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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씨엠 립 여행후기
2012년 2월 5 ~10일까지
<< 참가 해설사. 김미숙 .김정례. 김태호. 백숙천. 성정자. 이용호. 정태순.>>
[매월 4만원씩 1년반을 모아서 경비로 충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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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간의 시차를 두고 캄보디아 씨엠 립 공항에 내렸다. 그 나라시간으로 오후 1시 45분.
더위가 절정인 시간이다. 피부로 느끼는 온도는 40도 정도.
후끈한 열기가 제일먼저 반겨주었다.
극과 극을 경험하는 순간이다. 맹추위를 겪다가 열대의 시간 속으로 들어 온 것이다.
불과 5시간 전만해도 대구 공항에서 오들오들 떨었었으니 말이다.
비행기에서 내려 포장된 길을 걸어서 공항청사로 오는 우리들을 향해 피켓을 든 현지경찰이 앙코르왓은 기다리고 “베트남 이쪽” 하며 우리들과 분류를 하는 것이었다.
한참을 기다려 베트남 관람객이 다시 비행기를 타기 위해 다른 출구로 나가고 나자 남은 사람들은 우리일행들 30여 명 뿐 이었던 것 같다. 세관원인지 경찰인지 모르겠으나 우리들을 향해 “ 여권, 사진”하며 우리가 들고 잇는 여권과 출입국 신고서 비자용 사진 등을 모으고 있었다. 우린 그에게 여권과 요구하는 것을 주고 한쪽에서 기다리는데 자기네들끼리 뭐라 뭐라 하더니 그냥 바깥으로 나가라는 것이다. 우리 일행은 화장실 앞에서 잠시 간단하게 겨울옷을 벗고 간단하게 바꿔 입고 앞에 있는 박스에 세관 신고서를 놓고 밖으로 나와서 우리 7명과 일정을 같이할 팀을 만났다. 결혼 6 개월 된 신혼의 부부와 아이들이 6명이 포함된 가족 팀이다. 모두 29명. 공항 밖으로 나가서 하나투어의 가이드를 만났다.
가이드에게 공항 안에서의 이야기를 하니 이곳은 그렇단다. 나중에 경찰이 여권을 호텔까지 배달해 준다는 것이다. 다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니까 할 말이 없었다.
씨엠 립에서의 시작이다. 버스를 타고 먼저 호텔로 가는 것이다. 방을 정하고 옷을 갈아입고 첫 여행의 스케줄을 시작할 것이다.
호텔은 깨끗했다. 가방을 올려준 호텔 보이에게 고맙다고 1불을 주었다.
방엔 에어컨이 가동되어 시원했다.
갑자기 옆방 백 선생이 나를 급히 불렀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문을 열고 나갔더니 방안에 도마뱀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설마 했었는데........
볼펜 길이만한 도마뱀이 침대 밑에 있었다. 잡으려고 손을 내미니 침대 밑으로 쏙 들어간다.
침대를 요리저리 흔들자 고개를 내밀고 나와 동그란 눈을 요리조리 돌리며 이방인들을 구경하는 것 같았다.
잽싸게 종이를 던져 눌러서 잡아 호텔 창문 밖으로 던져 소란은 끝났다.
여름옷으로 갈아입고 얼굴과 팔에 썬 크림을 바르고 모자와 썬 그라스를 끼고 나갔다.
모두가 한 여름 차림이다. 패션도 그렇고 ... ...
호텔은 4성급이라는데 그 나라 사정을 생각 할 때는 부족함이 없었다.
버스를 타고 10 여분 떨어진 그곳 민속촌을 가서 3팀의 공연을 봤는데 무대의 남자들은 모두 상의를 입지 않았다.
새까만 피부를 드러내놓고... ...
공연이 끝난 시간은 우리시간으로는 7시가 넘은 오후 5시쯤이었다.
배가 고프다. 가까운 식당으로 갔는데 한국인들이 대부분이라 상추, 미나리, 쌈 배추... 그리고 된장까지 배불리 먹고 호텔로 갔다.
에어컨을 켜 놓고 땀에 젖은 옷을 벗고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편하게 쉬는 시간이다. 추위와 더위의 극과 극을 몸이 잘 극복해 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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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함과 낯선 곳에서의 잠은 편안하기 보다는 뒤척이다 만 밤이었던 것 같다.
한방에 누운 동료의 코고는 소리가 들리다 말다 하기도 했지만 두어 번 잠을 깨곤 했다.
너무 더워서 에어컨을 틀지 않을 수 없었다.
아침7시 호텔식으로 아침을 먹었다. 여러 가지가 있었다.
김치도 있고 계란 후라이도 빵도 국수도 ... ... 먹을 수 있을 정도 물론 과일도 몇 가지나 되고. 아침 8시 반 차를 타고 첫 사원을 방문키로 했다.
사원은 조그만 하지만 초기유적으로 아담하고 섬세했다. 롤로오서 유적지다.
붉은 벽돌 같은 것으로 만들었지만 오랜 세월 비바람에 시달린 탓으로 거의 붕괴 직전으로 굵은 철사 줄로 붙들어 매어 놓은 상태였다.
버스에서 내리자 모자, 부채, 머풀러 등을 가득안고 --1달러- 3 달러 -하며 사라고 종용을 한다. 황토먼지 땅에 맨발도 많았다. 키가 작아서 아인지 어른인지..... 꼬맹이도 많았다. 어디로 가나 그런 모습은 흔한 풍경, 그들이 벌어들이는 수입은 도대체 얼마일까?
그곳 일반 노동자의 하루 품삯은 2불에서 5불정도 보통은 2불정도 란다. 1불은 그 나라 돈으로 4000리엘. 우리나라 일반 근로자들의 월급은 최저선인 100만원으로 보면 비교가 될 것 같다.
주유소 휘발류 가격은 고급이 리터당 1250원정도 우리나라는 휘발류가 1950원정도. 두 나라와 비교하면 그곳이 싼 것 같지만 우리나라 국민소득은 2 만불 그 나라 소득은 2천300불. 소득에 비해 엄청 비싼 물가였다.
공부도 시키지 못하는 처지, 아이들의 출산율 대비 40%는 영아사망이라고 한다.
의료시설의 낙후화와 함께 비싼 의료비가 문제였다. 그만큼 병원이 없다는 얘기다.
그곳의 아이들은 평균적으로 작아 보였다. 키도 체격도 작다. 까만 피부에 윗옷하나만 아무렇게나 걸치고 있었는데 짤막하고 왜소한 다리 까만 얼굴에 희멀건 눈동자, 의식 없이 바라보는 듯한 초점 없는 표정. 우리나라 아이들에 비하면 2/3 정도나 될까? 그러나 아이들은 꾸밈없는 순수함이었다.
물론 먹는 것이 부실하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열대 지방이라서 그런지 옷의 색상들로 충충해서 그런지 사람들의 표정까지 어둡게 느껴졌다. 신발은 샌달이 대부분이었다. 그 샌달을 신고 흙투성이 길을 걸어면 풀석 풀석 흙먼지가 따라 올라와 바지를 온통 흙투성이로 만드는 데 그네 아이들은 긴 옷을 입지 않으니 그럴 염려가 없었고 또한 익숙해서 인지 관심도 가지지 않는 것 같았다. 흙으로 범벅된 발인데 간혹은 신발 없이 맨발로 뛰어 다니는 아이들도 있었다. 아이들만 키가 작은 게 아니라 어른들도 그랬다. 성인 여자들은 전부 작았다. 키도 작고 몸도 왜소하고.....150을 넘지 못할 것 같았다.
일자리가 없으니 고용자 측에서는 적은 임금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을 쓸 수 있는 이점도 있었다. 그렇다고 매일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니 어른 한명이 한 달에 버는 수입은 30~40불정도 라고 하는데 이 돈으로 한명의 아이가 학교를 갈 경우 내는 비용이 15불정도가 된다니 학교를 보낼 수가 없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오전에 학교를 갔다 온 아이들이 무엇인가를 팔기위한 생활 전선에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 나라에서 생산되는 것은 3 가지. 물과 휴지 그리고 맥주가 유일하다고 한다. 차 오토바이 자전거 먹거리 등 모두가 수입을 해야 한다니. 열악한 환경이 아니라 천혜의 환경 탓이겠지 사시사철 벼를 심을 수 있는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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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에는 돌로 만든 사원이 약 280여개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산도 없는 그런 환경에서 그렇게 많은 돌들을 날라다가 사원들을 건설했을까?
물론 많은 인원이 강제로 동원되었겠지만..... 예를 들어 캄보디아를 대변하는 세계 7대 불가사의라고 부르는 앙코르 왓은 정말 불가사의스런 사원 이었다
둘레에는 인공 호수 같은 해자를 파서 물을 채웠고 꼭 인공 섬 같은 대지위에 한 변이 450 미터를 넘는 사원을 순 돌로 3층 사원을 건설했다.
그리고 그 긴 사원의 회랑 즉 복도의 4면에는 온갖 조각들로 채워져 있는데 신의 세계를 시작으로 과거 현재 미래 등 꽉 채운 조각들에 압도당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섬세한 조각예술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리아바르만 2세가 만든 천년의 역사를 지닌 세계최대의 석조사원이다.
우리나라의 불국사를 잠시 떠 올려 보았으나 우리말로 [새 발에 피다] 라고 밖에 말 할 수 없다.
동원된 인원은 얼마나 될까? 하루에 5만 명 씩 동원하여 하루에 10톤 이상의 쌀이 들어갔고 공사기간도 무려 37년이나 걸렸다고 하니 상상이나 될까?
그 공사 기간에 일어났을 많은 일들을 생각해 보니 피눈물로 만들어진 사원이라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의 왕이 그토록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었는지.
그렇게 만든 사원이 또한 지천으로 널려 있다. 작거나 크거나.
수많은 사원들이 오랫동안 밀림속에서 숨어 있다 수백년이 지나서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된 후 세계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첫날 앙코르 제국의 최초수도였던 롤로오스에 위치한 롤레이사원을 관람 했다.
2일 째 날 본 반데스레이 사원은 앙코르왓의 건축양식과는 조금 다른 인도 문화에 가깝다. 붉은 색의 사암으로 정교한 장식의 조각품은 예술의 극치라고 찬탄한다. 규모는 작으나 가장 아름답고 정교한 사원이란다. 영화[톰 레이드]의 촬영지인 프놈바켕도 잠시관람하고.
3일 째 날은 많은 유적을 보는 날이다.
앙코르-도시 톰- 크다 =즉 큰 도시라는 뜻을 가졌다. 앙코르톰은 자야바르만 7세가 만든 사원으로 거대한 도시란 어원을 품고 잇다. 크메르제국시대 가장 큰 최고의 도읍지라고 한다. 톡톡이(오토바이 택시)에 2명씩 타고 앙코르톰 남문을 들어가서 크레앙, 비퓨욘, 바이욘 사원을 보고 북문을 나와 자야바르만 7세가 어머님을 위해 만든 밀림속의 사원인 타프롬 사원을 관람 했다.
오후 여행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앙코르 왓을 보기로 했다. 건기이지만 한낮의 온도는 족히 36~7도를 오르내리는 강열한 햇살. 옷은 젖고 살결은 따갑고.......
앙코르 왓은 수리아르반 2세가 만든 사원으로 세계7대 불가사의로 부르는 천년의 역사를 가진 사원이다. 그날은 3층까지 볼 수 없어서 이튿날 다시 관람하기로 했다.
줄지어 선 상가의 나무그늘아래서 그곳 특산물인 야자수의 시원하고 달콤한 맛을 볼 수 있었다.
4일째 날은 쁘레아 칸을 관광하는 날이다. 이 사원은 자야바르만 7세가 아버지에게 헌정한 불교계통의 사원이다. 흰두교 적 양식이 많이 보였다. 쁘레아칸 사원은 수도원이 부속되어 있어서 승려들의 교육기관 역할도 했던 곳이다.
이날은 어제 보지 못한 앙코르 왓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3층으로 올라가서 보기로 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올라가려 하기엔 밑에서 내려오는 사람의 양 만큼 위로 올려 보내는데 경사가 워낙 심해서 조심해야 한다. 모자를 써서도 안되고 짧은 치마나 민소매 옷을 입고는 사원으로 올라가는 경사도가 70도에 이르는 계단을 어찌 올라 갈 수 있겠는가.
어제 1·2층에서도 목욕탕이 있었지만 3층에는 좌우로 2개가 보였다. 엄청 큰 목욕탕에 물을 채우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가로 10미터 세로 10미터 높이 2미터짜리 돌로 쌓은 목욕탕에 바케스로 물을 나른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을까? 물까지 거리는 족히 3~4백미터 정도의 거리인데??????? 3층 난간에서 보니 앙코르 왓의 정경이 잘 보였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아서 한 바퀴 휙 둘러보고 내려 왔는데 대부분의 건축 형태는 완성되었지만 벽이나 기둥에 새겨놓은 조각들에서 일부 미완성의 상태를 볼 수 있었는데...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보십시오?
그날 저녁엔 아마 돼지고기를 먹었던 것 같다.
5일째 사실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이날은 현지인의 가정을 방문하고 거대한 민물호수인 톤레샵을 보았던 날이다. 시간적 여유도 있고 해서 차분히 즐길 수 있었던 하루였고 늦은 밤 비행기를 타고 고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날이기도 했다.
이렇게 많은 유적과 자원이 선재해 있는 흑진주 같은 나라였지만 열악한 주위의 환경으로 인하여 혹은 내전과 오랫동안의 식민지배로 인하여 너무 많은 것들을 읽어 버린 탓으로 피폐하고 찌든 삶속에서 탈출하기란 쉽지 않았다. 스스로 일어나기란 어렵게 보였다 .우리나라의 60년대 모습에서 70년대 초반 새마을 운동이 일어나기 직전 같은 모습들이었다.
그래도 도시는 활발해 보였다. 물론 쏟아져 들어오는 여행객들로 특수를 누리고 있는 듯 하지만 더운 날씨로 인해 한낮의 활동은 문제가 있다고 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푸른 초원, 농경지 한쪽에서는 수확을 하고 한쪽에서는 모를 심고 수확하고 남은 그루터기에 흰 소가 풀을 뜯고 하늘로 향한 열대 과일 나무들 ... ... 야자나무나 바나나 망고 등 이름을 알 수 없는 열대나무들, 그곳에서 유명한 고무나무들이 밀림을 이루고 있었다.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어도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기반시설의 부족도 있지만 부익부 빈익빈의 차이가 너무나 크고 공무원 즉 경찰의 부패가 극에 달해 있다고 했다. 즉 믿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나라에서 생산 되는 것은 3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물이다. 이곳 물 사정이 나빠서 물은 사먹거나 정수기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두 번째는 맥주다. 음로대용일 수도 있다. 한 병의 값은 4불. 소주는 7불 수입품인데 우리나라 것이다. 다음은 휴지다. 그러나 질은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 외는 모두가 수입품이란다.
넓은 땅을 보니 엄청 부러웠다. 이 넓은 땅을 임차하여 기계영농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일 년에 쌀농사를 2모작만 한다 하여도. 아직도 그 곳에서는 손으로 심고 손으로 베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인구는 1600 여 만 명. 인구대비 일자리가 적어니 세차장에 차를 닦는 사람들을 보니 차 한 대에 10 여명이 매달려 있었다. 식당도 마찬가지였다.
식당은 관광객들을 위해서인지 대부분 규모가 컸다. 백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대부분 한국에서 온 손님들을 주로 받는 것 같았다. 메뉴는 주로 한국인들의 입맛에 맞도록 했기 때문에 식사에는 별 거부감이 없었다. 식당마다 채소는 많이 주었기 때문에 여자들에겐 인기가 있는 것 같았다 .돼지고기도 만두전골도 혹은 김치찌개도 먹을 수 있었다. 잘 먹어서 인지 모두가 몸무게가 는 것 같다고 했다.
사원들의 규모가 크기 때문에 식사 때는 부지런히 먹어둬야 걸어 다닐 수가 있다. 워낙 넓어서 많이 걸으며 발품을 팔아야 많이 볼 수 있으니까. 두 번 오기는 어려울 것이고 아마도 다시 오고 싶지 않을 수도 있는 곳이니까 왔을 때 많이 보고 느끼는 것이 좋다. 먼지를 마시고 햇볕에 그을리기는 해도 언제 또 오겠는가. 사진도 찍고 처음 보는 과일도 맛보고 그곳 사람들의 생김새나 행동도 보면서 여행을 즐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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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중 현지인의 가옥을 방문하기로 했다.
길가에 있는 가옥 앞에는 열 평 남짓한 논에 벼가 필듯 말듯했고 집 둘레엔 핸드볼 공 크기만한 야자가 주렁주렁 달려 있어서 이국적 풍경임에는 틀림없었다.
가옥은 2층 누각 즉 우리네 원두막 같은 형태였다 약간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생활 할 수 있는 방이 있는 것이다. 아래쪽 빈터에는 그네처럼 생긴 [함먹]이라든가 확실치 않은 데 그런 것이 메어져 있고 평상이 하나 놓여 있는게 전부였다.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꽤재재한 여자가 조그만 아이 몇을 데리고 있었는데 표정이 별로 없다.
우리를 본 동네 아이들 대 여섯 명이 손목에 끼울만한 수공예 팔찌를 갖고 와서 팔아 달라고 치근된다.
집의 둘레에는 울타리는 없고 바로 풀밭이다. 왼쪽 곁에는 흰 소 한마리가 기다란 줄에 매인체 풀을 듣고 있었고
우측 뒤편으로 화장실이 보여서 들어가 보았는데 꽤 위생적이다.
쪼그리고 앉아서 볼 수 있는 흰색변기인데 볼일을 보고나서 뒷 편 물통에 있는 물로 씻어 내리는 형식이다. 별로 거부감이 없을 것 같았다. 우리네 농촌에 있는 재래식보다 오히려 나아 보였다.
양해를 구한터라 2층 살림방을 보러 대여섯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우리네 거실 같은 공간이 있고 왼쪽 구석으로는 쌀 포대 같은데 서너 개 보였다. 그 곁엔 우리네 방장 같은 모기장 안에 침대 하나가 있었다. 손님이 온다고 치운 상태는 아니라서 솔직히 엉망이라서 멀리서 보았고 오른쪽 탁자 같은 것 위에는 정수기 같은 게 하나 있고 맞은편엔 실내 안테나가 달린 텔레비젼이 하나 있었다.
안쪽 칸으로는 방인데 문은 없고 커텐 같은 가리개 하나가 있고 바닥엔 침대 메트 같은 것이 하나 그 위엔 홑이불 같은 천이 아무렇게나 있고 바닥은 고물상 같은 느낌이라 더 이상 표현할 길이 없다.
지붕 쪽 처마 아래로는 그냥 뚫려 있기 때문에 바깥과 다름없었다. 즉 칸막이만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물론 현지인들의 생활이 이렇지만 시내의 집들은 우리네와 같아 보였다.
시내를 벗어나면 모든 주거 형태가 이와 비슷했다. 열악한 환경이고 또한 그런 환경에 잘 적응하며 살아 왔으니 우리네 시각으로 볼 때의 애처로움 같은 연민은 아닌 듯하다.
마당에 몰려든 아이들은 무엇이든지 팔기위해
"언니 예뻐 하나 사줘"
"제는 두개 팔았는데 나는 하나도 못 팔았어"
등 우리말을 제법 잘 했다. 초등학교 5학년 정도쯤의 여자아이가 하도 매달리기에 우리 돈 천원을 주고 다섯 개를 샀더니
너무 좋아라 하며 "성공 하세요 고맙습니다. 건강 하세요"하며 저쪽 누군가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었다.
오히려 내가 미안했다 돈 천원 땜에 받은 덕담이 너무 커서........
서둘러 차에 오르는데 여자 손님이 하도 매달리며 사 달라니까
' 나 돈 없어' 라고 했더니
"언니 큰 가방 안에 돈 있잖아" 하는 것이다. 우린 웃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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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을 둘러보아도 산하나 보이지 않는 광활한 땅. 일 년 내내 30도를 웃도는 천혜의 날씨. 농사를 짓는 데는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이 없다. 그러나 차창가로 스치는 그들의 삶의 모습은 왜 저렇게 살아가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갔다. 까닭이 있긴 했지만.
낮은 교육열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닌가 싶었다. 또 하나 많은 자원이 게으르게 만들었다는 것. 오랫동안의 식민지 생활의 후유증, 부족한 의료시설 등 어느 것 하나 일반 서민들이 살아가기엔 모든 조건이 열악한 것 같았다.
우리로서는 부러운 문화유적이 세상을 놀라게 할 만큼 많은데 그걸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그것도 유지에 필요한 시스템이나 기술이 모자라니 외국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고. 여행의 마지막 날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민물호수인 톤레샵 호수를 보러 갔다.
물이 차면 경상북도보다 크다는 호수, 배를 빌려 수로를 타고 가면서 주변에 늘어 선 수상가옥을 볼 수 있었는데 그 배 한 척안에서 온가족이 살아가기엔 아무래도 불편함이 많아 보였다. 맘대로 활동 할 수도 없고 전기도 물도 불편하고....... 보기엔 온통 흙탕물 같앗는데 이외로 1급수라니.......배가 지나다닌 곳은 흙탕물이지만 넓은 호수로 나가면 물이 맑아 보였다. 물고기도 많다고 하고. 하지만 배위에 살며 그 물을 퍼 올려 목욕하고 빨래하고 일상 생활을 하고 화장실 볼일도 배의 맨 뒷부분에 설치되어서 그 곳에서 해결하고 있었다.
화장실의 용변은 물고기들의 먹이역할을 한다니 어찌 게름 직 했지만 그들의 생활이라니 이해를 해야 함이 맞을 것 같다. 남자들은 낮에 종일 딩굴고 하다가 밤에는 이웃들과 함께 넓은 곳으로 나가서 물고기를 잡는다고 한다. 잡은 물고기로 시장에 팔아서 삶을 꾸려 가기도 하고 식용으로 쓰기도 한 단다.
수상 가옥에는 대문이나 내부를 볼 수 없도록 한 가리개가 없었다. 이것도 가려 놓으면 무슨 일이 생긴 것으로 간주하거나 도둑이 들 염려가 있다고 한다. 해서 모두들 안이 보이도록 해 노았고 모두들 배위에서 어망을 손질하거나 아이들과 놀고 있었다. 보기엔 평온해 보였지만 땅위에 살기보다는 아주 힘들 것 같았다. 배위에서 나무로 밥을 짓는다거나 전기가 없어서 충전된 밧데리를 사서 쓰곤 한단다. 그런데도 출산율은 높다네? 보고 느낀 것을 글로서는 표현하기조차 어렵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선진국의 보통사람들이 생각하고 느끼기엔 너무나 형편없으니..... 요즘의 이삼십 대가 본다면 어떻게 말 할까? 그들은 이런 시간속의 세월을 살아보지도 못했으니까?
4박 5일간 캄보디아의 제 2도시인 씨엠 립을 둘러보았는데 우리나라의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쯤의 시간대를 살아가는 것 같았다.오십년 육십년이 지난다 해도 그들이 우리와 같은 삶을 누리기엔 힘들 것 같았다. 외국에 가봐야 애국자가 된다는 말과 같이 우리나라의 위상을 알 수 있었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의 대열에서 얼마나 잘 살아가고 있는지 국제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어디를 가나 우리나라 글로 적힌 간판, 그리고 우리나라 말을 할 줄 아는 상인들, 물건 값으로 우리나라 돈을 사용 할 수 있는 일,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일부 사람들이 캄보디아 여행을 하며 치안이 안 좋으니 길거리를 걸을 때 조심하라, 여자혼자 다니는 것은 위험하다, 뒷골목 길은 가지 마라 등부정적인 이야기를 해서 신경이 쓰였는데 여행하는 동안 그런 것은 없었다. 오히려 모두가 착해 보였다.
돌아오는 길 공항에서 선진국에서는 도저히 일어 날 수 없는 아직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웃을 일이 생겨서 한 바탕 웃고 온 일이 생기기는 했지만 결코 후회스런 여행은 아니었던 것 같다.
새삼 우리나라에 태어난 걸 너무너무 감사해야 하고 불평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되었다. 우린 너무 많은 것을 바라고 있지는 않은지. 우린 너무 사치스런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조금만 아끼고 참을 수 있다면 너 나은 미래를 향한 항해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내가 살아가는 이곳이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란 걸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고 이렇게 잘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준 조상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고 싶어졌다.
이번 여행은 우리 해설사들이 1년 반 동안 경비를 모아서 간 여행이라 특별한 의미가 있다 하겠다. 우리나라에서 열심히 해설 활동을 하고 있지만 다른 나라에 대한 여러 가지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견문을 넓혀서 좀더 고급스런 해설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지원도 따라줬으면 더 좋았을 것 같았다. 많은 동료 해설사들이 함께 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여행동안 서로를 배려하고 챙겨주는 동료애가 어느 때 보다 따뜻했던 것 같다.
앞으로 계획은 이집트와 터키를 여행하려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또 여행경비를 알뜰히 모아야 할 것이다. 비행기 안에서의 다섯 시간은 잠을 잔 듯 만듯하게 보냈던 것 같다.
멀리 희미하게 여명이 밟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보이는 우리나라의 도로와 집들 그 모든 것들이 얼마나 잘 정비되어 있던지 천국같이 느껴졌다.
함께한 동료 해설사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함께 하지 못한 동료 해설사들에게는 미안함과 고마움을 전한다
첫댓글 정말 멋지십니다 글 너무 훌륭하게 잘 읽어 봤습니다 꼭 제가 그 여행에 한팀이 되어서 다녀온듯 상세히 ... 늘 배울게 많은 우리의 이쌤과 고령에 계신 우리 동기님들께도 안부 전해 주세요
용호샘. 정말 대단 하십니다. 우륵박물관만 소개 잘 하시는줄 알았는데..........? 우~~~~~와 국제적 명인이 여기 꽁꽁 숨어 있었네요. 축하 ~~~ 합니다, 저도 며칠 전에 베트남, 캄보디아 다녀왔었는데....? 샘의 설명이 더 재미있네요. 아참 그리고 미리 알았으면 동행 했으면 좋았을걸.......담 부터는 사발통문 좀 돌리세요.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