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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오늘도 쾌청(1998 도다 이쿠코)
●10. 고추는 남자아이의 표식―한국의 출산 사정
출산 예정일이 되었지만 진통은 아직 오지 않는다. 단골 의사가 난처한 얼굴로 말한다. “사실은 당신 예정일 일주일 뒤에 대전에서 산부인과 의사 학회가 있어서, 사흘 동안 출장을 가야 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초산이니까, 조금 더 늦어지겠죠. 아마 제가 돌아올 때까지는 괜찮을 겁니다.”
그야 의사야 남의 일이니까 태평한 것이다. 몇 시간씩 기다리면서 정기 검진을 계속 다닌 것도 막상 그때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는데, 정작 그때가 되자 의사에게 버림받은 기분이었다. 아마 의사가 없는 동안 진통이 올 거라고 나는 직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동네 개인 병원에 다녔어야 했다고 후회해 보지만, 이미 늦었다.
갑자기 개인 병원에 뛰어들어 출산하려 해도 받아주지 않아, 진통에 시달리면서 병원을 전전했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다. 인위적으로 출산 날짜를 조정할 생각은 전혀 없다. 되는 대로 되라며 각오를 다졌다. 내 옆에서 기다리던 사람도 예정일이 가까운 듯했다. “학원 강사라서 일요일에 낳을 수 있게 해 주세요.” 라고 말하고 있었다.
부모 사정으로 출산 날짜를 마음대로 정해도 되는 건가 하고 나는 놀랐다. 하지만 무당에게 점을 보게 해서 억지로 ‘좋은 날’에 낳으려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혹은 병원 사정으로 분만 촉진제를 맞거나 제왕절개를 강요받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다. 1991년 조사에서는 다섯 명 중 한 명이 제왕절개였다고 한다. 나도 갑자기 불안해졌다.
그 병원에는 조산사라는 존재가 없는 듯하다는 것을 나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진찰 도중 의사가 간호사에게 불려 나가 “출산이 시작돼서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하고 자리를 비우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출산 때 꼭 남편이 입회해 주길 바랐다. 그것도 미리 의사에게 부탁해 두었다. 같은 시간대에 출산하는 사람이 없으면 남편 입회도 가능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 의사가 없으면 그것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 걱정이다! 내 직감은 맞았다. 역시 담당 의사가 출장 중일 때 진통이 시작되고 말았다. 밤 12시가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시어머니에게 전화하자 곧바로 달려왔다. 출산 후 얼마나 지나야 일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어서, 나는 정리해 두고 싶은 원고가 있었다.
아직 통증이 불규칙해서 남편과 시어머니에게 먼저 쉬라고 하고, 나는 혼자 워드프로세서로 향했다. 오전 4시. 겨우 원고를 마칠 즈음 통증이 규칙적으로 변했다. 하지만 아직 견딜 만하다. 일단 자 두자고 누웠지만 약 10분 간격으로 통증이 와서 잠을 잘 수 없다. 오전 6시. 병원에 가기로 한다. 출산까지는 아직 시간이 걸리니 먹을 수 있을 때 영양 있는 것을 먹어 두라고 시어머니가 소 내장을 푹 끓인 국을 데워 주었다. 식욕은 없지만 어쨌든 먹는다.
밖은 이미 밝아오기 시작했다. 이런 시간에 일어나는 생활을 한 적이 없어서 아침 공기가 신선하다. 병원까지는 차로 10분도 채 안 걸린다. 그런데 그곳에 있던 젊은 여자 의사는 무정하게 이렇게 말했다. “초산이니까 아직 멀었어요. 아마 내일 밤쯤 될 겁니다. 집도 가까우니까 3분 간격으로 진통이 오면 입원하세요.” 어쩔 수 없이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 돌아와 얼마 지나지 않아 교정해야 할 원고가 팩스로 도착했다. 이것도 지금 처리해 두는 편이 낫겠다 싶어 시어머니를 일단 돌려보내고 책상에 앉았다. 확인해야 할 내용이 있어 진통 사이사이에 어떻게든 전화도 했다. 일을 마치고 누워 있으니 점점 통증이 심해진다. 하지만 간격은 아직 7~9분. 아직 병원에는 갈 수 없다.
“이건 진짜 진통이 아니야. 더 더 아파질 거야.”
출산에 관한 책을 반복해서 읽으며 통증을 견딘다. 저녁이 되자 꽤 아파졌다. 남편에게 등과 허리를 문질러 달라고 하며 얼음을 입에 물고 버틴다. 그래도 간격은 아직 5분. 이 고통이 다음 날 저녁까지 계속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질린다. 차라리 이대로 기절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계속 얼음만 입에 넣었다.
저녁 7시가 조금 지난 시각. 더는 참을 수 없다. 일단 병원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기분이 나쁘다. 아직 샤워할 여유는 있을 것이다. 통증에 간간이 쪼그려 앉으면서도 어떻게든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었다. 다시 시어머니가 달려왔다. 출발 전에 화장실에 갔더니 끈적한 붉은 점액이 나왔다.
아파서 더 이상 일어설 수 없다. 시어머니에게 의지해 겨우 걷다가 갑자기 물이 터지는 느낌으로 양수가 터졌다. 그래도 병원에서 내일 밤이라고 했으니 아직 멀었다고 본인은 생각하고 있었다. 오후 8시 15분. 병원 도착. 진찰대에 올라타자마자 간호사들이 소란을 피운다.
“아, 벌써 머리가 보여요!” “여기서 힘주지 마세요! 빨리 분만대로 옮겨야 해요!” “왜 이렇게 될 때까지 참으셨어요! 준비할 시간도 없잖아요!” 나는 멍한 머리로 ‘뭐야, 내일 밤이 아니었나’ 하고 생각했다. 이동 침대에 실려 분만실로 옮겨지면서 옷을 갈아입혔다. 곧바로 분만대로 옮겨져 “자, 힘 주세요”라는 말을 들었다.
젊은 남자 의사와 간호사 다섯 명이 보인다. 나는 거의 녹초가 된 상태에서 어떻게든 “남편을 불러 주세요”라고 부탁했지만, 상황이 그럴 여유가 아닌 듯했다. 진통에 맞춰 세네 번 힘을 주자 벌써 머리가 나왔다. 그다음은 짧은 호흡으로 순식간에 몸이 빠져나왔다. “응애―” 하는 울음소리.
“남자아이입니다.” 라는 말을 듣고 ‘당연하지’라고 생각했다. 내 직감은 맞는다니까! 보랏빛을 띤 아기가 팔다리를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4월 16일 오후 8시 45분, 나는 이렇게 무사히 남자아이를 출산했다. 병원 도착 30분 만이었다. 조금만 늦었으면 차 안에서 낳을 뻔했다! 이상할 정도로 감동은 없다. 그저 그 고통에서 해방된 것이 안도될 뿐이다.
아기가 저렇게 보라색인데 괜찮은 걸까 하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동안 남편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분만 입회를 원한다고 간호사에게 말했더니, 먼저 입원 수속을 하지 않으면 밤 9시가 지나면 입원이 안 된다고 해서, 곧바로 1층 응급 접수 창구에서 서류를 작성하고 돈을 내고 돌아와 나를 찾으러 다녔다고 한다. 그때 다른 간호사에게 “이미 태어났어요”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는 것이다.
시어머니와 둘이 복도에서 기다리다가 한참 뒤 간호사가 와서 아기를 보라고 했다. 유리창 너머로 막 태어난 아기를 보고 건강한 모습에 눈물이 났다고 한다. 그래도 내 모습이 보이지 않아 걱정되어 복도를 서성였다고 했다. 태반이 나온 뒤의 일은 나도 기억이 없다. 그 자리에서 곧바로 깊이 잠든 모양이다.
어젯밤을 꼬박 샜으니까. 정신을 차려 보니 이동 침대 위에 혼자 있었다. 주변에도 이동 침대가 줄지어 있었지만 자고 있는 건 나뿐. 고개를 들자 시계가 보였고 10시 반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산과 접수 앞 복도에 눕혀져 있는 듯했다. 마침 교대 시간인지 저쪽에서 간호사들이 인사를 나누고 있다. 두리번거리자 아기를 받아낸 남자 의사가 와서 “출혈이 있는지 확인할 테니 조금 더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다.
아기도 건강하고 걱정할 필요 없다는 말을 듣고 안심하며 다시 졸았다. 밤 11시가 지나 입원실로 옮겨졌다. 검진은 1층에서 받았고 분만실과 입원실은 4층이라 위치 관계를 전혀 알 수 없다. 이동 침대에 실린 채로 옮겨지는 도중 남편의 모습이 보였다. 그도 내가 어디 있는지 몰라 계속 복도에 서 있었다고 한다. 병실 침대에 누워 있으니 시아버지가 웃으며 들어왔다. 남자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에 택시 기사에게 팁까지 주며 달려왔다고 한다.
내가 들어간 1인실에는 TV, 전화, 냉장고, 샤워와 화장실이 갖춰져 있다. 6인실이면 보험 적용이 되지만 “입원비는 걱정 마라, 내가 낸다”고 시아버지는 큰소리를 친다. 그런데 혹시 여자아이였으면 6인실이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건 차마 묻지 못했지만. 방에는 식은 미역국과 밥, 시금치 나물, 전이 놓여 있었다. 밤 9시 이전에 입원 수속을 해서 야식이 나온 것이다. 거의 식욕이 없어 조금만 먹었다.
다음 날 아침 간호사가 와서 아기를 병실로 데려와도 되지만 밤 9시까지 다시 신생아실에 돌려보내라고 한다. 곧바로 남편과 시어머니가 작은 카트에 아기를 태워 데려왔다. 어젯밤에는 보라색이었는데 지금은 새빨갛다. 그래서 ‘아까짱(赤ちゃん)’이라고 하는 거구나 하고 납득한다. ‘이게 내 뱃속에 들어 있었던 건가’ 하는 묘한 기분.
쭈글쭈글하고 작고 연약해서 부서질 것 같아 나는 무서워서 만질 수 없다. 그런데 남편 가족들은 안아 보라, 젖을 먹여 보라며 재촉한다. 해 본 적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일본 책에는 초유를 먹이라고 되어 있지만, 아기는 처음부터 젖병과 함께 데려왔다. 병원 옷도 깨끗이 빨았겠지만 낡고 새하얗지는 않다.
형수는 겨드랑이가 찢어진 것을 발견하고 “우리 귀한 아기에게 이런 걸 입히다니!”라며 화를 낸다. 하지만 병원에 있는 동안은 마음대로 갈아입힐 수 없다고 한다. 아이를 좋아하는 형수는 “귀엽다”를 연발한다. 시아버지가 “어때, 귀엽지?”라고 묻자 나는 솔직히 “바둑이가 더 귀여워요”라고 대답해 소란이 났다. 바둑이는 형수 집에서 키우는 잡종개로, 태어났을 때 내가 탯줄을 잘라 준 적이 있다.
“자기 자식보다 개가 더 귀엽다니!” 하지만 아기는 쭈글쭈글한 외계인 같아서 아직 귀엽다고 하기엔 멀었다. 게다가 나는 솔직히 아이보다 개를 더 좋아한다. 금요일에 출산했는데 일요일에는 벌써 퇴원. 자연분만은 2박 3일 입원이다. 출산 비용은 분만 등 약 20만 원이 보험 적용되고, 나머지 차액 병실료와 식비 약 39만 원을 현금으로 지불했다. 그 이전에 정기 검진 비용이 약 35만 원.
일본과 비교해 비싼지 싼지는 모르겠다. 다만 초음파 비용 등은 병원마다 차이가 크다는 신문 기사를 보니, 내가 다닌 서울 중앙병원은 꽤 비싼 편이었다. 입원 2박 3일 동안 병원에서는 아기 돌보는 법을 전혀 가르쳐 주지 않는다. 나는 아기를 안아 본 적도 없어 어떻게 안고 어떻게 수유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조심스럽게 안아 보면 “그렇게 안으면 아기가 불쌍하다”며 가족들이 빼앗아 간다. 나는 모유 수유를 하고 싶었지만 집에 돌아오자마자 가족들이 분유와 젖병을 사 왔다. “모유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분유를 먹이고 싶지 않아요.” “배고파서 우는데 불쌍하잖아. 너는 신경 쓰지 말고 자.”
나는 초보, 가족들은 경험자. 반박할 수 없다. 기저귀 가는 법도, 목욕시키는 법도 모른다.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왜 그렇게 꾸물거려”, “아기가 불쌍하잖아”, “넌 그냥 자”라는 말을 듣는다. 내가 아기를 만지면 불안하다며 모두 빼앗아 간다. 집에는 친척들이 계속 찾아온다.
그런데 밖에서 와서 손도 안 씻고 아기를 안는다.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사람들에 둘러싸인다. “친척들에게 일일이 손 씻으라고 하기도 그렇고…” 라며 시어머니는 중얼거린다. 출산 후 3주 동안은 외부인이 방문하면 안 된다고 하지만, 친척은 가족이라 예외다.
옛날 한국에서는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대문에 줄을 치고 빨간 고추를 매달았다고 한다. 고추는 한국어로 ‘고추’. 남자아이의 성기도 고추라고 하므로 남자아이 출생의 표시다. 또한 빨간색은 액막이 의미도 있어 병이 들어오지 않게 하는 뜻도 있다. 이 표시가 있는 동안은 외부인은 출입 금지다.
출산 후 한동안 김치 같은 자극적인 음식은 먹지 않고 미역국을 많이 먹는 것이 한국의 풍습이다. 또 찬물에 손을 넣어서는 안 된다고 해서 약 2주 동안 시어머니가 집에 머물며 집안일과 육아를 맡아 주었다. 시어머니는 손자가 너무 예뻐 밤늦게까지 자는 아기에게 말을 걸곤 한다. 남편 가족 모두 아기를 무척 좋아해, 초등학교 교사인 형수는 조퇴까지 하고 와서 목욕을 시켜 준다.
우리는 배워야 하는데도 아이를 떨어뜨릴까 봐 만지게도 하지 않는다. “손자는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주는 선물이다.” 남편의 말 그대로다. 이 아이는 내 아이이기 이전에 류씨 집안의 아이다. 출산 직후 남편 가족이 내게 한 말은 “잘했다”, “수고했다”였다. 반면 일본 부모는 “축하한다”였다. 뉘앙스 차이가 꽤 크게 느껴졌다.
이후 육아를 하면서도 한국에서는 내 아이라고 해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점점 깨닫게 된다. 퇴원하고 며칠 뒤, 탯줄이 툭 떨어졌을 때였다. 시어머니가 그것을 쓰레기통에 버리려 하기에 나는 깜짝 놀랐다. 바싹 마른 탯줄을 소중히 집어 드는 나를 시어머니는 기묘하다는 듯 바라본다. 물론 마른 탯줄이란 것이 기묘한 물건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쓰레기통에 휙 버리는 것은 너무 매정한 느낌이 든다.
나중에 오동나무 상자에라도 넣어 주려고 천으로 싸서 내 책상 서랍에 넣어 두었다. 처음으로 머리카락을 잘랐을 때도 쓰레기통에 버리려는 것을 내가 막아서 휴지에 싸서 역시 책상 속에 넣어 두었다. 언젠가는 버릴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아직 그럴 마음이 들지 않는다. 이런 걸 보면 한국뿐 아니라 일본에도 꽤나 묘하고 신기한 풍습이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우리 결혼에 계속 반대했고, 결혼 후에도 남편을 싫어하던 나의 어머니가 한 달 뒤 아버지와 함께 한국에 왔다. 커다란 짐 속에는 전부 아기 용품이 들어 있었다. 이런저런 말을 했어도 역시 손자는 귀여운 모양인지, 동시에 남편에 대한 감정도 완전히 바뀌었다. 그런 이야기는 종종 들었지만, 남편은 그 일에 무척 감동하고 있었다.
서울은 오늘도 쾌청 (1998 도다 이쿠코)
●11.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쓰기 편한 이름을 ― 이름 짓는 법
근처 은행에 아파트 관리비를 내러 갔다. 대체로 한국의 은행이라는 곳은 창구가 아무리 바빠도 그 뒤에 앉아 있는 과장이나 계장 같은 직함을 가진 남자들이 한가해 보이기 때문에, 나는 언제나 불쾌해진다. 마침 월말이라 관리비를 내러 온 사람들이 긴 줄을 만들고, 창구는 두 개뿐인데 직원들은 숨 돌릴 틈도 없다. 그런데 바로 뒤에 앉은 아저씨는 잡지 같은 걸 펼쳐 놓고 느긋하게 쉬고 있다. 기다리는 나는 점점 짜증이 난다.
뭐야, 이렇게 많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는데, 창구 업무를 돕지는 않더라도 당신도 좀 바쁘게 일하는 척이라도 하란 말이야, 하고 한마디 따지고 싶어진다. 그럴 때 문득 그의 책상 위에 놓인 명패가 눈에 들어왔다. “과장 김왕국”. 그 순간 내 분노는 싹 날아가고 웃음이 치밀어 올랐다. 주변 사람들에게 “저기 저 사람, 김왕국이래요” 하고 말을 걸고 싶어 몸이 근질거린다. 그러나 줄 서 있는 사람들은 모두 모른 척. 나는 혼자 웃음을 참으며 순서를 기다렸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남편에게 “김왕국 씨”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그는 “그거 별로 특이한 이름도 아닌데”라며 시큰둥하다. “아니, 은행원 이름이 김왕국이라니 대단하잖아?” “왜?” …안 되겠다, 이 재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반대로 한국인에게는 매우 우스운 일본 이름도 있다. 내 친구 이름은 ‘준요’. 한국인은 그 이름을 한자로 쓰는 순간 배꼽을 잡고 웃는다.
준요의 한자 ‘純代’를 한국식으로 읽으면 ‘순대’. 돼지 창자에 소를 채운 음식이다. “부모님도 너무하시네. 하필 순대 같은 이상한 이름을 붙일 필요가 뭐야…” “그래도 일본 부모가 한국어를 알 리가 없잖아. 일본어로는 귀여운 이름인데.” 이런 이유로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한국어로도 일본어로도 어색하지 않은 이름을 지어야 한다고 나는 꽤 고민했다.
처음에는 한국어로 읽어도 일본어로 읽어도 발음이 같은 이름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남편 집안에서는 손자의 이름은 할아버지가 짓는 것이 관례다. 게다가 남자아이의 경우에는 돌림자를 써서 이름의 한 글자가 이미 정해져 있다. 참고로 여자아이는 아무 이름이나 지어도 된다고 해서, 차라리 딸이 태어나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태어난 건 역시 아들이었다.
한국에서는 보통 성은 한 글자, 이름은 두 글자다. 이름 두 글자 중 하나는 돌림자이므로 자유롭게 정할 수 있는 것은 겨우 한 글자뿐이다. 따라서 동명이인이 꽤 많다. 한국 대학에 다니던 시절이 떠오른다. 출석을 부를 때마다 “김대중”, “김일성”이라는 이름이 나오면 모두가 크게 웃었다. 한자까지 같지는 않을지 모른다. 金大中이 아니라 金大重일 수도 있고, 金日成이 아니라 金一星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발음은 같은 것이다.
내 이름 도다 이쿠코(戶田郁子)는 한자로 써도 일본식으로 읽어 주는 사람이 없다. 한국식으로 읽어 “호정욱자”라고 불려 버린다. 왠지 내 이름 같지 않아서 나는 익숙해지지 않는다. 병원 대기실에서 이렇게 불리면 주변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쳐다본다. 가끔 “이상한 이름이네요. 중국인이세요?”라고 묻기도 한다. 정말 배려 없는 말이다.
“이상한 이름”이라니. 하지만 이런 일에 일일이 상처받다가는 한국에서 살 수 없다.
돌림자를 직역하면 ‘돌려 쓰는 글자’다. 몇 대는 어떤 글자, 다음 세대는 어떤 글자라고 정해져 있고, 몇 세대 후에는 다시 같은 글자가 반복된다. 이를 통해 같은 성, 같은 본관, 같은 돌림자를 가진 사람들끼리는 같은 항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스무 살 이상 나이 차이가 나더라도, 일족의 계통상 같은 세대라면 형식적으로는 존댓말을 쓰지 않아도 된다. 물론 연장자에게는 자연스럽게 존댓말을 쓰게 되지만. 그런데 아랫세대 사람이 나이가 더 많은 경우도 자주 있다.
이런 때는 서로 말투와 호칭 때문에 애를 먹는다. 그래도 먼 친척이라면 자주 만날 일은 없겠지. 시아버지의 돌림자는 ‘근’, 남편은 ‘규’가 이름의 끝 글자로 쓰인다. 내 아이 세대는 ‘수’다. 나는 무심코 “그럼 ‘수길(秀吉)’로 하죠”라고 말했다가 눈총을 샀다. 하지만 아쉽게도(?) ‘수’는 반드시 이름의 뒤에 와야 한다고 한다. 이 글자는 일본어와 한국어에서 읽는 법이 다르기 때문에, 남은 한 글자만이라도 일본과 한국에서 모두 쓰는 한자를 골라야 했다.
그런데 일본의 어머니도 가만있지 않는다. 획수가 24획이나 31획이 되도록 하라며 주문을 해 온다. “토다(戸田)랑 야나기(柳)는 둘 다 9획이라서 딱 좋았어.” 나는 그런 걸 지금까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래도 어차피 마음대로 정할 수 없는 이름이니 양쪽 의견을 모두 반영하고 싶었다.사전을 뒤져 일본과 한국에서 모두 쓰이는 한자 가운데 획수가 맞는 것을 골라 보니 몇 개밖에 없다.
그중에서 시아버지에게 정해 달라고 했다. 아들을 낳은 그날 밤, 시아버지는 기쁜 표정으로 그 목록에서 하나를 골랐다. “명수”. 한국어로는 명수, 일본어로는 아키히데다. 24획으로 재물운이 좋다고 한다. 믿어 보겠습니다. 요즘 일본 아이들은 켄, 고, 준 같은 영어로 해도 어색하지 않은 세련된(?) 이름이 많다고, 유치원생을 둔 친구가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런 가운데 ‘아키히데(明秀)’라니 촌스럽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한참 뒤 초등학교 교사인 형수님이 나에게 툭 하고 말했다. “명수라니, 한 시대 전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진부한 이름이야.” 과연, 명수는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시대에 뒤떨어진 이름이었던 걸까. 그래도 그 덕분에 양쪽 모두에서 공평해진 셈 아니냐며, 나는 이상하게 납득했다.
그런데 결혼한 이후 나는 남편 가족에게 이름으로 불린 적이 한 번도 없다. 어쩌면 내 정확한 이름을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 역시 형수 이름을 모른다. 유학생이었을 때나 직장에 다닐 때나 나는 늘 ‘도다 씨’라고 불렸다. ‘씨’는 氏. 한국에서는 직장 동료나 밖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이름에 ‘씨’를 붙여 부르는 것이 보통이다. 또는 성에 미스터, 미스를 붙여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우스운 건 자기 자신을 미스터 김, 미스 정이라고 소개하는 습관이다. 외국어이기 때문에 미스터나 미스가 존칭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일본식으로 바꿔 “저는 김상입니다”, “정상입니다”라고 말해 일본인을 당황하게 하는 사람도 있다.
남편도 그랬다. 친정 아버지가 “야나기 군”이라고 남편을 부르는 것을 기억하고, 전화로 “여보세요, 저는 야나기 군입니다”라고 말해 내가 황급히 고쳐 주었다. 그러고 보니 또 하나 신경 쓰이는 점이 있다. 범죄 보도를 보면 유죄가 된 한국인 범인의 이름에는 ‘씨’를 붙이면서도 외국인 이름에는 아무런 존칭도 붙이지 않고 “호소카와는”, “하시모토는”이라고 하는 것이 나에게는 매우 부자연스럽다.
내가 한국에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도다입니다”라고 하면, 전달하는 사람이 “도다네요”라고 답하는 것도 무척 불쾌하다. “도다 씨라고 해야지!”라고 소리치고 싶은 걸 늘 참고 있다. 그래도 결혼해서 자기 이름이 사라지는 것에 비하면, 모르는 사람에게 ‘도다’라고 불리는 편이 차라리 낫다. 이름이 있는데도 그것을 불러 주지 않는다는 것은 나에게 작은 충격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뭐라고 불리는 걸까. 이게 또 무척 복잡하다. 부르는 사람에 따라 호칭이 다르다. 아이가 생기기 전에는 시부모님이 나를 ‘작은 애' 라고 불렀다. 남편이 막내이기 때문이다. 남편의 형님은 나를 ‘제수씨’, 형수는 ‘올케’라고 부른다. 형님 부부의 아이들은 나를 ‘작은 엄마’, 남편을 ‘작은 아빠’라고 부르고, 남편 누나 부부의 아이는 나를 외숙모라고 부른다.
다행히 아이가 생기고 나서는 좀 단순해졌다. 나는 ‘명수 엄마’, 남편은 ‘명수 아빠’다. 줄여서 ‘에미’, ‘에비’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것은 ‘엄마’, ‘아빠’보다 한 단계 낮은 호칭으로, 내가 나보다 윗사람에게 남편 이야기를 할 때는 “에비가…”라고 말한다. 처음에는 그때마다 혼자 “새우라니(*일본말로 새우를 '에비'라고 함)” 하고 피식 웃었지만, 이제는 익숙해졌다. 밖에서는 나는 ‘명수 엄마’가 된다. 남편의 형제나 형수도 그렇게 부른다. 아이가 학교에 가도 계속 그렇다.
내가 남편 가족을 부를 때는 어떨까. 일본에서는 보통 가족이라고 하면 부모와 자녀까지를 말하지만, 한국에서는 조부모, 부모, 자녀, 부모의 형제와 그 자녀까지가 가족이다. 우리 집은 형님 부부와 아이 둘, 우리 아이 하나로 정확히는 9인 가족이지만, 시누이 부부가 부모와 함께 살고 있기 때문에 시누이부부와 아이까지 포함해 12인 가족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나와의 관계에 따라 각각의 호칭이 달랐다. 시부모는 아버님, 어머님, 시누이와 형의 배우자는 형님, 그 남편은 아주버님 또는 서방님이라고 부른다. 아이들(조카)은 이름으로 부른다. 아이를 낳은 뒤에는 아이 기준으로 부르게 된다. 시부모는 할아버지, 할머니, 시누이 부부는 고모, 고모부, 형님 부부는 큰아버지, 큰어머니가 되었다.
그 호칭대로 아이에게는 큰어머니나 작은어머니가 사실상 어머니 역할을 한다. 그래서 나는 형님 부부의 아이들을 내 아이처럼 대해야 한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명수(아들)는 형님 부부가 맡고, 반대로라면 우리가 형님 부부의 아이를 맡아 키워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론은 그렇지만, 내 아이도 제대로 키울 수 있을지 모르겠고, 무엇보다 나는 본래 아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조카를 내 아이처럼 생각하라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저 그런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여기까지의 가족 호칭은 어떻게든 익혔다. 문제는 친척이다.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의 형제와 그 자녀들까지가 가까운 친척이라 집안 행사 때마다 오가는 사이다.
복잡해서 형수(남편의)의 호칭을 귀 기울여 듣는다. 남편이 쓰는 호칭을 그대로 외우면 나는 시집온 사람이기 때문에 맞지 않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한 번에 많은 사람을 만나면 누가 누구의 자식인지 손자인지 전혀 알 수 없다. 벽에 큰 가계도를 그리고 사진을 붙여 외우려다가 곧 포기했다.
“누가 누구를 부른다더라”는 식의 전달이 되면, 내 기준으로만 생각한 호칭으로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어설픈 호칭을 써서 실수하느니 차라리 입을 다무는 편이 낫다. 친척들이 모여 여자들이 부엌에서 수다를 떨 때도 도대체 누구 이야기인지 알 수 없어 듣는 척하며 딴생각을 한다.
가끔 옆에 있던 형수가 내 무릎을 톡 치며 “지금 너 얘기야”라고 알려 준다. 적어도 나를 여러 호칭으로 부르지 말고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했더니 형수에게 혼이 났다. “이름으로 부르는 건 상놈들이나 하는 짓이야. 우리 집에서는 그런 거 허용 안 돼!” 여기서 ‘상놈’이란 신분이 낮은 사람을 뜻하며 양반과 대비되는 말이다.
한국에서는 이런 차별적 표현이 일상적으로 쓰인다. 솔직히 나는 남편 집안의 가문에는 전혀 관심이 없지만, 며느리 입장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없어 조용히 있었다. 호칭 이야기라면 부부 사이의 호칭도 빼놓을 수 없다. 연인 사이에서는 서로 이름+씨로 부르거나 ‘자기’라고 부른다. ‘자기’는 한자로 自己지만, 당신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결혼하면 보통 서로를 ‘여보’나 ‘당신’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우리는 왠지 쑥스러워서 ‘여보’, ‘당신’이라고 부르지 못한다. 아이가 태어난 지금도 여전히 서로를 ‘자기’라고 부른다. 이걸 시댁 식구들이 들으면 곧바로 혼이 난다. 남편은 한동안 근처 일본어 학원에 다녔는데, 어느 날 싱글벙글하며 돌아와 이렇게 말했다.
“오늘 일본어로 널 뭐라고 부르면 되는지 배웠어. ‘오쿠상(부인)’이라고 하더라.” 교과서를 보니 “야마다 씨의 부인 생일은 언제입니까”라는 예문이 있었다. 그 이후 남편은 “부인, 밥 먹자”, “부인, TV 보자”라고 불렀다. 그렇게 불리니 왠지 불륜이라도 하는 것 같아 웃겨서 나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불릴 때마다 “히히히” 하고 웃음이 나오는 바람에 남편도 이상하게 여겼는지 그 호칭을 그만둔 것은 조금 아쉬웠다. 다른 사람에게 남편을 소개할 때도 딱 맞는 표현이 없어 조금 불편하다. 한국식으로 ‘남편’이라 하거나 ‘애 아빠’라고 할 수밖에 없다.
남편은 나를 ‘집사람’이라고 부르는데, 직역하면 ‘집의 사람’이라는 뜻이라 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마누라’도 있지만 ‘마늘’ 같아서 영 와 닿지 않는다. 그렇다고 ‘와이프’라고 부르는 것도 거북하다. 좋은 말이 없을까 생각하지만 아직 찾지 못했다.
서울은 오늘도 쾌청 (1998 도다 이쿠코)
● 12. 김치와 우메보시 - 극복할 수 없는 식생활
산후에는 미역국을 대량으로 먹지 않으면 안 된다. 아침, 점심, 저녁 내내 계속 미역국이다. 시어머니가 큰 냄비에 끓여 주시고, 겨우 다 먹었다 싶으면 또 끓인다. 미역은 피를 맑게 하는 작용이 있다고 해서, 한국에서는 산후나 생일 등에 빠질 수 없는 음식이다. 하지만 일본에서도 미역을 먹는데, 특히 산후에 대량으로 먹지는 않는 건 왜일까.
모유가 잘 나오게 하려면 족발을 푹 고아낸 국물을 마시라고 들었지만, 냄새가 심할 것 같아서 자신이 없다. 사 오겠다는 시아버지를 어떻게든 말리면서 필사적으로 핑계를 찾는다. “저는 외국인이니까 한국인과는 체질이 다를지도 몰라요. 그래서 일본식으로 해보겠습니다.”
그렇군, 하고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잉어곰국을 만들어 먹었다. 잉어는 한국에서도 출산 후에 먹는 음식인데, 이것도 푹 끓여서 국물을 마신다. 나로서는 그것보다 일본식으로 된장을 풀어 담백하게 만든 쪽이 먹기 편하다. 잠깐 옆길로 새자면, 가끔 나는 이상한 생각이 든다.
일본인의 평균 수명과 한국인의 평균 수명을 비교해 보면 약 10년 차이가 나는데, 나처럼 한국에 살면서 한국인과 같은 것을 먹는 일본인은 도대체 한국인의 평균 수명에 가까워지는 걸까, 아니면 일본인의 평균 수명을 기준으로 보면 되는 걸까 하고. 물론 이것도 결국은 개인차이겠지만, 이런 게 갑자기 신경 쓰이면 문득 혼자서 깊이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출산 후 15일째부터는 이번에는 ‘보약’이라고 불리는 한약을 보름 동안 마시게 되었다. 보약이란 강장제로, 고려인삼이나 녹용(사슴뿔), 그리고 여러 한약재를 달여 만든 액체다. 한국에서는 한방
(漢方)을 ‘한방(韓方)’이라고 부른다. 발음은 같다. 중국에서 전해진 한방이 조선시대에 활발히 연구되어 민간에 퍼졌다. ‘한방(韓方)’이라는 표현이 정착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지만, 서민들의 의약으로 널리 퍼져 있다.
몸 상태가 좋지 않거나 쉽게 피로하고 나른하다든지, 식욕부진 같은 증상이 있으면 한국인들은 자주 보약을 마신다. 보약은 꽤 비싸다. 보름이나 한 달 분으로 재료에 따라 다르지만 30만~40만 원(약 4~5만 엔) 정도라고 하니, 대졸 초임의 절반 정도에 해당한다. 그래서 수시로 마실 수 있는 건 아니다.
현모양처형 주부들은 평소 절약해서 1년에 두 번은 남편을 위해 보약을 준비하고, 수험생 아들에게도 먹인다. 심지어 아기에게까지 먹이는 경우도 있다고 해서, 우리 집에서도 “명수에게 먹일까”라는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아직 한 살도 안 된 아기에게 쓴 한약을 먹인다니, 이걸 고문이라 하지 않으면 뭐라 해야 할까.
그렇게 귀한 보약을 며느리에게 주었으니 감사해야 할 일이겠지만, 나는 이런 한약에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그저 쓰기만 할 뿐 기쁘지도 아무렇지도 않다. 보약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은 남성용으로는 개, 여성용으로는 흑염소다. 시장에 가서 한글 간판을 읽지 못하더라도 흑염소 인형이나 그림이 있다면, 보약을 달여주는 집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고 보니 나도 한국에 막 왔을 때는 설마 흑염소를 달여 마신다는 걸 몰라서, 왜 간판에 흑염소가 있는지 신기하게 생각했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일본에서 온 유학생 친구들도 그랬다. “한국에는 염소 키우는 사람이 많네. 매일 학교 갈 때 염소를 산책시키는 사람이 있더라.”
사실 그 염소가 약이 되기 위해 시장으로 팔려 가는 중이었다는 걸 깨달은 것은 한참 뒤였다. 아이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아버지가 말했다. “안색이 별로 안 좋구나. 살이 빠진 거 아니냐.” 그럴 만도 하다. 익숙하지 않은 육아로 완전히 녹초가 되어, 만성적인 수면 부족으로 늘 머리가 멍하다. “어때, 흑염소 먹어볼래?” 드디어 나왔다, 흑염소…. “아, 그건… 비싼 거라 괜찮습니다. 냄새도 심해서 먹기 힘들다고 들었고요…”
나는 당황해서 횡설수설한다. 예전에 몸이 약해서 흑염소를 먹었다는 친구 얘기로는, 기름 냄새가 코에 배어 너무 역겨워 도저히 먹을 수 없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아버지가 1회분씩 비닐봉지에 담긴 흑염소 엑기스를 큰 종이봉투 두 개나 들고 왔을 때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여기 흑염소는 이상한 냄새가 절대 안 난다고 가게 사람이 보증했으니까 괜찮다.”
그래, 나 한국 와서 개도 먹어봤지. 이쯤 되면 염소든 호랑이든 가져와라! 기분을 북돋우려고(?) “♪ 흰 염소가 편지를 보내왔네~ 검은 염소는 읽지도 않고 먹어버렸네~♪” 하고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하루 세 번 억지로 마신다. “이거 완전 야생의 왕국이네.” 개를 먹었을 때도 그랬지만, 염소다 염소다 생각하면서 마시면 더 역겨워지니까 아무 생각 없이 단숨에 들이킨다.
그런데 생각했던 것만큼 비린내가 심하지도 않고, 전에 마셨던 한약보다 조금 더 걸쭉한 정도랄까 하는 느낌이었다. “어때, 흑염소는 효과가 있냐?” 시아버지는 매일 와서 묻는다. 효과가 있다고 믿고 마시면 혹시 신통한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초롱초롱한 눈의 흑염소 모습을 떠올리며 마시는 나로서는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다.
차라리 비타민제가 나았겠다 싶지만, 한국 사람들은 보약을 먹으면 반드시 기운이 나고 튼튼해진다고 믿고 있으니 어쩔 수 없다. 아니, 흑염소가 영양가 만점이라는 건 틀림없는 것 같다. 출산하면 살이 빠질 줄 알았는데, 염소 덕분에(?) 전혀 체중이 줄지 않았으니까. 어쨌든 보약 신앙이 있으니 한방의는 돈을 번다. 남편 친구 중에도 개업한 사람이 있다.
상가 건물에 세 들어 있지만, 언젠가는 빌딩이라도 세울 기세로 잘 나가서, 차도 국산 최고급 3500cc ‘엔터프라이즈’(안마기·냉장고 포함)를 타고 다닌다. 실제로 들어보면, 약이 되어버리면 어떤 재료를 썼는지 손님(환자)은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나쁜 짓을 하려고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한다.
가끔 신문에도 한방의 면허도 없는 사람이 터무니없이 비싼 한약을 팔아 적발됐다는 기사도 보인다. 아, 물론 그 친구는 실력이 좋아서 잘 되는 것이다. 뭐니 뭐니 해도 내 허리 통증을 말끔히 고쳐줬으니까…. 산후 2주가 지나면 이제 보통 식사를 해도 된다. 그런데 나는 출산 전부터 이미 부엌에 서는 습관이 거의 사라져서, 뭔가 직접 만드는 게 너무 귀찮다.
그라탱이나 카레 같은 게 먹고 싶지만, 외식하려 해도 갓난아기가 있어 불가능하다. 시어머니나 시누이는 내가 아이 돌보느라 힘들 거라며 자주 반찬을 만들어 가져다주는데, 이것 또한 전부 한국 음식이라 나는 식사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인다. 시어머니 말대로 역시 뱃속에 있을 때가 편했다. 출산 전에는 자주 외식했는데, 그게 안 되다 보니 오히려 아이가 태어난 뒤가 생활비는 덜 들게 되었다.
우리가 살던 잠실은 매우 편리한 동네라 바로 근처에 일본과 같은 대형 슈퍼도 있고, 일식·양식·중식 등 일본과 비슷한 맛을 내는 가게도 있으며, 맥도날드나 켄터키 같은 패스트푸드도 있다. 덕분에 나는 임신 중에도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 남성과 결혼해 지방에 사는 일본인 친구는 “입덧할 때 특히 먹고 싶은 걸 구할 수 없어서 너무 힘들었다”고 했다. “가끔 딸기가 올라간 쇼트케이크가 너무 먹고 싶어져서 말이야.” 그 말을 듣고 나는 그럴 거면 서울에서 가져다줄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통일교에서 결혼해 한국 시골에 살고 있을 일본 여성들은 도대체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나는 계속 신경이 쓰였다. 먹고 싶은 것을 먹지 못하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는 나도 겪어봤지만 꽤 괴로운 것이다. 하물며 언어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임신, 출산, 병까지 겪게 된다면, 과연 그녀들은 견뎌낼 수 있을까. 종교의 힘이라는 게 그렇게까지 위대한 것일까.
내가 유학을 시작한 1983년 무렵과 비교하면 서울도 많이 변했다. 시내 어디를 가도 24시간 영업하는 슈퍼가 있고, 인스턴트가 아닌 저렴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가게도 많이 생겼다. 서울에서도 가장 세련된 젊은이들이 모인다는 강남에서는 일본식 이자카야가 대유행이다. 이름하여 ‘노바타야키’. ㄹ이 단어 첫머리에 오면 ㄴ으로 바뀌는 한국어 발음 법칙을 따른 것이다. 게다가 한자로 ‘野畑焼’라고 적힌 간판을 봤을 때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炉端焼가 바른 일본어 표기임)
맛있는 일본 술이 없는 건 아쉽지만 안주는 거의 일본과 같은 메뉴라 나도 식사를 겸해 가끔 갔다. 다만 꽤 비싼 게 흠이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식사를 하면서 화가 난 적도 몇 번 있었는데, 대부분은 잊어버렸지만 몇 가지는 아직도 기억난다.
하나, 맛있는 초밥이 먹고 싶어 가장 비싼 ‘특’을 주문했더니 재료가 전부 도미뿐이었다. 접시 위에 새하얀 초밥만 줄지어 있었다. 일류 호텔이라도 초밥은 메뉴 사진과 실제가 많이 다르다는 걸 각오하고 주문하는 게 좋다. 참치 뱃살, 성게, 연어알 등은 거의 없다. 롯데에서 한 번 항의했더니 오히려 “없는데 어쩌라고요”라고 웨이트리스가 되받아쳤다.
하나, 텐동을 시켰더니 밥 위에 튀김을 계란으로 풀어 얹어놓았다. 슬펐다. 하나, 스파게티 면이 우동 같았다. 눈물이 날 뻔했다. 그래도 돌려보내지 않고 먹어버린 내가 슬프다. 일식인데 김치가 나온다든지, 중식인데 단무지가 나온다든지, 돈가스가 얇고 종잇장 같다든지 하는 초보적인 수준에는 이제 놀라지도 않는다. 간장이나 육수 맛의 차이, 초밥 재료의 차이는 어쩔 수 없는 만큼 그저 참고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최근에 제대로 된 전문점이 늘어난 것은 반가운 일이다. 일본이라면 값싼 패밀리 레스토랑 같은 곳도 한국 기준으로는 꽤 비싸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훨씬 낫다. 외국인이 늘어서 이런 가게가 늘었다기보다, 한국 젊은 세대의 입맛이 그만큼 변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마치 초등학생 조카와 내 식성이 비슷한 것과도 같다.
예를 들어 내가 양배추 롤이나 미트볼을 만들어 형님 집에 가져가면, 좋아하는 건 남자들뿐이다. 남편은 우유를 사용한 요리에 거부감이 있어 스튜나 그라탱, 포타주 수프 등을 싫어한다. 나도 놀랐다. 1993년 6월, 어느 생명보험회사가 전국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설문 결과를 신문에서 봤는데, 좋아하는 음식: 돈가스, 피자. 싫어하는 음식: 불고기, 김치, 채소, 파.
아마 지금의 30대 이상과 이하 사이에는 식성도 꽤 차이가 있을 것이다. 30대 이상은 식사라 하면 밥과 김치가 없으면 시작이 안 된다. 우리 남편도 그렇다. 빵이나 라면만 먹으면 세 끼 식사로 치지 않는다. 이런 우스갯소리도 있다. 어떤 대식가가 우동을 먹었다. 세 그릇을 먹어도 다섯 그릇을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다가 열 그릇을 먹고서야 겨우 배가 불러 가게를 나왔다. 걷기 시작하자마자 넘어지며 그가 한 말, “역시 면은 포만감이 안 든다.”
중국에 사는 약 200만 명의 조선족도 주식은 역시 쌀이다. 예전에 만주국 시절에도 조선족에게는 한족보다 더 많은 쌀이 배급되었다고 들은 적이 있다. 지금도 한족은 밀가루로 만든 만두나 국수 등을 주식으로 하는 경우가 많지만, 조선족은 밥을 먹지 않으면 힘이 안 난다고 한다.
내가 일본에서는 빵이나 스파게티를 주식으로 먹는 경우도 많다고 하자, 남편은 “그래서 일본은 이미 미국의 식민지가 된 거야. 그런데 조카를 보니까 한국도 곧 그렇게 될 것 같아”라고 말했다. 가끔 “한국인은 김치와 마늘을 많이 먹어서 살이 안 찐다”고 아는 척하는 일본인을 보면, “그럼 우리 남편은 대체 뭐냐!” 하고 반박하고 싶어진다. 김치와 마늘을 매일 먹어도 평균 체중을 훨씬 넘고 있으니까.
시어머니에게 “네가 양식 같은 이상한 걸 먹여서 그런지 요즘 또 살찐 것 같지 않니”라는 말을 듣고 크게 웃은 적도 있다. “어머니, 살찐 건 결혼하고 나서가 아니라 결혼 전부터 이미 충분히 쪘었어요!” 한국 음식은 맵고 짜고, 일본 음식은 담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지도 모른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집집마다 맛의 차이는 있겠지만, 요즘 들어서야 한국 음식은 맵지만 담백한 것도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예전에 조용필이 일본에 왔을 때 며칠 통역을 한 적이 있었는데, 식사 때마다 일본의 된장국을 마시고는 “너무 짜서 못 먹겠으니 물로 희석해 달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이게 왜 짜지?’ 하고 이해가 안 됐다. 그런데 몇 년 동안 한국 음식을 먹고 나서 일본에 돌아가 외식을 하면, 우동 국물이나 된장국이 아주 짜게 느껴진다. 나도 건강할 때는 대부분의 한국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다. 하지만 감기에 걸려 식욕이 없을 때는 좋아하던 김치에도 손이 가지 않는다. 그럴 때는 역시 죽과 매실장아찌가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서울은 오늘도 쾌청(1998 도다 이쿠코)
●13. 죽은 이를 위로하는 화투 ― 남편의 절친의 장례식에서
월요일 아침 7시에 전화가 울렸다. “누구야, 이런 아침 댓바람부터!” 잠결에 남편이 전화를 받았다. 대학 시절 동급생이었다. “승여리가 어젯밤 죽었어…” “뭐라고, 설마…” “나도 믿기지 않지만, 어젯밤 늦게 승여리 삼촌에게서 연락이 와서, 아침 되기를 기다렸다가 너한테 전화한 거야.”
승여리라고 불리던 친구(본명은 승열이지만 애칭으로 부르면 승여리가 된다)는 남편의 대학 시절 동급생으로, 함께 사진을 공부한 동료였다. 충무로에서 스피드 현상 서비스를 하는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충무로에는 사진 스튜디오와 영화 제작사, 인쇄소 등이 밀집해 있어 서울 중심부이면서도 서민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동네다. 나 역시 남편과 밖에서 만나기로 할 때면 자주 그의 가게를 이용하곤 했다.
교통사고였다. 일요일이라 일찍 집에 돌아온 그는 그날 왠지 피곤하다며 저녁을 먹고 바로 누웠다고 한다. 밤 8시쯤 근처에 사는 고등학교 시절 친구가 찾아와 드라이브를 가자고 권했다. 피곤하다며 한 번은 거절했지만, 잠시 후 다시 와서 결국 둘이 함께 나갔다고 한다.
덤프트럭과 정면충돌해 운전자도, 조수석에 있던 그도 즉사였다. 서울은 교통사고가 많다는 말을 늘 남의 일처럼 흘려듣던 내가 몸서리를 쳤다. 남편은 곧바로 여기저기 전화를 걸기 시작했고, 영정 사진이 필요하다며 사진과 필름이 가득 들어 있는 큰 케이스를 뒤엎어 대학 시절 친했던 다섯 명이 지방 촬영 여행에서 찍은 흑백 사진을 꺼냈다.
거기서 웃고 있는 작게 찍힌 승열 씨의 얼굴을 크게 확대하기로 했다. 사진 찍는 것을 좋아했던 그였지만, 이상하게도 자기 초상 사진은 한 장도 남겨두지 않았다. 놀러 가서 찍은 스냅 사진조차 없다고 한다. 남편은 허둥지둥 옷을 갈아입고 그 사진을 들고 나갔다. 집에 혼자 남겨진 나는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며칠 전만 해도 승열 씨는 대학 시절 친한 친구들과 함께 우리 집에 놀러 왔었기에, 갑작스러운 부고는 나로서도 믿기지 않았다.
가게 보증금은 부모의 도움을 받고, 현상 기계 값은 매달 조금씩 갚아 나가 이제 곧 그 빚도 끝난다고 했었다. 가게를 시작한 지 3년째에 드디어 단골도 생기고, 이제는 어떻게든 해나갈 자신이 생겼다고 했던 이야기도 들었다. 게다가 최근에야 겨우 여자친구도 생겼다며 기쁘게 말하던 모습이 떠올라 나는 견딜 수 없었다. 늦은 밤, 남편은 몹시 지친 모습으로 돌아왔다. 밤이 되어 일을 마친 친구들이 모여들었기에 일단 돌아왔다고 했다.
승열 씨는 외아들이었다. 남겨진 부모의 슬픔이 얼마나 클지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사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어머니는 즉사했다는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실신했다고 한다. 그날 밤은 누워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갑자기 남편이 말했다.
“다시 병원에 가서 승여리 좀 보고 올까.” 이미 날짜가 바뀌어 시계는 새벽 2시를 넘고 있었다. 나도 마지막 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해 곧바로 일어나 준비했다.
“오늘 밤은 친구들이 밤새 곁에 있을 테니 먹을 걸 좀 가져가자.” 남편의 말에 급히 뜨거운 커피를 보온병에 담고, 집에 있던 빵과 과일을 챙겨 병원으로 향했다. 사고 현장 근처 병원 주차장에서는 친구 한 명이 차 안에서 곯아떨어져 있었다. 승열 씨 가게 2층에서 광고 스튜디오를 운영하던 대학 동급생이었다.
아침에 사고 소식을 듣고 일도 내팽개치고 계속 병원을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병원 뒤편 영안실로 갔다. 넓은 방에는 그날 여섯 명의 영정이 놓여 있었고, 각각 앞에는 친척과 친구들이 모여 있었다. 크게 확대된 승열 씨의 영정 앞에 무릎을 꿇자 눈물이 흘렀다. 저쪽에서 이불을 덮고 자고 있는 사람이 승여리 어머니와 아버지라고 남편이 귓속말로 알려주었다.
지쳐 쓰러지듯 잠든 것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주변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전혀 들리지 않는 듯했다. 복도를 사이에 둔 반대편에도 역시 젊은 영정이 있었다. 승열 씨를 드라이브에 데려갔다가 함께 죽은 친구라고 했다. 모인 사람들 가운데 서로 오가는 이는 없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둘러앉아 화투를 치고 있었다.
승열 씨 영정 앞에서도 대학 친구들이 친척이 준비한 소주와 주스, 떡과 귤을 먹으며 환호성을 올리고 있었다. “빈소에서 저렇게 떠들다니…” 내가 눈살을 찌푸리자 남편이 말했다. “친구나 친척들이 많이 모여 떠들썩하게 놀아 주는 게 고인을 즐겁게 해주는 거야.” 하지만 이런 자리에서 화투라니….
처음에는 팥색의 천 원짜리 지폐와 동전이 오갔지만, 곧 초록색 만 원짜리 지폐가 오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모두 눈빛까지 달라진다. 손님인 나를 신경 써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버지, 그거 아니고 이거예요.” 여드름 난 아들이 아버지 뒤에 붙어 진지한 표정으로 조언을 한다. “여보, 힘내요. 오늘 저녁 반찬은 당신에게 달렸어요.”
아내도 남편에게 열렬한 응원을 보낸다. 나는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다. 오가는 말 속에 일본어 같은 것이 섞여 있다.
“코도리”, “나가리”, “미나토”… 이 화투 역시 일제 잔재인 것이다. 결혼하기 전, 남편이 몹시 분하다는 듯이 나에게 말한 적이 있다. “정말 일본인들은 머리가 좋아. 한국인들에게 화투를 가르쳐 놓고, 다들 거기에 빠져 있는 사이에 나라를 빼앗아 버렸잖아.” “화투 때문에 식민지가 된 건 아니잖아.” “아니야, 충분히 효과는 있었을 거야.” “그렇게 말할 거면 화투 같은 건 그만두면 되잖아.” “그건… 못 해.”
남편은 예전에 열렬한 화투 애호가였다고 한다. 친구 집에 놀러 가면 꼭 새벽까지 화투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결혼 후 내가 화투를 싫어한다고 하자,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너 결혼하고 많이 변했다.” 남편의 친구들은 늘 이렇게 놀린다. “옛날에는 신혼인 우리 집에 와서 밤새 놀았잖아.” “에이, 나는 그런 적 없는데?” “무슨 소리야. 오늘은 복수하러 왔으니까 얼른 화투 내놔.” “나는 화투 안 하니까 집에 있을 리 없잖아.” 그때마다 끝까지 잡아떼는 남편이었다.
이번에는 내가 반격한다. “화투는 원래 일본 거니까, 한국 사람들끼리만 즐기지 말아요. 기분 나쁘네.” “우리도 그걸 이용할 권리는 있어.” “화투는 일본의 국기야.” 누가 결혼한다는 등의 정보 교환도 이루어진다. 때로는 화투를 너무 많이 해서 팔이나 허리가 아프다고 푸념하는 사람도 있다. 내 하숙집 아주머니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녀의 일과는 먼저 화투 점을 보는 것이다.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오면 좋아질 때까지 계속한다. 딱딱한 온돌 바닥 위에서 등을 굽힌 채 혼자 묵묵히 화투를 늘어놓는다. 아주 진지하다. 내가 학교 다녀오겠다고 인사해도 쳐다보지도 않는다.
내 아는 사람 중에는 여관에 눌러 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과 전화 연락을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여관 아주머니들이 늘 화투에 몰두해 있어서, 한창 재미있을 때는 그 사람이 있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나갔어” 하고 전화를 끊어버리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통계를 본 적이 있다. 울산 지역 성인 남녀 804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인데, 성인 남녀의 94%가 ‘고스톱’이라는 화투 규칙을 알고 있고, 대부분이 30대 이전에 배웠으며, 가족이나 친척이 모일 때마다 반드시 화투를 한다고 답했다. 그중 20%는 시간이 나면 매일이라도 한다고 했고, 한 번 시작하면 3시간 이상 계속한다는 사람이 63%였다. 직장에서 점심이나 저녁을 걸고 한 판 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심지어 하룻밤 사이에 한 달 월급을 날려버리는 사람도 있다.
물론 도박은 한국에서도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가 오락이고 어디서부터 도박인지 기준은 없다. 식사 정도를 거는 것은 도박이 아니라고 여겨질 것이다. 실제로 처음 3점에 500원, 2점 추가마다 500원이라는 단위의 화투는 무죄 판결이 난 사례도 있다. 화투뿐만 아니라 당구나 포커 등으로 내기를 즐기는 사람도 많다. 그래서 도박 관련 사건도 자주 일어난다.
어느 대학 교수가 부동산 중개업소에서 화투를 하다 싸움이 나 상대에게 3주 치료의 상해를 입혔다는 이야기, 은퇴한 여배우가 화투로 번 수백만 원을 경찰을 사칭한 청년에게 빼앗겼다는 기사도 본 적이 있다. 신문에 나지 않는 곳에서도 기가 막힌 이야기는 많다. 형이 포커로 1억 원이 넘는 빚을 져 동생 부부가 집을 팔아 갚았다든지, 화투에 빠져 집까지 잃고 아내가 아이를 데리고 가출했다든지, 고등학생이 수백만 원의 빚을 지고 부모가 대신 갚았다든지…
이런 이야기가 흔하니 아이들이 영향을 받지 않을 리 없다. 남편도 초등학생 때부터 친척들에게 화투를 배웠다고 한다. 중학생이 되어 포커도 모르면 바보 취급을 받는다고 한다. 일본 인기 만화 카드로 초등학생들이 학용품이나 용돈을 걸고 노는 것이 문제가 되기도 한다. 아이는 부모를 보고 자라는 법이다. 이야기가 승열 씨 장례에서 많이 벗어나 버렸다.
장례식은 다음 날이라고 했다. 아침 9시에 관을 화장장으로 옮긴다고 들었다. 새벽까지 화투를 치던 친구들은 관은 자신들이 메겠다고 친척들과 약속하고 잠시 집에 갔다고 한다. 남편은 화장이 끝나고 영정을 절에 안치할 때 합류하기로 했다.
그런데 아침 9시 전에 친구들이 영안실에 모였을 때는 이미 관이 나간 뒤였다고 한다. 우리 집에 전화해 온 친구는 몹시 흥분해 있었다.
“약속까지 했는데 너무한 거 아니야? 친구랑 마지막 인사도 못 하게 하고 아침 일찍 화장해 버렸대. 지금 다들 화가 나서 가족에게 항의하러 가고 있어.” 아마 유족은 친구들에게 시신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했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한국에서는 매장이 일반적이고, 특히 부모가 죽었을 때 화장을 하면 불효자라고 한다.
하지만 부모보다 먼저 죽은 경우에는 화장을 하는 경우가 많고, 재는 산이나 바다, 강에 뿌린다. 묘라는 것은 제사를 이어갈 자손이 있을 때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결혼하지 않고 죽은 사람은 당연히 자식이 없어 묘를 만들지 않는다. 승열 씨는 특정 종교를 믿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교회에 다녔지만, 그렇다고 고인이 신자였던 것은 아니므로 기독교식 장례를 하는 것도 이상했다.
그의 가게에 자주 드나들던, 산 사진을 취미로 하는 스님이 자신의 절에 영정을 모시겠다고 제안해 그곳에 안치하게 되었다. 사십구일은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절이라고 해도 주택가의 평범한 집이었고, 2층에 불상이 모셔져 있었다. 그날까지 영정은 그곳에 있었고, 누구든 찾아와 참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사십구일까지였다. 이날을 끝으로 그의 영혼은 이 세상을 떠나 극락으로 간다.
기도가 끝나고 스님을 앞세워 아래층으로 내려가 마당 한쪽 소각로 앞에 모였다. 이별의 순간이었다. 스님이 고인을 보내는 말을 하고, 유족이 가져온 속옷과 양말에 불을 붙였다. 이모가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리자 주변 사람들이 말렸다. 이때 울면 고인의 영혼이 성불하지 못한다고 한다. “승여리는 바보야. 우리한테 인사도 없이 가 버렸어.”
“불쌍한 녀석이야. 결혼도 못 하고 죽었네.”
친구들은 평소처럼 농담하듯 말하며 죽은 친구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는 돌아오는 길에 남편에게 물었다. “불쌍한 건 남겨진 부모님이지, 왜 다들 승열 씨가 불쌍하다고 해?” “결혼도 못 하고 죽었잖아.” “결혼했으면 남은 가족이 더 불쌍했을 거야. 젊은 미망인은 어떻게 하라고? 난 오히려 결혼 안 한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래도 결혼했으면 자식이 묘를 지킬 수 있었잖아.” 묘를 만든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듯하다.
나는 남편의 조부모 제사라며 묘에 가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라 실감이 나지 않는다. 제사를 위해 음식을 준비하고 산까지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하면 번거롭기만 하다. 하지만 시아버지를 보면, 그런 제사가 삶의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 같다. 묘를 다녀오면 항상 상쾌한 얼굴이다. 승열 씨가 죽은 뒤 몇 달이 지나 추석 연휴에 친구들이 부모님을 찾아가 위로하기로 했다. 나도 함께 갔다.
어머니는 임신 중인 나에게 말했다.
“요즘은 아이 키우기 힘들다고 하나만 낳는 사람이 많은데, 이런 일이 있으니까 하는 말이지만 둘은 낳는 게 좋아.” 부모님은 고아원에서 아이를 입양할까도 생각했지만, 스님이 반대했다. “입양한다고 해서 아들을 잃은 슬픔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또 그 아이를 진짜 자식처럼 대할 수 있겠습니까? 조금 더 시간을 두세요.”
그 후 부모님과는 자연스레 연락이 끊겼다. 지금도 문득 궁금하다. 두 분은 어떻게 지내고 계실까.
승열 씨가 죽은 뒤 가게는 친구가 이어받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친구들의 입에서도 ‘승여리’라는 이름이 점점 사라졌다. “우리도 이렇게 조금씩 잊어 가는 거겠지…” 남편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서울은 오늘도 쾌청(1998 도다 이쿠코)
●14. 신을 믿으세요 ―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한국은 아시아에서 필리핀 다음으로 기독교 신자가 많은 나라라고 한다. 미국의 종교 잡지인 『Christian World』의 1993년 조사에 따르면, 세계에서 신도 수가 가장 많은 교회를 조사한 결과, 1위는 서울시 여의도의 순복음교회(60만 명), 2위는 경기도 안양시의 순복음교회(10만 5천 명)를 비롯해, 한국의 23개 교회가 베스트 50에 이름을 올렸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한마디로 ‘크리스천’이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프로테스탄트(개신교)와 가톨릭(천주교) 두 가지가 있다. 나도 한국에 오기 전에는 어느 쪽이 어떤지 전혀 알지 못했다. 아니, 지금도 나는 신자가 아니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역시 잘 모르지만, 간단히 말하면 프로테스탄트 교회에는 목사가 있고, 가톨릭 성당에는 신부가 있다.
목사는 결혼이 허용되어 있지만, 신부는 평생 결혼하지 않는다. 거리에서 눈에 띄는 회색 베일과 옷을 입은 수녀는 가톨릭으로, 역시 결혼하지 않는다. 가톨릭은 유교의 전통을 받아들여 조상의 제사(법사)를 지내는 것을 긍정하지만, 프로테스탄트는 이를 전면적으로 부정한다. 이 때문에 크게 다투는 가정도 드물지 않다. 한국에서 가톨릭 신자가 많은 것도 납득이 간다.
처음에 예로 든 통계는 프로테스탄트에 관한 것이고, 그와는 별도로 가톨릭 쪽에도 신도 수가 많은 유명한 성당이 여럿 있다. 가톨릭은 로마 교황이 정점에 있고, 거기서 임명된 신부가 지역별 성당을 맡고 있다고, 이렇게 쉽게 설명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무 데나 함부로 성당을 세우는 것은 금지되어 있고 공통된 교리를 가지고 있다.
한편, 서울 시내를 저녁에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여기저기 붉게 빛나는 십자가가 보이는데, 그것이 바로 교회다. 신도만 모이면 목사는 어디에든 새로운 교회를 세울 수 있다. 교회라는 건물이 없어도 상관없다. 모일 장소만 있으면 된다. 상가 빌딩 창문에 십자가가 그려진 곳도 많다. 성서를 근거로 삼으면서도 해석 방식이 다른 다양한 종파가 있고, 기독교라고 하면서도 신흥 종교 같은 단체도 많다.
서양의 크리스천은 일요일을 휴식일로 삼아 교회나 성당에 예배를 드리러 가지만, 한국에는 한국식 해석이 있는 듯하다. 국민의 4분의 1이 크리스천이라고 하는데도 일요일이 되면 행락지로 향하는 도로는 대혼잡이다. 신도들은 아침 6시나 7시 예배에 참석하고 나서, “자, 오늘은 하루 실컷 놀아보자” 하고 기세 좋게 나서는 것이다. 그 덕분에 월요일에는 비틀거리며 출근하고, 일터를 빠져나와 목욕탕에서 한숨 돌리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일본인은 종교라고 하면 어딘가 수상쩍은 것이라는 인상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지만, 한국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 “종교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과 대답이 자연스럽게 오가고, 확실히 대학 신입생 생활 조사 카드에도 종교를 적는 칸이 있었다. 외국인 선교사도 많다. 예전에 내가 한국어를 배웠던 연세대학교 한국어학당에도 미국, 인도, 아프리카, 프랑스 등 여러 나라에서 와서 종교 활동을 위해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 옆자리에 앉은 인도인은 걸핏하면 “신은 위대하다. 할렐루야!”라고 말해서 나는 질려버렸는데, 어느 날 그는 매우 온화하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에게 기독교를 믿으라고 강요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어떤 종교든 좋으니 한 번 믿어보는 것도 좋다. 마음의 의지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한국에서 종교를 강요받아 여러 번 질린 경험이 있다.
“당신이 그 나이가 되도록 결혼을 못 한 것은 신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신을 믿지 않으면 당신은 불행해진다” 그건 내 마음이잖아, 하고 소리치고 싶어지는 일종의 협박 같은 포교에 몇 시간이나 붙잡힌 적도 있고, 택시에 타서 내릴 때까지 카세트로 찬송가를 크게 틀어놓고 “신을 믿으세요” “교회에 다니세요”라고 설교하는 ‘할렐루야 택시’ 운전사를 만났을 때는 길 위에서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고 싶기도 했다.
열심인 것은 좋지만, 개인의 의사를 완전히 무시한 강압적인 권유는 질색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도인 선교사의 말은 솔직하게 마음에 들어왔다. 교회나 성당에도 몇 번 가보았는데, 그 규모와 신도들의 열성에 놀랐다. 일본에서도 몇 번 교회에 간 적이 있었지만, 설교가 너무 어려워서 늘 졸음이 왔다. 찬송가도 가사가 난해해서 일본어인데도 뜻을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한국의 교회는 다르다. 부부 갈등이나 자녀 교육 문제, 나아가 최근의 사회 정세까지, 이해하기 쉬운 예를 들며 설교를 하고 찬송가 가사도 알기 쉽다. 아주 세속적인 이야기로 신도들을 한바탕 웃게 해놓고, 곧바로 가슴에 와닿는 이야기로 전환하는 화술의 능숙함.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듣게 된다. 신도들이 이야기 중간중간 “아멘”이라고 외치는 것도 왠지 즐겁다.
성당 쪽은 건물의 장엄함과 그 안에 감도는 엄숙한 분위기가 나에게는 비일상적이라 흥미로웠다. 그럼에도 신앙심이 부족해서인지 신자가 되지는 못했다. 종교를 갖게 되는 데에는 어떤 계기가 있을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출판사 사장은 사업 실패로 정신적으로 불안정했을 때, 새로운 사업에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이유로 재계 인사나 유명 인사들이 이름을 올린 어떤 기독교계 신흥 종교의 문을 두드렸다.
그에게는 종교에 의지하려는 의도보다도, 거기서 알게 된 인맥을 이용해 사업으로 연결하려는 생각이 더 강했지만, ‘3일 기도회’라는 연수에 참가한 뒤 생각이 완전히 바뀌어 마치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 듯한 감동을 얻고, 그 이후로 열심히 믿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신앙과 양심은 연결되지 않는 걸까 하고 내가 고개를 갸웃했던 것은, 그가 새로 시작한 출판사가 일본 만화를 불법 복제한 해적판으로 큰돈을 벌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신흥 종교라고 색안경을 끼고 볼 생각은 없다. 성당에 모이는 가톨릭 신자들을 봐도 모피 코트를 입은 아주머니도 있고, 운전사가 딸린 차를 타고 오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을 돕고 평등을 내세운다면서요, 라고 묻고 싶은 심정이다.
이렇게 종교를 믿는 인구가 많은데도 왜 거리에는 범죄가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교회나 성당에 발을 들여놓을 때만 성인이 되는 것일까. 그래도 신부라는 존재는 일목요연하게 존경받는다. 어느 조사에서 ‘존경할 수 있는 직업’ 1위가 신부였다고 한다. 뭐 신부도 직업이라면 직업이다. 신을 섬기는 직업이니, 확실히 성인군자임에 틀림없다. 남편의 가족의 종교는 시부모와 시누이 부부 및 그 자녀가 가톨릭이고, 남편의 형수는 프로테스탄트다.
신앙을 갖게 된 계기는 이렇다. 결혼 후 몇 년이 지나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았던 시누이가 주변 사람들의 권유로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다행히 아이를 갖게 되었고, 그 이후 부부가 함께 믿게 되었다. 태어난 아이는 유아 때 이미 세례를 받았고, 이후에도 부모와 세 사람이 열심히 성당에 다녔다. 시누이는 가족에게도 권유했지만, 그 제안을 받아들인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시아버지가 복어 중독에 걸려 병원에 실려 가는 큰 소동이 벌어졌다.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조카는 할아버지의 상태를 걱정하여 밤새도록 신에게 기도했다. 무사히 퇴원한 할아버지는 손자의 눈물겨운 이야기에 크게 감동하여 “나도 성당에 가볼까” 하고 한마디를 했다. 시아버지의 한마디는 그야말로 절대적이었다.
그때까지 “아멘 따위는 싫다”고 질색하던 시어머니까지 성당에 다니게 되었다. 막상 다니기 시작하니 재미있었는지, 시어머니는 열심히 공부하여 세례까지 받고, 지금은 처음 성당에 온 사람들에게 일주일에 한 번씩 신의 가르침을 강의할 정도로 열성적이 되었다. 시아버지는 “사실 나는 별로 관심 없지만, 저 사람이 열심이라서 따라다니는 거야”라고 말하면서도 매주 일요일 이른 아침 미사를 빠지지 않는다.
형수는 결혼 전부터 교회에 다녔지만, 결혼 후 곧 아이가 생겨 계속 다닐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아이가 자라고 남편은 일요일에도 일이 바빠, 어린 시절 친구의 권유로 최근 다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의 종교라고 하면 통일교가 유명하지만, 한국 내에서는 상당히 이단으로 간주되어 언론에서는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그 유명한 합동 결혼식 때조차 오히려 일본 언론이 더 떠들썩했다는 점이 화제가 될 정도였다.
사이비(유사, 가짜라는 의미) 종교로 불리는 신흥 종교가 사회 문제가 되는 일도 있다. 1992년 10월 28일 24시에 세계가 끝난다는 ‘종말론’도 그 하나였다. 1992년 여름 무렵, 종말론을 믿는 신도들이 직장을 그만두고 학교를 자퇴하고, 이혼하여 가정을 버리고, 집과 가재도구를 팔아 그 돈을 교회에 헌금하고 산속 기도원에 들어가 종말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종말론 신도는 약 2만 명, 그중 약 5천 명이 기도원에 들어갈 정도로 열성적인 신도라고 했다. 그 교리는 이렇다. “10월 28일 밤 12시에 예수가 공중 재림하면, 지상의 종말론 신도들은 살아 있는 채로 예수 곁으로 끌어올려지고(휴거), 7년 동안 함께 지낸다. 그동안 지상에서는 대혼란이 일어나고, 종말론을 믿지 않는 자는 모두 멸망한다. 그리고 1999년에 예수가 다시 지상에 재림하면, 새로운 신의 뜻에 따른 ‘천년왕국’이 건설된다.”
원래 종말론이란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성서의 중요한 가르침 가운데 하나로, 기독교뿐만 아니라 불교의 말세 사상 등 어떤 종교에도 공통된 교리가 있다고 한다. 즉 세상이 혼란에 빠졌을 때 구세주가 나타나 낡은 세상을 끝내고 새로운 이상 국가를 창조한다는 가르침이다. 나는 남편과 함께 산속 기도원으로 취재를 간 적이 있다.
마침 경찰이 본격적으로 단속에 나서던 시기였고, 목사는 교회를 떠났으며 50여 명의 신도만 남아 있었다. 종말이 오지 않을 경우 집단 자살의 위험이 있다고 하여, 형사들이 매일 빠짐없이 순찰을 돌고 있었다. 신도 중에는 종말론에 빠진 아내를 비관해 남편이 자살하고, 9세와 6세 아이를 데리고 이 기도원에 들어왔다는 여성도 있다고 한다.
모두 10월 28일까지 버틸 수 있는 돈을 가지고 들어온 사람들이었고, 오래된 사람은 1년이나 그곳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하루 네 번의 예배 외에는 모두 조용히 그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절반 이상이 고등학생 정도였고, 부모에게 끌려온 듯한 아이들이나 아기도 있었다. 고등학생들은 모두 성실하고 얌전해 보였다. 비닐하우스 예배당에 들어가자 한 여자아이가 수줍게 나에게 방석을 권했다.
종말론을 한국에 퍼뜨린 이장림 목사의 다미선교회 예배에도 갔다. 매일 밤 10시부터 12시까지 예배가 열리고, 이후에도 희망자는 철야 기도를 했다. 예배는 건물 4층에서 이 목사가 직접 전도를 하고, 2층과 3층은 자리가 부족해 TV 화면으로 이를 보는 방식이었다. 찬송가 연주는 기타, 베이스, 키보드, 드럼으로 구성된 젊은 밴드가 맡았다.
이런 광경은 한국의 어느 교회에서도 볼 수 있다. 다른 점이라면 찬송가가 매우 경쾌한 리듬으로 연주되고, 가사가 모두 휴거와 관련된 내용이라는 것. 신도들은 반복되는 찬송가에 점점 도취되어 양손을 흔들거나 박자를 맞추며 몸을 앞뒤좌우로 흔들면서 큰 소리로 합창하고 있었다.
9월 2일 새벽 1시경, 다미선교회에서는 ‘악마 퇴치’ 기도회가 열렸다. 한 젊은 여성이 이 목사 앞에 누워 있었다. 그녀의 몸에는 “10월 28일 휴거를 믿지 않는 악마”가 붙어 있다고 했다. “여기는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다. 당장 나가라. 집세도 안 내고 왜 이 몸에 들어왔느냐. 나가라!” 이 목사가 외칠 때마다 여성은 몸을 떨며 험악한 표정으로 저항했다. 이런 공방이 30분 정도 이어졌을까, 마침내 여성이 크게 울음을 터뜨렸고, 불신의 악마가 떠났다고 선언되었다. 무당이 병자를 굿으로 치유하는 장면과 매우 닮았다고 느꼈다.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6세 소년도 만났다. 세 살 때 갑자기 웃기 시작해 이유를 묻자 “천국의 강에서 놀고 있었는데 천사가 나를 간질였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아이가 집에서 기도하면 유리창에 십자가가 비친다고 했다. 실제로 나도 보았지만, 특별한 장치는 보이지 않았다. 기도하며 놀던 소년이 갑자기 “천사가 천국의 포도를 주셨어”라고 손을 내밀었는데, 그 손에서 달콤한 향기가 풍겨 놀랐다. 이 아이의 영향으로 불교를 믿던 부모도 종말론을 믿게 되었다고 한다. 이 아이는 어른을 속이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순진한 아이였기에, 오히려 더 설득력이 있었다.
아내가 집을 비운 사이 전 재산을 처분해 교회에 헌금하고 외아들을 데리고 교회에 들어가 버렸다는 남편도 만났다. 집과 가족, 친구와 학교를 버리고 사람들은 왜 종말론에 빠지는 걸까. 어떤 불만이나 스트레스에서 도피하려는 것일까 하고 여러 가지로 상상해 보았다. 10월 28일이 가까워지자 종말론 교회 내부에서도 분열이 생겨, 계시를 받았다는 사람이 신도들을 이끌고 산속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리고 10월 28일 밤, 나도 상황을 지켜보기 위해 서울 시내의 한 교회를 찾았다. 교회 주변에는 집단 자살이나 방화 위험에 대비해 경찰 기동대와 소방차, 구급차가 대기하고 있어 긴장감이 감돌았다. 언론은 완전히 차단된 상황이었지만, 나는 취재 중 알게 된 신도의 도움으로 간신히 교회 안에 들어가 예배에 참여했다. 들어가자마자 이름이 적힌 스티커를 가슴에 붙이라고 했다.
휴거 시에는 육체만 끌어올려지기 때문에, 남겨진 옷으로 누가 휴거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긴 이야기 같지만, 그 분위기 속에 들어가면 반발할 여유도 없어진다. 입구에는 사복 경찰 두 명이 엄중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찬송가가 시작되자 도취된 신도들은 앉은 채 몸을 흔들거나 일어나 춤추며 합창했다. 전도사는 틈틈이 외쳤다. “곧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됩니다!”
마침내 자정이 가까워지자 모두 일어나 서로 손을 잡고 ‘주여 영광의 나라’라는 찬송가를 부르며 휴거를 기다렸다. …그러나 자정이 지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울면서 찬송가를 계속 부르는 사람, 노래를 멈추는 사람, 돌아갈 준비를 하는 사람들로 교회 안이 술렁였다. “휴거는 반드시 일어납니다! 계속 노래합시다!”라고 외치는 전도사. 그때 갑자기 입구에서 가족들이 밀려 들어왔다.
“언제까지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할 거냐!” “내 아내를 돌려줘!” “휴거 따위 일어나지 않잖아!” 가족과 신도들이 몸싸움을 벌이고, 한 신도가 단상에 올라 “휴거는 새벽에 반드시 일어난다!”라고 외치자, “저건 악마다, 믿지 마라!”라고 고함치는 사람도 있었다. “속았다!”며 목사에게 달려드는 신도도 있었다. 가족 간의 싸움까지 벌어져 현장은 대혼란에 빠졌고, 결국 기동대가 투입되어서야 사태가 진정되었다.
일부 언론에서는 신도들을 마치 정신 이상자처럼 보도했지만, 실제로 만난 사람들은 모두 매우 성실하고 경건한 크리스천이었다. 종말론 신도 대부분이 원래 크리스천이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 이 교리는 나 같은 무종교자에게는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이해하기 어려웠고, 주변 사람들이 걱정했던 것처럼 세뇌되는 일도 없었다. 기독교에 대한 기본 지식과 종말론을 이해하는 것은 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종말론을 퍼뜨린 이장림 목사는 사기 혐의 등으로 체포되었고, 교회도 폐쇄되었다. 우려되던 집단 자살도 일어나지 않았고, 산속에 모여 있던 사람들도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직장과 학교를 그만둔 사람들은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하지만, 나도 몸 상태가 좋지 않아(당시 임신 3~4개월이었다) 더 추적하지는 못했다.
그 후에도 신문 사회면 한구석에 어느 교회에서 “○월 ○일 휴거설”을 주장하며 기도하고 있다는 기사가 가끔 실렸다. 아무래도 아직도 정신 못 차린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다. 비슷한 시기, 역시 프로테스탄트 분파인 ‘여호와의 증인’ 교회에 다니는 아내에 대한 앙심으로 교회에 방화를 저질러 신도 14명이 사망하는 사건도 있었다.
이러한 종말론과 방화 사건 보도를 본 내 어머니는 “한국인은 무섭네”라고 말했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일본에서는 한국인을 한데 묶어 “무섭다”고 말하려는 사람이 많겠지, 하고 나는 또 한숨을 쉬었다.
서울은 오늘도 쾌청 (1998 도다 이쿠코)
●15. 행복한 무당은 없는 걸까? ― 불교의 민간신앙
기독교 신자도 많지만, 한국에는 불교 신자도 많다. 크리스마스와 더불어 부처님의 탄생일(음력 4월 8일)은 국민 공휴일이다. 이날에는 안국동 광장에서 시내의 조계사까지 대규모 연등 행렬이 열리고, 전국의 사찰에도 신도들이 가져온 연꽃 모양의 아름다운 등이 가득 달린다.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불교에도 다양한 종파가 있다. 뭐, 이건 일본에도 공통된 일이지만. 그러나 나는 신자가 아니어서 자세한 것은 잘 모른다. 열성적인 신자들은 매일 절에 가서 참배하고 기도를 하며,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는 먼 절까지 찾아간다. 이런 때는 완전히 소풍 기분이다.
기독교도 그렇지만 불교 쪽도 신자의 대부분이 여성이다. 아줌마들이다. 역시 이런 아줌마들은 집에서 충족되지 못하고 있는 걸까, 하고 나는 상상해 본다. 남편은 매일 밤 술을 마시며 바람이나 도박에 빠져 있고, 대학 입시를 앞둔 아들은 성적이 뜻대로 오르지 않으며, 설령 대학에 합격한다 해도 입학금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고…
그런 식으로 저마다 심각하면서도 비슷한 인생 고민을 안고 있는 사람이 많은 것처럼 보인다. 내가 서울에서 유학 생활을 막 시작했을 무렵, 하숙집 아주머니는 열성적인 불교 신자였다. 어느 날 강원도 오대산의 절에 참배를 가는데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나에게 권했다.
이웃의 신도들끼리 버스를 전세 내어 새벽 일찍 출발해 당일치기로 다녀오는 꽤 빡빡한 일정이었다. 가는 사람은 전부 여성. 오십대가 가장 많았다. 버스에 타자마자 과자가 돌고, 노래가 시작된다. 이제 절에 참배를 간다는 엄숙함 따위는 조금도 없다. 좁은 통로를 뛰어다니며 춤을 추는 아줌마도 있다. 서로 마음을 터놓은 신도들끼리다. 참고로 술은 한 방울도 들어가지 않았다.
부르는 노래는 추억의 엔카부터 최신 히트곡까지, 아무튼 다들 활기차다. 큰 소리로 웃고 추임새를 넣고, 흥이 오르면 몇 사람이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해 대형 버스도 흔들린다. 히익, 고속도로에서 시속 100킬로도 넘게 달리고 있는데…. 몇 시간이나 이어진 격렬한 소동 끝에 도착하면, 각자 절에 참배를 마치고, 그곳에서 준비된 식사를 받는다.
물론 고기 요리는 없고 산나물이 중심인 사찰 음식이다. 한국에서는 보통 어떤 요리에도 고추를 쓰지만, 고추의 붉은 색은 귀신(나쁜 귀신이나 요괴뿐 아니라 조상의 영혼이나 부처까지 포함한다)을 쫓는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절이나 제사 음식에는 고추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잠시 쉬고 나면 다시 서울로 출발이다. 나 같은 경우는 이것만으로도 지쳐서 졸음이 오는데, 아줌마들은 기력이 넘친다. 무엇보다도 남편과 집안의 번거로움에서 오랜만에 해방된 것이다. 이참에 마음껏 자유를 만끽하겠다는 기세다. 여행사 패키지 상품을 보면 ‘성지순례’라는 것이 흔히 있다.
기독교는 이집트나 이스라엘, 혹은 로마 등. 불교는 태국이나 인도 같은 동남아시아다. 연로한 부모에게 여행을 시켜 드리려는 ‘효도 관광’으로도 성지순례 코스는 인기가 있는 듯하다. 이것 역시 모두 소풍 기분으로 참가하는 게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 해도 ‘성지순례’나 ‘효도 관광’은 일본에서는 여행 상품으로 절대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
불교 신자도 기독교 못지않게 많다고 하니, 전체 인구의 약 4분의 1 정도가 되는 걸까. 남편 가족 중에는 불교 신자가 없지만, 우리가 살던 올림픽 경기장 옆 아파트에서 전기료와 가스비를 내지 않고 나가버린 이전 거주자는 불교 신자였던 듯, 절에서 언제 어떤 행사가 있다는 다이렉트 메일(?)이 자주 왔다.
조금 오래된 통계지만, ‘여성불교신문’이 1992년에 창간될 때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왜 불교를 믿느냐는 질문에 ‘불법을 통해 자기 수양을 하기 위해’가 67%, ‘복을 받고 싶어서’가 17%, ‘번거로운 현실을 잊기 위해’가 12%라는 결과가 나왔다. 절에 가는 횟수는 ‘가고 싶을 때’, ‘주 1회’, ‘월 1회’가 각각 30%였다.
어릴 때부터 절에 자주 갔다는 사람은 42%. 가족 전원이 불교 신자라고 답한 사람은 51%나 됐다. 그런데 기독교뿐 아니라 불교 쪽에도 여러 가지 사이비가 있다. 원래 한국에는 무속신앙(샤머니즘) 같은 토착 민간신앙이 있었고, 불교나 기독교가 퍼지는 과정에서 이것과 상당히 결합되어 있다.
예를 들어 잘 나가는 교회라는 것은 불치병이 나았다든가, 걷지 못하던 사람이 걷게 되었다는 식의 이야기로 신도를 모은다. 이것은 불교도 마찬가지다. 무속신앙의 근저에는 바로 그런 것이 있어서, 극도의 황홀 상태에 빠졌을 때 믿기 어려운 힘이나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이용해 병을 고치거나 기적을 일으킨다.
이런 것은 기독교나 불교의 교리에서 벗어난 일이지만, 눈앞에서 기적을 본 사람들은 더욱 강하게 그 종교를 믿게 되는 것도 당연하다. 나와 남편의 만남은 무당 취재가 계기였다. 그 후에도 모 대학의 서운범 교수의 안내로 몇 명의 샤먼을 만났다.
샤머니즘은 한국에서 오랫동안 박해를 받아왔다. 박정희 정권 시절 시작된 ‘새마을 운동’은 낙후된 농촌에 근대화를 가져왔지만, 한편으로는 전통 민속 예능과 민간신앙을 부정했다.
예를 들어 집에 환자가 생겨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 도중, 이웃의 신고로 경찰이 들이닥쳐 소동이 벌어지는 일도 흔히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경건한 기독교 신자나 불교 신자들은 무당을 미신이라고 단정해 버린다. 내가 남편과 함께 무당을 만나러 간다고 하면 시어머니나 시누이가 반드시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다.
서 교수는 이미 40년 가까이 샤먼 연구를 해온 분으로 관련 저서도 많다. 그에 따르면 무당이 되는 계기는 크게 세 가지다. ‘가정 환경 속에서 애정이 결핍된 경우’가 70%. 예를 들어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이나 사별, 또는 결혼 생활이 원만하지 않은 경우 등이다. ‘가족(부모)이 무당인 경우’가 20%로, 이런 세습 무당은 특히 제주도에 많다.
'천둥소리 등 강한 충격을 받은 경우’가 5%. 한마디로 행복한 사람은 무당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독실한 기독교인이 신의 계시를 받는 것처럼, 무당도 어느 날 갑자기 부처나 조상, 혹은 전혀 관계없는 흰 수염의 선인이나 역사적 인물—예를 들어 이순신 장군 같은 존재—이 꿈에 나타나 계시를 내린다.
무당은 저마다 자신의 수호령을 모신다. 어떤 이는 아이이고, 어떤 이는 산신이나 조상이다. 그리고 ‘굿’이라 불리는 의식을 통해 병을 고치거나 미래를 점친다. 굿의 방식은 무당마다 천차만별이며 지역에 따라서도 특징이 있다. 맥아더 장군이 붙어 있다는 무당은 제물로 케이크, 위스키, 바나나 등을 준비했고, 아이의 영이 붙어 있는 경우는 사탕이나 과자를 좋아한다.
사람들이 무당을 찾는 것은 고민이 있을 때다. 사귀는 상대와의 궁합, 심신의 문제나 병, 가정불화 등으로 단순히 앉아서 점만 보는 경우도 있고, 제물을 준비해 큰 굿을 하는 경우도 있다. 나도 몇 번 무당에게 점을 본 적이 있다. 나중에 생각해 보면 “그거 맞았네” 싶은 것도 몇 가지 있었다. 아이의 영이 붙은 무당에게 “곧 아이를 갖게 될 거야. 남자아이야”라는 말을 들었는데, 그것도 맞았다.
무당들은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 많다. 나는 민속학자는 아니어서 전문 지식은 없지만, 무당이 된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는 큰 흥미를 느낀다. 어떤 무당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상담을 받으러 오는 사람 중에는 범죄자도 있어서, 무당이 몰래 경찰에 신고해 체포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고민 상담을 하러 왔다가 오히려 붙잡힌다니 왠지 불쌍하기도 하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차별받아 온 무당 입장에서는 가끔 이렇게 경찰에 협조하지 않으면 안 되는 때도 있다고 한다. 성당에 죄를 고백하러 온 사람 중 범죄자가 있다면 어떻게 하느냐고 시어머니에게 물었더니, 그것은 신에게 하는 고백이므로 비밀을 알게 된 신부도 절대 신고하지 않는다고 했다.
반대로 생각하면 신부는 사회적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가능하고, 개인 영업에 가까운 영세한 무당은 결국 ‘큰 나무 아래 그늘’에 기대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가톨릭도 개신교도 불교도 모두 조직이 크고 방송국이나 신문사까지 갖고 있지만, 무당은 그렇지 못하다. 조직이 크다고 하면 통일교도 대단하다. 무엇보다 자금력이 있다.
일본에서는 영감상법이다 뭐다 해서 시끄럽지만, 그 돈이 원화로 바뀌어 한국으로 들어온다고 생각하면 대단한 일이다. 대학도 갖고 있고, 광대한 토지와 건물도 있다. 미국에도 상당한 재산이 있다고 한다. 이전에 중국 길림성 연변대학에 갔을 때, 문선명의 기부로 지어진 도서관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통일교는 반공 아니에요?” 나는 놀라서 물었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좋은 고양이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과연 돈의 힘은 이데올로기도 뛰어넘는 것이다. 합동결혼식에서 거의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과 결혼하는 사람들에게 불안이 없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같은 진리를 배우는 사람이니까 불안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복잡한 마음이지만, 하나님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불안하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세계 인류는 모두 형제니까요.” “하나님이 바라시는 일입니다. 문 선생님과 같은 한국인이라 감사해요.” “같은 신앙,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불안이 있다면 애초에 합동결혼식에 신청할 수 없었겠죠.” “맡기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상대가 일본인인 경우, 외국인이 아니라서 안심했다는 사람도 많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자신의 인생까지 맡기려 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무척 신기했다. 저마다의 가치관이나 인생 고민은 없는 걸까. 아니면 이미 그것을 초월해 버린 걸까. 어떤 종교든 권유하는 쪽은 자신의 종교가 절대적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나처럼 믿지 않는 사람을 무척 불쌍하게 여기는 것 같다.
종말론 신자도 그랬다. “당신도 우리와 함께 휴거합시다.” 내 손을 붙잡을 듯한 기세로 진지하게 말하는 그 태도는, 내가 경험한 어떤 종교 권유보다도 열정적이었다. 어떻게 저렇게까지 믿을 수 있을까 의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순수함이 부럽기도 했다.
세속적인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는 종교와 무관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집에 있으면 기독교, 가톨릭, 불교 등 여러 종교의 권유자가 초인종을 누른다. 문을 열어버리면 이미 붙잡힌 것이나 다름없다. 목소리를 높여 쫓아낼 수도 없어 곤란하다. 가끔은 한국어를 잘 모르는 척도 해본다. 일부러 일본어로 “팸플릿을 받아도 저는 못 읽어요”라고 말해보기도 한다.
그런데 언젠가는 “어머, 일본인이세요? 저도 일본에 살았었어요. 그럼 다음에는 일본어 팸플릿을 가져올게요”라고 일본어로 답이 돌아와 당황했던 적도 있다. 상대가 너무 끈질길 때는 최후의 수단으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죄송하지만 저는 일본인이라 신토(神道)를 믿습니다.”
ソウルは今日も快晴(1998戶田郁子
●16. 二つの国籍と二つの名前-家族の中の子供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