보에 대한 메시지와 대책을 지시하고 전달하는 카톡이 쉴 틈이 없이 쏟아지고 있어 피곤하지만 여기는 시원하다 못해 서늘한 기온이 맴돌고 있어 제대로 된 피서를 즐기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여하튼 내일은 3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다는 천왕봉 일출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하며 하루를 정리한다.
○ (4일차) 장터목~천왕봉~로타리~중산리 순두류
새벽 2시부터 주변이 소란스러워 잠을 깬다. 참 우리나라 사람들은 부지런하기도 하다. 다만 요즘은 개인주이가 팽배하여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를 거의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이 못내 아쉽다. 하는 수 없이 조금 일찍 일어나 여유 있게 올라가기로 하고 4시도 안된 시간에 출발한다.
05:00 천왕봉 정상에는 벌써부터 일출을 보기위한 인파들로 자리를 잡기 어려울 정도다. 아쉽게도 구름에 가려 시원한 일출을 볼 수는 없었지만 다음을 기약할 수 있음에 만족한다.
중산리 방향으로 하산하여 로터리대피소에서 아침을 해결하고 순두류로 하산한다. 순수듀에서 09:20분 버스를 타고 중산리에 도착하여 3박4일 종주산행을 마무리 한다.
기꺼이 힘든 지리산종주 산행에 동행해준 둘째아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든다. 아들에게도 느낌이 있는 산행이자 기억에 남는 여름휴가가 되었기를 바래본다.
중산리에서 버스승강장까지는 도보로 15분정도면 갈 수 있지만 무더위를 피해 택시로 이동한다. 이후 시외버스로 진주까지 이동, 진주에서 KTX로 대전까지, 대전에서 세종시까지 버스로 이동하여 집에 도착한다.
진주역에서 열차를 기다리며 들린 소여사 식당의 갈비탕과 섞어냉면과 함께한 맥주 맛도 꿀맛이었다.
첫댓글 연일 속되는 폭염속에 산사나이들의 피서 대단하십니다~~벗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