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서 제19세 호태왕은 형제계승을 제외하면 주몽왕의 13세손이다.제1대 동명성왕(주몽) - 제2대 유리명왕(유리 혹은 유류) - 제3대 대무신왕 혹은 대해주류왕( 무휼 ) / 유리왕의 셋째 아들 - 제4대 민중왕(해석주) / 대무신왕의 아우. - 제5대 모본왕( 해우혹은 해애루) / 대무신왕의 맏아들, 민중왕 이후 즉위 - 제6대 대조대왕 혹은 국조왕( 궁 ) / 유리왕자인 고추가 재사의 아들 – 제7대 차대왕(수성) / 대조대왕의 동모제다. 제8대 신대왕( 백고 또는 백구) / 대조대왕의 계제. 제9대 고국천왕 혹은 국양 (남무 혹은 이이모) / 신대왕 백고의 둘째 아들. - 제10대 산상왕( 연우 일명은 위궁) / 고국천왕의 아우. 제11대 동천왕 혹은 동양( 우위거이고 어릴 때의 이름은 교체) / 산상왕의 아들. - 제12대 중천왕 혹은 중양(연불) / 동천왕의 아들. - 제13대 서천왕 혹은 서양 ( 약로 또는 약우) / 중천왕의 둘째 아들. - 제14대 봉상왕 또는 치갈 (상부 혹은 삽실루) / 서천왕의 태자. - 제15대 미천왕 혹은 호양왕 (을불 혹은 우불) / 서천왕의 아들인 고추가 돌고의 아들. - 제16대 고국원왕 또는 국강상왕 ( 사유 혹은 유라) 『수서』에서는 ‘소열제’라 칭한다. - 제17대 소수림왕 또는 소해주류왕 (구부) / 고국원왕의 아들. 제18대 고국양왕( 이련 혹은 어지지) / 소수림왕의 아우. 제19대 광개토왕(담덕) / 고국양왕의 아들.호태왕비문」의 건국 장소 엄리대수 및 건국시기와 『삼국사기』의 건국 장소 시엄수 및 건국시기를 "엄리대수=시엄수"로 비교시켜 보면 양자가 상호 대응하고 있었다.표1. 고구려 건국의 시점
구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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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고구려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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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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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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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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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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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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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1 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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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리대수 왕
엄수
시암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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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전 58년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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룡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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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삼성기전 상, 북부여기 하, 고구려국본기 건국시점
『삼국사기』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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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태왕비문」왕
엄리대수
『고려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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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2 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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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둔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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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전 40년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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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자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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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3 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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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본천,
비류수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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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전 37년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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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전
20년, 룡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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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건국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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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태왕비문」왕
비류곡 홀본서성,
『고려본기』
| 맥락상 「고자비문」의 주인공인 고자는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서 모둔곡(건국2 지점)의 극씨, 중실씨, 소실씨의 후예이다. 고구려 주몽이 ㉠ 비류수변에서 3차 건국한 지역은 ㉡ 해모수의 홀승골성 영역을 다물한 것이고, 또 비류수변 비류국은 선인 왕검의 후예인 ㉢ 송양왕의 영지이고, ㉣ 고구려 동천왕 때 수도를 옮긴 지역은 ㉤ 선인 왕검의 집인 아사달 지역의 평양과 동일 지역이다. 여기서 동천왕의 수도 평양은 대동강의 평양이 아니라 만주의 평양이다. 영역론에서 고조선 수도-북부여 수도-고구려 수도는 동일 지역으로 영토적, 인구적, 정치이념적으로 계승된다. 다만 관련 쟁점인 ‘호태왕이 시조와 상호 17세손이라는 것’은 해결되지 못했다. 이 내용은 연표를 구성하여 접근한 것이 효과적이다. 3) 『환단고기』 연표 (『환단고기』「삼성기전」과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환단고기』는 「호태왕비문」의 주몽왕의 건국시점과 장소가 『삼국사기』의 주몽왕의 건국시점과 장소와 견해를 달리하고 있어 주몽왕이 다단계 건국한 것을 알았던 유일한 저작이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고구려 건국은 주몽왕이 졸본부여왕의 사위가 된 시기이다. 또 이것은 『삼국사기』에서 전한 이설에 속한다. 『환단고기, 삼성기전 상』"1-1-35구: 그후 계해년(B.C. 58년)의 봄 정월에 이르러 고추모 역시 천제의 아들로서 북부여의 대통을 이어 일어났다. 36구: 단군의 옛 문물과 제도를 회복하고 해모수를 태조로 삼아 제사지내며 처음으로 건원을 세워 다물이라 하니 고구려의 시조이다." 『환단고기, 북부여기 하』"3-2-14구: 6세 단군 고무서 재위 2년, 20구 [2년 계해(B.C. 58년)] 겨울 10월에 단군 고무서가 붕하니 고주몽이 유언에 따라 대통을 이었다. 이 보다 먼저 단군 고무서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고주몽을 보고 비상한 인물임을 알고 왕의 딸과 혼인하게 하고 이 해에 이르러 즉위하니 그때 나이 스물 셋이었다. 22구: 한 때 하부여 사람들이 고주몽을 죽이려 하자 고주몽이 어머니의 명을 받아 오이· 마리· 협보 등 세 벗과 함께 길을 떠났는데 차릉수에 이르러 그 물을 건너려 하였으나 다리는 없고 뒤에서는 하부여의 군사들이 추격해 다가오고 있었다. 23구: 주몽이 차릉수를 보고 말하였다. 24구: "나는 천제의 아들이고 하백의 외손자인데, 오늘 도주 중인데 추격병이 추격해 오니 어떻게 해야 하느냐." 이때 물고기와 자라들이 얇은 곳에 떠올라 건너 갈 다리를 지시해 주어 비로소 강을 건너게 되고 그 후 물고기와 자라들은 곧 흩어졌다." 『환단고기, 고구려국 본기 제6』"4-6-1구: 고구려의 선조는 해모수로부터 나왔고 해모수 어머니의 고향 역시 그곳이다. 2구: <조대기>에는 이렇게 말한다. 3구: ‘해모수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웅심산에 일찍이 살다가 부여의 옛 서울에서 군사를 일으켜 무리에게 추대되어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니 이를 부여의 시조라 한다. 4구: 오우관(=까마귀의 깃털로 만든 관)을 쓰고 용광검(용 새김 검집)을 차고 오룡거(용관을 쓴 다섯 마리 말이 끄는 수레)를 탔다. 7구: 단군 해모수가 처음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임술(B.C. 239) 4월초 여드레로서 곧 진시황 정의 8년이다. 8구: 고리국의 왕인 고진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며, 옥저후 불리지는 고진의 손자이다. 모두 도적 위만을 토벌함에 있어 공을 세워 봉함을 받은 바다. 9구: 불리지는 일찍이 서쪽 압록강변을 지나다가 하백녀 유화를 만나 즐겨 그녀를 맞아 들여 고주몽을 낳게 하였다. 때는 곧 임인 (B.C. 79) 5월 5일이다. 곧 한나라 왕 불능 원봉 2년이다. 10구: 불리지가 죽으니 유화는 아들 주몽을 데리고 웅심산으로 돌아왔으니 지금의 서란이다. 11구: 주몽이 성장하여 4방을 유람하다가 가섭원을 택하여 살았다. 12구: 그는 관리로 선발되어 목마관이 되고, 얼마 안 되어 관가에서 꺼리는 자가 되어 오리, 마리, 협보와 더불어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렀다. 13구: 때 마침 부여왕은 후계자가 없었다. 주몽이 마침내 왕의 사위가 되어 대통(B.C. 58)을 이으니 이를 고구려의 시조라 한다." 위 『환단고기』 기록의 해석을 통해 세 가지 부합하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환단고기』의 역사관으로 상대「호태왕비문」에서는 건국 시점이 올라가고 하대『삼국사기』에서는 내려간다는 것을 알았다. 즉 “엄리대수=시엄수[=차릉수: 환단고기]”의 건국 시점은 『삼국사기』의 졸본왕의 사위로 건국했다는 이설이고 또한 『환단고기』의 졸본왕의 사위로 건국한 시점이라 추정할 수 있었다. 이점은 『환단고기』가 진서라는 중요 증거 중에 하나이다. 둘째, 『환단고기』는 「호태왕비문」의 호태왕이 그 시조와 상호 17세손이라는 의미가 고구려 주몽왕과 호태왕 사이가 아니라 북부여 해모수와 호태왕 사이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즉 ㉠ 북부여 해모수 - ㉡ 고구려 후 고진 - ㉢ 고진의 자 - ㉣ 고진의 손자 옥저후 불리지(자칭 천제지자)- ㉤ 주몽으로 이어지는 계보이고, 또 고구려 후 고진의 고구려건국(『환단고기』, 「북부여기」, 4대 고우루, 서기전 120년)은 ‘788년간’으로『삼국사기』신라 본기, 문무왕 10년조 ‘「안승책봉문」의 고구려 장 800년간’설과 부합한다. 이 부분은 『환단고기』가 진서이거나 적어도 근대의 새로운 신해석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셋째, 『환단고기』가 유일하게 고구려의 다단계 건국설을 파악한 사서라는 점에 주목하면 고구려 주몽의 초기 건국연도가 서기전 58년이고, 북부여의 건국연도는 서기전 239년과 232년이라는 건국설의 가치도 재평가된다. 즉 『환단고기』의 기록 내용은 고구려 다단계 건국설이 위축되면서 『삼국유사』가 고구려 주몽의 건국연도(서기전 58년)과 그 선조인 북부여 천제 해모수의 건국연도(서기전 232년과 서기전 239년)를 혼동하게 되어 그 결과로 주몽의 초기 건국연도(서기전 58년)를 북부여 해모수의 건국연도(『삼국유사』, 북부여, 서기전 58년 건국)로 착각하게 되었다고 주장한 셈이다. 또한 『신당서』 고려전의 당의 시어사 가언충이 고려비기의 "고구려는 9백년을 넘지 못하고 ..."을 인용하며 "고씨는 나라가 생긴 지 올해 668년이 꼭 900년이다"는 말이 나온다. 고구려건국 900년설은 『환단고기』 북부여기상의 해모수의 임술 원년(3-1-2: 서기전 239년) 제1 건국과 기사 8년(3-1-9: 서기전 232년) 고조선의 5가 공화정을 폐한 후 제2 건국 중에서 후자 서기전 232년설을 선택한 셈이다.고구려의 신왕호는 추모(신왕호 추모: 『삼국사기, 고구려』, 『삼국지위지,‘맥구려후 추’』)이고 구왕호는 '동명(성왕)' '해모수' '부루' '단군4-6-41' '왕검' '천제자' '대인[환웅]' [천왕]동명제4-6-39'등을 계승한다.
우리는 고구려 주몽의 원래 역사를 『삼국사기』, 『삼국유사』 그리고 『환단고기』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 등으로 복원할 수 있다. 주몽왕의 영토는 시엄수[차릉수]와 졸본천으로 구성된다.
| 고구려 추모왕은 신구왕호법을 사용하는 마지막 시대이고 그 이후로는 고구려 동천왕의 동천제, 단군이나 신라 진평왕의 상제/ 지상왕 병행 정도의 드문 사례 이외에는 역사기록에서 사라지기 시작한다. 이런 고구려 건국기년의 위축전승은 그 이전 정치체인 졸본부여와 북부여 계승전승에도 위축효과를 미치게 된다. 고구려의 다단계 건국설이 건국1에서 건국3으로 위축 되면서 졸본부여 동명왕을 지원한 마가와 저가 2가 지원(『후한서』, 부여; 『삼국지 위지』, 부여)과 고구려 동명성왕 주몽을 지원한 5가(『삼국사기, 동명성왕』 주몽의 지원자: 마가, 우가, 저가, 구가, 조가)와 6가(『삼국유사, 국사 고려본기』주몽의 지원자: 마가, 우가, 저가, 구가, 조수, 수가) 사이에 혼동이 발생해 졸본부여 동명왕이 고구려 동명성왕 주몽 안으로 사라진다.
▲ 표2. 호태왕이 북부여 천제지자와 상호 17세손이라는 쟁점 © 편집부 | | http://greatcorea.kr/sub_read.html?uid=548§ion=sc2§ion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