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시(Digital poem)에 나타난 소통구조와 직관의 세계
김애경의 『 이별이 추억으로 가 닿을 때까지』를 중심으로
나병훈
1. 들어가면서
시의 언어는 “기호의 언어가 아니라 무명無名의 언어이므로 천지 그 자체인 존재存在(sein)의 언어”를 지향한다. 그러므로 시는 “자연성 혹은 절대성을 붙잡는 시적 직관에 의해서 탄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학에서의 철학적 소통구조의 견해는 ‘자연·인간과 하나 되는 몰아일체의 우주적 합일合一’이라는 시의 초자연적 영통靈通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김동수,『시적 발상과 창작』, 2020)
본고는 목적은 이러한 시학적 논거를 바탕으로 디카시에서의 ‘소통구조와 직관의 세계’가 실제 현장에서 어떻게 발화되고 있는지를 탐사 해 봄으로써 독자들의 디카시 읽기의 즐거움을 배가시키는 데 있다. 이를 위해 김애경 시인의 디카시집 『 이별이 추억으로 가 닿을 때까지』(2023, 실천)의 숲속으로 독자를 초대하여 문학탐사를 떠나보기로 한다.
2. 디카시(Digital poem)에 나타난 소통구조와 직관의 세계
1. 우주적 자아自我로 전도傳導된 인식
먹물을 듬뿍 찍어
그려놓은 수묵화 한 점
낙관이 없어
바람만 기웃기웃
- 「벽화」 전문
햇살의 그림자가 벽화에 그린 수묵화의 시각적 이미지가 시詩라는 언어적 진술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으로 눈길을 붙잡게 한다. 시적 진술 행위의 주체를 온전하게 사물에게 위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시의 주도권이 시인에게서 자연이자 우주로 이동했다. 말하자면 벽화를 그린 주체요 화자는 사람이 아닌 자연이자 우주로서 위임받은 수묵화를 그리는 주체요 소통의 매개자로 나선 것이다. 우주적 자아로 전도傳導되어 천지 그 자체인 존재存在의 언어로서의 철학적 소통이 투영 된 결과다. 시적 직관이 있기에 가능할 일이다. 직관이란 판단, 추론 등을 개재시키지 않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인식하는 행위다. 결국 시인은 행간의 밖에서 지켜보고만 있을 뿐 자연의 언어에 맡김으로써 소통과 직관이 가능한 구조로 디카시가 탄생되었다.
행간 속으로 들어가 보자. 이 시의 주체를 햇살에 의한 그림자가 수묵화를 그릴 수 있는 벽으로 이동시켰다가 바람에게로 다시 이동시키고 있다. ‘햇살’과 바람’이라는 이중구조적인 주체를 형성함으로써 디키시의 고유의 맛을 더욱 풍미스럽게 만들어 내고 있다. 전반부 그림을 그린 햇살이 주체일 때는 수묵화가 목적어가 되겠지만 후반부는 그러한 수묵화를 지켜보는 주체는 곧 ‘바람’이다.
이러한 디카시의 철학적 소통구조와 직관이 가능한 것은 디카시에서 시인은 영상 속 풍경을 단순히 전달하는 ‘에이전트(agent)’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시인은 포착된 사물들이 주체가 되어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며 서로의 상황을 가능케 하는 우주적 대변자 역할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디카시에 있어서 사물은 자연의 입이자 김동수 시인의 말대로 “신을 닮은 인간의 입 즉 ‘샤먼(shaman)의 언어”다.
2. 존재存在의 의미 서로 확인하기
내려와
내가 잘못했다니까
정말
반성을 하긴 한 거야
- 「기 싸움」 전문
‘기氣 싸움’은 너와 내가 ‘존재의 의미’를 상호 확인하기 위한 힘겨루기인 셈이다. 그러하다면 이 시는 시적 직관을 통해 세상을 사는 우리들에게‘ 기氣 싸움’은 존재의 의미를 서로 확인하는 역설적인 행복론을 제시해 주고 있다.
어느 도시 하천 습지 영상 속으로 들어가 왜가리 부부의 ‘기氣 싸움’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신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행간을 살펴본다. “내가 잘못했다니까” 남편 일 듯한 왜가리가 백기를 들며 용서를 구한다. 아내 왜가리는 내심 붙잡아 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정말? 반성을 하긴 한 거야” 이러한 아내의 직관을 통해 우주적 자아自我를 인식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많은 ‘기氣 싸움’ 속에 살아간다. 그때마다 이기려 할 필요는 없다. ‘기氣 싸움’에서 이겼으나 행여라도 사람을 잃으면 그보다 더 부질없고 허망한 일은 없다. 다른 사람과의 ‘기氣 싸움’에서 이기려 말고 자기 자신과 싸워 이겨한다. 특히 부부 사이에서는 내가 아니라 네가 이기는 ‘기氣 싸움’이어야 한다. 이 시가 돋보이는 것은 인간관계론적 알레고리와 감동의 여운을 던져주고 있기 때문이다.
3. 풍경의 내면 의식화
타오르는 게
어디 너뿐이랴
나의 다비식을 내가본다
-「새벽노을」 전문
디카시는 풍경(自然)과 사물을 내면의식(自我)의 존재로 형상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서정시보다 철학적 소통에서 우월성을 지닐 수도 있다. 그 논거는 무엇일까? 시적 대상으로써 그 감흥이 뇌리를 스치는 풍경에 대한 순간 포착의 힘! 그것은 시인으로 하여금 내면 의식인 우주적 자아自我를 스스로 돌아보게 하는 ‘유기적인 촉매제’로 작용하는 힘이 어느 문학 장르보다도 강하기 때문이다.
유기적인 촉매제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소위 ‘근원根源의 목격자’라 불리는 세잔느의 말을 인용해 본다. “나는 풍경의 의식이다. 내가 그리고자하는 것은 실존의 뿌리 그 자체에 휘감겨 있다.” 말년에 이르러서야 생 빅투아르산을 풍경으로 언덕 위 한 그루 소나무 밑에 10년간 이젤을 세운 끝에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그가 시인 가스케에게 한 말이다. 풍경에 대한 감각이 꽉 들어차면 그것은 실재가 되며 곧 ‘우주적 자아自我’의 모습으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풍경[自然]은 표면보다는 깊이에 참된 진리가 있음을 간파한 동양적 깨달음이다. 순간포착된 풍경[自然]은 ‘표면(단순한 외형)’보다는 ‘깊이(내면의 인식)’로 감각이 전이 되어 ‘존재의 근원’을 깨닫게 하는 것이 곧 예술에서의 ‘유기적인 촉매제’다.
이상과 같은 디카시가 지니는 ‘풍경(自然)의 내면의식(自我)’이라는 본질을 상기하면서 시의 행간 속으로 들어가 본다. 새벽노을은 이미 우리의 존재存在의 내면 의식으로 “나의 다비식을 내가 보는” 저녁노을이 되어 숭고한 자신의 '장례식'이라는 내면 인식의 확산이 이루어진다. 자연과 인간과 우주가 몰아일체의 우주적 자아의 합일을 이루고 있다. 그러니까 붉게 타오르는 새벽노을은 화자의 ‘다비식’을 통해 ‘표면(단순한 외형)’보다는 ‘깊이(내면의 인식)’로 전환되어 여명과 힘께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시의 철학적 소통구조가 탐지되는 부분이다.
4. 타자를 향한 말 걸기
얼마나 많은 새들이 울다가 갔을까
발자국만 어지럽다
그나마 잎 지면 사라질
그 자취
- 「새의 흔적」 전문
문학에서의 철학적 소통구조의 논거를 서양철학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프랑스 실존주의 현상학의 거두 조르주 귀스도르프는 하이데거를 계승한 존재론의 입장에서 철학을 ‘인간학’으로 수립한 언어철학자다. 그에 의하면 실존적 언어능력 즉, 파롤(la parole)은 ‘타자他者를 향하는 말 걸기’이며 설령 독백의 경우라 할지라도 결국 ‘나自我’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 규정한다.《파롤,2021이윤일 譯 pp72)》
그러니까 만일 내가 말을 한다면, 그것은 ‘나 자신보다는 타자를 위해서’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언어철학적 개념규정은 오늘날 ‘나自我’와 타인간의 만남의 이음줄’이라는 시법詩法으로 발전되어 서정시는 물론이거니와 디카시에서도 소중한 창작적 재료로 활용되고 있다.
김애경 시인의 디카시의 독창성은 파롤(la parole)에 있다. 그녀가 디카시를 통해 길어내고자 하는 시적 사유는 대부분 나 자신보다 타자를 위한 말 걸기다. 타자인 독자에게 말을 걸기 위해, 먼저 자신을 이해시키기 위한 말투가 예사롭지 않다.
이러한 소통구조의 또 다른 논거를 염두에 두고 시의 행간을 더듬어 보자. 태양의 그림자로 새겨진 돌담 벽화가 “울다간 새들의/ 발자국만 어지러운” 울음들로 처연하다. 그 울음들은 ‘내면의 울음’으로 굳어져버린 화석이라고 화자는 파롤(la parole) 즉, 시적 직관으로 말을 걸고 있다. 풍경(애기단풍 그림자)과 시적 깨달음( 발자국)이 한몸을 이루며 새로운 의미의 파롤(내면의 울음)로 융합된 한 편의 알레고리적인 디카시를 완성하고 있다.
시인은 귀결연에서 “ 그나마 잎 지면 사라질 / 그 자취”라고 말을 걸고 입을 닫아버린다. 햇살이 붙잡은 새 발자국을 형이상학적으로 내면화 시켜, 인생은 모름지기 ‘자취’를 남길 수 있는 ‘흔적’이다는 말 걸기로 여운을 남기고 있다. 이 시의 백미는 잎이 지기 전에(생전에) ‘내면적 울음’ 즉, 존재存在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삶이어야 한다는 역설(paradox)에 있다. 말하자면 자연(풍경)과 화자가 서로를 삼투滲透하는 직관의 언어로 말 걸기를 하면서 내면적 자아自我로 발화되고 있다.
5. 우주-내-존재存在”의 깨달음
‘쏴∼아∼’
귀 대면 들려오는 너의 음성
구르고 굴러
가루가 될지라도 포기할 수 없는
「소라의 꿈」 전문
풍경(自然)에 대한 시인의 시각적 이미지가 청각적 이미지로 전환되고 있다. 시적 감흥을 불러일으킨 대상은 바다 풍경을 배경으로 해변에 초췌하게 몸을 뉘이며 안식에 들고 있던 소라껍질이 하나였다. 파도들은 소라를 “구르고 굴리면서” 패류 동족들의 가루지기 무덤가에 데려다 주었을 것이다. 화자는 소금기 바람결 한 줌 한 줌 덜어내어 식어가는 자신을 염하며 나 홀로 고독한 장례식을 치르고 있던 죽음 한 개. 지나온 생의 기억을 복기하는 잔잔한 파도소리 장송곡만이 “싸∼아∼”귓전에 흐르고 있을 뿐이다.
파도소리가 대신 전해주는 소라의 마지막 음성기호는 ‘생의 덧없음과 부활’을 환기하고 있다. 사위어가는 노쇠한 삶의 말로를 지켜보는 화자의 애잔한 정서가 느껴지지만 여기에서 머물렀다면 이 시는 완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 화자가 포착한 가루지기 해변 패류들의 공동묘지는 빛바랜 추억의 도서관이요, 흘러간 과거의 시간을 복원하며 널부러진 고고학 서책들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것은 디카를 들이대는 유인이 되었지만 배경에 불과했다. 진즉 순간포착된 시적 감흥의 대상은 바로 저 사위어가고 있는 소라껍질의 음성이 아니었던가.
이처럼 이 시는 젊음[生]과 늙음[死]이라는 긴장관계가 소라(존재의 언어)의 역설적인 본능의 노래를 통해 해소되고 있다. 고독한 소라의 장송곡을 부활의 역설이라는 희망가로 풀어낼 수 있었던 시적 장치는 무엇일까? 말 그대로 생물학적 차원에서 볼 때 시간과 죽음은 상호배타적이어서일까? 아니면 시간이 흐르면 생과 사는 피할 수 없다는 숙명론? 우리는 알 수 없다. 디카시인은 소라의 음성이 무엇인가를 결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명無名의 언어요 신의 언어였기 때문에 그저 대변자로서 에둘러 말했을 뿐이다.
3. 맺으면서
디카시는 인간성 회복과 자연[풍경], 환경에 대한 철학적 물음의 형태로 소통구조를 지님으로써 천지 그 자체인 존재存在의 언어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일반 서정시와 다름이 없다. 살펴본 바와 같이 디카시에서도 문학적 진실(reality)로서의 핍진성(life likness)이나 공감적 요소가 발화되기 위해서는 피사체와 존재(sein)의 언어가 화학적으로 융합되어 앙상블을 이룬다는 점에서 소통구조의 한 장르로 요즘 디지털 시대에 대중들로부터 각광을 받고 있다.
또한 시적 직관이 순간 포착한 대상과 이탈되지 않으면서 독자가 공감할 수 있는 시적 영감을 전달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정교한 세공술이 요구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난해하지 않고 너무 깊은 사유와는 거리감을 둠으로써 일반 시보다 더 독자와 가깝게 다가가가는 작시作詩 태도가 요구됨을 시사하고 있다.
이와 같이 김애경의『 이별이 추억으로 가 닿을 때까지』에서 탐지된 ‘소통구조와 시적 직관의 세계’는 시 읽기의 즐거움을 배가시켜 독자를 매료시키는 또 하나의 문학적 장치가 아닌가 한다. _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