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2.03 10:32 | 수정 : 2015.02.03 11:24
1. 국군 23연대 38선 돌파 진격한 10월 1일로 국군의 날 제정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불법 기습 남침으로 경북 포항까지 밀렸던 국군 1군단이 9월 17일부터 동해안을 따라 하루 20km씩 북진하여 최초로 38선을 돌파한 시각은 ‘50년 10월 1일이었다. 그 10월 1일을 기념해 국군의 날이 제정되었다. 국군 1군단 3사단 23연대는 북한군을 파죽지세로 몰아붙이면서 10월 1일 오전 7시에 38선에 도착했으나 더는 북진할 수 없었다. 38선을 넘지 말라는 미국 합참본부의 지침 때문에 국군 수뇌부는 북진 명령을 못 내리고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23연대 3대대(대대장 허형순 소령)는 연대장 김종순 대령의 비밀 명령으로 이미 38선을 12km 넘어 강원도 양양시의 북한군을 공격하고 있었다.
허 소령은 당시 전선 시찰 중인 정일권 참모총장과 김백일 1군단장에게 38선 돌파 공격 사실을 통신으로 사후 보고했다. 상급 사령부 명령 없이 공격한 것이다. 요즘 같으면 명령 불복종으로 당장 군법회의 회부며 국회 청문회가 열리는 등 야단법석일 것이다. 정일권 참모총장과 김백일 군단장이 간단히 논의한 후 김백일 군단장의 명령이 하달되었다. “23연대장, 내가 3사단장을 대신해 명령한다. 38선을 돌파 진격하라! 이제 38선은 없다.” 38선 돌파 명령을 받은 23연대 장병은 최초로 38선을 돌파하는 영예에 신이 나 군가를 힘차게 부르며 조국통일을 향해 신나게 북진하기 시작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불법 기습 남침으로 경북 포항까지 밀렸던 국군 1군단이 9월 17일부터 동해안을 따라 하루 20km씩 북진하여 최초로 38선을 돌파한 시각은 ‘50년 10월 1일이었다. 그 10월 1일을 기념해 국군의 날이 제정되었다. 국군 1군단 3사단 23연대는 북한군을 파죽지세로 몰아붙이면서 10월 1일 오전 7시에 38선에 도착했으나 더는 북진할 수 없었다. 38선을 넘지 말라는 미국 합참본부의 지침 때문에 국군 수뇌부는 북진 명령을 못 내리고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23연대 3대대(대대장 허형순 소령)는 연대장 김종순 대령의 비밀 명령으로 이미 38선을 12km 넘어 강원도 양양시의 북한군을 공격하고 있었다.
허 소령은 당시 전선 시찰 중인 정일권 참모총장과 김백일 1군단장에게 38선 돌파 공격 사실을 통신으로 사후 보고했다. 상급 사령부 명령 없이 공격한 것이다. 요즘 같으면 명령 불복종으로 당장 군법회의 회부며 국회 청문회가 열리는 등 야단법석일 것이다. 정일권 참모총장과 김백일 군단장이 간단히 논의한 후 김백일 군단장의 명령이 하달되었다. “23연대장, 내가 3사단장을 대신해 명령한다. 38선을 돌파 진격하라! 이제 38선은 없다.” 38선 돌파 명령을 받은 23연대 장병은 최초로 38선을 돌파하는 영예에 신이 나 군가를 힘차게 부르며 조국통일을 향해 신나게 북진하기 시작했다.
- 38선 돌파를 자축하는 국군 3사단 장병들
국군 1군단 3사단과 미 10군단 7사단은 북진하여 11월 21일 함남 혜산진에서 감격의 압록강 물을 마셨다. 1군단 수도사단은 함북 청진을 점령하고 종성 방면으로 진격했다. 한편 태평양 전쟁 영웅 미 해병 1사단은 ‘50년 11월 26일 북한의 임시 수도인 평북 강계를 점령하기 위해 함경도 개마고원 장진호까지 진격해 통일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러나 이미 국경을 넘어 침공한 60만 중공군 중 7개 사단 12만 명이 1만2천 명의 미 해병 1사단 주위에 매복하여 포위하고 있었다. 스미스 소장이 지휘하는 미 해병 1사단은 영하 30도 이하의 강추위의 눈보라 속에서 10배 이상 병력의 막강한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후퇴해야만 했다.
이 전투에서 미 해병 1사단 1만2천 명 중 20대 꽃다운 청년 7천5백 명이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Korea”라는 이국땅에 와 mother! mother! 부르짖으며 눈보라 치는 혹한 속에서 적에게 사살되거나 처참하게 얼어 죽어갔다. 그러나 불굴의 전사 미 해병들은 항공기를 이용한 탈출을 거부하고 육탄으로 맹공격하여 중공군 2만5천 명을 사살하고 1만2천5백 명을 부상시키면서 퇴로를 만들었다. 중공군은 미 해병 1사단에 막대한 피해를 당하여 남하를 못하고 부대를 재편성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국군 1군단과 미 10군단이 흥남시 외곽에 타원형 방어진지를 만들어 중공군 공격을 막을 수 있었기에 군인들은 물론 북한군의 학살을 피하려는 피난민들도 미 해병들의 영웅적인 전투로 뚫은 퇴로를 따라 흥남부두로 올 수 있었다.
- 미 해병 1사단의 전사자와 생존자들
북한 통일을 눈앞에 바라보았던 국군 1군단(군단장 김백일 소장)과 미 10군단(군단장 아몬드 소장)은 중공군에 의해 배후가 완전히 포위되어 맥아더 사령부로부터 성진항과 흥남항을 통해 해상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철수 작전 기간은 ‘50년 12월 14일부터 24일까지 10일간이었다. 문제는 북한군에게 학살당할까 두려워 남으로 가려고 목숨을 걸고 흥남부두로 몰려든 50만 가량의 피난민들 승선문제였다. 고향이 함북 명천인 김백일 장군은 북한 공산당의 잔인한 학살 모습을 직접 보았기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함경도 피난민들을 데리고 가야만 했다. 총 철수 책임자인 미 10군단장 아몬드 소장은 수송선의 공간 부족과 북한군 첩자 잠입 가능성 때문에 피난민 승선은 절대 안 된다고 하여 선박이 없는 국군은 난감했다.
피난민 대책 1군단 작전회의가 열렸다. 김백일 장군은 “피난민 보호는 국군의 사명이다. 꼭 데리고 가야 한다.” 수도사단장 송요찬 준장이 “국군이 승선할 자리에 피난민을 태우고 수도사단이 앞장서 육로로 퇴각합시다.” 하자 김백일 장군이 “최악의 경우 1군단이 피난민을 데리고 육로로 철수한다.”는 비장한 명령을 내렸다. 즉 “피난민 승선 안 되면 미군만 배 타고 철수하라”는 내용에 아몬드 장군은 놀라며 매우 곤란해 했다. 영화 “국제시장”에 나오는 미 10군단 문관 현봉학씨의 간곡한 요청도 영향을 주었으나 국군의 피난민에 대한 비장한 각오에 아몬드 장군은 피난민 승선을 허락했다. 국군을 피난민과 같이 놔두고 미군만 철수하면 작전에 심각한 차질이 발생하고 한편으로 감동도 받아 피난민 승선을 허락했다. 아래는 흥남부두 광경과 김백일 장군의 모습이고 사진 아래는 흥남철수 과정을 표로 그린 것이다.
- ‘50년 12월 흥남부두의 군인들과 피난민들 그리고 그들과 운명을 같이 했던 김백일 장군(좌)=주간조선
4. 남으로 가는 수송선 갑판엔 사람들과 똥, 오줌이 뒤범벅되어
김백일 장군은 미군과 별도로 성진에서 흥남에 이르는 해안선에 있는 모든 선박을 징발하여 피난민들을 태웠다. 그는 어떻게 하든 피난민 1명이라도 더 태우고 가려고 최후까지 부두에 남아있다 승선했다. 그러나 수송선을 타려고 부두에 몰려든 피난민은 수십만 명이 넘어 도저히 다 태울 수 없었다. 가족 중에 승선한 자들과 못한 자들이 갈라져 부두와 배에서 소리 지르며 울고불고 난리였다. 철수 수송선에 못 타면 북한군에 의한 학살이나 생지옥의 삶만이 기다리고 있기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타야 했으나 도저히 다 탈 수는 없었다. 마지막 수송선이 12월 24일 오후 2시30분 흥남부두를 떠나려는데 선창가의 피난민들이 배를 타려고 닫히는 수송선(LST) 앞 쇠문에 달라붙다가 문에 끼어 죽기도 하고 바다에도 떨어져 죽었다.
필사의 탈출이었고 배를 못 탄 부두의 수많은 피난민이 떠나가는 배들을 보며 목 놓아 울고 있었다. 193척의 선박에 10만 명의 군인들, 10만 명의 피난민들, 차량 1만7천 대, 연료 2만9천 드럼, 탄약 9천t과 35만 톤의 군수장비를 싣고 철수하는 인류 역사상 최대의 철수작전으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수송선 갑판에는 사람들로 꽉 차 발 디딜 틈도 없어 남녀노소 상관없이 갑판에서 대소변을 보아야만 했다. 똥, 오줌으로 뒤덮인 갑판에서 먹지도 자지도 못하는 등 고생 고생하면서 3일간 항해 끝에 경남 거제도에 도착했다. 혹독한 고생을 했지만 피난민들은 고귀한 자유를 찾았고 많은 이들이 부산 국제시장에서 장사하며 살 수 있었다.
- 철수 수송선 메러디스 빅토리 호 갑판
한국전을 총 지휘하는 맥아더 장군은 五星의 명장이었고 한국정부에 매우 협조적이었으나 자기주장이 강해 계급질서를 무시한 인사를 했다. 당시 미 8군 사령관은 한국에 있는 미 육군 전체의 사령관이었다. 그런데 맥아더 장군은 평안도 낭림산맥 서쪽은 8군에게 동쪽은 10군단에게 맡겨 각각 독립해 경쟁하면서 작전하도록 했다.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책상을 주먹으로 쾅쾅 치며 이럴 수가 있느냐고 불만을 터트렸다. 하급자인 10군단장 아몬드 소장과 대등해졌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50년 11월 24일 총공격명령이 맥아더 원수로부터 하달되었다.
12월 24일 이전에 전쟁을 빨리 끝내겠다는 맥아더 원수의 강한 의지가 담긴 소위 크리스마스 공세 명령이었다. 아몬드 소장은 자기에게 독립지휘권을 준 맥아더 원수에게 잘 보여야 하는데 마침 중공군도 별로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신이 나서 낭림산맥 동쪽인 함경도에서 서쪽의 8군보다 빠르게 공격하며 북진을 했다. 보급문제로 10군단 보다 진격이 늦었던 8군은 맥아더 장군에게 찍혀 워커 중장의 불만이 쌓였다. 이렇게 미군은 동서로 나뉘어 균형을 잃고 유기적 네트워크를 구축하지 못한 채 적진 깊이 진격하다가 산속 동굴이나 나무숲속에 숨어 매복하고 있는 60만 대병력의 중공군 공격을 맞았다.
6. 맥아더 원수 정치적 부담에 서둘러 공격하다 중공군에 당해
맥아더 원수는 트루먼 대통령의 방침을 어기고 38선 넘어 진격해 발생한 미국 정부와의 불화 때문에 정치적 부담이 있어 크리스마스 전에는 북한 전역을 점령해 전쟁을 빨리 끝내고 미군 장병들을 모두 고향으로 보내겠다고 공언했다. 혹한에 전투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 미군 장병들은 애인과 가족이 있는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는 소식에 마음이 들떴고 워커 장군과 아몬드 장군은 따로 행동했다. 이러한 맥아더 원수의 군사 작전 개요를 매복중인 중공군이 알아버려 아군의 급소를 친 것이다. 아래는 맥아더 원수의 작전 실패 과정을 그린 것이다.
- 맥아더 장군의 작전 실패 과정.
- 맥아더 원수와 아몬드 소장 (왼쪽), 맥아더 원수와 워커 중장(오른쪽)
7. 영화 “국제시장” 미 해병1사단과 국군1군단의 희생 장면 없어 아쉬워
한국인들은 세계 역사상 최고의 경제성장을 달성했다. 현대경영학 원류의 대부분은 2차 세계대전 때의 미국 군대경영이고 한국 남성들 대부분이 군대생활을 하였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때 북진 시 맥아더 장군의 지휘권 배분 잘못과 중공군의 상황 파악부족으로 인한 작전실패는 너무 아쉽다. 그러나 국군 23연대의 용감한 38선 돌파 내용과 함경도에서 미 해병 1사단의 영웅적인 전투내용은 감동적이다. 정부와 군대는 물론 기업, 학교도 경영자와 조직 구성원들의 협동적인 희생이 있어야 승리할 수 있다. 지금 우리의 자유와 경제발전은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한국군과 미국 등 참전국가 장병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군 장병들에 대한 창업과 경영교육이 성공한 이스라엘처럼 한국도 군복무 기간을 3년 이상으로 늘리고 복무기간 중 창업경영과 협동하는 희생정신을 교육해야 승리국가가 될 수 있다. 영화 “국제시장” 첫 장면에 흥남철수가 나오나 미 해병1사단 장병 7,500명의 희생과 김백일 장군 등 1군단의 피난민 철수를 위한 노력의 장면은 안 보인다. 다른 사람들을 위한 희생과 협동 노력을 기억해 주지 않으면 누가 또 그런 희생적인 협동과 노력을 하겠는가? 협동과 희생하는 사람이 없으면 조직의 번영이 없다는 것을 우리 한국인 모두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