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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전 2 - 케산 전투와 구정공세 이후에 미군은 철수하고 베트남은 통일되다!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 상사, 이제서 돌아왔네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 상사, 너무나 기다렸네
굳게 닫힌 그 입술 무거운 그 철모, 웃으며 돌아왔네
어린 동생 반기며 그 품에 안겼네, 모두 다 안겼네
“월만에서 돌아온 김상사”는 김추자가 1969년 발표했고, 1집 늦기 전에에 수록됐는데 월남전을 상징하는
노래로, 신중현 사단의 히트곡 중 하나이니 신인 가수였던 김추자는, 데뷔하자마자 이 노래가 유행하는
바람에 금세 유명세를 타게 됐으며 이 노래의 대척점에는 반전 영화라 할수도 있는 “하얀전쟁”이 있습니다.
한국은 연 32만명의 병력을 파병했는데 해병대 청룡부대 3대대 11중대가 치른‘짜빈동 전투’ 는 전쟁사에
남을 신화니, 1967년 2월 14일 저녁부터 다음 날 오전 7시 반까지 월맹군 2개 연대의 기습에 맞서
고작 1개 중대로 백병전 까지 벌이며 승리했지만, 8년간 총 5천명이 죽고 1만 1천명이 부상당했고
또 4만명의 고엽제 환자가 생겼지만 우리 기업들이 큰 돈을 벌어 "국민소득을 5배" 나 높이기도 했습니다.
월남전쟁은 공산세력으로 부터 자유세계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한 의로운 전쟁이라고 말하지만 일어나지
않았을수도 있었던 전쟁이니, 북베트남과 프랑스가 맺은 제네바협정에 남북 통일선거를 예정대로
실시했다면 전쟁은 없었을 것이지만.... 선거를 통한 합법적인 공산국가가 수립되는걸 막기 위해
미국이 개입해 선거를 거부하고 통킹만 사건을 조작해 하노이를 북폭하니 월남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1968년 초에 케산전투가 시작되고 몇주 후에 베트남 민족해방전선과 북베트남은 베트남의 음력
설날 명절인 뗏(Tết) 휴일에 이틀동안 휴전을 하겠다는 약속을 깨고 1968년 1월 30일
남베트남 전역에서 기습 공격을 시작했으니... 100 곳이 넘는 도시에서 공격이 이루어
졌으며.... 주베트남 미군 사령부의 본부와 미국 대사관이 있던 사이공 역시 공격을 받았습니다.
구정 대공세시 미군과 남베트남군은 고전을 면치못하였고 퇴각했지만 막강한 화력으로 응전해 베트남
민족해방전선과 북베트남의 공격을 막아내었고, 이때 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전투원들이 큰 피해를
입었으나 응우옌 왕조 시절의 수도였던 후에는 한때 베트남 민족해방전선과 베트남인민군에 의해
점령되자 미군은 도시 전체의 80% 가 폐허로 변하는 포격을 퍼부으며 전투를 벌여 후에를 탈환 합니다.
북베트남과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은 구정 대공세를 통해 잠시 남베트남 주요 도시들을 획득할수 있었지만....
결국에는 병력과 화력의 열세로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으니 전면전으로 붙으면 미군의 상대가
안된다는 것이니 그러나, 구정 대공세는 그 동안 전쟁 승리를 낙관하였던 미국 내 여론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제임스 위츠는 구정 대공세가 “존슨 정부와 군부가 만든 베트남 전쟁의 단계를 정면 반박하는 것”
이었다고 평했으니 구정 대공세로 변환점을 맞을수 밖에 없었고 그동안 미국 정보당국이 평가
하고 있던 베트남 민족해방전선과 북베트남의 전력이 과소 평가되어 있었다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무렵 피터 아네트는 벤쩨에서 근무중인 익명의 장교가“마을을 탈환
하려면 파괴할 필요가 있다”는 명령을 받았다고 폭로했고 또 다른
정보원은 제9 보병 사단의 부리스 소령이 이러한 명령을 내렸다고 지목했습니다.
CBS 이브닝 뉴스의 앵커였던 월터 크롱카이트는“우리는 지난 시기 잘못된 낙천가가 내놓는
증거들을 통해 승리가 멀지 않았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패배에 직면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무책임한 비관주의일 것입니다. 냉정히 현실을 보면 우리는
스테일메이트에 빠진 것 같습니다. 불만스럽지만, 그게 결론입니다.” 라고 논평하였습니다.
1968년 3월, 구정 대공세후 웨스트모어랜드는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는데 이는 정규 인사의 결과였지만,
구정 대공세가 있었던데다가 20만명의 증파를 요청하였다는 것이 언론을 통해 폭로되자, 격렬한
비난을 받았고 베트남 군사 원조 사령부의 사령관은 그의 부관이었던 크레이톤 에이브람스가 승계합니다.
미국의 대통령이 된 리차드 닉슨은 구정 대공세가 지나고 난 뒤 철군 계획을 발표했으니 닉슨 독트린이라
불린 계획은 남베트남군을 강화시켜 스스로 영토를 방어하도록 한다는 것이었으니 닉슨의 정책은
“베트남화”라고도 불렸는데 베트남화는 케네디 정부가 구상하였던 남베트남의 독자적 전쟁 수행과
비슷한 것이었지만, 그것과는 달리 분쟁 확산의 방지를 위해 미군이 계속 개입한다는 점이 달랐습니다.
닉슨은 한 발표에서 “저는 오늘밤 15만명의 추가적인 철군 계획을 설명하려 합니다.
철군은 내년 봄까지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것으로 베트남에 주둔한 미군 병력은
15개월 전42만명에서 이제는 265,500 명으로 줄게 되었습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1969년 10월 10일 닉슨은 자신이 베트남 전쟁을 종결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일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B-52 폭격기 편대에 핵폭탄을 무장하고 소련 영공 부근을 비행하도록 지시했으며
닉슨은 또한 정전 협상을 지속하는 한편, 차기 주베트남 미군 사령관인 크라이튼 에이브람스
에게 남베트남군과 협조하여 북베트남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공격을 지속하라고 명령합니다.
“미라이 학살”과 그린 베레가 캄보디아를 비밀리에 폭격한 감마 계획 등이 알려지면서 미국 내의
반전 운동은 점점 거세지게 되었으니... 1970년초 미군은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던 내륙
지역에서 철수하여 기지를 해안지역으로 옮겼고, 이로써 1969년보다 사상자를 줄일 수 있었습니다.
1969년 9월 2일 북베트남의 지도자 호찌민이 사망했는데.... 일생을 프랑스, 일본, 미국과 상대로
싸웠던 호찌민은 베트남 사람들에게 공산주의자 이전에 민족주의자로 알려져 있었는데,
"정약용의 목민심서" 를 늘 곁에둔 청련한 사람이었으니, 남베트남 정부의 지도자로 호찌민을
상대로 싸웠고 부통령을 지낸 응우옌까오끼는 전쟁 후 “그는 베트남 인민들에게 존경 그 자체였다.”
“그는 프랑스는 물론 다른 외침에 대항하는 투쟁에 언제나 앞장섰다. 내가 어려서 철이 없었을 때,
베트남 사람들은 호찌민을 위대한 애국자로 생각했으며 나도 그를 대단히 칭송했었다.”
고 말했는데 미국의 CBS는 광고없이 7분간 호찌민의 사망을 해드라인 뉴스로 보도했고
1969년 9월 8일 하노이 바딘광장에서 10만명이 운집한 가운데 호찌민의 장례식이 치러졌습니다.
미군이 캄보디아를 침공하자 베트남전 반대 운동은 더욱 거세졌으니 오하이오주에서는
켄트 주립대학교에서 반대 시위를 벌이던 네명의 학생이 총격을 받고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였고, 이에 격분한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하면서 반전 운동은 더욱 커졌습니다.
1971년 《뉴욕타임즈》는 미국의 베트남 개입에 대한걸 정리한 일급 기밀 문서인 펜타곤 보고서
를 폭로하면서... 미국이 오랫동안 남베트남 정부의 국방부 고위 관리들에게 뇌물을
건낸 사실을 보도하였지만, 미국 연방 대법원은 정부의 이런 행위가 합법이라고 결정하였습니다.
1971년 2월 남베트남군은 라오스 영토 내의 호찌민 통로를 봉쇄하기 위한 람선 719 작전을 시작하했으니
당시 라오스는 표면상 중립을 표방하고 있었지만 북베트남의 호찌민 통로를 묵인하고 있었는데,
작전에 나선 남베트남군은 저항군과 교전한 뒤 후퇴하다 길을 잃었으니 남베트남군은
잘못된 길을 헤매다가 연료가 떨어지자 차량을 버리고 미군이 헬리콥터로 후송하여 줄 것을 요청합니다.
북베트남의 공격으로 남베트남군의 절반 가량이 죽거나 생포되어 결국 베트남군의 단독 작전은 큰 실책으로
끝났고, 이는 닉슨의 베트남화 정책 역시 실패하였다는 것을 뜻하였으니 카르노는 “잊지 못할 실수
였다. 미군에 의해 5년에서 10년 동안 훈련된 베트남군 고위 장교들도 그다지 배운게 없었다.”고 기록합니다.
1971년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가 철군하였으며 미군 역시 196,700 명으로 감축되었고, 1972년 2월까지
45,000 명을 추가로 철군하기로 되어 있었으며 한편, 미국의 반전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있었습니다.
1972년 부활절 공세에서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은 남베트남 북부 지역을 신속히 공격하면서
캄보디아를 지나 남베트남 중부를 양단하는 공세를 가했으니 미국 공군은 공습에 나섰지만 공세는
이미 지난 뒤였고 이로써 닉슨의 베트남화 정책은 실효성이 없다는 것이 다시 한번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헨리 키신저는 북베트남의 레득토와 비밀리에 정전 협상을 했고 1972년 8월 키신저와 토는 합의하지만
남베트남 대통령 티에우는 평화 협정 내용을 변경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북베트남이 협정
내용을 공표하자 닉슨 정부는 북베트남이 기만 전술을 쓰고 있다고 비난하였고 협상은 중단되었습니다.
닉슨은 남베트남에게 여전히 지원하고 있다는 것을 보이고 북베트남으로 부터 유리한 협정 조건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1972년 12월 18일부터 29일까지 하노이와 하이퐁을 폭격하는 라인베커 II 작전을 실행하였습니다.
무차별 폭격작전에 사용된 폭탄은 12만톤으로 히로시마 원자 폭탄의 5배에 해당하는 양이었으며, 4만톤이
하노이에 집중되었으니 북베트남의 경제와 공업은 큰 타격을 입었고 같은 시기 닉슨은 남베트남의
티에우를 압박하여 남북 양자간의 평화 유지와 미군 철수를 골자로 하는 협정 조건을 승인하도록 합니다.
1973년 1월 15일 닉슨은 북베트남에 대한 공격을 중지한다고 발표하였고, 1월 27일 “종전과 베트남
의 평화복원에 대한” 파리 평화 협정을 체결하여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을 공식적으로
종결하였고 평화협정이 체결된 뒤 베트남 남북 정부는 휴전하였고 미군 전쟁포로가 석방되었습니다.
미국 안에서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이유는 다양하였으니 초기 반전운동은 미국이 제네바 협정에
따른 총선거를 거부하고 지엠 정권을 지원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이유로
전쟁에 반대하였으니.... 존 F. 케네디 역시 상원의원 시절에는 베트남 전쟁 개입을 반대했습니다.
1968년 미라이 학살이 폭로된 이후 미국내 반전 운동은 점점 확산되었으니 1968년
민주당이 주최한 전국 대회에 참가한 사람들은 베트남 전쟁에 반대
하는 시위를 벌였으며, 1969년 10월 15일 수백만명이 참여하는 반전 시위가 열립니다.
미군은 남베트남에서 철수하였고 북베트남과 미군 사이 포로 교환이 이루어졌으니 협정에 따라 북베트남은
물자의 조달과 같은 제한된 범위 내에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지원할수 있게 되었고 평화 협정의
체결로 키신저와 토는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되었지만 토는 진정한 평화가 오지 않았다며 이를 거부하였습니다.
제4차 중동 전쟁 때문에 촉발된 1973년 유류 파동으로 남베트남은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겪었는데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은 1974년 1월 건기를 맞아 공세를 시작했으니 55명의 남베트남 병사가
사망한 두번의 무력 충돌후 남베트남의 티에우 대통령은 전쟁이 재발하였고, 파리 평화협정은
효력을 상실하였다고 주장했으니 정전 기간동안 남베트남 측 사상자는 2만 5천여명에 달했습니다.
1974년 8월 9일 리처드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하야하자 제럴드 포드가 미국 대통령 직을 승계하는데
의회는 남베트남에 대한 원조금액을 1억달러에서 7백만 달러로 삭감했고 1974년 미국의
보궐선거는 민주당이 의석 과반수를 차지하게 되었고 정부의 전쟁 수행에 대한 반대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짜는 캄보디아에서 부터 프억렁(Phước Long) 성을 공격해 호찌민 통로에 대한 봉쇄를 푸는 한편
공격의 규모를 제한하여 미국이 다시 개입할 명분을 주지는 않으려 했는데, 1974년 12월
13일 북베트남군은 프억렁성 14번 통로를 공격하였고 1975년 1월 6일 성도(省都) 인
프억빈이 함락되자 포드 정부는 남베트남에 대한 지원 재개를 의회에 요청하였지만 거부됩니다.
프억빈이 함락된 뒤에도 미국의 지원이 없자 남베트남의 지배층은 혼란에 빠지는데 중앙 고원
지역을 빠른 속도로 확보한 반띠엔중은 레주언에게 “우리가 이렇게 완벽히 군사적
정치적으로 성공한 적이 없었지만, 지금은 크나큰 전략적 우위를 갖게 되었다.”고 보고합니다.
1975년초 남베트남군은 북베트남군에 비해 3배나 많은 대포와 두배 더 많은 탱크, 1,400 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병력도 두배 이상 많았지만, 석유 가격 인상으로 상당수는 사용할 수 없었는데
반면에 북베트남군은 공산주의 국가로부터 받은 원조를 바탕으로 조직되어 있었고 사기 또한 높았습니다.
1975년 3월 10일 중 장군은 중부 고원을 공격하는 275 작전을 시작하는데 목표는 닥락성의 부온마투옷
이었으니 중 장군은 성공하면 플레이쿠를 공격하여 1976년까지 전역 작전을 펼칠 계획이었는데,
3월 11일 남베트남군은 별다른 저항도 없이 패퇴하자 북베트남은 다시한번 스스로도 놀란
신속한 승리를 거두었고 중 장군은 바로 플레이쿠를 공격했으며 연이어 꼰뚬 성의 성도까지 진군합니다.
남베트남군의 장군 출신인 대통령 응우옌반티에우는 남베트남군을 일시적으로 후퇴시켜 재집결한
뒤 반격하는 작전을 수립하는데.... 옛날 전진(前秦)의 부견이 군대를 물렸다가 후퇴를
멈추지 못해 동진(東晋)군에 대패한 사수전투처 럼 남베트남군은 이미 통제불능의
상태에 있었으니 3월 20일 티에우는 이전의 작전을 취소하고 후에를 사수하도록 급히 명령합니다.
그러나 후방에서 재집결을 위해 후퇴중인 부댜에 이러한 긴급한 작전 변경은 혼란만을 더 키웠으니 3월 22일
북베트남군은 후에를 포위하였고, 3월 30일 10만명의 남베트남군은 항복하였으며 후에에서 승리한
북베트남군은 곧이어 다낭으로 개선 행진을 하였으니 이로써 베트남 중부는 북베트남의 것이 되었습니다.
1975년 5월 1일 이전에 사이공을 함락하는 것을 목표로 북베트남군은 빠른 속도로 냐짱, 깜라인, 달랏을
점령해 나가니 남북 베트남 군대는 4월 7일 사이공 동쪽 64 Km 부근에서 쑤언록 전투를 치렀는데,
남베트남군 18사단은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옥쇄하기로 결정하고 북베트남군에 맞섰지만
그러나 4월 20일 남베트남군 지휘부는 18사단에게 사이공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같은 날 공포에 휩싸인 남베트남의 티에우 대통령은 미국이 남베트남을 배반하였다고 비난하였으니,
티에우는 헨리 키신저 미국 국무장관에게 2년전 자신이 파리 평화협정에 서명하도록 종용
하면서 만약의 경우 군사지원을 약속하지 않았냐고 전문을 보냈으며 4월 25일
티에우는 타이완에 있던 쩐반흐엉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비밀리에 미국으로 망명하였습니다.
1975년 4월 말 메콩강 삼각주 지역에서는 명령 체계가 무너진 채 고립된 남베트남군이 여기저기 흩어진
채 북베트남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으며 사이공에는 수도방위군 3만명이 남아 있었지만 사기는
극도로 떨어져 있었으며 훗날 2021년에 아프가스탄에서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이 먼저
달아났듯 티에우가 망명하자..... 많은 남베트남 공직자와 시민들이 공포에 휩싸인 채 사이공을 떠납니다.
사이공에는 계엄이 선포되었고, 미군 헬리콥터들이 대사관에서 미국 시민들과 남베트남인, 대한민국 교민
들과 총영사관 직원들이 헬기를 타고 사이공을 탈출하고 있었는데 당시 사이공 인근 바다에는 미해군
7함대가 시누크 대형 헬기를 대기시키고 있었으나, 작전 개시시간을 베트남 현지시간이 아닌
영국 시간으로 지정해 놓고 있어서 현지시간 보다 7시간 늦은 시간에 작전을 개시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를 알지못한 대한민국 영사관 직원들과 현지 특파원들은 미국 대사관이 반드시 탈출 시켜
주겠다는 말을 믿고 여유를 부리고 있었는데, 구조 헬기가 보이고는 있었으나 이것은
미해군 헬기가 아닌 CIA 소속 헬기여서 많은 인원을 탑승 시킬 수 없었으며 한편
백악관에서는 상황의 위급함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급히 시누크를 출동시키라고 명령합니다.
대사관에서 시누크가 보이니 1만명의 군중들이 일제히 진입하자 미국 해병대들은 막으려고 노력했는데
시누크 탑승인원은 40명이였으나 90명이 탑승했으며 그러나 시누크는 1대가 올 때마다 1시간이
걸렸으니 그 이유는 탑승한 인원들을 내려주고 나서 연료까지 주입하는데에만 1시간이 걸렸던 것입니다.
4월 29일 미국 대사 마틴은 애완견과 베트남인인 가정부를 데리고 혼자 탈출했고 6대 남은 시누크에는
한국 대사와 직원에 교포와 특파원등이 탈출했으나 한국 영사와 9명 직원과 일부 교포들은 미국
시민권자(베트남인)들이 뒤늦게 들어오는 바람에 그들에게 우선 순위가 밀려 탑승을 못했으며
그 중에 영사와 3명은 감옥에 갇혔다가 북한 직원들의 집요한 회유를 뿌리치고 몇년 후에야 귀국합니다.
마침내 다음날인 1975년 4월 30일 북베트남군은 사이공을 함락하니 324호 탱크가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깃발을 들고 사이공 대통령궁의 철문을 부수고 들어간 시간은 11시
30분 이었고.... 이틀 전 쩐반흐엉 으로 부터 대통령 직을 이양받은 즈엉반민은 항복합니다.
1954년 베트민이 전쟁에서 승리한뒤 프랑스 총리 피에르 멩데 프랑스와 중국의 총리 저우언라이
가 협상을 하여 제네바 협정의 주요 내용을 합의했으니 당시 저우언라이는 미국의 개입을
우려하여 베트민에게 북위 17도를 기점으로 하는 남북 분단을 수용하도록 하였고
중화인민공화국은 1960년 북베트남이 징병제를 실시하자 그에 필요한 쌀을 지원하기도 합니다.
1962년 여름, 마오쩌둥은 북베트남에 9만정의 총을 무상으로 공급하도록 했으며 또한 중국은 1965년
부터 미국의 공습에 대항하기 위한 방공 화기와 도로 및 철도를 복구하기 위한 공병 대대를
파견하였는데 1968년 8월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이후 중소관계에
갈등이 발생하자 중화인민공화국은 북베트남에게 소련과의 관계를 끊어달라고 요청합니다.
하지만 북베트남은 이를 거절하였으니 이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은 북베트남에 대한 지원을
중지하고 군사 지원단을 철수하였으며... 1969년 우수리강의 전바오섬에 대한 중소
양국의 국경 분쟁이 발생하자..... 중화인민공화국은 북베트남을 견제할 목적으로
크메르 루즈를 지원하기 시작하였고 1970년 중국은 북베트남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였습니다.
크메르 루즈는 1975년부터 1979년 사이 베트남 국경을 침범하여 무력 충돌을 야기하였는데 이에 대한
반격으로 베트남은 캄보디아를 침공하여 크메르 루즈를 붕괴시켰고, 이 때문에 중국과
베트남 사이에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생하였으니 중국군은 국경을 넘어 북베트남을 침공했습니다.
중월 전쟁(中越戰爭)은 1979년 2월 17일 국경분쟁을 시작으로 중국과 베트남 사이에 일어난
전쟁으로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라고도 불리는데 중국군은 베트남 북부에
진입하여 여러 도시를 점령했으니 1979년 3월 6일, 중국은 하노이의 관문이
열렸고, 징벌적 임무가 달성되었다고 선언하고 중국 인민해방군이 베트남에서 철군합니다.
월남전쟁중 미군의 북폭에 대해서는 소비에트 연방은 남중국해에 배치한 함정을 통해 미국 공군의
B-52 폭격기 항로를 추적하고 이를 북베트남에 통지하였으니 북베트남은 이러한 경고를
활용하여 하노이와 하이퐁등 해당 지역에 폭격 공습경보를 내렸고 인명 피해를 줄일 수 있었습니다.
소련은 북베트남에 의료, 무기, 탱크, 공장, 핼리콥터, 곡사화기, 지대공 미사일을 비롯한
다양한 군사 무기를 지원하였는데.... 1991년 기밀 해재된 러시아의 자료
에서는 소련이 베트남 전쟁동안 3천여명의 지원단을 파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북한은 1966년 8월 조선노동당의 결의에 따라 1967년 초 하노이 방어를 위해 제921 전대와 제923 전대를
파견하였으니 200여명의 조종사로 구성된 이들 전대는 1968년까지 북베트남에 주둔
하였으며 두개의 방공포 부대가 추가적으로 파견되었고, 무기와 탄약 그리고 2백만벌의 군복이 지원됩니다.
1961년 박정희대통령은 케네디에게 파병을 제안하니 케네디의 정책은 미군을 월남에 투입하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에 거절했는데, 존슨은 1964년 대한민국에 의료부대의 지원을 요청하니 1964년 5월 9일 "1개 이동
외과병원" 을 파병해 주도록 요청하자 130명 규모의 이동 외과 병원과 10명으로 편성된 태권도교관단
등 140명을 파병하기로 결정했고 통킹만 사건후 미국은 대한민국에 후방 지원부대의 파병을 요청합니다.
한국 비둘기 부대는 1965년 3월 16일사이공에 도착하였고 지안에 주둔하여 건설지원임무를 수행하는데
1965년 미국은 베트남 주둔 미군의 사상자가 속출하자 곤경에 빠졌으니 1965년 3월 11일 김현철
주미대사는 조지 볼 미국무부 차관과 면담을 통해 "한국 정부는 베트남에서 추가적 병력을 기꺼이
파견하겠다." 고 말했으며, 이동원 외부무 장관은 브라운 주한미국 대사와 다음과 같이 협상을 합니다.
파병 상한선은 5만명이내, 한국군의 현대화 지원, 북한의 침공시 미국이 즉각 출병하도록 한미방위조약을
개정하며 남베트남에서 사용할 군수품 공급등 한국의 남베트남 시장진출을 보장한다. 한국 정부의
요구사항은 1965년 5월 17일에서 18일까지 워싱턴에서 개최된 한미정상회담에서 대부분 타결되었습니다.
한국정부는 6월 14일 남베트남 정부로부터 전투병력 정식 파병요청서를 접수하고, 8월 13일에 국회
의결을 얻었으며 주월한국군사령부를 창설하고 수도사단장 채명신 소장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였으며 청룡 부대가 1965년 10월 9일 깜라인에 상륙하였고, 9월 20일부터
주월한국사령부가 사이공에서 업무를 시작하였으며 11월 1일 맹호 부대가 꾸이년에 상륙을 합니다.
대한민국의 베트남 파병 병력의 누계는 32만명에 달했으니 베트남 파병 병사의 의무 파견 기간은
1년이었고, 파병이 최고조에 달했던 1968년 당시의 베트남에 주둔한 한국군의
수는 5만여명이었는데 파리 평화 협정으로 미군이 철수하면서 대한민국 역시 철군하였습니다.
베트남 전쟁 기간동안 한국군의 전사자는 5천여명이고 1만 1천여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한국군은 전쟁
중에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전투원 4만1천여명을 사살하였다는데, 미국은 한국군 병사에게
2억 3600만 달러를 전투 수당으로 지불하였고 대한민국은 파병의 대가로 민간 기업들을 진출시켜
엄청 돈을 벌어 경제발전을 이루었으니 ...대한민국의 "GNP 는 파병 이후여 5배" 가량 성장하였습니다.
내 개인적으로는 1967년 부산 부두에서 장병들이 배를 타고 떠날 때 태극기를 들고 환송을 나갔는데, 한국군
은 두종류니 상당수는 흩어져서 불안한 얼굴로 환송나온 가족을들 찾고 있었고 일부 무리는 한데 모여
구호를 외치고 악을 쓰며 노래를 목청껏 부르고 있었으니 전자는 맹호부대고 후자는 해병대 청룡부대 입니다.
2007년에 선배님 부부등 4명에 개인 배낭여행을 떠나 캄보디아로 들어가 앙코르와트등을 보고
비행기로 하노이로 들어가 하롱베이까지 보고는 다시 중부 후에에 도착해 교외의
엄청나게 큰 능들을 보고는 다이노이 왕궁 Dai Noi을 구경하고는 후에 전쟁박물관에 도착했습니다.
박물관 내부에서 월남전 여러 전시물들을 구경하는데 월남전 참전용사인 선배님이 갑자기 벌레 씹은 얼굴을
하기에 놀라서 쳐다보니 어느 전시물을 가리키는데 “Puppet Army”라... 한국군을 미국의 부용국
괴뢰군 이라고 표기하고 있으니 미군을 도와 참전해 작전지휘를 받고 총과 전차에 대포와
탄약등 모든 무기를 받아 사용하며 병사는 "매일 전투수당을 미국 달러" 로 받으니 용병이자 괴뢰군이라는?
호주는 6만명 이상이 참전해서 521명이 사망하고 3천명 이상이 부상당하였으며 뉴질랜드의
병력 누계는 3천여명이었고 사망 37명, 부상 187명이었으며 필리핀에서는 10,450명이
의료와 기타 민간 평화 지원을 그리고 태국군 합법적인 파병 이외에도 미국 중앙정보부의
경찰항공 정찰대에 비합법적으로 “자원” 하여 라오스 영토내의 호찌민 통로를 공격했습니다.
1967년 11월부터 중화민국은 남베트남을 지원하기 위한 미국의 전쟁 물자를 수송하는
비밀작전을 시작하였으며 운전병을 지원하였는데, 이들은 개구리 대원(Lien Doi
Nguoi Nhai) 이라고 불렸으니 중화민국이 지원한 운전병의 수는 수백명 정도였습니다.
베트남전쟁 기간 미군은 나프타를 주 원료로 하는 강력한 소이탄인 네이팜탄을 사용했으니 네이팜탄은
넓은 지역을 일순간에 불태우는 강력한 무기였고, 전쟁 기간 내내 미군이 대량살상무기를 민간인
에게 사용한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는데, 1972년 6월 8일 사이공 인근의 짬방 마을이 네이팜탄
폭격을 받았으니 사찰에 숨어있던 9살 판티 킴푹은 옷에 불이 붙어 벌거벗은채 도망쳐 나와야 했습니다.
1961년부터 1971년까지 베트남 농촌지역을 포함하여 인도차이나 반도 곳곳에서 사용된
고엽제는 밀림을 황폐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먹이 사슬을 통한 독성 물질 전파로
생태계 역시 파괴하였고, 사람과 생물 모두가 질병과 선천적 기형으로 고통받게 하였습니다.
미군은 적이 숨지 못하도록 고엽제를 사용했으니 다우 케미컬과 몬산토 지원을 받아 열대우림을 파괴할수
있는 강력한 제초제를 개발했는데, 에이전트 오렌지는 다이옥신을 포함된 매우 독성이 강한 제초제
였으니 베트남을 비롯한 캄보디아와 라오스 지역에 45,000,000 리터의 에이전트 오렌지가
살포되었으며, 특히 메콩 강 삼각주 지역의 밀림을 파괴하기 위한 랜치 핸드 작전에 집중 투입되었습니다.
고엽제는 밀림 뿐만 아니라 논밭에도 살포되었으니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살포된 고엽제의 양은 75,700,000
리터이고, 고엽제가 살포된 숲과 경작지의 면적은 24,000 km2로 이는 남베트남 전체 국토의 13% 에 해당
하였는데 1965년의 경우 고엽제 가운데 42% 가 남베트남의 통제하에 있던 농촌의 경작지에 뿌려졌습니다.
2006년 베트남 정부는 다이옥신 중독에 의한 피해를 받은 사람이 4백만명이라고 발표하였으며 미국 정부는
베트남의 다이옥신 중독과 에이전트 오렌지 사이에 과학적 상관관계가 없다고 주장하였는데.... 2011년
당시 베트남의 일부 지역에는 여전히 국제 허용 기준 보다 100배 이상 많은 다이옥신이 검출되고 있습니다.
베트남에서는 뇌가 없는 아이들이 태어나자 말자 죽게 되고 또 두 팔과 두 다리가 없이 몸통만으로
태어난 아이는 다행히 죽지는 않고 살았는데 움직일때는 점프를 해서 통통 뛰어다니는 모습이
몇십년전 KBS에서 방영된 적도 있는데.... 미국과 대한민국 병사들도 고엽제로 인한
전립선암, 폐암, 다발성 골수종, 2형 당뇨병, 림프종 등 각종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미군 고엽제 피해자들은 1978년부터 고엽제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시작했으니 제대 군인들과 가족들이
베트남 전쟁시 사용됐던 고엽제(에이전트 오렌지) 제조회사 다우케미컬 등 7개 업체를 대상으로
400억 달러 규모의 보상을 요구하는 집단소송으로 확대됐지만 1984년 5월 공판일을 앞두고
회사들이 고엽제 피해 제대 군인과 가족에게 1억8천만 달러의 기금을 지급하는 조건으로 합의했습니다.
한국군 참전용사 중에도 고엽제 피해를 당했다는 사람들이 다수 있으니 당시에는 고엽제의 위험성
이 널리 알려지기 전이라서 참전용사들의 상당수가 고엽제에 무방비로 노출되었기 때문
으로 이들 중에 일부는 지금도 심각한 피부질환 등으로 정신적인 고통과 후유증을 앓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고엽제 문제가 불거진건 20년이나 지난 1990년대이니 해외로 이민갔던 베트남전 참전용사들이
베트남전 참전자들의 고엽제 피해보상 요구운동을 보면서 자신들도 고엽제 피해자란걸 깨달으면서
부터니 이런 사람들의 목소리가 언론을 통해 소개되었고, 국내에도 상당한 수의 고엽제 피해자
들이 있다는게 드러나자..... 1993년 「고엽제후유의증 환자지원 등에 관한 법률」이 국회를 통과합니다.
정치권의 무관심과 복잡한 행정절차, 비협조적인 군당국등으로 실질적인 피해보상은 지지부진한 실정
이니 베트남전에 참전한 32만명 중에서 고엽제 피해자로 판정받은건 고작 2,000여명 수준
으로 실제 해외참전 전우회나 고엽제전우회, 언론에서 추정하는 숫자와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2005년에 과거 월남전 참전 군인 조판철 씨가 쓴“에이전트 오렌지” 라는 책에 보면
조씨는 1970년 백마 부대로 파월되어 월남에서 22개월을 복무하고 귀국
5년 후에는 이가 빠지고..... 온몸에 여드럼 처럼 생긴게 돋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1978년에 첫아들이 태어났으나 두개골이 없는 기형으로 하룻만에 죽었고
2년 뒤에 태어난 둘째는 배속에서 죽었으며..... 1989년 셋째는
정상인 것 처럼 보였으나 31개월후 세균성 뇌막염 으로 죽었습니다.
에이전트 오렌지 는 맹독성 제초제인 고엽제의 별칭 으로 함유된 다이옥신은 청산가리
1만배 위력을 가지고 있다는데 미군은 1962년부터 10년간 고엽제 2천만 갤런을
베트남 밀림 에 뿌렸으니 그중에 80% 인 1,600만 갤런은 한국군 작전 지역에 집중됩니다!
한국군 하늘에서 비행기로 뿌리는 “에이전트 오렌지” 를 소독제 로 알고 일부러도 맞았으며
이는 2세에게도 유전 되니 2006년 베트남은 다이옥신 중독자가 400만명 이라 발표합니다.
미군은 1960년대말 한국 비무장지대에도 2만갤런을 뿌렸으니 현재 한국에는 고엽제 후유증 환자가 4만
6천명 이고 고엽제 의심증 환자는 8만 8천명에 달한다는데.... 1만 6천500명이 미국의 고엽제 제조
회사를 상대로 한국 법원에 손해배상을 청구했으나 39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대법원에서 패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