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초 총무에게서 전화가 와서 모임의 시간과 장소를 정했다. 예당저수지는 읍내에서 약 5키로 떨어진 저수지로 주면엔 민물매운탕이나 어죽들을 주로 하는 식당들이 많이 있다. 중학교앞의 주차장에서 만나서 내 차로 다시 합쳐 타고는 저수지쪽으로 향한다.
지역마다 특색있는 음식이 있기 마련인데 예산은 50년 전통의 소복식당 갈비와 예당저수지의 어죽, 삽다리의 곱창, 수덕사의 산채정식이 대표음식으로 손 꼽힐 것이다. 70년대의 소복식당 갈비는 정말 좋았다. 하기는 나는 별로 먹어 본적도 없지만 하루에 그날 양만큼의 고기만 재어서 팔고는 일찍 문을 닫았다고 한다. 지금도 그 명성이 있어서 주말에 읍내를 가다보면 가끔 외지차들이 유명한 갈비집을 찾아서 "조오기 길따라 가다가 극장앞 골목" 이라고 가르켜 주곤한다. 그러나 갈비는 워낙 비싸서 특별한 날 아니고는 먹기 어렵다.
예당저수지의 어죽은 딴 지방에서도 이런 음식이 있나 모르겠는데 하여튼 독특하다. 금산에도 어죽이 있다고 하는데 그쪽은 고추장이 아닌 간장으로 간을 해서 이상한 맛이 났다. 예당저수지의 붕어를 잡아서 -특히 참붕어가 토종이다- 한참 고아서 채로 내려서 가시를 없앤 물에 야채를 넣고 쌀을 넣어서 죽을 끓이는 것이다. 전에는 한여름에 큰 가마솥에 끓여서 동네잔치를 한 음식으로 예산의 여름 별미음식이다. 지금도 예당호반축제등 행사가 있을 때 온 관객 전부에게 어죽을 끓여주곤 한다.
10월말이니 이제 저녁 일곱시뿐이 안되었는데 벌써 밖은 완전한 어둠이 내리고 저수지 물은 검은 북청색 물빛으로 잠자리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건너편 대흥쪽의 불빛이 물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난다. 최근 몇년 사이에 저수지 주변에 많은 가든과 모텔이 들어섰다. 충청도 땅의 열풍은 이곳도 예외가 아니어서 물이 보이는 어느곳이라도 삼십만원을 홋가한다고 한다. 전에 대흥양조장집 친구가 자기네 옆으로 이사 오라고 했을 때 갈 것을 지금은 땅값이 너무 비싸서 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예당저수지는 예산군 신양면, 응봉면, 대흥면, 광시면등 4개면에 걸쳐있는 저수지로서 무한천 상류에 축조되었으며, 신양천등의 소지류들이 무한천과 합류해 대규모의 호수를 이룬다. 1929년 조선농지개발사업의 하나로 착공되었으나 8.15 해방후 잠시 중단되었다가 예당수리조합 주관하에 다시 착공되어 1964년에 완공되었다.저수지의 남북길이 10키로, 동서길이 70키로, 저수량 4,607만톤으로 단일 저수지로는 국내에서 가장 크다. 본래는 농업관개용으로 축조되었으나 생활용수공급과 홍수조절 기능도 한다. 또한 각종 담수어가 풍부해 낚시터로도 이용되며, 1986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다. 이상이 인터넷에서 검색해본 예당저수지에 대한 이야기다.
일제 징용으로 남양군도에 가셨다가 당신의 고향인 청진으로 가지 않고 처갓집이 있는 예산으로 오신 아버지는 살길을 찾아 이리저리 떠돌다가 마침 저수지 공사가 있는 이 손지리로 오셔서 삽으로 흙을 퍼내며 일을 하셨다고한다. 그래서 그때 손지리 또순네 과수원집에서 산 것이다. 내가 서너살의 아주 어린 때여서 별로 기억에 없으나 손지리 뚝길을 햇볕 쨍쨍 받으며 혼자 걸은 기억과 언니들 손을 잡고 밤에 교회에 갔던 기억들 몇가지 단편적인 기억이 영화처럼 머리에 남아있다. 지금의 명함판 사진만한 조그만 사진 속에 언젠가 저수지 아래로 소풍가서 솥단지 걸어놓고 밥을 해 먹은 사진이 남아있다.
여중때 원족은 멀리가는 것이라고 했던가, 가끔은 읍내 향천사가 아닌 예당저수지로 줄 나란히 서서 소풍가곤했다. 포장도 안된 먼지 풀풀 날리는 자갈길을 변변한 외출복 하나없는 시골 여학생들은 교복이나 체육복을 입고 돌을 차며 걸어가야했다. 마침 길옆의 소가 오줌을 싸는 것을 보고
" 지금 조아래 있는 개미는 홍수난줄 알겠다" 고 우스개 소리를 하신 총각으로 한참 인기가 높던 독어선생님은 대학교수로 나가셨다가 학장도 하시는등 잘 나갔는데 이상하게도 몇년전에 벌써 돌아가셨다.
아! 여고시절의 예당저수지는 내 꿈의 산책로였다. 자전거가 있던 나는 새벽이면 자전거를 타고 저수지아래의 무한천변을 달리며 너무 많은 찬란한 꿈에 괴로워했다. 여러분은 지렁이 우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지................
오가 벌판의 물안개 자욱한 들판을 지나면 아련하게 들리는 꿈길 속을 거니는 것 같은, 공중에 떠도는 소리 같은 것을 나중에 엄마한테 물으니 그것이 지렁이 우는 소리라고 하셨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신새벽의 북청색 물위에 나를 비추며 무언가 결심을 했던 것도 같다.
"꼭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너한테 다시 올테야............" 아마 그랬을 것 같다.
찬란한 여학생때의 꿈과는 상관없이 고향에서 평범한 시골 주부가 되어 살아갈 때 그곳은 다시 내 운동코스가 되었다. 아이들이 일어나기 전에 새벽에 집을 나와 무한천을 따라 한참을 걷고 뛰었다. 그래서 나중에 마라톤을 하게 되었을 때 쉽게 적응 할 수가 있었다. 언젠가는 남편과 아이들을 닥달하여 같이 데리고 나왔으나 식구들이 졸다 걷다 하는 바람에 그냥 나혼자만 나오곤하였다. 가을이면 작은 애를 데리고 무한천을 따라 그냥 걷다가 신양으로 나가서 버스를 타고 오기도 했다. 작은 애는 고추잠자리를 보고 깔깔 웃기도 하고 오리새끼가 헤엄치는 것을 귀엽다고 쫓아가기도 했다.
몇년 전에는 기아 자전거가 생겼다. 퇴근하고 나서 아직 버언할 때 자전거를 타고 오가 벌판으로 나갔다. 코스모스 한들 거리는 길을 따라 달리며 만추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곤 하였다. 또한 일요일날 예당 저수지를 한바퀴 다 돌고 물가에 있는 차와 보리밥집인 "아름다운 시절 " 한쪽에 자리잡고 앉아서 배낭에 넣어온 책을 읽다가 창너머로 보이는 장독대옆의 봉숭아를 보다가 차 한잔 마시고, 보리밥을 먹고 오곤 하였다. 내가 늦게 글을 쓰게 된 것이 가장 아쉬운 것이 그때마다의 좋은 일들을 쓴 글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저수지 아랫동네인 가따머니는 축구선수 황새 황선홍의 고향이다. 아! 2002년 월드컵때 얼마나 그가 자랑스러웠는지.....
그때 생각만 하면 지금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우리가 그냥 부르던 가따머니가 갈담원이라는 창원황씨가 칡뿌리처럼 모여살아서 나온 지명이라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하얀 백로가 유유히 나르는 가따머니를 가리키며 " 저기가 황새의 고향이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곤 했다.
양어장 가든에서 메기 매운탕을 먹고 나오며 꿈속같은 아련한 물빛과 해떨어진 다음의 빠알간 노을빛에 이구동성 감탄하며 그냥 가기 아까우니 조각공원에 가자고 한다. 조각공원 옆의 야외음악당은 사람하나 없이 고요하다. 오늘 여기 올 것을 생각하고 미리 대금을 가져왔다고 하니 계원들이 좋아라 박수를 친다. 야외음악당 무대에서 몇명만의 관객을 앞에두고 청성곡을 부르니 밤하늘에 울려 퍼지는 대금소리가 기가 막히다. 그러나 악보를 잘 기억하지 못하여 옆의 작은 불빛에 의존하여 악보를 보며 불자니 자꾸 같은 소절을 불게된다. 악보를 외워야하는데 아깝다. 가을밤을 야외음악당과 조각공원을 걸으며 여자들은 "너무 좋다, 너무 아름답다"를 연발한다. 그냥 이렇게 살면 되지않는가! 사는 데 더 많은 것이 필요할 것 같지 않다. 그냥 이만큼만 살아도 좋을 것 같은 기분좋은 가을밤에 우리들은 모두 취해있었다.
첫댓글 좋은 시간을 가지셨군요 양어장 가든에 가 본지 참 오래되었습니다 언제 시간을 내서 가봐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