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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 쪽으로는 철문을 걸고 뒤뜰 쪽으로 유리창을 냈다. 조선 집의 참맛은 뒤뜰이라고 생각한다. 삼릉은 신라의 박씨 왕인 아달라왕, 신덕왕, 경명왕의 릉으로 사적 제219호이다. 능의 형식은 규모가 큰원형 토분이고, 표식이나 상석이 하나도 없다(지금있는 상석 하나는 최근에 설치한 것). 가운데 위치한 신덕왕릉은 1950년대 조사해 내부 구조가 밝혀졌는데, 널길을 갖춘 석실이 있고 석실 내부는 회를 칠했다. 밑에서 1.4m 높이까지 2단으로 방향 구획을 만들고 그 안에 황, 백, 주, 청의 채색을 한 흔적이 있다. 경애왕릉부터 삼릉, 포석정까지 이어진 5km의 숲길에 자리한 도래솔들이 장관이니 꼭 들러보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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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없는 망나니가 남편 덕분에 인간 됐어요”
▲ 소나무 동산과 연결돼 있는 서울 평창동 자택 옥상에서 마주앉은 박대성 화백과 정미연씨. 뒤에 보이는 십자가상은 정씨의 작품이다. photo 이경민 영상미디어 기자
1970년대 대구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는 교칙이 엄격하기로 유명했다. 고등학생처럼 하얀 블라우스에 검정색 치마를 교복처럼 입었다. 매일 아침 총장을 비롯해 교수들이 교문에 지켜 서서 복장검사를 했다. 새 학기가 시작하고 며칠 되지 않았을 때였다. 교복을 입은 여대생 틈에 남학생처럼 짧은 스포츠머리를 하고 청바지를 입은 여학생이 건들거리며 교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총장 눈에 뜨인 것은 당연했다. 총장이 그 여학생을 불렀다. 입학식 날 딴짓 하느라 총장 얼굴을 보지 못한 여학생은 자신을 부른 사람이 ‘총장’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저씨, 와 예?”
책 보따리를 빙빙 돌리며 ‘아저씨’ 쪽으로 걸어가는데 뒤에서 “튀라! 총장이다” 하는 소리가 들렸다. 청바지 여학생은 곧바로 몸을 돌려 줄행랑을 쳤다. 회화과 수석으로 입학한 신입생 정미연(55)씨였다. 그날 회화과는 범인색출을 하느라 한바탕 난리가 났다.
선머슴 같았던 정씨의 대학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당시 화제였던 오태석 작가의 연극 ‘춘분’이 대구 공연을 왔다. 연극을 보러 갔던 정씨는 옆자리에 앉은 일행과 차를 마시게 됐다. 집으로 가는 길에 그 일행 중 방향이 같은 사람이 있었다. 한국화가라고 했다. 서양화를 그린답시고 정씨에게 한국화가는 우습게 보였다. 정씨는 자신보다 열 살이나 많은 그 남자에게 당돌하게 물었다. 미술에 대한 고민은 혼자 다 짊어지고 있는 것처럼 건방을 떨던 시절이었다.
“하얀 캔버스가 주는 공포를 느껴보신 적 있나요?”
그 남자가 말했다.
“머리로 그림을 그리려고 하지 마라. 몸으로 뛰면서 경험에서 우러나는 작업을 해야지 머리 굴려서 한 작업은 감흥이 없다.”
강의실에서는 들어보지 못한 말이었다. 자신이 고민하고 있던 문제를 마치 알고 있다는 듯 말을 하는 그 남자를 정씨는 새삼스럽게 다시 쳐다봤다. 그 남자가 바로 남편이 된 한국화가 소산(小山) 박대성(65) 화백이다. 경북 청도 출신인 박 화백은 10년째 경주에 터를 잡고 수묵 속에 신라 천년의 혼을 담고 있다. 때문에 ‘경주의 화가’ ‘불국사의 화가’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소산의 묵향은 한국을 넘어선 지 오래다.
샌프란시스코 아시안 아트 뮤지엄(Asian Art Museum of San Francisco), 휴스턴 뮤지엄(Museum of Fine Arts, Houston), 청와대, 국립현대미술관, 호암미술관, 63빌딩…. 박 화백의 작품이 소장돼 있는 곳이다. 교과서에도 박 화백의 그림이 두점 실려있다.
“박대성의 그림을 보는 것은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관통하는 것이다. 그의 붓 길 속에는 우리의 지나온 삶이 넉넉히 녹아있고 그의 묵향 속에 우리의 다가올 희망이 시나브로 피어난다.” 미술평론가 이주헌씨의 말처럼 박 화백의 그림은 과거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 현대적이다. 박 화백의 그림은 한국화의 고정관념을 깨트린다. 붓이 지나간 자리 위엔 붉은 양귀비꽃이 피고, 갈대가 흔들리고, 새하얀 불국 설경이 펼쳐진다.
가난한 화가와 부잣집 여대생
▲ 샌프란시스코 아시안 아트 뮤지엄에 걸려있는 박대성 화백의 작품 ‘금강전도’.
박 화백은 “내 그림이 과거로 물러나지 않고 현대로 한발 나아갈 수 있게 한 것은 서양화가인 아내 덕분”이라고 말했다. 박 화백의 그림을 있게 한 정씨와의 결혼은 대구를 떠들썩하게 한 ‘일대 사건’이었다. 정씨는 두 사람의 결혼을 “비극과 희극의 만남”이라고 말했다. 비극은 박 화백의 간단치 않은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희극은 부잣집 막내딸로 자란 정씨의 삶을 이르는 것이다.
박 화백은 한국화단의 거물이 됐다. 굳이 비극을 들춰낼 필요 없이 그림만으로 그를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그의 삶과 그림을 따로 놓고 보는 것 또한 어렵다. 수없는 담금질을 통해 그를 단단하게 만든 것이 그의 비극이기 때문이다. 박 화백이 다섯 살 때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박 화백의 아버지는 한의사였다. 청도의 지주였던 박 화백의 집안을 인민군이 가만둘 리 없었다. 7남매 중 막내인 박 화백을 안고 도망치는 아버지를 향해 인민군이 낫을 휘둘렀다.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운명을 달리했고 어린 아들은 왼쪽 팔을 잃었다. 초등학교는 마을에 있었지만 중학교는 다른 마을을 지나야 했다. 학교 가는 길이 괴로웠다. 다른 마을의 아이들이 그를 향해 돌을 던지고 괴롭혔다. 박 화백은 학교를 가는 대신 집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박 화백의 학력은 거기서 멈췄다. 청도의 자연과 화집을 스승으로 삼고, ‘천덕꾸러기가 되진 않겠다’는 굳은 의지를 채찍으로 삼았다. 20대에 국전에 내리 여덟 번 당선됐다. 박 화백이 정씨를 만난 것은 이미 대구 화단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을 때였다.
정씨는 간장 제조업을 하는 떠들썩한 집의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집은 공장 식구들과 가족들이 뒤섞여 늘 북적거렸다. 8남매는 노래 좋아하고 시조 좋아하는 아버지의 끼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8남매가 모이면 즉석 콘서트가 벌어질 만큼 유쾌한 집이었다. 정씨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정씨가 의대나 법대에 가길 바랐지만 정씨의 생각은 달랐다. “미대를 다닌 언니가 가진 고갱이나 고흐 화집을 처음 봤는데 가슴이 벌렁벌렁 한기라. 아버지는 반대할 것이 뻔하고 언니하고 담판을 지었죠. 학원비 대 달라고.” 정씨가 고 1 때의 일이었다. 학교 끝나고 미술학원 들러 집에 오는 이중생활이 계속됐다. 언니와 정씨만 아는 비밀이었다. 처음으로 나간 미술대회에서 최우수상 다음인 우수상을 받았다. 대구 지역신문에 수상자 명단이 나왔다.
“신문에 내 이름이 나온 줄 모르고 집에 갔는데 아버지가 날 부르더니 ‘학교에 정미연이란 학생이 또 있나’하고 묻더라고요. ‘없다’고 했더니 신문을 턱 내밀어요. ‘야는 누고?’ 하시면서.” 아버지는 노발대발했지만 “죽어도 미대를 가겠다”며 단식투쟁까지 하는 정씨에게 결국 두 손을 들었다. 홍익대를 목표로 했지만 대규모 간장공장에 밀려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서울 유학’을 포기했다. 덕분에 정씨는 박 화백을 만났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문제지”
내공 9단의 서른 살 총각과 천방지축 스무 살 여대생, 가난한 화가와 부잣집 막내딸. 비극으로 삶을 시작했던 남자와 희극 속에서 살아온 여자. 서로를 묶어 줄 공통분모가 전혀 없었던 박 화백의 무엇이 정씨를 사로잡았을까.
“솔직했어요. 자신의 아픈 과거, 부끄러운 과거도 숨김없이 털어놓았어요. 그 솔직함이 귀하게 다가왔어요. 폭넓은 대인관계도 마음을 끌었어요. 막노동하는 사람부터 대학 총장까지 형님 아우 하면서 지내는데 하나같이 끈끈하더라고요. 사람이 괜찮으니까 관계가 이어지겠지 싶은 생각도 들고.”
집안의 반대는 당연한 일. 위로 네 명인 오빠들의 극성은 오히려 정씨를 반발하게 만들었다. “자꾸 외적인 조건으로 사람을 판단하니까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요. 내가 좀 정의심이 있거든요.(하하) 처음 봤을 때부터 팔 하나 없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전혀 불편해보이지 않았고,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럼 됐지 뭐가 문제겠어요. 몸이 불편한 것보다 마음이 잘못된 것이 더 문제 아닌가. 어렸지만 사람 보는 눈이 좀 남달랐던 거는 같아요.” 오빠에게 조목조목 따지고 들었다가 죽도록 얻어맞았다. 영화 몇 편을 찍고도 남을 만큼 사연 많은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여행을 떠나는 차 안에서 쌍코피가 주르륵 흐르더란다.
단 한 사람, 정씨의 어머니는 달랐다. 박 화백의 이야기를 듣고는 정씨에게 말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열두치마폭으로 그 사람을 감싸줄 자신이 있나. 엄마 같은 품으로 보듬어 안아줄 수 있는지 깊이 생각해봐라.”
결혼하면서부터 함께 살았던 어머니는 박 화백을 위한 기도를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어머니는 가톨릭 신자였다. “우리 박 서방 세계적인 화가가 되게 해주세요.” 어머니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묵주를 들고 ‘우리 박 서방’ 뒤에서 기도를 바쳤다. 어머니의 기도가 통했던 것일까. 결혼하고 얼마 후 중앙미술대전에서 ‘상림’이란 작품으로 대상을 받았다. 이때부터 박 화백은 뜨기 시작했다. 정씨의 말대로 ‘살림이 쫙 폈다’. “삼성 쪽에서 전속하자는 프러포즈가 오고 63빌딩 벽화 작업도 하고, 성공이 눈에 보이데요.”
창고 같은 집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18평짜리 단독주택으로, 1년 만에 40평짜리 집으로, 또 얼마 후 경기도 팔당댐 쪽에 전원주택을 짓고 이사했다. 결혼한 지 불과 3년 만이었다. 박 화백은 연년생으로 낳은 두 딸에게 “자연을 선물해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자연이 나를 만들어줬다. 땅을 알게 해줬고 전통과 동양정신을 배웠다. 내가 받은 것을 내 아이들에게도 주고 싶었다.”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자란 ‘도시여자’에게 시골은 두려움이었다. “가게는 걸어서 20~30분 거리에 하나 있죠, 주변엔 콩밭밖에 안보이죠, ‘이젠 죽었다’ 생각했어요. 평생 써도 남을 생리대며 온갖 생활용품을 산더미처럼 사가지고 들어갔어요.”
“사람들이 우리를 키웠다”
자동차는커녕 전화·TV도 없는 시골생활은 정씨를 조금씩 변화시켜갔다. “씨앗을 심으면 뭐가 쏙쏙 나는 것이 억수로 신기하데요. 열매라고 생긴 것은 전부 술을 담갔어요. 내 키만한 술독 13개를 집 앞마당에 묻었어요. 땅에서 숙성된 술맛은 기가 막혔어요. 주말이면 그 맛을 잊지 못해 찾아오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어요. 어느날은 다리가 하도 아파 몇 팀이나 오는지 세어 봤더니 하루에 13팀이 왔다갔더라고요.”
찾아오는 사람들도 절친한 작가 이문열을 비롯해 연예인·화가·문인 등 다양했다. 얼음이 살짝 얹힌 김치 한 보시기만 있어도 술 한 동이가 금방이었다. 예술·정치·문학 등 세상 모든 일이 안주가 됐다. 재담이라면 박 화백도 뒤지지 않았다. “하룻밤에도 집 한 채가 지어졌다 부서졌다, 밤 새는 줄 모르고 나누는 대화를 듣다보니 세월 가는 줄도 몰랐어요. 그런 대화를 책에서 얻을 수 있겠어요? 우리 영감도 나도 복이 많아요. 이만큼 큰 것도 다 사람들의 힘인 것 같아요.”
주말이 지나면 박 화백은 스케치 여행을 떠났다. 돌아올 땐 전국의 산천이 그의 보따리에 담겨 왔다. “집을 나설 때면 안됐다 싶어요. 추운 데 앉아서 종일 외롭게 산하고 투쟁하고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림 그리는 것이 보기만 근사하지 힘들어요. 여관방에 앉아 그림 펼쳐놓고 볼 때, 출산하듯 전시 한번씩 하고 좋은 평가 받을 때 위안을 받는 거죠.”
집을 자주 비우는 탓에 박 화백은 정씨를 위해 도자기 굽는 가마를 만들어주었다. 정씨는 그때부터 흙을 주무르기 시작해 1998년엔 가나아트스페이스에서 테라코타전을 열었다. 박 화백은 인체 크로키를 좋아하는 정씨를 위해 모델을 대주는 등 아낌없는 지원을 했지만 주부, 아내, 엄마 역할에다 성공한 화가의 뒷바라지까지 하다 보면 ‘화가’로서의 시간은 많지 않았다.
다시 머리를 깎다
스포츠머리였던 정씨의 머리는 결혼 후 한동안 길어졌다가 다시 짧아졌다. 박 화백이 유명해지는 만큼 ‘나는 뭔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한국 화가 박대성의 부인이 아닌 ‘작가 정미연’으로 인정받고 싶었다. 가슴속에 누르고 있던 ‘그림에 대한 열정’이 불끈불끈 올라왔다. 정씨는 그것을 ‘가슴속의 불’이라고 표현했다. “이젠 나로 살고 싶다”는 선언과 함께 어느 날 머리카락을 확 잘랐다. 미장원 가는 시간도 아까워 집에서 직접 가위를 들고 눈을 질끈 감은 후 자르기 시작한 것이 이젠 미용사가 다 됐다.
마음의 평화가 깨진 탓이었을까. 인생이 역공을 해왔다. 집안에도 안 좋은 일이 생기고 건강에도 적신호가 울렸다. 전환점을 찾기 위해 나선 미국 여행길, 박 화백의 작품이 걸려있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아시안 아트 뮤지엄을 찾았다. 한국관에 들어가서 한쪽 벽에 위풍당당하게 걸려있는 박 화백의 ‘금강전도’를 보는 순간 눈물이 ‘텅’하고 떨어졌다. “지금까지 고생한 것이 전부 보상받는 기분이었어요. 세계가 지켜보는 자리에 한국 대표작가로 걸려 있는데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어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생각이 들데요.” 정씨는 그때가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내 안의 보물을 찾다
정씨와 인터뷰를 하는 도중 경주에 있는 박 화백이 두 번이나 전화를 했다. 박 화백은 기자를 바꿔달라고 하더니 “그 사람 재능이 특별하다. 내 그늘에 가려 빛을 못 보고 있다”면서 안타까워했다. 그 말을 전하자 정씨가 “선생님의 마음은 알지만 이젠 세상의 스포트라이트가 아니라 내 마음속의 보물이 더 귀하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무슨 이야기일까.
정씨는 두 달 전 한 달 일정으로 그리스·터키 여행을 다녀왔다. 사도 바울의 순례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여행이었다. 부부는 둘 다 가톨릭 신자다. 정씨는 세상과 단절된 수도원에서 ‘행복의 비밀’을 엿보고 왔다. 수도자들은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한 기도를 하면서 너무 행복해보였다. 그동안 애달파하고 욕심냈던 것들이 부끄러웠다. “내가 선택한 사람이 꽃을 피우는 것을 바라보는 즐거움이 얼마나 큰 것인 줄 깨달았어요. 세상에 안 드러나도 한 존재의 기운을 알 수 있다는 것은 나만의 보물이다. 내 안에 보물이 있으니 부러운 것이 없어졌어요.”
정씨에게 큰 깨달음을 준 이번 여행은 평화신문에 격주로 글과 그림이 실린다. 그 동안 정씨는 누드 크로키와 테라코타 작업을 하면서 10여년 동안 성화와 성물 작업을 수없이 했다. 정씨의 성화가 실린 묵주 기도 책은 100만부가 넘게 팔렸다. 서울 혜화동 서울대학병원 호스피스 병동 입구 양쪽 벽엔 정씨가 작업한 백조가 날고 있다. 지난해엔 책에 실린 성화를 가지고 전시회도 열었다. 정씨의 성화는 한국적이다. 박 화백의 그림에서 현대의 꽃을 피운 것이 정씨의 영향인 것처럼 정씨 작품의 한 뿌리는 한국화로 연결되는지도 모르겠다. 부부는 작품 이야기를 할 때는 밤을 새울 정도로 치열하다고 한다. “서로의 작품에 대해선 신랄해요. 내가 아니면 못할 이야기를 해줘야 도움이 되지. 서로 분야가 다르니까 오히려 할 수 있는 이야기도 많아요.”
박 화백은 조계종이 성철스님 탄신 100주기를 맞아 추진하고 있는 대형 프로젝트를 맡았다. 성철스님의 일대기를 그림으로 풀어내는 작업이다. 정씨는 1년간 예수 일생을 그림에 담아내고 박 화백은 성철스님을 그리고, 부부가 한국 종교계를 접수한 셈이다. 경주에서는 박 화백 미술관을 건립하기 위한 논의가 한창이다. 박 화백의 중국 전시도 추진 중이다.
아버지가 선물해준 땅을 디디며 어린 시절을 보낸 두 딸도 미술의 길을 걷고 있다. 서양화를 전공한 큰딸 정련은 미술경영을, 둘째 아련은 디자인을 전공했다. 도자기로 디자인 작품을 만들고 있는 둘째는 내년 1월 전시를 앞두고 있다.
정씨는 “얻을 것은 다 얻은 것 같아. 아무것도 모르던 망나니가 선생님을 만나 인간이 됐다”고 말했다. 정씨는 이제 자신에 대한 세상의 평가에 조급해하지 않는다. 겉으로 드러난 화려함을 좇기보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울과 경주에 떨어져 있을 땐 박화백에게 전화로 ‘닭살 멘트’도 날릴 줄 알게 됐다. “난 자기 보고 싶은데 자긴 안 그란가배.”
조선뉴스프레스 - 주간조선 : 황은순 차장대우