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드램프를 두고 ‘자동차의 눈’이라는 표현을 종종 쓴다. 운전자의 전방 시야를 확보하기 위한 장치인 동시에 앞에서 차를 바라봤을 때 사람의 눈과 닮았기 때문이다. 라디에이터 그릴과 범퍼의 공기흡입구를 각각 코와 입에 비유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다.
최근에는 카메라, 레이더, 라이다 등 각종 센서가 헤드램프와 함께 자동차의 시야를 책임지지만, 완벽한 자율주행차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운전자가 전방 상황을 주시하고 직접 운전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어떤 환경에서도 안전한 시야를 제공해야 하는 헤드램프는 운전자의 눈이나 마찬가지다.
자동차 초기의 헤드램프는 기름이나 촛불을 태워 가까운 거리를 밝히는 등불에 지나지 않았다
19세기 말 자동차가 처음 등장했을 당시 헤드램프의 기능과 형태는 기름이나 촛불을 태워 가까운 거리를 밝히는 등불에 지나지 않았다. 중세시대 배경의 영화에 등장하는 마차의 등불 말이다. 전방 시야 확보와 나의 존재를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기능적인 목적은 같지만 어둠을 밝히는 능력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았다.
이후 자동차 헤드램프는 전기를 이용한 조명 기술의 발전과 함께 진화했다. 헤드램프를 하나의 필라멘트 전구처럼 활용하는 실드빔 램프(Sealed Beam Lamp), 할로겐 가스를 이용한 할로겐 램프(Halogen Lamp), 고전압 방전 방식의 HID 램프(High Intensity Discharge Lamp) 등 새로운 방식의 광원이 연달아 등장했다. 21세기 이후엔 발광 다이오드(전압을 가했을 때 빛을 내는 반도체 소자)를 이용한 LED 램프(Light Emitting Diode)가 크게 각광 받고 있다. 초기 LED 램프는 높은 가격 때문에 고급 모델에 주로 쓰였지만, 기술의 발전 덕분에 최근에는 모든 모델로 확대되고 있다.
기아자동차 K7 프리미어(좌)와 모하비 더 마스터(우)의 헤드램프. LED 주간주행등과 어우러져 해당 모델의 특색을 드러낸다
LED 램프가 널리 쓰이는 이유는 뛰어난 가시성과 내구성, 낮은 전력 소모량, 긴 수명 등 장점이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간단한 구조 덕분에 디자인 자유도도 높다. 초기에는 여러 기술적 난관이 있었지만, 이제는 어느정도 원하는 형태를 구현할 수 있는 수준에 다다랐다. 이처럼 차의 눈매에 해당하는 헤드램프의 디자인이 다양해지면서 차량의 인상 역시 크게 달라졌다. 더욱 강렬하고 인상적인 자동차 디자인이 등장한 배경에는 LED 헤드램프의 역할도 컸다는 뜻이다.
아울러 안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다른 운전자나 보행자에게 차량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 중요해졌다. 이에 낮에도 항상 빛나는 주간주행등(Daytime Running Light)이 등장했다. 2015년부터 법적으로 의무화된(국내 기준) 주간주행등은 헤드램프와 어우러져 자동차와 브랜드의 개성을 나타내는 디자인 요소로 굳게 자리 매김했다.
현대차 넥쏘와 팰리세이드, 베뉴에는 분리형 컴포지트 헤드램프가 들어간다. 디자인과 기능 모두를 중요하게 생각한 결과다
헤드램프와 주간주행등은 브랜드의 패밀리룩을 강화하는 역할로 쓰이기도 한다. 라디에이터 그릴, 헤드램프, 주간주행등을 이용해 일관적인 디자인 방향성의 패밀리룩을 만드는 것이다. 현대차는 현재 SUV 라인업 대부분의 모델에 헤드램프, 주간주행등, 턴시그널을 나누는 분리형 컴포지트 헤드램프(Composite Headlamp)를 사용하고 있다. 소형 SUV 코나에서 시작된 패밀리룩은 싼타페, 팰리세이드, 베뉴 등은 물론, 친환경 수소전기차 넥쏘에도 적용됐다.
기아차 셀토스의 턴시그널은 물 흐르듯 켜지는 시퀀스 방식으로 개발됐지만, 양산 과정에서 지금의 형태로 자리 잡았다
물론 헤드램프는 자동차의 중요한 안전 장비 중 하나다. 따라서 국가에서 요구하는 자동차 부품의 성능과 기준을 엄격히 따라야 한다. 이로 인해 콘셉트카에서 양산차로 넘어오며 헤드램프 디자인이 바뀌는 경우도 있다.
기아차 셀토스는 애초 턴시그널이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물 흐르듯 켜지는 시퀀스 방식으로 개발됐다. 하지만 셀토스 초기 개발 모델에 적용된 시퀀스 턴시그널은 점등 방향, 점등 지연 시간, 가로 면적 등 까다로운 기준을 요구하는 국내 법규를 충족시키지 못해 양산까지 이어지지 못 했다.
기아차 K5의 LED 헤드램프는 심장 박동 그래프를 형상화한 주간주행등과 어우러졌다. LED의 쓰임새에 따라 주간주행등이 턴시그널로 바뀌기도 한다
한편, 창의적인 디자인과 혁신적인 기술의 만남은 헤드램프를 새로운 영역으로 이끌었다. 최근 3세대로 거듭난 기아차 K5는 헤드램프와 기아차 고유의 ‘타이거 노즈’ 라디에이터 그릴을 통합해 날렵한 인상을 완성했다. 또한, 보닛을 이전보다 길게 늘여 라디에이터 그릴 위쪽 경계도 과감하게 지웠다. 심장 박동 그래프를 형상화한 주간주행등과 헤드램프에 자연스럽게 눈길이 쏠리도록 의도한 것이다.
라디에이터 그릴과 헤드램프를 통합한 현대차 더 뉴 그랜저의 창의적인 시도는 발전된 기술 덕분에 가능했다
라디에이터 그릴과 헤드램프를 통합한 디자인은 현대차 더 뉴 그랜저에서도 볼 수 있다. 더 뉴 그랜저는 여러 가지 요소를 하나로 엮어 입체감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디자인됐다. 특히 보닛부터 범퍼까지 하나의 굴곡진 면으로 만든 앞모습의 입체감이 두드러진다. 풀 LED 헤드램프 내부의 빔 프로젝션과 그릴의 마름모꼴 디테일이 모여 이런 인상을 한층 더 강조한다.
더 뉴 그랜저의 앞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라디에이터 그릴로 파고든 헤드램프 모서리 주변에 5개의 빛나는 LED 주간주행등이 있는 걸 알 수 있다. 라디에이터 그릴을 수놓은 파라메트릭 쥬얼 패턴에 히든 라이팅 기술을 접목한 주간주행등이다. 시동이 꺼진 상태에선 그릴의 다른 패턴과 다를 바 없지만, 시동을 걸면 LED가 환하게 빛난다. 크롬 코팅한 렌즈에 레이저로 미세한 구멍을 뚫어 빛을 투과 시킨 것이다. 디자이너와 엔지니어의 협업으로 완성한 혁신적인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제네시스 GV80는 브랜드만의 차별화된 이미지를 강조하는 쿼드램프를 사용한다
제네시스 최초의 SUV인 GV80의 헤드램프 또한 디자이너의 상상력과 첨단 기술의 결합으로 완성됐다. 위아래 2줄로 나뉜 LED 헤드램프는 좌우 2개씩 짝을 이뤄 총 4개로 나뉜 쿼드램프(Quad Lamp)다. G90부터 시작된 쿼드램프는 제네시스를 대표하는 디자인 특징으로, 여기서 시작된 2개의 빛 줄기는 측면의 턴시그널을 거쳐 테일램프까지 동일한 형상으로 연결된다. 이는 제네시스 브랜드만의 차별화된 이미지를 강조하는 효과를 지닌다.
GV80의 쿼드램프는 현재 기술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최대 얇기로 제작됐다. 아울러 아래쪽 헤드램프엔 IFS(Intelligent Front-lighting System) 헤드램프라는 새로운 기술을 품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도 카메라가 전방 상황을 감지해 다른 운전자의 눈이 부시지 않도록 여러 개의 LED 단자 중 해당 방향만 끄는 기술이다. 다른 차를 감지해 하이빔 기능을 끄고 켰던 오토 하이빔 어시스트에서 한단계 더 진화한 것이다.
차세대 헤드램프의 방향성을 제시한 기아차의 이매진 바이 기아 콘셉트(위)와 현대차의 비전 T 콘셉트(아래)
첨단 기술이 발전될수록 헤드램프는 더욱 다양한 형태와 기능을 갖추게 될 예정이다. 미래의 헤드램프를 예상해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동차 제조사가 선보인 콘셉트카를 살펴보는 것이다. 지난해 현대차·기아차가 공개한 여러 콘셉트카들의 헤드램프도 차세대 디자인 방향성과 새로운 기능들을 암시했다.
지난해 3월 제네바 모터쇼에서 공개된 기아차의 크로스오버 EV 콘셉트카 ‘이매진 바이 기아(Imagine by KIA)’는 타이거 노즈 그릴과 헤드램프를 완전히 통합한 모습으로 눈길을 끌었다. 띠처럼 얇은 LED 광원을 복면처럼 두른 모습에서 기술과 디자인의 결합이 극대화된 미래를 상상해볼 수 있었다.
현대차는 지난해 11월 LA 오토쇼에서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SUV 콘셉트카 ‘비전 T(Vision T)’를 공개했다. ‘입체적 상상력(Parametric Fantasy)’과 ‘초월적 연결성(Transcendent Connectivity)’이라는 2가지 디자인 테마를 하나로 아우른 비전 T는 현대차 SUV의 새로운 디자인 방향성을 제시했다. 비전 T의 라디에이터 그릴과 헤드램프는 정지 상태에선 하나의 면으로 이뤄져 있지만, 주행할 때는 헤드램프가 빛을 발하고 파라메트릭 셔터 그릴이 따로 움직여 역동적인 면모를 강조한다. 파라메트릭 셔터 그릴은 필요할 때마다 여닫히며 공력 성능과 연비 효율을 극대화한다. 디자인과 기술의 이상적인 만남이다.
현대모비스의 자율주행 콘셉트카 엠비전 에스는 사람과 소통하고 교감하는 커뮤니케이션 라이팅 기술이 특징이다
우리의 삶을 바꿔줄 미래 헤드램프의 또 다른 모습은 CES 2020에서 현대모비스가 공개한 자율주행 콘셉트카 엠비전 에스(M.Vision S)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바로 사람과 소통하고 교감하는 커뮤니케이션 라이팅 기술이다. 40만 픽셀 이상의 DMD(Digital Micro-mirror Device) 램프를 이용해 도로 위에 방향을 표시하거나 위급 상황을 알리는 아이콘, 글씨 등을 비춰 보행자와 소통하는 기술이다. 지금은 콘셉트카에서나 볼 수 있는 기능이지만, 이는 자율주행 시대가 오면 모든 차가 꼭 갖춰야 하는 의무 기능이 될지도 모른다. 자율주행 시대에는 신호등도 없고, 인도와 차도의 경계도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헤드램프는 자동차와 함께 끊임없이 진화할 예정이다. 미래 자율주행 시대의 자동차 헤드램프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우리의 삶을 밝혀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