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만년 한국사 가운데 그 무대가 한반도에 국한된 시기는 고려시대부터 1000여 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 이전까지 한국사의 육상 무대는 만주와 내몽골 일대를 아우르는 대륙이었다. 조선의 쇄국정책은 한인들의 자발적인 만주 이주로 한계에 봉착하고, 구한말부터 대륙사가 다시 전개되기 시작했다.
조선의 집단 망명자들이 거주했던 중국의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 마을. 뒤에 보이는 산이 1911년 4월 민단자치조직인 경학사를 조직했던 대고산이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만주의 삼부(三府) ①만주 한인사회 형성
길림성 정협문사자료위원회 등에서 편찬한 길림조선족(주필 김택, 연변인민출판사, 1994)은 청나라 장봉대의 장백회정록(1909)을 인용해 “광해군 때 강홍립의 조선군이 청나라에 투항한 이후부터 조선 사람들이 동북(만주)에서 살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필자는 길림성(吉林省) 환인현(桓仁縣)의 고구려 오녀산성을 답사하던 중 묵었던 고려성(高麗城)의 여주인이 이 무렵 만주에 정착했던 조선인의 후예라는 말을 듣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광해군을 쫓아낸 뒤 인조 정권 때 발생한 정묘·병자호란으로 인해 만주로 끌려간 백성은 더 많아졌다.
만주로 끌려간 조선 포로들은 심양의 남탑(南塔) 시장에서 매매되었다. 인조실록 15년(1637) 4월 21일자는 “처음에는 속환가가 포 10여 필(匹)에 불과했으나 속환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골육(骨肉)의 속환에 다급하여 값의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아 값을 더 비싸게 요구하는 폐단을 초래하게 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 인질로 잡혀갔던 소현세자 측에서 조선 조정에 올린 심양장계 인조 15년 5월 24일자는 “요구하는 값이 비싸기 그지없어서 수백, 수천 냥이나 되니 희망을 잃고 울부짖는 사람이 도로에 가득 찼다”고 말하고 있다. 이때 돈을 주고 속환되지 못한 조선인들은 만주에 정착해 사는 수밖에 없었다.
합니하 신흥무관학교 근처에 있던 고려관자. 100여 년 전에는 조선인들이 집단 거주하던 마을이었다. 현재는 유하현 광화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조선 후기 대외교섭 문서집인 동문휘고(同文彙考)사신별단(使臣別單)에 따르면 이원진(李元鎭)은 인조 22년(1644) 사신으로 가는 도중 만주 봉황성(鳳凰城)에 속환되지 못한 조선인과 한인(漢人) 60, 70가구가 살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때 조선 여인 여러 명이 이원진 일행에게 ‘나는 누구의 딸이고 누구의 누이인데 아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고 전한다. 또 “남자들은 타작을 하거나 풀을 베고 물을 길었으며 혹은 길바닥에 엎드려 진정했는데, 어떤 사람은 온몸이 상처투성이여서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청나라에서 백두산 일대를 자기네 선조들의 발상지라는 이유로 봉금(封禁) 지역으로 묶고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시키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청사고(淸史稿)살포소(薩布素)열전에 따르면 청나라는 강희 16년(1677, 조선 숙종 3년) 내대신(內大臣) 각라무묵눌(覺羅武默訥) 등을 백두산 등지로 보내 제사를 지내게 했다.
청나라의 발상지라는 이유였다. 그리고 산해관(山海關)~개원(開原)~길림(吉林)을 연결하는 선과 개원~봉황성(鳳凰城) 부근을 연결하는 선으로 이루어진 ‘人’자 모양의 선을 만들고 요소마다 변문(邊門)을 두어 출입자를 감시했다. (현규환, 한국유이민사(韓國流移民史), 1967)
청나라는 백두산 지구를 포함한 압록강·두만강 이북의 500㎞ 정도를 청의 발상지라는 이유로 봉금(封禁) 구역으로 삼아 사실상 이때부터 조선과 청 사이의 본격적인 영토분쟁이 시작된 것이다.
2년 후인 숙종 5년(1679) 12월 북병사(北兵使) 유비연(柳斐然)은 ‘청나라에서 백두산의 형세를 포함한 북방 지도를 만들었는데 그 의도가 의심스럽다’고 보고하고 있다. 청나라는 중원을 모두 차지한 후에도 만주는 다른 지역과 달리 봉천(奉天·심양)에 성경장군(盛京將軍)을 두어 다스렸다. 이후 광서제 33년(1907)에야 비로소 중국 내지처럼 성경장군 대신 ‘동삼성(東三省) 총독’을 임명하고 봉천·길림·흑룡강(黑龍江) 세 성(省)에는 각각 순무(巡撫)를 두어 다스렸다.
그런 가운데 압록강·두만강 대안 지역은 산삼도 풍부하고 농사도 잘되는 옥토라는 소문이 나면서 조선인들의 월경이 잇따랐다. 청나라는 숙종 6년(1680) 윤8월 강희제가 청나라 사신에게 범월인(犯越人·국경을 넘은 사람) 문제를 제기하도록 조서를 내릴 정도로 이 문제에 민감하게 대응했다. 강희제의 국서를 받은 숙종은 도강한 온성(穩城) 사람 유원진(柔遠鎭)을 사형시키고 온성첨사 한시호(韓時豪) 등을 유배했다.
급기야 청나라는 두 나라의 국경을 획정하자고 주장해 숙종 38년(1712) “서쪽은 압록이고 동쪽은 토문이다(西爲鴨綠, 東爲土門)”라는 내용의 백두산정계비를 백두산에 세웠다. 그럼에도 조선인들의 도강은 끊이지 않았다.
통문관지 영조 38년(1762) 조에 따르면 평안도관찰사 정홍순(鄭弘淳)이 ‘강계부 백성 박후찬(朴厚贊) 등 10인이 월경해서 사냥하다가 4명은 체포되었고, 나머지는 달아났다’고 보고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조선도 이때만 해도 청나라를 의식해 월경 문제에 강경하게 대처했다. 하지만 월경이 백성들에게 이득이 된다는 사실을 안 조선의 지방관들 사이에선 이 문제를 관대하게 처리하는 경향이 강했다. 통문관지 고종 4년(1867) 조에는 청나라 성경장군 아문(衙門)에서 ‘조선 민간인 하명경(何名慶) 등이 사사로이 월경해서 봉천부(奉千府) 왕청문(旺淸門) 밖 육도하(六道河) 등지를 개간했다’고 항의할 정도로 도강 및 개간이 빈번했다.
같은 책 고종 6년(1869) 조는 ‘청나라 예부에서 봉황문(鳳凰門) 남쪽부터 왕청문 북쪽까지 찾아낸 개간지가 9만6000여 하루갈이(日耕)’라고 말하고 있다. 하루갈이란 성인 장정 한 명이 하루에 경작할 수 있는 땅을 말하니 무려 9만6000여 명의 장정이 농사지을 수 있는 농지를 개간했다는 뜻이다.
조선인들이 개간한 농지가 수백만 향(<664C>)에 달한다는 기록도 있는데, 청나라 양빈(楊賓)이 지은 변기략(邊紀略)은 “(만주의) 영고탑(寧古塔) 지역은 무(畝)로 계산하지 않고 향으로 계산하는데, 하루 동안 씨를 뿌릴 수 있는 땅이 향으로서 절강(浙江)의 4무(畝)에 해당한다”고 전하고 있다.
고종 6년(1869)과 7년 한반도 북부에 대흉년이 들면서 만주 지역을 개간하는 조선 백성은 크게 늘어났다. 그러면서 만주 지역이 조선 영토라는 자각도 생겨났다. 고종 20년(1883) 청나라가 함경도 경원부 등지에 공문을 보내 ‘9월 안에 토문(土門) 이북과 이서(以西) 지방의 조선 사람들을 모두 쇄환(刷還)하라’고 요구하자 조선인들은 거꾸로 백두산정계비를 직접 답사한 후 종성부사 이정래(李正來)에게 자신들이 개간한 토지가 정계비에 명시된 토문강과 두만강 사이의 조선 영토라고 주장했다. 때마침 경원부에 있던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 어윤중(魚允中)은 ‘종성 사람 김우식(金禹軾)에게 조사시킨 결과 조선 백성들의 주장이 맞다’고 거듭 확인했다.
그래서 대한제국은 고종 40년(1903) 간도시찰관 이범윤(李範允)을 북간도(北墾島) 관리(管理)로 삼고 서간도를 평안북도에, 동간도(북간도)를 함경도에 편입해 상주시켰다. 또 간도 백성들은 대한제국에 세금을 납부했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강탈한 일제는 1909년 9월 간도에 관한 청일협약을 맺어 남만주철도 부설권을 얻는 대신 간도를 청나라에 넘겨주고 말았다(‘망국의 몇 가지 풍경⑪ 간도 강탈’ 참조).
청·일 두 나라의 야합과는 별도로 만주 지역의 유이민은 계속 늘어났다. 간도총영사(間島總領事)가 작성한 재만조선인개황(在滿朝鮮人槪況)은 청일전쟁 직전인 1894년 6만5000여 명이었던 재만 조선인이 1910년에는 10만9000여 명으로 증가했다고 전하고 있다. 우시마루(牛丸潤亮) 등이 작성한 최근 간도사정(最近間島事情)(1927)은 망국 직후인 1911년에는 12만6000여 명으로 급증했다고 전해주고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최근간도사정은 “동양척식회사와 일본인의 토지매수로 지가(地價)가 앙등하고 이들이 소작료를 인상해 소작 한인의 종전과 같은 수익이 없어진 점”을 들어 일제의 학정이 한 원인임을 시인하고 있다. 같은 책은 또 “한일합방에 불평을 가진 자와 일본 관헌의 간섭을 피함과 아울러 만주의 지가(地價)가 저렴한 점”을 들고 있다. 망국 후 일제의 학정으로 생계 수단을 잃은 빈농(貧農)은 생계를 위해, 일부 선각자는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이주했다는 것이다.
최근간도사정은 또 북간도(동간도)의 이주 한인이 1921년에 30만7806명, 1924년에 55만7506명이라고 전하고 있다. 이주 한인들은 마적들의 습격에 대비해 집단 마을을 형성했다. 1915년 조선총독부에서 작성한 국경지방 시찰복명서는 만주에서는 각 지역 자치제를 실시하는데 그 명칭을 사(社) 또는 향(鄕)이라고 한다고 전하고 있다. ‘사’라는 명칭은 1911년 4월 집단 망명자들이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에서 민단자치조직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한 것이 전 만주로 퍼진 것이다(‘절망을 넘어서⑧ 건국의 뿌리’ 참조).
1920년 50만 명에 달했던 만주 지역 한인들은 만주를 독립운동 근거지로 만든 토양이었다.
이 토양에서 참의부(參議府)·정의부(正義府)·신민부(新民府)라는 만주의 삼부(三府)가 꽃을 피운다.
홍범도 대한독립군, 망국 10년 만에 국내 진공작전 포문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망국 후 만주로 이주한 독립운동가들의 한결같은 꿈은 무장투쟁을 통해 일제를 내몰고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곳에 흩어진 독립운동세력을 통합해 단일 독립군을 조직해야 했고 무장해야 했다.
역시 3·1운동이 그런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만주 각지에서 통합 독립군이 결성돼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공격을 가하자 일제는 대규모 토벌을 계획했다.
사진은 중국 길림성 집안(集安) 쪽에서 바라본 압록강의 모습. [사진가 권태균 제공]
만주의 삼부(三府) ②독립군, 압록·두만강 건너다
대종교 1세 교주 나철. 1916년 자결했다.
1919년 8월 홍범도(洪範圖)가 이끄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은 두만강을 건넜다. 나라를 빼앗긴 지 10년 만에 개시되는 본격적인 국내 진공작전의 시작이었다. 평북 양덕 출신의 포수 홍범도는 이미 의병장으로 큰 명성을 떨친 바 있었다. 일제의 간도지방 무력 불령선인의 동정에 관한 건이란 정보보고는 “연길시 북쪽 의란구(依蘭溝) 지방의 민심은 대체로 전시(戰時) 기분을 띠고 있어 정신이 흥분 상태이며, 일반적으로 홍범도를 심하게 숭배한다. 그는…조선 및 간도 방면의 지리에 밝기는 신(神)과 같다”고 보고하고 있다.
대한독립군은 갑산(甲山)과 혜산진(惠山鎭) 같은 국경도시에 주둔한 일본군 병영을 공격했는데, 10월에는 압록강을 건너 만포진(滿浦鎭)과 더 안쪽의 강계(江界)까지 공격했다.
‘독립신문’ 대한민국 원년(1919) 11월 8일자는 “자성(紫城) 지방에서 독립군과 적병(敵兵) 간에 격전이 있었는데 적은 7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나 아군의 사상자는 별로 없으며 강계와 만포진은 아군의 수중에 점령되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독립군이 내륙까지 들어와 공격하자 일본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일제에 더 큰 충격은 만주 여러 지역의 무장세력들이 큰 규모로 통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런 통합 움직임도 3·1운동 때문이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주 각지에 흩어져 있던 독립운동단체들 사이에서 통합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었다. 상해 임시정부와 달리 이들의 통합은 독립군의 통합을 뜻한다는 점에서 일제에는 더 큰 위협이었다.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세력들은 몇 갈래로 뭉치기 시작했다. 만주는 압록강 건너편의 서간도(남만주)와 두만강 건너편의 북간도(동간도), 그리고 북만주로 나눌 수 있었는데 각 지역의 독립운동단체들이 통합하고 있었다.
중광단과 대한정의단을 결성한 서일. 군사전문가인 김좌진과 통합해 청산리대첩을 이끌었다.
1910년 망국 직후 서간도에는 서울의 이회영(李會榮) 일가와 안동의 이상룡(李相龍) 일가 같은 양반 사대부들이 망명해 민단 자치조직인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1911년 가을 대흉작에 풍토병이 덮치면서 경학사는 활동 불능 상태에 빠졌지만 이듬해에는 다시 부민단(扶民團)을 결성했다. 부민단 단장 이상룡은 만주기사(滿洲紀事)에서 부민단이 ‘삼권분립의 자치정부를 표방하는 단체’라고 전하고 있다. 민주공화제를 지향했다는 뜻이다.
부민단은 1914년에는 산하의 신흥무관학교 외에 통화현(通化縣) 쏘베사 지역에 백서농장(白西農莊)을 세웠다. 일제의 눈을 속이고 중국인들의 경계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농장이란 명칭을 썼지만 사실은 독립군 밀영(密營)이었다. 현재 이 지역에 대해선 중국 군부가 민간인 출입을 금지시키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천혜의 요새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부민단은 서간도의 자신계(自新契)와 통합해 한족회(韓族會)를 결성했다. ‘독립신문’은 한족회 관내의 교포 수가 8만 호에 30만여 명이라고 전하고 있다. 한족회가 유하현(柳河縣) 고산자(孤山子)에 군정부(軍政府)를 조직하고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기로 하자 상해 임정에서 여운형(呂運亨)을 파견해 임정에 합류할 것을 촉구했다. 군정부 내부의 반발도 작지 않았지만 이상룡 등은 “하나의 민족이 어찌 두 개의 정부를 가질 수 있겠는가”라면서 군정부라는 명칭을 포기하고 1919년 11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개칭했다.
서간도에는 국내에서 의병전쟁을 일으켰다가 일제의 남한대토벌에 쫓겨 망명한 의병과 유림세력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대체로 대한제국 황실을 재건하자는 복벽파(復<8F9F>派)들이었다. 이들도 서간도 각 지역에 흩어져 있다가 1919년 음력 3월 15일 단군의 어천절(御天節: 하늘로 승천한 날)을 기해 각 단체 대표 560여 명이 유하현 삼원보 대화사에 모여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결성하고 도총재(都總裁)에 박장호(朴長浩), 총단장(總團長)에 조맹선(趙孟善)을 선출했다.
독립운동가 출신의 김승학(金承學)이 편찬한 한국독립사(韓國獨立史)에 따르면 조맹선은 하얼빈에 주둔한 제정 러시아 장군 세미노푸와 교섭해 러시아 군대 안에 2000여 명의 한인들로 구성된 한인청년부를 특설하기로 합의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무산되었는데, 이 때문에 울화병이 생겨 1922년 길림성(吉林省) 추풍(秋風)에서 순사(殉死)했다.
만주 지역 무장투쟁사를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세력이 단군교(檀君敎)라고 불렸던 대종교(大倧敎)다. 제1세 교주 나철(羅喆)은 을사늑약 직전 일본 왕궁 앞에서 사흘간 단식항쟁을 하기도 하고 을사늑약 체결 후에는 을사오적(五賊) 중 박제순과 이지용을 제거하기 위해 폭탄 상자를 배달하기도 했던 열혈 독립운동가였다.
대종교 중광 60년사에 따르면 나철은 이 사건 때문에 정부 전복 혐의로 무안군 지도(智島)에 유배되기도 했는데, 1909년 정월 15일 자시(子時: 밤 11시~새벽 1시) 서울 북부 재동(齋洞) 취운정(翠雲亭) 아래에서 60여 명의 동지들과 단군교를 새롭게 열면서 이날을 중광절(重光節)로 삼았다. 중광이란 기존에 있던 것을 새롭게 중흥한다는 의미였다. 망국이 눈앞에 있었기 때문에 위기를 느낀 사람들이 단군교에 속속 입교했지만 서울 북부지사교(北部支司敎) 정훈모가 친일로 돌아서고 일제의 탄압이 가해지자 나철은 1910년 8월 교명을 대종교로 바꾸었다.
망국 후인 1911년 7월 나철은 강화도 참성단을 참배하고 평양과 두만강을 건너 백두산 북록(北麓) 청파호(靑坡湖)를 답사한 후 만주 화룡현 삼도구(三道溝)로 총본사를 이전하고 그 산하에 동서남북 사도본사(四道本司)를 두었다. 각 본사(本司)의 관할 범위를 보면 대종교의 광대한 역사의식이 잘 드러난다.
각 본사 책임자를 보면 이 당시 대종교가 독립운동가들에게 어떤 위상을 갖고 있었는지 잘 알 수 있다. 동도본사는 서일(徐一), 서도본사는 신규식(申圭植)·이동녕(李東寧)이었고, 남도본사는 강우(姜虞), 북도본사는 이상설(李相卨)이었다. 현규환의 한국유이민사(상)에 따르면 임정 수립 당시 의정원 의원 의장 이동녕을 비롯해서 29명의 의원 중 대종교 교도가 21명이었다. 대종교는 독립운동이 곧 신앙생활이었던 교단이었다.
총본사를 만주로 이전한 후 30만 교도로 확장되자 중국과 일제가 모두 탄압에 나섰다. 1914년 중국 화룡현 지사가 해산령을 내린 데다, 1915년에는 조선총독부도 대종교를 ‘종교가 아닌 항일독립운동 단체’라면서 남도본사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나철은 이에 대한 항의의 뜻으로 1916년 구월산에서 ‘삼십만 교도에게 격려하는 글’과 ‘순명(殉命) 3조’ 등 3종의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나철의 뒤를 이어 김교헌(金敎獻)이 제2세 교주가 되는데, 동도본사 책임자 서일이 서른한 살 때인 1911년 3월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한 것이 청산리 대첩의 씨앗이 된다.
중광단은 3·1운동 이후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으로 탈바꿈하는데, 서일은 대종교라는 탄탄한 대중조직이 있었지만 군사 부문에 전문가가 많지 않은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김좌진(金佐鎭)·조성환(曺成煥) 등 한말 육군무관학교 출신들이 1919년 3월 결성한 길림군정사(吉林軍政司)에 통합을 제의했다.
그래서 두 단체는 1919년 10월 군정부(軍政府)로 통합했지만 12월 정부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말라는 임시정부의 권고에 따라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칭했다. 북로군정서는 독판(督辦)에 서일, 군사령관에 김좌진을 추대했고 무관들을 배출하기 위해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도 설립해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을 교관으로 초빙하기도 했다.
북간도에는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도 있었다. 대한국민회는 산하에 안무(安武)가 지휘하는 대한국민군(大韓國民軍)이 있어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최진동(崔振東)의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와 통합을 시도했다. 그 결과 1920년 5월 28일 군사통일회의를 열고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를 결성했다.
일제의 정보보고는 이 부대의 규모를 최진동 계열 약 670명, 홍범도와 안무 계열 약 550명 등 총 1200여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무기는 기관총 2문, 군총 900정, 수류탄 100여 개, 망원경 7개, 군총 1정당 탄약 150발을 가지고 있다고 추정했다.
독립군은 제1차 세계대전 때 시베리아에 출병했던 체코군이 철수하면서 넘기고 간 무기들로 무장했다. 이 무기들은 제정 러시아가 미국의 레밍천사(社), 웨스팅하우스사 등에서 구입한 것을 체코군에 제공한 것이었다.
반만년 한국사 가운데 그 무대가 한반도에 국한된 시기는 고려시대부터 1000여 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 이전까지 한국사의 육상 무대는 만주와 내몽골 일대를 아우르는 대륙이었다. 조선의 쇄국정책은 한인들의 자발적인 만주 이주로 한계에 봉착하고, 구한말부터 대륙사가 다시 전개되기 시작했다.
조선의 집단 망명자들이 거주했던 중국의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 마을. 뒤에 보이는 산이 1911년 4월 민단자치조직인 경학사를 조직했던 대고산이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만주의 삼부(三府) ①만주 한인사회 형성
길림성 정협문사자료위원회 등에서 편찬한 길림조선족(주필 김택, 연변인민출판사, 1994)은 청나라 장봉대의 장백회정록(1909)을 인용해 “광해군 때 강홍립의 조선군이 청나라에 투항한 이후부터 조선 사람들이 동북(만주)에서 살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필자는 길림성(吉林省) 환인현(桓仁縣)의 고구려 오녀산성을 답사하던 중 묵었던 고려성(高麗城)의 여주인이 이 무렵 만주에 정착했던 조선인의 후예라는 말을 듣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광해군을 쫓아낸 뒤 인조 정권 때 발생한 정묘·병자호란으로 인해 만주로 끌려간 백성은 더 많아졌다.
만주로 끌려간 조선 포로들은 심양의 남탑(南塔) 시장에서 매매되었다. 인조실록 15년(1637) 4월 21일자는 “처음에는 속환가가 포 10여 필(匹)에 불과했으나 속환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골육(骨肉)의 속환에 다급하여 값의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아 값을 더 비싸게 요구하는 폐단을 초래하게 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 인질로 잡혀갔던 소현세자 측에서 조선 조정에 올린 심양장계 인조 15년 5월 24일자는 “요구하는 값이 비싸기 그지없어서 수백, 수천 냥이나 되니 희망을 잃고 울부짖는 사람이 도로에 가득 찼다”고 말하고 있다. 이때 돈을 주고 속환되지 못한 조선인들은 만주에 정착해 사는 수밖에 없었다.
합니하 신흥무관학교 근처에 있던 고려관자. 100여 년 전에는 조선인들이 집단 거주하던 마을이었다. 현재는 유하현 광화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조선 후기 대외교섭 문서집인 동문휘고(同文彙考)사신별단(使臣別單)에 따르면 이원진(李元鎭)은 인조 22년(1644) 사신으로 가는 도중 만주 봉황성(鳳凰城)에 속환되지 못한 조선인과 한인(漢人) 60, 70가구가 살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때 조선 여인 여러 명이 이원진 일행에게 ‘나는 누구의 딸이고 누구의 누이인데 아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고 전한다. 또 “남자들은 타작을 하거나 풀을 베고 물을 길었으며 혹은 길바닥에 엎드려 진정했는데, 어떤 사람은 온몸이 상처투성이여서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청나라에서 백두산 일대를 자기네 선조들의 발상지라는 이유로 봉금(封禁) 지역으로 묶고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시키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청사고(淸史稿)살포소(薩布素)열전에 따르면 청나라는 강희 16년(1677, 조선 숙종 3년) 내대신(內大臣) 각라무묵눌(覺羅武默訥) 등을 백두산 등지로 보내 제사를 지내게 했다.
청나라의 발상지라는 이유였다. 그리고 산해관(山海關)~개원(開原)~길림(吉林)을 연결하는 선과 개원~봉황성(鳳凰城) 부근을 연결하는 선으로 이루어진 ‘人’자 모양의 선을 만들고 요소마다 변문(邊門)을 두어 출입자를 감시했다. (현규환, 한국유이민사(韓國流移民史), 1967)
청나라는 백두산 지구를 포함한 압록강·두만강 이북의 500㎞ 정도를 청의 발상지라는 이유로 봉금(封禁) 구역으로 삼아 사실상 이때부터 조선과 청 사이의 본격적인 영토분쟁이 시작된 것이다.
2년 후인 숙종 5년(1679) 12월 북병사(北兵使) 유비연(柳斐然)은 ‘청나라에서 백두산의 형세를 포함한 북방 지도를 만들었는데 그 의도가 의심스럽다’고 보고하고 있다. 청나라는 중원을 모두 차지한 후에도 만주는 다른 지역과 달리 봉천(奉天·심양)에 성경장군(盛京將軍)을 두어 다스렸다. 이후 광서제 33년(1907)에야 비로소 중국 내지처럼 성경장군 대신 ‘동삼성(東三省) 총독’을 임명하고 봉천·길림·흑룡강(黑龍江) 세 성(省)에는 각각 순무(巡撫)를 두어 다스렸다.
그런 가운데 압록강·두만강 대안 지역은 산삼도 풍부하고 농사도 잘되는 옥토라는 소문이 나면서 조선인들의 월경이 잇따랐다. 청나라는 숙종 6년(1680) 윤8월 강희제가 청나라 사신에게 범월인(犯越人·국경을 넘은 사람) 문제를 제기하도록 조서를 내릴 정도로 이 문제에 민감하게 대응했다. 강희제의 국서를 받은 숙종은 도강한 온성(穩城) 사람 유원진(柔遠鎭)을 사형시키고 온성첨사 한시호(韓時豪) 등을 유배했다.
급기야 청나라는 두 나라의 국경을 획정하자고 주장해 숙종 38년(1712) “서쪽은 압록이고 동쪽은 토문이다(西爲鴨綠, 東爲土門)”라는 내용의 백두산정계비를 백두산에 세웠다. 그럼에도 조선인들의 도강은 끊이지 않았다.
통문관지 영조 38년(1762) 조에 따르면 평안도관찰사 정홍순(鄭弘淳)이 ‘강계부 백성 박후찬(朴厚贊) 등 10인이 월경해서 사냥하다가 4명은 체포되었고, 나머지는 달아났다’고 보고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조선도 이때만 해도 청나라를 의식해 월경 문제에 강경하게 대처했다. 하지만 월경이 백성들에게 이득이 된다는 사실을 안 조선의 지방관들 사이에선 이 문제를 관대하게 처리하는 경향이 강했다. 통문관지 고종 4년(1867) 조에는 청나라 성경장군 아문(衙門)에서 ‘조선 민간인 하명경(何名慶) 등이 사사로이 월경해서 봉천부(奉千府) 왕청문(旺淸門) 밖 육도하(六道河) 등지를 개간했다’고 항의할 정도로 도강 및 개간이 빈번했다.
같은 책 고종 6년(1869) 조는 ‘청나라 예부에서 봉황문(鳳凰門) 남쪽부터 왕청문 북쪽까지 찾아낸 개간지가 9만6000여 하루갈이(日耕)’라고 말하고 있다. 하루갈이란 성인 장정 한 명이 하루에 경작할 수 있는 땅을 말하니 무려 9만6000여 명의 장정이 농사지을 수 있는 농지를 개간했다는 뜻이다.
조선인들이 개간한 농지가 수백만 향(<664C>)에 달한다는 기록도 있는데, 청나라 양빈(楊賓)이 지은 변기략(邊紀略)은 “(만주의) 영고탑(寧古塔) 지역은 무(畝)로 계산하지 않고 향으로 계산하는데, 하루 동안 씨를 뿌릴 수 있는 땅이 향으로서 절강(浙江)의 4무(畝)에 해당한다”고 전하고 있다.
고종 6년(1869)과 7년 한반도 북부에 대흉년이 들면서 만주 지역을 개간하는 조선 백성은 크게 늘어났다. 그러면서 만주 지역이 조선 영토라는 자각도 생겨났다. 고종 20년(1883) 청나라가 함경도 경원부 등지에 공문을 보내 ‘9월 안에 토문(土門) 이북과 이서(以西) 지방의 조선 사람들을 모두 쇄환(刷還)하라’고 요구하자 조선인들은 거꾸로 백두산정계비를 직접 답사한 후 종성부사 이정래(李正來)에게 자신들이 개간한 토지가 정계비에 명시된 토문강과 두만강 사이의 조선 영토라고 주장했다. 때마침 경원부에 있던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 어윤중(魚允中)은 ‘종성 사람 김우식(金禹軾)에게 조사시킨 결과 조선 백성들의 주장이 맞다’고 거듭 확인했다.
그래서 대한제국은 고종 40년(1903) 간도시찰관 이범윤(李範允)을 북간도(北墾島) 관리(管理)로 삼고 서간도를 평안북도에, 동간도(북간도)를 함경도에 편입해 상주시켰다. 또 간도 백성들은 대한제국에 세금을 납부했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강탈한 일제는 1909년 9월 간도에 관한 청일협약을 맺어 남만주철도 부설권을 얻는 대신 간도를 청나라에 넘겨주고 말았다(‘망국의 몇 가지 풍경⑪ 간도 강탈’ 참조).
청·일 두 나라의 야합과는 별도로 만주 지역의 유이민은 계속 늘어났다. 간도총영사(間島總領事)가 작성한 재만조선인개황(在滿朝鮮人槪況)은 청일전쟁 직전인 1894년 6만5000여 명이었던 재만 조선인이 1910년에는 10만9000여 명으로 증가했다고 전하고 있다. 우시마루(牛丸潤亮) 등이 작성한 최근 간도사정(最近間島事情)(1927)은 망국 직후인 1911년에는 12만6000여 명으로 급증했다고 전해주고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최근간도사정은 “동양척식회사와 일본인의 토지매수로 지가(地價)가 앙등하고 이들이 소작료를 인상해 소작 한인의 종전과 같은 수익이 없어진 점”을 들어 일제의 학정이 한 원인임을 시인하고 있다. 같은 책은 또 “한일합방에 불평을 가진 자와 일본 관헌의 간섭을 피함과 아울러 만주의 지가(地價)가 저렴한 점”을 들고 있다. 망국 후 일제의 학정으로 생계 수단을 잃은 빈농(貧農)은 생계를 위해, 일부 선각자는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이주했다는 것이다.
최근간도사정은 또 북간도(동간도)의 이주 한인이 1921년에 30만7806명, 1924년에 55만7506명이라고 전하고 있다. 이주 한인들은 마적들의 습격에 대비해 집단 마을을 형성했다. 1915년 조선총독부에서 작성한 국경지방 시찰복명서는 만주에서는 각 지역 자치제를 실시하는데 그 명칭을 사(社) 또는 향(鄕)이라고 한다고 전하고 있다. ‘사’라는 명칭은 1911년 4월 집단 망명자들이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에서 민단자치조직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한 것이 전 만주로 퍼진 것이다(‘절망을 넘어서⑧ 건국의 뿌리’ 참조).
1920년 50만 명에 달했던 만주 지역 한인들은 만주를 독립운동 근거지로 만든 토양이었다.
이 토양에서 참의부(參議府)·정의부(正義府)·신민부(新民府)라는 만주의 삼부(三府)가 꽃을 피운다.
홍범도 대한독립군, 망국 10년 만에 국내 진공작전 포문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망국 후 만주로 이주한 독립운동가들의 한결같은 꿈은 무장투쟁을 통해 일제를 내몰고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곳에 흩어진 독립운동세력을 통합해 단일 독립군을 조직해야 했고 무장해야 했다.
역시 3·1운동이 그런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만주 각지에서 통합 독립군이 결성돼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공격을 가하자 일제는 대규모 토벌을 계획했다.
사진은 중국 길림성 집안(集安) 쪽에서 바라본 압록강의 모습. [사진가 권태균 제공]
만주의 삼부(三府) ②독립군, 압록·두만강 건너다
대종교 1세 교주 나철. 1916년 자결했다.
1919년 8월 홍범도(洪範圖)가 이끄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은 두만강을 건넜다. 나라를 빼앗긴 지 10년 만에 개시되는 본격적인 국내 진공작전의 시작이었다. 평북 양덕 출신의 포수 홍범도는 이미 의병장으로 큰 명성을 떨친 바 있었다. 일제의 간도지방 무력 불령선인의 동정에 관한 건이란 정보보고는 “연길시 북쪽 의란구(依蘭溝) 지방의 민심은 대체로 전시(戰時) 기분을 띠고 있어 정신이 흥분 상태이며, 일반적으로 홍범도를 심하게 숭배한다. 그는…조선 및 간도 방면의 지리에 밝기는 신(神)과 같다”고 보고하고 있다.
대한독립군은 갑산(甲山)과 혜산진(惠山鎭) 같은 국경도시에 주둔한 일본군 병영을 공격했는데, 10월에는 압록강을 건너 만포진(滿浦鎭)과 더 안쪽의 강계(江界)까지 공격했다.
‘독립신문’ 대한민국 원년(1919) 11월 8일자는 “자성(紫城) 지방에서 독립군과 적병(敵兵) 간에 격전이 있었는데 적은 7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나 아군의 사상자는 별로 없으며 강계와 만포진은 아군의 수중에 점령되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독립군이 내륙까지 들어와 공격하자 일본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일제에 더 큰 충격은 만주 여러 지역의 무장세력들이 큰 규모로 통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런 통합 움직임도 3·1운동 때문이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주 각지에 흩어져 있던 독립운동단체들 사이에서 통합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었다. 상해 임시정부와 달리 이들의 통합은 독립군의 통합을 뜻한다는 점에서 일제에는 더 큰 위협이었다.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세력들은 몇 갈래로 뭉치기 시작했다. 만주는 압록강 건너편의 서간도(남만주)와 두만강 건너편의 북간도(동간도), 그리고 북만주로 나눌 수 있었는데 각 지역의 독립운동단체들이 통합하고 있었다.
중광단과 대한정의단을 결성한 서일. 군사전문가인 김좌진과 통합해 청산리대첩을 이끌었다.
1910년 망국 직후 서간도에는 서울의 이회영(李會榮) 일가와 안동의 이상룡(李相龍) 일가 같은 양반 사대부들이 망명해 민단 자치조직인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1911년 가을 대흉작에 풍토병이 덮치면서 경학사는 활동 불능 상태에 빠졌지만 이듬해에는 다시 부민단(扶民團)을 결성했다. 부민단 단장 이상룡은 만주기사(滿洲紀事)에서 부민단이 ‘삼권분립의 자치정부를 표방하는 단체’라고 전하고 있다. 민주공화제를 지향했다는 뜻이다.
부민단은 1914년에는 산하의 신흥무관학교 외에 통화현(通化縣) 쏘베사 지역에 백서농장(白西農莊)을 세웠다. 일제의 눈을 속이고 중국인들의 경계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농장이란 명칭을 썼지만 사실은 독립군 밀영(密營)이었다. 현재 이 지역에 대해선 중국 군부가 민간인 출입을 금지시키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천혜의 요새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부민단은 서간도의 자신계(自新契)와 통합해 한족회(韓族會)를 결성했다. ‘독립신문’은 한족회 관내의 교포 수가 8만 호에 30만여 명이라고 전하고 있다. 한족회가 유하현(柳河縣) 고산자(孤山子)에 군정부(軍政府)를 조직하고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기로 하자 상해 임정에서 여운형(呂運亨)을 파견해 임정에 합류할 것을 촉구했다. 군정부 내부의 반발도 작지 않았지만 이상룡 등은 “하나의 민족이 어찌 두 개의 정부를 가질 수 있겠는가”라면서 군정부라는 명칭을 포기하고 1919년 11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개칭했다.
서간도에는 국내에서 의병전쟁을 일으켰다가 일제의 남한대토벌에 쫓겨 망명한 의병과 유림세력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대체로 대한제국 황실을 재건하자는 복벽파(復<8F9F>派)들이었다. 이들도 서간도 각 지역에 흩어져 있다가 1919년 음력 3월 15일 단군의 어천절(御天節: 하늘로 승천한 날)을 기해 각 단체 대표 560여 명이 유하현 삼원보 대화사에 모여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결성하고 도총재(都總裁)에 박장호(朴長浩), 총단장(總團長)에 조맹선(趙孟善)을 선출했다.
독립운동가 출신의 김승학(金承學)이 편찬한 한국독립사(韓國獨立史)에 따르면 조맹선은 하얼빈에 주둔한 제정 러시아 장군 세미노푸와 교섭해 러시아 군대 안에 2000여 명의 한인들로 구성된 한인청년부를 특설하기로 합의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무산되었는데, 이 때문에 울화병이 생겨 1922년 길림성(吉林省) 추풍(秋風)에서 순사(殉死)했다.
만주 지역 무장투쟁사를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세력이 단군교(檀君敎)라고 불렸던 대종교(大倧敎)다. 제1세 교주 나철(羅喆)은 을사늑약 직전 일본 왕궁 앞에서 사흘간 단식항쟁을 하기도 하고 을사늑약 체결 후에는 을사오적(五賊) 중 박제순과 이지용을 제거하기 위해 폭탄 상자를 배달하기도 했던 열혈 독립운동가였다.
대종교 중광 60년사에 따르면 나철은 이 사건 때문에 정부 전복 혐의로 무안군 지도(智島)에 유배되기도 했는데, 1909년 정월 15일 자시(子時: 밤 11시~새벽 1시) 서울 북부 재동(齋洞) 취운정(翠雲亭) 아래에서 60여 명의 동지들과 단군교를 새롭게 열면서 이날을 중광절(重光節)로 삼았다. 중광이란 기존에 있던 것을 새롭게 중흥한다는 의미였다. 망국이 눈앞에 있었기 때문에 위기를 느낀 사람들이 단군교에 속속 입교했지만 서울 북부지사교(北部支司敎) 정훈모가 친일로 돌아서고 일제의 탄압이 가해지자 나철은 1910년 8월 교명을 대종교로 바꾸었다.
망국 후인 1911년 7월 나철은 강화도 참성단을 참배하고 평양과 두만강을 건너 백두산 북록(北麓) 청파호(靑坡湖)를 답사한 후 만주 화룡현 삼도구(三道溝)로 총본사를 이전하고 그 산하에 동서남북 사도본사(四道本司)를 두었다. 각 본사(本司)의 관할 범위를 보면 대종교의 광대한 역사의식이 잘 드러난다.
각 본사 책임자를 보면 이 당시 대종교가 독립운동가들에게 어떤 위상을 갖고 있었는지 잘 알 수 있다. 동도본사는 서일(徐一), 서도본사는 신규식(申圭植)·이동녕(李東寧)이었고, 남도본사는 강우(姜虞), 북도본사는 이상설(李相卨)이었다. 현규환의 한국유이민사(상)에 따르면 임정 수립 당시 의정원 의원 의장 이동녕을 비롯해서 29명의 의원 중 대종교 교도가 21명이었다. 대종교는 독립운동이 곧 신앙생활이었던 교단이었다.
총본사를 만주로 이전한 후 30만 교도로 확장되자 중국과 일제가 모두 탄압에 나섰다. 1914년 중국 화룡현 지사가 해산령을 내린 데다, 1915년에는 조선총독부도 대종교를 ‘종교가 아닌 항일독립운동 단체’라면서 남도본사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나철은 이에 대한 항의의 뜻으로 1916년 구월산에서 ‘삼십만 교도에게 격려하는 글’과 ‘순명(殉命) 3조’ 등 3종의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나철의 뒤를 이어 김교헌(金敎獻)이 제2세 교주가 되는데, 동도본사 책임자 서일이 서른한 살 때인 1911년 3월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한 것이 청산리 대첩의 씨앗이 된다.
중광단은 3·1운동 이후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으로 탈바꿈하는데, 서일은 대종교라는 탄탄한 대중조직이 있었지만 군사 부문에 전문가가 많지 않은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김좌진(金佐鎭)·조성환(曺成煥) 등 한말 육군무관학교 출신들이 1919년 3월 결성한 길림군정사(吉林軍政司)에 통합을 제의했다.
그래서 두 단체는 1919년 10월 군정부(軍政府)로 통합했지만 12월 정부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말라는 임시정부의 권고에 따라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칭했다. 북로군정서는 독판(督辦)에 서일, 군사령관에 김좌진을 추대했고 무관들을 배출하기 위해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도 설립해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을 교관으로 초빙하기도 했다.
북간도에는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도 있었다. 대한국민회는 산하에 안무(安武)가 지휘하는 대한국민군(大韓國民軍)이 있어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최진동(崔振東)의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와 통합을 시도했다. 그 결과 1920년 5월 28일 군사통일회의를 열고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를 결성했다.
일제의 정보보고는 이 부대의 규모를 최진동 계열 약 670명, 홍범도와 안무 계열 약 550명 등 총 1200여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무기는 기관총 2문, 군총 900정, 수류탄 100여 개, 망원경 7개, 군총 1정당 탄약 150발을 가지고 있다고 추정했다.
독립군은 제1차 세계대전 때 시베리아에 출병했던 체코군이 철수하면서 넘기고 간 무기들로 무장했다. 이 무기들은 제정 러시아가 미국의 레밍천사(社), 웨스팅하우스사 등에서 구입한 것을 체코군에 제공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