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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 길어서 십리골목이여”
강진 병영 한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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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길로 새약시 가매(가마)도 들오고 생이(상여)도 나가고….” `하도 길어서 한골목’ 이라는 병영 한골목. 그 골목에 깃들어 사는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을 차곡차곡 간직한 정깊은 길이다. |
초가을 햇살이 내리는 한낮의 골목은 적요하다. 그리고 끝날 것 같지 않게 길다.
“쩌어∼그 장터서부텀 쩌어∼∼그까지.”
그 `쩌어그’를 가능한 한 성의껏 늘이는 것으로 골목의 길이를 실감나게 전하려 애쓰는 마을 어른신들.
강진 병영 `한골목’은 그런 곳이다. `골목이 크고 길다’고 해서, `하나로 연결돼 있다’ 해서 `한골목’이다.
“하다(하도) 진께(길어서) 한골목이라요. 첨 온 사람들이 십리는 간갑다고 헌게 `십리골목’이라고도 허고.
우리는 살다 본게 으짠지 모르고 사요. 첨에 보믄 좋게도 궂게도 보이제만 하냥 살다본게 먼 질도 가찹고,
궂은 것도 좋고 이것이 내 머시기다 허고 사요.”
골목에서 만난 김선애(80·성동리) 할머니 말씀이시다.
장터가 있는 성남리 제일슈퍼에서 지로리 마을회관 앞까지 약 1.5km. 골목길에 맞대고 있는 마을이 성남·박동·동성·
남성·지로리까지 5개 마을.
“지로리 너머 꼭대기로 상림이라고 있는디 거그까지가 한골목” 이라는 주장대로 하자면 10개 마을 600여 가구가
“한골목 지나지 않으면 생활이 안된다” 는 한골목 사람들이다.
“전에는 맨 땀똑(담독)하고 흙하고만 쏘았제(쌓았어). 인자 많이 빈했어(변했어).
허물어지믄 브로꾸(블록)로 쏘아 분게.”
오래된 가게 앞에서 동네 마실 길 쉬고 있던 박정덕(86) 할머니는 10리 돌담길의 옛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사람은 나날이 줄고 골목은 넓어졌다. `세멘트 물결 새마을사업’ 속에 급속하게 모습을 바꾸었다는 한골목.
허물어지고 쌓기를 거듭하면서 원형을 잃었다고는 하지만 한골목 돌담길은 여전히 그 어디에도 없는 독특한 풍경을
잃지 않고 있다.
“길기만 한 게 아니라 여그 돌담은 사람 키를 빨딱 넘어가 부러.”
특히 지로리 부근 돌담은 유난히 키가 높다. 옛날엔 더 높았다고 한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담장 너머로 말 건넬 정도인 1m20㎝가 일반적인 돌담의 높이라면,
병영 돌담은 2m정도가 많고 3m에 이르는 것도 있다.
돌담이 높게 쌓아진 이유는 병영에 있었던 병마절도사영에 뿌리가 닿아 있다는 것이 강진 문화관광해설사 최창권씨의 설명이다.
왜구의 침입이 잦던 조선초기 1417년(태종 17년), 수인산과 성자산 옥녀봉 등 크고 작은 산에 둘러싸여 작은 분지를 이룬 이곳 병영은 군사령부라 할 수 있는 전라병마절도사영이 설치되고 병영성이 축조되면서 군사요충지가 되었다.
하여, 말 타고 출입하는 군관들의 왕래가 잦아지면서 담이 점차 높아지게 된 것이다.
“담이 야차우믄 말 위에서 집안이 훤히 들여다보일 터이니 아녀자들이 활동하는 데 지장이 많을 것 아니겄습니까.”
더불어 `북에는 개성상인 남에는 병영상인’이라는 말이 통할 정도로 상업활동이 활발하던 곳인지라 골목을 통행하는 상인들로부터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담이 높아진 것이라고도 한다.
병영 돌담은 높기도 높거니와 돌담의 무늬가 독특하다.
“꼭 (생선) 까시같이 생겼제.”
얇은 돌을 15도 정도 눕혀서 촘촘하게 쌓고 다음 층에서는 다시 엇갈리게 눕히는 지그재그 방식의 빗살무늬 돌담.
일러 `하멜식 담쌓기’다.
1653년 제주도에 표류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가 1656년 이곳에 억류돼 1663년 여수를 거쳐 일본으로 탈출하기까지
7년 동안 병영에서 억류생활을 했던 네덜란드인 하멜 일행이 남긴 자취다.
지난 2002년 8월 병영을 방문한 하인드 브리스 주한네덜란드대사가 이곳 돌담의 축조방식은 네덜란드식이라고
밝힌 바도 있다.
“데려다 놓기는 했제만 33명이나 되는 입을 만날 놀려 놓고 믹일 수는 없응게 니그들 알아서 묵고 살아라 했겄지요.
그래서 지그 나라 식대로 담을 쌓은 것을 본게 빨리 쌓기도 하고 든든하기도 하고 그러다 본게 그대로 따라서들
했겄지요.”
최창권씨는 하멜 일행이 생계를 위해 잡역을 하면서 네덜란드식 담장 쌓는 기술뿐만 아니라 `클로그’라고 하는
네덜란드식 나막신 만드는 기술과 수로를 놓는 법도 함께 전했다고 설명한다. 서구 사회에 우리나라의 존재를 알린 《하멜 표류기》에 나오는 은행나무가 지금도 한골목 언저리 병영교회 앞에 청정한 가지를 드리우고 선 천연기념물 385호 은행나무. `하멜 은행나무’로 불리고 있다.
옛사람의 자취를 읽으며 걷는 한골목. 골목길에서 우연히 만난 박삼옥(51)씨는 샛골목으로 빠져봐야 한골목 진짜 맛을 아는 법이라고 길 안내를 자청했다.
“전라병영 사또 마셨던 것은 사또샘이고, 사또보다 높은 백성들 마시는 것은 오또샘” 이라며 지금은 쓰지 않는
마을 우물로, “앙거서 놀기에 이만한 경치 또 있간디” 하며 `한골목 뒷골목’ 개울가 `적벽청류(赤壁淸流)’로….
한골목의 지류들인 샛골목이 품은 재미는 한나절엔 다 맛보지 못할 것 같았다.
박삼옥씨가 `한골목대장’이라고 소개한 오용수(75) 지로리 이장은 떠들썩했던 한골목의 옛 시절을 들추어냈다.
“전에는 정월 보름이면 한골목에서 줄다리기도 했네. 요 밑에 정미소 있는 데다 고를 매고 우아래 동네가 편을 갈라서 질게 늘어서. 이긴 편이 풍년 든다고 열씸히들 땡겼제.”
그 정미소 있는 사거리에 `뽕저자’가 섰던 추억을 끄집어 낸 이는 장터 나갔다 오던 최규요(70) 할머니였다
“여가 누에고치 질이 좋아. 그런게 누에를 많이 쳐. 그래서 뽕저자라고 했어. 장날(오일장)이 아니고 날마다 아침에
빠딱 장이 서. 나무 한 짐 등거리에다가 지고 오믄 다 폴고 가고, 쌀도 폴고 보리도 폴고….”
신명나는 놀이가 있었고 생생한 삶이 펼쳐졌던 한골목이 품은 옛이야기 들으며 고요한 한낮의 고샅길 바라본다.
“이 길로 새약시 가매(가마)도 들오고 생이(상여)도 나가고….”
수백년 한 자리에서 마을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을 지켜보았을 돌담. 더러는 푸른 이끼를 얹고 있거나, 꽃다발 같은
작은 풀꽃들을 보듬고 있기도 한 고색창연한 빗살무늬 돌담길. 담장 위로 감나무 가지 흐드러졌다.
“병영에서 감나무집 찾기나 서울에서 김서방집 찾기나” 그런 말이 있을 정도로 감이 흔한 게 병영 한골목이란다.
“한골목 다 갈라믄 배고파서 못 가. 가다가 배고프믄 암디서나 감 따 묵소. 내 말허고"
(한골목은 835번 지방도와 동쪽 도로의 병영천 사이에 위치한다.
성남리 118번지 앞에서 지로리 회관 앞까지 약 1.5km의 골목을 가리키며, 골목이 크고 길다 하여
‘한골목’이라 불렀다.
한골목은 병영성이 설영된 후 촌락이 형성되면서 만들어졌다.
특히 한골목은 병마절도사가 수인산성을 순시할 때 통행하던 길이었는데, 이 길의 담장이 높이 쌓아졌던
것은 병사들이 주로 말을 타고 이 길을 다니므로 집안이 다 보여 이를 가리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골목의 담장은 황토와 돌을 이용하여 빗살무늬 방식으로 쌓아 다른 지역과 비교되는 이색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마을 사람들은 일명 ‘하멜식 돌담’이라 하여 하멜 관련 유적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농촌 개발이 확산됨에 따라 돌담이 훼손되고 점차 한골목의 원형이 파괴되는 것을 우려하여,
한골목은 2006년에 등록문화재 264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곡선을 이루며 길게 펼쳐진 한골목 길을
산책하다보면 고즈넉한 옛 정취에 흠뻑 젖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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