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김기천·논설위원
미국에서 흑인들의 빈곤 탈출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1940~60년대다. 빈곤선 이하의 흑인 가구 비율이 87%에서 47%로 크게 떨어졌고, 화이트칼라 직업이나 관리직, 행정직에 진출하는 흑인들도 두배로 늘었다. 1964년 인종분리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고용차별을 금지시킨 공민권법이 통과되기도 전에 기업에선 인종 간 차별이 완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이유로든 부당한 차별을 하는 기업은 유능한 인재를 구하기 어렵고 경쟁력도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반면 1940년대에 하버드대가 경제학계의 떠오르는 별이었던 폴 새뮤얼슨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채용하지 않는 등 대학과 재단, 병원 같은 비영리 단체와 공공기관에선 특정집단에 대한 차별대우가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차별에 따른 비용을 자신들이 부담하는 게 아니라 납세자나 기부금 후원자에게 떠넘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요즘 우리 사회의 현안인 비정규직 문제는 어떻게 봐야 할까.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차별에 대해서는 주장이 엇갈린다. 통계청의 경제활동인구조사 부가조사 결과로는 비정규직 임금이 정규직의 60%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성·연령·학력·경력·근속연수 등의 조건이 같을 때 비정규직 임금은 정규직의 87% 수준이라는 연구결과도 있다. 그러나 고용보험·건강보험 같은 사회보험과 각종 복리후생 혜택을 감안하면 실제로 상당한 차별이 있다고 봐야 한다.
비정규직에 대한 처우는 개선해야 한다. 부당한 차별이 있다면 바로잡아야 한다. 그게 장기적으로 기업에도 이익이다. 기업들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비정규직 문제가 풀리지 않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기업이 노동자를 착취하기 때문"이라는 좌파적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기업을 윽박지를 일은 아니다. 무조건 정규직 전환을 고집하다간 오히려 역효과만 날 수도 있다.
비정규직 고용을 가장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는 프랑스가 그렇게 됐다. 프랑스는 까다로운 조건을 붙여 사실상 기업이 상근정규직 일자리에 비정규직을 채용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고용기간도 1년6개월~3년으로 제한돼 있다. '동일 노동·동일 임금'은 당연하고, 비정규직을 해고할 때는 고용기간 총 급여의 10%를 보상금으로 줘야 한다.
해고가 조금 쉽다는 점만 빼면 비정규직이나 정규직이나 별 차이가 없다. 그런데도 청년층 신규취업자 가운데 비정규직 비율은 1983년 5%에서 50%대로 뛰어올랐다. 경기가 나빠져도 인력 구조조정을 하기 어렵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기업들이 정규직 채용을 꺼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랑스 청년층 실업률은 20%가 넘고, 이들이 정규직 일자리를 얻는 데 8~11년이나 걸릴 정도로 고용사정이 악화됐다.
국내 기업들은 정규직 고용의 부담이 더 크다. 연공서열형 임금구조로 인해 20년 이상 장기근속자의 임금수준은 초임의 2.2~2.4배에 이른다. 프랑스는 1.3~1.5배, 독일은 1.2~1.3배, 영국은 1.0~1.2배, 이탈리아는 1.2~1.3배, 스웨덴은 1.1~1.3배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격차가 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직장인들의 실질 정년이 갈수록 짧아지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비정규직 문제는 정규직 고용의 경직성, 연공형 임금구조와 함께 풀어가야 한다. 그래야 비정규직이냐 아니면 실업이냐의 극단적인 양자택일을 피할 수 있다.
첫댓글 연공서열형 임금구조로 인해 20년 이상 장기근속자의 임금수준은 초임의 2.2~2.4배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