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만우절이죠. 정당하게 거짓말을 유쾌하게 즐길 수 있는 유일한 날이죠.
'거짓말'의 문제는 늘 '진실'과 '진리'라는 문제와 관련해서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래의 글은 아주 오래 전에 썼던 글인데, 우연히 찾아내서
여기에 올려봅니다.
1) 진리의 문제는 그 '진리'라는 용어가 가지는 심오한 뉘앙스 때문에 사뭇 심오하
고 때론 너무나 진지한 논의처럼 보인다. 물론 그 논의는 반대로 너무나 가벼운 것
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진리'라는 논의가 벌어지는 공간이 범접할
수 없는 그런 이상화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것도 아닌 것이다. 우리는 그 '진리'에
대한 논의를 아주 가까운 곳에서 시작할 수 있다. 그래서 이를테면, 우리는 비트겐
슈타인의 『철학적 탐구』의 xi에서 논의되는 그 유명한 소위 '토끼-오리'그림에서
진리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
2) 하나의 사태가 최소한 두 가지의 서로 다른 국면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전제할
때, 예를 들어, 토끼로서도 드러나고 오리로서도 드러날 수 있을 때, 그 사태에
대해서 우리는 어떠한 태도를 가질 수 있을까? 우리의 상식적이고 '건전한' 태도는
하나의 사태는 하나의 의미규정을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어떤 것이 토끼로서도 오리로서도 드러난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것은 하나의 '모순'
이며 그러한 모순이 생기는 원천은 사태가 아닌 우린 인식의 문제라고 단정짓곤 한
다. 즉, 하나의 사태는 그것이 재대로 인식되는 한에서는 오직 하나의 의미규정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사태의 진정한 객관성은 그 자체 환한 빛남 속에서
어떠한 은폐성도 없는 순수한 '현전'으로서 우리 앞에 서있는 것이라고 여겨지기 때
문이다.
3) 바로 이러한 환한 빛남 속에서 순수한 '현전'으로서 우리 앞에 서있는 것으로서의
사태를 '진리' 라고 본 사람이 '플라톤'이다. 그의 유명한 '동굴의 비유'는 바로 인간
이 온갖 가상들의 혼란 속에서 진리를 찾아가는 여정과 그 결과를 설명하고 있는 대
목인 것이다. 여기서 플라톤은 진리를 태양의 환한 빛 속에서의 완전한 비-은폐성으
로 이해하고 있다. 그가 진리를 '동굴'로부터의 벗어남, 즉 'A-letheia', 비-은폐성(숨
겨지지 않음)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그러나 하이데거에 의하면
그는 비록 비-은폐성으로서의 진리라는 것에 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비-은폐성
이 그 자체 안에 가지는 두 국면, 즉 '은닉됨'과 '탈-은닉됨'을 이해하지 못한 나머지
, 그 '비-은폐성'을 '탈-은닉됨'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비
-은폐성이 비록 개개의 상이한 단계들에서 거론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어떻게
이 비-은폐성이 나타나는 것을 그것의 보임새에 있어 접근 가능하게 만들어 이 스
스로를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게끔 하는 가에 있어서만 사유하였다"(『플라톤
의 진리론』34)라고 말하고 있다.
4) 위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즉 이데아는 보임새로서의
외관을 현전하는 것 속으로 자유롭게 내주어 현전하는 것으로 하여금(나타나는 것
으로서의 존재자로 하여금) 그것의 존립성에, 그 존립의 가시적인 것 안에 그리고
이러한 의미로 그것의 '존재'에 현전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때, 이데아는 사실상
오직 비-은폐성의 근거 하에서만 이데아일 뿐이라는 것을 플라톤은 보지 못하고 있
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플라톤은 진리를, 비-은폐성으로서의 알레테이아를 그것의
'은닉됨'과의 연관성에서 보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제 진리는 오히려 환한 빛남이
라는 규정성 속에서만 이데아로서 이해되기에 이른다.
5) 진리가 이렇게 이해되었을 때, 이러한 비-은폐성에로의 유일한 통로는 오직 그것
에 대한 탁월한 봄(seeing)만이 문제되고 그리고 그 때 진리의 본질에 대한 플라톤
의 논의는 '교육'-그러한 봄의 능력을 키우게 하는- 에 대한 논의로 바뀌어 버린
다. 이제 진리는 존재의 근본특징으로서의 비-은폐성에서 '올바른 바라봄'이라는
존재자에 대한 인간의 하나의 행동관계로 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플라톤의 진리론』42).
6) 이러한 하이데거의 플라톤에 대한 간략한 논의에서 우리는 진리의 본질에 대한
두 가지의 변화 내지는 결과를 알게 된다. 그것은 첫째, 진리는 오직 환한 빛남
속에서 '하나의 명증적인 규정성'으로서 이해된다는 것이며, 둘째, 진리는 존재
자체의 근본특징이 아닌 '인간화된 하나의 사건'으로서 이해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특징은 앞으로의 논의에서 가장 본질적인 주제로서 다루어질 것이며 우리의
니체의 이해에서 주요 계기로서 다루어질 것이다.
7) 현대 철학자들에게 '니체'라는 인물은 우리를 전통 내지는 근대라는 '망각의 강'을
건너게 해주는 뱃사공일 수도 있고, 또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가나안의 땅으로 안
내했건만 정작 본인 자신은 여전히 광야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던 모세일 수도
있다. 이 뱃사공과 모세 사이에는 모종의 공속성이 있지만 그런 이유로 근원에서의
본질적인 '사이-나눔'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이-나눔의 여러 줄기에서 우리
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그는 여러 사람들에게 '최초의
탈-근대철학자'로서 또는 '마지막 근대철학자'로서 이해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이름 사이에는 여러 갈래의 간섭과 넘나듦 현상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8) 데리다는 그의 책『에쁘롱』에서 니체를, 특히 그를 'style'의 문제를 통해서 다
루고 있다. 그러나 비록 데리다가 니체를 다룬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데리다가 하는
작업은 니체가 여성들을 폄하하고 비난하는 그 대목들을, 그것을 말하고 있는 니체
의 맥락하고는 별개로, 숨겨진 자신의 의도에 따라 재구성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는 니체의 입을 통해서 자신의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니체에 기생해서,
자기 스스로는 아무 것도 아니기에, 니체의 이중-읽기 또는 해체를 시도하는 것이
다. 그것은 참으로 남성에 대한 가장 여성적인 전략이 아닐 수 없다.
9) 데리다가 니체에게서 따오는 여성적인 것들은 대략 '거리','배일', '위장','생명 또
는 삶'등이다. 니체의 입을 통해서 데리다가 말하는 여성은, 기존의 철학자들이 추
구해왔던 의미에서의 진리와는 별개인, 그래서 진리 아닌 진리에 대한 하나의 상징
이다. 그것은 기존의 진리에 대한 태도를 모종의 남성적인 것, 문체, 뾰족한 것, 현
존 등으로 이해하고, 그러한 것을 조롱하고 거세하려는, 그래서 모든 남성적인 진리
를 추구해왔던 무리들을 바보로 만들고 두려움에 떨게 하려는 의도에서 설정된 것이
라고 할 수 있다.
10) 데리다가 말하는 바 여성은 늘 '거리'를 둔다고 한다. 그가 인용하는 니체의
『즐거운 지식』의 한 구절은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여성과 거리를 두고서 해내는
그들의 효과". 그 거리(Distance)는 여성의 고유한 것이다. 남성이 늘 가까이 하고
자 끊임없이 다가설 때 여성들은 계속해서 남성들의 눈과 품으로부터 멀리 도망친
다. 남성은 늘 자신의 눈으로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고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꽉 붙
들어 두고자 하지만, 그래야 그들은 안심하고 또한 언제나 동일한 것으로 확인할
수 있을 수 있지만, 불행히도 여성들은 늘 그러한 남성의 손아귀를 바람처럼 모래
처럼, 또는 유령처럼 잡히지 않고 빠져나가는 것이다. 여성은 늘 무지개처럼, 로렐
라이의 인어들처럼, 사이렌들처럼, 또는 신기루처럼 언제나 조금은 멀리서 노래하고
손짓하고 춤을 춘다. 그리고 그들의 노래와 춤에 남성들은 조만간 도취되고 자신들
도 모른 채 나락으로 떨어지고, 침몰하고, 거세되는 것이다. 여성들은 언제나 그 거
리를 두고 남성들을 유혹하고 결국은 그들을 파멸시킨다. 여성들의 거리(Distance)
를 두고서 해내는 효과는 사실상 '멀리서 춤추는 것(Dis-Tanz, dis tanzen)'인
것이다.
< 표상으로부터의 일탈-여성, 진리- 니체적 비-표상주의>
11) 아무리 용감하고 진리의 의지에 투철한 남자, 또는 철학자들일 지라도, 바로
그러한 이유로 더더욱 여성의 유희와 춤에 나약하다. 철학자들은 그저 여성들이 춤
을 추는 그곳에서조차 보다 심오하다고 생각되는 그 무엇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에 여성이 행하는 유혹에 쉽게 걸려드는 것이다. 데리다가 말하기를 여성은 " 하나
의 형상의 결정적인 동일체를 지니는 어떤 사물이 아니기 때문에 거리를 두고 예고
되고--- 아마도 여성은 비-실체, 비-인물, 환영, 거리의 심연, 거리의 거리두기,
간격의 모양 자체일 수 있다." 그러한 이유로 여성은 그 자신 어떠한 본질도 가지지
않는다. 여기서 플라톤은 아무리 이데아를 흐리게 하고 진리의 의미를 흩어버리게
하는 시인들을 추방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뮤즈의 화신인 사포의 매력으로부터는
자유롭지 못했으리라. 그녀의 살과 에덴의 물(l'eau d'eden, 향수) 냄새가 배인 치
맛자락의 나부낌에 그의 빛나기만 했던 눈은 어느새 흐릿해지고 이데아는 또다시
그림자처럼 흔들리며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리고 죄수는 다시 붙잡혀 동굴 속으로
회송된다.
12) 이러한 데리다의 여성에 대한 언급은 바로 데리다의 자신의 소위 해체철학에
대한 상징적인 언급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데리다가 말하는 바 기존의 철학의 궁
극적인 문제점은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망각'보다도 더 근원적인 것에 기초하고
있다. 그것은 언제나 철학의 궁극적인 목적이자 시발점으로서 어떤 가장 순수한 무
엇을 상정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데아이건 누우스이건 실체이건 주체이건 또는
심지어는 존재이건 그것들은 한결같이 그 자체 순순하게 항존하는 적극적인 어떤
것, 데리다의 표현에 따르면, '현전'인 것이다. 철학의 목적과 시작이 항상 그리고
근원적으로 그 어떤 것이어야 할까? 데리다는 어떠한 것도 상정하지 않는 그런 시
작과 끝을 보면서 철학을 한다. 그의 '텍스트'가 바로 그 징표이며 또한 '차연'이 바
로 그 특징인 것이다. 그가 말하는 텍스트는 그 무엇도 아닌 하나의 전체적 짜임망
이며 '차연'은 그 텍스트를 생성시키는 그 무엇 아닌 순수한 힘 또는 작용인 것이
다. '아무 것도 없는데 거기서 그 어떤 것들이 나온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를
기원으로 하는 서양의 오랜 사유는 그것의 뿌리가 없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무엇에서 다른 무엇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무수한 차이와 거리, 그리고
사이지움의 끊임없는 생성 속에서 모든 것들이 나오는 것이다. 그것들은 결코
어떤 하나의 지점으로 모일 수 없다. 그런 곳도, 그런 곳에 놓여 있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단지 모든 것들 이전에 모든 것들을 가능케 했던, 그러나 그것도 그
자체 무상한, 텍스트의 분기와 결합들, 다시 말해, '차연현상'들만이 작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 무수한 연기(緣起)만이 무상하게 무상한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하나의 현(玄)이고 묘(妙)이다. 이 현묘(玄妙)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멂'과 '여성'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13) 여기서 우리는 잠시 『포박자(抱朴子), 내편』권1 「창현(暢玄)」에서 전개되는
현(玄)에 대한 논의를 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현(玄)은 가장 최고의 실재로서 묘
사된다.
"현(玄)이란 자연의 시조이며 만물의 근본이다. 어둑해서 그것은 깊다. 그래서 미(微)
라고 무르고 아득하니 그것은 멀다. 그리하여 묘(妙)라고 부른다." 이러한 언급은 사
실상 『도덕경』에서 말하는 "어둡고 또 어두우니 그것은 모든 오묘함의 문이다
(玄之又玄, 衆妙之門)" 와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언급되는 현(玄)은
사실상 그 어떤 것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따라서 어떤 것의 이름이 아니라 어떤
변화하며 무소부지(無所不至), 무궁무진의 현상의 빗댄 표현일 따름인 것이다.
그것은 어떤 하나의 적극적인 그 무엇이 아닌, 차라리 언제나 하나의 흔적(妙)으로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생성해내는 힘(玄)인 것이다.
14) 이렇게 이해했을 때, 이 현묘한 것으로서의 텍스트와 그 차연의 작용, 즉 여성
과 그녀의 원거리-춤으로부터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는 데리다가
말하는 바 "여성은 모든 본질, 모든 실체, 그리고 모든 특성을 목적 없이 기저
없이 근본부터 사키고 휘게 한다. 여기 눈먼 어두운 철학적 담화는 파멸에 빠지고
만다" 일 것이며, 여기서 다시 "여성에 대한 진리는 없지만, 그것은 진리에 대한
그 깊은 분열 때문이며, 바로 그러한 비-진리가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성이야말로 진리의 이 비-진리성에 대한 하나의 이름인 것이다."를 이해하게
된다. 그녀가 본성적으로 알고 있는 진리는 철학자들이 꿈꾸는, 사포의 치맛자락
을 붙들고 정신을 잃는 우리의 불쌍한 플라톤이 포기 못하는, 그런 식의 진리는
없다는 것이다.
15) 모든 것은 한갓 꿈이지만 여성들은 계속해서 우리를 유혹하고 춤춘다. 사이렌
은 계속해서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한다. 우리는 한없는 아름다움과 지복을 그려보
고 기대한다. 그러나 실상 그렇게 춤추고 노래하는 여성들 자신은 그런 아름다움과
지고한 것을 생각지 않으며 그런 것을 믿지 않는다. 그녀들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녀들에게는 아름다움이 없다. 그녀들은 사실상 어떤 의미에서 근본적인 회의주의
자들일 수 있다. 그녀들은 알고 있다, 모든 것이, '진리'가 그저 '표면'들일 뿐이며,
그것은 그녀들이 하는 '베일'들의 효과일 뿐임을. 이 '베일', 그것은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보이도록 덮고 있으며, 우리의 삶에 "유망하고 마음속을 감추는, 수줍어
하는, 빈정대는, 불쌍히 여기는, 유혹적인 모습을" 부여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니체는 외친다, "신은 죽었다" 대신 "그렇다! 여성이야말로 삶이다."
16) 데리다를 통해서 드러나 니체는 여성이야말로 진리가 없다는 진리, 비-진리의
진리, 그리고 그런 한에서 그것이야말로 삶 자체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대신
플라톤과 모든 철학자들, 또는 기독교주의자들은 가증스런 자들, 삶에 적대적인
자들일 뿐인 것이다. 그들은 삶 자체의 비-진리성과 그 표면성을 거부한다. 대신
그들은 '깊이' 와 '높이'를 추구한다. 그들은 표면뿐인 삶을 증오하면서 본질적이면서
근원적이라고 여겨지는 '진정한'세계와 그 '진리'를 찾아 헤맨다. 그들은 또 하나의
세계가 있음을 주장하고 세계를 이분화 한다. 그들은 변화 대신 '영원성'을 택함으
로써, 세계는 그리고 그것에 대한 진리는 하나의 '명증하게 규정되는 것'으로, 하나
의 '형상'으로서 굳어버리게 된다. 그들은 진정한 세계를 버리고 그들만의 또 하나
의 세계로 이주한다.
17) 그럼으로써 '들뢰즈'는 그의 『니체와 철학』에서 '진리의 개념'을 논함에 있어서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의 다음 구절을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진리는 항상 본질
로서, 신으로서, 최상의 심급으로서 상정되었다. --- 그러나 진리의지(la volonte
de verite)에는 어떤 비판이 필요하다. -우리의 의무를 정의하자.- 이번만은 진리의
가치를 검토하고자 노력해야만 한다."
18) 들뢰즈는 진리의 개념은 늘 어떤 세계를 참된 것으로 규정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과학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과학은 진리는 현상들의 세계와 구별되는
'어떤 세계'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만일 누군가가 진리를 원한다면, 그것
은 세계인 바의 이름 아래서가 아니라, 세계가 아닌 바의 이름 아래서이다."라고 말
하고 있으며, 이는 곧 니체가 비난하는 다음의 태도를 의미한다고 한다. "삶은 길을
잃게 하고, 속이고 ,감추고, 현혹시키고, 눈멀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이렇
게 진리의 세계를 우리의 세계와 다른 것으로 상정하면서 세계를 이분화 시키는 태
도는 다시 "삶을 하나의 '오류'로, 그 세계를 하나의 '외관'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그는 삶에 인식을 대립시키고, 세계에 또 다른 세계, 저 세상, 소위 참된 세계를 대
립시킨다. 참된 세계는 그 의지, 이 세계를 외관으로 다루려는 의지와 분리될 수
없다. 그 때문에 인식과 삶의 대립, 세계들의 구분은 그것들의 참된 특징을 드러
내 보인다. 그것은 도덕적 기원의 구분, 도덕적 기원의 구분이다." 들뢰즈가 이
지점에서 보는 것은 단순히 진리에 대한 정의나 규정성에 대한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하나의 가치의 문제를 덧붙이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니체에 따라 모든
인식에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가치에 대한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진리를
의지하는 자의 "삶을 반대하는 삶", 다시 말해 우리의 삶과는 다른 보다 심오한
삶을 의지하는 자, 그래서 "책임지고, 결백을 부정하며, 삶을 비난하고 심판하며,
외관을 고발" 하며 그렇게 우리의 삶과 도덕에 적대적이었다가 결국은 "삶이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로부터 등을 돌리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모순이다.
19) 이러한 분석을 통해서 들뢰즈가 폭로하고자 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이해는
단순히 인식론이나 존재론적 차원에서 순수한 문제를 일으키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진리에 대한 문제는 "사변적 입장에서, 도덕적
대립으로, 도덕적 대립에서 금욕적 모순"으로 확장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삶을 부인하는 자의 태도를 니체를 통해서 다시 말한다 "여전히 축소된 삶, 퇴화하
고 축소된 자신의 삶, 자기 유형의 보존, 그리고 그뿐 아니라 자기 유형의 권력과
승리, 반응적(노예적) 힘들의 승리와 그것들의 전염을 원하는" 태도라고 한다.
20) 이 지점에서 다시 들뢰즈가 본 것은 거대한 허무주의이다. 다시 말해 "무의
의지"인 것이다. 이러한 무의 의지는 적극적인 힘과 대립되는 반응적인 힘의 형태
아래에서만 삶을 견뎌내고 "바로 그것은 반응적 힘들을 삶이 모순되고, 부인되고,
소멸되는 수단으로 이용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허무주의, 또는 무의 의지는 "처음
부터 사람들이 삶보다 (우월하다)고 부르는 모든 가치에 생기를 불어넣는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우리의 삶보다 더 우월하고 고귀하고 심오한 어떤 또 다른 세계,
예를 들어, 이데아를 추구할 때, 그것에 대한 의지의 귀착점은 모순적으로 하나의
허무주의인 것이다.
21) 우리는 데리다가 말하는, 진리를 믿지 않는 여성들이 근원적인 의미에서 회의
주의자들일 수 있다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여기서는 진리를 믿는 철학자들은 본질
적인 의미에서 허무주의라는 것을 보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하나의 해결을 볼 수
있다. 데리다의 여성들은, 삶을 사랑하고, 오로지 삶만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그러한 '표면'뿐인 삶을 거부하고, 보다 심오하다고 여겨지는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자들에 대해서, 그들이 말하는 그 '진리'를 의심에 가득찬 시선으로
지켜보고 그들의 이중성과 모순을 한껏 조롱하는 자들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
에서 데리다가 말하는 여성들이야말로 허무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회의주의자들,
다시 말해, 삶에 대한 가장 긍정적인 낙천주의자들인 것이다.
22) 니체가 진리를 거부하고 허무주의를 극복하고자 했을 때, 그의 논적은 언제나
플라톤과 그의 진리였을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플라톤이 말하는 진리 개념에 대해
서 이해했었다. 그것은 하나의 비-은폐성, 그러나 은닉됨의 관계가 제거된, 사실상
탈-은폐성을 의미하는 것, 그래서 하나의 탁월한 봄 앞에 놓여있는 순수한 현전으
로 이해했다. 그럼으로써 '하나의 명증적인 규정성'이자 '인간화된 하나의 사건'으로
서 이해했다. 우리는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과연 니체가 플라톤이 의도
하는 삶에 적대적인, 그래서 초-감각적인 이데아로서의, 허무주의적 진리관에 대해
거부했다고 했을 때, 그는 과연 진리를 존재자성으로부터도, 또한 단순히 인간화된
하나의 사건성으로부터도 벗어나서 사유하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바로 이 문제를
하이데거는 『니체』에서 다루고 있다.
23) 하이데거에 따르면 니체는 감각적인 것에서 근본현실을, 본래적인 실재성을 발
견하고 있다고 한다. 니체는 생리학적 도취에서부터 그래서 감각과 신체에서부터
사유된 예술이 진리를 가장한 허무주의에 대한 반대운동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그
래서 니체는 예술이야말로 '진리'의 반대급부가 되며 우리의 살아있는 삶을 구제할
수 있다고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이 진리가 예술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본 것에 반대해서 예술이 더 가치가 있다고 함으로써 플라톤의 전복을 시도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이제 예술의 '겉만의 (밝은) 세계'가 인식의 '참된 세계' 위에
놓여지고 그 참된 세계는 제거돼버리기에 이른다.
24) 니체에게서 실제적인 삶과 그러한 삶을 누리는 살아있는 것은 사태를 자신의
이익에 따라 파악하려는 힘에의 의지에 의해 필연적으로 '관점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살아있는 것들은 자신과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해 자신을 척도로
해서 어떠한 특정한 시각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는 곧 어떤 것을 자신에게 가까운
것으로 또 다른 어떤 것을 자신으로부터 멀게 이해한다는 것으로 예를 들어," 도마
뱀은 풀밭에서의 아주 작은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듣지만 가장 가까이서 발사된 권
총소리는 듣지 못한다는 것이다."
25) 이렇게 힘에의 의지에 따른 관점적 태도는 진리와 예술에도 적용된다. 그래서
진리의 경우, 그것은 사실상 존재하는 다양한 관점들 중에서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여겨지는 하나의 관점을 고정화시키고 그럼으로써 항구적인 것으로 취한다는 것이
다. 이에 따라 지속적인 삶으로서의 참된 것은 결코 눈앞의 것에, 그 자체 지속적인
것에다 방향을 맞춤에서부터 발원해 나오는 것이 아니라(순전히 사변적인 차원이
아니라), 오히려 힘에의 의지로서의 삶이 자기 자신에게 주는 명령에서부터 발원해
나오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하이데거에 따르면 예술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술도 삶의 광명화의 하나의 특정한 가능성을
고정화시킨다는 것이다.
26) 그러나 예술은 삶을 빛나게 하고 고양시킨다는 점에서, 단순히 항구화로서의
진리보다는 훨씬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둘 다 힘에의 의지의 관점적 취사
선택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는 단순한 겉모양에서의 가상의 고정으로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창조'해야할 진리의 빛남에로의 삶의 고정화와 고양으로서 서로 분리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27) 여기서 우리는 데리다가 본 삶으로서의 여성과 하이데거가 해석하는 바의 니체
의 삶에 대한 이해 사이에 주요한 차이가 있음을 보게 된다. 주지하다시피
데리다에게 삶은 그 자체 어떠한 고정화의 노력에도 포착돼지 않으면서도 그 자체
또한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도 고정된 관점을 가지지 않는 그런 것이다. 반면
하이데거가 해석하는 바의 니체가 말하는 삶은, 비록 삶에 적대적인 어떤 고정화
에도 저항하면서도, 그 자체는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다른 것을 고정화시키려는
의지를 소유한다는 것이다.
28) 한편, 하이데거가 해석하는 바의 니체에게서 삶은, 그 근원적 의미에서의 진리의
본질과 연관해서, 좁게는 예술과 관련해서는, 그 창조와 가치의 정당화의 척도를 오
직 그 자체 속에서 찾고 있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밖에서는 어떠한 기준과 척도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남는 것은 오로지 힘에의 의지의 자기 자신에 대한 정당화
인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힘에의 의지는 자기-입법적, 또는 자기-건립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29) 이렇게 볼 때, 어떤 의미에서 니체는 근대적으로 변형된, 형이상학적인 특징을
그 극단에까지 밀고 간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럼으로써 진리의 근원적 본질로서의
-비-은폐성에 대한 사유는 봉쇄되는 것처럼 보인다.
30)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술을 광명화시키며, 고양시키는 광채(이를테
면, '존재사건'과 유사한)에서부터 해석하고 있을 때(삶에 대한 적극적인 긍정),
그는 미약하나마 비-은폐성으로서의 진리의 한 실마리를 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
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니체가 "인식의 진리, 즉 고정화와 영구화시킴을, 오류와
환상으로 폭로하려 할 때, 그 자신의 방식대로 헤라클레이토스적 진리의 견해에서
부터 무엇인가를 다시 길어내고 있는 샘이다『니체1』504이하" 라고 말하고 있다.
31) 바로 이러한 니체가 가지는 특징으로 말미암아 그는 하이데거에게 '마지막
형이상학자'로서, 그리고 들뢰즈와 데리다에게 '최초의 탈-근대철학자로서'이해되기
에 이르렀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니체는 진리를 여전히 관점적인,
즉 '인간화된 사건'으로서 이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그것을 단순한
하나의 고정된 현전성으로 이해하는 대신, 비록 인간이 개입되고 있긴 하지만,
예술을 통한 근원적인 하나의 '존재사건'으로서, 순수한 '힘의 생성'으로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