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인간이 특정 사회에서 행한 행위들을 이성의 글 즉 산문으로 기록한 것이, 역사라고 헤겔은 규정한다. 그렇다면 인도 고대에는 역사가 없다. 그들은 인간의 행위를 기록하지 않고 신의 행적을 시로 노래했으니, 그건 헤겔식으로 말하면 역사 없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몇 편의 조각과 그것들을 기워 이은 에피소드일 뿐이다. 그 고대 인도인들은 시(詩)로 역사를 서술하였고, 신의 이야기로 인간의 역사를 이야기했다. 사진에서 말하는 이미지의 전유다. 시로 신을 빌어 인간을 말하는 게 왜 역사가 아닐까? 한발 더 깊숙이 들어가 생각해보면, 역사를 시로 쓰는 것까지만 가능한 것일까? 이미지로 역사를 서술할 수는 없을까? 열린 역사 서술은 어디까지 가능할까? 누구나 자기 안에서 자기만의 감각으로 서술하는 역사, 특정 사회의 행적이 아닌, 인류 보편의 속성에 관한 역사, 그 안에서 개개의 역사가 전체의 역사고, 전체의 역사가 개개의 역사인 어떤 이야기, 가능하지 않을까? 이것이 '따마스, 인간은 악이다. 사진으로 서술하는 인간 속성에 관한 이야기다.
첫장의 제목은 '태초의 바다'이고 마지막 장의 제목은 '따마스: 인간은 악이다'이다. 그 둘 사이에 열 개의 장이 있는데, 각 장의 제목을 통하지 않고는 각자의 내러티브를 만들어내기가 어렵다. 텍스트 몇 단어가 이야기 줄거리의 뼈대를 이루는 셈이다. 읽는 이는 그 제목 하나씩 모아 열둘의 자장(場)안에서 각 사진이 물 흐르듯 혹은 역류하듯 배열되는 때로는 한 장의 사진이, 때로는 좌우로 연결되는 사진 둘이, 때로는 앞과 뒤로 연결되는 사진 두셋이, 때로는 멀리 건너뛰면서 몇몇 사진이 돌출하고 충돌하면서 자신 안에서 생성되는 각 이야기를 만들어 읽으면 되는 일이다. 내러티브는 정해진 것이 없고, 옳고 그른 것도 없으며, 쉽고 어려운 것도 없다.
'따마스(tamas)'는 산스끄리뜨 어휘다. 힌두철학에서 가장 오래된 한 분파 철학인 상키야 (Sankhya)학파에서 말하는 인간의 세 가지 본질 속성 중 하나다. 그 고대의 현자라 불린 그 사람들은 인간은 따마스 즉 어둡고, 무기력하며, 무관심한 속성을 갖는데, 도를 닦고, 열심히 노력하면, 다음 단계로 올라가고, 이후 또 노력하면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가 궁극의 해탈에 이르게 된다고 했다. 전형적인 이원론의 세계 안에서 사회 안정에 이바지한 도덕 목적 담론이다. 난, 그 스승들의 가르침에 일부 동의하지만,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못한다. 인간의 속성은 따마스다. 그들이 보았듯, 나도 그렇게 본다. 그렇지만, 그 따마스, 악의 속성은 바뀌지 않는다. 과실이 열린 듯 보이지만, 뿌리는 여전히 따마스다. 인간이기에 그렇다. 밝음도 결국 어둠으로 가고, 삶도 결국 죽음으로 간다. 열정도 무기력으로 가고, 사랑은 미움으로 간다. 해탈이란 없다. 해탈로 보이지만, 마야(幻일 뿐, 본질이 아닌 이미지일 뿐이다. 해탈은 욕망이고, 욕망은 배신이며, 배신은 보복이고, 보복은 저주이다. 모든 것이 하나인 일원론의 세계다.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왜 이미지로 말하려 하는지, 그 열린 해석의 세계가 어떻게 따마스로, 그 따마스가 어떻게 '인간은 악이다'로 규정되는지, 사진의 세계에서 말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