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의 일기/ 김길녀
잠시, 두꺼운 슬픔을 빌려 와 조심스럽게 키우던 나날이 있었습니다
쓸모 없어진 몽당연필처럼 해체되고 고립되어 찢긴 혁명의 깃발로 나부끼는 회한의 한철이 내게 있었습니다 스나얀 공원 늙은 벙글나무 몸통 버짐 가득 핀 검은 숲의 나날이 내 마흔 언저리에 있었더랬습니다 절박함 없이 신에게 바치는 기도가 길고 지루한 장마 같은 나들이 내 곁에 머문 적 있습니다 쉽사리 소멸될 수 없는 지독한 아픔이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 속 저물녘같이 무섭도록 쓸쓸하게 다가왔던 그때가 내게 있었습니다 바자우 족과 함께 내가 좋아하는 바다만 떠돌다가 죽어 바융도 덮지 않고 마뭇도 치르지 않은 채 시상팡 섬 모래 속에 묻히고 싶었던 간절함도 있었습니다 생을 풀어내는 방식이 아직도 내게는 어눌한 이차방정식 문제 같은 순간들이 멀지 않은 시절에 있었답니다 에곤실레 누드 자화상에서 보았던 절규와 구토가 내 모습인 양 정겨웠던 펄럭이는 밤도 있었습니다 폐사지에 뒹구는 조각난 기왓장으로 비추던 서늘한 달빛의 금지된 사랑의 뜨거움이 잠깐 스쳐가기도 했습니다 주저함 없이 초록 꽃대 쑥쑥 피워 올리는 감성의 소절 한 장식 찾아 넘겨 가던 그 즈음이 좋기도 했습니다 오래된 빙붕의 무거운 침묵 깨려던 망치 끝에 핏빛 석양이 마젤란 해협 파도꽃을 뿌리고 가기도 했던 향기로운 여백도 보았습니다
그때는 석양도 붉지만 아니하고 노랗거나 푸르렀다는 것을 적도 근처에 처소를 마련한 지금에서야 다시, 알게 되었습니다
- 웹진 『시인광장』 2013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