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슴과 공주
나는 머슴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오래전의 일은 아니지만 어느 날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 머슴 같다는 것이다.
부산에는 눈이 잘 내리지 않지만 어느 날 눈이 많이 내린 적이 있다.
우리 식구는 두 명의 공주와 왕자님 그리고 머슴인 내가 살고 있으니 넷인 셈이다.
밖에는 아직도 눈발이 내리고 온천지는 그냥 은백색으로 변해 보기는 좋지만 두 명의 공주와 왕자님은 밖의 세상에 대해 궁금증도 없다.
왜냐면 그냥 식사가 끝나고 나면 도로 이불속에 들어가서 자면 그만이니 차가 다니든 말든 상관없는 일이지만 머슴인 난 연신 밖을 내다보고 차를 타고 가야하나? 버스를 타고 가야하나? 하며 머릿속을 빠르게 굴리면서 가끔 티비에서 흘러나오는 일기예보에 귀를 기우린다.
결국은 도로에 차가 움직인다는 그것 하나만을 나의 신조로 여기며 차를 타고 일을 나선다.
아무도 일하지 않아도 되지만 난 머슴인지라 하고 안하는 선택권은 없어 언제나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집을 나서면서 느끼는 기분은 나도 방안에 누워서 멀리 내려다보이는 눈 내리는 풍광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신세가 머슴이라 미끄럽고 위험한 길을 곡예 하듯 운전을 하고 일하러 가야 하는 기분은 조금 서럽다.
반면에 두 명의 공주는 참 재미있어 한다.
늙은 공주는 따뜻한 돌침대가 마음에 들어 그냥 누워서 코를 골면서 다시 자고, 젊은 공주는 창문 밖 아름다운 풍광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빠져들어 감상에 젖어있다.
아마 몰라도 머슴이 어떻게 갔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가졌겠지만 스스로 공주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행복하고 기분 좋은 하루임에는 틀림없다.
사람들은 왜 공주가 둘일까 하는 의심을 하게 된다.
쉽게 설명하면 늙은 공주는 젊은 공주의 어미지만 나는 둘 다 공주라 부른다.
늙은 공주는 자신이 학생이라고 늘 우긴다.
“왜 학생이라고 말하느냐?”고 물으면 한꺼번에 두 개의 학교를 다니는 엄연한 학생이라고 우긴다.
하나는 농협주부대학이고, 하나는 불교대학이다.
한꺼번에 두 개의 대학을 다니니 참 바쁘기도 한가보다.
이들 대학들은 심심하면 견학이니 여행이니 하면서 버스타고 관광가고 그 관광을 갔다 오는 날이면 기분이 어린 소녀처럼 좋아라! 해서 내가 붙인 별명인 셈이다.
공주는 늘 자랑한다. “내 스케줄이 한주 내내 꽉 차있다.”하며 자랑스러워한다.
한동안 갱년기 증세와 병환으로 우울해하는 모습을 봐 온지라 지금처럼 신나하고 즐거워하는 표정은 조금은 의아하지만 그래도 밝아 보여 머슴인 내가 봐도 좋아 보인다.
가끔은 얘기한다.
세상이 정말 불공평한 것 같다고.
"어떤 놈은 머슴 되어 허구한 날 일만하고 어떤 사람은 팔자 좋아 학교 다니면서 세상 유람이나 하고 있으니 정말 불공평해“라고 불평이라도 하면 늙은 공주는 항상 그런다.
“당신은 머슴이지만 공주를 안고 잘 수도 있으니 천만 다행 아니요?”라며 날 옛날 영화에 나오는 마당쇠 취급을 한다.
공주를 사랑할 수 있는 머슴, 이것을 특권이고 특혜라고 주장하는 공주를 보면 웃음이 난다.
사람들은 무슨 일로 웃고 사는지 잘 모른다.
우린 철부지 같은 늙은 공주 땜에 웃고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되돌아오는 것이 반가워서 웃고 산다.
두 번째 공주는 내 딸이다.
아마 세상에서 누군가 날 더러 누굴 가장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단 1초의 망설임 없이 두 번째 공주님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공주님은 아직도 백조다.
백조인데도 난 마냥 좋기만 하다.
백조라는 사실을 자기 자신은 못마땅하게 생각하는지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 시집갈 나이인데도 얼굴에 여드름이 나서 속상해 한다.
백조에게는 머슴이 아니고 의사다.
얼굴에 난 여드름을 일일이 침을 찔러 제거해주는 의사이다 보니 백조인 공주는 나의 손님이지만 늘 외상만하고 현금으로 주는 경우도 없거니와 가끔 삥땅도 친다.
내 지갑을 열게 하는데 가장 잘 홀리는 녀석도 이 녀석이다.
아직도 백조라서 돈을 벌지 못한다는 사실이 늘 녀석을 불편하게 하는지 모르지만 난 녀석이 돈을 벌든 안 벌든 상관없이 그냥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다.
우리에게는 통하는 구석이 있다.
술 취해 흥얼거리는 아빠의 노래를 즐겁게 들어주는 아이, 주절대는 얘기를 끝까지 경청할 줄 아는 아이, 머리맡에 갈증을 해소하라고 물 한 컵을 떠다두고 가는 아이.
그러니 미워할 수도 없고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도 없다.
머슴으로 살지만 불평.불만 없이 사는 이유가 두 공주가 내 곁에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한다.
사람마다 생각의 차이가 있듯이 기쁨을 얻는 차이도 있을 것이다.
나는 방황하며 살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냥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고 예쁜 눈으로 바라보고 사랑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산다.
가끔 혼자 일하러 나설 때 참으로 머슴의 신세가 더럽다고 투덜대긴 하지만 그래도 나를 위해 집에서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즐겁고 유쾌한 일이라고 믿기 때문에 쉬이 잊고 내게 주어진 머슴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는 것이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머슴도 하지 못할 시간이 돌아올 것이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머슴으로 사는 것도 즐거워하면서 살고 싶다.
내가 열심히 일하고 집에 돌아와 늙은 공주의 말처럼 사랑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 이것이 내가 안고 살아야하는 운명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어디에서 행복을 느끼면 사는지 가끔은 궁금해지지만 내가 가진 환경과 여건에 그냥 만족해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최선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늙은 공주가 할 일이 너무 많아 바쁘게 사는 모습에서 건강한 모습이 보여 좋아 보이고 그 속에서 밝은 웃음을 발견할 수 있다면 머슴의 역할도 보람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내가 가진 작은 소망은 언제나 함께 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웃음을 발견할 수 있다면 만족하며 살고 싶기에 비록 현실에 대한 작은 불만이 있다손 치드라도 항상 즐겁게 살고 싶다.
머슴과 공주가 사는 이야기 속에는 아주 평범하지만 영화 속의 마당쇠는 아닐지라도 둘만이 아는 따뜻한 정이 존재하고 그것이 늘 마음속에 고이 자리 잡아 서로에게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한다.
머슴을 사랑하는 공주와 공주를 사랑하는 머슴의 삶은 항상 같은 궤적을 그리며 살지만 그 속에서 작은 행복을 찾아가는 술래잡기와 같은 삶이라 즐거운 것이다.
공주가 술래인지 머슴이 술래인지 구별이 없는 놀이지만요..
첫댓글 늙은공주 읽고 다녀가심,,,ㅋㅋㅋㅋㅋ
행복함이 묻어나는듯하오.. 근디 돌침대를 좋아하는 00공주님 표현에 반찬이 달라질까 걱정되오, 참 간큰 머슴이로다 빨리 변명을 하심이 어떨찌! ㅎㅎㅎ^^
늙은 공주 읽고가서 별일 없는것보면 이해하나보네요.. ㅎㅎ 간이 부어 밖으로 돌출되었나봐요 ㅎㅎ
자랑이여 불만이여....ㅎㅎㅎ
자랑도 아닌것이 불만도 아닌것이 현실이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