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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덜보스의 바울신학 해설 1강
정리자 : 송다니엘
들어가면서
헤르만 리덜보스의 “바울 신학”은 지금까지 출판된 바울 신학 중에서 가장 뛰어나고 현대적인 책이다. 그의 책의 특징은 학문의 결과와 영적 실제를 완벽하게 통일했다는 점이다. 그의 책은 대단히 학문적이므로 논리적으로 어떠한 의문점도 남겨놓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계시와 그리스도인의 영적 실제를 깊이 있게 드러냈다.
“Paulus, Ontwerp van zijn theologie”(바울신학개요)은 1966년에 발간되어 1970년에 독일어(Ein Entwurf seiner Theologie)로 번역되었으며, 1975년에 영역되었다(PAUL An Outline of his Theology). 이것이 한글로도 번역, 출판되었으나 2017년에 솔로몬사에서 박문재에 의해 재번역되어 출판되었다.
필자는 오래전부터 독일어판을 읽으면서 큰 감동을 받고 신학생들과 교인들을 가르칠 목적으로 조금씩 번역하였으나 2022년까지 목회를 했으므로 큰 진전을 보지 못하던 중, 퇴임 이후에 중요한 부분을 모두 번역했다. 이미 솔로몬사에서 매우 훌륭한 번역을 내놓았으므로, 나는 평범한 번역을 하지 않고 중요한 부분만 선정하여 해설적으로 번역했다.
해설적 번역이란, 직역을 피하고 독자 눈높이에 맞추어, 되도록 쉽게 번역하는 것이다. 그리고 복잡한 학문적인 논의를 되도록 생략하고, 긴 문장은 줄였다. 더 나가서는 본문에는 없는 소제목을 만들어 이해를 쉽게 했다. 그리고 필요한 곳에서는 필자의 해설 부분을 추가하고, 원래의 학문적인 각주를 없애고 본문 이해에 필요한 각주만 달았다. 박문재는 정확한 전달에 초점을 두었다면, 나는 내용 전달에 중심을 두었다.
내가 사용한 독일어본은 네덜란드 원본을 약간 줄여서 번역한 것으로써 분량으로는 원본의 약 70% 정도 되는 것 같다. 생략된 것 중에서 중요한 부분은 나중에 솔로몬 출판사 박문재 역에서 찾아서 그대로 차용했다.
좋은 번역서가 있음에도 내가 굳이 해설서를 만든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책 자체가 학자 및 전공자를 위한 것이라서 일반인이 접근하기가 다소 어렵다. 그러므로 이 책이 소수에게만 알려진다면 그것은 너무나 아쉽다.
2. 바울 신학은 대부분 신자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내용이다. 이것을 체계적으로 공부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신약에 숫자로는 절반을 차지하는 그 중요한 부분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바울 신학을 체계적으로 연구해서 기본을 알고 있어야 바울서신을 읽고 이해할 수 있다.
3. 내가 지금까지 바울 신학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지만, 리덜보스만큼 탁월하게 설명한 것을 보지 못했다. 대부분 교인은 자기가 복음을 안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이와 많이 다르다. 리덜보스는 바울이 가르친 복음을 체계적으로 그리고 실존적으로 설명했으므로, 우리는 이것을 연구함으로써 복음을 다시 배우고 실천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독자는 본 해설서를 읽고 자극을 받아 “바울 신학”을 구해서 읽어보기를 권한다.
이곳에서는 “바울 신학”의 총 12장(약 1020쪽) 중에서 2장(376-598: 약 220쪽)만 소개한다. 그 이유는 내가 올해(2024) 8-9월에 “개혁성경신학교”(http://rbs.or.kr)의 위탁을 받아 강의를 하는데, 이것이 할당된 강의 시간에 알맞은 분량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소개하는 이 두 장이 우리 한국인에게 가장 절실하고 중요한 부분인 동시에, 다음의 두 가지 핵심적인 질문에 대답이다:
1. 그리스도인은 어떤 존재인가?
2.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것은 간단히 존재와 윤리에 대한 문제라고 할 수 있는데, 윤리라고 해서 어떤 윤리적 강령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에 따른 삶이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다. 즉, 새로운 창조, 새로운 피조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새롭게 부활한 존재, 죄와 율법과 세상에 대해 죽은 존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삶, 한마디로 믿음으로 사는 삶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다.
바울신학은 한마디로 말한다면,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인 복음을 구속사적으로 본 것이다. 필자가 정리한 본고에서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가 아니라, 이 복음이 죄인을 어떻게 변화시켰으며 변화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만 다루었다. 리덜보스는 이것을 구속사적으로 바라보았다. 따라서 본고는 그리스도인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설명해 주므로 우리가 당연히 대강이나마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문제는 자기에게서 찾아야 한다. 본고를 숙지하고 바울서신을 읽는다면 이해도가 훨씬 높아질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나는 보수 신학자가 저술한 바울신학 중에서 리덜보스의 것이 단연 최고의 저작이라고 생각한다. 독일에 세계적인 신학자들이 무수하게 많지만, 이들은 대부분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므로, 종교개혁자들 신학을 이어나가면서도 자유주의자들의 신학을 모두 섭렵하고 성경영감론을 바탕으로 바울신학을 세워나가는 것, 자유주의 학자들의 신학을 정당하게 학문적으로 비판하면서도, 그들이 올바른 학문적인 연구를 받아들여 자기 신학을 세워나가는 학자들은 적다. 그중에서 가장 출중한 사람은 복음서 분야에서는 게르하르트 마이어이고 바울신학에서는 헤르만 리덜보스라고 필자는 감히 생각한다.
그의 책을 읽고 평한 여러 학자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당시 가장 저명한 바울신학자 중의 하나였던 자유주의 신학자 에른스트 케제만(불트만의 제자)의 평가와 추천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바울에 대한 최근의 연구서 가운데 나는 헤르만 리덜보스의 책이 표준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놀라운 통찰들과 정보를 제공해 주고, 세심하게 고찰되어 철저하게 논의되어야 할 바울 신학에 대한 해석을 제시한다”(“바울신학” 한글 역본 뒷 표지에서)
마틴 로이드 존스도 다음과 같이 평했다:
“많은 점에서 이 책은 내가 지금까지 읽은 것 중에서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대한 가장 포괄적이고 철저한 해설로서, 곳곳에서 독창성을 보여주기 때문에, 심지어 이견을 불러일으키는 대목들에서도 생각과 연구를 자극한다.”
합신 이승구의 “하나님 나라와 교회에 대한 리덜보스의 이해”라는 훌륭한 기고문도 있다. 이 책에 관한 비판적인 목소리도 있는데, 이것은 추후에 필자가 상세하게 반박하고자 한다.
제Ⅰ부 새 생명
I. 전체적인 관점(서론)
II.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다
1.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2.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림을 받아 그분과 연합되었다
3. 세례(믿음)를 통해 개인에게 새 창조가 이루어진다
III. 성령님으로 말미암는 삶
1. 율법과 성령님과의 대립
2. 문자와 성령님과의 대립
3. 옛 지배체제(율법과 문자)와 새 지배체제(성령님)의 대립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바라본다
4. 성령님 안에 있다는 말은 일차적으로 교회 범주이다
5. 성령님 안에 있다(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말은 개인에게서 구체적으로 실현되어야 한다
참조: 율법의 다양한 의미 층
IV. 새 사람
1. 새로운 인간성을 전체적으로 묘사한다
2. 새로운 인간성을 구체적이고 개별적으로 묘사한다
3. 바울에게서 몸의 다양한 의미
4. 그리스도인 삶의 매우 독특한 긴장과 양극의 대립(Polarität)의 원인
V. 새 생명의 실존 방식으로서의 믿음
VI. 믿음의 본질
1. 순종으로서의 믿음
2. 신뢰, 소망으로서의 믿음
3. 이미와 아직
I. 전체적인 관점(서론)
바울 선포의 핵심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가 회복되어 칭의 받고 화해 되어 우리가 아들 신분으로 다시 받아들여지는 것(양자됨)이다. 이것은 구원의 법정적이고 객관적인 면이다. 그런데 이것이 구원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단지 동전의 한 면일 뿐이다. 구원은 인간의 삶 전체를 포괄하는 현상이다. 구원은 인간을 완전히 새롭게 만들며 죄의 능력을 무력화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가 회복되었고, 그분 아들의 신분이 되었으므로 자연히 따라오는 현상이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구원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자녀로서 품위를 가지고 거룩하게,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 생명, 성령님의 사역, 믿음을 새로운 실존방식(die neue Existenzweise)과 새로운 자유로서 다루어야 한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가 이것을 3장에서 죄의 열매(“죄 가운데서의 삶”)라고 배운 것과 반대되는 것이다. (전에는 인간에게 전혀 없었던 새로운 것이 인간 안에 들어옴으로써 인간은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 그는 또한 정욕으로부터의 자유를 얻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요 8:36).
우리는 이곳에서도 종말론과 구속사라는 큰 줄기를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구약 기술 전체가 그리스도의 이러한 사역을 향해 달려간다. 이제 때가 차서 이것이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단지 죄책을 면제해줄뿐만 아니라, 죄의 능력으로부터의 구속과 새롭게 되고 거룩하게 되는 것과 믿음까지도 바울에게는 무엇보다도 종말론적인 현실이며, 이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새롭게 열린 새 시대의 계시로서 이해되기를 원한다. 성령님의 사역도 여기에 속한다. 비록 바울이 새 시대에 펼쳐지는 삶을 묘사하는데 인간론적인 개념과 범주를 사용할지라도, 바울의 선포의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구속사적-종말론적인 것이다. 즉, 이것은 기독론적이고 성령론적이다.
그리스도 영으로서의 성령님은 새로운 시대의 영[1]이며, 그가 새롭게 하고 재창조하고 변화시키는 모든 것들은 이 종말론적인 새로움에 속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이것들은 이전과 다른 것. 새로운 것들이다. 성령님의 사역은 전적으로 이러한 깃발 아래 서 있다. 이 모든 것이 개개인에게 일어나고 적용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여)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새로운 인간성의 의미는 바울서신에서 여러 종류의 인간론적인 개념들과 범주들을 통해서 자세하여 설명된다. 그럼에도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바울의 모든 선포에서는 인간론적인 것이 아니라, 구속사적이고 종말론적인 것, 즉 기독론적이고 성령론적인 성격의 것이라는 사실은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고, 아마도 죄론에서보다도 한층 더 강도 높게 적용된다. 구원이 갖는 인간론적인 의미는 단지 그리스도 안에서 그 근거를 지닐뿐만 아니라, 그 다양한 측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및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일어난 일들에 비추어서 설명되어 왔기 때문에, 그 결과 바울의 선포 속에는 구원의 서정(ordo salutis)에 관한 체계적인 설명이나 구원의 인간론적인 적용에 관한 자세한 가르침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바울의 가르침은 그러한 것과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새로운 삶을 묘사할 때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지 않고 새로운 “창조”라고 한다(고후 5:17). 즉, 새로운 삶은 개인적인 중생과 개인의 인격적인 새로워짐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옛것들과 새것들이라는 구속사적 범주에서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구원이 비인격화되는 것(구원이 개인 인격 변화와 상관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각 개인이 집단으로 죄의 끈에 묶이게 되어 있는 것처럼(집단적인 연대관계 속에 개인이 편입된 것과 마찬가지로), 구원이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하고 개인이 그분에 의해 대표되는 새 창조의 지체로서 있다는 관점에서 이것을 서술하고 있다.
II.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나에게, 구체적인 나의 실존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것은 먼저 내가 세례 받을 때(믿음으로 이 사실을 받아들일 때) 나도 죄에 대해, 율법에, 세상에 대해 죽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림을 받아, 즉 새 생명을 받아 그리스도와 영광스러운 연합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었으므로 하나님을 위하여 새 삶을 살 자유를 얻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한번(einmal)” 일어난 일이 신자의 새로운 삶을 어느 정도까지 규정하는지는 바울이, 먼저 롬 3-5장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음을 설명한 후에, 신자의 새로운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대답하는 말 속에 잘 드러나 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1-2).
이 구절은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라는 말이 윤리적이나 신비적인 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죽음과 장사됨에 교회가 참여하는 것, 즉 단 한번 일어난 일에 대한 구속사적인 의미에서 그렇게 말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문맥을 보면 이러한 해석이 옳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교회가 죄에 대해 죽었다는 말 다음에 세례에 대한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롬 6:3-4).
지금 내가 바울의 세례 가르침에 대해 상술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점 한마디만 한다: 바울이 세례를 말하는 이유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가 된다는 것과, 그분의 구속사역의 효과를 자기가 입는다는 것을 의미한다(참조: 고전 12:12-13; 갈 3:27 등). 여기에도 집단 개념[2]이 지배적인 생각이다. 신자는 (지금) 세례를 받음으로써 (2000년 전에) 골고다에서 한 번 일어난 구속 사건과 부활에 참여한다. 그러면 그분의 죽음과 부활이 그에게도 유효하게 되어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고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신자는 이렇게 세례를 통해 골고다에서의 구속사역과 부활에 참여한다. 그러면 이것이 신자의 삶에 어떠한 결과를 가지고 오는지를 살펴본다:
1.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교회를 위한 죽음이었다.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써 교회도 죽은 것이다. 사람은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의 효과를 누린다. 사도 바울은 여러 가지 표현을 통해 이것을 나타낸다: 교회는 죄에 대해, 율법에 대해, 세상의 초등학문에 대해, 세상에 대해 죽었다. 이곳에서는 이러한 표현의 의미를 자세히 살펴본다.
굳이 세례와 연관시키지 않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로 말하는 구절들도 있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 5:14), 혹은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롬 7:4). 여기에서 교회는 직접 구속사적 사건으로 편입된다: 그리스도가 죽었을 때 교회가 죽었으며, 그리스도의 죽음은 교회의 죽음이었다. 그런데 이 구속의 사건은 믿는 자가 성사적으로 소유하게 된다(세례를 통해 신자의 것이 된다). 그러므로 바울이 앞에서 세례를 근거로 둔 것은 교회의 죽음이 구속사적 사건에 근거를 두기 때문이다.
롬 6:5절은 이제 세례의 기능에 대해,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교회에 무슨 유용성이 있는지를 설명한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연합되었다”라는 말은 세례와 관계지으며, 세례는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가 대표하는, 그와 같은 삶을 사는 집단 속으로 편입(합병)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나타낸다.
그런데 이것이 그의 죽음과 부활과 비슷하게 되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그리스도 자신에게 갖는 의미와 자기에게 속한 자들에게 주는 의미 사이의 일치점과 차이점이 동시에 남아있다. 이것은 양자가 같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롬 8:3) 오셔서 (돌아가셨지만), 그분 자신은 죄가 없으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죄 때문에 돌아가셨지만 이것은 교회가 자기 죄 때문에 죽는 것과 다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시는 것”은 교회가 “새로운 삶의 상태로 변화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4).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죽음 및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하는 것이라고 말을 교회가 “자신의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4). 그러면 교회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1) 교회는 죄에 대해 죽었다(죄의 절대적인 지배권으로부터 해방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유사점(“같은 모양”)이 단지 상징적이고 인식적인 일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말미암아 구속사적인 유사점(“같은 모양”)을 갖는 것이다. 교회는 이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이렇게 함께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은 두 가지 면이 있는데, 칭의에 대해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죄가 교회에 영향을 미치려는 지배권에 대해서도 그렇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그들은 죄에 대해 죽었고(2), 그의 “옛 사람”은(6) 함께 십자가에 박혔기 때문이다(옛 사람이란 이곳에서 개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악된 실존양식을 말한다). 이 죽음을 통해 “죄의 몸”(6: 이것도 실존양식과 관계한다)도 능력을 잃게 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은 죄를 통해 우리를 노예 상태로 지배하던 세력에 종말을 가져왔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서 심판받은 것은 “죄의 몸이 무력화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바울은 이것을 고대법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 죽은 자는 법적으로 죄에 대해 자유하다. 그는 죽음으로써 죄에 빚진 것을 갚았으므로, 이제는 죄가 그에게 청구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이것은 우선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것인데, 바울이 이 단락을 마감하면서 10절에서 다시 한 번 언급한 바와 같다: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그는 이를 통해 칭의와 화해가 아니라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하고자 한다: 그리스도는 한 번 죄에 대해 죽으셨고 죽음을 통해 자기를 죄의 요구로(Ansprüche)부터 해방하셨고, 이제는 부활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그분의 사역을 위해 사신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것이 교회에 대해서도 유효하다. 즉,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박히고 장사됨으로써 죄에 대해 죽었다. 즉, 죄의 강제로부터 해방되었다. (죽었다는 말은, 죄로 말미암은 사형선고가 이미 집행되었으므로 죄가 청구권을 잃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구속사적이고 성례적인 현실이 교회에게도 유효하다는 것을 바울은 6장에서 교회에게 분명히 가르치려고 했으며, 이러한 이유로 이들에게 6장 후반부에서 더는 죄를 섬기지 말라고 경고한다.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속하고 그와 함께 죽은 후에 부활했으므로, 교회는 자기 자신에 대해 새롭게 판단해야 하고, 믿음 안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11).”
바울이 롬 6:1-10에서 논증하려는 것이 여기에(11) 결론적으로 압축되어 있다. 그리스도와 한 번 죽은 사람은, 죄에 대해 죽은 자이며 죄를 따를 필요가 없게 된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된 삶은 자기를 하나님을 위해 살고 그분의 다스림 아래 있다고 여길 수 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한 번” 일어난 일은 신자의 새로운 삶의 현실 속에서 실제가 되어야 한다: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13-14).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부활했다는 이러한 구절을 근거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4가지 사실을 확증할 수 있다:
교회가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은,
첫째, 교회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구속사적인 실제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과,
둘째, 신자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성사적인 연합을 통해(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자기 것이 된다는 것과,
셋째, 믿음을 통해 교회가 자기 자신에 대해 내리는 판단 내용을 나타내고, (자기가 죄에 대해 죽었다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다는 자의식[3])
넷째, 그 결과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 순종이 우리가 하나님께 맺는 열매이다(롬 7:4: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이러한 관점이 바울의 구속론의 특징을 이룬다는 것은 그 밖의 다른 수많은 선언들로부터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동일한 현실은 교회가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죄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도 나타난다: 교회는 율법에 대해, 세상의 초등학문에 대해, 세상에 대해 죽었다. 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본다:
2) 교회는 율법에 대해 죽었다
롬 7:4ff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 이에게 가서 …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갈 2:19-20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곳에서 율법은 인간을 위협하고 족쇄를 채우는 세력이다. 왜냐하면, 죄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은 율법의 형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 아래 있다는 것과 죄 아래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 밖에서 살아가는 삶의 사망과 종살이 상태를 나타내는 동의어 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해 죽었다는 말은 교회로 하여금 율법에 대하여 죽어서 율법의 죽이는 권능으로부터 벗어나게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4].
갈 2:19-20에서도 율법은 인간에게 적대적인 세력, 즉 인간을 자신의 지배 아래 두고서 생명에 이르는 길을 가로막는 세력으로 등장한다. “율법으로 말미암아”라는 어구는 그리스도가 자기 백성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내어 주었을 때에 그에게 임한 율법의 형벌, 특히 십자가 위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을 가리킨다. 그러나 율법으로 말미암은 그러한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그리스도와 그 안에 있는 자들이 율법에 대하여 죽고 율법으로부터 해방되는 일도 동시에 일어난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죽었으므로 율법에 대해서 더는 채무가 없기 때문이다. 율법에 대해 죽은 사람은 죄가 권능으로 그를 지배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는 죄에 대해서도 죽었다고 한다.
3) 교회는 세상의 초등학문에 대해 죽었다
골 2:20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세상의 초등학문은 “세상의 초보적인 원리”라는 말로서 갈 4:9에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이라고 부른 율법주의적 원리를 가리킨다[5]. 즉, 이러한 것들을 모두 준수해야 의롭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골로새 교회에 율법주의자들이 들어와 여러 가지 규례의 준수를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들이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약하고 천박하지만, 인간을 종으로 삼아서 폭압을 행하는 데에는 결코 약하지 않다(갈 4: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인간은 너무나 쉽게 이에 물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도 신자들은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 다른 길을 열어놓았기 때문이다.
4) 교회는 세상에 대해 죽었다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여기에서 세상이라는 표현은 인간이 자랑하고 싶어하는 모든 것, 즉 율법이나 할례처럼 종교적인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자기 자신을 내세울 수 있게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나타낸다. (즉, 칭의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세상이라고 지칭한 것은, 그것이 세상의 초보적인 원리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이전의, 그리고 그리스도 밖의 삶인 현세라는 삶의 상태에 속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 모든 것에 대하여 단번에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이 모든 것은 자랑하고자 하는(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위해 내세울 수 있는) 근거로서, 그리고 실제로는 인간을 위협하는 권능으로서 부적절하고 헛된 것임이 드러났다. 다른 한편으로, 바울은 자기가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그의 백성도 그들을 지배하고 미혹시켰던 세력으로서의 세상으로부터 빼내졌다. 여기에서 “십자가로 말미암아”는 “그리스도와 함께” 또는 “그리스도 안에서”를 의미하는데, 집단적인 개념은 조금 덜 부각되지만 표현하고자 하는 개념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중간에 십자가가 있다. 이 십자가는 교회를 세상으로부터 단번에 빼내었고, 이 십자가로 말미암아 세상은 교회에게 무가치하고 전적으로 해로운 것이 되었다:
빌 3:7-8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요약하면, 죄에, 율법에, 그리고 세상에 대해 죽었다(십자가에 박혔다)는 표현은 모두 근본적으로는 같은 상태를 나타낸다. 죄, 율법, 세상은 옛 세대에서 인간을 지배하던 권능이었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옛 삶을 꼭 붙들어 구속하는 것으로서, 교회는 이것의 지배권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죽음 속으로 자유롭게 된 것이다. 바울이 단지 “너희는 죽었다”(골 3:3)라고만 말한 경우는 드물다. 그리고 문맥을 보면 이곳에서도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므로 이것 때문에 사람을 묶어두는 세상적인 것이 별 의미가 없고, 하늘의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즉, 의롭게 되고자 하는 목적으로 이러한 것을 추구하지 않고 이것을 더러운 것으로 여기고 모두 버린다. “너희는 죽었다”는 말은, 그가 죽었을 때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것과 관계가 있다. 그때 그들은 “땅의 것”의 강제로부터 벗어났다. “땅의 것”이란, 인간을 자신들의 포로로 사로잡아서 종살이를 시키는 것들인 세상에 속한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만 자랑하고 십자가만 추구해야 한다.
2.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림을 받아 그분과 연합되었다
교회는 단번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을뿐만 아니라, 그분과 함께 살림을 받았다. 이곳에서 사용된 단순과거시제(아오리스트; 부정과거)는 이것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구속사적인 순간(Moment: 계기)이었음을 나타낸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죄와 세상과 율법에 대해 죽은 것과 같이,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자유롭게 되었는데, 이것은 그가 그리스도와 하나님께 대해 살게 되기 위함이다(롬 7:4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갈 2:19 …). 즉, 교회의 새로운 삶은 단지 그리스도의 부활에만 근거를 두었을뿐만 아니라, 그것과 함께 주어졌고, 그것과 함께 시작했다. 이것은 특히 엡 2:4-6에서 분명해진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바울이 이곳에서 인간론적-구원의 순서적(ordo salutis)으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적-구속사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또 한 번 분명히 드러난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킴을 받으셨을 때 그에게 속한 모든 백성은 그와 함께 그들의 죽음 가운데에서 있었다. 그런데 죽음은 율법의 저주와 하나님의 진노 하에서의 삶이며 그리스도로부터 멀리 떨어진 삶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하나님의 진노를 없애어 이들을 하나님께 다시 데려오는 것을 말한다. 간단히 말해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하는 것(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로마서 6장 외에 골 3:1 이하[6]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한다는 것의 “객관적”이고 구속사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표준적인 구절이다. 신자의 새로운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무덤 밖으로 나와서 나타났고, 그분과 함께 하늘로 올라갔고, 지금은 그곳에서 숨겨져 있으며 그분의 재림 시에 다시 한 번 나타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게 일어났고 장차 일어날 일은, 즉 죽음으로부터 영광 속에서의 재림까지의 일은, 교회와도 함께 일어났으며, 장차 교회에서도 일어날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와 합병되었다는 의미에서 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3. 세례(믿음)를 통해 개인에게 새 창조[7]가 이루어진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의 연합이라는 성례적이고 실존적 의미도 다른 구절에서 계속 나타난다. 골 2:11 이하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된 것은, “육의 몸을 벗는 것”을 의미하는 할례를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받았기 때문에 교회가 할례가 더는 필요 없다는 인식을 위한 근거가 된다. 이와 같이 엡 4:24, 골 3:9-10은 교회가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가 교회가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것이 세례에서 일어났다. 세례 안에서 신자는 그리스도를 입었고 이로써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에 참여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번 일어난 일이 바울에게는 이미 교회에게도 일어난 일이 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은 그분의 선재(Praeexistenz; 엡 1:4)로부터 그분의 재림(골 3:4)에까지 유효하다. 그러나 교회에게 해당하는 그 “한 번”이 세례를 통해 이곳과 지금(here and now)이, 즉 현재적이 된다. 교회를 위해서 및 교회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일은, 세례를 통해서 교회(교인 각자)의 것이 되고 구체적인 현실이 되어서, 교회는 그러한 관점에서 믿음으로 자기 자신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바울은 구원의 성례화를, 즉 세례의 비밀(Mysterium)이 한 번 일어난 구원을 반복하는 것, 혹은 재현이라고(가톨릭의 성사교리) 가르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울은 롬 6장과 연관하여 골 2:12에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이것은 구속사적인 순간(Moment)이 포기되거나 믿음이라는 사건으로 이전되었다는 의미(Bultmann & Co.)가 아니라 이 구절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핵심으로 하는 구속사적인 사건은 세례성사 안에서 교회로 전달(übertragen: 이전)되었고, 이것은 믿음을 통해 교회의 것이 된다. 세례와 믿음을 이곳에서는 롬 6장과 마찬가지로 하나로 본다. 왜냐하면, 세례는 믿음을 전제로 하고 행해지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는 함께 구속사적인 실제가 실존적인 믿음의 실제(existentielle Glaubenswirklichkeit)가 되게 한다. 믿음을 통한 세례에서 개인에게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지고, 새로운 세대(Aeon)는 개인적인 중생과 새로운 생명이 된다. 새로운 삶이 지닌 성사적이고 실존적인 (측)면은 나름대로 그들의 독자적인 의미를 지니지만, 그들은 구속사적으로 규정되고 의미를 가지며, 단지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볼 때에만 그것들은 바울의 구원론 이라는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끝으로, 바울이 새로운 생명이 복음을 통해서 생긴다는 것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딤후 1:10에서는 그리스도가 복음을 통해서 “사망”을 폐하고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냈다고 말하고, 다른 곳에서는 복음을 생명의 말씀(빌 2:16),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고후 2:16)라고 한다. 왜냐하면, 복음은 새로운 생명을 자기 소유가 되게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이러한 이유로 이 생명의 말씀은,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일을 자기 안에서 자기에게 속한 자들을 위해,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일어난 일로 이해하도록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신자의 새 생명은 자기의 영적 생명의 내면(개인의 영적 상태)으로부터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 있는 구속의 사건으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생명이시며, 그분께 참여하는 자는 생명을 얻는다. 그들은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 편입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드러나게 된 생명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세례는 그리스도와 한몸이 되는 것(그리스도 안으로 합병되는 것)으로서 그들에게 있어서 옛것과 새것을 구분지을 수 있는 가시적인 선이며, 복음을 믿게 되면 다음과 같은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된다: 나는 죄에 대해 죽었고 하나님에 대해 산다.
그런 이유에서 이 새 생명은 신자들에게 단번에 주어져서 그 이후로는 그들 내면에서 자동적으로 결정되는 어떤 자족적인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그들의 생명이기 때문에, 이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로 가서(엡 2:6; 빌 3:20),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고(골 3:3), 그리스도가 하늘로부터 나타나실 때 그때에 이 생명도 나타나게 될 것이다(골 3:4). 이 땅에서의 교회의 삶은 하늘에 의해서 결정되고 지배되며 자양분을 얻는다. 마치 땅에 있는 예루살렘이 율법 아래에서의 삶의 구심점으로서 그 자녀를 지배하여 종살이 시켰던 것과 마찬가지로,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교회의 어머니이다(갈 4:26). 이러한 이유에서 새로운 창조는 한편으로는 이제 더 이상 죄의 종으로 살아가지 않고 하나님을 위하여 자유를 얻어서 자유 가운데서 살아가는 데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나타남이기도 한 그리스도의 나타남을 기다리는 데 있다(롬 8:19; 골 3:4).
참조: 골3:1-4 해설[8]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하나님께서 새롭게 창조하신 영광스러운 교회의 모습은 어디에 있는가? 이것은 하늘에,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 즉 하늘에 있다. 나의 생명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아직 볼 수 없다는 의미에서 감추어져 있고, 또한 잘 보호되어 있다는 점에서 감추어져 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우리의 자연적인 욕망, 우리를 지금까지 다스리고 몰고가던 정욕도 죽었다. 그러므로 죄는 더는 우리를 다스리지 못한다. 우리의 옛 사람이 죽어서 무덤에 묻힘으로써 옛 사람은 완전히 끝났다. 그리고 동시에 새 사람이 되었다. 이 새 사람은 새로운 의지를 부여받았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그는 이제부터 하늘에 속한 것을 추구할 수 있다. 예수님의 명령을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게 되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 이것은 우리가 정욕과 함께 죽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새 생명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현재적 삶은 여전히 연약하고 모든 유혹에 열려있다. 우리의 몸은 여전히 죽을 몸이다(롬 7:24). 우리의 몸은 구속을 기다린다(롬 8:23). 그럼에도 사도는 “너희 생명이 (이미 주어졌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다고 한다. 새 생명이 이미 받은, 그리고 나중에 드러날 그 영광이 감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그 영광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다. 내가 받을 영광, 나의 영광된 모습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사도 요한도 이와 같은 말을 했다: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요일 3:2). 우리의 장래 모습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으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을 가질 것이다. 이 생명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고 하나님 손에 보호되어 있으므로 안전하다. 예수님도 비유적으로 그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 10:20).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야 할 방향은 너무나 분명하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우리의 정욕, 명예욕, 근심, 이 모든 것은 땅의 것이고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혀 죽었다. 앞으로는 완전한 영광, 하나님 안에서 이미 실현된 그 영광이 우리의 확실한 소망이 되어 우리 삶을 형성해나가야 한다.
이 영광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온전히 나타날 것이다. 그때 우리는 완전히 새롭게 창조된 실존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며, 하나님 아들의 형상과 같을 것이다(롬 8:29; 요일 3:2).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이러한 믿음과 소망으로 산다. 그러므로 열심히 살아가면서도 현실에 집착하지 않고, 가진 것이 없을지라도 그 무한한 영광을 보고 살므로 항상 마음이 풍요롭다.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함께 부활했으며, 함께 하늘에 올라갔으며, 머지 않아 함께 영광된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믿음이란 이런 것이다!
[1] 성령님께서는 구약시대에서도 인간 사이에서 활동하셨지만, 예수님이 승천 하시어 자기의 영인 성령님을 세상에 보내신 후에 성령님은 휠씬 강도 높게 활동하신다. 즉, 인간 안에서 역사하신다.
[2] “der korporative Gedanke”.
[3] 나에게 죄악된 생각이 들어올 때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해 죽었다는 것을 깨닫고 죄를 물리쳐야 한다. 그러한 일이 신앙생활에서 내가 실제로 죽어서 새 몸을 입을 때까지 계속되어야 하므로, 우리는 시련이 가득한 긴장 가운데서 산다.
[4]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는 율법의 요구가 더는 나를 죽음으로 몰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함으로써, 즉 나는 죽었으므로 율법이 나에게 아무것도 요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로써 나는 율법의 죽이는 권능으로써 벗어났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율법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거나 율법이 나에게 더는 유효하지 않거나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5] 율법이 악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6] II장 끝에 이에 대한 해설이 있다.
[7] 새 창조란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을 말한다.
[8] 리덜보스 저작에서 이 부분이 자주 인용되므로 이곳에서 간단하나마 확실하게 본문의 의미를 밝힌다.
*강의자 : 송다니엘 교수
*본 리덜보스의 바울신학 해설 1강은 2024년 8월 25일(주일)과 9월 1일(주일)에 실시된 부천개혁교회의 사경회와 부천개혁성경신학교의 집중강의를 겸하여 강의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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